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7~38 (1권 끝)

나단비 | 2024.02.16 12:09:11 댓글: 0 조회: 12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596
37

죽음의 신





마릴라의 놀라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매슈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그래요? 매슈 오라버니, 어디 아파요?”

그때 앤은 하얀 수선화를 양손에 쥐고 현관을 들어서고 있었다. 매슈는 접힌 신문을 손에 쥐고 현관 입구에 서 있었다. 얼굴은 기묘하게 굳어 있고 잿빛이었다. 앤은 꽃을 떨어뜨린 채 부엌을 가로질러 매슈에게 쏜살같이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마릴라도 달려왔다. 하지만 둘 모두 너무 늦었다. 둘이 닿기도 전에 매슈는 문지방에 쓰러져버렸다.

“아저씨가 기절했다. 앤, 빨리 마틴을 불러라. 빨리, 서둘러! 헛간에 있다.”

마릴라가 소리쳤다.

우체국에서 막 집에 돌아온 일꾼 마틴은 곧바로 의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가는 길에 배리 씨 집에 들러 소식을 알려서 배리 부부와 마침 그 집에 와 있던 린드 부인까지 달려왔다. 그동안 앤과 마릴라는 매슈의 의식을 되돌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보았다.

린드 부인은 이성을 잃은 마릴라와 앤을 옆으로 비키게 하고 매슈의 맥박을 짚어보고 매슈의 가슴에 귀를갖다 댔다. 마침내 린드 부인이 슬픈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오, 마릴라, 이제 아무 소용이 없어요.”
린드 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린드 아주머니, 설마…… 매슈 아저씨가, 매슈 아저씨가…….”
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얘야, 그런 것 같다. 이 얼굴을 봐라. 나처럼 이런 얼굴을 많이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단다.”
앤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이 찾아와 마지막 숨결을 거두어간 듯했다.
마침내 의사가 도착해 매슈를 살펴보고는 매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 아무런 고통도 없었을 것이며, 사인은 갑작스러운 충격인 듯하다고 말했다. 마틴이 아침에 우체국에서 가져왔고, 매슈의 손에 쥐어진 신문에서 그 충격의 비밀이 밝혀졌다. 에비 은행이 파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매슈의 사망 소식은 금세 에이번리 전체에 퍼졌고, 온종일 친구들과 이웃들이‘초록 지붕 집’에 몰려들어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위해 사사로운 일들을 대신해주었다. 소심하고 조용하던 매슈 커스버트가 죽음을 맞아서야 처음으로 중요한 주인공이 되었다.
적막한 밤이‘초록 지붕 집’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자 그 낡은 집이 잠잠해지고 조용해졌다. 긴 회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채 창백한 얼굴로 관 속에 누워 있는 매슈는 잠을 자고 있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응접실에 안치되어 있는 관 주변으로는 꽃들이 빙 둘러 놓였다. 매슈의 어머니가 막 결혼했을 때 집 정원에 심어놓았던 사랑스럽고 수수한 꽃들이었다. 매슈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이 사랑하던 꽃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앤은 눈물을 꾹 참고, 고통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그 꽃들을 꺾어 매슈의 품에 안겨주었다. 앤이 매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배리 부부와 린드 부인이 그날 밤 이들과 같이 밤을 지새워주려고 남았다. 다이애나가 동쪽 방으로 올라가 창가에 서 있는 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앤,오늘 밤에는 내가 너랑 같이 자줄까?”
앤이 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고마워, 다이애나. 오늘 밤엔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래도 오해하지는 않겠지? 난 무섭지 않아. 아저씨가 돌아가신 후로 난 잠시도 혼자 있지 못했어. 이제라도 혼자 있고 싶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조용히 아저씨의 죽음을 생각해봐야겠어.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절반은 매슈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절반은 돌아가신 지가 아주 오래된 일인 것 같아. 그리고 그 이후로 난 이렇게 죽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
다이애나는 앤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의 자제력과 성품을 깨뜨리고 폭풍우처럼 격렬하게 쏟아내는 마릴라의 비통함이 앤의 눈물 없는 고통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앤에게 혼자 슬픔에 잠기는 시간을 주려고 기꺼이 나가주었다.
앤은 홀로 남겨지면 눈물이 흘러나오기를 바랐다. 자기를 지극히 사랑했고 한없이 친절했던 매슈 아저씨, 어제저녁까지 황혼 속을 함께 걸었는데 이제는 섬뜩할 정도로 평화로운 표정으로 아래층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 있는 매슈 아저씨를 위해 눈물도 흘리지 않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인 듯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창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언덕 너머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기도를 드릴 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고 똑같은 불행감과 둔탁한 통증만 느껴졌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을 때까지도 그 고통은 계속되었다.
