빨간 머리 앤 7권 9~10

나단비 | 2024.04.14 13:43:44 댓글: 0 조회: 6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960
9
우나가 나서다






미스 코넬리아는 메러디스 씨와 면담을 했고, 언제나 정신을 놓고 사는 이 신사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메리 밴스라는 떠돌이 아이가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떤 아이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자기 아이들과 놀게 한 일은 아버지로서 의무를 방관한 일이라고 목사님을 존경하는 태도와는 전혀 멀게 따끔히 지적해주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그래서 무슨 해로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에요. 메리라는 아이가 질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요. 내가 목사님네 아이들과 블라이드 아이들에게 물어서 알아낸 바로는 그 아이가 저속한 말을 좀 쓰고, 언어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렇게 나쁜 점은 없더라고요. 하지만 혹여 그 아이가 나쁜 아이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보셨어야죠. 짐 플래그네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그 집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가르쳐 이만저만 피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목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메러디스 목사도 그런 사실을 알았고, 자기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지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엘리엇 부인? 그 불쌍한 아이를 그저 쫓아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돌봐줄 곳이 필요해요.”
목사가 속수무책으로 물었다.
“물론이죠. 당장 호프타운 고아원으로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써야 할 거예요. 답장이 올 때까지 며칠은 메리를 여기에 두어도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방심하지 말고 지켜보세요, 메러디스 목사님.”
미스 코넬리아가 목사님에게 훈계하는 장면을 수잔이 보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숨이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미스 코넬리아는 자기 임무를 마치고 흡족한 마음으로 목사관을 떠났다.
그날 밤 메러디스 씨는 메리를 서재로 불렀다. 메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목사 뒤를 따라 서재로 갔지만 지금까지 상처만 받고 살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따뜻한 위로를 받고 나왔다. 무서워서 덜덜 떨며 목사 앞에 섰으나 알고 보니 목사님은 친절하고 인자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메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까지 겪어온 고생담을 남김없이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메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격려해주었다. 서재에서 나온 메리의 얼굴이며 눈이 너무 부드럽게 변해 우나도 얼른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네 아빠도 정신이 깨셨을 때는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분이야. 좀 더 자주 깨어나지 않는 게 안타까워. 와일리 부인이 죽은 일은 조금도 내 탓이 아니라고 하시더라. 나더러 그저 부인의 좋은 점만을 기억하고 나쁜 점은 떠올리지도 말라고 하셨어. 좋은 점이라고는 집을 깨끗하게 하고 버터를 잘 만든다는 것밖엔 아무것도 생각나지않지만. 난 정말이지 그 낡은 부엌 바닥을 닦느라고 팔이 다 닳아 없어질 뻔했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네 아빠가 해준 말을 기억하면서 살 거야.”
메리는 겨우 눈물을 그치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다음 날부터 메리는 기운이 좀 없어 보였다. 고아원으로 돌아갈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싫어진다고 우나에게 털어놓았다. 우나는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을까 작은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아무런 묘안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낸 블라이드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해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다.
“엘리엇 아주머니가 메리를 데려가면 되지 않을까? 그 아주머니는 커다란 집도 있고 엘리엇 아저씨는 언제나 도와줄 사람을 두라고 하신다니까. 메리가 엘리엇 아주머니 집에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메리가 얌전하게 행동하기만 한다면.”
“낸, 너 정말 엘리엇 아주머니가 메리를 맡아줄 거라고 생각하니?”
“그냥 물어보기만 하는 거야 뭐 나쁠 거 있겠니?”
