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9~10

나단비 | 2024.03.02 04:09:32 댓글: 0 조회: 6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046
9

공회당 페인트 색깔 소동





해리슨 씨가 몹시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그 귀찮은레이철린드 할멈이 오늘 또 와서는 예배실에 깔 카펫 살 돈을 기부해달라고 졸라대지 뭐야. 그렇게 진절머리 나는 여자는 아주 처음이야. 설교니 성경 구절이니 해설이니 실생활 응용이니 하는 것들을 잔뜩 머릿속에 집어넣고 와서는 벽돌을집어 던지듯 마구 내게 쏘아대.”
베란다 끝에 앉아 잿빛의 11월 황혼녘을 즐기고 있던 앤이 몽롱해 보이는 얼굴을 어깨너머로 돌렸다. 부드럽고 매혹적인 서쪽 바람이 이제 막 갈아놓은 들판을 지나뜰 아래휘어진 전나무를 악기 삼아 재미있는 노랫가락을 울려주었다.
“문제는 아저씨와 린드 아주머니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지 않을 때는 항상 문제가 생겨요. 저도 처음에는 린드 아주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곧 아주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죠.”
앤이 설명했다.
“노력으로 린드 부인과 어울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싫어도 억지로 먹다 보면 좋아지게 된다고바나나를 꾸역꾸역 먹는 짓은 못 하겠다. 그 여자를 이해하라고? 참견 잘하기로 소문난 여자라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 그 여자한테도 그렇게 얘기해주었다.”
해리슨 씨가 심기가 사나운 듯 말을 내뱉었다.
“어머나, 아주머니 기분이 몹시 상했겠군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저도 아주 오래전에 린드 아주머니께 끔찍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땐 너무 화가 나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지 고의로는 절대로 그런 말 못 해요.”
앤이 책망하듯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고, 난 누구에게나 사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실을 전부 다 말한 것은 아니죠. 사실 중에서도 기분이 나쁠 말만 한 거잖아요. 아저씨는 저에게도 머리가 빨갛다는 말은 열두 번도 더 했지만 제 코가 예쁘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앤이 반박했다.
“난 말하지 않아도 네가 아는 줄 알았거든.”
해리슨 씨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제 머리가 빨간색인 것도 제가 알거든요. 하지만 옛날보다는 훨씬 더 색이 진해졌다고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이제 더 안해주셔도 돼요.”
“그래, 그래, 네가 그렇게 예민하게 여기는 문제라면 말하지 않으마. 그렇지만 앤, 나는 내 속에 있는 말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는 게 습관이 돼서 네가 날 이해해주어야 해.”

“하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그리고 그게 아저씨 습관이라 하더라도 괜찮은 건 아니에요. 만일 어떤 사람이 핀이나 바늘로 사람을 쿡쿡 찌르고 다니면서 ‘실례지만 이건 내 습관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린드 아주머니도 남의 일에 참견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쳐요. 사실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주머니에게 ‘당신은 아주 친절하고 언제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마음 좋은 사람이오.’라는 얘기도 하셨나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주 마음이 좋은 분이라고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티머시코튼이 린드 부인의 버터를 훔쳐내서 사왔다고 얘기했대요. 코튼 부인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린드 아주머니에게 버터 맛이 나쁘다고 불평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그렇게 돼서 미안하다고만 하고 말았대요.”
“나도 린드 부인에게 좋은 점도 있다는 건 알아.”
해리슨 씨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지. 물론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고. 하지만 난 그 카펫을 위해 돈을 내놓지는 않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나한테 끊임없이 돈을 내놓으라고 해. 그 공회당에 페인트칠을 하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니?”
“아주 잘되고 있어요. 지난 금요일 밤에 개선회 모임이 있었어요. 페인트칠뿐만 아니라 지붕도 다시 갈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모았어요. 거의 모두들 기꺼이 돈을 내주었다고요, 해리슨 아저씨.”
앤은 마음이 고운 아가씨였지만 이 말만큼은 힘주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색깔로 칠할 거냐?”

