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7~18

나단비 | 2024.03.03 13:55:42 댓글: 0 조회: 105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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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라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





앤은 그날 밤 세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 창가로 가서 에이브 씨의 예언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마침내 하늘이 은빛 광채를 흩뿌리면서 진주 같은 빛을 발하며 아침이 찾아왔고 아름다운 하루가 열렸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이애나가 한쪽 팔에 꽃바구니를 안고 다른 팔에는 모슬린 드레스를 든 채 문가에 나타났다. 모슬린 드레스는 식사 준비를 마친 후에 입어야 해서 지금은 분홍색 무늬가 수 놓인 옷을 입고 예쁜 주름이 근사하게 잡힌 앞치마를 둘렀다. 그 모습이 마치 장미꽃처럼 너무 어여뻤다.
“너, 정말 예쁘다.”
앤이 찬사의 말을 던졌다.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난 내 옷을 모두 늘려야 해. 7월보다 몸무게가 거의 2킬로그램이나 늘었어. 도대체 내 몸무게는 언제까지 이렇게 불어나는 걸까? 모건 부인의 주인공은 모두 다 날씬하고 키가 크잖아.”
“오늘은 고민거리는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하자. 앨런 부인도 괴롭고 우울한 일이 생각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어. 네가 약간 살이 쪘다면, 넌 정말 예쁜 보조개를 갖고 있잖아. 내 코는 주근깨가 있지만 예쁘고 생겼고. 간밤에 바른 레몬즙이효과를 좀 내준 거 같니?”
앤이 활기차게 말했다.
“응,효과 만점인데!”
다이애나의 말에 기분이 더 좋아진 앤이 앞장서 여기저기 시원한 그늘과 황금빛 빛줄기가 너울대는 뜰로 나갔다.
“우선은 응접실부터 꾸미자. 아직 시간은 많아. 프리실라가 12시나늦어도 12시 30분까지는도착한다고 했으니까. 1시에 점심을 먹으면 될 거야.”
캐나다나 미국이나 세상 어느 곳에 이 순간의 이 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었을까? 경쾌한 가위질 소리와 함께 장미와 작약, 초롱꽃이 잘릴 때마다 ‘모건 부인이 오늘 오신다!’ 하고 노래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앤은 해리슨 씨가 오솔길 저쪽 밭에서 건초를 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 무심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풀만 벨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초록 지붕 집’의 응접실은 좀 삭막하고 음울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딱딱한 느낌의 마미단15)깔개며, 뻣뻣한 레이스 커튼, 그리고 하얀색의 덮개들이 재수 없게 누군가의 단추에 걸려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언제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었다. 앤이 이 방에 우아한 세련미를 더해보고자 했지만 마릴라는 조금도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꽃으로 이 방이 훌륭하게 달라졌다. 앤과 다이애나가 방 장식을 모두 끝냈을 때는 이 방이 그 응접실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커다란 푸른색 항아리에 까마귀밥나무 꽃을 가득 꽂아반질반질하게 닦은 탁자 위에 놓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색 벽난로 선반에는 장미꽃과 풀고사리가 한가득 자리를 잡았다. 방 안의 모든 선반에 초롱꽃을 올려놓아 장식했고 벽난로의 어둑한 양 구석에는 화사한 진홍색 작약꽃을 가득 담은 항아리를 두어 밝게 빛을 냈으며, 벽난로 한가운데는 노란 양귀비꽃으로 불타오르게 했다. 이 갖가지 빛깔의 꽃과 더불어 창문을 타고 올라온 인동 덩굴 사이로 햇빛이 비쳐들어 벽이며 바닥 위에 그림자가 너울대 항상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방이 앤이 상상하던 바로 그 정자로 탈바꿈했다. 뭔가 꼬집으려고 들어왔던 마릴라조차도 그대로 우뚝 서서 찬사를 보내고 말았다.
“이제 식탁을 장식해야겠어. 가운데에는 큰 꽃병에 들장미를 가득 꽂고 모두의 접시 앞에 장미 한 송이씩을 놓자. 그리고 모건 부인의 접시 앞에는 특별히 장미 꽃다발을 놓는 거야. 《장미 정원》을 암시하는 거지.”
신을 경배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을 치르려는 여사제라도 된 것 같은 목소리로 앤이 말했다.
식탁은 거실에다 차렸다. 마릴라의 가장 좋은 식탁보와 가장 좋은 도자기,유리그릇, 그리고은 제품의 식기들이 모두 나왔다. 그릇들은 모두 정성스럽게 잘 닦여서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그다음으로 오븐에서 풍겨 나오는 군침 돌게 하는 냄새로 가득한 부엌으로 갔다. 닭요리도 이미 고소하고 먹음직스럽게 구워졌다. 앤은 감자를 준비했고 다이애나는 콩 종류를 준비했다. 그런 다음 다이애나는상추 샐러드를 만들려고 식품 저장실로 갔고 주방의 열기만큼이나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앤은 닭고기 요리에 곁들일 소스를 만들고 수프에 넣을 양파를 썰었으며 마지막으로 레몬 파이에 쓸 크림의 거품을 냈다.
그러는 동안 데이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착하게 지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을까? 그랬다. 데이비는 자기가 약속한 대로 분명 얌전히 있어주었다. 부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기는 했지만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난번 바닷가에 갔다가 주워온 청어 잡는 그물의 매듭을 푸느라고 정신을 팔고 있었고, 아무도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11시 30분이 되어상추 샐러드가 완성되었고 둥그런 황금빛 파이 위에는 크림이 부어졌으며 지글지글 익어가야 할 것은 익어가고 보글보글 끓어야 할 것은 끓었다.
“이제 가서 옷을차려입어야겠다. 12시면 모두들 도착할 테니까. 1시면 정확하게 식사를 시작해야 해. 수프는 만들자마자 내야제맛이 나거든.”
앤이 말했다.
동쪽 방에서 진지하게 몸단장이 시작되었다. 앤은 걱정스럽게 코를 살펴보았지만 주근깨가 잘 보이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레몬즙덕분인지 아니면 뺨이 평소와는 다르게 붉어져 있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두 사람은 모건 부인의 주인공들 못지않게 예쁘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도 가끔씩은 대화에 끼어들어 뭔가 한 마디씩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만 할 것 같아 걱정이야. 모건 부인의 주인공은 다들 말도 잘하잖아. 하지만 난 혀가 굳어버리고 바보처럼 굴 것 같아. 내가 또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써버리면 어쩌지. 스테이시 선생님한테 배운 후부터는 그런 말버릇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흥분하면 꼭 옛날 말버릇이 나와버리잖아. 앤, 내가 모건 부인 앞에서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쓴다면 창피해서 죽고 싶어질 거야. 그것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 못지않게 창피한 일이야.”

