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11~12

나단비 | 2024.04.14 18:16:13 댓글: 0 조회: 8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014
11
엄청난 실수






골짜기에서 아이들을 만나자마자 메리가 인사를 던졌다.
“어이구, 너희들 정말 엄청난 일을 저질렀더구나.”
미스 코넬리아는 그동안 ‘잉글사이드’로 올라가 앤과 수잔과 함께 고통에 찬 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다. 메리는 그 회의가 길어지기를 바랐다. 여기 ‘무지개 골짜기’에 와서 다정한 동무들을 만난 게 꼭 2주 만이었으니까.
“뭐라고?” 
언제나처럼 백일몽에 잠겨 있는 월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제히 물었다.
“너희 목사관 아이들 말이야. 너희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니? 나라면 절대로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나는 목사관에서 자라지 않았고, 다른 보통 집에서 키워진 것도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아.”
메리가 말했다.
“우리가 뭘 어쨌는데?”

페이스가 무심히 물었다.
“뭘 어쨌느냐고? 그래, 잘 물어봤어! 지금 끔찍한 소문이 돌고 있어. 그 일로 너희 아빠가 교회 신도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다니, 가여운 목사님! 사람들이 다 목사님을 비난해. 이건 정말이지 공정치 않아. 하지만 이 세상에는 공정한 일이라고는 없지.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은 너희들인데 말이야.”
“우리가 도대체 뭘 어쨌는데?”
우나가 절망스럽게 다시 물었다. 페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메리를 쏘아보는 눈이 황금빛 섞인 갈색으로 빛났다.
“오, 순직한 척하지 말라고.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메리가 움찔하며 대꾸했다.
“난 몰라. 우나를 울리기만 해봐, 메리 밴스. 그리고 무슨 이야기인지 어서 말해.”
젬 블라이드가 끼어들었다.
“넌 서부에서 막 돌아왔으니까 아마 모를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야.”
메리가 목소리를 다소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메리도 젬에게는 꼼짝 못 했다.
“뭘 알고 있다는 거니?”
“페이스와 우나가 지난 일요일에 주일 학교를 빼먹고 집 청소를 했다는 것 말이야.”

“안 그랬어.”
페이스와 우나는 하나가 되어 외쳤다.
메리는 아주 오만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딱 잡아뗄 줄은 정말로 몰랐는걸. 나한테는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쥐 잡듯이 잡아놓고선. 너희들이 아무리 잡아떼도 아무 소용 없어. 클로 장로님과 부인이 너희를 분명히 보았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일로 교회가 두 동강 날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아. 너희들은 착한 아이들이니까.”
낸 블라이드가 일어서 망연자실해 있는 페이스와 우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이 아이들은 테일러 씨네 헛간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던 너 메리 밴스를 데려다가 먹이고 입혀주었을 만큼 착한 아이들이지.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넌 은혜를 아는 아이로구나.”
“은혜를 아는 아이고말고. 난 언제나 변함없이 메러디스 목사님 편을 들어주는 말을 했어. 이번 주에도 목사님을 위해서 혀가 아플 만큼 편들어주는 말을 했다고. 일요일에 청소를 한 아이들이 나쁜 것이지 목사님이 나쁜 게 아니라고. 목사님은 집에 계시지도 않았잖아. 사람들은 왜 그것도 모르는지 몰라.”
메리가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는 청소를 안 했어. 우리가 청소한 날은 월요일이었다고. 그렇지, 페이스 언니?”
우나가 항의했다.
“그렇고말고. 우리는 비가 오는데도 주일 학교에 갔어.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더라고. 에이브러햄 장로님마저도. 사람들에게는 날씨가 좋을 때만 그리스도인이니 뭐니 하면서 설교를 해놓고선.”
페이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비가 내린 날은 토요일이야. 일요일에는 날씨가 아주 좋았다고. 나는 이가 아파서 주일 학교에 못 갔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갔고 ,너희 집 잔디밭에 물건들이 다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고. 에이브러햄 장로님과 부인은 너희들이 묘지에서 깔개를 털고 있는 것도 다 봤대.”
메리가 말했다.
우나가 데이지 꽃들 사이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자, 얘들아, 여기 좀 봐. 정리 좀 하자. 누군가 실수를 저질렀어. 일요일은 날씨가 좋았다고. 너희는 왜 토요일을 일요일이라고 생각했니?”
젬이 위엄을 갖추어 말했다.
“목요일 밤에 기도회가 있었어. 금요일에는 애덤이 마사 할머니의 고양이에게 쫓기다가 수프 냄비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점심식사를 망쳐버렸고, 토요일에는 지하실에 뱀이 들어와서 칼이 꼬챙이로 집어냈고, 일요일에는 비가 내렸어. 그러니까 다 맞잖아!”
페이스가 소리쳤다.
“하루가 틀렸어, 페이스 메러디스. 기도회는 수요일 밤에 있었다고. 벡스터 장로님이 기도회를 맡기로 했는데 목요일 밤에는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요일로 바뀌었지. 그래서 너희가 일요일에 일을 하게 되었구나.”
메리가 말했다.