앤은 한밤중에 깨어났다. 주변이 온통 너무나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날의 기억이 슬픔의 파도처럼 앤에게 밀려왔다.어제저녁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에서 헤어질 때 빙긋이 웃어 보이던 매슈 아저씨의 환한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우리 아이, 난 우리 아이가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말하던 매슈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앤은 가슴이 터지도록 울었다. 앤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릴라가 살며시 방에 들어와 앤을 달래주었다.
“이런, 이런, 그렇게 서럽게 울지 마라, 앤. 그렇다고 아저씨가 살아 돌아오실 수는 없잖니. 그렇게 울면 안 돼. 하기야 오늘 나도 울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눈물이 쏟아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내게 언제나 친절하고 훌륭한 오라버니였다. 하느님이 가장 잘 아실 거다.”
“마음껏 울고 싶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가슴이 아픈 것보다 우는 것이 나아요. 아주머니, 잠시만이라도 제 곁에 계시고 저를 안아주세요. 예, 이렇게요. 다이애나를 옆에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다이애나는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다이애나가 슬퍼할 일은 아니잖아요. 다이애나는 우리 집 사람이 아니니까요. 다이애나라도 제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건 우리의 슬픔이에요. 아주머니와 저의 슬픔이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이제 아저씨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앤이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니, 앤. 네가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네가 우리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오, 앤, 내가 네게 엄격하고 가혹하게 대했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너를 매슈 아저씨만큼 사랑하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하지는 말거라. 내가 어떻게 너를 대했든지 간에 내 속에 있는 마음을 너한테 말하기가 어려웠을 뿐이야. 하지만 오늘 같은 때는 말을 하기가 더 쉽구나. 나는 너를 내 진짜 피붙이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한다. 네가‘초록 지붕 집’에 온 이후로 줄곧 넌 내 기쁨이고 위안이었어.”
그로부터 이틀 후 매슈 커스버트는 ‘초록 지붕 집’의 문턱을 넘어, 그가 평생 경작한 밭과 한없이 사랑했던 과수원, 그리고 직접 심은 나무들을 지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묻혔다. 그 후 에이번리는 다시 평소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갔다.‘초록 지붕 집’에서도 이런저런 일들이 일상의 틀에 빠져들며 예전과 다름없이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익숙한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없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매슈 아저씨 없이도 예전과 다름없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앤은 슬픔을 느꼈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슬픔이 밀려왔다. 또 전나무 숲 뒤에서 떠오르는 해와 정원에서 살포시 얼굴을 내미는 연분홍빛 새싹을 보면 옛 기억처럼 반가운 마음이 밀려온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매슈 아저씨에게 면목 없는 자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다이애나가 찾아오면 즐겁고 다이애나의 유쾌한 말과 행동에 웃음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아름다운 꽃과 사랑과 우정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세상은 여전히 앤을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며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여전히 앤은 삶이 흥미로웠다.
어느 날 저녁에 목사관 정원을 앨런 부인과 함께 거닐며 앤이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는데도 그런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 매슈 아저씨를 배신하는 일 같아요. 전 아저씨가 너무 그리워요. 언제나 그래요. 하지만 사모님, 그래도 세상과 삶이, 인생이 제게는 언제나 너무아름답고흥미롭게 느껴져요. 오늘도 다이애나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서, 저는 웃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일이 있었을 때 전 다시는 웃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또 어떤 이유로든 웃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어요.”