낸이 말했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물어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우나는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리고 우나는 모든 일에 나서대고 부산스러운 엘리엇 부인이 좀 부담스러웠다. 물론 그 아주머니를 좋아하고 그 집에 놀러 가는 건 즐거웠지만 메리 밴스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는 뻔뻔스러운 일이 아닐까 걱정이었다. 겁 많은 우나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드디어 호프타운 고아원에서 메러디스 씨에게 지체하지 말고 메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오자 메리는 목사관 다락방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우나는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 우나는 목사관을 빠져나와 항구 길을 따라 내려갔다. 저 아래로는 ‘무지개 골짜기’가 보였고 즐거운 웃음소리도 들려왔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우나는 너무나 창백하게 질린 채로 너무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도중에 누구를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스탠리 플래그 할머니는 그런 우나를 보고 혀를 차며 저 아이도 자라면 제 아버지 못지않게 얼빠진 사람이 될 거라고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의 집은 글렌과 포 윈즈 곶 중간 정도에 있었다. 집이 원래는 선명한 녹색이었으나 지금은 차분해 보이고 그다지 보기 싫지 않은 녹색 빛이 나는 회색으로 바래 있었다. 마셜 엘리엇이 집 주변에 나무를 심고 전나무 울타리를 만들었으며 장미꽃 정원도 가꾸었다. 덕분에 전에는 보잘것없던 집이 몰라볼 만큼 보기 좋게 달라졌다. 목사관 아이들과 ‘잉글사이드’ 아이들도 이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정다운 항구 길은 아름다웠고, 언제나 도넛이 가득 든 항아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안개 낀 바다가 저 아래 모래사장을 부드럽게 씻어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배 세 척이 거대한 흰 바닷새처럼 항구를 미끄러져 갔다. 범선 한 척이 항구 쪽으로 들어왔다. 포 윈즈 세상은 찬란한 색채와 잔잔한 음악소리,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여기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 코넬리아 집 문 앞까지 온 우나는 아무래도 발길이 더 이상은 앞으로 나가지지 않았다.
미스 코넬리아는 베란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우나는 엘리엇 아저씨도 함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몸집도 아주 크고 마음도 넓고 재미있는 엘리엇 아저씨가 있으면 힘이 좀 날 것 같았다. 우나는 미스 코넬리아가 내놓아준 의자에 앉아 미스 코넬리아가 준 도넛을 먹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도넛은 목에 걸린 채로 넘어가지 않았다. 우나는 미스 코넬리아가 도넛이 맛이 없어서 그런 줄 알까 봐 도넛을 억지로 삼켰다. 우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커다란 푸른 눈은 너무나도 가여워 보여서 미스 코넬리아는 이 아이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간파했다.
“무슨 걱정이 있는 거니, 아가?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인 게로구나.”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우나는 필사적으로 마지막 도넛 조각을 삼켰다.
“엘리엇 아주머니, 메리 밴스를 맡아주실 수는 없나요?”
우나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메리 밴스를 맡으라고! 너 지금 나더러 그 애를 데려다 키우라는 거니?”
“네, 메리를 맡아주세요. 아주머니 댁에서 살게 해주세요. 오, 제발, 엘리엇 아주머니, 제발 그래주세요. 메리는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대요. 밤마다 울어요. 고아원으로 가면 또 다른 곳으로 보내질까 봐 걱정해요. 메리는 정말 똑똑한 아이예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 아주머니가 메리를 맡으면 절대로 후회할 일이 없을 거예요.”
우나가 말했다.
“난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걸.”
미스 코넬리아가 속수무책으로 말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시지 않겠어요?”
우나가 사정했다.
“하지만 얘야, 나한테는 도움이 필요 없단다. 이 집안일은 나 혼자서 거뜬히 해낼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집에 도와줄 아이를 둘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우나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우나는 절망에 빠진 모습으로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거라. 나도 그 애를 맡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너무나도 뜻밖의 이야기여서 놀란 거야. 우리 잘 생각해보기로 하자.”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못하는 성미인 미스 코넬리아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메리는 정말 똑똑해요.”
우나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욕설을 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냐?”
“전 메리가 욕하는 건 들어본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좋지 않은 말은 좀 아는 모양이지만…….”
우나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모양이더구나.”
“네 말을 믿겠다. 그리고 그 애가 거짓말하지는 않겠지?”

“그럼요. 매질을 당할까 봐 무서워서 그런 때만 빼면요.”
“그런데도 넌 나더러 그 애를 맡으라는 거냐?”
“누군가 메리를 맡아야 해요. 누군가 돌봐주어야 한다고요, 엘리엇 아주머니.”
우나가 흐느꼈다.
“그 말이 맞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 의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그 문제는 엘리엇 아저씨와 의논해봐야 하니까 지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도넛이나 하나 더 먹으렴.”
우나는 도넛을 하나 더 받았다. 도넛은 아까보다 훨씬 맛있었다.
“저는 도넛을 아주 좋아하는데, 마사 이모할머니는 만들어주지 않아요. ‘잉글사이드’의 수잔 아줌마가 가끔 만들어주긴 하지만요.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 때 가끔씩 한 접시 가득 도넛을 가져다주어요. 제가 도넛이 너무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엘리엇 아주머니?”
