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25~26

나단비 | 2024.04.19 11:21:32 댓글: 0 조회: 7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381
25
셜리도 가다






수잔은 신문에 난 윌슨 대통령의 이름을 밉살스럽다는 듯 뜨개바늘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아니에요, 우드로 윌슨. 승리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캐나다 사람은 평화도 승리도 모두 쟁취할 생각이에요. 우드로, 당신은 원한다면 승리 없이 평화를 얻으라고요.”
수잔은 미국 대통령과 말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의기양양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수잔은 몹시 흥분해 블라이드 부인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모님, 기쁜 소식이에요. 샬럿타운에서 금방 전화가 왔는데 드디어 우드로 윌슨이 독일 대사 놈을 쫓아내 버렸대요. 이 사건은 전쟁을 의미하는 거래요. 결국에는 우드로의 마음이 제대로 돌아가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 머리야 어디에 있든지요. 나는 이 일을 축하해야겠어요. 설탕을 조금 가져다가 초콜릿캔디를 만들어서요. 식량청(食糧廳)에서 뭐라고 외치건 난 설탕을 쓸 거예요. 나는 그 잠수함 사건으로 독일 놈들이 천벌을 받게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소피아에게도 그렇게 말했지요. 그랬더니 소피아 한다는 소리가 연합군의 운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나요.”
“의사 선생님이 초콜릿캔디 만드는 걸 알아서는 안 돼요. 정부가 요청하는 절약 정책에 엄격하게 동참하길 원하니까요, 수잔.”
앤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사모님. 한집안의 가장은 남자이니 여자는 그저 남자의 신조에 따라야죠. 나도 이제 절약하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지요. 하지만 때로는 예외도 있는 법이에요. 며칠 전에도 셜리가 초콜릿캔디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셜리의 표현대로라면 ‘수잔표 초콜릿캔디’요.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승전 소식이 들려오면 그 기념으로 초콜릿캔디를 만들어준다고 약속했어요. 이 소식은 승전 소식이나 마찬가지예요. 의사 선생님도 뭐라 하지는 못하실 거예요. 알지 못하는 이상은요. 책임은 내가 다 질게요, 사모님. 그러니 사모님이 양심에 거리낄 건 없어요.”
그해 겨울 수잔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음껏 셜리의 응석을 들어주었다. 주말마다 셜리가 퀸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의사 선생님 몰래, 아니면 의사 선생님을 속이고 먹고 싶다는 음식을 다 만들어주고 셜리의 손발이 되다시피 시중을 들어주었다. 수잔은 누구나 보기만 하면 언제나 전쟁 이야기였지만 셜리에게만큼은 절대로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고양이가 쥐를 감시하듯 셜리를 지켜보았다. 바포메에서 독일군이 물러나기 시작했고, 연일 퇴각이 계속되자 수잔은 한시름 놓고 기세등등해졌다. 수잔이 자기 속마음을 꺼내놓지는 않더라도 그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가 전쟁터로 떠난다고 나서기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제야 우리 뜻대로 되어가기 시작했어요. 독일군을 도망치게 했잖아요. 미국이 결국에는 선전포고를 했고, 난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어요. 윌슨 대통령이 성명서나 발표하는 재주밖에는 없다고 해도, 미국도 일단 기분이 내키면 이리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고요. 난 미국이 이렇게 나올 줄 다 알고 있었어요.”
수잔이 의기양양해 말했다.
“미국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더라도 이번 봄 전투의 전황을 바꿀 수는 없어. 아니, 미국이 개입하기도 전에 연합군은 최후를 맞고 말 거라고. 독일군이 미국을 꾀어 들이려고 수를 쓰고 있는 거야. 그 사이먼즈라는 사람 얘기로는 독일군이 퇴각하는 이유는 연합군을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거라고 하던걸.”
소피아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 사람 말은 하나도 믿을 것 없어. 로이드 조지가 영국의 총리로 있는 한, 난 그 사람이 한 말로 걱정 같은 건 안 할 거야. 로이드 조지는 속임을 당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장담해. 내 생각엔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으니 이제 우리가 쿠트도 바그다드도 다 되찾을 거라고. 6월이면 연합군이 베를린에 입성한다고 해도 놀랄 일도 아닐걸. 러시아군도 마찬가지야. 러시아군이 황제를 몰아내 버렸으니까. 모든 게 다 잘 되어가고 있다고.”
수잔이 반박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소피아가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소피아를 보고 당신은 폭정이 폐지되는 것이나 연합군이 운터덴린덴로31)를 활보하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잔이 창피당하는 꼴을 더 보고 싶어 한다고 꼬집었다면 무척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러시아 사람들의 한탄이 날로 높아만 가는 사정은 잘 몰라서 언제나 낙천적이기만 한 수잔이야말로 끊임없는 골칫거리였다.
그때 셜리는 거실 탁자 끝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고 있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갈색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어머니, 아버지, 전 지난 월요일로 열여덟 살이 되었어요. 이제 입대해도 될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셜리는 침착하게 말했다.