“아주 예쁜 초록색으로 정했어요. 물론 지붕은 진한 붉은색으로 할 거고요. 로저 파이 씨가 오늘 페인트를 가져온대요.”
“누가 칠할 건데?”
“카모디의 조슈아 파이 씨예요. 지붕 작업은 거의 끝냈어요. 우리는 조슈아 파이 씨와 계약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파이 집안 사람들이 전부 네 집인데, 조슈아가 그 일을 맡지 않으면 네 집이 모두 한 푼도 기부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요. 모두 12달러나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걸 놓치기가 아깝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파이네 사람에게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특히 린드 아주머니는 파이네가 모든 일에 나설 거라고 했지요.”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조슈아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느냐는 거다. 일만 잘한다면야 그 사람 이름이 파이든 푸딩이든 무슨 상관이 있어.”
“조슈아 씨가 일은 잘한다고들 해요. 하지만 좀 특이한 성격이래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대요.”
“말이 없다면 특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군.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말이야. 나도 에이번리에 오기 전에는 말이 많지 않았지. 하지만 여기서는 나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지껄이지 않을 수 없었어. 그렇지 않으면 린드 부인이 내가 벙어리인 줄 알고 수화를 가르치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벌써 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앤?”
“가야 해요. 오늘 오후에는 도라 옷 바느질을 해야 하거든요. 게다가 지금쯤이면 데이비가 또 못된 장난을 꾸며서 마릴라 아주머니가속상해하고 있을 거라고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데이비가 한 말이 ‘어둠은 어디로 가버리는 거지?’ 하고 물어서 어둠이 이 세상반대편으로 갔다고 대답해주었지만 아침을 먹은 후에 데이비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둠이 우물 속으로 들어갔대요. 오늘 네 번이나 어둠을 쫓아가 보겠다고 우물 바가지에 매달려 있는 걸 마릴라 아주머니가 붙들었다니까요.”
“그 녀석은 정말 장난꾸러기야. 어제 여기 와서는 내가 헛간에 있는 틈을 타서 진저 꼬리를 여섯 개나 뽑아갔다고. 그 일 때문에 저 가여운 앵무새는 지금까지 죽 풀이 죽어 있어. 그 애들 때문에 참 힘들겠어.”
“소중한 것을 곁에 두자면 힘들기도 한 거죠.”
데이비가 진저에게 앤을 대신해 복수해주었으니 다음번에 저지른 잘못은 무엇이든 용서해주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앤이 대답했다.
그날 저녁 로저 파이가 공회당에 칠할 페인트를 가져왔고, 다음 날부터 말이 없고 무뚝뚝한 조슈아 파이는 공회당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그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회당은 아랫길이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늦은 가을이면 이 길은 항상 질척거려서 사람들은 더 돌아가야 하는 윗길을 따라 카모디로 갔다. 공회당은 빽빽하게 둘러선 전나무로 에워싸여 있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조슈아 파이는 혼자서 공회당 페인트칠을 해나갔다.
금요일 오후에 일을 모두 끝낸 조슈아는 카모디 집으로 돌아갔다. 조슈아가 가버리자마자 린드 부인은 새로 단장한 공회당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아랫길을 따라 공회당을 둘러보러 갔다. 가문비나무 숲 모퉁이를 돌자, 린드 부인의 눈에 공회당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공회당을 본 린드 부인의 모습이 이상스러웠다.

