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3~4

나단비 | 2024.04.17 15:02:16 댓글: 0 조회: 5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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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향연






잠을 잘 때도 눈 모양이 꼭 웃고 있는 것 같은 릴라는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거트루드 올리버에게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트루드 올리버는 어젯밤에 로브리지에서 왔고, 오늘 밤 포 윈즈 등대에서 댄스파티가 있다고 붙잡는 바람에 머무르게 되었다.
“새날이 창문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오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요?”
미스 올리버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릴라처럼 열정적으로 하루를 맞이한 적이 없었다. 하루가 끔찍한 일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다.
“저는 하루를 맞이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뜻밖의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맑은 황금빛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오늘 하루가 제게 어떤 놀라운 선물을 가져다줄지 생각하면 무척 가슴이 두근거려요. 저는 언제나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10분쯤 공상에 잠겨요. 밤이 될 때까지 어떤 멋진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면서요.”
릴라가 말했다.

“나도 오늘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우편배달부가 우리에게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릴라가 무심히 말했다.
“오, 그래요.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너무 끔찍할 거예요. 하지만 전쟁은 우리랑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전 전쟁이 좀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보어 전쟁도 그랬잖아요. 그 전쟁을 잘은 모르지만요. 올리버 선생님, 오늘 밤 이 흰색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새로 맞춘 녹색 드레스를 입을까요? 녹색 드레스가 훨씬 더 예쁘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해변 댄스파티에서 입기에는 옷을 망칠지도 모르니 좀 걱정돼요. 그리고 제 머리를 새로 유행하는 스타일로 해줄 수 있어요? 글렌의 다른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하지 않을 스타일로요. 그러면 제가 모두의 눈길을 끌 수 있잖아요.”
“엄마 허락은 어떻게 받았니?”
“월터 오빠가 엄마를 설득해줬어요. 댄스파티에 가지 못하면 제가 몹시 슬퍼하리란 걸 오빠는 알고 있었거든요. 올리버 선생님, 이것은 제가 어른이 된 다음 처음으로 가는 파티예요. 전 이 파티 생각으로 일주일이나 잠도 못 잤어요. 오늘 아침 해가 빛나는 것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오늘 밤 비가 온다면 정말 큰일이에요. 모험이긴 하지만 저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가겠어요. 처음으로 파티에 가는 거니까 가장 예쁘게 하고 가고 싶어요. 이 드레스가 흰색 드레스보다 길이도 2.5센티미터나 길거든요. 그리고 굽이 높은 은빛 구두를 신고 가려고요. 포드 부인이 작년 크리스마스 때 보내준 것인데 아직 한 번도 신을 기회가 없었어요. 정말 예쁜 구두라고요. 아, 제게 춤을 신청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어요, 올리버 선생님. 만일 춤추자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전 너무 창피해서 죽고 싶어질 거예요. 저녁 내내 담벼락에 기대앉아 있어야 하잖아요. 칼과 제리는 춤을 출 수 없어요. 목사님 아들이니까요. 그렇지만 않으면 그 두 사람에게 저를 구해달라고 하면 될 텐데.”
“춤출 상대는 많이 있을 거야. 항구 건넛마을 젊은이들이 다 오잖아. 거긴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들이 훨씬 더 많거든.”
“제가 목사님 딸이 아니라서 너무 다행이에요. 가여운 페이스 언니는 오늘 밤 춤을 출 수 없다고 아주 골이 났어요. 우나 언니는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춤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누가 페이스 언니에게 춤추지 않는 사람들은 부엌에서 엿이나 만들면 된다고 말했어요. 그때의 언니 표정을 보여주고 싶어요. 젬 오빠와 페이스 언니는 아마 저녁 내내 바위 위에 앉아 있을 거예요. 저희는 모두 ‘꿈의 집’ 아래로 난 좁은 길 끝까지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등대로 가기로 했어요. 굉장히 멋질 것 같지 않으세요?”
릴라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열다섯 살 때는 말을 과장해서 하기도 좋아하고 최상급 형용사도 많이 썼지.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파티가 유쾌하겠지만 나한테는 지루할 거야. 나처럼 늙은 노처녀랑 춤추고 싶어 할 남자도 없을 거고. 젬이랑 월터는 불쌍한 마음으로 내게 한 번쯤은 춤을 신청해주겠지. 그러니 나한테까지 너의 그 황홀한 기분을 기대하지는 말아줘.”
미스 올리버는 비꼬듯 말했다.
“그래도 올리버 선생님도 처음으로 파티에 참석할 때는 마음이 설레었죠?”

“아니, 난 그때도 파티가 싫었어. 나는 너무 촌스럽고 평범하게 생겨서 아무도 나한테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거든. 나보다 더 못생긴 남자 하나만 빼고. 그 사람이 너무 어색해하면서 춤을 추자고 해서 난 더 그 사람이 싫었어. 내가 거절하니까 그 사람도 두 번 다시 나한테 춤추자고 하지 않았지. 난 진정한 소녀 시절을 거치지 못했어, 릴라.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야. 너는 멋지고 행복한 소녀 시절을 보내기 바란다. 네 첫 댄스파티도 일생을 두고 유쾌한 추억이 되길 바라고.”
“어젯밤 꿈에 댄스파티에 갔었어요. 그런데 제가 일본 기모노를 입고 침실용 슬리퍼를 신고 있지 뭐예요. 사람들이 절 빙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서서요. 전 진저리를 치며 눈을 번쩍 떴어요.”
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도 이상한 꿈을 꾸었어. 난 가끔씩 무척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꾸고는 하는데 어젯밤 꿈도 그랬어. 보통 꿈처럼 뒤죽박죽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분명하고 꼭 현실처럼 느껴지는 꿈이야.”
미스 올리버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꿈인데요?”
“내가 글렌 들판을 바라보면서 여기 ‘잉글사이드’ 베란다 계단에 서 있었어. 갑자기 저 멀리 들판에서 은빛의 반짝이는 파도가 넘실대는 게 보이는 거야. 그 파도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왔어. 모래사장으로 밀려드는 작은 흰 파도처럼 계속해서 몰려들었어. 파도가 글렌 마을을 다 삼켜버릴 것 같았어. 나는 그 파도가 설마 ‘잉글사이드’까지는 오지 않겠거니 생각했어. 그런데 파도는 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금세 내 발치까지 밀려들었어. 그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렸지. 글렌 마을이 있었던 곳은 미친 듯 출렁이는 큰 바다로 변해버렸어. 나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어. 그랬더니 내 옷자락이 피로 물들어 있었어. 나는 몸을 떨면서 잠을 깼지. 몹시 불쾌한 꿈이었어. 그 꿈에는 뭔가 불길한 의미가 담겼어. 그렇게 생생한 꿈은 언제나 현실이 되어버리고는 했는데.”
