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1~2

나단비 | 2024.02.10 09:33:24 댓글: 6 조회: 270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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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철 린드 부인 놀라다





레이철 린드 부인의 집은 에이번리의 큰길이 비탈길이 되어 분지까지 쑥 내려가 있는 곳에 있었다. 오리나무와 숙녀의 귀걸이 꽃들이 집 주변을 빙 둘러 있고 집 앞으로는 커스버트네 집이 있는 숲에서 시작된 개울이 흘렀다. 상류 쪽으로는 가끔 옹달샘이나 폭포도 볼 수 있을 만큼 물길이 복잡하고 물살도 꽤나 센 개울이라고들 하지만 린드 부인의 집 앞 분지를 지나면서는 물줄기도 졸졸졸 차분히 흘러갔다. 시냇물도 레이철 린드 부인 집 앞에서는 행동을 삼가야 책잡히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린드 부인은 창가에 앉아 시냇물이며 아이들이 지나가는 모습까지 온갖 마을 일을 다 지켜보았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일어날라치면 그 자초지종을 꼬치꼬치 다 캐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실 에이번리든 어디든 이웃 일에 참견하고 다니느라 바빠서 자기 일은 게을리하는 사람이 많지만, 레이철 린드 부인은 남의 일에 간섭하고 다니더라도 자기 일은 말끔하게 끝내놓고 다니는 재주가 있었다. 훌륭한 주부이기도 해서 집 안도 언제나 깔끔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바느질 모임을 이끌고, 주일 학교 운영도 돕고 있으며 교회의 자원봉사 모임과 해외 선교 단체 일도 가장 열심히 했다. 그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린드 부인은 여유롭게 부엌 창가에 몇 시간이고 앉아 퀼트 담요 뜨개질을 즐겼다.

“린드 부인이 퀼트 담요를 벌써 열여섯 장이나 만들었대요.”

에이번리의 주부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 분지를 지나 저 너머 붉은 언덕으로 올라가는큰길에서 일어나는 일도 다 지켜봤다. 에이번리는 세인트로렌스 만 바다 쪽으로 세모꼴로 튀어나와 두 면이 바다에 면해 있어서 이 마을로 들어오려는 사람이나 나가려는 사람은 모두 린드 부인 집 앞으로 난 언덕을 지나야만 했고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 린드 부인의 눈을 절대 피해갈 수 없었다.

어느 이른 유월 오후 그날도 역시 린드 부인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는 햇볕이 밝고 다사롭게 비쳐들었고, 집 저 아래 비탈길 과수원에 신부 얼굴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연분홍 색깔 꽃들 위로는 수많은 벌들이 윙윙거렸다. 에이번리 사람들이 그저 ‘레이철린드의 남편’이라고 부르는 작은 체구에 온순한 성격을 가진 토머스 린드 씨는 헛간 저 너머 언덕 위 밭에서 늦은 순무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매슈 커스버트도 ‘초록 지붕 집’ 너머에 있는 넓은 개울가 붉은 밭에 씨를 뿌리고 있어야 했다. 어제저녁 린드 부인은 카모디에 있는 윌리엄 J. 블레어네 상점에서 커스버트가 피터 모리슨에게 내일 오후에 순무 씨앗을 뿌릴 거라고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물론 피터가 먼저 물었고 매슈 커스버트는 대답을 했을 뿐이다. 매슈는 절대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남에게 시시콜콜 자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오후 3시 반경 이 바쁜 시간에 매슈 커스버트가 유유자적 이 분지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흰색 셔츠에 가장 좋은 옷까지 갖추어 입고서. 이것은 매슈가 에이번리에서 멀리 나간다는 증거였다. 밤색 암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니 꽤 멀리 가려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매슈 커스버트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에이번리의 다른 사람 같았더라면 린드 부인이 이런저런 상황을 짜맞추어 이 의문을 꽤 그럴듯하게 추측해냈을 것이지만 매슈의 외출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뭔가 급하고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낯선 사람 속에 섞이거나, 다른 사람과 말을 해야 하는 곳엔 절대로 가려 들지 않는 사람인 매슈가 하얀 셔츠를 차려입고 마차까지 몰고 길을 나서는 일은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레이철은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어 그만 그날 오후의 즐거운 기분까지 망치고 말았다.

‘차를 마신 다음‘초록 지붕 집’에 가서 마릴라에게 매슈가 어디를, 왜 갔는지 알아보아야겠어.’ 결국 린드 부인다운 결론을 내린 다음에도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매슈가 보통 이때쯤 시내로 나가지는 않지. 누구네 집을 방문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닐 테고. 순무 씨앗이 떨어졌다면 그렇게 차려입지도 않았을 텐데, 더군다나 마차까지 끌고 나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의사를 부르러 가는 사람처럼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어. 하지만 어젯밤 이후로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바로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매슈 커스버트가 오늘 외출한 이유를 알아낼 때까지는 궁금해 한시도 못 참겠어.’

차를 마시자마자 린드 부인은 얼른 집을 나섰다. 과수원에 둘러싸인 넓고 한적한 커스버트의 집은 린드 부인 집에서 4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그다지 먼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길고 좁게 난 오솔길을 걷자면 길이 좀 멀게 느껴지기는 했다.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아들만큼이나 내성적이고 부끄럼을 많이 탔던 매슈 커스버트의 아버지는 숲 속으로 아예 들어가 버리지는 않더라도 마을 사람과 가능하면 멀리 떨어져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개척지 제일 끄트머리에 집터를 정했다. 에이번리의 다른 집들은 서로마주 보며 사이좋게 위치해 있건만‘초록 지붕 집’은 그렇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근처에 자리를 잡아큰길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레이철린드 부인으로서는 왜 이런외딴집에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그냥 사는 것뿐이지, 그럼.”

마차바큇자국이 깊게 패였고 길 양쪽으로는 들장미가 핀 푸른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린드 부인이 혼잣말을 했다.

