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3~4

나단비 | 2024.02.29 22:40:16 댓글: 0 조회: 9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0823
3

해리슨 씨 집을 방문하다





해리슨 씨의 집은 추녀가 낮고 회칠이 된 구식 건물로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을 등지고 서 있었다.
덩굴 식물이 그늘을 드리운 베란다에서 소매도 없는 셔츠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해리슨 씨는 누군가 집 쪽으로 난 길을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놀라고 당황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전날 성질을 부린 일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리슨 씨의 이런 행동으로 앤은 그나마 남아 있던 용기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
“지금도 저렇게 화가 나 있는데, 내가 저지른 잘못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더 화를 낼까.”
앤은 비참한 기분으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해리슨 씨는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고, 얼마간은 불안해 보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파이프를 한쪽으로 내려놓고 웃옷을 걸친 다음 해리슨 씨는 앤에게 먼지로 가득 쌓인 의자를 정중히 권했다. 새장 철망으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앵무새의 말만 아니었다면 앤은 충분히 환대를 받은 셈이었다. 앤이 자리에 앉자 마자 그 말 많은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앵무새 ‘진저’가 소리를 쳤다.
“이런, 이런, 저 빨간 머리 계집애가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이 앵무새의 말에 해리슨 씨와 앤의 얼굴 중 누구 얼굴이 더 빨개졌는지 모르겠다.
“저 앵무새 말에는 신경 쓸 것 없어. 저놈은…… 저것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니까. 선원이었던 내 동생이 준 거지. 뱃사람이 말을 골라서 쓰지는 않으니까. 저 앵무새도 그런 말투를 배운 모양이야.”
해리슨 씨가 앵무새에게 사나운 얼굴을 해보이고는 말했다.
“네, 그렇겠죠.”
앤은 자기가 이 집에 온 용건을 생각해서 화도 내지 못한 채 대꾸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해리슨 씨에게 싫은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남의 소를 주인의 동의를 받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게 팔아버린 주제에 앵무새가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있다 한들 불평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그 ‘빨간 머리 계집애’란 얘기에는 기분이 상했다.
“제가 고백할 것이 있어서 왔는데요, 아저씨. 저…… 저…… 그건…… 그 저지종 소 때문이에요.”
앤이 마음을 굳게 먹고 말을 시작했다.
“이런, 이런, 그럼 그 소가 또 내귀리밭에 들어갔단 말이야? 아니, 괜찮아……. 그랬다 하더라도 괜찮아. 그래도 상관없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난……. 내가 어제는 너무 성급하게 굴었지. 밭에 또 들어갔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마라.”