“그 꿈이 제발 동쪽에서 폭풍우가 밀려와 파티를 망치는 꿈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릴라가 중얼거렸다.
“구제 불능 열다섯 살! 아니야, 릴라, 나의 릴라. 그 꿈이 그런 일을 예고하는 건 아니야.”
미스 올리버는 무심하게 말했다.
요 며칠 동안 ‘잉글사이드’에는 어떤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로지 릴라만이 그런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한창 피어오르는 삶의 기쁨에 빠져 있었다. 블라이드 의사는 침묵을 지키며 무거운 표정으로 신문만 보고 있었다. 젬과 월터도 신문에 실린 기사에 관심을 곤두세웠다. 젬은 그날 저녁 기사를 보고 흥분해 월터를 찾았다.
“어이구, 결국은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말았어. 이제 영국도 곧 전투에 돌입할 거야. 만일 그렇게 되면 네가 본 피리 부는 사나이의 환상이 현실이 되고 만 거겠지.”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어. 예감 같은 거였다고나 할까? 미래의 환영을 본 것이었다고. 오래전 그날 저녁 무렵에 난 한순간 그를 정말로 보았어. 형은 영국이 전투에 참여하리라고 생각해?”
월터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우리 모두 나서서 영국을 도와야 해. 북해의 잿빛 모국3)혼자 싸우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렇지 않니? 하지만 넌 가서는 안 돼. 장티푸스가 너에게서 싸울 힘을 모두 앗아가 버렸으니까. 정말 안됐다.”
젬이 흥분해 외쳤다.
월터는 그것이 안된 일인지 아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글렌 마을 너머로 움푹 들어가 보이는 저 먼 푸른 항구만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영국의 일부야. 영국연방의 한 나라로, 우리의 핏줄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해. 정말 멋진 모험이 될 거야! 결국엔 자유당의 그레이 의원과 다른 노련한 정치가들이 그렇게 결론을 낼 거야. 무엇보다도 궁지에 몰려 있는 프랑스를 못 본 척 내버려둔다면 영국으로선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 될 테니까. 그렇게만 되면 굉장한 모험을 할 수 있을 거야. 자, 이젠 등대에서 신나게 놀 준비를 해야겠다.”
젬은 강인하면서도 기다란 손가락으로 빨간 고수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명랑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젬의 섬세해 보이는 손을 볼 때마다 타고난 외과 의사 손이라고 생각했다. 젬은 ‘백 명의 피리 부는 악사들’ 가락을 휘파람으로 불며 멀어져 갔다. 월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서서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한꺼번에 불어닥쳤다. 며칠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어이없이 당한 기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헤어날 길을 찾을 것이다.
전쟁은 지옥같이 무섭고 싫다. 20세기에, 그것도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두렵고 싫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전쟁 생각으로 월터의 마음은 비참하기만 했다. 생각지 말자. 월터는 단호하게 마음속에서 전쟁 생각을 몰아내려고 했다. 8월이 무르익어가는 글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래된 농가들은 줄지어 서 있고, 목장과 정원은 고요했다. 서쪽 하늘은 하나의 거대한 황금빛 진주알 같았고, 저 아래 달빛을 받은 항구는 하얗게 빛났다. 주변은 기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졸린 듯한 울새의 지저귐, 해 질 녘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의 구슬프면서도 부드러운 속살거림, 포플러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며 내는 은빛 속삭임, 우아한 하트 모양 잎사귀를 흔드는 소리. 창문마다에서는 아가씨들이 댄스파티에 갈 준비를 하느라 즐겁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상은 아름다운 소리들과 갖가지 빛깔에 잠겨 있었다. 월터는 이런 것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들이 주는 깊고 더없는 기쁨만을.
‘아무도 내게 전쟁에 나가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젬 형 말대로 다 장티푸스 덕분이지.’
월터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릴라는 댄스파티에 갈 채비를 마친 다음 창문으로 윗몸을 내밀고 있었다. 노랑 팬지꽃 한 송이가 머리에서 빠져 황금빛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창문턱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러나 머리에는 미스 올리버가 사랑하는 아이의 머리를 꾸미려고 팬지꽃다발로 핀을 만들어 꽂아주어서 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고요할까요,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저흰 더없이 좋은 밤을 보내게 될 것 같아요. 들어보세요, 선생님. ‘무지개 골짜기’에서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또렷이 들려와요. 저 방울은 거기 10년도 넘게 매달려 있었어요.”
“저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천상의 음악소리를 듣는 것 같아. 밀턴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들었던 음악소리처럼.”
미스 올리버가 대답했다.
“저희가 어렸을 때엔 ‘무지개 골짜기’에서 아주 즐겁게 놀았는데…….”
릴라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이젠 아무도 ‘무지개 골짜기’에서 시끌벅적 노는 사람이 없어 여름 저녁이면 아주 고즈넉한 곳이 되었다. 월터는 거기 가서 책을 읽고는 했고, 젬과 페이스는 거기서 밀회를 즐겼다. 제리와 낸은 심오한 주제를 놓고 끊임없이 토론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것이 아마 둘의 연애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릴라는 그곳에 자기만의 작고 아늑한 골짜기를 갖고 있어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부엌으로 가서 수잔 아줌마에게 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요. 안 그러면 삐칠 거라고요.”
릴라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갔다. 릴라의 모습이 어찌나 눈부시게 아름답던지 수잔이 양말을 수선하고 있던 어둑한 ‘잉글사이드’ 부엌이 다 환해져 버렸다. 릴라는 작은 분홍 데이지꽃 화환 무늬가 있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실크 스타킹에 은빛 구두를 신었다. 머리와 흰 목에는 노랑 팬지꽃으로 장식했다. 그 예쁘고 활기에 넘친 릴라의 모습에 소피아 크로퍼드마저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수잔의 사촌 소피아 크로퍼드는 필연적으로 변하기 마련인 세속적인 것을 칭찬할 생각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다. 소피아와 수잔은 소피아가 글렌 마을에 와서 살게 된 뒤로 싸웠던 옛일을 물에 씻은 듯 잊었다. 소피아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듯 거의 매일 저녁 들렀다. 수잔이 언제나 소피아를 반색하지는 않았다. 소피아가 마음에 꼭 맞는 대화 상대는 못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방문은 반갑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사모님.”
수잔은 소피아가 다녀간 후 이 방문은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는 듯 말한 적이 있었다.
사촌 소피아는 창백하고 긴 얼굴에, 쭈글쭈글 주름이 많고, 코는 길쭉하니 가늘었으며, 입술도 길고 얇았다. 손도 매우 길고 창백했는데 언제나 검은 사라사 무명옷을 입은 무릎 위에 체념한 듯한 모양으로 포개놓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모두 길고 가늘고 생기라곤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소피아는 음울한 눈길로 릴라 블라이드를 바라보며 슬픈 듯이 물었다.
“그 머리는 전부 네 거니?”
“물론이지요.” 
