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5~6

나단비 | 2024.04.17 15:02:46 댓글: 0 조회: 65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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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소리






릴라는 눈부시게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잉글사이드’ 뒤편 단풍나무 숲을 달려 ‘무지개 골짜기’ 자기만의 구석지를 찾았다. 양치류 사이에 놓인 초록 이끼 낀 돌 위에 앉자 손으로 턱을 바치고 8월 오후의 눈부신 푸른 하늘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너무나 푸르고, 너무나 평화스럽고, 너무나 변한 것이 없었다. 예전과 하나도 다름없는 늦은 여름의 부드러워진 날이 골짜기 위로 둥글게 드리워져 있었다.
릴라는 혼자 있고 싶었다.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들어와 버린 탓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혼란스러울 만큼 당혹스러웠다. 자기가 엿새 전, 겨우 엿새 전에 포 윈즈 등대에서 춤추었던 그 릴라 블라이드가 맞는가? 엿새 전의 그 릴라와 같은 사람인가? 그 엿새 동안이 지금까지 살아온 전 생애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으로 살아온 세월을 헤아릴 수 있다면 그 말은 진실이었다. 댄스파티가 있던 날 저녁에 느꼈던 희망과 두려움, 승리와 모욕감이 지금은 옛날이야기처럼만 느껴졌다. 그날 모두들 자기를 두고 가버려 메리 밴스와 함께 집으로 걸어와야 했던 일로 정말 자기가 눈물을 흘렸던가?

아, 릴라는 슬프디슬픈 심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릴라에게는 그런 일이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바보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이젠 정말 울 만한 이유가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울어서는 안 된다. 엄마가 창백한 입술에 눈에는 슬픔을 가득 담고 바라보며 뭐라고 말했던가? 릴라는 엄마의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여자들이 용기를 잃어버린다면, 우리 남자들이 어떻게 두려움 없이 전투에 나설 수 있겠니?”
그렇다. 그래야 한다. 담대해야 한다. 엄마처럼. 그리고 낸 언니랑 페이스 언니처럼. 너무 울어서 눈이 빨개진 페이스 언니는 자기도 남자였다면 전쟁터에 나갔을 거라고 했다. 눈이 이렇게 아프고, 목이 이렇게 탈 것만 같을 때는 잠시 ‘무지개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다 돌아가면 된다.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 더 이상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릴라는 이제 이렇게 힘든 일도 직면해야 하는 어른, 여자였다. 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혼자 떨어져 나와 있는 것도 좋다. 아무도 자기 모습을 볼 수 없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다른 사람이 겁쟁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양치류에서 나는 냄새, 숲의 향기가 얼마나 정겨운 정취를 느끼게 하는지! 커다란 깃털 같은 전나무 가지는 얼마나 부드럽게 흔들리며 소곤대는지! 산들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연인 나무’에 걸린 종에서 울리는 딸랑딸랑 종소리는 얼마나 요정 소리 같은지. 저 언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수많은 제단에 향을 피워놓은 것처럼 보랏빛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나무 잎사귀들이 얼마나 하얗게 보이는지! 숲이 온통 하얀 은빛 꽃으로 가득 차버린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릴라가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온 그대로였다. 그러나 세상은 완전히 표정을 바꾸어버렸다.

‘극적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나빴어! 다시 한 번 다정하고, 단조롭고, 유쾌한 날들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다시는 불평하지 않을 테야.’
릴라는 생각했다.
릴라의 세상은 바로 그 파티 다음 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가족들이 ‘잉글사이드’에서 점심을 먹으며 전쟁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전화벨이 울렸다. 샬럿타운에서 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젬이 통화를 끝내자 전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얼굴은 흥분으로 붉어지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젬이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엄마와 낸과 다이의 얼굴은 창백해져 버렸다. 릴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생 처음으로 자기의 심장 고동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인가가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대요, 아버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원했대요. 저도 오늘 밤에 가서 지원할 겁니다.”
젬이 말했다.
“오, 젬, 아가야. 오, 안 돼, 안 돼. 우리 젬.”
블라이드 부인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며 외쳤다. 부인은 젬을 이렇게 부른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전 가야 해요, 어머니. 그렇죠, 아버지?”
젬이 말했다.
블라이드 의사가 일어섰다.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래, 젬.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라.”

블라이드 부인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월터는 멍하니 자기 접시만 바라보았고, 낸과 다이는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셜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비가 되어버린 듯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수잔의 접시에는 반쯤 먹은 파이가 놓여 있었다. 결국 수잔은 그 먹다 남은 파이를 그대로 남겨놓았고 그것이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잔은 먹기 시작한 것을 끝내지 않으면 문명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범하는 것으로 믿었다. 고의적인 낭비이고,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젬은 다시 전화기로 향했다.
“목사관에 전화해야 해요. 제리도 가고 싶어 할 거예요.”
“아!” 
순간 낸이 누군가 칼이라도 들고 덤빈 것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방에서 달려 나가버렸다. 다이가 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릴라는 위로를 바라는 심정으로 월터를 바라보았지만, 월터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 누구와도 자기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좋아, 난 너도 갈 거라고 생각했어. 오늘 저녁 기차역에서 7시에 만나자. 그럼 이따가 봐.”
젬은 마치 소풍 갈 계획이라도 상의하듯이 말했다.
“사모님, 저 좀 깨워주실래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 맞죠? 아니, 제가 지금 깬 건가요? 저 아이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저 아이가 정말로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가려고 한단 말인가요? 그 나라가 젬과 같은 아이를 원하는 것 맞아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사모님이나 의사 선생님이 이 일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수잔이 말했다.
“우리는 젬을 말릴 수 없어요. 오, 길버트!”
블라이드 부인이 목이 메어 말했다.
블라이드 의사가 아내 뒤로 와서 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슬픔이 담긴 부드러운 잿빛 눈으로 앤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호소력 짙은 고통이 담긴 눈빛은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 ‘꿈의 집’에서 조이스가 죽었던 날이었다.
“젬을 잡아두겠어, 앤? 다른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는데, 그것이 그 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이기적이고 대의를 모르는 소인배로 그 애를 당신 곁에 잡아두겠어?”
“아니, 아니! 하지만 젬은 우리의 첫 아들이에요. 아직 어리다고요, 길버트. 나중에는 용기를 낼 수 있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에요. 시간을 좀 줘요.”
블라이드 의사와 부인이 방을 나갔다. 젬도 나갔다. 월터도 나갔다. 셜리도 나가려고 일어섰다. 릴라와 수잔은 텅 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릴라는 아직 울지 않고 있었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수잔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잔이 우는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오, 아줌마, 젬 오빠가 정말 떠나는 거예요?”
릴라가 물었다.
“이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고.”