다이애나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도 여러 가지 일들이 염려스럽지만 말을 못 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아.”
앤이 말했다.
물론 앤이야 그럴 염려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앤은 모슬린 드레스 위에 큰 앞치마를 두르고 수프를 만들려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자기 몸단장을 끝내고 쌍둥이의 옷을 입혀주고 있는 마릴라도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모습이었다. 12시 30분이 되자 앨런 부인과 스테이시 선생님이 왔다. 모든 준비가 잘되어가고 있었지만 어쩐지 앤은 무척 불안했다. 이제 프리실라와 모건 부인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앤은 《푸른 수염》16)이야기에 나오는 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자기를 구해주려고 오빠들이 오는지 살펴보려고 탑의 창문으로 밖을 살피듯 몇 번이나문가로 나가 불안스럽게 오솔길 쪽을 바라보았다.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앤이 초조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이애나 역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앤, 스테이시 선생님이 배리 할머니의 버드나무 무늬 도자기 접시를 보고 싶다고 하신다.”
마릴라가 응접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앤은 접시를 가져오려고 서둘러 거실로 달려갔다. 린드 부인에게 한 약속대로 샬럿타운의 배리 할머니에게 접시를빌려줄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더니 친구로서 20달러나 주고 산 접시이니 조심해서 다뤄주기 바란다고 쓴 답장과 함께 곧 보내주었다. 그 접시는 부인회 바자회에서 제 임무를 다하고‘초록 지붕 집’으로 왔다. 앤이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그 접시를 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시냇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는 현관으로 앤이 조심스럽게 접시를가져갔다.모두들 감탄하며 접시를 구경한 다음 막 접시를 다시 가져다두려는 순간, 부엌 식품 저장실 쪽에서 와장창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마릴라와 다이애나가 달려갔고 앤도 접시를 계단 두 번째 층계에 내려놓고 즉시 달려갔다.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참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데이비가 깨끗하게차려입었던블라우스에 노란색 크림을 뒤집어쓰고 잔뜩 주눅이 든 채 식탁에서 기어 내려오는 중이었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그 먹음직스럽던 두 개의 레몬 파이는 끔찍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데이비가 청어잡이 그물 풀어낸 실을 감아 공으로 만들어서 식품 저장실 선반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선반 위에는 이미 이십여 개나 되는 비슷한 공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들킬 때까지 갖고 있다는 즐거움 말고는 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그 선반에 데이비의 손이 닿으려면 위태위태하게 식탁 위로 올라가야 했고, 그것은 마릴라가 엄히 금하고 있는 일이었다. 전에도 한번 그랬다가 엄청 혼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 결과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레몬 파이 위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아 깨끗한 블라우스가 당장 엉망이 된 것은 물론이고 파이를망치고 말았다. 데이비의 이 말썽 덕분에 돼지만 먹을 복이 터진 셈이었다.
“데이비 키스, 그 탁자에 다시는 올라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그러지 않았어?”