릴라가 발끈해 소리쳤다.
그 말에 소피아는 한숨을 쉬었다.
“아, 그래? 그렇지 않은 편이 좋았을 텐데. 머리숱이 많으면 사람이 힘이 없는 법이거든. 머리가 힘을 다 빼앗아가 버려서. 폐병에 걸릴 수도 있어. 너야 뭐 괜찮겠지. 오늘 밤 춤을 추러 간다지? 목사님 아들들도 간다면서? 목사님 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할 텐데. 난 춤을 좋아하지 않아. 난 춤을 추다 픽 쓰러져 죽어버린 아가씨도 하나 안다. 그런 천벌이 내린 다음에도 어떻게 춤출 마음이 생기는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
“그 아가씨가 또 춤을 추었나요?”
릴라가 까불면서 물었다.
“쓰러져 죽어버렸다니까. 물론 그 아가씨는 다시는 춤을 추지 못했다. 가여운 피조물이지. 로브리지에 사는 커크 집안 아가씨였어. 설마 그렇게 목을 드러내 놓은 채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오늘 밤엔 더운걸요. 하지만 배를 타고 가면서는 스카프를 두를 생각이에요.”
릴라가 항의했다.
“40년 전에 항구에서 배를 타다가 배가 뒤집혀 젊은이들이 모두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아, 그런 일이 오늘 밤엔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그 주근깨는 없애려고 해봤어? 식물즙이 아주 효과가 있던데 말이야.”
소피아는 슬픈 듯이 말했다.
“확실히 소피아는 주근깨라면 잘 알 거야. 처녀 적에 두꺼비보다도 주근깨가 많았으니까. 릴라 주근깨는 여름철에만 잠깐 나왔다가 들어가지만 소피아 주근깨는 일 년 내내 다닥다닥 붙어 있잖아. 주근깨 밑으로 피부도 릴라 피부처럼 곱지도 않았고. 릴라야, 아주 보기 좋다. 머리도 아주 잘 어울리게 했구나. 하지만 그 높은 구두를 신고 항구까지 어떻게 걸어가려고 하니?”
수잔이 릴라를 지키려고 나섰다.
“아, 아니에요. 항구까지는 편한 신발을 신고 갈 거구요, 이 구두는 들고 갈 거예요. 내 드레스 정말로 예뻐요, 아줌마?”
수잔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사촌 소피아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가 아가씨였을 때 입었던 드레스를 생각나게 하는구먼. 나도 분홍색 꽃무늬가 있는 녹색 드레스를 입었지. 허리에서부터 치맛단까지 주름이 잡혀 있었어. 우리는 요즘 아가씨들이 입는 것 같은 몸에 달라붙는 옷은 입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해.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서 걱정이지. 그런데 그날 밤 내 드레스에 그만 커다란 구멍이 나버렸고 누군가 차까지 엎지르고 말았어.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렸지. 하지만 네 옷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드레스는 좀 더 길어야 될 듯 싶구나. 네 다리는 끔찍이도 길고 가냘프니까.”
“블라이드 부인은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어른처럼 옷을 입는 것은 허락하질 않아.”
수잔이 소피아를 면박 주려고 딱딱한 말투로 말했지만 모욕감을 느낀 사람은 오히려 릴라였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라니! 릴라는 화가 나 수잔의 부엌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이제 두 번 다시 수잔에게 내려가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아줌마는 내가 60살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를 어른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 보기 싫은 소피아 아줌마는 내 주근깨와 마른 다리를 들춰 빈정대고 말이야! 그 할머니, 자기는 더 길고 말라깽이라서 꼭 막대기처럼 생겼으면서 남더러 길다느니 가냘프다니 하고 말할 수 있어? 릴라는 그날 저녁의 좋은 기분을 다 망쳐버렸다.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싶었다.
드디어 포 윈즈 등대 쪽으로 떠나는 왁자지껄한 젊은이들 가운데 끼게 되자 릴라는 다시 명랑한 기분을 되찾았다.
블라이드네 아이들은 먼데이가 짖어대는 구슬픈 음악소리에 맞춰 ‘잉글사이드’를 나섰다. 먼데이는 등대 파티에 초대받지도 못하고 헛간에 갇힌 신세였다. 마을에서 메러디스 아이들을 만났고, 다른 젊은이들도 만나 모두들 함께 항구 길을 내려갔다. 메리 밴스도 미스 코넬리아네 집 문에서 나타났다.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에 파란색 스카프를 걸친 화려한 모습이었다. 메리는 릴라와 미스 올리버와 함께 걸었다. 릴라는 메리 밴스를 보고도 별로 환영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릴 적 마른 대구를 들고 자기를 몰았던 메리가 아닌가! 마을길을 쫓기며 달려야 했던 그 망신스러운 일을 잊을 수 없는 릴라는 메리 밴스를 좋아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메리 밴스는 그 누구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메리와 함께 즐겁게 지내기는 했다. 메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따가우면서도 자극적이었다. 다이 블라이드는 “메리 밴스는 우리의 습관 같은 존재예요. 그 애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 애 없이는 지낼 수 없거든요.”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모두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걸었다. 젬은 페이스 메러디스와 함께 걸었고, 제리 메러디스는 낸 블라이드와 함께 걸었다. 다이와 월터는 함께 걸으며 지극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어 릴라를 부럽게 했다.
미란다 프라이어는 칼 메러디스와 함께 걸었는데 순전히 조 밀그레이브를 애태우기 위해서였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조가 미란다를 무척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들 아는 사실이었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조는 자기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만일 어두운 밤이었다면 조도 미란다 곁으로 갈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달빛이 환할 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졸졸 뒤만 따라가며 되지도 않게 칼 메러디스를 원망했다.
미란다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의 딸이었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심하게 미움을 받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란다는 킬킬대며 웃는 버릇이 있어 옆에 있는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얼굴도 창백하니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아가씨였다. 머리는 은빛에 가까운 금발이고 눈은 커다란 파란 도자기 같은 색깔로 어렸을 때 심하게 겁먹은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미란다도 칼보다는 조하고 걷고 싶었다. 칼하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하지만 대학생에다 목사님 아들과 함께 걷는 일은 영광이었다.
셜리 블라이드는 우나 메러디스와 걸었는데, 둘 다 조용한 성격이라 별말 없이 조용히 발걸음만 옮겼다. 셜리는 열여섯으로 조용하고 조심성 있는 성격에다 생각이 깊고 유머가 넘치는 소년이었다. 아직도 수잔의 ‘구릿빛 왕자님’으로 통하고 있고, 여전히 갈색 머리에, 갈색 눈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었다.