수잔이 말했다.
수잔이 눈물을 훔치고 마음을 다독이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섰다.
“가서 설거지를 해야겠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대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자, 울지 마라. 젬은 갈 거야. 아마 가게 되겠지. 하지만 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니까. 젬이 거기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버릴 거라고. 우리 마음 굳게 먹고 가여운 네 엄마 걱정시킬 일은 하지 말자.”
“오늘 <엔터프라이즈> 신문에 키치너 경5)이 전쟁이 3년 정도 지속될 거라고 말했다고 나와 있었어요.”
릴라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키치너 경이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끔 잘못 생각하는 일도 있겠지. 의사 선생님 말로는 전쟁이 두세 달이면 끝날 거라고 했어. 나는 무슨 경이라는 사람의 의견 못지않게 네 아버지 생각도 옳다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지금 내가 할 일은 집을 청소하는 거다. 나는 울지 않을 거야. 그건 시간 낭비고,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야.”
수잔은 침착하게 말했다.
젬과 제리는 그날 밤 샬럿타운으로 갔다가 이틀 뒤에 카키색 군복 차림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글렌 마을은 온통 열광했다. ‘잉글사이드’ 생활은 갑자기 팽팽하게 긴장되고 바쁘게 돌아갔다. 블라이드 부인과 낸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의연하게 움직였다. 블라이드 부인은 미스 코넬리아와 함께 이미 적십자 조직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블라이드 의사와 메러디스 목사는 애국협회를 만들려고 남자들을 동원했다. 릴라도 처음의 충격이 가시자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 일에 따르는 낭만적인 면을 보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젬은 분명 멋져 보였다. 캐나다 젊은이들이 조국의 부름에 이처럼 두려움 없이 재빨리 응한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릴라는 나라의 요구에 응한 오빠가 없는 소녀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다녔다. 릴라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남자였다면 나 역시도 틀림없이 나섰을 일에 그들은 나선 것이다.

릴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자기가 남자였다면 분명 자기도 전쟁터로 나갔을 것이다. 그 점은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월터 오빠가 장티푸스를 앓은 뒤로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나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릴라의 일기는 이렇게 계속되었다.

