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16

나단비 | 2024.02.11 14:34:33 댓글: 0 조회: 18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558
16

비극으로 끝난 다이애나의 초대





초록 지붕 집의 10월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분지의 자작나무들은 햇빛에 물들어 황금색 옷을 입었고 과수원 뒤편의 단풍나무들은 멋진 진홍색으로, 오솔길에 늘어서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벚나무들은 화려한 붉은색과 구릿빛이 섞인 초록색으로 단장했으며, 저 아래 들판도 햇빛을 받아 한껏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앤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멋진 세상을 한껏 즐겼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어느 토요일 아침, 화려한 나뭇가지들을 한 아름 안고 춤을 추며 걸어오던 앤이 소리를 쳤다.

“이 세상에 10월이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만일 9월에서 11월로 곧바로 넘어가 버린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그렇죠? 이 단풍나무 가지 좀 보세요. 가슴이 떨려오지 않으세요? 전 가슴이 다 두근거려요. 이 가지들로 제 방을 장식해야겠어요.”

“방 어지른다. 넌 밖에서 너무 이것저것 가져다가 방에다 늘어놓고 있잖아. 침실이란 잠을 자는 곳이야.”

미적 감각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마릴라가 말했다.

“오, 꿈을 꾸는 곳이기도 하죠,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방에 예쁜 것들이 많이 있으면 훨씬 더 멋진 꿈을 꿀 수 있는걸요. 전 이 가지들을 파란 화병에 꽂아서 제 탁자 위에 올려놓을 거예요.”

“그러려거든 계단에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오늘 오후에는 카모디에서 부인회 모임이 있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집에 오지 못하니까 매슈 아저씨와 제리 차는 네가 준비해야 한다. 지난번처럼 식탁에 앉기 전에 차 담가두는 걸 깜빡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저도 제가 너무 잘 잊어버려 끔찍해요. 하지만 그날 오후에는‘제비꽃 골짜기’란 이름을 생각해내느라 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다른 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매슈 아저씨는 너무 마음이 너그러우셔서 야단도 치지 않으시고 손수 차를 넣으신 다음 조금 기다려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기다리는 동안 전 멋진 요정 이야기를 해드렸죠.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였거든요. 하지만 그끝부분은 잊어버려서 제가 지어냈어요. 그랬는데 아저씨는 제가 지어낸 부분이 어디서부턴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매슈 아저씨야 네가 한밤중에 일어나 식사를 하자고 해도 좋다고 할 사람 아니니. 어쨌거나 이번에는 잊지 말아라. 그리고 그래도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만 다이애나더러 집에 오라고 해서 오후에 여기서 차를 마시고 같이 놀아도 된다.”

“마릴라 아주머니!”

앤은 두 손을 꼭 잡고 소리를 쳤다.

“어쩌면 이렇게 근사할 수가! 아주머니도 결국에는 상상력을 갖게 되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그런 일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실 수 있었겠어요. 너무너무 근사한 시간이 될 거예요. 어른이 된 기분일 것 같아요. 제 손님이 오는데 차 담그는 일을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저 장미꽃 무늬 찻잔을 써도 될까요?”

“안 돼, 무슨 소리야! 장미꽃 무늬 찻잔이라니! 다음엔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나도 저찻잔은 목사님이 오신다거나 부인회 모임이 있을 때 아니면 써본 적이 없는데. 넌 저기 오래된 갈색 찻잔 세트를 써라. 하지만 체리 절임이 들어 있는 저 작은 노란 단지는 열어도 된다. 이제는 먹어도 될 때가 되었으니까. 이제 맛이 들었을 거야. 그리고 과일 케이크와 과자랑 비스킷도 좀 먹어라.”

“제가 식탁에 앉아 차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앤이 눈을 감고 황홀한 듯 말했다.