마릴라가 데이비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잊어버렸어요. 하지 말라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내가 다 기억할 수가 없잖아요.”
데이비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그래? 2층으로 올라가서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라. 그때쯤이면 차근차근 기억이 날지도 모르니까. 안 돼, 앤, 이 아이 역성 들 생각일랑 마라. 난 데이비가 네 파이를 망쳐서 벌을 주려는 게 아니야. 그건 사고였다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잖아. 올라가, 데이비.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전 점심도 못 먹어요?”
데이비가 울부짖었다.
“다른 사람들식사가 끝나면 내려와 부엌에서 혼자 먹어야 해.”
“아, 그럼 됐어. 누나가 내 고기를 남겨줄 테니까, 그렇지, 누나? 내가 일부러 파이에 넘어진 게 아닌 걸 알잖아. 그렇지, 누나? 어차피 파이는 못 쓰게 됐으니까, 내가 좀 2층으로 가져가서 먹으면 안 될까?”
데이비가 조금 안심한 듯 말했다.
“안 돼. 넌 레몬 파이를 먹을 수 없어.”
마릴라가 데이비를 복도로 내몰며 말했다.
“디저트를 어떻게 하죠, 이제?”
앤이 망가져 버린 파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딸기 절임 단지를 내오너라. 그리고 아직 휘핑크림도 많이 남아 있을 거다.”
마릴라가 괜찮다는 듯 말했다.
1시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프리실라와 모건 부인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앤은 안절부절못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수프도 완벽하게 만들어졌는데이대로시간이 더지체되면맛이 떨어질 터였다.
“어쩐지 안 오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릴라가 기분이 언짢은 듯 말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서로의 눈에서 위안을 구했다.
1시 30분이 되자 마릴라가 다시 응접실에서 나왔다.
“얘들아, 우리끼리 식사를 해야겠다. 모두들 배도 고프고 더 이상 기다려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프리실라와 모건 부인은 오시지 않을 모양이야. 그럴 게 분명해. 더 이상 기다려봐야 나아질 게 없다고.”
앤과 다이애나는 식사 준비를하고는 있었지만 온몸의 맥이 풀려버린 것 같았다.
“난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이애나가 비통하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스테이시 선생님과 앨런 목사님 내외분이 계시니 기분 좋게 식사를 했으면 좋겠어.”
앤이 힘없이 대답했다.

다이애나가완두콩 요리를접시에 담으며 맛을 보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앤, 너 이 완두콩에다 설탕 넣었니?”
“응, 설탕 한 숟가락 넣었지. 난 항상 그렇게하거든.왜, 맛이 이상해?”
앤이마지못해 하는 듯감자를 으깨며 말했다.
“그게,나도 콩을 불에 올리면서 한 숟가락 넣었거든.”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이감자를 으깨다 말고완두콩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나, 이걸 어째! 나는 네가 설탕을 넣으리라고는생각지도못했어. 네 엄마는 절대 설탕을 넣지않으시잖아. 신기하게도 오늘은 그 생각이나서……. 다른 때 같으면 잊어버렸을 테지만…… 그래서 내가 한 숟가락 넣었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두 사람 대화를듣고 있던 마릴라가 자기도뭔가 찔리는 게 있는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설탕 넣는 걸잊어버렸을 것 같아서 나도 한 숟가락 넣었다. 전에는 네가 언제나 잊어버렸잖아. 그래서 내가 넣었지.”
응접실에 있던 손님들은 부엌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었지만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식탁에 완두콩 요리는 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샐러드가 있으니까. 다른 콩에는 이상이 없겠지. 어서 음식을 나르고 잊어버리자.”
정신을 가다듬은 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식사는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앨런 목사님 내외분과 스테이시 선생님도 열심히 분위기를 돋우려고 애썼고 마릴라도 겉으로는 뒤숭숭한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앤과 다이애나는 너무 실망이 컸을 뿐만 아니라 오전 내내 너무나 들떠 있어서 식탁에 앉았으나 좀처럼 말할 기분도 먹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앤은 손님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대화를 해보려 애썼지만 아무리 해도 활기가 없었다. 앨런 목사님 부부와 스테이시 선생님을 사랑하건만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싶었고 자기는 동쪽 방으로 가서 지치고 실망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만 싶었다.
옛말에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다. 이날의 재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앨런 목사님이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자마자 계단 쪽에서 이상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 단단하고 무거운 물체가 계단을 굴러 내려가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였다. 모두들 복도로 달려갔다. 앤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층계 바닥에 커다란 분홍색 소라 껍데기가떨어져 있었고,그 주위로 배리 할머니의 접시 파편이 뒹굴고 있었다. 계단 맨 위에는 놀란 데이비가 눈을 크게 뜨고 주저앉아 그 참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이비, 너 그 소라 껍데기를 일부러 던졌니?”
“아니, 정말 아니에요. 난 여기 그냥 무릎을 꿇고 있었어. 아주 조용히, 조용히 앉아서 계단 난간 사이로 모두들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고. 근데 발에 저것이 걸려서 차버린 거야. 난 정말 배가 고파……. 난 항상 2층에 갇혀 있어야 하고,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못 볼 바에야 차라리 매라도 맞고 끝내버리고 싶었다고.”
데이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데이비 잘못이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저기에 접시를 놓아두고는 그만 잊어버렸어요. 제가 부주의해서 벌을 받은 거라고요. 하지만 배리 할머니가 뭐라고 할까요?”
“괜찮아, 그건 산 물건이잖아.조상 대대로물려받은 물건하고는 다르다고.”
다이애나가 위로의 말을 했다.
손님들은 빨리 물러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돌아들 갔다. 앤과 다이애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다이애나는 두통이 있다며 집으로 돌아갔고 앤은 동쪽 방으로 갔다. 저녁 무렵에 마릴라가 우체국에서 프리실라의 편지를 가져왔다. 전날 쓴 편지였다. 모건 부인이 아주 심하게 발을 삐어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앤, 정말 미안하게 됐지만 우리는 이제‘초록 지붕 집’에 갈 수 없게 되었어. 우리 고모의 발이 다 나을 때쯤이면 토론토로 돌아가야만 하거든. 정해진 날짜까지 돌아가야만 해.