창백해진 얼굴로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둘이 전쟁터로 나가 하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데 너까지 가야 한단 말이니, 셜리?”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가고자 하느냐?’32)수 세기 전 족장들의 외침을 지금 세계대전에 아들을 내보낸 어머니들이 그대로 외치고 있었다!
“저를 병역 기피자로 만들고 싶진 않으시죠, 어머니? 전 항공대에 들어가려고 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애비 플래그 할머니에게 줄 류머티즘 가루약을 조제하여 종이에 싸고 있던 의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블라이드 의사도 이런 때가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에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의무라고 믿고 있는 일을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머니 허락 없이 가서는 안 된다.”
셜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말이 많은 젊은이는 아니었다. 앤도 그때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앤은 항구 건너편 오래된 묘지에 있는 작은 조이스의 무덤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이스도 살았더라면 이제 어엿한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앤은 또 프랑스에 있는 흰 십자가와 자기 무릎에서 처음으로 의무와 충성심을 배웠던 소년의 반짝이는 잿빛 눈을 생각했다. 끔찍한 참호에 있는 젬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만 있는 낸과 다이와 릴라도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황금 같은 청춘 시절은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뎠다.
하지만 그날 밤 앤은 셜리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수잔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기로 했다. 며칠 뒤, 셜리가 항공대 제복 차림으로 부엌에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수잔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잔은 젬과 월터가 떠날 때보다 절반도 소란을 떨지 않았다.
“기어이 너마저 데려간다니?”
수잔은 차갑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나를 데려간다고요? 아니에요, 내가 가는 거예요, 아줌마. 난 가야만 해요.”
수잔은 ‘잉글사이드’ 아이들을 기르느라 마디마디 옹이가 진 두 손을 마주 잡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두 손이 떨렸다.
“그래, 넌 가야만 하겠지. 전에는 그런 일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도 지금은 안다.”
“아줌마는 정말 멋져요.”
셜리가 말했다. 셜리는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수잔이 차분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에 안도해 가벼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나갔다. 하지만 30분이나 지난 뒤에 앤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을 때도 수잔은 거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잔은 그 옛날의 수잔이라면 이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모님,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어요. 젬과 월터는 사모님의 아이였지만 셜리는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그 아이가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다닌다니,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어요. 비행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우리 셜리의 몸도 짓이겨져 버릴 것 아니에요. 갓난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우고 안아주고 하던 그 사랑스럽고 소중한 몸이요.”
“수잔, 그만 해요.”
앤이 소리쳤다.
“어이구머니나, 사모님, 죄송해요. 이런 소리를 입 밖에 내다니. 내가 가끔씩 여장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일을 잊어버리고는 해요. 이 일로 정신이 좀 어떻게 되었나 봐요. 다시는 내가 정신을 놓아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앞으로 며칠 동안 부엌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수잔은 어찌어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비행기를 타는 건 깨끗한 일일 거예요. 참호에서 뒹구는 것처럼 더럽게 흙투성이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잘됐어요. 저 아이는 원래가 깔끔한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그렇게 셜리도 전쟁터로 향했다. 젬처럼 멋진 모험이라도 나서는 듯 유쾌하게도 아니었고, 월터처럼 하얀 희생의 불꽃을 태우지도 않았으며, 불쾌하고 싫은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이므로 한다는 식의 냉정하고 사무적인 기분으로 떠났다. 셜리는 다섯 살 이후 처음으로 수잔에게 입을 맞추어주며 말했다.
“잘 있어요, 아줌마. 내 어머니, 수잔.”
“우리 구릿빛 왕자님, 우리 귀여운 구릿빛 왕자님.”
수잔은 블라이드 의사의 슬퍼하는 얼굴을 보고 쓰디쓰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 셜리 볼기짝을 때렸던 일이 생각나시나요? 난 그런 일이라고는 없었으니 내 양심에 걸리는 일은 없네요.’
블라이드 의사는 과거에 자기가 셜리를 어떤 방식으로 훈육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왕진을 나가려고 모자를 쓰고 잠시 조용한 거실을 둘러보며 예전에는 이 넓은 거실이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 찼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막내아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인데. 선량하고 다부지고 지각 있는 아이였는데. 그놈은 언제나 우리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어. 그 아이가 전쟁터로 나서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해. 젬이 나갈 때는 자랑스러웠어. 월터 때도 그랬었지. 하지만 이제 우리 집이 텅 비어버린 것 같군.”
블라이드 의사가 소리 내어 말했다.
“오늘 선생님 생각을 했어요. 이제 집이 너무 커 보이겠구나 하고요.”
그날 오후 글렌 윗마을에 사는 샌디 노인이 블라이드 의사에게 말했다.