페이스가 느닷없이 미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렇게 된 거로구나. 정말 웃긴다!”
“네 아빠는 그렇게 우습다고 생각지 않을걸.”
메리가 심술궂게 말했다.
“우리가 실수로 그랬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리가 설명할게.”
페이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찾아다니며 초죽음이 될 때까지 설명한다 해도 소용없어. 소문은 너보다 훨씬 더 빨리 앞질러 달려갈 테니까. 내가 세상을 더 오래 살았고, 또 더 많이 보았으니까 너보다 잘 알거든. 그리고 네 말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을 거야.”
메리가 말했다.
“내가 설명하면 다 믿어줄 거야.”
페이스가 말했다.
“넌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어.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넌 네 아빠 얼굴에 먹칠을 한 거야.”
메리가 말했다.
우나는 이 끔찍한 일로 걱정하느라 그날 저녁을 망쳐버렸다. 하지만 페이스는 걱정만 하고 있지 않고 이 일을 해명할 계획을 세웠다. 언제나 걱정만 하고 있는 건 페이스에게 맞지 않았다. 지나가버린 일이야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내버려두고 현재를 마음껏 즐겼다.

젬은 낚시를 하러 갔고 월터는 공상에서 깨어나 천국을 노래했다. 메리는 귀를 쫑긋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태도로 월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월터에게는 좀 이해하지 못할 구석도 있었지만 메리는 월터의 책 이야기를 무척 즐겼다. 월터가 해주는 이야기는 참 색다르고 기분이 좋았다. 그때 월터는 콜리지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는 천국을 이렇게 그렸다.

‘정원에는 구불구불 흘러가는 실개천이 빛나고
무성한 나무들은 향기를 뿜어낸다.
천국의 숲은 양지바른 녹지를 에워싼
저 언덕들만큼이나 오래되었다.’15)

“난 천국에도 숲이 있다고는 생각 못 했어. 천국에는 길뿐인 줄 알았지. 저쪽에도 길, 이쪽에도 길.”
메리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숲이 있어! 우리 엄마랑 나는 숲이 없으면 살 수 없어! 그러니까 천국에 숲이 없다면 천국에 가도 별 소용이 없다고.”
낸이 말했다.
“천국에는 도시도 있단다. 멋지고 화려한 도시들이지. 석양빛 색깔이고 사파이어 탑이랑 무지개 성이 있어. 집들은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지어졌지. 길도 전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서 태양처럼 번쩍거려. 광장에는 수정 분수가 있어서 빛을 내고 있고 어디를 보아도 천국의 꽃인 아스포델이 만발해 있지.”
어린 몽상가가 말했다.
“아, 멋지다! 나도 샬럿타운 번화가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곳도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 천국이 정말로 네가 말한 대로라면 정말 무척 아름다울 거야. 하지만 좀 따분하지 않을까?”
메리가 말했다.
“천사들이 우리와 놀아주면 따분하지 않고 재미있을 거야.”
페이스가 무사태평으로 말했다.
“천국은 아주 재미있는 곳이야.”
다이가 장담했다.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
미스 코넬리아가 감시하고 있어 일요일 오후 내내 성경을 너무 많이 읽은 메리가 말했다. 이제 메리는 자기도 성경에 관해 퍽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말로는 성경에 쓰인 말은 모두 비유래.”
낸이 말했다.
“그 말은 성경에 있는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이니?”
메리가 희망적으로 물었다.
“꼭 그런 말은 아니고, 내 생각에 천국은 네가 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할 거라는 말인 것 같아.”
“그럼 천국이 ‘무지개 골짜기’ 같았으면 좋겠다. 너희들과 모두 함께 모여서 놀 수 있게 말이야. 나한테는 그것이면 충분해. 어쨌거나 우리는 죽기 전까지 천국에 갈 수 없잖아. 아니, 죽어서도 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지금 천국이 어떤 곳일까 걱정해도 소용없어. 저기 젬이 송어를 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송어를 구울 차례야.”
메리가 말했다.
“우리는 목사님 가족이니까 월터보다 천국을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두워지자 집으로 돌아가며 우나가 말했다.
“우리가 더 잘 알아. 월터는 그저 공상한 거야. 엘리엇 아주머니 말로는 월터는 그 버릇을 엄마한테서 물려받았대.”
페이스가 말했다.
“우리가 일요일을 잘못 알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나가 한숨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들에게 해명할 계획을 세웠어. 내일 밤까지만 기다리라고.”
페이스가 말했다.