해리슨 씨가 불안하게 말했다.
“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나쁜 일이에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런, 그럼 그 소가 또 내 밀밭에 들어갔단 말이야?”
“아니, 아니에요. 밀밭이 아니고요. 저, 실은…….”
“그럼양배추밭이구나! 그 소가 내양배추밭을 망가뜨렸어. 내가 전시회에 출품하려고 기르고 있는 건데, 응?”
“양배추밭이 아니에요, 아저씨.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제가 무슨 일로 왔느냐 하면요. 하지만 제발 제 말을 중간에서 막지는 말아주세요. 그럼 제가 너무 불안해지거든요. 제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아무 말씀도 말아주세요. 제 말을 다 듣고 나면 아저씨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아주 많을 거예요.”
앤이 그렇게 말했지만 마지막 말은 겉으로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래, 난 입을 다물고 있지.”
해리슨 씨는 그렇게 약속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저만은 그 약속에 아랑곳하지 않고 “빨간 머리 계집애!” 소리를 계속해서 지껄여대서 결국에는 앤도 발끈하고 말았다.
“제가 어제 우리 소를 젖소 우리 안에 가두어두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 카모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니 우리 소가 아저씨네귀리밭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다이애나와 저는 밭에서 소를 몰아냈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옷은 흠뻑 젖어버렸고 지치고 화도 몹시 났죠.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시어러 씨가 우리를 보고는 그 소를 사겠다고 나섰어요. 전 그 자리에서 소를 20달러에 팔아버렸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좀 기다렸다가 마릴라 아주머니와 상의했어야 옳았어요. 하지만 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일을 저질러버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제 이런 성격을 알죠. 시어러 씨는 그 소를 오늘 오후 곧장 기차에 실어 데려가 버렸어요.”
“빨간 머리 계집애.”
진저가 아주 경멸스럽다는 듯 말했다. 해리슨 씨가 벌떡 일어나 다른 새라면 공포로 얼어붙어버릴 만큼 무서운 표정으로 진저를 노려보았지만 이 앵무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리슨 씨는 진저의 새장을 옆방에 갖다 두고 문을 닫아버렸다. 진저는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갇히게 된 것을 알자 풀이 죽어 잠잠해졌다.
“자, 이제 이야기를 계속해봐. 내 동생이 저 새에게 예절이라는 것을 가르쳐놓질 않아서.”
해리슨 씨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 차를 마시고는 젖소 우리로 나가보았는데, 아저씨…….”
앤이 몸을 앞으로기울이며,아이 적부터 해오던 습관대로 두 손을 모아 쥐고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커다란 회색 눈을 해리슨 씨의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에 고정시켰다.
“그런데 제 소는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그대로였어요. 제가 시어러 씨에게 팔아버린 소는 아저씨네 소였어요.”
“이런, 이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해리슨 씨가 이 뜻밖의 결말에 아연실색한 듯 소리를 쳤다.
“오, 그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에요. 전 늘 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거든요.”
앤이 슬픈 듯 말했다.
“전 그런 일로 아주 유명해요. 그럴 시기는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다음 달 3월이면 전 열일곱 살이 되니까요. 아직도 때가 아닌 모양이에요. 아저씨, 제가 용서를 빌면 너무 뻔뻔스러운 건가요? 다시 소를 찾아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만 여기 소를 판 돈이있어요. 아니면 원하신다면 대신 우리 돌리를 드릴게요. 돌리는 매우 좋은 소예요.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이런, 이제 그만해도 돼. 뭐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뭐 크게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사고는 생기는 법이지. 나도 가끔은 성질이 급해. 앞뒤 생각 없이 너무 급하게 굴지. 나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들이 앞뒤 생각 없이 튀어나와 버리고. 내가 그런 사람인 걸 뭐 어쩌겠어. 만일 그 소가 내양배추밭에 들어갔더라면 지금쯤 아마……. 하지만 뭐 상관없어, 그 소는 없으니까, 그러니 괜찮아. 대신 내가 아가씨네 소를 갖지. 그 소를 없애버리고 싶어 했다면 말이야.”
“오, 감사합니다, 아저씨. 화도 내지 않으시다니 너무 기뻐요. 전 아저씨가 화를 낼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어제 내가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여기 와서 그 얘기를 하자니 얼마나 두려웠을지 나도 짐작이 가. 그렇지? 그렇지만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입이 좀 험악한 늙은이이기는 해도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사실이 그렇다면 그냥 뱉어버리고 말지.”
“린드 부인도 그래요.”
앤이 말해놓고 곧 아차 싶었다.
“누구? 린드 부인이라고?”
해리슨 씨가 기분이 상한 듯 물었다.
“내가 그런 수다쟁이 할멈 같다는 말은 하지 마. 난 전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상자 안에 든 건 뭐지?”
“케이크예요.”
앤이 얼른 반갑게 대답했다. 뜻밖에도 해리슨 씨의 부드러운 태도로 인해 앤의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것이다.
“아저씨 드리려고 제가 가져왔어요. 케이크를 자주 드시지 못하실 것 같아서요.”
“그래, 그리고 난 케이크를 아주 좋아하지. 이거 아주 고마운 일이야. 겉은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정말로 속까지 다 맛있었으면 좋겠군.”
“그럼요. 전에는 케이크를 잘못 만들었지만, 그건 앨런 부인이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잘 만들어요. 이건 제가 개선회 모임을 위해 만들었지만, 또 만들면 돼요.”
“자,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차 준비를 할 테니까,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 케이크를 먹으면 어때?”