하일랜드 샌디 노인이 한 말은 블라이드 의사의 심정 그대로였다. 그날 밤 ‘잉글사이드’는 넓고 텅 비어 보였다. 하지만 셜리는 겨울 내내 주말에나 집에 돌아오고, 집에 있어도 말도 없이 조용히만 지내던 아이였다. 셜리가 집에 오직 하나 남은 아들이었던 탓에 이렇게 큰 공백이 생긴 것처럼 생각되는 걸까? 집 안의 모든 방이 텅 빈 듯 황량해 보였다. 뜰에 서 있는 나무들까지도 자기 그늘 아래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하나도 남긴 없이 가버렸다고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가지를 서로 비비대며 위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수잔은 온종일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만 했다. 부엌의 시계태엽을 감아주고 지킬 박사를 전혀 부드럽지 않은 손길로 밖으로 내놓아주고는 잠시 문턱에 서서 한쪽이 움푹 꺼진 초승달에서 나온 희미한 은빛 속에 환영처럼 떠 있는 글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수잔의 눈에는 언제나 보던 언덕도 항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셜리가 있을 킹스포트 항공대 캠프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나를 어머니 수잔이라고 불렀어. 이제 우리 집 아이들은 다 가버렸네. 젬과 월터, 셜리까지. 그리고 목사관의 제리와 칼도. 그 누구도 그 아이들 등을 떠밀지 않았지. 그러니 우리는 그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하지만 그 자부심이란 것이 참으로 냉정한 것이구나.’
수잔은 생각했다. 괴로운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달은 더욱 기울어 서쪽 하늘의 검은 구름 속으로 숨어버려서 글렌 마을은 갑자기 어둠에 잠겨버렸다. 몇천 마일 떨어진 저쪽에서는 캐나다 군인들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다. 비미 리지라는 이름은 세계대전 캐나다 전쟁 역사에 선홍빛과 황금빛으로 기록되었다.
“이곳은 영국군도 공략하지 못했고 프랑스군도 어찌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네 캐나다군은 바보라서 겁도 없이 덤벼든 것이다.”

어느 독일군 포로가 자신을 잡은 군인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게 이 바보들은 비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다.
제리 메러디스는 비미 리지 전투에서 심한 중상을 입었다. 등에 총상을 입었다는 전보가 온 것이다.
“낸이 가엾게 되었구나!”
그 소식을 듣고 블라이드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블라이드 부인은 그 옛날 ‘초록 지붕 집’에서의 행복하기만 했던 소녀 시절을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이런 비극을 몰랐다. 지금 아가씨들은 얼마나 큰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2주일 후에 레드먼드에서 돌아온 낸의 얼굴은 그동안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견뎠는지 그대로 말해주었다. 존 메러디스 목사 역시도 갑자기 늙어버렸다. 페이스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자원봉사 부대에 자원해 대서양을 건너가 부상 입은 병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다이는 자기도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보낼 수 없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다이는 집에 돌아오자 적십자 봉사활동을 위해 킹스포트로 돌아갔다.
산사나무 꽃이 ‘무지개 골짜기’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피기 시작했다. 릴라는 산사나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는 젬이 맨 먼저 피어난 산사나무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젬이 가버린 후로는 월터가 어머니에게 꽃을 꺾어다 드렸다. 그리고 작년 봄에는 셜리가 산사나무 꽃을 찾아서 갖다 드렸다. 릴라는 올해엔 자기가 남자들을 대신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릴라가 아직 꽃을 찾아내기 전 어느 날 저녁때 브루스 메러디스가 ‘잉글사이드’로 찾아왔다. 팔에는 화사한 분홍색 작은 산사나무 꽃가지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브루스는 베란다 계단을 기운차게 뛰어올라가 산사나무 꽃가지를 블라이드 부인의 무릎에 놓았다.
“셜리 형이 있었으면 꺾어왔겠지만 형이 여기 없으니까 제가 대신 가져왔어요.”
브루스는 수줍어하면서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말하는 블라이드 부인의 입술이 떨렸다. 부인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땅딸막하고 눈썹이 시커먼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젬 형에게 산사나무 꽃을 꺾으러 가지 못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 썼어요. 제가 잘 알아서 하겠다고요. 그리고 저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열 살이고, 열여덟 살도 금방 올 테니 가서 젬 형이 싸우는 걸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대신 싸워주면 젬 형이 잠깐 집에 와서 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제리 형도 점점 나아지고 있대요.”
브루스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제리에게서 소식이 왔니?”
“네. 오늘 엄마한테 편지가 왔어요.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대요.”
“하느님이 도우셨구나.”
블라이드 부인이 중얼거렸다.
브루스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블라이드 부인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더니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며칠 전 미드 씨네 개가 우리 고양이를 물었을 때 제가 그런 말을 하니까 아빠는 무섭게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양이 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전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치지 않아서 정말 하느님이 도왔다고 생각하고 한 말이거든요. 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블라이드 아줌마. 스트라이피를 살려준 것은 하느님이 틀림없어요. 그 미드 씨네 개는 굉장히 입이 커서 스트라이피를 물고 막 흔들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왜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하면 안 되나요?”33)
브루스는 뭔가가 기억난 듯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제가 말을 너무 크게 해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스트라이피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미칠 듯이 기뻤거든요. 저는 거의 고함치듯 말해버렸어요, 블라이드 아줌마. 아줌마나 아빠처럼 속삭이듯이 조용히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요. 그렇지요, 블라이드 아줌마?”