말고삐를 놓아버리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에구머니나, 주여!”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기 두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히스테리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실수가 일어난 거야, 틀림없어. 난 그 파이네가 큰 실수를 저지를 줄 알고 있었다고.”
집으로 오는 길에 린드 부인은 길에서 몇몇 사람들을 만났고, 자기가 방금 본 공회당 얘기를 전했다. 그 소식은 산불처럼 퍼져 나갔다.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길버트 블라이드도 석양 무렵에 아버지 농장 일꾼에게 그 소식을 듣고 급히‘초록 지붕 집’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프레드 라이트를 만나 같이‘초록 지붕 집’뜰에 들어서자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 아래 다이애나, 제인, 앤이난감해하며 서 있었다.
“설마 사실이 아니겠지, 앤?”
길버트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사실이야. 린드 아주머니가 카모디에 다녀오는 길에 보고 나한테 와서 얘기해주셨어. 이건 정말이지 끔찍해! 뭔가를 개선해보자고 나선 일인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앤이 비극의 요정이라도 되어버린 양 말했다.
“뭐가 그렇게 끔찍한데?”
마릴라에게 전할 상자를 들고 이제 막 도착한 올리버 슬론이 물었다.
“아직 못 들었어? 조슈아 파이가 공회당에 초록색이 아니라파란색으로 페인트칠을 해버렸대. 아주 촌스러운 짙은파란색으로.짐마차나 손수레에 칠하는 색깔 말이야. 린드 아주머니가 그러시는데, 건물 색깔로 그렇게 망측한 색깔은 없을 거래. 거기다 빨간 지붕 색깔하고파란색이 만나서눈 뜨고볼 수 없는 지경이래. 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어. 우리가 이 일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제인이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지?”
다이애나도 울부짖었다.
이 불행한 재앙은 결국 모두 파이네 탓으로 돌아갔다. 개선회 회원들은 모튼 해리스 페인트를 쓰기로 결정했는데, 모튼 해리스 페인트통은 색깔에 따라서 고유번호가 매겨진다. 페인트를 살 사람은 색깔 카드에 적힌 대로 색조를 선택해서 번호로 주문하면 된다. 이들이 원하던 색깔은 147번 초록 색깔이었고, 로저 파이 씨가 시내로 나가는 길인데 페인트를 사와야 하느냐고 아들인 존앤드루를 통해 개선회원들에게 물었을 때 개선회원들은 존앤드루에게 아버지더러 147번을 사오라고 전했다. 존앤드루는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지만, 로저 파이 씨는 존앤드루가 자기에게 157번이라고 했노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오늘 문제는 일이 이렇게 되어 발생했던것이다.
그날 밤 에이번리의 모든 개선회원 집에는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초록 지붕 집’의 우울함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데이비마저 주눅이 들었다. 앤은 눈물마저 흘렸고 무엇으로도 그런 기분을 달랠 수 없었다.
“나이가 열일곱이 다 되었다고 해도 전 울지 않을 수 없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지금 기분이 몹시 참담해요. 이건 우리 개선회에 죽음의 경종을 울리는 소리와 같다고요. 우리는 웃음거리가 되었어요.”
앤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종종 일이 기대한 것과는 반대로 되는 경우가 있다. 에이번리 사람들은 비웃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서 비웃을 수도 없었다. 공회당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한 돈은 자기네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어서 모두 이 실수에 자기 일처럼 속상해했다. 사람들이 모두 파이네에 분노의 화살을 돌렸고 로저 파이와 존앤드루는 이 문제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다. 조슈아 파이가 페인트통을 열고 색깔을 보았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왜 들지 않았는지 아주 바보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들 했다. 이런 비난의 대상이 되자 조슈아 파이는 자기야 공회당에 페인트칠을 하도록 고용된 사람이지 자기가 페인트 색깔에대해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에이번리 사람들의 색깔 취향이 어떤지 자기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개선회원들은 치안판사인 피터 슬론과 상의한 끝에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페인트를 칠한 임금을 지불했다.
“임금을 치러주어야 합니다. 이 실수에 대한 책임을 조슈아 씨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색깔로 칠하라는 얘기를 듣지 못했고 페인트통을 받아 그대로 칠하기만 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공회당이 아주 끔찍한 모습이 되어버렸잖아요.”
피터는 그렇게 말했다.
운도 없는 개선회원들은 에이번리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개선회에 편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동정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그렇게 열심히 일한 이 작은 모임의 열성과 열정이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고 가엾게 여겼다.
린드 부인은 개선회원에게 끝까지 일을 해나가고, 파이네가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용기를 주었다. 메이저 스펜서 씨는 자기 농장 앞길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를 모두 없애고 자기 비용을 들여 잔디를 심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이람 슬론 할머니는 어느 날 학교로 찾아와 살며시 앤을 현관으로 불러내더니 봄철에 삼거리에 제라늄을 심으려 한다면 자기네 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자기가 이 약탈을 일삼는 짐승을 안전하게 울타리 안에 잘 가두어두겠다는 것이다. 껄껄대기 좋아하는 해리슨 씨조차도 뒤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동정심을 표해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앤. 페인트란 해가 지나가면서 다 흉하게 색이바래게 마련이야. 하지만파란색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처음처럼 흉해지지는 않지. 해가 더해가면서 색깔이 바래 더 보기 좋아진다니까. 그리고 지붕을 새로 얹고 페인트칠도 했으니, 이제부터는 지붕이 새는 일도 없을 거고. 그만하면 훌륭한 성과라고.”
“하지만 에이번리의파란색공회당은 앞으로 이 부근 마을 사람들의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리게 될 거라고요.”
앤이 쓰디쓰게 말했고 사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10
말썽꾸러기 데이비