‘매슈나 마릴라나 둘 모두 이런외딴곳에 사는 걸 보면 좀 별난 사람들이지. 나무가 친구가 돼줄 수 있다면야 모를까. 나무라면 지천으로 널렸으니까. 나는 사람과 가까이 살고 싶지 이거야 원. 그런데 이 두 남매가 자기네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그렇지만 그것도 그냥 익숙해져버린 것 아닐까. 아일랜드 사람들 말처럼 사람은 목을 매달아놔도적응한다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린드 부인은 오솔길에서 빠져나와‘초록 지붕 집’의 뒷마당에 들어섰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정리가 된 뒤뜰은 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자리 잡았고 다른 쪽은 미루나무들이 차지했다.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삭정이 하나,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런 게 있었다면 린드 부인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도 없겠지만. 린드 부인은 마릴라 커스버트가 뜰 청소도 집 안 청소만큼이나 자주 한다고 생각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식을 털지 않고 주워 먹어도 될 만큼.

린드 부인은 재빨리 부엌문을 탕탕 두드리고 들어오라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섰다.‘초록 지붕 집’부엌은 기분 좋게 아늑한 곳이었지만 너무나 깨끗해서 쓰지 않는 응접실 같은 인상을 주었다. 창문은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나 있는데 뒤뜰이 내다보이는 서쪽 창문으로는 밝은 유월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쪽 창문으로는 우거진 푸른 덩굴 식물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집 왼편 과수원에 만발한 흰 벚꽃들이 하늘거리는 모습과 분지의 개울가에 서 있는 날씬한 자작나무가 보였다. 눈부신 햇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릴라 커스버트는 항상 동쪽 창가에 앉는다. 마릴라에게 햇빛은 경건하게 살아야 할 세상에서 너무 촐랑대기만 할 뿐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오늘도 마릴라는 이 부엌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뒤로 식탁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린드 부인은 문을 채 닫기도 전에 식탁을 훑어보고 마음속으로 이 상황을 가늠해보았다. 접시가 세 개인 것을 보니 매슈가 누군가를 데려와 함께 식사를 할 생각인 게 틀림없어. 좋은 그릇을 내놓지 않고 매일 쓰는 그릇에 사과 통조림과 빵도 한 가지만 있는 걸 보니 특별한 손님은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매슈는 왜 흰색 셔츠를 입고 마차를 끌고 나간 걸까? 린드부인은 이 조용하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던‘초록 지붕 집’의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도무지 풀 수가 없었다.

“어서 와요,레이철. 정말 화창한 날이에요. 좀 앉으세요. 다들 별일 없죠?”

마릴라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릴라 커스버트와레이철린드 부인은 서로 닮은 점이 전혀 없었지만 둘 사이에는 우정이랄까 뭐 그런 게 있었다. 둘이 닮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게 둘이 잘 지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마릴라는 키가 크고 마른 몸에 둥글둥글한 데라고는 없이 여기저기 각진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흰 머리가 보이는 검은 머리는 항상 뒤로 틀어 올려 흩어지지 않게 철사핀 두 개로 단단히 고정했다. 뭐랄까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입가로는 약간의 유머감각이 엿보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개발을 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마릴라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걱정이 되던데, 아까 매슈가 외출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매슈가 의사를 데리러 가나 싶어서…….”
린드 부인이말했다.

마릴라가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릴라는 이미 린드 부인이 올라올 줄 짐작하고 있었다. 매슈가 느닷없이 외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 아니에요, 어제는 두통이 좀 심했지만 오늘은 아주 좋아요. 매슈 오라버니는 브라이트 리버에 갔어요. 노바스코샤에 있는 고아원에서 사내아이를 하나 데려오기로 했거든요. 그 아이가 오늘 밤 기차로 온다고 했어요.”

차라리 브라이트 리버로 매슈가 호주에서 오는 캥거루를 마중하러 갔다고 했더라면 린드 부인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린드 부인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마릴라가 지금 자기를 놀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릴라, 지금 진담이에요?”

린드 부인이 따지듯 물었다.

“그럼요.”

마릴라는 노바스코샤 고아원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 에이번리 농장에서 봄이면 으레 해온 일이라도 되는 양 대답했다.

린드 부인은 심한 충격이라도 받은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세상에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릴라와 매슈 커스버트가 사내아이를 입양한다니! 고아원에서 고아를! 세상이 뒤집힐 일이야! 이보다 더 놀랄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린드 부인이 다그쳤다.

조언도 구하지 않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분명히 반대를 해야 했다.

마릴라가 대답했다.

“글쎄, 매슈 오라버니와 내가 겨우내 생각했던 문제예요. 알렉산더 스펜서 부인이 크리스마스 전쯤에 우리 집에 방문했을 때 봄이 되면 호프타운의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데려올 거라는 얘기를 했어요. 부인의 사촌이 거기 살고 있고 스펜서 부인도 가본 적이 있어서 그 고아원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오라버니와 나는 줄곧 이 문제를 상의했어요. 우리는 남자아이를 데려올 생각이에요. 오라버니도 이제 많이 늙었어요. 올해 나이가 벌써 예순 살이나 되었고 예전처럼 그렇게 창창하지가 않아요. 심장도 좋지를 못하고. 지금 우리에게는 도와줄 일손이 꼭 필요해요. 일꾼을 구하려고 해도 멍청하고 버릇없는 프랑스 아이들뿐이잖아요. 그것도 좀 일을 가르쳐놓아 도움이 된다 싶으면 가재 통조림 공장이나 미국으로 내빼버리죠. 처음에 매슈 오라버니는 버나도1) 고아원 아이로 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죠. 그 아이들이 나쁜 애들이라서가 아니라 런던의 부랑아를 데려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난 단지 이 나라 아이를 데려오고 싶어요. 누구를 데려오건 모험이긴 하지만 캐나다 아이를 데려온다면 내 마음이 더 편하고 밤에 잠도 더 잘 올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스펜서 부인이 여자아이를 데려올 때 우리에게도 아이를 하나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기로 결정했죠. 우리는 스펜서 부인이 지난주에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카모디에 사는 리처드 스펜서를 통해 열 살이나 열한 살 정도 된 영리하고 성격이 좋은 남자아이를 데려다 달라는 얘기를 전했죠. 우리는 그 나이면 당장 잔심부름을 시키기에도 적당하고 키우면서 교육을 시키기에도 가장 좋은 나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아이에게 좋은 가정을 주고 교육도 잘 시키려고 해요. 그런데 오늘 알렉산더 스펜서 부인이 전보를 보내왔더군요. 우체부가 역에서 가져왔어요. 오늘 밤 5시 30분 기차로 온대요. 그래서 매슈 오라버니가 브라이트 리버로 아이를 마중 나간 거예요. 스펜서 부인이 아이를 역에 내려주기로 했거든요. 물론 부인은 화이트 샌즈 역까지 갈 거구요.”