“휴우!”
앤은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뒷문의 붉은 돌층계에 편지를 놓았다. 하늘에서는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모건 부인이 온다고 했을 때부터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더라니. 어머나…… 내 말이 꼭 엘리자 앤드루스 아주머니의 말처럼 비관적이잖아요. 이런 말을 하다니 부끄러운 일이에요. 저한테 좋고 멋진 일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데요. 그리고 오늘 일은 재미있는 면도 있었어요. 다이애나와 제가나이가 들었을 때오늘 일을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제 미리 기대하는 일은 못 할 것 같아요.이번 일은 정말 실망감이 너무 컸거든요.”
“넌 앞으로 인생을 살려면 말이다, 이보다 더 큰 실망감을 아주 많이 느끼면서 살아야 할 거다. 너는 아직도 어떤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어, 앤.”
마릴라가 앤을 진심으로 위로해주려고 한 말이었다.
“저도 제가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걸 알아요.”
앤도 안타깝다는 듯 인정했다.
“전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날거라는 생각이 들면 곧 그 기대감의 날개를 펴고하늘 높이날아오르는 거예요.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쿵하고 땅으로 떨어져 버려요.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날아오를 때는 있잖아요, 그 순간만큼은 더할 수 없이 멋지다고요. 황혼 속에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쿵하고 떨어져 버려도 충분히보상받는 느낌이에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나 같으면차분하게걸어서 다니겠다.날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제 삶의 방식대로 살겠지. 전에는 옳은 길은 단 하나라고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랑 쌍둥이를 키우다 보니까 그 생각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어. 이제 배리 할머니의 접시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접시값20달러를 변상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돈으로 보상할 수 없는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귀중한 보물은 아니어서천만다행이에요.”
“그것과 똑같은 접시를 사서 돌려드리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오래된 접시를 쉽게 구할 수는 없잖아요. 린드 부인이 바자회 저녁에 쓰려고 찾아보았지만 구하지 못했잖아요.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만요. 배리 할머니의 접시와 똑같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면 그분도 받아주실 테니까요. 아주머니, 해리슨 아저씨네 단풍나무 숲 위에 떠 있는 저 큰 별 좀 보세요. 하늘도 거룩한 기운이 감돌도록 은빛이 나네요. 기도하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해요. 저 별과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작은 실망이나 뜻하지 않은 사고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데이비는 어디 있지?”
무심히 별을 보며 마릴라가 물었다.
“자고 있어요. 제가 내일 해변으로 데이비와 도라를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거든요. 물론 처음에는 착하게 굴어야지 소풍을 가겠다고 했지만 착하게 굴려고 애는 썼잖아요. 그리고 데이비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그 보트를 타고 연못을 노 저어 다니다 너나 쌍둥이나 물에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난 여기서 60년이나 살았지만 그 연못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마릴라가 잔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늦지 않았어요. 내일 우리랑 함께 가요. 내일‘초록 지붕 집’문을 잠가버리고 온종일 해변에서 지내자고요. 세상 시름은 모두 내려놓고요.”
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이구, 됐다. 내가 연못에서 노를 젓는다면 좋은 구경거리 나겠구나.레이철이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해리슨 씨가 어디를 가는 모양인데. 해리슨 씨가이사벨라앤드루스와 사귄다는 소문이 정말일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날 저녁 하몬 앤드루스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 집에 갔는데, 린드 아주머니가 보시고 오해한 것뿐이에요. 그날 하얀 셔츠를 입었다고 해리슨 아저씨가 청혼하러 간 것으로 오해하신 거죠. 해리슨 아저씨는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아요. 결혼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던걸요.”
“글쎄다, 나이 먹은 독신자 일을 누가 알겠니. 그리고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난레이철과 같은 생각이야. 뭔가 의심스럽다고. 전에는 해리슨 씨가 하얀 셔츠를 입은 적이 없잖니.”
“하몬 앤드루스 씨와 거래를 잘 매듭짓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사람이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 때는 그런 때뿐이라고 해리슨 아저씨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거든요. 이쪽이 돈이 좀 있는 듯 보이면 상대방도 자기를 속이려 들지 않는다면서요. 해리슨 아저씨는 참 안됐어요. 그런 생활에 만족할 리가 없잖아요. 앵무새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무척 외롭겠죠? 하지만 남의 동정을 받는 것은 싫은가 봐요. 누구나 그렇겠죠?”
앤이 말했다.
“저기 길버트가 올라오고 있구나. 연못으로 보트를 타러 가자고 하면 외투를 입고 장화도 신고 가거라. 오늘 밤엔 이슬이 많이 내릴 것 같으니.”