브루스는 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속삭이는 어조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카이저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은지 아세요?”
“어떻게 해주고 싶은데?”
“학교에서 노먼 리즈가 그랬는데 자기는 카이저를 나무에 묶어놓고 개를 성나게 해서 물어뜯게 하겠대요. 그리고 에밀리 플래그는 카이저를 우리 안에 가두고 뾰쪽한 것으로 마구 찔러주겠대요. 모두 그런 말을 해요. 하지만 블라이드 아줌마…….”
브루스는 주머니에서 작고 네모진 손을 꺼내 앤의 무릎에 올려놓고 말을 이었다.

“저는 카이저를 좋은 사람으로, 아주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고 싶어요. 할 수만 있으면 단번에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블라이드 아줌마?”
브루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기특하기도 하지. 그 고약한 악마에게 그런 벌을 내리는 게 가장 심한 벌이란 걸 어떻게 알았니?”
수잔이 물었다.
브루스는 짙은 파란색 눈으로 수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왜냐하면 카이저가 좋은 사람으로 바뀌면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럼 그 사람도 몹시 슬프고 기분이 나빠질 거라고요. 그 어떤 방법보다도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방법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아주 끔찍한 기분이 될 거라고요. 영원히 그런 불행한 기분으로 살게 될 거예요.”
브루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요. 저라면 카이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그것이 그 사람에게 꼭 알맞은 벌이에요.”


31.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대로.
32. 창세기 42장 36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3. 아이가 ‘Thank God’이라고 한 말을 두고 어른들이 ‘God’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나무랐기 때문에 나온 말.





26
수잔이 청혼을 받다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서녘 하늘을 나는 커다란 새처럼 보였다. 은빛 어린 노란색 하늘은 참으로 맑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바람이 깨끗하게 청소까지 해놓아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잉글사이드’ 잔디밭 위에 무리지어 몰려서 있는 사람들은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해 여름에는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이 간간이 보여 그게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수잔은 비행기를 볼 때마다 극도로 흥분했다. 저 구름 위에 있는 것이 킹스포트에서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돌아오고 있는 셜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셜리는 지금 해외에 나가 있다. 그러니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와 조종사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수잔은 경외감으로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사모님, 나는 저 묘지에 누워 있는 옛날 사람들이 잠깐 무덤에서 일어나 저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참 궁금해져요. 우리 아버지라면 분명 혀를 찼을 거예요. 새롭고 혁신적인 생각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죽는 날까지도 곡식을 낫으로 베셨지요. 곡식 베는 기계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자기에게 충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어요. 난 아버지의 그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말이 불효한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그렇지만 나도 비행기는 별로 탐탁스럽지 않아요. 군사적으로야 필요한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애초에 우리를 날게 할 생각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날개를 주었겠지요. 날개를 주지 않은 걸 보면 하느님은 우리가 땅에다 발을 딱 딛고 살기를 원하셨던 거예요. 어쨌거나 내가 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돌아다니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모님.”
수잔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빠의 자동차가 올 텐데.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 보는 것은 싫지 않겠지요, 수잔 아줌마?”
릴라가 놀리듯 말하자 수잔이 대꾸했다.
“자동차에도 이 늙은 몸을 맡겨둘 생각은 없지만, 나는 자동차를 일부 소견머리 좁은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는 않아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정부 내각을 전부 사퇴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더군요. 이 섬에 자동차가 다니도록 내버려둔 죄목으로요. 자동차를 보면 버럭버럭 화를 낸대요. 지난번 자기네 밀밭 옆으로 난 좁은 길로 자동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 인간이 쇠스랑을 들고 울타리를 뛰어 넘어와 길 한복판에 딱 막아섰더랍니다. 자동차에 탔던 남자는 무슨 중개인이었다는데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중개인도 자동차만큼이나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자동차를 못 지나가게 했대요. 그 사람을 비켜서 지나갈 만한 틈도 없는 길이고, 그 인간을 치어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겠지요. 쇠스랑을 치켜들고 ‘그 악마 같은 놈의 기계에서 내려. 아니면 내가 이 쇠스랑으로 당신을 찔러버릴 거야.’ 하고 소리를 질러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사모님? 세상에나, 그 중개인은 로브리지 길까지 1.5킬로미터를 자동차를 후진해서 돌아갔대요. 그 뒤를 구레나룻이 쇠스랑을 휘두르며 쫓아가면서 온갖 욕을 해댔고요. 그런 지각없는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요즘은 세상 모든 일이 다 요지경 속이에요.”
수잔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비행기니 자동차니 뭐니 하면서 섬도 그전 같지 않아요. 모든 게 달라졌어요.”
비행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곤두박질치듯 내려오더니 빙빙 맴돌았다. 곧 다시 올라가 조그만 점이 되어 저녁놀 진 언덕을 넘어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비행기 덕분에 인류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까요? 제 생각에는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 같아요. 새로운 발명품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행복은 물질적인 성취나 승리에 달린 것이 아니니까요.”