린드 부인은 언제나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성격이었고, 그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 린드 부인은 이 놀라운 얘기를 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자기 생각을 마구 쏟아 내놓기 시작했다.

“글쎄요, 마릴라가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좀 해야겠어요.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그럼. 지금 마릴라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낯선 아이를 집 안으로 들여놓으려 한다고요.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성품이 어떤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모르면서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바로 지난주에 신문에서 이 섬 서쪽에 사는 한 부부가 고아원에서남자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밤중에 일부러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는 기사를 읽었거든요. 잠자다가 타 죽을 뻔했잖아요. 마릴라,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얘기도 들었어요. 입양한 사내아이가 날계란을 깨서 빨아먹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무리 해도 그 버릇을 못 고쳤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미리 내게 조언을 구했어야지 왜 그러지를 않았어요, 마릴라. 내가 그런 일은 생각지도 말라고 미리 충고를 했을 텐데, 그럼.”

이런 린드 부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마릴라는 기분 나빠하지도, 걱정하지도 않고 그저 차분하게 뜨개질만 계속했다.

“레이철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건 알아요. 나도 좀 걱정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매슈 오라버니가 말은 안 해도 몹시 원하는 눈치라서 제가 반대할 수 없었어요. 오라버니가 지금까지 어떤 일에 이렇게 마음을 두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차라리 내가 포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낯선 아이를집 안에 들이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도요.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다 위험이 따르기 마련 아니에요? 자기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안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고요. 아이들이 항상 잘 자라주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노바스코샤는 바로 우리 섬 근처에 있으니까 아이를 영국이나 미국에서 데려오는 것과는 다를 거예요. 아이가 우리랑 많이 다르지도 않을 거고요.”

“글쎄요, 나도 모든 일이 다 잘되기를 바라지만, 만에 하나 초록 지붕 집이 불에 타버린다거나,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가 우물에 독약을 넣어 가족 전부가 끔찍한 고통 속에 몰살당했다는 뉴브런즈윅에서 일어난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충고를 해주지 않았다고 원망일랑 마세요. 그 경우는 사내아이가 아니라여자아이였대요.”

린드 부인이 심히 우려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여자아이를 데려오려는 게 아니에요.”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는 일은 순전히여자아이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남자아이들이 할 짓은 아니라는 듯 마릴라가 항변했다.

“난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건 꿈도 꾸어보지 않았어요. 난 왜 알렉산더 스펜서 부인이여자아이를 데려오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하긴 그 부인이라면마음먹기에 따라 고아원 아이들을 통째로 입양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린드 부인은 매슈가 그 고아를 데리고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매슈가 돌아오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아 로버트 벨 부인 집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물론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면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린드 부인은 떠들썩한 화젯거리를 아주 좋아했다. 린드 부인이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가겠다고 하니 마릴라로서는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린드 부인의 비관적인 말에 마릴라의 마음에는 슬며시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되살아났다.

“아이구, 이런 일이 다 생기다니!”

린드 부인이 다시 오솔길로 들어서면서 탄식했다.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그 가여운어린것도 안됐지 뭐야. 실수가 아니기만 바라야지. 매슈와 마릴라는 어린아이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이가 제 조상보다도 더 현명하고 착실한 아이이기를 바라다니, 그 아이에게 조상이 있기나 한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어쨌거나‘초록 지붕 집’에 아이는 어울리지가 않아. 그 집에는 아이가 있었던 적도 없잖아. 그 집이 새로 지어졌을 때는 이미 매슈나 마릴라도 다 자란 후였고. 그 둘이 아이였던 시절이 있긴 했나, 상상이 안 되는 일이야. 여하튼 난 그 고아 입장도 되고 싶지 않아. 그 애도 참 안됐지, 그럼.”

그렇게 린드 부인은 들장미 덩굴에게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다 풀어놓았으나 바로 그 순간 브라이트 리버 역에서 자기를 데리러 나와 주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고아 아이를 보았더라면 린드 부인의 아이를 가여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1)영국의 자선가로 많은 고아원을 설립했다.



2

매슈 커스버트 놀라다





매슈 커스버트는 밤색 암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브라이트 리버까지 13킬로미터 길을 유유자적 갔다. 아담한 농장들 사이로 난 아름다운 길이었다. 향기로운 전나무 냄새가 이따금씩 코끝을 간질였고, 온통 하늘하늘한 꽃들로 뒤덮인 야생 자두나무 골짜기를 지나기도 했다. 사과밭에서 나는 향내로 공기는 달콤했고, 저 아래로는 비스듬히 경사진 목초지가 진줏빛과 자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저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졌다.

“작은 새들은 노래를 부르네,
여름날이 한 해 중 오늘 하루뿐인 양.”2)

매슈는 길을 가다 여자들과 마주치면 고개 숙여 인사를 해야 하는 것만 빼고는 나름대로 이 여행이 즐거웠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사를 하는 게 예의였다.