월터 오빠가 가버린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난 젬 오빠도 많이 사랑하지만 월터 오빠는 내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다. 월터 오빠가 가버린다면 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요즘 오빠는 너무나 변해버렸다. 나한테도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오빠도 전쟁터로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 속이 상해 있는 것 같다. 젬 오빠나 제리 오빠랑은 어울리지도 않는다. 젬 오빠가 군복을 입고 오던 날, 수잔 아줌마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얼굴이 뒤틀린 채로 아줌마는 ‘군복을 입으니까 정말로 남자다워 보인다, 젬.’ 하고만 말했다. 그 말에 오빠는 웃기만 했다. 젬오빠는 수잔 아줌마가 자기를 아직도 아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다 알면서도 아줌마의 말을 탓하지 않는다.
나만 빼고 모두들 바쁜 것 같다. 나한테도 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 할 일도 찾을 수 없다. 엄마랑 언니들은 온종일 바쁜데 나는 혼자 외로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 정말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엄마와 낸 언니의 웃는 얼굴이다. 마치 미소를 만들어다 붙인 듯 어색하기만 하다. 이제 엄마의 눈은 결코 웃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나도 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웃고 싶어지는 마음이 나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난 젬 오빠가 전쟁터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웃지 않고 지내기가 무척 힘들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웃더라도 예전처럼 즐거워서 웃는 것은 아니다. 웃더라도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아프다. 밤에 자다가 잠이 깼을 때가 특히 더 그렇다. 그러면 난 울어버린다. 전쟁이 몇 년이나 계속 될 거란 키치너 경의 말이 맞으면 어떻게 하나 너무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다. 그러면 젬 오빠는, 아니 그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무섭다.
저번 날에 낸 언니가 우리에게 이제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난 무척 화가 났다. 왜 모든 일이 변해버렸다고 하는가? 전쟁이 끝나면 젬 오빠와 제리 오빠는 돌아올 텐데. 그러면 우리는 다시 행복하고 즐거운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요즘에는 정말이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하루 일과 중 가장 기다리는 것이 우편물 오는 때이다. 아빠가 제일 먼저 신문을 홱 잡아챈다. 전에는 아빠가 그렇게 신문을 잡아채는 일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아빠를 둘러싸고 아빠 어깨너머로 신문 표제를 읽는다. 수잔 아줌마는 신문에 쓰인 일은 한 마디도 믿지 않고, 믿을 마음도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도 늘 부엌문 앞에서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는 고개를 내저으며 들어간다. 아줌마는 언제나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젬 오빠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다. 어제는 먼데이가 손님방의 레이철 린드 할머니가 만든 사과 나뭇잎 무늬 퀼트 이불 위에서 자는 것을 보고 야단도 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에이구, 가여운 짐승, 머지않아 네 주인이 어디서 자게 될지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밖엔 모르게 되겠구나.”
수잔 아줌마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조용히 먼데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박사에게는 여전히 가차 없이 대했다. 이 고양이는 군복 입은 젬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하이드 씨로 변해버린다. 수잔 아줌마는 이 일이야말로 이 짐승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수잔 아줌마는 이상한 말을 참 잘도 하지만 좋은 사람이다. 셜리 오빠는 수잔 아줌마가 천사에다 아주 훌륭한 요리사라고 한다. 하지만 수잔 아줌마에게 혼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셜리 오빠뿐이니까.
페이스 메러디스 언니는 참으로 훌륭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난 페이스 언니가 젬 오빠와 약혼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눈빛을 반짝이며 다니기는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은 우리 엄마 얼굴처럼 굳어 있다. 만일 내게 연인이 있고 그 사람이 전쟁터에 나간다면 나도 그렇게 용감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빠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통스럽다.
메러디스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브루스 메러디스도 젬 오빠와 제리 오빠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밤새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가 항상 이야기하는 ‘케이 오브 케이(K of K)’6)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 왕 중의 왕을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고도 했다.
브루스는 정말이지 귀여운 아이다. 난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브루스만큼은 정말로 좋아한다. 난 아기들이 조금도 좋지 않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충격적인 말이라도 한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난 아기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렇다. 다른 사람이 안고 있는 깨끗하고 예쁜 아기를 바라보는 것은 괜찮지만, 내가 직접 아기들을 만져볼 마음이나 흥미 같은 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올리버 선생님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선생님처럼 정직한 사람은 본 일이 없다. 선생님은 마음에 없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갓난아기는 따분하지만 아기가 말을 할 만큼 자라면 좋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가까이 하는 것은 좀 그렇다고 했다. 엄마도 낸 언니도 다이 언니도 아기라면 정신을 못 차리게 좋아해서 내가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 파티가 있었던 날 밤 이후로 케네스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 젬 오빠가 돌아온 뒤에 저녁에 한 번 오긴 했다. 하지만 난 그날 집에 없었다. 케네스 오빠는 내 이야기를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 같다. 케네스 오빠가 내 얘기를 물었다는 말은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했으니까. 나도 케네스 오빠 소식을 묻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다 무슨 상관이람. 그때는 심각했던 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내게 중대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젬 오빠가 군대에 지원해 며칠 후면 발카르티에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 멋진 큰오빠 젬. 나는 젬 오빠가 아주 자랑스럽다.
케네스 오빠도 발목만 다치지 않았더라면 군에 지원했을 것이다. 난 이것이 하늘이 도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케네스 오빠는 외아들이다. 케네스 오빠가 떠나버리면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워하겠는가. 외아들은 군대에 갈 생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월터가 고개를 숙인 채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지고 릴라가 앉아 있는 골짜기로 걸어왔다. 릴라를 보자 월터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가려다가 다시 돌아서 릴라 쪽으로 왔다.
“릴라, 나의 릴라, 무슨 생각하고 있니?”
“모든 게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어. 심지어 오빠까지도. 오빠도 달라져 버렸어. 일주일 전만 해도 우리는 무척 행복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 날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