우나가 말했다.
“아니, 어떻게 하는데?”
“엄마가 옛날에 보던 요리책을 꺼내서 도넛 요리법이랑 다른 요리법을 읽어요. 요리법은 너무 듣기 좋아요. 전 배가 고플 때마다 그렇게 해요. 점심으로 디토를 먹은 날에는 특히요. 그런 날에는 닭튀김 요리법이랑 구운 거위 요리법을 읽어요. 우리 엄마는 그런 맛있는 것을 모두 만들 수 있어요.”

“왜 메러디스 씨는 결혼하지 않는 걸까요? 아이들을 모두 굶겨 죽일 작정이래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요. 그리고 내가 그 메리를 맡아야 할까요, 마셜?”
우나가 돌아가고 난 다음 미스 코넬리아는 분개해서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당신이 그 애를 맡지.”
마셜은 간단히 말했다.
“꼭 사내다운 말이군요. 아이를 맡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예요? 생각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요. 아, 정말이에요.”
아내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 애를 맡으라고. 다른 문제는 그 후에 생각하면 돼, 코넬리아.”
남편이 말했다.
결국 미스 코넬리아는 메리를 맡기로 했고, 그 사실을 맨 먼저 ‘잉글사이드’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길을 나섰다.
“정말 잘됐어요! 나도 미스 코넬리아가 그래 주길 바랐답니다. 그 가여운 아이에게 좋은 집이 생겼으면 했거든요. 나도 바로 그 아이처럼 집 없는 고아였잖아요.”
앤이 기쁘게 말했다.
“저 메리란 아이도 앤처럼 변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 그 애는 종류가 달라요. 하지만 그 아이도 영혼을 구제해주어야 할 한 인간인 것은 분명하니 어린이 교리 문답서와 아이용 칫솔이니 빗을 준비해야겠네요. 이미 쟁기를 잡았으니 내 의무를 다해야지요.”14)

미스 코넬리아가 암울하게 말했다.
메리는 그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운이 좋구나.”
메리가 말했다.
“엘리엇 아주머니 집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해.”
낸이 말했다.
“그 정도야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잘 행동할 수 있다고, 낸 블라이드.”
메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쁜 말은 쓰면 안 돼.”
우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랬다간 그 아주머니가 기절을 하시겠지.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우나. 이제부터는 얌전한 척 시치미 뚝 떼고 지낼 테니까. 아주 고상한 말만 쓰면서 말이야.”
메리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흰 눈을 빛냈다.
“거짓말도 하지 말고.”
페이스가 덧붙였다.
“채찍질을 피하려고 거짓말하는 것도 안 돼?”
메리가 사정했다.
“엘리엇 아주머니는 널 매질하지 않아.”

다이가 소리쳤다.
“정말 그럴까? 내가 매질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만 찾는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럼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고. 거짓말하는 건 나도 싫거든. 거짓말해야 할 이유만 없다면 나도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야.”
메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메리가 목사관을 떠나는 날 아이들은 ‘무지개 골짜기’에서 작별 파티를 열었다. 그날 저녁때 아이들은 모두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소중한 물건을 작별 선물로 주었다. 칼은 소중하게 간직했던 노아의 방주처럼 생긴 조가비를 주었고, 제리는 자기의 두 번째로 좋은 구금을 주었다. 페이스는 뒤에 거울이 붙어 있는 작은 머리빗을 선물했다. 메리가 전부터 멋있다고 생각했다. 우나는 구슬지갑을 줄까 아니면 사자굴 속에 있는 예쁜 다니엘 그림으로 할까 망설인 끝에 메리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메리는 사실 구슬지갑을 갖고 싶었지만 우나가 그걸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다니엘 그림을 줘. 난 사자가 좋아서 그 그림을 더 갖고 싶어. 저 사자들이 다니엘을 삼켜버리는 그림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럼 정말 신날 텐데.”
밤이 되자 메리는 우나에게 자기와 같이 자달라고 했다.
“마지막 밤이니까. 게다가 오늘 밤은 비가 내리잖아. 저 묘지 때문에 비가 오는 밤에는 여기서 혼자 자기 싫어. 비가 내리지 않는 밤이면 괜찮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저 하얀 비석들로 비만 무섭게 퍼붓잖아. 그리고 저 창문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는 꼭 죽은 사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들어올 수 없어서 우는 소리처럼 들려.”

