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5~6

나단비 | 2024.04.01 17:14:02 댓글: 0 조회: 6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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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늘 푸른 집’의 맨사드 지붕에 붙은 창문에서 생각에 잠긴 채 앤이 ‘윈디 포플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떠나버리기라도 하는 양 엘리자베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리지 중에서도 가장 심한 리지가 되었다. ‘도깨비 길’ 모퉁이에서 활기찬 썰매 소리가 사라져 버리자 엘리자베스도 창문에서 물러나 침대 가에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하느님, 제게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아요. 할머니와 그 여자가 즐겁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셜리 선생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제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했어.”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앤은 이미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맛보고 있었다. 기차가 역을 출발하자 앤은 온몸에서 행복의 빛을 발했다. 집으로 가고 있다. 내 집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간다.
보기 흉한 거리가 저 뒤로 사라져가고 시야가 탁 트인 시골길이 나타났다. 황금빛 섞인 하얀색 세상을 군데군데 거뭇한 가문비나무와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자작나무가 흐릿한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헐벗은 숲 뒤에 낮게 걸린 해는 기차가 속도를 더해 달릴수록 눈부시게 빛을 뿌리며 나무 틈을 비집고 뒤로 뒤로 달려 나갔다.
캐서린은 말이 없었지만 그다지 무례하지도 않았다.
“내가 말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이미 앤에게 그렇게 경고도 했다.
“네, 그러지 않을게요. 내가 상대방이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기나 바라는 끔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야 끊임없이 말이 하고 싶겠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데이비가 브라이트 리버로 커다란 2인용 썰매를 끌고 마중 나와 앤을 덥석 껴안았다. 두 아가씨는 털이 보송보송한 덮개가 잔뜩 놓인 아늑한 뒤 좌석으로 파고들었다. 역에서 ‘초록 지붕 집’까지의 드라이브는 앤이 주말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부분이었다. 앤은 브라이트 리버에서 집으로 갈 때마다 매슈와 함께 처음으로 이 길을 지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봄이었고 지금은 12월이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는 내내 모든 것들이 앤에게 “나 기억해요?”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지나는 썰매 종소리는 잔뜩 눈을 이고 선 끝이 뾰족한 전나무 사이로 울려 퍼졌고‘환희의 하얀 길’에 선 나무들은 작은 별꽃들을 매달고 반짝거렸다. 마지막 언덕 마루에 오르자 달빛 아래 신비롭게 빛나는 아직 얼어붙지 않은 세인트로렌스 만이 나타났다.
“내가 이 길을 지나면서 언제나 이제 집에 다 왔어 하고 느끼는 곳이 바로 저기예요. 다음 언덕 꼭대기요. 거기 올라서면 ‘초록 지붕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여요. 지금 마릴라 아주머니는 우리를 위해 어떤 요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릴까요? 벌써부터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아, 너무 좋아요. 집으로 가는 건 너무 좋은 일이에요!”
앤이 말했다.
‘초록 지붕 집’ 뜰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앤을 기쁘게 맞이해주었고 창문의 불빛 하나하나가 앤에게 손짓했다. 문을 열었을 때 마릴라 아주머니의 부엌은 어찌나 좋은 냄새로 가득하던지! 모두들 껴안고 웃으며 환호성을 올렸다. 캐서린조차도 남이 아니라 가족의 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끼던 응접실용 램프를 식탁으로 가져와 불을 밝혔다. 솔직히 말하면 빨간 전구가 끼워진 좀 촌스러운 램프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잘 어울리는 따사로운 장밋빛 불빛을 던져주었다. 램프 그림자마저도 참 따뜻하고 정겨워 보였다. 도라는 이제 아리따운 소녀가 되었고, 데이비도 거의 어른이 다 되었다.
여러 가지 소식이 앤을 기다렸다. 다이애나는 딸을 얻었고, 조시 파이에게 정말로 연인이 생겼으며 찰리 슬론은 약혼했다는 말이 들린다고 했다. 이 모두 대제국 소식 못지않게 흥분되는 소식이었다. 린드 아주머니는 조각 천을 5천 장이나 써서 패치워크 퀼트 담요를 완성해 모두 앞에 펼쳐 보였다. 당연히 찬사가 터져 나왔다.
“앤 누나가 집에 오면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 같아.”
데이비가 말했다.