메러디스 목사가 아득한 옛날부터 분투해온 인간의 승리를 상징하는 최신 기계가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비행기는 정말 멋진 물건이에요. 그것은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소망하던 일이었죠. 하늘을 날고자 하던 소망이요.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거예요. 아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해서 이룬 거죠. 나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요.”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셜리 오빠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첫 번째 비행은 정말로 실망이었대요. 새처럼 땅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멋진 경험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솟구쳐 올라가는 느낌은커녕 전혀 움직이는 느낌도 없더래요. 그렇지만 땅이 아래로 멀리 떨어져 가는 것 같긴 했대요. 그리고 처음으로 하늘에 올라가서는 무척이나 고향이 그립더래요. 전에는 향수병 같은 건 몰랐는데 갑자기 자기 혼자 공중을 헤매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나요. 옛날에 살던 곳으로, 집으로,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로 당장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대요. 곧 괜찮아지긴 했지만 자기의 첫 비행은 그 끔찍한 외로움 때문에 악몽이었다고 썼어요.”
릴라가 말했다.
비행기는 사라졌고, 블라이드 의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새가 된 비행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제정신이 돌아오니까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앤, 당신 내가 에이번리에서 처음으로 마차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던 일 기억나? 그날 밤 우리는 카모디 발표회에 가는 길이었지. 당신이 에이번리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던 첫해 가을이었을 거야. 난 이마에 하얀 별 무늬가 있는 검은 암말을 갖고 있었어.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 장만한 마차도 달았지. 그때 난 세상에서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자신만만한 남자였어. 우리 손자는 아마 자기 연인을 비행기에 태우고 저녁 외출을 나갈지도 모르겠군.”
블라이드 의사가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행기는 실버스팟만큼 멋있지 않을 거야. 기계는 단순한 기계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버스팟은, 그 말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어, 길버트. 그 말 뒤에 앉아서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은 저녁놀에 불타는 구름 속을 날아가는 기분 이상이었다고. 나는 내 손자의 연인이 부러울 것 같지 않아. 메러디스 목사님 말씀이 옳아. 하느님의 왕국과 사랑의 나라, 행복의 나라는 외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야.”
“거기다 우리의 손자는 비행기에만 주의를 기울여야지 연인의 눈을 바라보려고 고삐를 잠깐 놓는 일도 할 수 없을걸. 한 손으로는 비행기를 조종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 그래, 나도 역시 실버스팟이 더 좋을 것 같아.”
블라이드 의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 여름 러시아 전선이 다시 무너졌고, 수잔은 카렌스키가 물러나 결혼해버린 뒤로 틀림없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신성한 결혼을 헐뜯고 흉볼 생각은 없지만 말이에요, 사모님. 그렇지만 남자가 혁명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 일에만 정신을 쏟고 결혼은 더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미루어야 하는 거라고요. 이번에 러시아가 당한 일을 보고 나서는 그 사람도 현실에 눈을 떴을 거예요. 그렇지만 교황의 평화 제안에 우드로 윌슨의 답변을 보셨나요? 굉장하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진상을 제대로 표현해놓았는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윌슨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줘도 좋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윌슨이 자기가 한 말의 뜻을 잘 알고 한 말이기만 하다면요. 의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사모님.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최근에 한 짓거리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며칠 전에 그 사람이 로브리지 길 학교에 가서 4학년 학생들에게 받아쓰기 시험을 봤대요. 그 학교는 여름에도 공부를 하거든요. 방학은 봄과 가을에 하고요. 거기 사람들은 어찌 된 게 계절을 거꾸로 산다니까요. 내 조카딸 엘러 베이커가 그 학교에 다니고 있어 들은 이야기예요.

프라이어 씨가 아이들 시험을 치르는 동안 선생님은 머리도 아프고 기분도 좋지 않아서 맑은 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가 있었대요. 아이들은 받아쓰기는 잘했는데, 단어의 의미를 묻자 하나도 모르겠더래요. 아직 배우지도 않은 거였으니까요.
우리 엘러랑 다른 큰 학생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대요. 프라이어 씨의 동생인 아벨 프라이어 씨가 그 학교의 이사로 있는데, 자기들이 단어의 의미를 대답하지 못하면 자기 선생님을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구실을 붙여 쫓아낼 거라는 걱정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샌디 로건 덕분에 그 상황을 모면했다지 뭐예요. 그 아이는 고아원에 사는 아이인데 아주 영리해서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얼마나 무식한 사람인지 금방 파악하고 대충 대답해버리자는 작전을 쓴 거지요.