앨런 부인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매슈 아저씨가 여기계신다면네가 웃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셨을 거다. 아저씨는 네가 주변의 즐거운 일들에서 즐거움을 찾기를 원하셨을 거야. 아저씨는 지금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지만 네가 예전과 똑같이 지내기를 바라실 거야. 난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자연적인 치유의 힘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 기분을 나도 이해한다. 우리 모두 같은 경험이 있는 것 같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주변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을 때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 또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가 삶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진정으로 슬퍼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앤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묘지에 가서 매슈 아저씨의 무덤에 장미를 심고 왔어요. 오래전에 아저씨의 어머니께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왔다는 작은 스코틀랜드 장미 묘목이에요. 매슈 아저씨는 언제나 그 장미를 가장 좋아하셨거든요. 가시 줄기에 아주 작고 예쁜 꽃이 피는 장미예요. 아저씨 무덤 옆에 그 장미를 심어드리니까 기분이 좋아졌어요. 아저씨 곁에 가서 아저씨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을 한 기분이었거든요. 천국에서도 아저씨가 그런 장미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아저씨가 오랫동안 여름마다 사랑해주던 그 작은 하얀 장미의 영혼들이 천국에서 아저씨를 만났을지도 몰라요.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가 혼자 계시는데 해가 지면 더욱 외로워하시거든요.”
“네가 대학에 진학해 집을 떠나면 더 외로워지실 텐데, 걱정이다.”
앨런 부인이 말했다.
앤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인사를 하고,‘초록 지붕 집’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마릴라는 현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앤도 그 곁에 앉았다. 두 사람 뒤로는 문이 열려 있고, 문이 닫히지 않게 끼워둔 커다란 분홍빛 조가비 안쪽의 매끄러운 나선형 무늬가 언뜻 바다의 일몰을 연상시켰다.
앤은 연노란색 인동꽃 가지를 몇 개 꺾어 머리에 꽂았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 위에서 꿈속의 축복처럼 흘러내리는 향긋한 향내를 앤은 좋아했다.
“네가 밖에 있는 동안 스펜서 의사 선생님이 오셨었다. 내일 시내에 안과 의사가 온다면서 날더러 꼭 가서 눈을 진찰받아 보라더구나. 나도 가서 진찰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그 의사가 내 눈에 맞는 안경을 쓸 수 있게 해준다면 그보다 감사할 일이 없겠지. 내가 없는 동안 혼자 있어도 괜찮겠니? 마틴이 나를 시내까지데려다주겠지만 다림질할 것도 있고 빵도 구워야 하는데.”
“전 상관없어요. 다이애나가 말동무를 하러 와줄 거예요. 그동안 다림질도 해놓고 빵도 예쁘게 구워놓을게요. 손수건에 풀을 먹이거나 진통제를 넣어 케이크를 만들까 걱정하지는 마세요.”
마릴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옛날에는 실수투성이였는데, 앤. 그래서 항상 곤경에 빠지고 말이다. 난 네가 귀신에게라도 홀린 줄 알았다. 네가 머리에 염색을 했던 때는 생각나니?”
“그럼요. 그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앤이 맵시 있게 땋아 내린 머리 가닥을 만지작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제가 머리 때문에 걱정했던 때를 생각하면 가끔 웃음이 난다니까요. 그렇다고 많이 웃지는 않아요. 그때는 머리칼이 정말 큰 고민거리였으니까요. 전 머리카락과 주근깨 때문에 정말 괴로웠어요. 이제 주근깨는 완전히 없어졌고, 사람들이 제 머리칼을 적갈색이라며 멋있다고 해요. 물론 조시 파이는 아니지만요. 어제는 조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제 머리칼이 더 빨간색으로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검은 옷을 입어서 더 빨갛게 보인다나요. 또 빨간 머리인 사람도 그런 머리에 익숙해질 수 있느냐고도 물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한때는 조시 파이를 좋아해 보려 영웅적이라 불릴 만한 노력도 해보았는데 이젠 포기하기로 했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조시 파이는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조시도 파이 집안사람이니까 사귀기가 힘들긴 할 거다. 그런 사람들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는 엉겅퀴만큼도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런데 조시도 가르칠 거라고 하든?”
마릴라가 심한 비난을 쏟아놓았다.
“아니요, 조시는 내년에 퀸스 학교를 다시 다닐 거래요. 무디 스퍼전과 찰리 슬론도요. 제인과 루비는 선생님이 될 건데, 둘 다 가르칠 학교도 정했어요. 제인은 뉴브리지 학교에서 가르칠 거고 루비는 서부에 있는 어느 학교래요.”