매슈는 마릴라와 린드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여자가 불편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는 피조물이 은밀히 자기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상 매슈가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기에 이것이 순전히 괜한 걱정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결코 호감을 주는 얼굴 생김새도 아닌데다 흰 머리는 구부정한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옅은 갈색 긴 턱수염은 스무 살 때부터 깎아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의 모습은 스무 살 때나 예순 살인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단지 그때보다 수염이 더 하얗게 변했다는 것만 빼고는.
브라이트 리버 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가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매슈는 너무 일찍 왔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작은 브라이트 리버 호텔 마당에 말을 매 놓고 기차 역사로 걸어갔다. 긴 플랫폼은 거의 비어 있었다.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고는 저쪽 끝 지붕 널빤지 더미 위에 앉아 있는여자아이하나가 눈에 띌 뿐이었다. 매슈는 거기 있는 사람이여자아이라는 것도 겨우 알아보았을 정도로 그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이를 지나쳤다. 그여자아이를 쳐다보았더라면 아이의 태도와 표정에 심상치 않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서려 있다는 것을 매슈도 분명히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이는 거기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매슈는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매표소 문을 잠그는 역장에게 다가가 5시 30분 기차가 곧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5시 30분 기차는 30분 전에 이미 왔다 갔지요. 그런데 승객 중 하나가 매슈 당신이 데려갈 거라면서 작은여자아이하나를 내려놓고 갔어요. 저 지붕 널빤지 더미에 앉아 있는 아이요. 아이에게 숙녀 대합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아주 진지하게 대꾸를 하더군요. 밖이 더 상상할 거리가 많다나요. 평범한 아이는 아닌 것 같습디다.”

매표원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나는여자아이를 데리러 온 게 아니라 남자아이를 데리러 왔어요. 그 아이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알렉산더 스펜서 부인이 노바스코샤에서 데려왔을 텐데.”

매슈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역장이 후 하고 한숨 소리를 냈다.

“뭔가 착오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스펜서 부인이 그 아이를 기차에서 내려주면서 내게 당부를 했거든요.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하기 원해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니까 누가 데리러 올 때까지 좀 봐달라고요. 그게 전부예요. 다른 고아 아이를 어디에다 숨겨두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마릴라가 곁에 있어 이 상황을 수습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매슈가 힘없이 말했다.

“저 아이한테 한번 물어보지 그래요. 아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도 입이 있을 테니 설명을 해주겠지요. 고아원에 원하는 남자아이가 없었는지도 모르고.”

역장이 태평스럽게 말했다.

배가 고팠던 역장은 그만 역에서 성큼성큼 걸어나가 버렸다. 이제 매슈는 어쩔 수 없이 여자아이한테 가서, 더구나 생전 처음 보는 고아 소녀에게 넌 왜 사내아이가 아니냐고 물어야 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일은 그로서는 사자 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매슈는 속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려 천천히 플랫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아이는 매슈가 자기를 지나쳐 갈 때부터 죽 지켜보고 있었고 지금은 아예 매슈에게 고정한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하지만 매슈는 아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아이를 쳐다보았더라도 어떻게 생긴 아이인지 자세히 살피지도 않았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이 아이가 열한 살 정도 되었고 누르스름하고 회색빛이 나는 보기 흉한 옷을, 그것도 이미 작아져서 몸에 너무 끼고 짧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색이 바랜 갈색 세일러3) 모자를 썼고, 모자 아래로는 숱이 많고 누가 보기에도 붉은색깔인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렸으며, 작고 마른 아이의 얼굴은 하얗지만 주근깨투성이였다. 입도 크고 눈도 컸는데 눈 색깔은 빛과 기분에 따라서 초록빛이 되었다 잿빛이 되었다 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고 사람을 아주 자세히 살피는 사람이라면 아이의 턱이 매우 뾰족하고 튀어나왔으며, 널찍한 이마에 큰 눈은 생기발랄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맴돌고 표정도 아주 풍부하다는 것을 알았으리라.한마디로말해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끄럼 많은 매슈 커스버트가 우스울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이 오갈 데 없는 소녀가 평범하지 않은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매슈는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고통은 면했다.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매슈의 모습을 본여자아이가 낡은 구닥다리 융단 가방을 얼른집어 들고 일어나서 다른 쪽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초록 지붕 집’의 매슈 커스버트 씨인가요?”

여자아이가 톡톡 튀는 맑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나 뵙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저를 데리러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막 걱정하기 시작했거든요. 못 나오시게 될 상황을 수도 없이 상상하고 있었어요.오늘 밤아무도 저를 데리러 나오지 않으면 저기 모퉁이에 보이는 커다란 산벚나무에 올라가 밤을 보내기로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달빛이 내리쬐는 밤에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산벚나무 위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대리석 저택에 살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전오늘 밤에 절 데리러 나오지 않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꼭 나오시겠거니 믿었거든요.”

아이의 작고 마른 손을 잡은 매슈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아이에게 착오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마릴라에게 그 일을 맡길 작정이었다. 어쨌거나 이 아이를 브라이트 리버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잘못되었든지 간에 모든 질문이나 설명은‘초록지붕 집’으로 돌아간 다음으로 미뤄도 될 성싶었다.

“미안하다, 내가 늦어서. 어서 가자꾸나. 말은 저기 뒤뜰에매어져있다. 가방을 이리 다오.”

매슈가 수줍게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들 수 있어요. 무겁지도않거든요.”