“다이애나에게 ‘설탕을 넣을까요?’ 하고 물어보겠죠! 물론 다이애나가 설탕을 넣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물을 거예요. 그리고 과일 케이크 한 조각을 더 들라고, 체리 절임도 더 먹으라고 권하겠죠. 오, 마릴라 아주머니! 생각만 해도 너무 멋져요. 다이애나가 오면 손님방에 모자를 두고 응접실에서 얘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안 돼, 네 손님에게는 거실이면 족하다. 하지만 지난번 교회 친목 모임 때 사용하고 남은 딸기 주스가반병정도 있으니까 마시고 싶으면 다이애나랑 같이 마셔도 된다. 거실 찬장 안 두 번째 선반에 있으니까 과자와 함께 먹어라. 매슈 아저씨는 릴리샌즈 호에 감자를 실어다 주고 와야 하니까 조금 늦으실 거다.”

앤은 분지로날 듯이뛰어 내려갔다. ‘드리아드의 샘’ 가를 지나고 가문비나무 오솔길로 올라가‘비탈길 과수원집’으로 가서 다이애나를 정중히 초대했다. 마릴라가 카모디로 떠나자, 다이애나는 자기 옷 중 두 번째로 좋은 옷을 입고 초대받은 사람답게 방문했다. 다른 때 같으면 노크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달음질쳐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현관문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앤도 역시 두 번째로 좋은 옷을 입고 나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두 소녀는 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것처럼 아주 점잖게 악수를 나누었다. 다이애나가 자기 모자를 벗어놓으려고 동쪽 방으로 갈 때까지도 이 둘은 계속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정중한 태도로 서로를 대했고 거실로 돌아와서도 10여 분을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잘 계시나요?”

배리 부인이 아주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사과 따는 모습을 보았지만 앤이 정중하게 물었다.

“아주 잘 지내십니다. 감사해요. 커스버트 씨는 오늘 오후에 감자를실어다 주러가셨다고요. 그런가요?”

오늘 아침 매슈의 마차를 얻어 타고 하몬 앤드루스 씨 집에다녀왔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네, 올해 우리 집 감자 수확이 아주 좋아요. 아버님의 감자 수확도 좋았으면 좋겠군요.”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과는 많이 땄나요?”

“응, 아주 많이 땄어.”

앤이 점잔빼기를 깜빡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과수원에 가서 빨간 사과를 따먹자, 다이애나. 마릴라 아주머니가 나무에 남아 있는 사과는 맘대로 따먹어도 된댔어. 마릴라 아주머니는 마음이 아주 너그러우신 분이야. 오늘 차를 마시면서 과일 케이크랑 체리 절임도 먹으라고 하셨어. 하지만 손님에게 무얼 먹을 건지 미리 얘기해버리는 건 예의 바른 일이 아니지. 그래서 난 우리가 무엇을 마실 건지는 말해주지 않겠어. 그냥 ‘딸’ 자로 시작되는 것이고 선홍색이라는 것만말해줄게. 난 선홍색 음료수가 좋아. 너는 안 그러니? 다른 색깔보다 맛이 두 배는 더 좋거든.”

과수원에는 열매를 매단 가지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고 소녀들은 오후 내내 즐겁게 이 과수원에서 놀았다. 둘은 용케 서리를 피해 여전히 푸름을 잃지 않은 풀밭 한구석에 앉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사과를 먹거나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해 앤에게 해줄 얘기가 아주 많았다. 거티 파이와옆자리에 앉게 되어 무척 짜증난다고 했다. 거티는 늘 찍찍 소리를 내며 연필을 쓰는 바람에 소름이 끼치고 다이애나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한다는 것이다. 루비 길리스는 크리크에 사는 메리 조 노인이 준 마법 조약돌로 사마귀를 모두 없앴다고 했다. 그 조약돌로 사마귀를 문지르고 보름달이 뜰 때 그 돌을 왼쪽 어깨너머로 던지기만 하면 된단다. 찰리 슬론의 이름이 엠 화이트의 이름과 함께 현관 벽에 적혀 엠 화이트가 엄청 화를 냈다는 얘기도 했다. 샘 볼터는 수업 시간에 필립스 선생님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회초리를 맞았고, 이 일로 샘의 아빠가 학교로 쫓아와 필립스 선생님에게 다시 한 번만 자기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매티 앤드루스가 빨간색 모자와 파란색 술이 달린 새 망토를 입고 학교에 왔는데 어찌나 거드름을 피우며 다니던지 몹시 꼴사나웠다고 했다. 리지 라이트는 마미 윌슨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미 윌슨의 큰언니가 자기 미모를 이용해 리지 라이트 언니의 애인을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모든 아이는 앤이 다시 학교에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단다. 그리고 길버트 블라이드는…….