“나는 비 오는 밤을 좋아하는데. 블라이드 여자아이들도 그래.”
작은 다락방에서 같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우나가 말했다.
“저 묘지만 없다면 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오늘 밤에는 여기 나 혼자 있으면 쓸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너희들과 정말 헤어지기 싫어.”
메리가 말했다.
“엘리엇 아주머니가 널 자주 ‘무지개 골짜기’로 보내서 놀게 해줄 거야. 그리고 너도 착하게 굴 거지, 그렇지, 메리?”
우나가 물었다.
“그래, 노력할게. 하지만 나는 너처럼 착해지기가 쉽지 않아. 내 안이 말이야. 물론 바깥도 그렇기는 하지만. 너한테는 그렇게 지독한 피가 흐르는 친척도 없으니까 몰라.”
메리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네 친척들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좋은 점도 있을 거야. 나쁜 점은 눈감아주고 좋은 점만 보고 살아야 해.”
우나가 말했다.
“우리 친척은 모두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난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고. 우리 할아버지는 부자였지만 아주 악당이었대. 나는 내 스스로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야 해.”

메리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하느님이 널 도와주실 거야. 네가 기도하면 말이야, 메리.”
“난 그런 것은 몰라.”
“아니야, 메리. 우리가 하느님께 네가 살 집을 찾아달라고 기도했더니 들어주셨잖아.”
“하느님이 해준 일이 아니야. 네가 엘리엇 아주머니 머릿속에 그 생각을 넣어준 거지.”
메리가 되받아쳤다.
“하지만 엘리엇 아주머니가 너를 마음에 들도록 해주신 건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그렇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아주머니 마음에 그 생각을 넣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거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있잖아, 우나. 내가 특별히 하느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나도 하느님에게 기회는 주어보겠어. 하지만 내 생각엔 하느님이 꼭 네 아빠 같아. 보통 때는 멍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정신이 들어오면 엄청 친절하고 분별력 있는 일을 해주잖아.”
메리도 인정했다.
“아이, 메리. 아니야! 하느님은 하나도 우리 아빠 같지 않아. 하느님이 우리 아빠보다 천 배나 더 친절하시다고.”
우나가 놀라 외쳤다.
“하느님이 네 아빠처럼 좋은 분이면 좋을 텐데. 네 아빠가 해준 말을 듣고 난 두 번 다시 나쁜 짓 할 생각이 없어졌어.”
메리가 말했다.
“네가 우리 아빠와 하느님 이야기를 나누어본다면 좋을 텐데. 우리 아빠가 나보다 설명을 훨씬 더 잘해주실 테니까 말이야.”
우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중에 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이야기해보지, 뭐.”
메리가 약속했다.
“그날 밤 나와 서재에서 이야기할 때도 내가 기도해서 와일리 부인이 죽은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설명해주셨어. 그 후로 내 마음은 편해졌지만 기도하는 것은 아주 조심하고 있지. 옛날에 배운 주기도문이나 외우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 같아. 그런데 우나야, 기도를 하느님에게 하는 것보다는 악마한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느님은 좋은 분이니까 우리에게 무슨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악마는 달래줘야 하잖아. 내 생각엔 아무래도 악마에게 기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오, 착한 악마여! 부디 날 부추기지 말고 그냥 좀 가만히 내버려둬 주세요!’ 하고, 그렇지 않니?”
“아니야, 메리. 악마에게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야. 악마는 나쁜 것인데 좋은 일을 해줄 리가 없잖아. 그건 악마에게 더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거야.”
“너와 난 이 문제에 의견이 다르니까, 더 이야기해보아야 소용이 없어. 어쨌거나 하느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메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었을 텐데.”
우나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좋겠다. 내가 가면 너희 어린것들이 어찌 될지 모르겠어. 어찌 되었거나 집을 좀 깨끗하게 정리하고 살도록 애써 봐. 사람들이 그 문제로 말들이 많잖아. 그리고 너희 아빠가 다시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알아둬. 그렇게 되면 계모가 너희들을 밀쳐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 테지.”
메리가 말했다.
우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빠가 결혼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생각만 해도 싫고 몸이 오싹하여 우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메리는 말을 계속했다.