릴라는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
월터가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릴라의 어여쁜 손을 잡았다.
“나도 우리의 정겨운 세상이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 릴라. 그래도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지.”
“젬 오빠를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 가끔씩은 그런 기분을 잊어버리고 오빠가 자랑스러운 마음에 흥분되고 우쭐한 기분도 들지만, 그런 뒤에는 다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 같아져.”
릴라가 하소연했다.
“나는 형이 부러워.”
“젬 오빠가 부럽다고! 어머나, 월터 오빠. 설마 오빠도 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 아니, 나는 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괴로운 거야. 릴라야, 나는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무서워. 나는 겁쟁이야.”
월터는 앞쪽 짙푸른 골짜기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야, 오빠는 겁쟁이가 아니야. 누구나 다 전쟁터에 가는 것은 무서워.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르잖아.”
릴라는 분연히 소리쳤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괜찮아. 나는 죽음 자체가 무섭지는 않아. 죽음 전에 찾아올 고통이 두렵지. 죽어서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거라면 그렇게 무섭지 않아. 그렇지만 릴라, 죽어가는 과정을 생각해봐. 난 그 고통이 무서워. 너 그 심정 아니?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난도질당하거나, 장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다 떨려와. 그건 상상도 하기 싫어. 눈이 멀어버리면 다시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없잖니. 포 윈즈의 달빛도, 전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도, 바다에서 올라오는 안개도. 하지만 난 가야만 해. 난 가고 싶다고 생각해야 해.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싫어. 난 내가 너무 부끄러워. 내가 너무 수치스러워.”
월터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월터 오빠, 오빠는 갈 수 없어. 오빠는 전쟁터에 갈 만큼 튼튼하지 않아.”
월터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릴라는 너무 슬펐다.
“아니야. 지난달부터 난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다고 느껴. 검사에서도 아무 문제도 없다고 했어.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내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난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나 봐.”
월터는 마음이 너무나 쓰라렸다.
“오빠가 건강하다고 해도 가서는 안 돼. 엄마 심정이 어떻겠어? 젬 오빠 하나만으로도 엄마 마음은 찢어진다고. 오빠마저 가버리면 엄마는 견디지 못할 거야.”
릴라는 흐느끼며 말했다.
“난 가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난 전쟁터에 나가는 일이 두렵다는 얘기를 한 것뿐이야. 난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있어. 너한테 다 이야기하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볍다, 릴라.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어. 낸이나 다이도 나를 경멸할 거야. 하지만 나는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이 혐오스러워. 공포, 고통, 추함. 전쟁은 카키색 군복이나 행진과는 달라. 역사책에서 읽은 모든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밤에 잠이 깨어 있으면 그런 장면들이 내 눈앞에 아른거려. 피로 물든 전쟁터며, 불결하고 비참한 일들이. 그리고 총검이니 돌격 명령이니 그런 것도. 다른 일에는 다 맞설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은 도저히 못 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속이 다 메슥거려. 총검으로 어떻게 사람을 찌를 수가 있어.”
월터는 괴로워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난 그런 일이 생각나 너무 괴로워. 젬 형과 제리 형은 그런 일을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웃으며 독일군을 닥치는 대로 무찌르겠다는 말을 하겠어. 하지만 나는 군복 차림의 그 두 사람을 보면 미칠 것만 같아. 그 두 사람은 내가 군대에 갈 수 없는 몸이어서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지만.”
월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정말로 죽을 맛이야.”
릴라는 월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월터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몹시 기뻤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월터 오빠마저 전쟁터로 가고 싶어 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월터가 자기에게 괴로움을 모두 털어놓아 준 것도 기뻤다. 다이가 아닌 자기에게 털어놓아주었다. 이제 릴라는 쓸쓸하지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넌 나를 경멸하지 않니, 릴라, 나의 릴라?”
월터는 슬픈 눈으로 물었다. 릴라가 자기를 경멸한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다이가 자기를 경멸한다고 한 것만큼이나 가슴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월터는 이 사랑스러운 동생이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아직 어린아이다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듯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자기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 애절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오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오빠와 같은 마음일 거야. 5학년 읽기 책에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시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라고.”
“‘숭고한 사람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가 못해. 나는 그런 식으로 날 위장할 수 없어. 나는 겁쟁이야.”
“그렇지 않아. 오래전 댄 리즈와 결투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봐.”
“평생 단 한 번 용기를 낸 적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순 없어.”
“월터 오빠, 언젠가 아빠가 오빠는 신경이 너무 예민하고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지. 난 이제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오빠는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그 일을 생생하게 느끼는 거야. 그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는 사람도, 오빠한테서 그 무거운 짐을 벗겨 내주는 사람도 없이. 오직 혼자 느끼고 있는 거야. 그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2년 전에 오빠랑 젬 오빠가 모래 언덕 풀을 태우다가 손을 데었을 때도 젬 오빠가 오빠보다 두 배는 더 아프다고 야단을 피웠잖아. 이 무서운 전쟁에는 오빠가 나서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갈 사람이 있어. 그리고 전쟁이 오래 계속되지도 않을 거야.”
“나도 그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자, 저녁 먹을 시간이야, 릴라. 얼른 가서 저녁 먹어.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한 입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여기 함께 있게 해줘, 오빠.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야. 다들 모두 내가 아직 어린애라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둘은 옅은 회색 구름 사이로 저녁별이 반짝이기 시작할 때까지 단풍나무 골짜기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작은 골짜기 조용한 숲으로 향기롭고 이슬을 머금은 어둠이 깔렸다.
그날 저녁은 릴라가 평생 소중하게 기억할 추억이 되었다. 월터가 처음으로 자기를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해준 날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위로받고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월터는 처음으로 전쟁터로 가기가 두렵다는 생각이 그렇게 경멸당할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고 릴라는 오빠가 자기의 힘든 마음을 자기에게 털어놓아 주고, 자기가 그 마음을 동정하고 격려할 수 있어 기뻤다. 자기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둘이 ‘잉글사이드’ 베란다로 돌아와 보니 목사관에서 메러디스 목사님 부부가 와 있었다. 노먼 더글러스 부부도 농장에서 왔고 소피아도 어둑한 한구석에 수잔과 함께 앉아 있었다. 블라이드 부인과 낸과 다이는 없었지만 블라이드 의사는 집에 있었고, 지킬 박사도 계단 맨 위에 황금빛 위엄을 떨치고 앉아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지킬 박사만은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고양이 특유의 경멸하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둘만 모여도 전쟁 이야기를 했고, 항구 어귀의 하일랜드 샌디 할아버지는 혼자 있으면서도 전쟁 이야기를 했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 농장 여기저기를 노려보며 카이저7)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월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아 살짝 사라져버렸으나 릴라는 층계에 앉았다. 이슬이 내린 뜰에서는 진한 박하향이 풍겨왔다. 아주 고요한 저녁으로 글렌은 황금빛 저녁 해를 받아 빛나고 있었다. 릴라는 두렵기만 했던 한 주를 보낸 끝에 지금은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월터가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가 스무 살만 젊었어도 지원을 하는 건데. 카이저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해. 내가 지옥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지옥은 있어. 한 다스가 아니라 몇백 개가 있지. 카이저와 그들 패거리가 떨어질 지옥 말이야.”
노먼이 고함을 쳤다. 그는 언제나 흥분하면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전쟁이 날 줄 나는 알고 있었어요. 전쟁이 바로 코앞까지 왔다고 생각했지. 그 얼간이 같은 영국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야기해주었어야 했는데. 존 메러디스 목사님, 몇 해 전에 내가 카이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말해주었죠? 그때 메러디스 씨는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카이저가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했죠. 목사님, 그때 누구 생각이 옳았죠? 목사님인가요, 아니면 나인가요? 자, 말해보세요.”
더글러스 부인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처형이 옳았음을 인정합니다.”
메러디스 씨가 말했다.
“이제 와서 인정해봐야 이미 늦었어요.”