“길버트 블라이드도 가르친다면서?”
“네.”
앤이 짧게 대답했다.
“그 애는 정말 훤하게 생겼더라. 지난 일요일에 교회에서 봤는데, 키도 크고 남자답게 보이더라. 그 애 아버지가 그 나이였을 때와 무척 닮았더라. 존 블라이드도 아주 멋진 청년이었다. 옛날에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였고, 사람들은 그를 내 애인이라고들 했지.”
마릴라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앤이 당장 흥미가 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서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왜 그분하고…….”
“우리는 싸웠어. 존이 내게 용서를 빌었지만 내가 용서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는 용서해주고 싶었단다. 내가 골이 나고 화가 나서, 처음엔 그를 혼내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블라이드네 식구가 고집이 좀 세거든. 한편으로는 늘 서운한 마음이 있었단다. 기회가 왔을 때 그를 용서해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했어.”
“그럼 아주머니 삶에도 낭만이 조금은 있었네요.”
앤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거라고 짐작했다. 나를 보고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사람은 겉만 보고는 절대로 그 속을 모르는 법이야. 사람들은 모두 나와 존의 일을 잊어버렸어. 나조차도 잊고 있었지. 그런데 지난 일요일에 길버트를 보자 지난날이 다시 떠오르더구나.”