“계모란 아주 무서운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계모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면 너는 피가 얼어붙어 버릴 거야. 와일리 부인 집 건너편에 사는 윌슨네 집에 계모가 들어왔는데, 그 계모는 와일리 부인이 날 때리듯이 아이들을 때렸어. 계모란 정말 끔찍한 거야.”
“우리 집엔 계모가 오지 않을 거야. 아빠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우나가 몸을 떨며 말했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말걸. 이 마을 노처녀들이 모두 네 아빠 뒤를 쫓아다닐 거니까. 그걸 당할 사람은 없어. 계모가 생기면 가장 나쁜 일이 뭔 줄 알아? 계모가 아빠와 너희들 사이를 이간질할 거라는 거야. 그럼 아빠는 언제나 계모나 계모 아이들 편만 들게 돼. 계모가 너희가 모두 나쁜 아이인 것처럼 만들어버릴 테니까.”
메리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메리, 그런 말은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어. 정말 기분이 안 좋아.”
우나가 울며 말했다.
“난 단지 너에게 미리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어. 네 아빠는 좀 정신이 없으니까 다시 결혼하는 문제는 생각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언제나 준비를 해두는 편이 낫다고.”
메리가 좀 후회하는 빛으로 말했다.
메리는 곧 잠들어버려 조용해졌지만 우나는 한참 후까지도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 깨어 있었다. 아버지가 결혼해서 계모의 이간질로 자기나 제리, 페이스, 칼을 미워하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참을 수 없었다.
메리는 미스 코넬리아가 우려했던 종류의 독소는 아니었지만 목사관 아이들의 마음에 조금은 해악을 남겼다. 메리 쪽에서는 좋은 의도였더라도. 어쨌거나 메리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잤지만 우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날 밤 내내 비가 내리고 낡은 잿빛 목사관 주변으로 바람이 울부짖었다.
존 메러디스 목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를 읽느라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까맣게 잊어버렸다. 책을 다 읽었을 때는 희끄무레한 새벽이었고, 여전히 2천 년 전의 문제로 고민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딸들 방문은 열려 있었다. 페이스는 장밋빛 어여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우나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블라이드 여자아이들에게 가서 밤을 보내고 오는 모양이라고만 여겼다. 우나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을 무슨 큰 상처럼 여겼다. 존 메러디스는 우나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자기가 알고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세실리아가 있었다면 아이들을 더 잘 보살펴주었을 것이다.
세실리아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메이워터의 목사관에는 세실리아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었다. 그 예쁘고 명랑했던 아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웃음소리도, 노랫소리도 사라지고 침묵만 남았다. 목사는 아직도 너무나 갑작스러워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때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건강했던 세실리아가 죽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존 메러디스는 다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내를 너무나 깊이 사랑해서 다시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목사는 그저 막연히 시간이 좀 지나면 페이스가 엄마 역할을 해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혼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자기 방으로 갔다. 침대는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침대 정리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메리는 감히 그 일을 할 생각도 못 했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목사의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메러디스 씨의 눈에는 침대 꼴이 어떤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14. 누가복음 9장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에서 나온 말.




10
목사관 여자아이들이 청소에 나서다






페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몸서리를 쳤다.
“아이구, 비가 오잖아. 난 일요일 아침에 비가 오면 싫어. 일요일엔 날씨가 좋아도 따분하단 말이야.”
“일요일을 따분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아직 잠이 덜 깬 우나는 늦잠을 잤다는 죄책감과 졸음을 떨쳐내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메리 밴스는 일요일이 너무 지루해서 자기 목을 매달아버리고 싶댔어.”
페이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우리는 메리 밴스보다는 일요일을 좋아해야 한다고. 우리는 목사님 아이들이니까.”
우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대장간 집 아이들이었으면 좋겠어.”
페이스가 양말을 찾으며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럼 사람들이 우리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거 아니야.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났네. 메리가 가기 전에 양말을 모두 꿰매주었는데 또 구멍이 났어. 우나야, 일어나. 나 혼자서는 아침을 못 차려. 어이구, 아빠랑 제리 오빠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너도 우리가 아빠를 그리워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아빠는 집에 있으나 없으나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집에 안 계시니까 집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 난 가서 마사 이모할머니 병이 좀 어떤지 보고 올게.”
“할머니는 좀 나았어?”
페이스가 돌아오자 우나가 물었다.