“제가 차 준비를 할까요?”
앤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해리슨 씨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차도끓일 줄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날 잘 모르는 거라고. 지금까지 마셔본 적이 없는 최고의 차를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아가씨가 차를 끓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봐. 다행히 지난 일요일에 비가 와서 깨끗한 찻잔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앤은 얼른 일어서서 차 준비를 했다. 차를 넣기 전에 찻주전자를 몇 번이나 씻었고 스토브도 닦았다. 그런 다음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 식탁을 차렸다. 찬장이 어찌나 더러운지 기절할 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해리슨 씨가 빵과 버터 그리고 복숭아 통조림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었다. 앤은 정원에서 꽃도 한 다발 꺾어다 식탁을 장식하기까지 했고, 식탁보의 얼룩은 눈을 딱 감고 보지 않기로 했다. 곧 차 마실 준비가 끝났고, 앤과 해리슨 씨는 서로마주 앉았다. 앤은 해리슨 씨에게 차를 따라주며 학교와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앤 자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해리슨 씨가 외로울까 봐 걱정된다면서 진저를 다시 데려왔다. 앤은 누구든, 무엇이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서 진저에게호두 조각을 주었다. 하지만 너무나 마음이 상해버린 진저는 이 호의를 거부해버렸다. 횃대에 시무룩하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초록색과 황금색 공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이 앵무새 이름을 진저라고 지었어요?”
모든 것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앤이 물었다. 진저라는 이름은 이렇게 아름다운 깃털을 갖고 있는 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선원이었던 내 동생이 지은 이름인데, 아마도 성질이 고약해서 그런 이름을 붙여준 것 같아. 그래도 난 이 앵무새가 좋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 아주 놀랄 거야. 진저도 물론 단점이 많지. 그 때문에 난처한 일도 여러 번 겪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 새가 욕을 잘한다고 싫어하지만 그 버릇이 고쳐지질 않더군. 나도 그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도 그랬어. 어떤 사람은 무조건 앵무새한테 편견을 가져.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난 앵무새가 좋아. 진저가 내겐 좋은 친구거든.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거야.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말이야.”
해리슨 씨는 앤이 진저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 이 마지막 말을 강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앤은 이상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 보이는 이 작은 남자에게서 호감이 느껴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상당히 친해졌고, 해리슨 씨는 개선회를 알게 되었으며 이 모임에 찬성한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좋은 일이야, 잘 밀고 나가라고. 이 마을에는 개선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 특히 사람들 말이야.”
“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앤이 얼굴을 붉혔다. 스스로에게나 아니면 특별히 친한 사람들끼리는 에이번리 마을이나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사소한 결점을 인정하겠지만, 해리슨 씨처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이 마을 사람을 비난한다면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전 에이번리가 정말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도 아주 좋은 사람들이고요.”

“정말 성미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군. 머리 색깔이 그런 사람은 대개 성질이 그렇지. 물론 에이번리는 아름답고 좋은 곳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도 않았을 테고. 하지만 앤도 이곳에 단점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아?”
해리슨 씨가 앤의 붉게 달아오른 뺨과 성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결점이 있어서 여기가 더 좋아요. 전 아무런 결점이 없는 것은 사람이든 마을이든 좋아하지 않아요. 전 완벽한 사람은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밀턴 화이트 부인은요, 자기는 완벽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지만 완벽하다고 하는 한 사람 얘기는 질리게 들었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자기 남편의 첫 번째 부인이었대요. 완벽한 여자와 결혼했던 남자와 결혼한다면 무척 힘들겠지요?”
“완벽한 아내와 결혼한 남자가 더 힘들 거야.”
해리슨 씨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한 어조로 말을 되받아쳤다.
차를 마시고 나자 해리슨 씨가 아직 몇 주일은 쓸 수 있을 만큼 그릇이 많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앤은 설거지를 했고 기꺼이 마루도 쓸어주고 싶었지만 비가 보이지 않았다. 앤은 비가 어디 있느냐고물었다가는그런 것이 아예 없다는 대답이 나올 것 같아 묻지도 못했다.
“가끔씩 와서 내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겠어?”
앤이 집을 나서자 해리슨 씨가 말했다.
“집도 가깝고 이웃끼리는 서로 가까이 지내야 하니까. 난 그 개선회인가 뭔가 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고,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런데 누굴 먼저 시작할 거지?”