하지만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의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길버트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서며 안으로 들어가 딸기 주스를 마시자고 했다.

앤은 거실 찬장 두 번째 선반을 찾아보았지만 딸기 주스 병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제일 위 칸에 있었다. 앤은 병을 쟁반에 담아와 컵과 함께 탁자 위에 놓았다.

“한잔 마시도록 해, 다이애나. 난 지금은 아무것도 못 먹겠어.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앤이 정중하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컵 가득 주스를 따라서 그선홍색을 감동스러운 듯 바라본 후 단숨에 마셔버렸다.

“앤, 딸기 주스가 무척 맛이 좋구나. 딸기 주스가 이렇게 맛이 좋은 건지 전에는 몰랐어.”

“맛있다니 나도 기뻐. 원하는 만큼 마음껏 마셔. 난 나가서 불을 좀 살펴보고 올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은 할 일이 무척 많거든.”

앤이 부엌에서 돌아왔을 때 다이애나는 두 번째 잔 가득 주스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앤의 권유에 따라 세 번째 잔도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잔 가득 따른 주스가 너무 아름다워 보였고 맛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내가 마셔본 것 중 최고야. 린드 아주머니가 자기 주스를 아무리 자랑해도 이것이 훨씬 더 맛이 좋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말이야.”

다이애나가 말했다.

“난 마릴라 아주머니의 딸기 주스가 린드 아주머니의 주스보다 훨씬 더 맛있다고 생각해. 마릴라 아주머니는 요리를 아주 잘하셔. 아주머니는 내게 요리를 가르쳐주시려고 하지만 다이애나, 그건 나한테 굉장히 무리야. 요리하는 일에는 상상할 일이 별로 없잖아. 그냥 정해진 대로 따라해야 하는 거니까. 전에는 케이크를 만들다가 밀가루 넣는 걸 잊어버렸지 뭐니. 너와 나에 관한 정말로 멋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는 네가 수두에 걸려서 무척 아프고 모두가 너를 버렸다는 상상을 했어. 하지만 난 용감하게 네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너를 돌보아주었지. 그런 다음 나도 수두에 걸려 죽게 되었어. 난 저 묘지의 미루나무 아래 묻혔고 네가 내 무덤 곁에덩굴장미나무를 심어 너의 눈물로 물을 주었지. 넌 절대로 너를 위해 희생한 네 어린 시절 친구를 잊지 않았던 거야. 오, 이건 정말로 슬픈 이야기지, 다이애나.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케이크 반죽을 할 때 눈물이 내 볼로 줄줄 흘러내렸단다. 그러다가 난 밀가루 넣는 걸 잊어버렸고 케이크를 완전히 망쳐버렸어. 케이크에 밀가루가 빠져서는 안 되잖아. 물론 마릴라 아주머니는 무척 화를 냈지. 난 정말이지 아주머니께 아주 두통거리야. 지난주에도 푸딩 소스 때문에 엄청 화가 나셨어. 화요일 점심에 우리는 자두 푸딩을 먹었고 푸딩과 소스가 많이 남았어. 거의 한 주전자나 되게 말이야. 마릴라 아주머니는 한 끼 식사를 더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남았으니까 부엌 선반에 올려놓은 다음 잘 덮어두라고 했지. 난 정말로 덮으려고 했었어, 다이애나. 그런데 그걸 들고 가면서 내가 수녀가 된 상상에 빠진 거야. 물론 난 개신교도이지만 상상만 가톨릭으로 한 거지. 속세와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서 베일로 상심한 가슴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수녀가 된 상상을 하느라 푸딩 소스를 덮어야 한다는 걸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지 뭐니.그다음날에야 생각이 나서 찬장으로 달려갔지만, 세상에, 다이애나, 쥐 한 마리가 그 소스 속에 빠져 죽어 있지 않겠어! 정말 소름이 끼쳤지만 그 쥐를 수저로 떠 뜰에다 버린 다음 수저를 세 번이나 씻어야 했어. 마릴라 아주머니는 밖에서 젖을 짜고 계셔서 들어오시면 그 소스를 돼지에게 주어도 되느냐고 물을 참이었지. 하지만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을 때는 내가 숲을 헤매고 다니는 서리의 요정이 되어 나무들이 원하는 대로 빨간색이나 노란색으로 나무 색깔을 바꾸어주고 다니는 상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소스 같은 건 또다시 새까맣게 잊어버렸지 뭐니. 그런데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나한테 사과를 따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어. 그런데 마침 그날 아침에 스펜서베일에서 체스터 로스 씨와 부인이 오신 거야. 그분들은 정말이지 형식을 따지는 분들이거든. 특히 체스터 부인은 더 하셔. 마릴라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을 때는 식사 준비가 다 끝나 모두들 식탁에 앉아 있었어. 나는 될 수 있는 한 점잖고 품위 있게 행동하려고 했지. 체스터 부인이 내가 예쁘지는 않더라도 숙녀다운 아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으니까. 모든 것이 좋았지. 마릴라 아주머니가 한 손에는 자두 푸딩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따뜻하게 데운 그 푸딩 소스를 들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다이애나, 난 그 순간 정말 너무 깜짝 놀랐어. 갑자기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를 질러버렸지. ‘마릴라 아주머니, 그 소스를 먹으면 안 돼요. 그 안에 쥐가 빠졌어요. 제가 미리 말씀드린다는 게 그만 깜빡 잊어버렸어요.’ 오, 다이애나, 난 그 끔찍했던 순간을 백 살이 될 때까지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체스터 부인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무 창피해서 마루를 뚫고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고. 그 아주머니는 완벽한 주부라는데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겠니. 마릴라 아주머니의 얼굴은 꼭 장작불처럼 빨개져서 한 마디도 하시지 못했어. 그 푸딩과 소스를 그대로 갖고 나가신 다음 딸기 절임을 갖고 들어오셨어. 내게도 좀 먹어보라고 했지만 난 한 입도 삼킬 수가 없었고 내 머릿속은 꼭 석탄을 태우고 있는 것 같았어. 체스터 로스 부부가 돌아가신 다음 나는 물론 마릴라 아주머니께 엄청나게 혼이 났지. 다이애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다이애나가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다시 주저앉으면서 손을 머리에 올려놓았다.