셜리는 우나 메러디스와 걷는 것이 좋았다. 우나는 억지로 말을 하게 하거나 수다를 떨어 귀찮게 하지 않았다. 우나는 ‘무지개 골짜기’ 시절과 다름없이 여전히 상냥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커다랗고 짙은 파란색 눈은 꿈을 꾸는 듯 슬퍼 보였다. 우나는 월터 블라이드를 좋아했지만 그 마음을 속으로만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어 릴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릴라는 우나의 마음을 동정하고 이해했으며 월터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페이스보다 우나를 더 좋아했다. 페이스는 우나보다 훨씬 예쁘고 성격도 대범해 함께 있는 여자들이 모두 빛을 잃게 만들어버렸다. 릴라는 페이스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릴라는 매우 행복했다. 친구들과 함께 가문비나무들과 전나무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어둑하고 반짝이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주변은 나무들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로 가득했다. 서쪽 언덕으로는 석양빛을 받은 목장이 보였고, 바로 앞으로는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항구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져 꿈에 젖은 음조가 희미한 자수정 빛 뾰족탑 끝에서 사라질 듯 맴돌았다. 저 너머 석양빛을 받은 바다는 은빛을 띤 푸른빛으로 빛났고 모든 것이 찬란하기만 했다. 맑은 공기에는 바다의 짠 내음이 배었고, 전나무 향기에,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릴라는 삶을 사랑했다. 그 활짝 피운 꽃송이 같고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릴라는 퍼져가는 음악소리를 사랑했고, 와글와글 즐거운 대화가 좋았다. 이 은빛과 그림자 진 길을 끝없이 걷고 싶었다. 릴라는 지금 태어나 처음으로 파티에 가는 길이고,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낼 것이다. 세상에 걱정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주근깨나 너무 긴 다리도 문제가 안 되었다. 자기에게 아무도 춤을 신청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외에는 아무 걱정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열다섯 살 예쁜 소녀라는 사실이 그저 멋지고 만족스러웠다. 릴라는 기쁨에 겨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날카롭게 귀를 찔러오는 소리가 있었다. 젬이 페이스와 나누고 있는 대화 중 발칸 전쟁 등에관한 이야기였다.
“그 의사는 다리를 잃었대. 두 다리가 모두 못 쓰게 되어버린 채로 들판에 홀로 남겨져 죽어가고 있었대. 그런데도 그 의사는 자기 주변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기어 다니면서 일을 했대. 자기 자신은 전혀 돌보지 않고 말이야. 바스러져 버린 자기 다리는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했던 거지. 사람들이 그 의사를 발견했을 때 그 의사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꽉 쥐여 있더래. 그렇게 부상자의 출혈을 멈추게 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거지. 대단한 영웅 아니야, 페이스?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어.”
젬과 페이스가 나누는 얘기가 이제는 들리지 않게 멀어졌다. 거트루드 올리버가 갑자기 몸을 떨었다. 릴라가 미스 올리버의 팔을 꼭 붙들었다.
“너무 끔찍한 이야기죠, 올리버 선생님? 왜 젬 오빠는 오늘 밤처럼 즐거운 날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러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왔잖아요.”
“넌 그 얘기가 끔찍하게 들리니, 릴라? 난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져. 그 의사의 행동은 바로 신의 행동 같아. 인간이 자기희생이라는 이상에 따른 것이지. 나도 내 몸이 왜 떨리는지 모르겠어. 오늘 저녁은 춥지도 않은데. 아마도 누군가가 어둡고 별빛이 반짝이는 내 무덤이 될 곳을 걷고 있어서가 아닐까. 미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거야.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래. 있잖아, 릴라. 난 밤이 되면 언제나 시골에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밤의 매혹적인 면을 느끼게 되거든. 시골은 모든 밤이 다 아름다워. 심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조차도. 나는 옛날부터 이 정겨운 바닷가에 요란하게 폭풍우가 몰아닥치는 밤이 좋았어. 그런 밤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느껴져.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청춘과 꿈나라의 밤 같거든.”
“저도 제 자신이 그 한 부분인 듯한 기분이 들어요.”
릴라가 말했다.
“아, 그렇고말고. 너는 아직 어려서 완전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자, 우리 ‘꿈의 집’에 다 왔다. 올여름엔 여기도 쓸쓸해 보이는구나. 포드네는 오지 않았니?”
“포드 아저씨, 아주머니랑 퍼시스는 오지 않았어요. 케네스 오빠는 왔지만 항구 건넛마을 어머니 친척집에 머물구요. 올여름에는 우리도 케네스 오빠를 자주 못 봤어요. 다리를 좀 절거든요. 그래서 많이 돌아다니지 못해요.”
“다리를 절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작년 가을에 축구 경기를 하다가 발목이 부러졌대요. 그래서 겨울 내내 집에 틀어박혀 지냈대요.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다리를 좀 절지만 이젠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머지않아 완쾌될 거래요. ‘잉글사이드’에도 두 번밖에는 오지 않았어요.”
메리 밴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에덜 리즈가 케네스에게 완전히 반해 있잖니. 에덜은 그 사람 일이라면 완전히 정신을 잃고 덤빈다니까. 지난번 항구 건넛마을 교회 기도회가 끝난 다음에도 같이 집으로 돌아갔어. 그 일 이후로 에덜은 자기가 온 세상을 다 차지한 것처럼 어찌나 뻐기고 다니는지 몰라. 케네스 포드 같은 토론토 남자가 에덜 같은 시골 아가씨를 생각이나 할라고!”
릴라는 얼굴을 붉혔다. 케네스 포드가 에덜 리즈와 함께 열두 번을 집으로 갔더라도 상관없다. 정말로 상관없다! 그 사람이 한 일은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케네스는 릴라보다 나이도 더 많다. 낸과 다이 그리고 페이스랑 같은 나이다. 릴라는 아이라고 무시한다. 놀릴 때 말고는 릴라가 옆에 있어도 알아채지도 못한다. 더욱이 릴라는 에덜 리즈를 굉장히 싫어했고, 에덜 리즈도 릴라를 미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지개 골짜기’ 시절 월터가 악명을 떨치도록 댄 리즈를 심하게 때려눕힌 뒤로 줄곧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덜이 시골 아가씨라고 해서 왜 케네스 포드에게 하찮게 여겨져야 한단 말인가. 메리 밴스는 소문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머릿속에 온통 ‘누가 누구와 함께 집에 돌아갔다.’는 둥의 얘기밖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꿈의 집’ 아래 해변에 있는 작은 선착장에 배가 두 척 정박되어 있었다. 한 척은 젬 블라이드가 맡고 다른 한 척은 조 밀그레이브가 맡기로 했다. 조는 배에 관해서라면 자신 있었는데, 그런 사실을 미란다 프라이어에게 모두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다. 두 배는 항구까지 경주를 벌였고 조의 배가 이겼다. 더 많은 배가 항구 어귀와 서쪽에서 항구를 가로질러 내려왔다. 주변이 온통 웃음소리로 넘쳤다. 머리 위로 등대 불빛이 빙빙 돌며 번쩍이는 가운데 포 윈즈 곶 위에 서있는 커다란 하얀 탑은 빛으로 넘실거렸다. 샬럿타운에 사는 등대지기의 친척이 여름 동안 등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가족이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는 포 윈즈와 글렌 세인트 메리 그리고 항구 건넛마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초대되었다.