어느 11월 오후 ‘자작나무 길’을 통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은 사는 게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앤의 작은 왕국에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했다. 세인트 클레어 도넬이 자기 이름 문제로 누구와 다툰 일도 없었고 프릴리 로저슨은 그날 치통으로 얼굴이 너무 부어올라 남학생에게 은밀한 눈길을 건넬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바버라 쇼도 바닥에 물을 쏟는 사고를 딱 한 번 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앤서니 파이는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올 11월은 정말 좋았어! 보통은 11월이 불쾌한 달이었지만 말이야. 한 해가 가버리는 것을 갑자기 깨닫고 울고불고 야단을 하곤 했잖아. 올해는 한 해가 정말 감사하게 지나고 있어. 기품 있게 나이 든 여인이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살이 늘어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날마다 아름다운 날이 계속되었고 저녁놀도 아름다웠지. 지난 2주 동안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던 날들이었어. 데이비조차도 얌전하게 행동해주었고. 데이비는 정말 한결 나아졌어. 오늘 저 숲은 고요하기도 하지. 나무 꼭대기에서 속삭이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빼고는 너무나 고요해. 바람 소리가 꼭 저 멀리 해변에서 들려오는파도 소리같아. 저 숲은 또 얼마나 다정해 보이는지. 아름다운 나무들아! 난 너희를 너무너무 사랑해!”
혼잣말을 곧잘 하던 아이 적 버릇을 여태 고치지 못하고 있는 앤이 말했다.
앤은 가던 길을 아예 멈추어 서서 날씬하고 어린 자작나무에 팔을 두르고 크림처럼 하얀 나무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오솔길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던 다이애나가 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앤 셜리, 넌 어른인 척만 하고 있는 거야. 너 혼자 있으면 아직도 순전히 어린아이 같은 짓만 하고 있잖아!”
“글쎄, 어린아이였을 적 버릇을 어디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겠니? 14년이나 어린아이로 있다가 어른이 된 지는 이제 3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리고 난 숲에 있으면 항상 아이가 되어버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 길이 내가 꿈을 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고. 잠들기 전 30분 동안을 빼면 말이야. 가르치고, 공부하고, 마릴라 아주머니를 도와 쌍둥이를 보살피고 하다 보면 너무 바빠서 잠시도 공상에 잠길 시간이 없거든. 매일 밤 동쪽 방으로 가서 잠자리에 든 후 내가 얼마나 멋진 모험의 시간을 갖는지 너는 잘 모를 거야.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승리를 일구고 영광을 얻는 상상을 하지. 훌륭한 프리마돈나가 되어보거나, 적십자 간호사, 아니면 여왕이 되기도 해. 어젯밤에는 여왕이 되어보았어. 여왕이 되었다고 상상하는 건 너무 멋진 일이야. 불편한 일은 하나도 없이 즐거운 일만 누릴 수 있잖아. 그리고 원할 때는 언제나 여왕을 그만두어버릴 수도 있고. 실제 여왕이라면 어디 그럴 수 있겠니. 숲에서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어. 늙은 소나무에 사는 나무의 요정, 메마른 낙엽 밑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작은 갈색 요정, 내가 입을 맞추었던 저 하얀 자작나무는 내 동생이었어.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저것은 나무고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차이는 아니야. 그런데 너 어디 가는 길이니, 다이애나?”
“저 아래 딕슨 아저씨네 집에. 앨버트가 새 옷을 재단한다고 해서 내가 도와준다고 했거든. 이따가 오후에 너도 와, 앤. 돌아올 때는 나랑 같이 오면 되잖아.”
“그래, 가볼게. 프레드 라이트도 시내에 나가고 없는데.”