15. 영국의 시인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 <쿠블라 칸(Kubla Khan)>의 일부.




12
해명에 나서다






다음 날 저녁은 글렌 세인트 메리 교회에 쿠퍼 목사가 와서 설교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로교회 안은 그 근방과 멀리서 온 사람들로 꽉 찼다. 쿠퍼 목사는 설교를 잘하기로 평판이 높았고,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도시에서는 최고의 옷으로, 시골에서는 최고의 설교’로 다가가야 한다는 옛 말씀을 잘 새기고 있었다. 그날 밤도 아주 수준 높고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생각은 쿠퍼 목사의 설교가 아니었다. 목사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쿠퍼 목사는 열정적인 호소력으로 설교를 마치고 커다란 이마에서 땀을 훔친 다음 “자, 우리에게 기도를 허락해주십시오.” 하는 말로 기도를 올렸다. 쿠퍼 목사는 그 말로 유명했다. 그 순간 약간의 소음이 들렸다. 글렌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는 옛날 방식대로 헌금을 설교 전이 아니라 후에 걷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 그런 건 아니었고, 감리교회가 새 방식을 채택해서 미스 코넬리아와 클로 장로가 감리교회가 따르는 방식은 절대로 추종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찰스 벡스터와 토머스 더글러스 두 사람이 헌금 그릇을 돌리려고 막 일어섰고 오르간 연주자는 봉헌송을 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관 좌석에서 페이스 메러디스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놀란 신도들을 마주 보고 섰다.
미스 코넬리아도 자기 자리에서 절반쯤 일어섰지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너무 뒤라서 말리러 나가기도 너무 늦었고,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못 하게 말려서 더 웃음거리로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미스 코넬리아는 괴로운 표정으로 블라이드 의사 부인을 잠시 바라보고, 다시 감리교회의 워런 집사를 흘끗 훔쳐본 다음 체념하고 추문을 하나 더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아이가 옷차림만이라도 제대로라면…….’
미스 코넬리아는 낙담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스는 자기 옷들 중 제일 좋은 옷은 잉크를 엎질러 망쳐버려서 빛이 다 바랜 분홍색 무늬가 있는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치마가 대각선으로 찢어져 붉은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했고, 작아진 옷을 늘리려고 단을 내린 탓에 색이 바래지 않은 치마 밑자락만 빙 둘러 분홍색이 선명했다.
페이스는 자기 옷차림이 어떤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서고 보니 갑자기 긴장되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았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져 어찌 된 일이냐는 듯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주 서자 용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불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침묵은 무서울 정도였다. 페이스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빠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제발 말이 나와 주어야 하는데.
진주처럼 창백해진 우나의 작은 얼굴이 애원하듯 자기를 바라보았다. 블라이드 아이들도 놀라서 넋이 나간 듯했다. 맨 뒤쪽에 앉은 로즈마리 웨스트는 아름답고 친절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고, 엘런 웨스트는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어지길 기대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 페이스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 상황을 구제해준 것은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였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버티 셰익스피어가 페이스를 향해 조롱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다. 페이스도 즉시 무서운 표정으로 답례해주었고 버티 셰익스피어 따위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두려움도 싹 잊어버렸다. 드디어 페이스는 또렷하고 용기 있게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가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만 합니다. 우나와 제가 지난 일요일에 주일 학교에 가지 않고 집 청소를 했다는 소문에 관한 거예요. 우리가 그러긴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요일을 다 헷갈려버려서 그랬던 거예요. 모두 벡스터 장로님 때문입니다.”
순간 벡스터 장로네 신도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장로님이 기도회를 수요일 밤으로 바꾸어버려서 우리는 목요일이 금요일인 줄 알았고, 토요일이 일요일인 줄 알았어요. 칼은 아파서 내내 누워 있었고, 마사 이모할머니도 그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요일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데도 토요일에 주일 학교에 간 겁니다.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우나와 저는 월요일에 집 청소를 깨끗하게 해서 사람들이 목사관이 더럽다고 흉보지 못하게 해주자고 했어요.”