38
모퉁이 길





다음 날 마릴라는 시내로 나갔고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다. 앤이 다이애나를 ‘비탈길 과수원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오자, 마릴라가 머리를 손에 기댄 채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마릴라의 이런 낙심한 모습을 보자 앤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마릴라가 이렇게 맥을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많이 피곤하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 잘 모르겠다. 피곤도 피곤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마릴라가 지친 듯 앤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안과 의사는 만나셨고요? 뭐라고 하던가요?”
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 의사를 만나서 눈을 진찰받았다. 의사 선생 말로는 책 읽고 바느질하는 걸 완전히 포기하면, 여하튼 눈을 혹사시키는 일 따위를 하지 않으면 눈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고 두통도 나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울지 않도록 조심하고, 처방해준 안경을 쓰고 지내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6개월 이내에 눈이 아주 멀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 눈이 멀다니! 앤,어떻게 하면 좋니!”
놀란 앤은 짧은 비명을 지르고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앤이 목멘 소리였지만 힘차게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조심하면 시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을 거예요. 또 의사의 처방대로 안경을 쓰면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니까 훨씬 좋잖아요.”
“난 그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 책도 읽지 못하고 바느질도 못 하고,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면 내가 무슨 재미로 살겠니? 앞을 못 볼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또 외로울 때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니? 그래, 말을 해봤자 무슨 뾰족한 수도 없고.차 한 잔만갖다 주면 고맙겠구나. 힘이 다 빠져 이젠 일어설 기운도 없구나. 여하튼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마라. 동네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며 동정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마릴라가 씁쓸하게 말했다.
마릴라가 저녁 식사를 끝내자 앤은 마릴라에게 침대로 가서 좀 자라고 권하고, 자기도 동쪽 방으로 올라가 불도 켜지 않고 창가에 앉았다. 앤의 눈물과 무겁고 괴로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슬프게도 집으로 돌아왔던 날 이곳에 앉았을 때와는 모든 일이 너무나달라져 버렸다.
그때만 해도 앤의 마음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했고, 약속된 미래는 장밋빛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앤은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잠자리에들었을 때쯤에는입가에 미소를 되찾았고, 마음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낸 것이다. 앤은 이 의무를 회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일생의 벗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마릴라가 마당에서 어떤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앤이 내다보니 그 사람은 카모디에서 온 존 새들러라는 부동산 매매인이었다.앤은 그 사람과 무슨 말을 했기에 마릴라의 표정이 저런지 알고 싶었다.
“새들러 씨가 무슨 말을 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내가‘초록 지붕 집’을 팔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던지 우리 집을 사고 싶다고 왔구나.”
마릴라가 창가에 앉아 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과 의사의 경고를 잊었는지 눈물을 흘렸고, 목소리도 갈라져 들렸다.
앤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신다고요!‘초록 지붕 집’을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로‘초록 지붕 집’을 파시려는 건 아니겠죠?”
“앤, 어쩔 도리가 없구나. 오랫동안 생각해봤다. 내 눈이라도 건강하면 이 집을 지키고, 좋은 일꾼을 고용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관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언젠가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거고, 또 집안일을 내가 감당하기도 힘들 것 같구나. 오, 내가 살아서 이 집을 팔아야 할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일이 나쁜 방향으로 꼬이기만 하고, 결국에는 아무도 이 집을 사려고 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잖니. 게다가 우리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그 은행에 있었고, 지난가을에 매슈 오라버니가 쓴 수표도 좀 있더구나. 린드 부인도 내게 농장을 팔고 어디에 전세 들어 살라고 조언을 하더라. 자기와 함께 살자는 뜻일 게다. 하지만 모두 팔아도 큰돈은 아닐 거다. 밭도 자그맣고 집도 낡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밥을 굶지 않고 살기엔 충분할 거다. 네가 장학금이라도 받아서 정말 고맙다. 그런데 네가 방학에 돌아올 집이 없어서 어떻게 하니? 하지만 넌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는다.”