아이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이 가방 안에 제 소중한 물건이 모두 다 들어 있긴 하지만 무겁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 가방은 요령 있게 들지 않으면 손잡이가 떨어져버려서 방법을 잘 아는 제가 들어야 해요. 굉장히 오래된 가방이거든요.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산벚나무에서 하룻밤 보내는 것도 멋진 일이기는 하지만요. 집까지는 오래 걸리나요? 스펜서 아주머니가 13킬로미터는 된다고 했거든요. 그것도 기뻐요, 전 이런 마차 여행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아저씨네 집에서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요. 전 사실 그 누구와도 가족이 되어 본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고아원은 최악이에요. 전 거기서 4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4개월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아저씨는 고아원에서 고아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곳 생활이 어떤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그곳 생활은 아저씨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쁘답니다. 스펜서 아주머니는 이런 말을 하면 못된 짓이라고 하셨지만 전 일부러 못되게 굴려는 게 아니에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짓을 하기는 너무 쉬워요. 그렇죠? 그 사람들도 좋은 분들이긴 해요. 고아원 사람들 말이에요. 하지만 그 고아원에는 상상력이라곤 아예 찾아볼 수가 없어요. 다른 고아아이에 관한 것밖에는. 고아 아이들 일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기는 했어요. 옆에 앉은 친구가 사실은 어떤 백작의 딸인데 아기 적에 잔인한 유모에게 납치를 당해 고아가 됐고, 그 유모는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뭐 그런 상상이요. 전 밤마다 잠도 자지 않고 자주 이런 상상을 하곤 했어요. 낮에는 시간이 없었거든요. 아마 그래서 제가 이렇게 빼빼 말랐는지도 몰라요. 전 정말 끔찍하게 말라깽이죠? 살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전 제 모습이 팔꿈치가 움푹 들어갈 만큼 예쁘게 토실토실 살이 쪘다고 상상하곤 해요.”

매슈의 길동무가 드디어 말을 멈추었다. 숨이 차기도 했고 마차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떠나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갈 때까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길은 부드러운 흙이 깊이 패여 있었고 길 둑에는 활짝 꽃망울을 터트린 산벚나무와 희고 가냘픈 자작나무가 머리 높이로 죽 늘어서 있었다.

아이가 손을 내밀어 마차를 스치는 자두나무 가지 하나를 꺾었다.

“아름답지 않나요? 저 둑에 길게 늘어선 하얀 레이스 같은 나무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아이가 물었다.

“글쎄다, 난 잘 모르겠다.”

매슈의 답이었다.

“아이, 당연히 새 신부죠. 온통 하얀색으로 만든 아름다운 안개 같은 면사포를 쓴 신부 말이에요. 저는 아직 한 번도 신부를 본 적은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신부가 될 수 있다고는 상상해보지 못했어요. 너무 못생겨서 저와는 아무도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해외 선교사라면 또 몰라도요. 전 해외 선교사는 까다롭게 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저도 하얀 드레스를 꼭 입어보고 싶어요. 그것이 저의 가장 큰 소망이랍니다. 전 예쁜 옷을 좋아해요. 하지만 전 한 번도 예쁜 드레스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더 꿈을 꾸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름답게 차려입은 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 아침 고아원을 나서면서도 이런 끔찍하게 낡고 초라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몹시 부끄럽기도 했지만요. 고아원 아이는 누구나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답니다. 지난겨울에 호프타운의 한 상인이 고아원에 면모 교직물을 무척 많이 기증해주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그 상인이 옷감을 팔지 못해 기증한 거라고 하지만 저는 그분이 따뜻한 마음으로 기증한 거라고 믿어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우리가 기차에 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어요. 하지만 전 금방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죠.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한 하늘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요. 어차피 상상인데 기왕이면 멋진 게 좋지 않겠어요? 꽃과 우아하게 늘어진 깃털 장식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금시계도 차고 있고, 새끼 염소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구두를 신고 있다고 상상하니까 금방 기분이 좋아져 섬으로 오는 내내 즐거운 기분이었어요. 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멀미는 전혀 안 했어요. 스펜서 아주머니도 평소에는 멀미를 하지만 오늘은 멀미가 안 난다고 하셨어요. 제가 바다로 빠져버리지나 않을까 감시하느라 멀미할 시간도 없으셨다나요. 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애는 처음 보셨대요. 하지만 제가 쏘다녀서 아주머니가 멀미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리고 저는 그 배에서 볼 수 있는 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보고 싶었답니다. 제가 다시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와! 저기에 벚꽃이 더 많이 피어 있네요! 이 섬처럼 꽃이 많은 곳은 처음이에요. 저는 벌써 이곳이 좋아졌고 여기 살게 돼서 정말로 기뻐요. 전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얘기를 벌써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섬에 사는 상상도 자주 하곤 했답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곳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상상하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저 붉은 길은 정말로 재미있어요. 샬럿타운에서 기차를 타고 올 때 저 붉은 길이 번쩍번쩍 스쳐 지나기에 스펜서 아주머니께 길이 왜 저렇게 붉은색이냐고 물었어요. 아주머니는 모른다고 하시면서 이젠 더 이상 질문은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이미 질문을 천 번은 했을 거래요. 저도 그것은 인정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죠? 아저씨, 왜 저 길은 붉은 거죠?”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매슈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 문제도 언젠가는 알아내겠어요. 앞으로 알아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살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잖아요. 이 세상은 정말로 흥미로운 일로 가득한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면 그렇게 흥미롭지 못하겠죠? 그렇게 되면 상상할 것이 별로 없을 거 아니에요.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사람들은 항상 제가 말이 너무 많다고 해요. 제가 말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이제 그만 입을 다물게요. 저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힘들기는 하지만요.”

매슈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아이의 이야기가 즐거웠다. 말이 없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매슈도 오히려 말이 많은 사람을 좋아했다. 혼자서 다 떠들고 이쪽에서 대꾸해주기만 바라지 않는다면. 하지만 어린여자아이와 함께 있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매슈에게 여자라면 모조리 유쾌하지 못한 존재들이지만여자아이는 특히 더 했다.여자아이들은 말이 한 마디라도 나오면 매슈가 자기를 한입에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곁눈질하며 지나치기 일쑤였다. 에이번리의 교육을 잘 받았다 하는 아이들은 모조리 그런 아이뿐이었다. 하지만 이 주근깨투성이여자아이는 전혀 달랐다. 매슈의 이해력으로는 이 활달한 아이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다스러운 이 아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매슈는 평상시 그답게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아니, 난 괜찮으니까 마음껏 얘기해도 된다.”