“우리는 사람을 개선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개선하려고 하는 것은 장소예요.”
앤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해리슨 씨가 이 계획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해리슨 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앤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았다. 저녁놀이 지는 들판을 경쾌하게 걸어가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난 퉁명스럽고 불평이나 해대는 외로운 노인네야. 하지만 저 소녀가 내게 다시 젊음을 전해주는 것 같군. 이런 유쾌한 기분을 다시 또 느껴보고 싶어.”
해리슨 씨가 소리 내어 혼잣말을 했다.
“빨간 머리 계집애.”
진저가 놀리기라도 하듯 다시 쉰 소리를 냈다.
해리슨 씨가 앵무새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이 고약한 놈 같으니, 동생이 너를 데려왔을 때 목을 확 비틀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다시 한 번만 날 난처하게 해봐라.”
앤은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마릴라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했다. 마릴라는 아무리 기다려도 앤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막 나가보려던 참이었다.
“이 세상은 꽤 살 만한 곳이에요. 그렇죠,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행복한 결론을 내렸다.
“린드 아주머니는 요전 날에 이 세상이 살 만하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셨지만요. 항상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하면 실망할 일만 생기지 기대대로 되는 법은 없다고 하시면서요. 그 말도 맞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면도 있어요. 나쁜 일도 항상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나쁘리라고 각오했던 것만큼 좋은 일이 되어버리기도 하잖아요. 오늘 밤에도 전 틀림없이 불쾌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고 해리슨 씨 집에 갔는데 아저씨는 저한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덕분에 기분 좋게 보내고 돌아왔잖아요. 아저씨와 제가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해가면서 지낸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아요.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앞으로는 절대로 누구네 소인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소를 팔아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 앵무새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어요!”

4

서로 다른 생각





어느 날 해 질 무렵 제인 앤드루스, 길버트 블라이드, 그리고 앤 셜리는 숲으로 나 있는 ‘자작나무 길’과 큰길이 만나는 길가 담장 옆, 가문비나무 가지가 부드럽게 살랑거리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앤이 그날 오후 집에놀러 온제인을 바래다주러 나왔다가 중간에 길버트를 만났고, 셋은 운명의 날이 될 내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내일이 바로 9월 1일, 학교가 방학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여는 날 아닌가. 제인은 뉴브리지로, 길버트는 화이트 샌즈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너희 둘은 모두 나보다는 나아.”
앤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은 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겠지만 난 예전에 같이 학교에 다녔던 애들을 가르쳐야 하잖아. 린드 아주머니는 내가 첫날부터 인상을 쓰면서 강하게 나가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나를 존중하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셨어. 하지만 난 선생님이 화를 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아, 생각하면 할수록 책임감이 더 무겁게 느껴져.”