앤이 시치미를 뗀 채 말했다.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휙 젖히고 걸음을 옮겼지만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앤은 그날 오후 딕슨 아저씨 집에 정말로 갈 작정이었지만‘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럴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사라져버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뜰에서 마주친 마릴라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앤, 도라가 없어졌어.”
“도라가 없어졌다니요?”
앤은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신이 난 눈빛으로 대문 옆에서 오락가락하는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데이비, 도라가 어디 있는지 아니?”
“아니, 난 몰라. 점심을 먹고 나서는 도라를 본 적이 없어. 맹세도 할 수 있어.”
데이비가 단호하게 주장했다.
“난 1시부터 집에 없었거든. 토머스 린드 씨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레이철이 당장 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내가 집을 나갈 때 도라는 부엌에서 인형을 갖고 놀고 있었고 데이비는 헛간 뒤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어. 30분 전에 집에 돌아왔는데 도라가 보이질 않았고, 데이비도 내가 나간 후로 도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난 정말 못 봤어.”
데이비가 엄숙하게 맹세했다.
“근처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혼자서 멀리 나간 적이 없잖아요. 도라가 얼마나 겁이 많은 아인데. 아마 어디 방에서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앤이 말했다.
하지만 마릴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 이 집을 이 잡듯이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집 안에는 없었어.”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집 안 구석구석, 뜰, 집 밖 여기저기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도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앤은 도라의 이름을 외치며 ‘유령의 숲’을 둘러보았고 마릴라는 촛불을 들고 지하실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데이비는 앤과 마릴라를 번갈아 쫓아다녔다. 도라가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둘이 다시 뜰에서 마주쳤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마릴라가 신음 소리를 냈다.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앤도 절망스럽게 말을 받았다.
“우물 속에 풍덩 뛰어든 건 아닐까?”
데이비가 아주 즐겁다는 듯 끼어들었다.
앤과 마릴라는 겁먹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도라를 찾아 헤매는 내내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감히 이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마릴라가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금방 쓰러져버릴 것 같았지만 앤은 우물가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뚜껑 안쪽에 두레박이 걸려 있고 저 아래로 고요한 수면이 반짝거렸다.‘초록 지붕 집’우물은 에이번리에서도 가장 깊은 우물이다. 만일 도라가……. 앤은 도저히 더 이상은 생각할 용기도 나지 않아 몸을 떨며 우물에서물러섰다.
“해리슨 씨 집으로 뛰어가서 좀 와달라고 해라.”
마릴라가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해리슨 아저씨도 존 헨리도 모두 외출 중이에요. 오늘 시내에 나갔거든요. 배리 아저씨 집에 가봐야겠어요.”
앤이 한 묶음의 밧줄을 든 배리 씨와 함께 왔다. 밧줄 끝에는 갈고리 같은 게 달려 있었다. 배리 씨가 우물 밑바닥을 더듬어보는 동안 마릴라와 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그 옆에 서 있었다. 대문에 걸터앉은 데이비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마침내 배리 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아래에는 없어요. 대체 어디를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군. 얘, 꼬마야, 너 정말 네 동생이 어디 갔는지 모른단 말이냐?”
“모른다고 열두 번도 더 말했다고요. 유괴범이 와서 도라를 데려가 버린 모양이죠.”