“정말이세요? 너무 기뻐요. 전 벌써부터 아저씨랑 제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아저씨가 아이는 얌전하게 놀아야 한다고 하지 않고,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말을 해도 된다고 하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전 그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은 제가 애답지 않은 거창한 표현을 많이 쓴다고 저를 비웃기도 해요. 하지만 거창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렇게 표현해야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매슈가 말했다.

“스펜서 아주머니는 제 혀가 목에 붙어 있질 않고 중간에 붕 떠 있나 보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요. 제 혀는 분명히 목구멍에 단단히 잘 붙어 있거든요. 스펜서 아주머니는 아저씨의 집이‘초록 지붕 집’이라고 불린다는 얘기도 해주셨어요. 제가 아주머니께‘초록 지붕 집’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집을 빙 둘러 나무가 아주 많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어요. 전 나무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고아원에는 나무라고 할 만한 나무는 한 그루도 없어요. 고아원 앞 하얀 울타리 곁에 아주 작은 나무가 두세 그루 있는 게 다인데, 그것들도 고아나 다름없어 보였어요. 나무들이 너무 불쌍해 보여 전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울고 싶어졌다니까요. 그래서 나무에게 이렇게 위로해주곤 했어요. ‘아, 가여운 것들! 너희가 저 넓은 숲 속에 다른 나무들과 함께 어울려 있었다면,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 있어 너희 뿌리 위로 이끼와 방울꽃이 덮이고 너희 가지 위에서는 새들이 노래한다면, 너희도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구나. 작은 나무들아, 난 너희 마음을 아주 잘 안단다.’ 저는 오늘 아침 그 나무들을 두고 고아원을 떠나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아저씨도 그런 것에 마음이 끌려본 적이 있지 않나요? 참,‘초록 지붕 집’근처에 개울은 있나요? 제가 그걸 스펜서 아주머니께 여쭈어본다는 게 그만 깜빡 잊어버렸지 뭐예요.”

“그래, 바로 집 아래로시냇물이흐른단다.”

“와! 멋져요. 전 항상 개울 근처에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 꿈이 정말로 이루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전 지금 거의 완벽한 행복을 맛보고 있답니다. 그런데 저는 완전한 행복을 맛볼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글쎄, 이게 무슨 색깔인 거 같아요?”

소녀는 마른 어깨너머로 땋아 내린 길고 윤기 나는 머리 한 가닥을 매슈의 눈앞에 갖다 댔다. 매슈는 숙녀의 머리 색깔을 판단해본 경험은 없지만 이런 경우는 대답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건 빨간색이구나, 그렇지?”

매슈가 말했다.

여자아이는 오랜 슬픔을 발끝에서부터 모두 토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래요. 빨간색이에요.”

아이가 체념한 듯 말했다.

“이제는 제가 왜 완전한 행복은 맛볼 수 없다는 건지 아시겠죠.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요. 전 다른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주근깨나 초록빛 눈이나 제 말라깽이 몸도요. 그런 것은 상상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거든요. 전 제가 아름다운 장미꽃잎 같은 피부색을 가졌고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 빨간 머리만큼은 제 상상으로도 없앨 수가 없어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요. ‘이제 내 머리 색깔은 윤기 나는갈까마귀의 날개 같은 검은색이다.’ 하고 혼자 생각을 해봐도 볼 때마다 제 머리는 그저 붉은색일 뿐인걸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이건 제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슬픔이에요. 전에 소설책에서 평생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소녀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건 빨간 머리 때문이아니었어요. 그 주인공의 머리는 석고 같은 이마에서 물결치듯 뒤쪽으로 흘러내리는 온전한 금발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석고 같은 이마란 무슨 뜻인가요? 전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어요. 아저씨는 아세요?”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이제 약간 현기증을 느끼며 매슈가 대답했다. 사춘기 소년이었을 적 소풍을 갔다가 다른 아이의 꼬임에 빠져 회전목마를 탔을 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

“전 그 말의 뜻이 무엇이건 아주 멋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소녀는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거든요. 성스럽게 아름답다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본적이 있으세요?”

“아, 아니. 그런 적은 없단다.”

매슈가 순진하게 고백했다.

“전 자주 그런 상상을 해요. 성스럽게 아름다운 것, 머리가 번쩍번쩍 돌아갈 정도로 영리한 것, 그리고 천사처럼 착한 것 중 아무거나 선택할 수 있다면 아저씨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어요?”

“글쎄다, 난 잘 모르겠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결정을 못 내리겠어요. 하지만 제가 가질 수도 없는 것인데 결정을 못 내려도 뭐 상관은 없죠. 하지만 제가 천사처럼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요. 스펜서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어머나, 커스버트 아저씨! 오, 아저씨!! 어머나, 아저씨!!!”

그것이 스펜서 아주머니가 한 말은 아니었다. 소녀가 마차에서굴러떨어졌다거나 매슈가 아이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자 둘의 눈앞에 넓은 가로수 길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뉴브리지 사람들이 ‘가로수 길’이라고 부르는 길로, 길 양쪽으로 어느 괴짜 농부가 오래전에 심었다는 사과나무들이 빈틈없이 사오백 미터는 되게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지들이 아치를 이룬 머리 위로는눈꽃 송이같은 하얀 꽃들이 천장처럼 하늘을 뒤덮어 향기를 내뿜고, 아래로는 자줏빛 황혼이 세상을 물들였으며, 저 멀리로는 성당 복도 끝으로 보이는 커다란 장밋빛 창문처럼 저녁노을 진하늘이 빛났다.

그 아름다움에 아이는 잠시 멍해져버린 듯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마차 의자에 기대앉아 가느다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나는 꽃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그 길을 다 지나 뉴브리지를 향해 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소녀는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넋을 잃은 얼굴로, 저물어가는 해가 빛을 뿌리는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두 눈에 아름다운 환상이라도 보이는 듯했다. 이어 떠들썩한 작은 마을 뉴브리지를 지났다. 개들이 두 사람을 향해 짖어대고 어린 사내아이들이 고함을 질러대면서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5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는 동안에도 아이는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아이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댈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겠구나.”