젬의 보트가 등대 아래에서 흔들리며 멎자, 릴라는 신고 온 구두를 벗어던지고 미스 올리버의 등 뒤에 숨어 굽 높은 은빛 구두로 갈아 신었다. 등대 쪽을 흘끗 올려다보니 바위를 깎아 등대로 올라가게 만든 계단을 중국 등이 밝혀주고 있었고, 거기 젊은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릴라는 엄마가 길을 걷는 동안에는 신고 가라고 고집하던 그 투박한 신발을 신고 층계를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릴라가 웃는 얼굴로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구두가 발을 몹시 아프게 했지만 그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그랗고 하얀 볼을 붉게 물들이고 부드럽고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그림자는 전혀 없었으니까. 계단을 오르자마자 항구 건넛마을 젊은이가 춤을 청해왔고, 둘은 곧 무도회장으로 마련된 바다를 향한 정자로 들어갔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곳이었다. 천장 머리 위로 뻗친 전나무 가지에는 등불이 매달려 빛을 발했고, 저 멀리로는 바다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왼쪽으로는 모래 언덕 마루와 골짜기가 달빛을 받고 있었으며 오른쪽으로는 캄캄한 그림자와 수정 같은 작은 바다 후미가 어우러진 바위 해안이 이어져 있었다. 릴라와 파트너는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섞여 들어갔다. 릴라는 기쁨에 찬 한숨을 깊숙이 내쉬었다. 글렌 윗마을의 네드 버어는 바이올린으로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그 소리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의 피리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춤을 추게 하였다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한지! 세상 위로 내리비치는 달빛은 얼마나 하얗고 아름다운지! 이것이 바로 삶이다. 마법에 걸린 듯 매혹적인 삶. 릴라는 자기 발과 영혼에 날개가 돋은 것만 같았다.

3. 영국을 지칭하는 말.



4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다






릴라의 첫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파티 초반에는 그런 기분이었다. 춤을 신청해오는 남자가 너무 많아 어떻게 하면 모두와 공평하게 춤을 출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은빛의 굽 높은 구두는 저절로 춤추는 듯 보였다. 발끝이 죄어오고 뒤꿈치가 부르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즐거운 기분이 덜하지는 않았다. 에덜 리즈 때문에 한 10분 동안은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정자 밖으로 나가 꼭 리즈다운 비웃음을 얼굴에 띠고 릴라의 드레스 뒷자락에 구멍이 났다느니, 주름 있는 부분에 얼룩이 졌다느니 소곤거렸기 때문이었다.
릴라는 비참한 심정이 되어 얼른 임시 여자 탈의실로 쓰는 등대 방으로 뛰어 들어가 드레스를 살펴보았지만, 얼룩이라고 한 것은 풀물이 약간 든 것을 말했고 구멍은 후크가 빠져 약간 벌어진 것뿐이었다. 아이린 하워드가 빠진 호크를 채워주면서 좀 심하게 과장된 말로 칭찬해주었다. 릴라는 아이린의 칭송에 금방 기분이 우쭐해졌다.
아이린은 글렌 윗마을에 사는 열아홉 살이나 먹은 아가씨였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소녀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 짓궂은 친구들 말에 따르면 그래야 경쟁 상대없이 자기가 여왕처럼 뽐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릴라는 아이린이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했고, 자기를 감싸주어서 더욱 좋은 인상을 받았다. 아이린은 아름답고 멋진데다가 노래도 잘 불렀다. 해마다 겨울이면 샬럿타운에 가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멋진 옷을 보내주는 몬트리올에 사는 고모도 있었다. 아이린은 슬픈 사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신비로운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릴라는 아이린의 칭송까지 들어 그날 밤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릴라는 기쁜 마음으로 정자로 돌아가 한동안 등불 빛을 받으며 입구 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한순간 틈이 생기면서 저쪽에 케네스 포드가 서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순간 릴라의 심장박동이 한 번씩 걸러뛰었다. 그것이 생리학상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릴라는 그렇게 느꼈다. 그 사람도 여기 왔구나. 케네스는 여기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다고 섭섭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릴라를 보았을까? 릴라를 알아보았을까? 알아보았다고 해도 릴라에게 춤을 신청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는 릴라를 단지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다. 바로 3주 전에 ‘잉글사이드’에 왔을 때도 릴라를 ‘거미’라고 불렀다. 그 일로 릴라는 2층으로 올라가 케네스를 원망하며 울었다. 그러나 케네스가 정자 가장자리를 빙 돌아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을 때 릴라의 심장은 다시 한 번씩 걸러뛰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걸까? 나를 찾아서? 나에게? 그렇다. 그가 내게로 오고 있다.’
이제 케네스는 릴라가 있는 곳으로 와서 바로 곁에 서 있다! 릴라를 찾고 있었다. 그는 잿빛 눈에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띠고 릴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전과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상대를 찾지 못한 남자들은 정자에서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나려 하는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케네스는 키가 크고 무척 잘생긴 청년이었다. 거기다 자연스럽고 기품 있는 그의 말과 행동은 다른 젊은이들을 딱딱하고 억지스러워 보이게 했다. 케네스는 머리가 좋다고들 했으며, 먼 도시에 살면서 일류 대학에 다닌다는 매력이 온몸에 감돌고 있었다. 여자를 좀 울리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것은 케네스가 어떤 아가씨든지 모두 반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웃음소리와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아가씨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태도가 또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다. 상대방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는 폼이 꼭 자기가 평생 듣기를 기다려온 말이나 된다는 듯했으니까.
“릴라, 나의 릴라 아니야?”
케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네, 그네요.”
대답한 순간 릴라는 등대의 바위에서 거꾸로 몸을 내던지든지, 아니면 자기를 비웃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어렸을 때 혀 짧은 소리를 했지만 이제는 그 버릇이 완전히 없어졌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할 때면 그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거의 1년이나 혀 짧은 소리를 하지 않았건만,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그런 소리가 나와 버릴 게 뭐람. 케네스에게 완전히 숙녀답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아기처럼 혀 짧은 소리나 내다니! 정말이지 끔찍한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엉엉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엉엉 울며 케네스따위는 저리로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케네스 따위는 절대로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먼지와 재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그가 ‘릴라, 나의 릴라’라고 불러주었다. 여태까지는 눈에 띄기만 하면 ‘거미’, ‘아가’, ‘고양이’라고 불렀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월터가 붙인 애칭을 케네스가 써도 조금도 싫지 않았다. 낮은 저음으로 달래는 듯 부르는 그 소리가 너무 감미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나의’란 말을 특히 강조해 말했다. 그런 바보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멋있었을 텐데. 릴라는 케네스 포드의 눈에 비웃음이나 들어 있지 않을까 두려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릴라의 기다랗고 까만 속눈과 진하고 부드러운 눈썹은 꿈꾸는 듯이 보여서 아주 사랑스럽고 마음을 자극하는 효과를 냈다. 케네스는 릴라가 ‘잉글사이드’ 자매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숙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릴라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 귀엽고 꿈꾸는 듯하며 무엇이라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고 싶었다. 릴라는 분명 이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와 춤출래?”