‘오, 산다는 건 이래야 해.’
도라의 새끼 고양이가 가르랑거렸다.
“달빛이 빛나는 밤의 유혹은 떨치기가 힘들어요. 우리 눈신을 신고 산책을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브룩 선생님? 선생님도 눈신을 신을 줄 안다고 들었는데.”
저녁을 먹은 후 앤이 말했다.
“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만 6년 동안이나 해보지를 않았어요.”
캐서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앤은 다락방에서 눈신을 찾아냈고 데이비를 ‘비탈길 과수원집’으로 보내 캐서린이 신을 수 있도록 다이애나의 눈신을 빌려왔다. 둘은 다정한 나무들이 온통 그림자를 드리운 ‘연인의 오솔길’을 지나 울타리 가장자리로 작은 전나무들이 늘어선 들판을 가로질러갔다. 그리고 비밀이 가득 담긴 숲도 지났다. 숲은 금방이라도 자기가 간직한 비밀을 귀에 대고 속삭여줄 듯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은빛 연못 같은 탁 트인 빈터를 지났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한다면 아름다운 것을 망치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앤은 캐서린 브룩과 이렇게 가깝게 느낀 적이 없었다. 어떤 마법과도 같은 힘이 그 겨울 밤 앤과 캐서린을 가까이 다가서게 했다. 거의 가까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둘이 큰 길가로 나오자 번쩍번쩍하며 썰매가 지나갔다. 종소리가 울리고 웃음소리가 쨍그랑거렸다. 두 아가씨는 저도 모르게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세상을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앞으로 돌아갈 세상은 두고 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일 것 같았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젊음이 있는 세상, 언어라는 조악한 수단이 없어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세상.
“정말 아름다워요.”

캐서린이 말했다. 그렇게 분명히 말했다. 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둘은 길을 내려가 긴 ‘초록 지붕 집’ 오솔길로 들어섰지만 대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둘은 말없이 이끼 낀 담벼락에 기대서서 나무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생각에 잠긴 어머니 같은 집을 바라보았다. 겨울밤의 ‘초록 지붕 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아래 얼음에 갇힌 ‘반짝이는 호수’는 나무 그림자로 가장자리에 무늬가 졌다. 터벅터벅 다리 위를 지나는 말발굽 소리 외에 세상은 온통 고요 속에 잠겼다. 동쪽 방에 누워 얼마나 많이 들었던 소리인가 생각하며 앤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그 말발굽 소리를 앤은 밤중에 요정 말이 달리는 소리라고 상상하고는 했었다.
갑자기 그 고요함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서린, 아니, 왜요, 왜 울고 있어요!”
캐서린이 운다는 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캐서린은 울고 있었다. 앤은 이제 더 이상 캐서린이 두렵지 않았다.
“캐서린, 오, 캐서린,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어요?”
“오,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어요! 선생님한테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란 게 없잖아요. 아름다움과 로맨스로 둘러싸인 마법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매일 매일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기다릴까’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되잖아요. 나는 어떤 줄 알아요?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도 모두 잊어버렸어요.아니요, 절대로 그런 건 안 적도 없지요. 나는, 나는 덫에 걸린 삶을 살고 있어요. 난 도저히 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쇠창살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꼬챙이로 찔러대는 것만 같아요. 선생님에게는 행복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친구, 세상, 연인! 그렇다고 내가 연인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나는 남자를 증오해요. 하지만 내가 오늘 밤 죽는다고 해도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 세상에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캐서린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또다시 울음이새어 나와캐서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캐서린, 캐서린이 마음을털어놓으니나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캐서린에게 친구가 없다면 그건 자기 잘못이에요. 난 캐서린과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나를 껄끄럽게만 대했잖아요.”
“오, 나도 알아요. 나도 알아요. 선생님이 처음 왔을 때 난 선생님이 몹시 미웠어요. 진주 반지를 자랑하며 의기양양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선생님이요.”
“캐서린, 난 자랑한 게 아니에요!”
“오, 나도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건 그저 내가 선생님이 미워서 그렇게 보인 거겠죠. 하지만 그건 내가 선생님의 애인을 부러워해서가 아니라, 그 반지가 스스로 자랑하는 걸로 보였어요. 난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결혼 생활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겨웠어요. 난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내 상관이 된 선생님이 미웠어요. 그래서 프링글 사람들이 선생님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내심 고소했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선생님은 다 가진 것 같았거든요.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젊고. 그래요, 젊음도요! 난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지만 젊음만큼은 목마르게 원해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모를 거예요. 선생님은 모르지요. 한 사람도 날 좋아해주지 않는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단 한 사람도요!”