“난 우리 모두 다 잘해낼 거라고 생각해.”
제인은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제인은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포부 같은 것으로 자신을 들볶지 않았다. 그저 꼬박꼬박 월급이나 받고 이사회 눈 밖에 나지 않도록 하면서 장학관의 우수교사 명부에 들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 외에 더 바라는 것은 없었다.
“학교에서는 질서를바로잡는일이 중요하니까, 선생님이 얼마간은 학생들에게 화를 내기도 해야 해. 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줄 거야.”
“어떻게?”
“물론 회초리로 때려줘야지.”
“오, 제인,그러지 마.그러면 안 돼.”
앤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난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해. 벌이 필요한 아이한테는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제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애들에게 절대 매질 같은 건 할 수 없어. 그런 일은 조금도 옳다고 믿지 않으니까. 스테이시 선생님도 우리를 때리지 않았지만 우리는선생님 말씀을 아주 잘 들었잖아. 필립스 선생님은 항상 때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고. 매질은 절대 안 돼. 만일 내가 매를 들어야 하는 날이 온다면 차라리 학교를 떠나는 게 더 나을 거야.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을 거라고. 난 학생들이 날 좋아하게 해서 내 말이라면 아이들이 무엇이든 따르고 싶게 하겠어.”
앤도 똑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제인이 말했다.
“어쨌거나 매질은 하지 않겠어. 그건 교육적이지 않아. 제인, 너도 아이들을 때릴 생각은 말아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야.”
“길버트,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학생들 중에는 꼭 매질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제인이 물었다.
“아이들을 때리는 건 너무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어떤 경우라도?”
앤도 자기주장을 굽힐 수 없어 얼굴까지 붉혀가며 물었다.
“글쎄.”
길버트는 자신의 신념과 앤의 이상을 일치시켜보고자 애를 쓰며 천천히 자기 생각을 밝혔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나도 아이들을 매질하는 것은 좋다고 보지 않아. 앤의 말대로좀 더나은 방법이 있을 거야. 체벌은 마지막 수단으로 삼아야 해. 하지만 제인의 말대로 매를 맞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체벌이 아이를 위해 더 좋은 경우도 가끔씩 있을 거야. 그러니까 체벌은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길버트는 두 사람을 다 만족시키려고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학생이 말썽을 부리면 때리겠어. 잘못이라는 걸 알게 하려면 때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니까.”
제인은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나는 결코 매질을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고, 또 필요한 일도 아니야.”
앤은 실망한 듯 길버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데 건방지게 말대답이나 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니?”
제인이 물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조용히 불러서 잘 알아듣게 하지만 엄하게 타이르겠어. 찾아내려고만 하면 누구나 장점을 갖고 있는 법이야. 그것을 찾아내어 길러주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니까. 퀸스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도 교장 선생님에게 그렇게 배웠잖아. 너는 아이를 때려서 좋은 점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거니? 아이들에게 읽기, 쓰기, 산수를 가르치는 것보다 뭔가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레니 교수님도 말했잖아.”
“하지만 장학관이 보는 건 읽기, 쓰기, 산수뿐이잖아. 아이들 성적이 좋지 못하면 우수 교사의 조건에 들지 못하게 돼.”
제인이 말했다.
“나는 우수 교사 명단에 오르는 것보다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졸업을 한 다음에도 진정한친구로 기억되는선생님이 되고 싶어.”
앤이 주장했다.