아이가 너무 오랫동안 말이 없자 매슈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잠자코 있는 이유로 그것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다. 1킬로미터 정도만 더 가면 돼.”

소녀가 깊은 한숨을 쉬며 침묵을 뚫고 나와 영혼이 저 멀리 헤매다 방금 돌아온 사람처럼 멍한 시선으로 매슈를 바라보았다.

“오, 커스버트 아저씨, 우리가 방금 지나온 저 하얀 곳이 도대체 어디죠?”

아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음, 가로수 길을 말하는가 보구나.”

매슈가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말했다.

“예쁜 길이지.”

“예쁘다고요? 오, 예쁘다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니에요. 아름답다는 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말들로는 충분치가 않아요. 아, 너무 멋진 길이었어요, 환상적이었다고요. 제 상상력으로 더 멋지게 할 수 없는 곳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여기가 꽉 찬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해요. 기분 좋은 통증이죠. 이렇게 아파본 적이 있나요, 커스버트 아저씨?”

아이가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글쎄다. 아무래도 기억나는 건 없는걸.”

“전 그런 적이 아주 많아요. 고귀하게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늘 그래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그저 가로수 길이라고 부르다니. 그런 이름에는 아무런 특별한 의미도 없잖아요. 잠깐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이 이름이 어때요? ‘환희의 하얀 길!’ 정말 멋지고 상상력 넘치는 이름이란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전 어떤 장소나 사람의 이름이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제가 새로 이름을 지어 불러요. 고아원에 헵지버젱킨스라는여자아이가 있었어요. 하지만 전 그 애를 항상 로잘리아 드비어라고 상상했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길을 가로수 길이라고 부르더라도 전 그 길을‘환희의 하얀 길’이라고 부를 거예요. 집까지 1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셨죠? 기쁘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해요. 이 길을 오는 동안 너무 즐거워서 섭섭하다는 거예요. 전 즐거운 일이 끝나면 언제나 섭섭해지거든요. 더 즐거운 일이 곧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확실하지가 않잖아요. 제 경험으로 보았을 때는 항상 그랬어요. 하지만 집에 다 왔다고 생각하면 기뻐요. 전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거든요. 우리 집에 다 왔다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려오네요. 어머, 저기도 너무 예뻐요!”

두 사람은언덕마루를 넘어갔다. 아래로는 연못이 아주 길게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마치 강처럼 보였다. 연못 가운데는 다리가 놓였고 거기서부터 아래쪽 끝까지 호박 색깔의 모래 언덕이 마치 띠처럼 가로질러가 저 너머 짙은 푸른색 바다에서 끝이 났다. 수면은 온갖 눈부신 색깔들이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신비로운 색조의 크로커스나 장미꽃 빛깔과 더불어 천상의 초록 빛깔, 뭐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갖가지 묘한 색깔들이 모두 어우러졌다. 연못은 다리 위쪽 전나무와 단풍나무 숲까지 이어져 우거진 나무 그림자가 수면 위에 어둡고 투명한 그림자를 흔들흔들 비추었다. 야생 자두나무들이 여기저기 기슭에서 몸을삐죽이내민 모습은 마치 하얗게차려입은 소녀들이 발끝으로 서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연못 어귀 늪에서는 맑고 구슬픈 개구리 합창 소리도 들려왔다. 비탈길 너머로는 하얀 사과나무 과수원에 포근히 둘러싸인 작은 회색 집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 집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건 ‘배리의 연못’이란다.”

매슈가 말했다.

“아이, 그 이름도 맘에 들지 않아요. 음, 잠깐만요, 저는 앞으로 저 연못을 ‘반짝이는 호수’라고 부르겠어요.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제 가슴이 찌릿해져 오는 걸 보니까 제가 이름을 제대로 찾아냈어요. 언제나 제가 이름을 제대로 찾으면 이렇게 가슴이 찌릿해지거든요. 아저씨도 그런 적이 있어요?”

매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오이밭에서 삽질하다 징그러운 벌레가 나오면 가슴이 찌릿해지더구나. 난 벌레가 아주 싫단다.”

“어머, 그건 제가 말하는 느낌이랑은 다르죠. 아저씨는 그 둘이 같다고 생각하세요? 벌레와‘반짝이는 호수’는 전혀 다르잖아요. 안 그래요? 그나저나 사람들이 저 호수를 왜 배리의 연못이라고 부르죠?”

“내가 알기로는 저 집에 배리 씨가 살고 있기 때문이지. 저 집 이름은 ‘비탈길 과수원집’이란다. 저 집 뒤로 저 큰 관목 숲만 없었다면 여기서도‘초록 지붕 집’이 보일 텐데. 어쨌거나 우리는 저 다리를 넘어서 길을 빙 둘러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도 1킬로미터는 더 가야 한단다.”

“배리 씨 집에는 어린여자아이가 있나요? 아니,아주 어린 아이말고, 제 또래 아이요.”

“있지, 열한 살 정도 된 아이야. 이름은 다이애나라고 하지.”

“어머나! 정말로 완벽하게 예쁜 이름이군요.”

탄성을 내지르며 아이가 말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내게는 그 이름이 오싹할 정도로 이교도 같은 느낌을 주거든. 난 제인이나 메리 같은 좀 더 점잖은 이름이 나을 것 같다. 다이애나가 태어날 때 그 집에 학교 선생님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더구나.”

“제가 태어났을 때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 이제 다리예요. 전 눈을 꼭 감아버려야 해요. 전 다리 위를 지나가기가 무섭거든요. 다리 한가운데 왔는데 다리가 두 동강 나면서 잭나이프처럼 딱 접혀 우리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전 눈을 감아야 해요. 그런데도 다리 가운데쯤 왔다 싶으면 눈을 안 뜨고는 못 배기겠어요. 다리가 정말로 무너진다면 어떻게 무너지는지 꼭 보고 싶거든요. 어머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무척 경쾌해요. 전 이렇게 덜커덩거리는 게 좋아요. 이 세상에는 재밌는 일들이 아주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이제 다 건넜다. 뒤를 돌아봐야지. 이제 안녕,‘반짝이는 호수’님!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게 항상 밤 인사를 건넨답니다. 사람에게 인사하는 거랑 똑같이요. 그러면 그것들도 아주 좋아해요. 저 호수도 제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 같아요.”