“오, 나는 캐서린을 좋아해요.”
앤이 외쳤다.
‘초록 지붕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앤은 통렬한 몇 마디로 자기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다.
“내가 그런 사실을 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내가 선생님을 다르게 대했을 텐데요. 나에겐 선생님이 온갖 행운만 다 갖고 태어난 사람 같았어요. 선생님이 부러워 죽을 것 같았어요. 내가 갖고 싶었던 위치를 차지했지, 지금은 선생님이 더 자격을 갖춘 분이란 걸 인정하지만 그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선생님은 예쁘지요, 적어도 선생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아름답다고 여기도록 했어요. 내가 어렸을 적에 누군가가 나를 보며 ‘세상에나 저렇게 못생긴 아이는 처음 봐.’ 하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선생님이 방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방이 다 밝아져요. 난 선생님이 처음 학교에 온 날 아침을 기억해요.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선생님을 미워했던 이유는 항상 뭔가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갖고 사는 사람 같아서였어요. 나날이 신나는 모험이나 되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미워했어도 내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저 먼 별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죠.”
캐서린이 말했다.
“정말이에요, 캐서린? 세상에, 그렇게 근사한 칭찬을 해주다니!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죠? 우리 이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난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특히 내 나이 또래의 친구는요.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요. 어디 속해본 적도 없어요. 난 어떻게 친구가 되는 건지도몰라요. 그렇지만 선생님을 더 이상 미워하지는 않아요. 이젠 내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마법이 나한테도 효과를 내나 봐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선생님에게 얘기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 선생님의 삶을 얘기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내 얘기를 할 수 없었겠죠.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왜 선생님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얘기해보세요, 캐서린. 나도 캐서린을 이해하고 싶어요.”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 들게 하는지는 선생님도 알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자기 부모까지도 원하지 않는 기분은 모를 거예요. 우리 부모님은 날 원하지 않았어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미워했어요. 두 분은 언제나 서로를 증오했죠. 네, 그랬어요.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까요. 서로를 함부로 대하면서 다투고 사소한 일로도 싸워댔어요.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은 악몽과도 같았죠. 하지만 그나마 내가 일곱 살 때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난 헨리 삼촌 가족과 같이 살아야 했어요. 그분들도 나를 원하지 않았지만요. 자기 가족이 자비를 베풀어 사는 사람이라고 나를 무시했죠. 삼촌 가족이 날 얕보면서 내뱉었던 말들을 낱낱이 기억해요. 친절한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난 옷도 내 사촌이 버린 옷을 입어야 했어요. 특히 모자는 저주스러웠어요. 그 모자를 쓰면 내가 꼭 버섯처럼 보였거든요. 삼촌 식구들은 내가 그 모자를 쓸 때마다 놀렸어요. 어느 날은 너무 화가 나서 그 모자를 찢어 불 속에 던져 넣어버렸죠. 그래서 그 겨울 내내 난 아주 우습게 생긴 빵모자를 쓰고 교회에다녀야 했어요. 나는 개를 키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난 머리는 좋았어요. 그래서 대학에 가서 학사 학위도 받고 싶었죠. 하지만 당연히 그런 꿈은 하늘의 달을 갖고 싶다는 소망과 다를 바 없었어요. 헨리 삼촌은 퀸스 전문학교까지는 보내주었어요. 대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 돈을 갚기로 했죠. 삼촌은 날 형편없는 하숙집에서 살게 했어요. 겨울에는 얼어붙을 듯이 춥고 여름이면 쪄질 듯이 더운 데다 항상 음식 냄새가 찌든 부엌 곁방이었죠. 퀸스에 다니면서 내가 입어야 했던 옷들이 어땠는지 알아요? 하지만 난 교사 자격증을 손에 쥐었고 서머사이드 중등학교에서 2학년을 맡게 되었죠. 그것이 내가 가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어요. 그 이후로 난 헨리 삼촌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돈을 아껴 쓸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에 든 돈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들어간 하숙비까지 몽땅 다 갚아야 했으니까요. 난 삼촌 돈은 단 1센트까지 모두 갚아드릴 생각이에요. 그래서 난 데니스 부인 집 같은 곳에서밖에 살 수 없었고 옷도 초라하게 입어야 했어요. 이제 막 삼촌 돈을 다 갚았어요. 제 평생 처음으로 자유를 느껴요.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정말이지 몹쓸 버릇을 얻었어요. 나도 내가 얼마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지 알아요. 나는말주변도 없어요. 어디를 가도 내가 무시당하고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 내 잘못인 줄도 알죠. 난 정말이지 불쾌감을 주는 행동이라면 예술적으로 잘하거든요.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든 다 비난조죠. 내 학생들은 나를 무슨 폭군처럼 여겨요. 난 내 학생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아요. 내가 그걸 알면서 상처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아이들은 나를 무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아요. 난 사람들이 나를 무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너무 싫어요. 오, 앤, 내 안에는 무슨 병처럼 미움이 도사리고 있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속이 상해요.”