그 사람이 ‘해부’가 무엇이냐고 묻자 ‘위가 아픈 것입니다.’ 하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신 있게 대답을 했대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원래 좀 무식하잖아요, 사모님. 그 남자도 그 말뜻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하고 칭찬했다지 뭐예요. 그 반 아이들도 그 사람의 수준을 곧 알아차렸대요. 적어도 머리 좋은 아이들 서넛은요. 그래서 아이들이 도리어 그 사람을 놀리기 시작했대요. 진 맥레인은 ‘청각’이라는 말의 뜻을 ‘종교적인 언쟁’이라고 했고, 뮤리얼 베이커는 ‘불가지론자’란 ‘소화불량을 일으킨 사람’을 말한다고 했고, 짐 카터는 ‘신랄함’이란 말은 ‘채소만 먹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대요. 아이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어물쩍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수잔은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구레나룻은 그것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요, 아주 잘했어요.’ 소리만 계속했다지 뭐예요. 엘러는 시치미 떼고 있기가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더군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자 구레나룻은 학생들이 배운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답니다. 그리고 이사회에 로브리지 길 학교가 보석 같은 선생님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겠다고 했대요. 4학년 아이들이 묻는 족족 그렇게 금방 단어 뜻을 대는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하면서요. 그 사람은 그날 싱글벙글하며 돌아갔답니다. 그렇지만 사모님, 이 일은 아주 비밀로 해야 한다고 엘러가 말했으니 로브리지 초등학교 선생님을 위해 비밀을 지켜줘야 해요. 만일 구레나룻이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선생님은 당장 쫓겨나고 말아요.”
그날 오후 메리 밴스가 ‘잉글사이드’로 찾아와 캐나다군이 70고지를 점령했을 때 밀러 더글러스가 다리에 부상을 당해 다리 하나를 잘라내야 했다고 보고했다.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메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메리의 열의와 애국심은 불붙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일단 불이 붙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밝고 굳건하게 타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쪽 다리밖에 없는 남편을 갖게 되었다고 놀리는 말을 하지만 난 다리가 열 개나 있는 사람보라도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밀러가 더 좋아요.”
메리는 아주 훌륭한 태도로 불끈 일어섰고 좀 생각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로이드 조지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난 가게에 왔다가 밀러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어 잠시 들른 거예요. 서둘러야 해요. 오늘 저녁때 루크 매컬리스터네 곡식 낟가리 쌓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제 남자가 별로 없으니 여자들이 추수를 거들어야 해요. 나는 작업복 바지도 마련했는데 그 옷이 나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 알렉 더글러스 부인은 그런 옷을 입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고 입지 말라고 해요. 엘리엇 아주머니까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님이 교실에 들어오자 구레나룻은 학생들이 배운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답니다. 그리고 이사회에 로브리지 길 학교가 보석 같은 선생님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겠다고 했대요. 4학년 아이들이 묻는 족족 그렇게 금방 단어 뜻을 대는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하면서요. 그 사람은 그날 싱글벙글하며 돌아갔답니다. 그렇지만 사모님, 이 일은 아주 비밀로 해야 한다고 엘러가 말했으니 로브리지 초등학교 선생님을 위해 비밀을 지켜줘야 해요. 만일 구레나룻이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선생님은 당장 쫓겨나고 말아요.”
그날 오후 메리 밴스가 ‘잉글사이드’로 찾아와 캐나다군이 70고지를 점령했을 때 밀러 더글러스가 다리에 부상을 당해 다리 하나를 잘라내야 했다고 보고했다.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메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메리의 열의와 애국심은 불붙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일단 불이 붙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밝고 굳건하게 타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쪽 다리밖에 없는 남편을 갖게 되었다고 놀리는 말을 하지만 난 다리가 열 개나 있는 사람보라도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밀러가 더 좋아요.”
메리는 아주 훌륭한 태도로 불끈 일어섰고 좀 생각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로이드 조지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난 가게에 왔다가 밀러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어 잠시 들른 거예요. 서둘러야 해요. 오늘 저녁때 루크 매컬리스터네 곡식 낟가리 쌓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제 남자가 별로 없으니 여자들이 추수를 거들어야 해요. 나는 작업복 바지도 마련했는데 그 옷이 나한테 아주 잘 어울려요. 알렉 더글러스 부인은 그런 옷을 입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고 입지 말라고 해요. 엘리엇 아주머니까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세상은 달라져 가고 있다고요. 그나저나 알렉 더글러스 아주머니를 놀라게 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또 없거든요.”
“참, 아빠. 전 잭 플래그 대신 한 달만 잭 아빠 가게에서 일을 하려고 해요. 아빠만 반대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오늘 약속했어요. 제가 가게를 봐주면 그 아저씨는 농부들을 도와서 추수를 거들 수 있으니까요. 제가 수확하는 일에 직접 나서봤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요. 하지만 여자들도 많이 나서고 있어요. 전 잭 대신 일을 할래요. 짐스 돌보는 일도 낮에는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밤에는 집에 있을 거구요.”
릴라가 말했다.
“설탕이랑 콩 무게를 달고, 버터며 달걀을 흥정하는 일을 네가 좋아하게 될까?”
블라이드 의사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마 좋아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그것도 의무를 다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죠.”
그리하여 릴라는 한 달 동안 카터 플래그네 가게 점원이 되었고, 수잔은 앨버트 크로퍼드의 귀리밭 일을 도와주러 갔다.