데이비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물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 마릴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앤, 혹시 도라가 해리슨 씨 집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네가 거기 데려갔다 온 이후로는 그 앵무새 얘기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도라가 혼자서 그렇게 멀리 갔을 리 없지만 한번 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앤이 말했다.
그 순간 아무도 데이비의 얼굴을 눈여겨본 사람은 없지만 데이비 얼굴을 보았더라면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데이비는 살며시 대문에서 내려와 헛간으로 있는 힘껏 뛰어갔다.
앤은 해리슨 씨 집으로 향하는 들판을 서둘러 지나갔지만 큰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문은 잠겼고 창문의 블라인드도 내려졌으며 집 안에 누가 있는 기척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에 서서 도라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다.
갑자기 부엌에 있던 진저가 비명을 지르며 날카롭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앵무새의 비명 사이로도 앤은 해리슨 씨가 연장을 두는 뜰 헛간에서 나는 작은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앤이 얼른 헛간으로 가 문을열어젖혔다. 도라가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엎어놓은 못 상자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나, 도라, 도라,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야?”

“데이비와 내가 진저를 보러 왔는데 진저는 전혀 볼 수 없었어. 데이비가 문을 발로 막 차면서 욕만 했어. 그리고 데이비가 나를 여기로 데려와서 문을 닫아버리고 도망쳐 버렸어. 나는 나갈 수가 없어 울고 또 울었어. 너무 무섭고 배도 고프고 추웠어. 아무도 날 데리러 오지 않을 줄 알았어, 언니.”
“데이비?”
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히 마음이 무거웠다. 도라를 무사히 찾아낸 기쁨은 데이비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찾아든 고통으로 온데간데없었다. 도라를 가두어둔 행동은 용서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데이비는 거짓말을 했다. 아주 철저하게 아닌 척 잡아떼며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실망해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앤은 데이비를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얼마나 데이비를 사랑하는지 알지도 못했을 만큼. 하지만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마릴라는 침묵을 지키며 앤의 얘기를 들었다. 데이비에게 절대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태도였다. 배리 씨도 웃어젖히기는 했지만 데이비를 엄히 다루어야겠다고 충고를 했다. 앤은 울고 있는 도라를 달래며 몸을 녹여주고 저녁을 먹인 다음 잠자리에 들게 했다. 부엌으로 돌아가니 마릴라가 엄한 얼굴로 마구간 가장 어둠침침한 곳에 숨어 있다잡혀온데이비를 억지로 잡아끌다시피 하며 데리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온통 거미줄투성이가 된 데이비는 잘 따라오려 들지 않았다.
마릴라는 방 한복판 카펫 위에 데이비를 세워놓고 자기는 동쪽 창가로 가 앉았다. 앤은 맥없이 서쪽 창가에 앉아서 꼬마 죄인은 두 사람 가운데에 섰다. 데이비는 마릴라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아주 순수해 보이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으며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앤 쪽을 보는 얼굴은 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있었지만 좀 봐달라는 눈빛이었고, 나쁜 짓을 했으니 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태도도 보였다. 나중에는 앤도 함께 웃어줄 거라고 하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앤의 심각한 눈에서는 반쯤 숨겨진 미소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단순한 장난이었다면 앤의 눈에 미소가 감돌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어딘지 무섭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있지, 데이비?”
앤이 슬프게 말해서 데이비는 불안한 듯 우물거렸다.
“나는 그저 장난을 했을 뿐이야. 여기는 너무 심심해. 앤 누나랑 어른들을 깜짝놀라게 해주면모두 재미있어 할 것 같았거든. 난 정말 재미있었어.”
얼마쯤 불안과 후회를 느끼기는 했지만 데이비는 아까의 일을 생각하고 싱긋 웃기까지 했다.
앤은더욱더슬프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거짓말을 했잖아.”
데이비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이 뭐지? 뻥 치는 거 말하는 거야?”
“사실이 아닌 얘기를 지어내서 말하는 거 말이야.”
“내가 그러긴 했지.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누나를 겁나게 할 수가 없잖아. 난 얘기를 지어내야 했어.”
데이비가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앤은 두려운 생각에 휩싸여 마음을 졸여가며 뛰어다니던 기억에다 데이비가 전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울컥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급기야는 커다란 눈물 두 방울이 앤의 눈에서 뚝뚝떨어져 버렸다.
“아, 데이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넌 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이야?”
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비는 깜짝 놀랐다. 누나가 울고 있다니! 내가 누나를 울게 했어. 데이비의 작은 가슴에 진정으로 후회하는 마음이 파고들어 흘러넘쳤다. 데이비는 앤의 무르팍으로 달려들어 목에 팔을 두르고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뻥 치는 게 나쁜 짓인 줄 몰랐어. 그게 잘못인 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어? 스프로트 아저씨네 애들은 날마다 뻥을 친단 말이야. 그리고 맹세까지 한단 말이야. 폴 어빙은 절대로 뻥 같은 건 치지 않겠지? 폴 어빙처럼 착한 애가 되려고 무진 애를 쓰긴 했지만 이제는 누나가 나를 절대로 좋아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고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울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앤 누나, 다시는 뻥 치지 않을게.”
데이비가 앤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펑펑 울었다. 갑작스럽게 데이비를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 앤은 데이비를 꼭 껴안고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데이비가 거짓말하는 게 잘못인 줄 몰랐대요, 마릴라 아주머니. 데이비를 용서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으니까요.”
“절대로 하지 않을게. 그것이 나쁜 일인지 이젠 알았으니까. 다시 한 번만 더 내가 뻥을 치면 나를 산 채로 껍데기를 벗겨버려도 좋아.”