“오, 아니에요, 캐서린도 할 수 있어요! 마음에서 미움을 몰아내요. 자신을 치료해요. 이제 겨우 삶을 시작하는 건데요. 이제 드디어 자유를 찾아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잖아요. 저 구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엇이 나올지 아직 모른다고요.”

앤은 말을 하면서 캐서린을 안아주었다.

“전에도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난 그 ‘구부러진 길’이란 말을 비웃었죠. 하지만 문제는 내 길에는 어떤 구부러진 길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 길은 저 지평선까지 곧장 펼쳐져 있어요. 끝없이 단조롭기만 한 길이죠. 오, 앤은 사는 게 무섭다고 느낀 적 없나요? 너무 황량하기만 하고, 냉정하고 지겨운 사람들만 들끓는 삶이요. 아니겠죠, 물론 그렇지 않을 거예요. 평생 가르치면서 살 필요도 없을 것이고. 앤에게는 모든 사람이 흥미롭잖아요. 레베카 듀인가 뭔가 하는 그 동그랗고 붉은 얼굴을 가진 사람까지도. 사실은 난 가르치는 게 싫어요. 하지만 가르치지 않으면 난 할 일이 없는걸요. 학교 선생이란 직업은 그저 시간의 노예나 마찬가지예요. 오, 앤은 나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요. 어떻게 가르치는 일이 좋다는 건지 난 모르겠어요. 앤, 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그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에요. 헨리 삼촌 집 내 다락방에 그림이 딱한 장 걸려 있었어요. 다른 방에 걸려 있다 색이 바래 버리려던 그림이었죠. 사막 한가운데 있는 샘물가에 종려나무들이 그려진 거였어요. 뒤 배경 저 멀리로는 낙타들이 줄지어 지나가요. 내게는 그 사진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언제나 그런 곳에직접 가보고 싶었죠. 난 남십자성을 내 눈으로 보고 싶고, 타지마할과 카르나크 신전 기둥들도 보고 싶어요. 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선생 월급으로는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죠. 난 영원히 헨리 8세의 부인들과 끝없는 권력욕이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지나 지껄이면서 이렇게 살아야 할 거예요.”

앤이 웃음을 터트렸다. 캐서린의 목소리에서 비탄은 사라졌고 단순히 처량하고 지겹다는 푸념으로 변해서 이제는 웃어도 괜찮았다.

“우리 이제 서로 다정하게 지내요. 여기서 열흘 동안 즐겁게 지내면서 우리 우정은 시작될 거라고요. 난 언제나 캐서린과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K로 시작하는 캐서린! 난 언제나 그 가시 돋친 캐서린의 껍질 아래로 뭔가 친구가 될 만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었어요.”