이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를 하게 된 거예요. 우리는 감리교회 묘지에서 깔개를 털었어요. 묘지가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거든요. 죽은 사람을 욕보이려고 한 일은 아니었어요. 죽은 사람들이 그 일로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고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랬죠. 이 일로 우리 아빠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빠는 멀리 가 계셔서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날이 월요일인 줄 알았어요. 우리 아빠는 이 세상 어느 아빠보다도 좋은 아빠예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 아빠를 사랑해요.”
페이스는 마지막에 흐느껴 우는 것으로 해명을 마치고 얼른 강단 계단을 뛰어내려와 교회 곁문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여름 밤하늘에 다정하게 떠 있는 별들이 페이스를 위로해주었다. 눈과 목이 아픈 것도 다 나았고 마음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끔찍한 해명은 다 끝난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이 이 일이 아빠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란 것을 알 것이다. 우나와 자기가 일요일에 청소를 할 만큼 나쁜 아이들이 아니란 것도 알아줄 것이다.
교회 안 모든 사람들이 멍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토머스 더글러스만은 엄숙한 얼굴로 일어나 통로를 돌기 시작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하늘이 내려앉을지라도 헌금은 거두어야 했다. 헌금은 모두 거두었고 성가대는 찬송가를 불렀지만 그 끔찍한 일로 노래는 엉망이었다. 쿠퍼 목사는 축복 말씀으로 예배를 끝냈지만 평상시와는 달리 말에 힘이 없었다. 쿠퍼 목사는 유머감각이 있어서 페이스의 행동을 귀엽게 생각했다. 게다가 존 메러디스는 장로파 동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다음 날 오후에 메러디스 씨는 돌아왔다. 하지만 메러디스 목사가 돌아오기도 전에 페이스는 또다시 글렌 세인트 메리를 떠들썩하게 달굴 소문 거리를 만들었다. 월요일이 되자 페이스는 일요일 저녁의 흥분과 긴장의 반동으로 더더욱 장난기가 발동했다. 미스 코넬리아가 봤다면 당장 ‘악마의 소행’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페이스는 그 ‘악마’의 부추김으로 월터 블라이드를 돼지 등에 올라타게 하고 자기도 다른 돼지 등에 올라타고는 글렌 마을 큰길을 내달렸다.
돼지들은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네 돼지로 보였다. 그것들이 지난 이삼 주 동안 목사관 옆 길 주변을 배회하고 다녔다. 월터는 돼지를 타고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의 큰길을 지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페이스 메러디스가 원하는 일이면 그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둘은 돼지를 타고 미친 듯이 언덕을 달려 내려와 마을을 통과했다. 페이스는 공포에 질린 돼지 등에 올라타고 자지러지게 웃느라 몸은 반으로 접혀 있었고, 월터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두 사람은 때마침 역에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던 메러디스 목사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 목사는 기차 안에서 미스 코넬리아와 대화를 나눈 덕에 다른 때보다는 덜 몽상적이었고 정신도 덜 빠져 있었다.
목사는 코넬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나면 일시적이나마 정신이 깨어났다. 목사도 둘을 알아보았고, 페이스에게 그런 행동은 적절치 못하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사소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월터와 페이스는 알렉 데이비스 부인 곁도 지나쳐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지르게 했고, 미스 로즈마리 웨스트의 옆도 지나갔지만 미스 로즈마리는 큰 소리로 웃고는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두 마리 돼지는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네 집 뒤뜰로 뛰어들어 두 번 다시 거기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번 일로 돼지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페이스와 월터가 돼지 위에서 막 뛰어내리는데 블라이드 의사 부부가 급히 들어왔다.
“이게 당신의 아들 교육 방식이야?”
길버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아이들 버릇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 같긴 해.”
앤이 뉘우친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길버트,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난 아이들에게 엄히 할 수가 없어. 나는 너무나 애정을 원했고 즐겁게 놀고 싶었거든. 어린아이였던 난 사랑도 받지 못하고 놀기는커녕 일만 해야 했어. 우리 아이들은 목사관 아이들과 너무 재미나게 놀잖아.”
“저 가여운 돼지들은?”
길버트가 다그쳤다
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자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로 저 돼지들이 고통받았다고 생각해? 저 짐승들은 제멋대로야. 올여름 저 돼지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 원성이 자자했다고. 드류네는 저 돼지를 가두어두지도 않고. 하지만 어쨌든 월터를 잘 타이를게. 내가 웃지 않고 잘 타이를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날 저녁 미스 코넬리아가 ‘잉글사이드’로 올라왔다. 일요일 저녁에 일어난 일에 대한 감정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앤은 페이스의 행동에 대해 자기와는 생각이 사뭇 달랐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명을 한 페이스의 행동은 용감했어요. 그 애의 고백에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구요. 그 아이는 몹시 두려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낸 거예요. 난 그 점을 높이 사고 싶어요.”
앤은 말했다.