마릴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초록 지붕 집’은 절대로 팔 수 없어요.”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앤, 나도 팔고 싶지 않단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혼자 살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니. 여기서 혼자 살면 괴롭고 외로워서 미쳐버릴지도 몰라. 또 시력도 언젠간 완전히 잃게 될 거고.”
“아주머니를 이 집에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아주머니 곁에 있을 거예요. 전 레드먼드에 가지 않아요.”
“레드먼드에 가지 않는다고! 앤, 무슨 소리야?”
마릴라가 손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앤을 쳐다보았다.
“말씀드린 대로예요. 장학금을 받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가 시내에 나갔다가 오신 날 밤 그렇게 결심했어요. 제가 어려움에 처한 아주머니를 혼자 내버려둘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아주머니가 저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동안 많이 생각했고 계획도 세워두었어요. 이제부터 제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배리 아저씨가 내년에 농장을 빌리고 싶어 하셔요. 그러니까 아주머니는 농장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선생이 될 거예요. 여기 학교에 지원을 했어요. 하지만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이사회에서 길버트 블라이드에게 선생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모양이더라고요. 하지만 카모디 학교에는 갈 수 있을 거예요.어제저녁에 블레어 상점에 들렀을 때 블레어 아저씨가 그렇게 말해주셨어요. 물론 에이번리 학교에 있는 것만큼 좋거나 다니기 편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따뜻한 때는 집에서 지내면서 카모디까지 제가 직접 마차를 몰고 다닐 수 있어요. 겨울에도 금요일에는 집에 올 수 있고요. 그러니까 말을 팔면 안 돼요. 제가 이렇게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 두었다고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아주머니에게 책도 읽어드리고 즐겁게 해드릴 거예요. 아주머니가 지루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게 해드릴 거예요. 우리는 이 집에서 함께 아늑하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 아주머니랑 저랑 둘이서요.”
마릴라는 앤의 말을 들으면서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앤, 네가 여기서 함께 지내면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하지만 나를 위해 네가 그렇게 희생하는 걸 허락할 순 없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희생이 아니에요.‘초록 지붕 집’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그보다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없을 거예요. 우리는 이 소중한 보금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해요. 저는 이미 결심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레드먼드에 가지 않아요! 전 여기 머물면서 가르칠 거예요. 저 때문에 걱정하지는 마세요, 눈곱만큼도.”
앤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 포부는…… 그리고…….”
“전 그 어느 때보다도 야심에 차 있어요. 야심의 목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이에요. 전 좋은 선생님이 되기로 했어요. 전 아주머니의 시력도 지켜드릴 거예요. 또 여기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혼자서 대학과정을 조금씩 공부할 거예요. 전 계획이 아주 많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일주일 동안 그것만 생각했거든요. 여기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살 거예요. 그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제가 퀸스를 떠나올 때는 제 미래가 제 앞에 곧게 뻗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앞길을 죽 다 그려볼 수 있었지만 이제 제 앞길에 구부러진 길이 생겼어요. 그 모퉁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저도 몰라요. 그 길 너머로 또 어떤 길이 이어질지, 영광스럽고 편안한 길이 될지, 고난과 그림자의 연속일지 아니면 새로운 삶, 새로운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죠. 하지만 그 구부러진 길, 언덕, 골짜기 너머에도 뭔가는 계속될 거예요.”
“그래도 네가 장학금을 포기하는 걸 허락하고 싶지는 않구나.”
마릴라가 장학금 생각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절 막지는 못하실걸요. 저도 이젠 나이가 열여섯 살 반이나 되었다고요. 게다가 린드 아주머니가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제가 노새처럼 고집도 세잖아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절 불쌍하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전 동정받고 싶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이 정다운‘초록 지붕 집’에서 지낸다는 생각만으로도 제 가슴은 벅차요. 아주머니와 저만큼 이 집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당연히 이 집을 지켜야지요.”
“넌 정말로 착한 아이야! 네가 나에게 새 생명을 준 것 같구나. 어떻게 해서든 너를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내게 그럴 힘이 없구나. 그러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겠다. 그래, 네 뜻대로 하마, 앤.”