더글러스 부인은 머리를 내저었다. 마치 존 메러디스가 그 사실을 좀 더 빨리 인정했더라면 전쟁이 나지 않았을 거라는 투였다.
“영국 해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다행이군요. 사람들이 다 박쥐처럼 눈이 멀어 있지만 군을 준비해둘 만큼 선견지명을 가졌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더글러스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육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일 거요. 조금만 기다려보라고요. 영국 육군이 전열을 가다듬기만 하면 카이저도 코밑수염을 양쪽으로 갈라 빗고 베를린 거리를 행진하는 것과 진짜 전쟁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거란 말이요.”
노먼이 소리쳤다.
“영국에는 육군 따위는 없어요. 나를 쏘아볼 필요 없어요, 노먼. 쏘아본다고 풀줄기에서 군대가 만들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몇십 만의 병사는 독일의 몇백 만 병사에게 한입 거리도 안 돼요.”
더글러스 부인이 힘주어 말했다.
“한입에 삼킨다 해도 씹느라 애를 좀 먹어야 할 거요. 씹다가 이가 부러져버릴걸. 영국군인 하나는 다른 나라 군인 열에 해당된다는 걸 모르오? 내 양손을 뒤로 묶어놓아도 나 혼자서 그놈들 열둘을 해치울 수 있어!”
노먼도 완강하게 주장했다.

“프라이어 씨는 영국이 왜 이 전쟁에 끼어들었는지 모를 일이라는 말을 하고 다녀요. 영국이 전쟁에 끼어든 건 순전히 독일을 시샘해서지 벨기에에서 벌어진 일을 염려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더군요.”
수잔이 말했다.
“그 인간이야 그런 얼빠진 말을 하고도 남지. 그렇게 말하는 걸 나는 못 들었지만. 내가 들었다면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지. 우리 알렉 데이비스 부인도 그런 소리를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내 앞에서는 감히 찍소리도 못 해. 누구든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린 하려 들지 않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였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예감이라도 드는 모양이야.”
노먼이 말했다.
“난 우리가 죄를 지어 그 벌로 이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요. 이 세상은 악으로 넘치고, 말세라고요.”
소피아는 창백한 손을 무릎에서 풀어 가슴 언저리께서 다시 무겁게 마주 쥐었다.
“여기 앉아 있는 목사님도 같은 생각일 거요. 그렇지 않소, 목사님? 그래서 저번 날 밤에 ‘피를 흘리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8)란 성경 구절로 설교를 한 거지요? 하지만 나는 목사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아요. 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사님 말은 한마디도 옳은 말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여기 있는 엘런이 날 붙들어서 못 했지만. 내가 결혼한 후로는 목사님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즐거움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있소.”
노먼이 킬킬 웃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정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메러디스 씨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아주 차분하고 꿈꾸는 듯해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전해주었다.
“모든 성취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종족은 피를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에 찬 진보를 해왔습니다. 지금 다시 한 번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입니다. 크로퍼드 부인, 저는 이 전쟁이 죄의 대가로 일어난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인류가 어떤 축복을 받으려고 그 대가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위대한 진보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얻은 것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볼 수 없다 해도 우리의 자손에 자손은 물려받게 되겠지요.”
“만일 제리가 죽는다면 이 전쟁을 그렇게 좋게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지요? 이런, 엘런, 내 정강이를 걷어차지 말아요. 나는 목사님이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직자의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니까.”
노먼이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먼은 평생 이런 식으로 말을 해왔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메러디스 씨의 얼굴이 떨렸다. 젬과 제리가 샬럿타운으로 간 날에도 그는 서재에 밤새 홀로 앉아 끔찍한 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어떤 기분이건 제 믿음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나라를 구하려고 나라의 아들들이 나선 나라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 것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그것이 목사님의 진정이라는 것을 난 압니다. 난 사람들이 말할 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닌지 잘 알아요. 이건 내 타고난 능력이에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나를 두려워하죠! 메러디스 목사님이 진심이 아닌 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어요. 내가 혹여나 거짓된 얘기를 하지나 않나 노리고 있었거든요. 그럼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나를 교화시키려고 드는 엘런에게 대항할 무기도 되어줄 것이고. 난 이제 에이브러햄 크로퍼드를 만나러 가봐야겠소.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저런 못된 이교도 같으니라고!”
노먼이 성큼성큼 나가자 수잔이 중얼거렸다. 엘런 더글러스 앞이라도 상관없었다. 저렇게 목사님을 모욕하는데 왜 하늘에서 노먼 더글러스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메러디스씨가 이 동서를 참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릴라는 사람들이 전쟁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했으면 했다. 일주일 동안 전쟁 얘기만 듣다 보니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월터가 전쟁에 나가고 싶어 할까 봐 걱정하던 마음에서 놓여난 지금 전쟁 얘기는 정말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직도 서너 달은 더 전쟁 얘기를 들어야 하리라고 한숨지으며 생각했다.