데이비가 훌쩍훌쩍 울어가며 말했다.
“데이비, 뻥친다는 말 대신 거짓말이라고 해.”
학교 선생님답게 앤이 말했다.
“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궁금하다는 듯 앤을 올려다보며 데이비가 물었다.
“왜 뻥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거짓말이라는 말은 너무 이상하잖아?”
“그건 나쁜 말이야. 어린아이가 나쁜 말을 사용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참 많기도 해. 세상에 나쁜 일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 뻥 친다는 말이 잘못된 말인 건 정말 맘에 안 들어. 더 편한데. 하지만 그게 잘못이라면 다시는 쓰지 않을게. 오늘은 어떤 벌을 줄 거지?”
앤이 애원하듯 마릴라를 쳐다보았다.
“나도 어린아이한테 너무 심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도 데이비에게 거짓말이 나쁜 짓이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고 스프로트 애들도 데이비에게 적당한 놀이 상대가 되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불쌍한 메리는 너무 아파서 데이비를 적당히 교육시키지도 못했을 거고. 여섯 살짜리 애가 잘못이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지. 애가 옳은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하지만 도라를 가둬둔 벌은 받아야지. 저녁을 굶겨 재우는 것밖엔 생각나는 게 없다. 그 벌을 너무 자주 주기는 했지만. 뭐 다른 벌은 없을까, 앤? 네가 항상 말하는 그 상상력으로 뭐 생각해낸 거 없니?”

“하지만 벌을 상상하는 건 너무 끔찍해요. 전 언제나 즐거운 일만 상상한다고요.”
앤이 데이비를 안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즐겁지 못한 일들이 이미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아도 돼요.”
결국 데이비는 평소대로 침실로 보내져 다음 날 정오까지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데이비는 혼자 생각을 좀 해보게 되었다. 앤이 잠시 후에 자기 방으로 가려는데 데이비가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데이비가 침대에 올라앉아 있었다. 팔꿈치를 무릎에 짚고 손으로는 턱을 받친 채였다.
“누나, 누구나 거짓말하는 건 나쁜 거지? 그게 궁금해.”
데이비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렇지.”
“어른이 그래도?”
“그럼.”
“그럼 마릴라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했으니까 아주머니도 나쁜 거지? 그럼 나보다 더 나쁜 거네. 난 모르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알면서 거짓말을 했으니까.”
데이비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데이비 키스, 마릴라 아주머니는 평생동안절대로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을 분이야.”
앤이 분개하며 말했다.