마릴라가 말했다.
15) 말총을 씨실로 하고 무명실, 삼실, 털실 따위를 날실로 하여 짠 서양 피륙.

16) 프랑스의 전설로 푸른 수염을 가진 남자와 자꾸만 사라지는 그의 아내들 이야기.





18
토리 길에서의 모험






데이비가 침대에서 일어나 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 물었다. “앤 누나, 잠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거야? 사람들이 밤마다 잠자러 가잖아. 물론 잠의 나라가 내가 꿈꿀 때 가는 곳인지는 알지만 거기가 어딘지 알고 싶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가 어떻게 거기에 갔다가 돌아오는지도 모르겠어. 그것도 잠옷만 입고서 말이야. 거기가 어디야?”
앤은 서쪽 방 창가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저녁노을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전체가 샛노란 꽃술에 샤프란 같은 꽃잎을 단 커다란 한 송이 꽃처럼 보였다. 앤이 데이비를 바라보며 꿈이라도 꾸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달의 골짜기 너머
그림자의 계곡 아래에”17)

폴 어빙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았거나저 스스로그 말의 의미를 찾아냈겠지만 앤이 종종 절망적으로 꼬집듯이 지극히 현실적이기만 할 뿐 상상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데이비는 그 대답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 불만이었다.
“누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다 알아.”
“물론 내가 그런 소리를 했지. 하지만 항상 이치에 닿는 소리만 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란 걸 모르니?”
“그래도 내가 말이 되는 질문을 하면 말이 되는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 거잖아.”
데이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오, 넌 아직 너무 어려서 몰라.”
앤이 말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곧 부끄러워졌다. 앤이 어렸을 때 이런 비슷한 말을 들으면 나는 어린아이한테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하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다니. 가끔씩 이론과 실제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얼른 어른이 되려고 애쓰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건 서두를 수가 없는 일이야. 마릴라 아주머니가 잼에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않는다면 내가 더 빨리 자랄 수도 있을 텐데.”
“마릴라 아주머니는 쩨쩨하지 않으셔. 그런 말을 하면 넌 은혜도 모르는 애가 되는 거야.”
앤이 엄하게 말했다.

“같은 뜻인 다른 말이 있는데, 그 말은 훨씬 더 나았지만 기억이 안 나. 마릴라 아줌마가 지난번에 하는 말을 들었는데.”
데이비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알뜰하다고 말을 하려고 했다면 쩨쩨한 것하고는 다르지. 알뜰하다는 건 좋은 점이거든. 마릴라 아주머니가 쩨쩨한 사람이라면 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너와 도라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너 위깅스 아주머니 집에서 살았다면 좋았겠니?”
“아니, 절대로. 리처드 삼촌한테 가는 것도 싫어. 난 여기서 사는 게 훨씬 더 좋다고. 마릴라 아주머니가 잼을 줄 때, 뭐라더라, 아까 그거라 해도 앤 누나가 있으니까 난 여기가 좋아. 앤 누나, 내가 잠들 때까지 얘기해줘. 요정 얘기는 말고. 그것은여자아이들이나 좋아하지. 난 신나는 얘기가 좋아. 막 죽이고 총 쏘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거 말이야. 집이 불에 탄다거나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그 순간 다행스럽게도 마릴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앤, 다이애나가 뭔가 급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어. 왜 그러는지 가보는 게 좋겠다.”
앤이 동쪽 방으로 달려가 보니 다이애나의 창가에서 플래시 불빛이 다섯 번씩 깜박거렸다. 둘의 어렸을 적부터의 암호에 따르면 그 의미는 “아주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 당장 와줘!”라는 소리였다. 앤은 급히 흰색 숄을 뒤집어쓰고‘유령의 숲’을 지나 벨 씨의 목장을 건너 비탈길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좋은 소식이 있어, 앤. 어머니와 내가 지금 카모디에다녀왔는데, 블레어 씨네 상점에서 스펜서베일에서 온 메리 센트너를 만났어. 메리가 그러는데 토리 길에 사는 코프 자매가 버드나무 문양 도자기를 갖고 있대. 바자회 저녁에서 본 것과 똑같은 거래. 그것을 팔지도 모른대. 마르타 코프는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모두 팔아치우는 사람이라니까. 코프 자매가 도자기를 팔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있어. 스펜서베일의 웨슬리 키슨네도 그 도자기가 있다니까. 그리고 그 도자기는 팔려는 것이 확실하대. 하지만조제핀할머니의 것과 똑같은 것인지는 모른대.”
“내일 당장 스펜서베일로 가봐야겠어.”
앤이 당장 결심하고 말했다.
“너도 나와 함께 가줘. 이제야 내 어깨의 무거운 짐을 벗게 되었어. 모레 샬럿타운에 가야 하는데 그 도자기 접시 없이 어떻게조제핀할머니를 만날 수 있겠어? 그손님방에서 침대에 뛰어든 사람이 나라고 고백하던 때보다 더 괴로울 것 같아.”
둘은 옛날 기억에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날 오후 두 사람은 접시를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섰다. 스펜서베일까지는 15킬로미터도 넘는 거리였고 날씨도 이 모험을 하기엔그리 좋지 못했다. 너무 덥고 바람도 없었으며 6주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 길에서는 먼지가 일었다.
“비가 좀 내렸으면 좋겠어. 모든 것이 다 바싹 말라붙었어. 저 가여운 들판도 너무나 불쌍하게만 보이고 나무들도 팔을 벌리고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아. 뜰에 나가도 식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게 보여. 농부들의 곡식이 저렇게 말라가고 있는데 정원 때문에 불평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야. 해리슨 아저씨도 목장에 풀이 다 말라 죽어 소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든대.”