이들이 언덕을 더 올라가 막 모퉁이를 돌자 매슈가 말했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다. 저 너머가‘초록 지붕 집’이야.”

“아니요,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아이가 막 들어 올린 매슈의 팔을 붙잡으며 숨 가쁘게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매슈가 가리킨 곳을 보지 않으려는 듯 눈까지 딱 감아버렸다. “제가 맞춰볼게요. 제가 알아맞힐 수 있어요.”

아이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은언덕마루에 올라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해는 이미 저물어 세상은 한층 부드러운 빛을 띠었지만 저녁노을에 비친 마을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교회의 거무스름한 뾰족탑이 금잔화 빛 하늘로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골짜기가 있었으며 골짜기 너머 길고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에는 아담한 농장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은 모습이 보였다. 잔뜩 흥분해 금방 무슨 말을 터트릴 것 같은 아이의 눈이 여기저기를 좇다가 드디어 왼편 어느 한 집에 멈추었다. 집은 큰길에서 한참이나 들어가 있었고, 집주변을 둘러싼 숲에는 하얀 꽃을 활짝 피운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 너머 구름 한 점 없는 남서쪽 하늘에는 커다랗고 수정처럼 맑은 별이 길 안내라도 하듯, 아니면 행복을 약속해주듯 반짝반짝 빛났다.

“바로 저 집이죠, 맞죠?”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매슈는 기분이 좋은 듯 밤색 암말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그래, 맞다! 그런데 스펜서 부인이 다 말해주어 맞힐 수 있었던 게지.”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아주머니가 말씀해준것은 다른 집에도 다 있는 것뿐이었다고요. 그 말만 듣고는‘초록 지붕 집’이 진짜 어떤 모습일지 그려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저 집을 보자마자 곧장 아! 이 집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고요. 아, 제가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있잖아요, 아저씨, 제 팔은 여기 팔꿈치부터 온통 멍투성이일 거예요. 모두 꿈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제가 너무 많이 꼬집었거든요. 이게 모두 꿈일까 봐 너무 걱정이 돼요. 그래서 꿈인지 현실인지 보려고 제 살을 꼬집으면서는 또 이렇게 꼬집는 것도 꿈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다니까요. 하지만 이게 모두 꿈일지라도 꿈을 꿀 수 있는 동안은 그냥 꿈을 꾸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꼬집는 것도 그만두었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집에 거의 다 왔나요?”

기쁨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는 다시 한 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불안감이 매슈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고대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 집은 네가 살 집이 아니라고말해줄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마릴라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들은 이제 레이철린드의 집이 있는 분지를 지났다. 날은 이미 꽤 어두워졌지만 이들이 언덕을 올라가‘초록 지붕 집’오솔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린드 부인이 창문 너머로 보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매슈는‘초록 지붕 집’으로 들어서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심한 불안과 걱정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모든 사실이 밝혀질 시간, 매슈의 마음을 차지한 생각은 마릴라나 자기 걱정이 아니라 오로지 아이가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눈에 서린 달뜬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을 생각하니 자기가 무언가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돕고 있기라도 한 듯, 한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어린 양이나 송아지 같은 순진무구한 어린 생명을 죽여야 했을 때도 기분이 꼭 이랬다.

이들이 뜰로 들어섰을 때는 어둠이 꽤 짙게 내렸고 미루나무 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나무가 잠을 자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있나 봐요.”

매슈가 아이를 안아 마당에 내려주는데 아이가 속삭였다.

그런 다음 아이는 자기의 소중한 물건이 모두 다 들어 있다는 융단 가방을 꼭 쥐고 매슈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2) 로웰(James Russell Lowell, 1819~1891)의 장시〈론팔 경의 몽상(Vision of Sir Launfal)〉제1부 3~4연.
3) 챙이 납작한 밀짚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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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38.♡.37
뉘썬2뉘썬2 (♡.169.♡.51) - 2024/02/29 03:07:11

남매가 같이사는것도 신기한데 일손을위해 남자아이를 입양한다는것은 더 놀랍네요.
시골풍경을 너무 섬세하고 낭만적인 어휘들로 그림그리듯이 표현햇네요.

눈빛이 반짝이고 수다스러운 앤.웬지 매슈는 이미 이 아이한테 빠진것 같아요.근데
빨간머리를 가진 사람은 행복할게 살수없다고 하니 웬지 씁쓸하네요.

나단비 (♡.252.♡.103) - 2024/02/29 15:20:38

앤이 수다쟁이라서 더 사랑스러워요.
앤이 묘사해주는 시골이 왠지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앤이 언어로 마술을 부린거죠.
마지막 문장을 보니 마음이 쓸쓸하네요.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1 04:35:42

이소설에 완전빠졋어요.내스타일이예요.눈앞에 수채화가 펼쳐지고 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챙챙한 목소리로 떠드는것 같아요.

언어의 아름다움을 다시한번 실감하게하는 소설이예요.

나단비 (♡.252.♡.103) - 2024/03/01 04:48:59

저도 예전에 읽고 인상적이어서 다시 찾아서 보면서 올리고 있어요. 세상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양한걸 새삼 느껴요.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1 07:15:23

시를읽는 느낌이고 서정산문을 읽는 느낌이예요.지금 독서필기를 하면서 읽다보니
속도가 늦어요.ㅋ

나단비 (♡.252.♡.103) - 2024/03/01 07:19:02

빨간머리앤'이 유독 시같고 산문같은 그런 소설이네요.
저도 다른 책 필기하면서 읽고 있어요. 속도는 많이 느려졌어도 더 잘 읽히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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