마릴라가 말했다. 앤 셜리가 대학에 진학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집에 머물면서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는 소식이 에이번리에 널리 퍼지자, 그에 관해 많은 얘기가 오갔다. 대부분이 마릴라의 눈에 알지 못한 까닭에 마릴라가 어리석은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앨런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앨런 부인이 앤에게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말해주자, 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마음 좋은 린드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여름날 저녁, 앤과 마릴라가 현관에 나와 앉아 있을 때 린드 부인이 찾아왔다. 황혼이 내리고 하얀 나방들이 정원의 곳곳을 날아다니며, 박하향이 이슬 머금은 대기 속을 가득 채우는 이 무렵에 거기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앤과 마릴라는 좋아했다.
린드 부인은 분홍색과 노란색 접시꽃들이 높다랗게 줄지어 서 있는 문 옆의돌의자에 육중한 몸을 내려놓으며 피로와 안도가 섞인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앉으니까 좀 살겠네. 온종일 걸어 다녔어요. 90킬로그램이나 되는 몸을 두 다리로만 지탱하려니까 좀 버겁기는 하네요. 마릴라는 몸이 뚱뚱하지 않으니 복 받은 거예요. 감사할 일이지. 앤, 네가 대학에 가려던 생각을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다 기뻤다. 넌 여자가 편하게 살 만큼은 충분히 교육을 받았잖니. 여자가 남자들과 함께 대학에 다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머릿속에욱여넣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할 거예요, 린드 아주머니. 여기‘초록 지붕 집’에서 교양 과정을 공부할 거예요. 제가 앞으로 대학에서 배우게 될 모든 걸 미리 공부할 거예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린드 부인이 놀라죽겠다는 듯 양손을 쳐들어 올려 보였다.
“앤 셜리, 그러다가 제명에 못 죽겠다.”
“조금도요. 전 잘해낼 수 있어요. 무리하진 않을 거라고요. ‘조시아 앨런 부인50)이 항상 하는 말처럼’ 저도 ‘엔간히’ 할 거라고요. 겨울밤은 기니까 여유 있는 시간이 많을 거예요. 저는 자수에는 소질이 없잖아요. 아주머니도 아시겠지만 전 카모디에서 가르칠 거예요.”
“몰랐다. 난 네가 여기 에이번리에서 가르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사회에서 너에게 선생 자리를 주기로 결정했거든.”
“린드 아주머니!”
앤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요, 이사회에서 길버트 블라이드에게 주기로 약속했다고 하던데요!”
“처음엔 그렇게 결정했었지. 하지만 네가 이 학교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길버트가 이사회를 찾아가 지원을 철회하겠다면서 너를 채용해달라고 부탁했다더라. 그래서어제저녁에 학교에서 그 문제로 회의를 했고. 길버트는 화이트 샌즈에서 가르치게 됐다고 하더라. 물론 길버트는 너를 위해서 에이번리 학교를 포기한 거다. 네가 마릴라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걸 길버트도 잘 아니까. 정말 자상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 같더구나. 화이트 샌즈에서 살려면 하숙을 해야 하는데 자기를 희생한 거지. 길버트가 대학에 진학하려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잖니. 여하튼 그래서 이사회에서 너를 채용하기로 한 거다. 토머스가 집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해주었을 때 나는 정말 너무 기뻤다.”
“그렇다고 제가 그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길버트가 저를 위해 희생하는 걸 모르는 체 넘어갈순 없어요. 저 때문에…….”
“네가 길버트를 막을 수는 없을 거다. 화이트 샌즈 학교 이사회와 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다더라. 그러니까 네가 거절해도 길버트에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물론 넌 에이번리 학교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거다. 넌 잘해낼 거야. 이젠 파이 씨네 아이들도 모두 졸업했으니까. 조시가 마지막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이 씨네 아이들이 20년 동안이나 학교를 차례로 다녔구나. 그 집안 애들의 인생 목표는 학교 선생들에게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것이었던 것 같다. 저런! 배리 씨네 집에서 깜박거리는 게 뭐냐?”
“다이애나가 저에게 와 달라는 신호예요. 옛날부터 우리는 죽 그래왔어요. 왜 그러는지 얼른 가보고 올게요.”
앤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앤이 클로버 비탈길을 사슴처럼 달려 내려갔고, 곧‘유령의 숲’의 전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린드 부인이 너그러운 눈길로 앤의 뒤를 좇았다.
“아직도 애 같은 면이 많아요.”
“다른 눈으로 보면 숙녀다운 면이 훨씬 더 많지요.”
순간 마릴라가 예전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하지만 마릴라는 과거의 당찬 모습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린드 부인은 그날 밤 토머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릴라 커스버트 성격이 많이 물러졌어요. 정말이라니까요, 그럼.”
다음 날 저녁 앤은 매슈의 무덤가에 새 꽃을 놓아주고, 장미에 물도 주려고 에이번리 묘지를 찾아갔다. 미루나무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무덤들 사이에서는 잡초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앤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묘지가 좋아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매슈의 무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앤이 묘지에서 물러나‘반짝이는 호수’까지 이어져 있는 긴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는해 질무렵이 다 되어서였고, 앤의 눈앞에 환상적으로 펼쳐진 에이번리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꿈처럼 달콤한 클로버 들판 위를 부는 바람이 맑은 공기를 실어왔고, 나무들 사이로 집집마다 새어 나오는 불빛이 반짝거렸다.
저 너머로 안개가 내리고 자줏빛을 띤 바다에서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서쪽 하늘은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들이 감미롭게 뒤섞였고, 연못에 비친 하늘은 한층 부드러운 색조를 띠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앤은 가슴을 두근대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영혼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아, 오랜 친구 같은 이곳,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게 너무 기뻐.”
앤이 혼잣말을 했다.
언덕 중간쯤 내려왔을 때 키가 큰, 한 청년이 휘파람을 불며 블라이드네 대문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길버트였다. 길버트가 앤을 알아보고는 불던 휘파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정중히 모자를 벗었지만, 그때 앤이 멈춰 서서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길버트는 그렇게 지나쳤을 것이다.
“길버트, 날 위해 에이번리 학교를 포기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고마워하는 걸 알아줬으면 해.”
앤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길버트가 얼른 앤이 내민 손을 잡았다.
“내가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야, 앤. 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기뻐. 이제부터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저지른 옛 실수 말이야, 정말로 용서가 안 되겠어?”
앤이 웃으면서 손을 빼려 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 연못가에서 이미 너를 용서했어. 내가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 내가 바보처럼 고집을 부렸던 거야. 솔직히 다 털어놓자면, 난 그 이후로 계속 후회하며 지냈어.”
길버트가 몹시 흥분해서 말했다.
“우린 진짜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처음부터 우린 좋은 친구가 되라고 태어났어. 네가 너무 오랫동안 그 운명을 거부한 거지. 우리는 많은 일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공부는 계속할 생각이지? 나도 그럴 거야. 가자, 집까지 바래다줄게.”
앤이 부엌으로 들어서자 마릴라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오솔길까지 너랑 같이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니, 앤?”
“길버트 블라이드요. 배리 아저씨네 언덕에서 만났어요.”
앤이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서 말했다.