힘들게 마차를 달린 둘은 스펜서베일에 당도했고 토리 길로 들어섰다. 토리 길은 넓은 대로였지만 조용했다. 마차바큇자국사이사이로 풀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그 길 양쪽으로는 어린 가문비나무가 샛길까지 죽 늘어서 있고, 길 이쪽저쪽으로 펼쳐진 농장 뒷밭 울타리가 보였으며, 나무 그루터기가 잡초와 국화꽃과 함께 흩어져 있었다.
“왜 이 길을 토리 길이라고 부를까?”
앤이 물었다.
“이 길이 토리 길이 된 건 나무도 없는데 숲이라 부르는 꼴이라고 앨런 목사님이 말씀하셨어. 여기에는 코프 자매와 저 끝에 자유당인 마틴 보베어 할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살고있지 않은데길을 내서 토리 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그렇대. 보수당인 토리당 정부가 정권을 잡았을 때 뭔가 업적을 남겼다고 과시하려고 이 길을 만든 거래.”
다이애나의 아버지는 자유당이고‘초록 지붕 집’사람들은 항상 보수당을 지지해와서 앤과 다이애나는 가급적 정치 얘기는 피했다.
드디어 둘은 코프 자매가 살고 있는 집에 당도했다. 깔끔하기로 소문 난‘초록 지붕 집’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단정하게 정리된 집이었다. 아주 옛날 집 같은 건물이 비탈길에 자리를 잡고 있어 한쪽 면 아래는 돌기둥으로 받쳐져 있었다. 집 본채와 집 밖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빛나는 흰색으로 회칠이 되었고 하얀 울타리로 둘러쳐졌다. 부엌 뜰에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블라인드가 모두 내려져 있어. 안에 아무도 없나 봐.”
다이애나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둘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집에 있는 도자기 접시가 내가 찾는 거라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상관없어.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웨슬리 키슨한테도 가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늦어지잖아.”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가 지하실 위로 작고 네모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건 부엌 창문이야. 이 집은 뉴브리지에 있는 찰스 삼촌 집과 똑같이 생겨서 저기가 부엌 창문이라는 걸 내가 분명히 알아. 저기는 블라인드도 내려져 있지 않아. 여기 오두막 지붕 위로 올라가 보면 저 안이 들여다보일 테니까 도자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럼 나쁜 일일까?”
“아니, 아닐 거야. 우리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중요한 윤리 문제가 해결되자 앤은 아까 말한 그 오두막 지붕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욋대18)로 엮어진 오두막 지붕은 뾰족했다. 전에는오리 집이었는데 코프 자매가 ‘깔끔하지 못한 새’라며 오리를 기르지 않게 되어 지난 몇 년 동안 알을 품은 암탉을 넣을 때 외에는 쓰지 않던 집이었다. 빈틈없이 회칠이 된 건물이었지만 조금씩 흔들려서 앤은 상자 위에 작은 나무통을 올려놓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면서도 왠지 불안했다.
“이 집이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면 어떡하지.”