수잔은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사람들만큼 일을 잘해요. 낟가리 쌓는 일이라면 그 사람들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요.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앨버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보면서 ‘일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더군요. 그래서 내가 ‘하루만 일을 시켜보고 그때 말씀하시지요. 내, 젠장,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일을 할 거니까.’했지요.”
그 말에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들은 ‘수잔이 배짱 있는 사람이니 일도 아주 잘할 거야.’ 하는 의미로 침묵을 지킨 것이었다. 하지만 수잔은 오해했고 그녀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내가 욕설이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사모님. 내 나이에도 그런 좋지 못한 습관이 생기다니! 이건 어린 아가씨들에게도 나쁜 본을 보이는 일이지요. 이게 다 신문을 너무 많이 본 탓이에요. 신문에는 신성 모독적인 말이 너무 많아요. 내가 젊었을 때처럼 그런 말에 별표를 붙이지도 않고요. 이 전쟁이 모두를 타락시키고 있어요.”
바람에 흰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치마는 안전과 편리성을 위해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채로 낟가리 위에 올라선 수잔의 모습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마른 팔에 넘치는 정신만큼은 비미 리지를 함락시키고 베르됭에서 독일군을 물리친 병사들의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프라이어 씨는 수잔이 일하는 밭을 지나다 수잔이 짚단 집어던지는 것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저 여자는 일하는 솜씨가 대단하군. 아직 젊은 여자 두 사람 몫은 해낼 만하겠는걸. 밀그레이브가 살아 돌아온다면 미란다를 잃을 것이고, 부인보다 돈이 더 많이 드는 가정부를 고용해야 하는데, 거기다 언제 남편을 버리고 도망칠지도 모르잖아. 한번 잘 생각해봐야겠는걸!”
그로부터 1주일 후 오후 늦게 마을에서 돌아온 블라이드 부인은 ‘잉글사이드’ 대문 앞에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발걸음도 멎어버렸다. 너무 괴상한 광경이 부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잉글사이드’ 부엌 쪽에서 뚱뚱하고 그 젠체하는 프라이어 씨가 달려 나왔다. 도대체 그런 장면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얼굴은 잔뜩 공포에 질려 있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바로 그 뒤로 복수의 화신이나 된 듯한 수잔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다란 냄비를 손에 들고 쫓아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 잡히는 날에는 잡아 죽이기라도 할 듯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쫓는 사람이나 쫓기는 사람이나 잔디밭을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왔다. 수잔보다 두세 걸음 먼저 대문에 닿은 프라이어 씨는 와락 문을 열고는 땅에 붙어버린 듯 우뚝 서 있는 ‘잉글사이드’의 여주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냅다 길을 달려 내려갔다.
“수잔!” 
앤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정신없이 달려온 수잔은 냄비를 내려놓고 프라이어 씨 뒤에다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프라이어 씨는 아직도 수잔이 쫓아오는지 알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뛰어갔다.
“수잔, 이게 다 어찌 된 일이지요?”
앤이 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물으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사모님. 내가 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이성을 잃도록 화가 난 것은 처음이네요. 저 못돼먹은 반전론자가 뻔뻔스럽게도 여기, 내 부엌에 나타나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나더러 자기와 결혼해달래요.”
수잔이 여전히 분노에 떨며 외쳤다.
앤은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수잔, 점잖게 거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만일 누가 지나가다가 그런 장면을 보기라도 했다면 어떤 말이 날지 생각해봤어요?”
“그럼요, 사모님. 사모님 말이 옳아요. 난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난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거든요. 얼른 집으로 들어가요.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이야기해줄게요.”
수잔은 냄비를 집어 들고 힘차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분한 마음으로 온몸이 떨렸다. 수잔은 부엌으로 들어가자 냄비를 난로 위에 탁하고 올려놓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모님. 창문을 활짝 열어 부엌 공기를 바꿔야겠어요. 자, 이제 좀 나아진 것 같군요. 그리고 손도 씻어야 해요. 내가 구레나룻 난 보름달과 악수를 했거든요. 그 사람이 처음 부엌에 들어왔을 때요.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그 뚱뚱하고 기름진 손을 내밀지 뭐예요. 그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난 방금 청소를 해서 다행히도 모든 것이 반짝반짝하고 얼룩 하나 없었어요. 그리고 이제 염색약이 끓고 있으니 깔개를 가져다가 저녁 먹기 전에 염색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바로 그때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문가에 서 있더군요. 풀을 먹여 다림질을 한 듯 말쑥하게 차리고요.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악수하고 사모님과 선생님 두 분 다 집에 안 계시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난 미스 베이커를 만나러 왔소.’ 하지 않겠어요.”
수잔은 말을 이었다.