“물론 그 아이의 의도야 좋았지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하다니 몹쓸 짓이지요. 일요일에 청소를 한 것보다도 더 말이 날 만한 일이었어요. 겨우 소문 하나가 잠잠해지면 또 문제를 만들고 하니 이거야 원.”
미스 코넬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로즈마리 웨스트도 앤과 생각이 같은 모양이에요. 어제저녁 교회를 나오면서 페이스의 용기가 가상하면서도 한편 가엾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미스 엘런은 아주 재미있었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그 같은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는데 아주 즐거웠다나요. 하지만 두 사람이야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 사람들은 감독교파잖아요. 하지만 우리 장로교인은 상관하지 않을 수 없다고요. 그날 저녁에는 호텔에 묵고 있던 손님들도 많이 참석했고 감리교인도 많았거든요. 리앤더 크로퍼드 부인은 너무 안됐다고 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더군요. 그리고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그런 아이는 볼기짝을 때려주어야 한다고 했대요.”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리앤더 크로퍼드 부인은 교회에서 늘 울어요. 목사님이 감동적인 말만 하면 반드시 울지요. 그런데도 헌금자 명단에 그분 이름이 기록된 예는 전혀 없답니다, 사모님. 눈물만 흘리는 거야 뭐 어렵나요. 돈도 안 드는 일인데. 언젠가는 마사 이모할머니가 깔끔하지 못하다고 흉을 보더군요. 난 그 부인에게 ‘리앤더 크로퍼드 부인, 댁은 부엌 설거지통에다 케이크 반죽을 한다면서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하고 대꾸해주려다가 말았지요. 그런 사람과 언쟁을 벌여보아야 내 위신이나 떨어뜨리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그 부인에 관해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일도 알아요. 내가 소문이나 퍼트리는 사람이 아니니 말을 삼가는 거지요. 그리고 그 알렉 데이비스 부인에 관해서도 말인데요, 사모님. 내가 그 부인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지 아세요? ‘데이비스 부인, 페이스의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은 부인 심정이야 잘 압니다만, 부인에게 목사님 딸 볼기짝을 때려줄 기회가 있으려고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요.’ 하고 쏘아주고 싶어요.”
수잔이 말했다.
“그 가여운 페이스가 옷차림이라도 반듯했다면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옷을 입고 강단 앞에 서다니요, 정말이지 못 봐주겠더라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한탄했다.
“그래도 깨끗한 옷이었어요, 사모님.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단정하게 하고 다녀요. 아이들이 부산스럽고 조심성이 없기야 하지만요, 사모님. 그래도 귀 뒤를 씻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하는 아이들은 아니라고요.”
수잔이 말했다.
“페이스가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도 분간치 못했다는 것은요, 그 아이도 제 아버지처럼 부주의하고 현실감각이 없이 자랄 거라는 얘기예요. 칼이 아프지만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묘지에 자라는 월귤나무 열매를 너무 많이 따 먹어 아팠을 거예요. 그 감리교인들이 칼을 아프게 만든 거라고요. 내가 감리교인이라면 적어도 묘지는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살겠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칼이 돌담에 자라는 시큼한 맛이 나는 풀을 너무 많이 먹어 아팠을 것 같네요. 목사님 아들이 죽은 사람의 무덤에 자라는 월귤나무 열매를 따 먹었을 리 없다고요. 돌담에 자라는 풀을 먹는 일이야 그리 나쁠 것도 없겠죠, 사모님?”