“나, 아픈 것 같아. 나, 나, 집에 가야겠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다이애나가 말했다.

“어떻게 차도 마시지 않았는데 집에 간다고 하니? 얼른 가서 차를 준비해올게.”

앤이 실망해 소리를 쳤다.

“나, 집에 가야만 해.”

다이애나가 좀 바보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점심은 먹어야지. 과일 케이크와 체리 절임을 조금만 가져다줄게. 소파에 좀 누워 있어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어디가 아프니?”

앤이 안타깝게 물었다.

“나 집에 가야 해.”

그 말만이 다이애나가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았고, 앤의 간청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난 손님이 차도 마시지 않고 집에 간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오, 다이애나, 네가 정말로 수두에 걸린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나도 너랑 같이 가서 너를 돌봐줄게. 그건 나를 믿어도 돼. 난 절대로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차를 마실 때까지만 있었으면 좋겠어. 어디가 아프니?”

앤이 신음 소리를 냈다.

“나 너무 어지러워.”

다이애나가 말했다.

다이애나는 정말 몹시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며 걸었다. 실망한 앤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다이애나의 모자를 가져다주고 배리 씨네 마당 울타리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런 다음 내내 눈물을 흘리며‘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와서는 딸기 주스를 다시 찬장에 집어넣고 시무룩하게 매슈와 제리를 위해 식사 준비를 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고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비가주룩주룩내려서 앤은‘초록 지붕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월요일 오후에는 마릴라의 심부름으로 앤이 린드 부인 집에 다녀와야 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안 있어 앤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앤은 부엌으로뛰어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니?”

마릴라가 궁금하고 당황해서 물었다.

“또 린드 부인한테 가서 버릇없이 굴었니?”

앤은 대답도 하지 않고 눈물만 펑펑 흘리며 점점 더 서럽게 울었다.