“아니, 나아지지 않았어. 아직도 신음하고 계셔. 블라이드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할까 봐! 그런데 이모할머니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하셔. 의사란 건 평생 한 번도 필요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볼 일은 없다고. 의사는 사람들에게 독약이나 먹여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물론 아니야. 블라이드 선생님이 독약을 넣을 리 없어!”
우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침 먹고 나서 또 마사 이모할머니의 등을 마사지해드려야겠어. 이번에는 어제처럼 물수건을 너무 뜨겁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페이스는 어제 일이 생각나서 깔깔거렸다. 페이스와 우나는 어제 하마터면 마사 이모할머니 등가죽을 홀랑 벗겨버릴 뻔했다.
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 밴스라면 등이 아플 때 물수건을 얼마만큼 뜨겁게 하면 좋은지 알 것이다. 메리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우나 형제들은 아는 것이 없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이 쓰라린 경험을 살려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가엾게도 마사 이모할머니가 치른 대가로?
지난주 월요일에 메러디스 씨는 제리를 데리고 노바스코샤로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수요일에 마사 이모할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 버렸다. 간간이 찾아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으로 할머니는 이 병을 ‘궁상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병은 꼭 아주 곤란한 때면 찾아왔다. 그래서 할머니는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래도 의사는 절대로 싫다고 했다. 페이스와 우나는 식사 준비를 하고 할머니 병간호를 했다. 하지만 둘의 음식 솜씨도 마사 할머니 음식 솜씨와 별다르지 않았다. 마을 부인들에게 알리면 기꺼이 와서 도와줄 테지만 할머니는 자기의 ‘궁상병’을 누구에게 알리기 싫다고 했다.
“내가 일어나서 돌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만 나를 도와주어야 해. 존이 여기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삶은 고기는 차갑게 해서 많이 준비해두었고 빵도 많이 있으니 찾아 먹고, 죽은 너희들이 알아서 끓여 먹어라.”
할머니는 신음했다.
둘은 죽을 끓여 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잘되지 않았다. 첫날에는 죽이 너무 묽게 되었고, 둘째 날에는 잘라지지도 않을 만큼 딱딱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몽땅 태워먹었다.
“난 죽이 정말 싫어.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면 난 절대로 죽을 먹지 않을 거야.”
페이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럼 아기들을 어떻게 키울 건데? 아기는 죽을 먹지 않으면 자라지 않잖아. 모두가 그렇게 말하던걸.”
우나가 물었다.
“죽을 먹지 않고 그냥 살든가 아니면 자라지 말라 하지, 뭐.”
페이스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자, 내가 상을 차리는 동안 우나 네가 죽을 젓고 있어. 잠깐만 젓지 않아도 타버릴 거야. 벌써 9시 30분이나 되었어. 이러다 우리 주일 학교에 늦겠다.”
“아직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 비가 저렇게 내리고, 설교도 없는데 멀리서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우나가 말했다.
“가서 칼한테 아침 먹으라고 해.”
페이스가 말했다.
칼은 어젯밤 ‘무지개 골짜기’ 늪지대에서 잠자리를 쫓아다니며 놀다가 비에 젖어 목감기에 걸린 듯했다. 양말도 구두도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며 집에 돌아왔는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있다 잠이 들었다. 칼이 아침을 못 먹겠다고 해서 페이스는 다시 가서 자라고 했다. 페이스와 우나는 아침을 먹고 치우지도 않은 채로 주일 학교에 갔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11시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서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감리교회 주일 학교에도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아.”
우나가 말했다.

“잘됐네. 감리교회에는 비가 내려도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 약 오르잖아. 그쪽 교회도 오늘은 설교가 없으니까 주일 학교는 오후에 시작할지도 몰라!”
페이스가 말했다.
우나는 메리 밴스에게 배운 대로 꽤 솜씨 있게 설거지를 했다. 페이스는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마루를 쓸고 점심식사에 쓸 감자를 벗기다 손가락을 베었다.
“점심에는 디토 말고 다른 음식을 좀 먹어봤으면 좋겠어. 난 디토가 너무 지겨워. 블라이드 아이들은 디토가 뭔지도 모른대. 우린 한 번도 푸딩을 먹어보지 못했는데, 낸네 집에선 일요일에 푸딩이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래. 그런 일은 수잔 아줌마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거래.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할까, 페이스 언니?”