“거짓말했어. 지난 화요일에 내가 매일 밤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든. 내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일주일이나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데이비가 아주 불만이라는 듯 말했다.
앤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고 마릴라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데이비 키스, 그 끔찍스러운 일이 바로 오늘 일어나지 않았니?”
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데이비는 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자야 하는 거? 하지만 이건 끔찍한 일도 아니야. 물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내가 여기 온 후로 너무 많이 받은 벌이라 견딜 만하다고. 저녁을 안 준다고 해도 아침 식사 때 두 배로 더 많이 먹으면 되는걸 뭐.”
데이비가 가소로운 듯 말했다.
“네가 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 거짓말을 한 걸 말하는 거야. 그리고 데이비.”
앤이 침대 쪽으로 몸을 내밀며 죄인을 향해 명심하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어린아이가 거짓말한다는 것처럼 나쁜 일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마릴라 아주머니가 진실을 이야기한 거지, 데이비.”
“하지만 난 나쁜 일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데이비가 속이 상한 듯 항의했다.
“네 그 잘못된 생각으로 마릴라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안 되지. 그리고 나쁜 일이 항상 재미있지만은 않아. 나쁜 일은 기분 나쁘고 바보 같은 일인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와 누나가 우물을내려다볼때는 엄청 재밌었다고.”
데이비가 무릎을 껴안으며 말했다.
앤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실 의자에 주저앉자마자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너무 웃어서 옆구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한테도 그 우스운 이야기 좀 들려주지 그러니. 오늘은 웃을 일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마릴라가 조금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 얘기를 들으면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앤이 장담했고 마릴라도 정말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릴라의 교육 방식이 앤을 데려온 이후로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데이비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목사님이 아이를 타이르면서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나도 써먹어본 거다. 그날 밤 데이비가 날 몹시 화나게 했거든. 네가 카모디의 콘서트에 간 날 밤이었어. 내가 데이비를 재우고 있었지. 그런데 그 녀석이 자기는 하느님 눈에 띌 만큼 자란 다음이 아니면 기도를 드려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하기에 그렇게 말해주었지. 앤, 난 저 아이를 어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저런 아이는 본 적이 없어.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싶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제가 처음 여기 왔을 때도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생각해보시라고요.”
“앤, 너는 절대로 나쁜 아이가 아니었어. 전혀. 내가 이제야 그걸 알겠다. 진짜로 나쁜 게 어떤 건지 알았으니까.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는 것은 나도 인정을 해야겠지만 네 의도는 언제나 착했어. 데이비는 그저 재미로 말썽을 부리지 않니.”
“아, 아니에요. 저는 데이비도 정말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장난이 좀 심한 것뿐이죠. 그리고 여기는 너무 심심하잖아요.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데이비가 관심을 가질 뭔가가 필요해요. 도라는 너무 얌전하기만 해서남자아이의 놀이 상대는 돼줄 수도 없고요. 데이비를 학교에 데려가 보면 어떨까요, 마릴라 아주머니?”
“안 된다.”
마릴라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아이를 일곱 살이 되기도 전에 학교 벽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앨런 목사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 쌍둥이를 집에서 조금씩 가르치는 것은 괜찮지만 일곱 살이 되기 전에 학교에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에서 데이비를 변화시켜야겠군요. 단점이 많기는 해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전 도라보다 데이비가 더 좋아요. 도라는 그저 착하기만 하잖아요.”

앤이 유쾌하게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긴 해.”

마릴라도 고백을 했다.

“하지만 이건 공정하지 않아. 도라는 말썽이라곤 조금도 일으키질 않잖아. 그만한 아이는 없다. 그 애는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하잖니.”

“도라는 너무 착해요. 이래라저래라 말할 필요도 없이 다 알아서 잘하고요. 천성적으로 어른스러운 아이인가 봐요. 그래서 도라는 우리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아요. 사람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법이잖아요. 데이비는 우리를 꼭 필요로 한다고요.”
앤이 말했다.

“데이비는 분명 뭔가를 필요로 하지.”

마릴라가 맞장구를 쳤다.

“린드 부인이라면 ‘데이비에겐 몽둥이찜질이 필요해.’라고 말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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