“정말로 나를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도 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글쎄요, 세 살 적 버릇도 기회만 된다면 바꿀 수 있겠죠.이 ‘초록 지붕 집’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집이라고 느낀 곳은 여기가 처음이에요.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되어봐야겠어요. 그게 너무 늦지 않았다면. 내일 저녁 선생님의 길버트가 여기 오면 환한 미소를 지어줄게요. 그런데 젊은 남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다 잊어버린 것 같아요. 아니, 처음부터 아예 몰랐는지도 모르구요. 길버트는 나를 노처녀 들러리 정도로 생각할 거예요. 오늘 밤 잠자리에 들면 내 가면을 벗어던지고 알몸을 드러내 보여준 것을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아니요, 안 그럴 거예요. ‘앤이 나도 인간인 것을 알게 돼서 너무 기뻐.’ 이렇게 생각할걸요. 자, 이제 푹신푹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요. 아마 따뜻한 물주머니가 두 개나 들어 있을 거예요. 서로 깜박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하고 마릴라 아주머니와 린드 아주머니 두 분 다 넣었을 테니까요. 달빛 아래서 눈길을 걸었으니 잠도 무척 잘 올 거예요. 아침까지 곤히 자고 눈을 뜨면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된 기분일걸요. 그리고 자두 푸딩 만드는 법도 배우게 될 거예요. 내가 화요일에 자두 푸딩을 만들 생각인데 나를 좀 거들어주었으면 하거든요. 자두도 많이 넣고 아주 크게요.”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앤은 캐서린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 놀랐다. 차가운 공기 속을 오래 걸은 후라 피부에 빛이 나면서 혈색이 돌아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어머나, 모자랑 옷만 제대도 갖추어도 캐서린은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될 텐데. 뭔가 조치를 취해주어야겠어.”앤은 서머사이드 가게에서 본 고급스러운 짙은 붉은색 벨벳 모자를 검은 머리 아래로 호박색 눈 바로 위까지 깊이 내려쓴 캐서린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6





토요일과 월요일은 ‘초록 지붕 집’이 즐거움으로 들썩였다. 자두 푸딩 만들 재료는 이미 준비해놓았고, 집안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려고 캐서린과 앤 그리고 데이비와 도라는 숲으로 나가 아름다운 작은 전나무를 잘라왔다. 어차피 올봄이면 나무들을 전부 베어내고 밭으로 개간할 예정인 해리슨 씨의 조그만 숲에 있던 나무라서 앤도 나무를 잘라오는 게 그리 마음 아프지 않았다.
모두들 숲을 돌아다니며 화환을 만들 가문비나무며 석송을 모았고, 숲 깊은 골짜기에서 겨울 내내 여전히 푸름을 간직한 고사리도 찾아냈다. 낮이 하얗게 솟아오른 언덕 너머로 밤을 향해 손짓할 무렵 모두들 의기양양하게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개암나무 빛깔 눈에 키가 큰 젊은이가 와 있었다. 돋아나기 시작한 수염 때문에 나이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길버트를 보고 앤은 한순간 이 사람이 길버트인지 아니면 모르는 사람인지 헷갈렸을 정도였다. 약간 미소를 머금은캐서린은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응접실에 둘만 남겨둔 채 부엌에서 쌍둥이와 내내 게임을 하며 놀았다. 놀랍게도 캐서린은 쌍둥이와 노는 것이 즐거웠다. 데이비와 함께 지하실로 내려가 아직도 달콤한 사과가 남아 있는 것을 보는 일도 무척 즐거웠다.
캐서린은 전에시골 농장지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촛불 그림자가 흔들거리는 그곳이 얼마나 재미있고 으스스한 곳인지 몰랐다. 산다는 게 이미 더 따뜻해지고 있었다. 캐서린은 평생 처음으로 삶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졌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데이비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소의 목에 다는 방울을 흔들면서 계단을 오르내려 ‘잠든 7인’30)이라도 깨워 일으킬 정도로 시끄럽게 굴었다. 마릴라는 집에 손님이 와 있는데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야단이었지만 캐서린은 계단을 내려오며 웃음을 터트렸다. 캐서린과 데이비 사이에는 이상한 동지애 같은 것이 싹텄다. 캐서린은 앤에게, 도라는 너무 완벽한 아이지만 데이비는 자기처럼 결점이 많은 아이 같아 더 정이 간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모두들 응접실에 모여 선물을 나누었다. 쌍둥이들이, 심지어 도라조차도 선물을 풀어보지 않고는 밥을 먹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캐서린은 앤이 의무감에서 준비한 선물 외에는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린드 부인은 코바늘 뜨개질로 만든 숄을 선물해주었고, 도라는 흰 붓꽃 뿌리를 넣은 향낭을 주었으며, 데이비는 종이 자르는 칼을, 마릴라는 여러 가지 작은 잼과 젤리 병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주었다. 길버트도 작은 고양이 모양의 청동 문진을 주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갈색 눈을 가진 아주 사랑스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다. 강아지는 따뜻한 담요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꼬리를 흔들며 눈을 반짝, 귀를 쫑긋했다. 목에는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캐서린,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원해요, 앤.”