“아이들이 잘못을 해도 절대로 벌 같은건 주지않을 작정이니?”
길버트가 물었다.
“아니, 그럴 때는어쩔 수 없이벌을 주어야겠지. 하지만 쉬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든가, 교실 앞에 세워둔다든가, 아니면 시를 베껴 쓰게 하는 벌을 줄 거야.”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함께 앉게 하는 벌은 주지 않겠지?”
제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길버트와 앤은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옛날에 앤이 길버트와 같이 앉으라는 벌을 받았을 때는 참으로 슬프고 약이 올랐었다.
“어쨌든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제인이 헤어지면서 철학자처럼말했다.
앤은 나뭇잎이 살랑거리고 풀고사리 향기가 감도는 그림자 진‘자작나무 길’을 따라 ‘제비꽃 골짜기’를 지나고 전나무 숲 아래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버드나무 연못’을 지나 ‘연인의 오솔길’을 걸어‘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이 모두는 앤과 다이애나가 오래전에 지은 이름이다. 앤은 별이 반짝이는 여름 저녁 들판과 숲의 아름다움에 한껏 젖어 천천히 길을 걸으며 내일부터 짊어져야 할 새로운 임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앤이‘초록 지붕 집’뜰에 당도했을 때 열려 있는 부엌 창문을 통해 린드 부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드 아주머니는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내게조언해주러오셨을 거야. 지금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겠어. 아주머니의 충고는 후춧가루처럼 맵거든. 조금만 하면 좋을 텐데 말씀이 너무 많아서 고문이 되어버려. 해리슨 아저씨 집에 가서 수다나 떨다 와야겠다.”
앤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저지종 소 사건 이후로 해리슨 씨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방문을 했고 해리슨 씨와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따금씩 해리슨 씨가 지나치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는 바람에 민망하고 곤란한 때도 종종 있긴 했지만. 진저는 여전히 앤에게 경계심을 품고 갈 때마다 “빨간 머리 계집애!” 소리를 해댔다.
해리슨 씨는 이런 진저의 버릇을 고쳐보려고 앤이 오는 모습이 보이면 아주 기쁜 듯이 호들갑을 떨며 “이런, 이런, 우리 예쁜 아가씨가 오는구먼.” 하고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놔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진저는 그 속셈이 훤히 보인다는 듯 더욱 안하무인이었다. 또한 해리슨 씨는 앤이 없는 곳에서는 앤을 칭찬하는 말을 곧잘 했지만 앞에 대놓고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아, 내일 쓸 회초리를 꺾으러 숲에 다녀오는 길이시구먼.”
앤이 베란다 계단으로 올라서자 해리슨 씨가 인사 삼아 한 말이었다.
“어머나, 아니에요.”
앤이 분하다는 듯 말했다. 앤은 이런 농담도 항상 진담으로 알아들어서 놀려주기 아주 좋은 상대였다.
“전 절대로 학교에서 회초리 같은 건 쓰지 않을 거라고요, 해리슨 아저씨. 물론 칠판을 가리키는 지시봉은 있어야죠. 하지만 전 그것도 그냥 지시봉으로만 쓸 거라고요.”

“그렇다면 대신에가죽 채찍을 쓰시겠다고? 글쎄, 난 잘 모르겠지만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회초리는 맞을 때만 아프지 사실은가죽 채찍으로 때려야 아픈 게 오래가거든. 맞아.”
“전 그런 건 아무것도 쓰지 않을 거라고요. 전 제 학생들을 때리지 않아요.”
“이런, 이런, 그러면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겠다는 건가?”
해리슨 씨가 정말 의외라는 듯 물었다.
“사랑으로요.”
“그것만으로는안 될걸. 어림도 없을 거다, 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말도 있잖아.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날마다 날 때렸지. 장난질을 하지 않을 때도 머릿속으로 못된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면서 때렸어.”
해리슨 씨가 말했다.
“아저씨가 학교에 다니실 때와는 교육 방법이 많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지. 내 말을 명심해. 회초리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어린 녀석들을 다룰 수가 없을 거라고. 불가능해.”
“글쎄요, 우선은 제 방법을 먼저 시험해보려고 해요.”
의지가 강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끈질기게 고집하는 성격인 앤이 말했다.

“그래, 앤도 꽤 고집이 세지. 하지만 글쎄다, 이제 보라고. 언젠가는 앤도 화를 참지 못하는 날이 올걸.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화를 잘 내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훌륭한 이상을 잊어버리고 매질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앤은 아직 누군가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어려. 어려도 너무 어리지. 아직도 아이 같은데 뭘.”

그 모든 말을 듣고 앤은 그날 밤 좀 비관적인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해 아침 식탁에 앉았을 때는 너무 창백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이런 앤의 모습에 놀란 마릴라는 아주 뜨거운 생강차를 만들어주었다. 앤은 생강차가 왜 좋은지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참고 마셨다. 나이와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적 같은 효험이 있는 것이라면 한 통이라도 기꺼이들이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실패하면 어쩌죠?”

“단 하루 만에 실패해버리는 일은 없어. 그리고 앞으로 시간은 많지 않니. 네 문제는 말이다, 앤,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점도 당장 고치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안 되면 실패했다고 단정해버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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