릴라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했지?
“네.” 
릴라는 대답했다. 절대로 혀 짧은 소리를 내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너무 굳어 이번에는 대답이 아주 무뚝뚝하게 들렸다. 그러자 또다시 심정이 사나워졌다. 내가 그 질문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네’라는 소리가 너무 대담하고 급하게 튀어나와 버렸어. 케네스 오빠가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난 내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끔찍한 일만 일어나는 거야?

케네스는 릴라를 춤추는 사람들 속으로 이끌었다.
“이 발목으로도 적어도 한 번은 춤을 출 수 있을 거야.”
케네스가 말했다.
“발목은 좀 어때요?”
릴라가 물었다. 할 말이 그것밖에는 없나? 케네스가 발목은 좀 어떠냐는 질문을 무척 지겨워한다는 걸 릴라도 알고 있었다. 지난번 ‘잉글사이드’에 왔을 때 그가 다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 가슴에다 ‘내 발목은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재미없는 질문을 하고 말다니.
케네스는 정말로 그 질문이 지겨웠다. 하지만 윗입술 위가 쏙 들어간 것이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입술을 가진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니 전혀 지겹지 않았다. 케네스는 아주 친절하게 발목은 잘 낫고 있고 오래 걷거나 너무 오래 서 있지만 않으면 별로 힘든 것도 없다고 대답해주었다.
“내 발목은 잘 회복되어가고 있어. 하지만 이번 가을 축구 경기에는 나가지 못할 것 같아.”
둘은 같이 춤추었고 릴라는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는 것을 알았다. 춤을 춘 다음 둘은 바위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작은 배가 있어 모래톱을 향해 달밤의 해협을 배를 저어 건넜다. 둘은 케네스의 발목이 아프다고 아우성칠 때까지 모래톱을 걷다 모래 언덕 사이에 앉았다. 케네스는 낸과 다이에게 이야기할 때와 똑같은 투로 릴라에게 말을 건넸다. 릴라는 스스로도 까닭은 알 수 없는 수줍음에 짓눌려 말을 많이 할 수 없었다. 릴라는 그가 자기를 바보 같다고 생각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다 근사하기만 했다. 아름답게 달빛이 빛나는 밤이었고 바다는 반짝였으며 아주 작은 파도는 쉴 새 없이 모래 해변에 와서 부딪혔다. 밤바람은 모래 언덕 마루에 난 풀 사이로 시원하고 상쾌하게 불어왔고, 바다에서는 달콤한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인어들을 위해 달빛이 연주하는 즐거운 음악소리!”
케네스는 월터가 지은 시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렸다.
이렇게 매혹적인 소리들과 풍경 속에 그와 단둘이 앉아 있다니! 아, 발만 아프지 않았으면! 올리버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처럼 말이 잘 나와 주면 얼마나 좋아. 아니, 다른 남자아이들과 이야기할 때처럼만 되어도 좋을 텐데. 그러나 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케네스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가 간간이 아주 간단하고 평범한 말 몇 마디만 나직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아마도 릴라의 꿈꾸는 듯한 눈과 귀여운 입술과 미끈한 목이 대신 멋지게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케네스는 돌아가자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둘이 마지못해 일어서 무도회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식사들을 하고 있었다.
케네스는 창문 가까이에 릴라의 자리를 잡아주고 릴라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는 동안 자기는 릴라 옆의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릴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첫 파티가 참으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방 안 여기저기에서 농담과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름다운 젊은 눈들이 반짝였다. 정자 밖에서는 바이올린 음악소리와 춤추는 사람들의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문 쪽에서 가벼운 웅성거림이 들렸다. 젊은 남자 하나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와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얼굴의 그는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잭 엘리엇이었다. 맥길 의과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사교 모임에는 관심이 없는 조용한 젊은이였다. 이번 파티에 초대는 받았으나 그날 샬럿타운에 가야 할 일이 있어서 파티에 나타나지 않을 줄 알고들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접힌 신문이 들려 있었다.
구석 쪽에서 그의 모습을 본 거트루드 올리버가 다시 몸을 떨었다. 미스 올리버도 샬럿타운에 사는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 온 대부분의 손님들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또 자기는 여기 사람도 아니어서 소외감이 느껴졌지만 이 총명한 여자가 옆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남자처럼 정열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기대 이상으로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며 거트루드 올리버는 아까 전의 불행한 기분을 얼마쯤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잭 엘리엇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일까? 옛 시 한 구절이 마음에 번쩍 떠올랐다.

‘밤 시간 환락의 소리가 들려오네……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통렬한 소리가 장례의 종소리처럼 울려옴을.’4)

왜 지금 이 시 구절이 생각났을까? 왜 잭 엘리엇은 입을 열지 않는 것일까? 할 말이 무엇일까? 왜 저기 서서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노려만 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인지 물어봐요, 어서 물어봐요.”

거트루드 올리버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엘런 데일리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방 안은 별안간 고요에 휩싸였다. 밖에서 들려오던 바이올린 소리도 잠시 쉬고 있는 듯 멈추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저 멀리로 나지막한 바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이미 대서양으로 불어 닥쳐온 폭풍의 조짐이었다. 바위 쪽에서 한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나 갑자기 조용해진 세상에 놀란 듯 곧 사라져버렸다.
“영국이 오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아까 내가 시내에서 돌아오려 할 때 전보로 들어온 소식이에요.”
잭 엘리엇이 천천히 말했다.
“세상에나! 내 꿈이 맞았어. 내 꿈에서 본 첫 파도가 밀려온 거야.”
거트루드 올리버는 나직이 혼자 중얼거리고는 엘런 데일리 쪽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이 전쟁은 아마겟돈이 되겠지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말했다.
“그럴까 봐 걱정입니다.”
엘런 데일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 주위에서 일제히 외침 소리가 일었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놀라움과 무책임한 흥미를 느끼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이 소식이 지닌 중대한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것이 자기네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윽고 다시 춤이 시작되었고 즐거운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미스 올리버와 엘런 데일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 소식을 이야기했다. 월터 블라이드는 얼굴이 새파래져 방을 나가다 바위층계를 올라오는 젬을 만났다.
“소식 들었어, 형?”
“그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드디어 왔구나. 만세! 난 영국이 궁지에 빠진 프랑스를 모른 척하지 않을 줄 알았어. 조시아 선장에게 국기를 내걸으라고 했는데 내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적절한 일이래. 잭이 그러는데 내일 군 지원자를 모집할 거란다.”