“앤 셜리,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지금 당장 똑바로 앉아서 왜 우는지 이유를 얘기해.”

앤이 비극의 화신이나 되어버린 듯 일어나 앉았다.

“린드 아주머니가 오늘 배리 아주머니 댁에 갔었는데요. 배리 아주머니의 기분이 무척 언짢아 있었대요. 제가 토요일에 다이애나를 엉망으로 취하게 해서 집으로 보냈다고요. 제가 나쁜 아이라면서 앞으로 절대로 다이애나랑 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대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전 절대로 이 비극을 이겨내지 못할 거예요.”

마릴라는 놀라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이애나를 취하게 했다고! 앤, 네가 정신이 나간 거니? 아니면 배리 부인이 그런 거니? 도대체 다이애나한테 무얼 주었어?”

정신을 차린 마릴라가 말했다.

“그 딸기 주스밖에는 준 것이 없어요. 전 딸기 주스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인지 정말로 몰랐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다이애나가 큰 컵으로 석 잔이나 마시긴 했지만 취하는 것인지는 몰랐다고요. 다이애나의 말투가 토머스 아저씨랑 아주 비슷하긴 했어요. 하지만 전 다이애나를 취하게 하려고 주스를 주지는 않았어요.”

앤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취하다니,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마릴라가 거실 찬장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거실 찬장에는 3년 전에 담근 커런트19) 과실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마릴라의 커런트 과실주 담그는 솜씨는 에이번리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지만 일부 엄격한 사람들은 마릴라가 과실주를 담근다고 비난했고, 배리 부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마릴라는 딸기 주스를 앤에게 말한 대로 거실 선반에 둔 게 아니라 지하실에 두었다는 생각이 났다.

마릴라는 손에 과실주 병을 들고 부엌으로 왔다. 웃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쏟아져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앤, 넌 확실히 말썽을 일으키는데는 천재적인 재주가 있구나. 네가 다이애나에게 준 것은 딸기 주스가 아니라 커런트 과실주였어. 넌 이게 과실주인 줄 몰랐단 말이냐?”

“전 맛을 보지 않았어요. 그게 주스인 줄로만 알았다고요. 전 정말이지 대접을 잘하고 싶었는데, 다이애나가 무척 아파버려 집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배리 아주머니가 린드 아주머니에게 말하기로는 다이애나가 무척 취해 있었대요. 다이애나의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냥 바보처럼 웃기만 하고는 곧 잠이 들어버렸다고 했어요. 다이애나 엄마가 냄새를 맡고서야 취한 줄 아셨대요. 그리고 어제는 내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고 해요. 배리 아주머니는 무척 화가 났고 제가 일부러 다이애나를 취하게 했다고 생각하신대요.”

앤이 말했다.

“난 배리 부인이 다이애나를 먼저 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료수건 뭐건 욕심 사납게 석 잔이나 마시다니.”

마릴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큰 컵으로 석 잔이나 마셨으면 그게 주스였다고 해도 탈이 안 났겠어. 어쨌거나 이 일은 내가 과실주를 만든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험담거리가 되겠구나. 목사님이 반대하신 이후로 3년 동안이나 과실주를 담근 적도 없지만 말이다. 저것은 아플 때 쓰려고 둔 건데. 자아, 자아, 그만 울거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유감이지만 네가 이 일에 책임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전 울어야만 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단 말이에요. 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저에게 등을 돌렸어요. 다이애나와 저는 영원히 헤어져야만 한다고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우리가 처음 우정을 맹세할 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앤이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앤. 배리 부인도 네가 일부러 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알면 널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네가 장난을 쳤다거나 뭐 그런 걸로 여기는 모양인데, 저녁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보면 될 거야.”

“전 용기가 없어요. 다이애나의 일로 화가 나 있는 분을 만나기가 두려워요. 마릴라 아주머니가저 대신가주시면 안 될까요? 저보다 훨씬 더 위엄 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테니 제 말보다 더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러마.”

마릴라가 그러는 편이 낫겠다고 여기고 말했다.

“앤, 그만 울어라. 다 잘될 거야.”