앤이 조심스럽게 지붕에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창문턱에 몸을 기대.”
다이애나의 충고대로 앤은 창문에 몸을 기댔다.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버드나무 문양의 그 도자기 접시가 창문 앞 선반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앤이 찾던 바로 그 접시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뛸 듯이 기쁜 마음에 앤이 위험스럽다는 것도 잊고 문턱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거기다 폴짝 뛰어버리기까지 해 지붕이 와장창 무너지며 몸이 양 겨드랑이까지 쏙 빠져버렸다. 앤은 매달린 몸을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가 오리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이 불운을 당한 친구의 허리를 잡아서 끌어당겼다.
“아, 아파, 하지 마. 판자 같은 것이 찔러. 내 발밑에 뭐 놓을 것이 있나 좀찾아봐 줘. 그럼 내가 몸을 빼낼 수 있을 거야.”
앤이 비명을 질렀다.
다이애나가 급히 아까 발판으로 사용했던 나무통을 갖다 놓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앤의 발이 겨우닿을락 말락 할뿐 몸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내가 위로 올라가면 너를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은 소용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판자 때문에 몹시 아파. 네가 도끼로 판자를 쪼갤 수 있다면 내가 빠져나갈 수도 있을 텐데. 아, 나는 정말이지 불운의 별 아래서 태어났나 봐.”

다이애나가 도끼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와야겠어.”
포로가 되어버린 친구에게로 돌아온 다이애나가 말했다.
“안 돼, 가지 마. 사람을 불러오면 소문이 퍼져서 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돼. 그냥 코프 자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해보자. 코프 자매라면 도끼가 어디 있는지 알 테니까 나를 꺼내줄 수 있을 거야. 움직이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견딜 만해. 몸만은 말이야. 코프 자매가 이 헛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해. 귀중하게 여긴다면 집을 부순 변상도 해줘야 할 것 아냐. 내가 부엌을 엿보아야 했던 이유를 이해만 해준다면 그래야 한대도 괜찮아.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저기 있는 접시가 내가 찾는 것과 같은 접시라는 거야. 코프 자매가 그걸 내게 넘겨주기만 한다면 지금의 고통쯤은 견딜 수 있다고.”
“저녁이 되어도, 내일까지도 코프 자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다이애나가 불안스럽게 말했다.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야겠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해. 아이, 이건 정말이지 끔찍스러운 고난이야. 내 불행이 모건 부인 작품의 주인공들이 겪는 것처럼 낭만적이라면 좋겠지만 내 고난은 그저 바보스럽기만 해. 코프 자매가 뜰에 들어섰는데 난데없이 웬 여자 몸이 지붕에 비쭉 솟아 나와 있는 걸 본다면 얼마나 놀라겠어. 어머,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니? 아니, 다이애나, 이건 천둥소리야.”

서둘러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다이애나가 천둥소리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북서쪽에서 시꺼먼 구름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소나기가 사납게 쏟아질 모양이야. 오, 앤, 이제 어쩌면 좋으니?”
다이애나가 어쩔 줄 몰라 외쳤다.
“그럼 비를 피할 준비를 해야지.”
앤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미 당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소나기쯤은 문제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넌 가서 말이랑 마차를 비어 있는 헛간에 집어넣어. 참, 다행히 마차에 파라솔이 있다. 여기 모자 받아. 마릴라 아주머니가 토리 길을 가는데 좋은 모자를 쓰는 건 어리석다고 말을 하더니 역시 그 말이 맞았어. 아주머니 말씀은 항상 옳아.”
다이애나가 매어놓은 말을 풀어 헛간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억수처럼 비가 쏟아져 내렸다. 다이애나는 그대로 헛간에 앉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빗발이 너무 심해 맨머리에 파라솔을 쓰고 비와 맞서고 있는 용감한 앤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였다. 천둥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비는 한 시간은 족히 사정없이 퍼부어댔다. 가끔씩 앤은 파라솔을 뒤로 젖혀 얼굴을 보이고 다이애나를 격려하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굉장한 빗소리 때문에 말은 주고받을 수 없는 거리였다. 겨우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자 다이애나는 뜰에 온통 물이 고여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앤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많이 젖었지?”

“아, 아니야. 머리랑 어깨는 하나도 젖지 않았고 치마만 욋대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에 좀 젖었어. 걱정하지 마, 다이애나, 나는 괜찮아. 난 이렇게 비가 내려줘서 얼마나 잘됐는지, 우리 정원의 식물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꽃이며 꽃봉오리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과꽃이랑 스위트피랑 라일락 나무에 앉은 야생 카나리아와 정원을 지키는 나무의 요정이 나누는 즐거운 대화도 상상해보았단다. 집에 가면 그것을 모두 글로 적을 거야. 지금 내게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좋겠어. 집에 도착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앤의 충실한 친구 다이애나는 연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 있는 상자 안에서 포장지도 한 장 찾아냈다. 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파라솔을 접고 모자를 쓴 다음 다이애나가건네준기왓장에 포장지를 펼쳤다. 그렇게 도저히 문학적인 분위기라고 생각되지 않는 환경에서 앤은 목가(牧歌)를 적어나갔다. 그렇지만 꽤 멋진 시였고 앤이 그 시를 읽어주자 다이애나는 그만 폭 빠져버렸다.

“오, 앤, 그건 너무 멋진 얘기야, 너무 멋져. 그걸 《캐나다 여성》지에 보내봐.”

앤은 머리를 흔들었다.