5.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육군 장관. 영국 역사상 유례없던 대규모 육군을 조직해 승리를 향한 국민의지의 상징이 된 인물.
6. 하르툼의 키치너(Kitchener of Khartoum)를 줄여서 부른 호칭.
7.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 왕인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 재위 1888~1918)를 보통 ‘카이저’라고 불렀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세계정책을 취했으나 이를 수행할 때의 독선적·단견(斷見)적인 행동은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끄는 대독 포위망을 만들게 했다.
8. 히브리서 9장 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6
수잔, 릴라, 먼데이의 결심






넓은 ‘잉글사이드’ 거실에 하얀 무명천이 수북이 널린 것이 꼭 함박눈이 쌓인 것 같았다. 적십자 본부에서 이불과 붕대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왔다. 낸과 다이와 릴라는 열심히 일했다. 블라이드 부인과 수잔은 2층 아들 방에서 좀 더 사적인 일로 바빴다. 둘은 고통에 찬 퀭한 눈으로 젬의 짐을 꾸리고 있었다. 바로 내일 아침 젬은 발카르티에로 떠나야 했다. 가족들은 그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더라도 막상 때가 닥치고 보니 역시 마음이 괴로웠다.
릴라는 평생 처음으로 이불단 시침질을 해보았다. 젬이 떠나야 한다는 소식이 왔을 때 릴라는 ‘무지개 골짜기’ 소나무 사이로 나가 한 차례 울고 엄마한테 갔다.
“엄마, 나도 뭔가 하고 싶어요. 난 여자라서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지만 집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어요.”
“이불 만들 무명천이 와 있으니 낸과 다이를 도와 너도 이불 만드는 일을 거들어라. 그리고 릴라야, 네가 여자아이들을 모아 적십자 소녀단을 조직해보면 어떻겠니? 내 생각엔 너희 여자아이들은 어른들과 따로 일을 해보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드는데.”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엄마, 난 그런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제부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많이 해야 할 거야, 릴라.”
“그래요. 한번 해보겠어요, 엄마.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시기만 하면요. 저도 요즘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용기를 내서 영웅적으로 나서고 이기적이지 않게 행동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릴라의 과장된 표현에도 블라이드 부인의 얼굴에 미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웃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인지, 릴라의 낭만적인 마음 뒤로 진지한 태도가 얼마간 보여서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릴라는 지금 이불 가장자리를 꿰매며 머릿속으로는 적십자 소녀단을 미리 구성해보았다. 즐거운 일이었다. 바느질이 아니라 적십자단 조직 말이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그 방면에 자기에게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단장은 누가 하면 좋을까? 나는 안 돼. 나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아이린 하워드? 안 돼. 아이린은 그 자리를 맡을 만큼 인기가 없어. 마저리 드류는 어떨까? 안 돼. 마저리는 배짱이 없어. 남이 하라는 대로만 하고 말걸. 베티 미드? 침착하고 총명하고 재치도 있는 아이지. 그래, 베티가 좋겠다! 그리고 우나 메러디스 언니는 회계를 시키면 좋을 거야. 그리고 난 서기가 되면 좋을 거야. 사람들이 날 서기로 임명해주기만 한다면.
여러 위원은 적십자 소녀단이 결성된 뒤 뽑아야겠지만 릴라는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면 좋겠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다. 모임은 단원들의 집을 차례로 돌아가며 열고, 식사는 내놓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릴라는 이 문제로 올리브 커크와 한바탕 입씨름을 하게 될 거라고 각오했다. 모든 일은 아주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해야 한다. 내 의사록에는 흰 표지를 씌우고 적십자 무늬를 그려야지. 그리고 모금을 위한 발표회를 열 때는 모두 똑같은 옷을 맞추어 입으면 좋을 거야.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단체복으로.
“너 이불단 위아래를 다른 방향으로 시침질해놓으면 어떻게 해.”
다이가 말했다.
릴라는 바느질한 것을 모두 뜯어내며 바느질은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적십자 소녀단을 운영하는 일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2층에서는 블라이드 부인이 수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잔, 젬이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면서 엄마라고 불렀던 날 기억나요? 젬이 처음으로 말을 했던 날이었지요.”
“그 축복받은 아기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죽는 날까지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할 거예요.”
수잔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참 쓸쓸하게 들렸다.
“수잔, 난 오늘 자꾸 옛날 일이 떠올라요. 젬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젬이 밤에 나를 찾으면서 울었어요. 그런데 길버트가 아기에게 가지 말라고 했어요. 잘 먹이고 따뜻하게 해주었는데 운다고 자꾸 가버릇하면 아기 버릇이 나빠진다고요. 하지만 난 가서 아기를 안아주었어요. 그 조그만 팔로 내 목을 어찌나 꼭 감고 안기던지. 수잔, 그 20년 전 날 밤에 나를 찾으면서 우는 젬에게 가서 안아주지 않았다면 난 도저히 내일 아침을 맞을 수 없었을 거예요.”
“난 그런 일이 없었어도 어떻게 내일을 맞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모님.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작별이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젬이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휴가를 받아 집에 들를 거니까요,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길 바라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어요. 나는 집에 들르지 않으려니 생각하려고 해요. 그러면 실망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수잔, 난 내일 웃으며 젬을 보내기로 마음먹고 있어요.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용기를 냈는데 어머니라는 사람이 아들을 보낼 용기도 없는 나약한 어머니여서 되겠어요? 약한 어머니의 기억을 갖고 젬이 떠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나저나 아무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는 울지 않을 거예요, 사모님. 그것만은 내 장담하지만, 웃을 수 있을지는 하느님 뜻과 내 마음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달렸지요. 과일 케이크를 넣을 데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쇼트브레드와 민스파이도요. 그 퀘벡인가 하는 곳에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젬을 굶게 해서야 되겠어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것 같아요. 목사관의 늙은 고양이까지도 죽어버렸어요. 어젯밤 9시 45분에 숨을 거두었대요. 브루스가 몹시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그 고양이도 좋은 고양이들 가는 곳으로 갈 때가 온 거예요. 나이가 열다섯 살은 되었을 테니까요. 마사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고양이 혼자 무척 쓸쓸해 보였어요.”
“난 하이드 씨가 죽는다 해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사모님. 그 고양이는 젬이 군복을 입고 돌아온 뒤부터 계속 하이드 씨가 되어 있었어요. 그것도 무언가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젬이 가버린다면 먼데이는 어떻게 될까요? 그 개는 사람 같은 눈을 하고 다녀요. 그걸 보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어요. 엘런 웨스트는 전부터 카이저를 호되게 욕하고 다녀 다들 그 여자가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미치광이 같은 짓에도 다 이유가 있었어요. 자, 이제 이 짐은 다 꽉 찼네요, 사모님. 난 이제 아래층에 내려가 재주껏 저녁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언제 또 젬에게 저녁 식사를 해줄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을 거예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젬 블라이드와 제리 메러디스는 길을 떠났다. 비가 올 것만 같은 흐린 날씨로 하늘에는 온통 무거운 잿빛 구름이 끼어 있었다. 구레나룻 난 보름달만 빼놓고는 글렌 마을과 포 윈즈, 그리고 항구 어귀와 글렌 윗마을 그리고 항구 건넛마을 사람까지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와 둘을 배웅했다.
블라이드 가족과 메러디스 가족은 모두 웃음을 지으며 둘을 떠나보냈다. 심지어는 수잔까지도 신의 가호에 힘입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얼굴에는 차라리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나았을 만큼 참혹한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페이스와 낸은 너무나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범하게 굴었다. 릴라는 무엇이 자기 목만 죄어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입술이 그렇게 덜덜 떨리지만 않는다면 잘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강아지 먼데이도 거기 있었다. 젬은 ‘잉글사이드’에서 먼데이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먼데이가 너무 간청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기차역까지 따라오도록 내버려두었다. 먼데이는 젬의 다리 곁에 꼭 붙어 따라오며 계속해서 사랑하는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 개의 눈은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어요.”
메러디스 부인이 말했다.