“우선 앉으라고 했지요. 예의는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러고는 부엌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잔뜩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노려봤어요. 뻔뻔스럽기로 소문난 구레나룻 난 보름달도 내가 그러는 데는 좀 쩔쩔매더라고요. 그런데 아, 그놈이 그 작은 돼지 눈에 감상적인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잖아요. 갑자기 끔찍한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내가 처음으로 청혼을 받으려는 순간이라고 무언가가 내게 말하고 있었어요, 사모님. 난 한 번만이라도 청혼을 받고 거절해보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래야 나도 다른 여자들 얼굴을 당당하게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사모님, 내 입에서 이 청혼을 자랑삼아 말하는 소리는 평생 듣지 못할 거예요. 이것은 모욕이에요.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할 거예요. 그런데 아까는 사모님, 내가 너무 놀라서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내가 듣기로는 어떤 남자들은 청혼을 하기 전에 무슨 예고가 되는 말을 조금 한다던데,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의도를 보이기 위해서요. 하지만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내가 폭풍우가 몰아치면 어느 항구라도 마다치 않고 들어갈 사람으로 보였나 봐요. 자기가 청혼만 하면 내가 얼씨구나 하고 자기에게 갈 줄 알았던 거라고요.
하지만 그 사람이 잘못 안 거죠. 그럼요. 그 사람이 잘못 알았지요, 사모님. 그 사람이 아직도 도망치느라 뛰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네요.”
“수잔의 심정은 나도 알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우리 집에서 몰아낼 것이 아니라 좀 더 부드럽게 거절할 수는 없었나요?”
“글쎄,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지요, 사모님. 처음에야 나도 그럴 작정이었지만 그 사람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게 만들고 말았다니까요. 나도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면 염색약 냄비를 들고 그 사람을 몰아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사람과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해줄게요, 사모님. 아까 얘기한 대로 구레나룻이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 옆에 놓인 의자에는 박사가 자고 있었어요. 그 짐승은 자는 체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로 자고 있지는 않았어요. 내가 잘 알아요. 온종일 하이드 씨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이드 씨는 절대로 잠을 자는 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사모님, 요즘 저 고양이가 전보다 더 자주 하이드 씨로 지내는 걸 알아차리셨나요? 독일군이 승리하는 일이 잦으면 저 고양이도 하이드 씨가 되는 일이 더 잦아요. 고양이 얘기는 사모님 판단에 맡기겠어요.
구레나룻은 내가 그 고양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내 비위를 맞출 작정으로 그 통통하게 살찐 손을 내밀어 하이드 씨의 등을 쓰다듬으며 ‘정말 귀여운 고양이군요!’ 하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귀여운 고양이가 그만 그 사람에게 덤벼들어 물어뜯어 버렸지요.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으르렁거리며 문으로 뛰어나가 버렸어요. 구레나룻은 어이없다는 듯 도망치는 고양이를 바라보더니 ‘괴상망측한 해충 같은 놈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동감이지만 그런 내 마음을 그 사람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지요. 게다가 그 사람이 우리 고양이를 해충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나요? 그래서 내가 ‘우리 고양이가 해충이건 아니건 적어도 그놈은 캐나다 사람과 흉악한 독일 놈은 구별할 줄 알아요.’라고 말해줬죠.
사모님, 그게 그 사람을 빈정대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나요? 그런데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더군요.
나는 뭔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얼른 끝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깔개 만들 헝겊을 저녁 식사 전까지 다 염색해놓으려면 꾸물거릴 시간도 없었고요. 그래서 내가 얼른 이야기를 꺼냈어요.

‘프라이어 씨, 뭐 내게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다면 빨리 해줬으면 고맙겠군요. 오늘 저녁때는 굉장히 바쁘니까요.’ 그랬더니 구레나룻은 붉은 수염 속에서 기쁜 듯이 싱글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그러더라고요. ‘미스 베이커는 참 직선적인 성격이군요. 나도 그 의견에 찬성이오. 말을 돌려서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지요.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당신이 나와 결혼해줬으면 해서요.’ 그렇게 된 거예요, 사모님. 나도 드디어 청혼이란 걸 받았어요. 64년이나 기다린 다음에요. 난 그 뻔뻔스러운 피조물을 노려봤죠.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남자라 해도 나는 당신 같은 인간과는 결혼하지 않아요, 조시아 프라이어. 이제 내 대답을 들었으니 그만 돌아가요.’ 하고 소리쳐주었어요.
내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이 얼마나 놀라던지. 너무 놀라 자기 속마음까지 저도 모르게 불쑥 실토해버리더군요, 사모님. 그놈이 글쎄 ‘아니, 내가 결혼할 기회를 주면 댁이 몹시 기뻐할 줄 알았는데요.’ 하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내가 확 돌아버렸죠. 사모님도 내가 충분히 그럴 만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독일 놈이고 반전론자고 나를 그렇게 모욕하고 덤비는데요.
나는 ‘나가!’ 하고 고함을 치면서 저 무쇠 냄비를 집어 들었죠.
구레나룻은 내가 갑자기 돌아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미친 사람이 펄펄 끓는 물감이 든 무쇠 냄비를 들고 서 있으니 위험한 무기라고 생각했겠죠. 어쨌든 나가기는 했지만 사모님이 보신 대로 정상적으로 보기 좋게 나가지는 못했죠. 이제 다시 여기 찾아와 내게 청혼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에 구레나룻 난 보름달 부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여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는 것을 그 사람도 단단히 알게 되었을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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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lax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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