‘비탈길 과수원집’에서 돌아온 마릴라는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던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릴라의 모습이 보이자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앤이 베란다로 쏜살같이달려 나왔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얼굴을 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로군요. 배리 아주머니가 저를 용서해주지 않겠다고 하시던가요?”

앤이 너무 슬프게 말했다.

“배리 부인도 참!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내가 모든 일이 실수였다고 충분히 알아듣게끔 설명했건만 내 말은 조금도 믿지를 않더구나. 그리고 역시나 내가 과실주 만든 것을 다시 들춰내고, 내가 항상 과실주가 사람에게 해가 없다고 말했지 않느냐는 이야기만 늘어놓더라니까. 나는 과실주를 한꺼번에 석 잔이나 마시면 안 되는 거라고 해줬지. 그리고 나 같으면 뭐가 됐건 한꺼번에 석 잔씩이나, 그것도 가득가득 마시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아이는 엉덩이를 두들겨줘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겠다고 했다.”

마릴라가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마릴라는 몹시혼란스러워하는 작은 아이 혼자만 베란다에 남겨두고 매우 기분이 언짢아 부엌으로 휙 가버렸다. 앤은 모자도 쓰지 않고 어둠이 내리는 차가운 가을 공기 속으로 나왔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단호한 발걸음으로 클로버가 시들어버린 들판을 지나 또박또박 걸어갔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서 서쪽 숲을 지나고 낮게 걸려 있는 달빛을 받고 있는 가문비 숲도 지났다. 조그맣게 노크를 하자 배리 부인이 문가로 나왔다. 앤은 문가 계단에서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입술로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배리 부인은 편견이 심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한번 화가 나면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지간해서는 다시 마음을 풀지도 않았다. 배리 부인이 생각하기에는 앤이 순전히 장난으로 다이애나를 취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어린 딸을 그런 아이와 가깝게 지내도록 뒀다가는 자기 아이도 물들지 모른다고 믿었다.

“무슨 일이니?”

부인이 차갑게 물었다.

앤은 양손을 꼭 모아 쥐었다.

“오, 배리 아주머니, 저를 용서해주세요. 전 다이애나를 취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아주머니라면 불쌍한 고아 소녀가 좋은 사람에게 입양이 되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단짝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를 일부러 취하게 했겠어요? 전 그게 딸기 주스인 줄 알았다고요. 전 정말 그것이 딸기 주스라고 믿었어요. 오, 제발 제가 더는 다이애나와 놀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랑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되면 아주머니는 제 모든 삶을 어두운 고통의 먹구름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사람 좋은 린드 부인 같으면 이런 말이면 한순간에 마음을 풀었을 테지만 배리 부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배리 부인은 이 말에 더 짜증만 났다. 앤의 이런 과장된 말과 연극 같은 몸짓이 의심스럽기만 했고 이 아이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생각마저들었다. 그래서 아주 차갑고 잔인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다이애나가 사귈 만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집으로 돌아가고, 앞으로는 행동을 올바르게 해라.”

앤의 입술이 떨렸다.

“다이애나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실 수는 없으세요?”

앤이 간청했다.

“다이애나는 아빠 따라 카모디에 갔다.”

말을 마친 배리 부인이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앤은 절망에 빠져‘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제 마지막 희망도 사라져버렸어요. 제가 직접 배리 아저씨 댁에 가서 다이애나 엄마를 만나고 왔어요. 아주머니는 저를 매우 모욕적으로 대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그 아주머니를 교양 있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기도를 올리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배리 아주머니처럼 고집불통인 사람은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앤,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니.”

마릴라가 핀잔을 주긴 했지만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웃음 발작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사실 마릴라가 그날 저녁 매슈에게 이 모든 얘기를 해주었을 때는 앤의 시련에도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잠자러 가기 전 동쪽 방으로 살짝 들어가 울다 지쳐 잠이 든 앤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릴라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가엾은 것.”

마릴라가 아이의 젖은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몸을 숙여 얼굴이 빨개진 채 잠들어 있는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19) 유럽 북서부가 원산지인 나무 열매로 캐나다 야산에도 많이 자란다고 하며, 즙이 많고 신맛이 강해 주로 잼이나 주스 또는 젤리를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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