우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나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제시 드류는 그 애 어머니 못지않을 만큼 집안일을 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넌 그 애처럼 멍청한 아이가 되고 싶니?”
페이스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붙들어 매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지 않아. 메리 밴스가 그랬는데 사람들이 우리 집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흉본대.”
페이스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집을 깨끗이 청소하자. 내일 당장 하지않을래? 마침 마사 할머니도 ‘궁상병’으로 누워 있으니까 아무도 방해할 사람이 없어.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다고.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집을 완전히 깨끗하게 정리해놓자. 우리도 쓸고 먼지 털고 창문을 깨끗이 닦는 일쯤은 할 수 있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우리 집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지 않을 거야. 젬 블라이드는 그런 말을 하는 건 심술궂은 할머니들뿐이라고 했지만, 그런 할머니들이 우릴 욕한다고 해도 기분 나빠!”
“내일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아, 페이스 언니,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깨끗해진다면 정말 기분 좋을 거야.”
우나도 신이 나서 말했다.
“마사 할머니 ‘궁상병’이 내일도 낫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단 한 가지도 해치우지 못할 거야.”
페이스가 말했다.
페이스의 마음씨 고운 소망은 이루어졌다. 다음 날도 마사 할머니는 일어나지 못했고 칼도 여전히 아파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페이스도 우나도 칼이 몹시 많이 아프다는 것을 몰랐다. 자상한 엄마가 있었더라면 곧 의사에게 보였을 테지만 엄마는 없었고, 가엾은 칼은 목이 아프고 머리가 쿡쿡 쑤시고 열로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서 견디어야 했다. 그나마 다 해진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녹색 도마뱀 한 마리가 위안이 되어주었다.
비가 갠 다음 세상은 여름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비쳤다. 오늘은 집안 대청소를 하기로 한 날이므로 동무도 찾지 않고 페이스와 우나는 즐겁게 일에 돌입했다.
“우리 식당을 먼저 청소하고 응접실을 치우자. 서재는 내버려두자고. 그리고 2층도 안 치워도 별 상관없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물건들을 다 밖으로 내놓는 거야.”
페이스가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둘은 물건들을 밖으로 들어냈다. 가구들은 베란다와 잔디밭에 줄줄이 쌓아놓았고, 깔개는 감리교회 묘지 울타리에 걸쳐놓았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청소가 시작되었다. 우나는 먼지떨이로 먼지를 털고 페이스는 식당 창문을 닦았다. 창문을 닦으면서 유리창 하나를 깨먹고 두 개는 금이 가게 만들었다. 우나가 창문을 잘 닦았는지 검사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어째 제대로 닦이지가 않은 것 같아. 엘리엇 아주머니네 유리창이랑 수잔 아줌마네 유리창은 반짝반짝 빛이 난단 말이야.”
“괜찮아. 그래도 햇빛이 잘 들어온다고. 내가 비누와 물로 닦았으니까 깨끗할 거야. 중요한 건 다 했다고. 자, 벌써 11시가 지났어. 넌 가구의 먼지를 닦아. 난 깔개를 털 테니까. 묘지에서 털어야겠다. 잔디밭에 온통 먼지가 날아다니면 곤란하니까.”
페이스가 쾌활하게 말했다.
페이스는 깔개 먼지를 터는 일이 무척 신이 났다.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 위에 서서 깔개를 탁탁 치고 흔들어 터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마침 에이브러햄 클로 장로 부부가 대형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 그 장면을 보고는 무서운 얼굴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애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기가 막힌다는 듯 에이브러햄 장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거예요.”
에이브러햄 장로 부인은 한층 더 엄하게 말했다.
페이스는 클로 부부를 향해 쾌활하게 구두 깔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들은 답례도 해주지 않았지만 페이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브러햄 장로는 14년 전에 주일 학교 교장으로 임명된 뒤로 절대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니와 애딜러 클로마저도 손을 흔들어주지 않아 심정이 상했다.
페이스는 블라이드 아이들 다음으로 미니와 애딜러를 좋아했다. 학교에서도 그 두 아이와 가장 친하게 지내면서 애딜러의 수학 공부도 곧잘 도와주고는 했건만. 그런데 이런 것이 고맙다는 표시인가. 메리 밴스 말대로 요새는 죽은 사람은커녕 산 사람 하나도 매장하는 일이 없는 옛날 묘지에서 깔개 좀 털었기로서니 모른 체 인사도 하지 않는 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 화가 나서 페이스가 베란다로 뛰어오자 우나도 클로 여자아이들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며 기분이 나빠 있었다.