“너와 길버트 블라이드가 그렇게 친한 사이인 줄 몰랐다. 대문 앞에 서서 30분씩이나 얘기를 나누고 말이다.”
마릴라가 태연스레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아니었죠. 좋은 적수였죠.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되는 게 훨씬 더 낫겠다고 결정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30분이나 거기에 서 있었어요? 몇 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는 5년이나 얘기를 하지 않고 지냈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은 그날 밤 흐뭇한 마음으로 자기 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벚나무 가지 사이로 살며시 가르랑거렸고, 박하 향기가 앤의 코끝까지 올라왔다. 분지의 뾰족한 전나무 위로는 별들이 반짝였고 언제나처럼 다이애나의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전나무들 틈새로 희미하게 빛났다.
앤이 퀸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앞으로 곧게 뻗어 있다고 생각했던 길은 막혔고, 앤의 시야는 좁아졌다. 그러나 앤은 길이 좁아졌다 해도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들이 피어날 것임을 알았다.
성실한 노력과 가치 있는 포부, 그리고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건 앤의 기쁨이었다. 그 무엇도 앤의 천부적인 상상력과 꿈속의 이상 세계를 빼앗지 못한다. 모든 길에는 항상 모퉁이가 있게 마련이다.
앤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온하다.’”51)


<1권 끝>

50) 조시아 앨런 부인은 미국 작가 마리에타 홀리(Marietta Holley, 1836~1926)가 쓴 소설의 주인공 사만다를 말한다. 홀리는 여성의 권리, 인종차별 등의 소재로 유머와 방언을 많이 섞어 글을 썼다.
51)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의 1841년 작 <피파가 지나간다(Pippa Passes)>의 마지막 부분. ‘아침의 노래’ 혹은 ‘봄의 노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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