“별일도 아닌 걸 갖고 왜 야단법석들이야.”
젬이 가버리자 메리 밴스는 경멸하듯 말했다.
메리는 밀러 더글러스와 함께 갯가재 어망 위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낭만적이지도 않고 불편했지만 그 위에 앉은 메리와 밀러는 더없이 행복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밀러 더글러스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별로 배운 것은 없는 청년이었지만, 메리 밴스의 혀야말로 흔치 않은 재능을 타고난 혀이고 메리 밴스의 하얀 눈은 최고로 밝은 별처럼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둘 다 왜 젬 블라이드가 등대에 국기를 올려야 한다고 했는지는 전혀 몰랐다.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우리가 걱정할 일이 전혀 아니잖아.”
월터가 메리를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예언자의 기운이 찾아든 눈빛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캐나다의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쟁을 느끼게 될 거야. 메리, 너도 느끼게 될 거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전쟁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거야. 피리 부는 사나이가 왔어. 그가 피리를 불어댈 거야. 거부할 수 없는 그 두려운 피리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을 때까지 세계 구석구석 피리를 불며 다닐 거야. 죽음의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는 여러 해가 걸릴 거야. 그동안 수백만 명의 가슴이 아픔으로 부서질 거야.”
월터가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월터의 입을 빌려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나, 놀래라!”
메리는 언제나 할 말이 없으면 그러고 말았다. 월터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몹시 불편했다. 월터 블라이드는 언제나 이상한 말만 했다. 월터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는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던 때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작스럽게 그 이야기는 왜 또다시 꺼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메리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하찮은 일에는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곳으로 온 하비 크로퍼드가 말했다.
“네 말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니, 월터? 이 전쟁은 몇 년씩이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한두 달이면 끝날 거야. 영국이 순식간에 독일을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버릴 거야.”
“독일이 20년이나 준비한 전쟁이 단 몇 주 만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이 전쟁은 발칸 반도 구석에서 벌어지던 작은 싸움이 아니야, 하비. 이것은 죽음의 그림자야. 만일 독일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캐나다는 독일의 식민지가 되는 거야.”
하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천만에, 그리 간단하게는 되지 않아. 첫째로, 그러려면 영국 해군을 쳐부숴야 해. 그리고 여기 있는 밀러와 내가 난동을 좀 부릴걸. 안 그래, 밀러? 독일이 이 나라까지 손을 뻗치지는 못할 거라고. 안 그래?”
하비는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아이들은 정말 미치광이 같은 말만 해.”
메리 밴스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메리는 얼른 일어서서 밀러를 잡아끌고 바위 해안가 쪽으로 내려갔다.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기회를 월터의 피리 부는 사나이니 독일이니 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망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월터는 아름다운 포 윈즈를 향해 혼자 바위 계단에 서 있었으나 생각에 잠긴 눈은 포 윈즈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잭 엘리엇의 등장 이후로 릴라도 그날 밤의 가장 멋진 순간은 이미 깨져버렸다고 느꼈다. 케네스가 더 이상은 자기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릴라도 느낄 수 있었다. 릴라는 갑자기 외롭고 슬펐다. 케네스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 전보다 더 나쁘다는 심정이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뭔가 기쁜 일이 있어 막 황홀한 기분에 빠져들었는데 그러자마자 그 일이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것.
릴라는 아까 집을 나왔을 때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럴지도 몰랐다. 정말 그럴 것이다. 젊은이가 느끼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젊은이는 아직 ‘인생’을 몰라서 그 고통이 크나크다.
그나저나 ‘이 고통이 지나갈까?’ 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리고 싶었다.
“피곤하니?”

케네스가 상냥하기는 하나 건성으로 물었다. 그래, 정말로 건성으로. 릴라는 케네스가 자기를 정말로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라고 느꼈다.
“케네스 오빠, 이 전쟁이 우리 캐나다 사람에게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릴라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중대한 문제? 물론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안은 사람들에게는 중대한 문제지. 내게는 아니지만. 이 괘씸한 복사뼈 덕분에 말이야. 운도 없지.”
“왜 우리가 영국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는데? 영국은 혼자서도 잘 싸울 수 있잖아.”
릴라가 외쳤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영연방 국가 중의 하나잖아. 이것은 가족 문제 같은 거라고.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해. 우리가 나서서 돕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버릴까 봐 그게 오히려 걱정이지.”
“오빠도 발목만 다치지 않았으면 그 전쟁에 나가고 싶은 거야?”
릴라는 놀랐다는 듯 물었다.
“물론이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자원할 거야. 젬도 물론 갈 거고. 그건 내가 장담해. 월터는 전쟁에 나갈 만큼 튼튼하지가 못해. 제리 메러디스도 나갈 거야. 그런데 난 올해엔 축구 경기에도 나가지 못해!”
릴라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젬이랑 제리도! 말도 안 돼! 왜 아빠랑 메러디스 목사님은 말리지 않는 거야. 둘 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왜 잭엘리엇은 그 끔찍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지 않고 다 말해버린 거야.
마크 워런이 다가와 릴라에게 춤을 청했다. 릴라는 자기가 자리를 뜨든 그곳에 머무르든 케네스가 마음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크를 따라갔다. 아까 한 시간 전만 해도 모래톱에서 케네스는 오직 릴라만이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인 듯 릴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릴라는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케네스의 머릿속은 온통 이 나라의 운명이 달린 피비린내 나는 전쟁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 여자들은 나설 수 없다. 여자는 집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비참한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다.
케네스는 갈 수 없다. 그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월터도 갈 수 없다. 천만다행한 일 아닌가. 그리고 젬과 제리도 더 분별력 있게 생각을 고쳐먹을 것이다. 릴라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즐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이 춤추고 있는 마크 워런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모르겠다. 춤추는 동작이 그렇게 엉망일 수 없다! 남자들은 왜 춤추는 법부터 배우고 춤추러 오지 않는담. 이런, 또 나를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만들었잖아! 내가 다시 마크 워런과 춤을 추나 봐라!
릴라는 다른 사람들과도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제 춤을 추어도 더 이상 신나지 않았다. 그리고 발이 너무 심하게 아팠다. 케네스는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릴라의 첫 번째 파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했건만! 머리도 아파져 왔다. 발가락은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릴라는 아직 한창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항구 건넛마을 친구들과 바위 해안가로 내려갔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피곤한 몸을 쉬고 싶었다. 다들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릴라는 대화에 끼지 않고 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누군가 항구 건넛마을로 가는 배가 지금 출발한다고 부르는 소리가 반가웠다. 등대 쪽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자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은 이제 몇 쌍 되지 않았다. 릴라는 글렌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등대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도 아무도 없었다. 릴라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바위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는 항구 건넛마을 젊은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아래에 배들이 보였다. 젬의 배는 어디 있지? 조의 배는?