수잔이 말했다.
“어젯밤에 페이스가 한 일 중에 가장 심했던 건 말을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인상을 쓴 거였어요. 클로 장로님은 자기한테 그런 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오늘 돼지를 타고 달리는 걸 봤나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나도 봤어요. 월터도 페이스랑 함께 돼지를 탔지요. 그 일로 월터를 좀 야단쳤어요. 월터가 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돼지를 타자고 한 것은 월터였지 페이스가 시작한 일은 아닌 것 같더군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 사모님? 월터는 모든 일을 자기 잘못이라고 제가 다 뒤집어쓰는 아이잖아요. 그렇지만 월터가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것은 나보다도 사모님이 더 잘 알겠죠. 그 착한 아이는 돼지 등에 탈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해보지 않았을 거라고요. 설사 돼지가 시를 쓴다고 해도요.”
수잔이 외쳤다.
“그 생각이 페이스 메러디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난 아모스 드류네 늙은 돼지들이 가엾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목사 딸이 그런 짓을 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의사 아들하고요!”
앤이 미스 코넬리아의 말투를 흉내 내며 크게 웃고는 덧붙였다.
“미스 코넬리아! 그 애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들이 정말로 나쁜 짓을 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다만 충동적으로 생각 없이 행동할 뿐이지요. 어렸을 때는 나도 그랬어요. 좀 더 크면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 될 거예요. 바로 저처럼요.”
미스 코넬리아도 웃고 말았다.
“앤, 있잖아요. 난 가끔씩 앤의 눈에서 그런 걸 읽어요.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온전한 정신을 걸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내키는 대로, 아이들처럼 뛰놀고 싶어 한다는 거요. 나까지도 그러고 싶게 했어요. 앤과 이야기를 나누면 꼭 그런 느낌이 들어요. 바버라 샘손을 만나면 꼭 반대 느낌이 들죠. 모든 일이 잘못되어 있고, 일이 제대로 풀리는 날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요. 물론 조 샘손 같은 남자와 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그 부인이 그 수많은 기회를 다 내버리고 조 샘손과 결혼을 했을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요. 처녀 적에는 따라다니는 남자가 많았잖아요. 나한테 자기는 애인이 스물하나에다 페식 씨도 있다고 자랑하고는 했어요.”
수잔이 말했다.
“페식 씨가 누구죠?”
“그 사람은 아무나 쫓아다녔어요, 사모님. 애인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죠. 정말로 그런 마음이 있어 누구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나저나 누구는 애인이 스물한 명인데 나는 단 하나도 없다니! 어쨌거나 바버라는 숲 속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구부러진 나무를 골라 갖고 나온 꼴이죠. 그래도 비스킷은 바버라보다 남편이 더 잘 만들어요. 손님이 오면 언제나 남편더러 비스킷을 만들도록 할 정도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네요. 내일 집에 손님이 오기로 했어요. 얼른 가서 빵을 만들어야 해요. 메리가 준비를 한다고 했고, 또 분명 잘하기야 하겠지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은 내 빵은 내가 만들어야지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메리는 잘하고 있지요?”
앤이 물었다.
“메리에게 아직 결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살도 좀 찌고 행동도 점잖게 하고 있죠. 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뭔가가 더 있어요. 아주 약은 아이죠. 내가 천 년을 파고든다 해도 그 아이의 속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아, 정말이에요. 일도 말이에요. 난 그런 아이는 처음 봐요. 아주 온 힘을 다해요. 와일리 부인이 그 아이에게 잔인하게 매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혹사시킬 필요는 없었겠어요. 그 아이는 아주 타고난 일꾼이에요. 그리고 가끔씩은 그 아이 다리가 먼저 닳을까, 혀가 먼저 닳을까 궁금하단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할 일이 없어서 죽겠다니까요. 메리가 얼른 개학을 해야지. 그래야 내가 하던 일을 다시 찾죠. 메리는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나도 학교는 반드시 보낼 생각이에요. 감리교인들에게 내가 빈둥거리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소리는 절대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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