“오, 안 돼, 절대 응모할 만한 글이 아니야. 멋진 말을 늘어놓기만 했을 뿐이지 구상도 제대로 안 된 거라고. 나는 이런 식으로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발표할 글로는 적당치 않아. 편집자는 구상을 중시한다고 프리실라도 말을 했거든. 어머나, 저기 사라 코프 아주머니가 오고 있다. 제발 다이애나, 네가 가서 먼저 이 상황을 설명해줘.”

키가 작은 사라 코프는 낡은 검은색 옷을 입었으며 쓰고 있는 모자도 허영심이나 장식적인 멋을 위해서가 아니라 질을 생각한 것인 듯했다. 사라 코프는 자기 집 뜰에 펼쳐진 해괴한 광경에 예상한 대로 당황해하기는 했지만 다이애나의 설명을 듣고는 동정심을 표해주었다. 얼른 뒷문을 열고 도끼를 꺼내 능숙하게 몇 번 휘두르자 앤의 몸은 자유를 되찾았다. 잠시 후 앤은 몹시 지치고 몸이 뻐근했지만 갇혀 있던 오두막으로 쑥 내려갔다가 기쁜 표정으로 곧 밖으로 나왔다.

“코프 아주머니, 버드나무 문양 도자기 접시를 보려고 제가 부엌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봤던 거예요. 다른 것은 보지 않았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괜찮아요. 뭐 해가 될 일을 한 것도 아니에요. 다행히도 우리 코프 집안사람들은 언제나 부엌을 깨끗이 정돈해두니까 누가 들여다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저 낡은오리 집도 정말 잘됐어요. 이제는 마르타도 그걸없애는 데 반대하지못할 테니까. 부숴버리자고 해도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반대했거든요. 봄마다 회칠하기도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마르타와 무슨 일을 의논하는 건 기둥에다 대고 말을 하는 거나 같아요. 오늘은 마르타가 시내에 가야 해서 내가 역까지 태워다 주고 왔지요. 그 접시를 사고 싶다고요. 얼마나 줄 건데요?”

“이십 달러요.”

앤은 코프 집안사람과 머리를 굴려가며 흥정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그 가격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접시가 내 것이라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마르타도 집에 없는데 내가 팔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만일 그랬다가는 마르타가 야단을 피웠을 거라고요. 이 집에서는 마르타가 아주 상전 노릇을 하거든요. 나도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로 사는 게 이제는 아주 진절머리가 나요. 어쨌거나 좀 들어와요, 자, 들어와요. 몹시 피곤하고 배도 고플 텐데. 내가 차야 정성스럽게 준비하겠지만 버터 바른 빵과 오이 외에는 기대하지 말아요. 마르타가 케이크랑 치즈랑 절임을 넣은 찬장을 모두 잠가버리고 나갔거든. 항상 그래요. 마르타는 손님이 오면 내가 음식에 너무 선심을 쓴다고 생각하거든.”

두 사람은 몹시 배가 고파서 사라 코프가 내온 맛있는 빵과 버터와 오이를 기꺼이 먹었다. 차를 마시고 나자 사라 코프가 말했다.

“접시를 파는 건 괜찮지만, 25달러는 내야 해요. 아주 오래된 접시니까요.”

다이애나가 식탁 아래서 앤의 발을 살짝 찼다. ‘응하지 마. 네가 버티면 20달러에도 살 수 있어.’ 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소중한 접시를 손에 넣고 싶었다. 앤은 즉시 25달러를 주겠다고 해서 미스 사라는 30달러를 달라고 할 걸하고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접시를 팔지요. 난 지금 돈을 좀 마련해야 해요. 사실은…….”

미스 사라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고 으스대듯 말했다. 볼에도 생기가 돌았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루서 왈라스와요. 루서는 20년 전에 내게 청혼했어요. 나도 그 사람을 좋아는 했지만 그때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우리 아버지가 반대해서 결혼을 못 했거든요. 내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서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난 너무 소심한 성격이었고 우리 아버지가 무서웠죠. 게다가 결혼할 남자가 이렇게 없을 줄도 몰랐어요.”

말고삐를 잡고 있는 다이애나와 접시를 소중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앤이 코프 자매 집에서 멀어져 나왔다. 비에 젖은 녹색의 싱그러운 토리 길을 달리며 두 사람의 처녀다운 밝은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잇달아 높게 울려 퍼졌다.

“내일 시내로 가면 너희조제핀고모할머니에게 오늘 일어난 우스운 일들을 모두 들려드릴 거야. 정말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잖아. 접시도 구했고 비를 갈구하던 땅에 비도 흠뻑 내렸으니 이거야말로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이 맞지 뭐야.”

“우리는 아직 집에 다 오지 않았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게 뭐야. 넌 말썽 일으키는 데는 천재잖아, 앤.”

다이애나가 언제 또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듯 말했다.
“어떤 사람에겐 그런 모험이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런 운명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나 봐.”

앤이 태연스레 말했다.
17)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en Poe, 1809~1849)의 시 <엘도라도(Eldorado)>에서 인용.
18) 지붕이나 벽에 흙을 바르려고 엮어 넣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나 대나무 혹은 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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