“저 애들은 틀림없이 뭔가 화난 일이 있었나 봐. 아니면 우리가 ‘무지개 골짜기’에서 블라이드 아이들하고만 논다고 샘을 내는 건지도 몰라. 개학하면 보라지. 다시는 아델러에게 덧셈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그럼 복수를 해주는 셈이야. 자, 이제 어서 물건들을 다시 들여놓자. 난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청소를 하기 전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이네. 묘지에 나가서 먼지를 다 털어냈는데도 말이야. 난 집 안 청소는 정말 싫어.”
페이스가 말했다.
지친 두 아이가 부엌과 응접실 청소를 마쳤을 때는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점심도 대충 먹고 즉시 설거지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는 무심코 다이 블라이드가 빌려준 이야기책을 집어 들었다가 저녁때까지 정신없이 책에 빠져 있었다. 우나는 맛이 형편없는 차 한 잔을 칼에게 가져다주러 갔지만 칼이 잠들어 있어서 자기도 제리의 침대로 들어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한편,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목사관 여자아이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었다.
“이것은 단순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오늘 오후에 미란다 드류가 그 이야기를 감리교회 주일 학교에서 듣고 이야기해주었는데요, 처음엔 나도 헛소리라고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에이브러햄 장로 부인이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았대요.”
미스 코넬리아가 큰 한숨을 내쉬며 남편에게 말했다.
“뭘 봤다는 거야?”
마셜이 물었다.
“페이스 메러디스와 우나 메러디스가 주일 학교에는 가지 않고 집안 대청소를 했대요! 에이브러햄 장로가 도서관 책을 정리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려고 교회를 나왔는데 그 아이들이 감리교회 묘지에서 깔개를 털고 있더래요. 난 다시는 감리교인들 얼굴을 보지도 못할 거라고요. 이 일로 얼마나 말들이 많겠어요!”
미스 코넬리아는 아주 절망이라는 듯 말했다.
그 일로 정말 말들이 많긴 했다. 그리고 말은 점점 부풀려져서 퍼져 나갔다. 항구 너머 사람들까지 목사관 아이들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 아이들이 일요일에 집안 청소며 빨래를 했을 뿐 아니라 감리교회에서 주일 학교공부를 하는 동안 묘지에서 소풍 놀이를 했다는 이야기로까지 부풀려졌다. 이 엄청난 소문을 듣지 못한 곳은 오직 목사관뿐이었다. 페이스도 우나도 다시 비가 내린 날이 화요일인 줄로만 알았고 그다음 3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비가 내려 아무도 목사관 근처에는 오지 않았다. 목사관 아이들은 어디에도 나가지 못했다. 안개 낀 ‘무지개 골짜기’나 ‘잉글사이드’에는 가볼 수도 있었겠지만 마침 수잔과 의사 선생님을 제외한 온 블라이드 가족이 에이번리에 가고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마지막 빵이야. 그리고 디토도 다 먹었고. 마사 이모할머니가 얼른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쩌지?”
페이스가 말했다.
“마을에 내려가서 빵을 좀 사오지 뭐. 메리가 말려놓은 대구도 좀 있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 모르잖아.”
우나가 말했다.
“그거 쉬워. 그냥 끓이기만 하면 된다고.”
페이스가 말했다.
둘은 생선을 끓였다. 하지만 끓이기 전에 생선을 물에 좀 담가두어 소금기를 빼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생선 요리는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둘은 몹시 배가 고팠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둘의 고생도 모두 끝났다. 해는 다시 반짝였고 칼도 몸이 나았으며 마사 할머니도 병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별안간 나아버렸다. 그리고 고기 장수가 목사관에 찾아와 모두를 굶주림에서 해방시켜주었다. 더욱 기뻤던 일은 블라이드 아이들이 돌아와서 그날 저녁때 블라이드네 아이들과 목사관 아이들 그리고 메리 밴스가 오랜만에 ‘무지개 골짜기’에 모인 것이었다. ‘무지개 골짜기’에는 이슬의 요정처럼 데이지가 여기저기 풀 사이로 피었고, 향기로운 황혼녘에 ‘연인 나무’에 매달린 종은 요정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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