“어머나, 릴라 블라이드, 너 여태 여기 있었니? 벌써 몇 시간 전에 집으로 간 줄 알았는데.”
메리 밴스가 스카프를 휘날리며 밀러 더글러스가 모는 배를 타고 해협을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릴라가 물었다.
“세상에, 다들 갔지. 젬은 한 시간 전에 갔고, 우나도 머리가 아프다면서 갔어. 다른 사람들도 모두 15분 전에 조와 함께 갔고. 저것 봐. 다들 자작나무 곶을 돌아가고 있잖아. 나는 파도가 거칠어서 뱃멀미가 날까 봐 가지 않았어. 난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도 상관없어. 2.5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니까. 난 너도 간 줄 알았어. 너 어디 있었니?”
“저기 바위 아래 젬 크로퍼드랑 몰리 크로퍼드랑 같이 있었어. 왜 다들 나를 찾지 않았지?”
“찾았지. 그렇지만 네가 보이지 않아서 다른 배로 간 줄 알았어. 걱정 마. 오늘 밤에는 나와 함께 자면 되니까. ‘잉글사이드’에는 우리 집에 있다고 전화로 알리자.”

릴라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이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메리 밴스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아서 눈을 힘주어 깜빡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럴 수가! 내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거야. 월터조차도.
그때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났다.
“내 신발. 내 신발을 배에 두고 왔어.”
릴라가 외쳤다.
“어머나, 기가 막혀. 너처럼 생각 없는 아이는 본 일이 없다. 헤이젤 루이슨한테 한 켤레 빌려달라고 하지 그러니?”
“싫어. 차라리 맨발로 걸을 테야.”
헤이젤을 싫어하는 릴라는 소리쳤다.
“꼭 너다운 짓이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자초하겠다고? 이 일로 좀 더 조심성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겠지. 자, 걷자.”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지만 마차 바큇자국이 깊이 파인 자갈투성이 길을 은빛 화려한 프랑스식 하이힐을 신고 걷기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릴라는 항구 길에 이를 때까지 절룩거리고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걸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아름답던 은빛 구두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릴라는 구두와 소중한 실크 스타킹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기분 좋은 일은 못 되었다. 릴라의 발은 몹시 연약해서 길가에 널린 자갈과 마차 바큇자국이 발을 아프게 했다. 이미 물집이 잡힌 발뒤꿈치가 벗겨져 욱신거렸다. 하지만 모두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모욕감보다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꼴이 아주 꼴불견일 거야!
만일 케네스 포드가 돌에 발이 짓물러 절름거리며 걷고 있는 내 꼴을 보게 된다면! 그 아름다웠던 파티가 이렇게 끔찍한 꼴로 끝을 맺다니! 릴라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도 릴라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이슬 젖은 길을 맨발로 걷다가 감기에라도 걸려버린다면 모두들 후회하겠지. 릴라는 슬쩍 스카프로 눈물을 닦았다. 손수건도 구두와 함께 사라져버렸으니 다른 수가 있나! 코는 왜 이렇게 훌쩍훌쩍 나오는지. 모든 일이 점점 더 나빠져만 간다!
“너 감기에 걸렸구나. 바람 부는 바위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으니 감기에 안 걸릴 수 있어. 네 엄마가 널 다시는 내보내지 않을 거다. 내 장담해. 파티가 정말 멋지긴 했어. 루이슨 집안사람은 무슨 일이건 멋지게 해내는 방법을 안단 말이야. 그건 확실해. 그렇지만 난 헤이젤 루이슨을 좋아하지 않아. 세상에나, 네가 케네스 포드와 춤추는 걸 보고는 헤이젤의 얼굴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하던지. 그리고 그 말괄량이 에덜 리즈도 마찬가지였어. 케네스는 어쩌면 그렇게 바람둥인지 몰라!”
“난 케네스가 바람둥이라고 생각 안 해.”
릴라는 격렬하게 두 번 코를 훌쩍이고는 도전적인 태도로 외쳤다.
“너도 나만 한 나이가 되면 남자를 더 잘 알게 될 거야. 남자가 하는 말을 모두 믿어서는 안 돼. 케네스 포드가 손수건 한 장만 달랑 떨어뜨리면 널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마. 좀 더 배짱이 있어야지, 얘.”

메리가 잘난 체하며 말했다.
메리 밴스가 이렇게 뻐기며 충고하는 것을 참고 들어주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돌투성이 길을 발뒤꿈치는 까지고 신발도 없이 걷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손수건 없이 우는 것도, 또 울음을 그칠 수 없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난 케네스…….” 훌쩍. “포드의 일 따윈…….” 훌쩍훌쩍. “조금도 생각하지.” 훌쩍. “않아.”
릴라가 외쳤다.
“이건 화낼 일이 아니야, 얘.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은 귀담아들을 줄도 알아야지. 나는 네가 케네스와 함께 모래톱으로 넘어가서 오랫동안 같이 있는 것을 다 보았다고. 네 엄마가 이 일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걸.”
“난 이 일을 우리 엄마랑 올리버 선생님 그리고 월터 오빠에게도 다 말할 거야.”
릴라는 코를 훌쩍이느라 숨을 몰아쉬었다.
“메리 언니도 밀러 더글러스와 함께 그 갯가재 어망 위에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잖아! 그 일이야말로 엘리엇 아주머니가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
“어머나, 난 너랑 싸우지 않을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른이 되기까지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
갑자기 메리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릴라는 울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를 포기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케네스와 모래톱에서 보낸 그 아름답고 달빛에 어린 시간까지도 통속화되고 싸구려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낭만적이고 꿈결 같았는데! 릴라는 메리 밴스를 증오했다.
“왜 그러니? 왜 우는 거지?”
메리가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해 물었다.
“발이 아파서 못 견디겠어.”
흐느껴 울면서도 릴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발이 아파서 운다는 편이 누군가로부터 놀림당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서 운다고 하는 것보다야 체면이 서는 일일 것이다.
“그럴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엘리엇 아주머니의 잘 정리된 식료품 저장실 어디에 거위 기름 항아리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어떤 사치스러운 콜드크림보다도 그게 더 효과가 있어. 자기 전에 네 발뒤꿈치에 발라줄게.”
메리는 친절하게 말했다.
발뒤꿈치에 거위 기름이라니! 그것이 내 첫 파티, 첫 연인, 그리고 첫 달밤의 로맨스의 끝이란 말인가! 릴라는 아무 소용도 없이 눈물만 흘리는 일에도 진력이 나서 울기를 그만두고 메리 밴스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밖에는 폭풍우의 날개를 타고 잿빛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조시아 선장은 약속한 대로 다음 날 포 윈즈 등대에 국기를 달았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국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4. 바이런의 장편 서사시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 제3권에 나오는 시.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전 영국 장교들이 춤추고 있는 장면을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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