먼데이를 보고 메리 밴스도 릴라에게 말했다.
“저 짐승은 사람보다 더 분별력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중 누가 이런 일을 볼 때까지 살 줄 알았겠어? 난 젬과 제리가 떠난다는 생각에 밤새 엉엉 울었어. 두 사람 다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냐? 밀러도 머릿속에 벌레라도 기어들어갔는지 전쟁터로 가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겨우 못 가게 말렸어. 밀러 고모도 몇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렸고. 알렉 데이비스 부인과 내가 의견을 같이 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이런 기적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저기 케네스가 있다, 릴라.”
릴라도 케네스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네스가 레오 웨스트의 마차에서 뛰어내릴 때부터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 케네스는 미소를 띠며 릴라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용감하게 웃고 있는 동생 역할을 잘하고 있군. 글렌 사람은 다 모인 것 같다. 나도 이삼일 있으면 돌아갈 거야.”
젬이 떠나는 것과는 다른 이상하게 허전한 감정이 릴라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왜? 아직 방학이 한 달이나 남았잖아?”
“그래.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나 혼자만 포 윈즈에서 어슬렁거리며 놀고 지낼 수는 없어. 이런 불편한 다리로라도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토론토야. 나는 젬과 제리 쪽을 보지 않기로 했어. 부러워 견딜 수 없어질 테니까. 너희 여자들은 훌륭해. 울지도 않고, 슬픔을 참는 것 같은 무거운 표정을 짓지도 않고. 떠나는 사람 마음도 무겁지 않을 거야.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니와 퍼시스도 그렇게 꿋꿋했으면 좋으련만.”
“안 돼, 케네스 오빠. 전쟁은 오빠 차례가 오기 전에 끈나 꺼야.”
이런! 릴라는 또 혀 짧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중요한 순간을 망쳐버렸다! 이것이 릴라의 운명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상관없다. 케네스는 이미 가버렸으니까. 그는 벌써 저기서 에덜 리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덜은 이 시각, 아침 7시부터 댄스파티에 입었던 드레스를 차려입고 나와 울고 서 있었다. 에덜은 도대체 왜 울고 있는 거지? 리즈 집안사람 중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도 없었다. 릴라야말로 울고 싶지만 참고 있는데. 드류 부인은 우리 엄마에게 저 코맹맹이 징징거리는 소리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일을 다 어찌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블라이드 부인. 우리 아이가 전쟁터로 간다면 난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 엄마, 오, 우리 엄마는 언제나 믿음직하다! 저 창백한 얼굴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잿빛 눈!
“내가 그 애에게 전쟁터로 가라고 억지로 부추겨야 했다면 더 나빴을 거예요, 드류 부인.”
드류 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릴라는 이해했다. 릴라는 머리를 획 치켜들었다. 우리 오빠는 누가 가라고 억지로 설득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릴라는 혼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편적인 얘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마크에게 다음번 모집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요. 다음에도 지원병을 모집한다면 그때는 보내주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다시는 모집하지 않을 거예요.”
팔머 버어 부인이 말했다.
“나는 벨벳으로 단단히 죄는 허리띠를 만들 생각이에요.”
베시 클로가 말했다.
“나는 무서워서 우리 남편 얼굴을 못 보겠어요. 그 사람도 가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요.”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귀여운 새색시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벌벌 떨고 있어요. 짐이 입대하지 않을까 벌벌 떨리고, 또 입대할 마음이 없을까 봐 벌벌 떨리기도 해요.”
변덕스럽기로 이름난 짐 하워드 부인이 말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도 끝날 겁니다.”
조 비커스가 말했다.
“유럽 나라들끼리 싸우든 말든 내버려두어요.”
애브너 리즈가 말했다.
“그 사람 어렸을 때 내가 몇 차례 혼내줬지요. 그래요. 내가 무섭게 때려줬어요. 그 사람이 지금은 훌륭한 거물이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노먼 더글러스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샬럿타운의 어느 장교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대영제국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감리교회 목사가 말했다.
“확실히 군복은 멋져!”
아이린 하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상업전쟁이에요. 그런 일로 귀중한 캐나다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릴 가치가 없습니다.”
바닷가 호텔에서 온 낯선 사람이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블라이드 가족은 참 태평하게도 받아들이네요.”
케이트 드류가 말했다.
“저 얼간이들은 모험을 하고 싶어서 가는 거야.”
나단 크로퍼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는 키치너 경을 절대로 신뢰합니다.”
항구 건넛마을 의사가 말했다.
그 10분 동안 릴라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했다. 화가 났다가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경멸감과 절망감이 들었으며, 격려를 받은 기분까지도 들었다. 아, 사람이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어쩌면 저렇게 뭘 모를까? 태평하게 받아들이다니! 수잔까지도 한숨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웠건만. 케이트 드류는 예전부터 좀 못됐어!
릴라는 기이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 사람들이 3주 전에 곡식이며 곡식가격 그리고 마을의 소문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들이 맞는가?

저기 기차가 들어왔다. 엄마는 젬의 손을 잡고 있었고, 먼데이가 그 손을 핥고 있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제 기차가 들어와 버렸다. 젬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페이스에게 키스했다. 드류 할머니가 히스테릭하게 “저, 저런!”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은 케네스의 선창으로 만세를 외쳤다. 릴라는 젬이 자기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갔다 올게, 거미야.” 누군가 릴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제리라고 생각했지만 누구인지 정신이 없었다. 젬과 제리가 멀어져 갔다. 기차는 천천히 역을 빠져나갔고 젬과 제리가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도 모두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와 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미소를 거두는 걸 잊어버려서인 것 같았다. 먼데이가 미친 듯이 짖으며 기차 뒤를 따라 달려가는 것을 감리교회 목사가 힘껏 말리고 있었다. 수잔은 자기의 가장 좋은 보닛을 흔들며 남자처럼 소리쳤다. 수잔은 정신이 나가버렸을까? 기차는 모퉁이를 돌아갔다. 젬도 제리도 가버렸다.
릴라는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블라이드 의사와 블라이드 부인은 같이 돌아갔다. 낸과 페이스도 돌아갔다. 존 메러디스와 로즈마리도 같이 돌아갔다.
월터와 우나, 셜리와 다이, 칼과 릴라는 함께 어울려 걸어갔다. 수잔은 모자를 거꾸로 쓰고 시무룩한 얼굴로 혼자 서둘러 돌아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먼데이가 없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중에야 먼데이가 보이지 않아 셜리가 역으로 되돌아가 보니 먼데이는 역 화물 창고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먼데이를 구슬려보았지만 조금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유감은 없다는 듯 꼬리만 살살 흔들 뿐 고집스럽게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먼데이는 젬이 돌아올 때까지 저기서 기다리기로 작정을 했나 봐.”
셜리가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렇다. 먼데니는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사랑하는 주인은 가버렸다. 그리고 먼데이는 감리교회 목사로 분장하고 나타난 악마의 손아귀에 붙잡혀 주인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먼데이는 그 연기를 내뿜고 코를 고는 괴물이 자기의 영웅을 다시 데려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래, 거기서 기다리거라, 충성스러운 개여! 그 부드럽고 슬퍼 보이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하지만 너의 소년 같던 주인이 너를 다시 찾을 때까지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오래도 견뎌야 할 것이다.
블라이드 의사는 그날 밤에도 환자를 보러 나갔고, 수잔은 가여운 사모님이 ‘편안하고 차분한’ 가운데 잘 쉬고 있는지 보려고 살살 블라이드 부인의 방으로 가보았다. 수잔은 침대 발치에 서서 엄숙하게 선언했다.
“사모님, 전 여장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사모님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공평치가 않았다. 릴라가 비슷하게 영웅이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때는 웃지 않았건만. 그때 릴라는 날씬한 몸에 하얀 옷을 입고 꽃처럼 예쁜 얼굴에 눈은 부푼 가슴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수잔은 아주 볼품없는 회색 플란넬 잠옷을 입고 흰머리에는 두통을 이기려고 붉은색 모직 끈을 질끈 묶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양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정신이 아닌가. 하지만 블라이드 부인은 정말이지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시는 일에 슬퍼하거나 불평하거나 의문을 달지 않겠어요. 신의 섭리에 불평하고 샐쭉해하고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양파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이건 국가를 경영하는 일이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난 내 일을 열심히 할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전쟁터에 나갔어요. 우리 여자들은 묵묵히 입 다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 애들을 기다려야 해요, 사모님.”
수잔은 굳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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