캐서린은 얼른 가서 그 작은 몸을 안아 올린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앤, 정말 귀여운 강아지예요! 하지만 데니스 부인은개를 키우지 못하게 해요. 내가 개를 키워도 되느냐고 물어봤는데 안 된다고 했거든요.”
“내가 이미 데니스 부인과는 이야기를 끝냈어요. 반대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어요. 그나저나 캐서린, 이젠 그 집에서 나와요. 좀 살 만한 집을 찾아요. 빚이라고 생각했던 돈도 다 갚았다면서요. 다이애나가 내게 보내준 저 예쁜 문구 상자 좀 봐요. 빈 종이를 보면 뭔가 매혹적인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저 빈 종이에 무엇을 써서 채울까 하고.”
린드 부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지 않는 해에는 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캐서린에게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자줏빛 진홍빛에 황금빛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그 뒤 일주일도 역시 즐겁고 행복했다. 캐서린은 지금까지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여러 번 생각해보았으나 이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캐서린은 놀랍도록 꽃피었다. 앤도 캐서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런데 나는 캐서린 때문에 크리스마스 방학이 엉망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으니.’
앤은 이런 변화가 놀랍기만 했다.
‘앤이 초대했을 때 하마터면 거절할 뻔했으니!’
캐서린도 혼자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곧잘 ‘연인의 오솔길’과 ‘유령의 숲’을 지나 멀리까지 산책을 나갔다. 고요함마저 다정스럽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언덕 너머로는 아기 도깨비가 겨울 춤을 추듯 눈송이가 흩날렸다. 자줏빛 그림자가 가득한 과수원도 지났고 화려한 석양빛이 수놓은 숲도 지났다. 재잘거리며 노래 부르는 새도 없었고, 졸졸 흘러가는시냇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속닥거리는 다람쥐도 없었지만 간간이 바람이 불어와 양에서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질만큼은 훌륭한 음악 소리를 내주었다.
“누구나 잘 살펴보고 들어보면 뭔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앤이 말했다.
두 사람은 ‘양배추와 임금님’을 이야기했고 별나라까지 마차를 몰았으며 ‘초록 지붕 집’ 부엌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왔다. 폭풍우가 몰아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동풍이 추녀 밑으로 휘몰아치고 잿빛 세인트로렌스 만이 울부짖는 날에도 ‘초록 지붕 집’에는 즐거움이 넘쳐흘렀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난로 앞에 앉아 사과나 사탕을 먹으며 타오르는 벽난로 불빛이 천장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따뜻한 집 안에서 먹는 저녁은 얼마나 달콤하던지!
어떤 날 밤에는 길버트가 둘을 다이애나의 집으로 데려다 주어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았다.
“난 평생 아기를 안아본 적이 없어요. 아기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내가 안으면 아기가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워서였죠. 내 팔에 안긴 그 작고 가냘픈 아기가 얼마나 크고 주체하기 힘들게 느껴지던지. 라이트 부인은 내가 아기를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던걸요.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을눈치채이지 않게 하려고 아주 애쓰며 참는 게 다 보였어요. 그것이 내게 뭔가를 준 것 같아요. 아기 말이에요.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며 캐서린은 말했다.“아기란 너무나 매혹적인 피조물이에요. 레드먼드에 다닐 때 누군가 아기란 ‘엄청난 잠재력의 덩어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생각해봐요, 캐서린, 호메로스 역시도 처음에는 아기였어요. 보조개가 있고 빛을 가득 담은 커다란 눈을 가진 아기요. 물론 그때부터 장님이었을 리가 없지요.”
앤이 꿈꾸듯 말했다.
“호메로스의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장차 그 호메로스가 될지도 몰랐을 것 아니에요!”
캐서린이 말했다.
“하지만 예수를 판 유다의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그런 짓을 저지를 줄 몰랐던 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죠. 죽을 때까지 몰랐길 바라지요.”
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밤 공회당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그 후에는 애브너 슬론 댁에서 파티가 열렸다. 앤은 캐서린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파티에 가서 낭독을 해요, 캐서린. 전에도 너무나 아름답게 낭독하던걸요.”
“내가 가끔씩 낭독을 하긴 했죠. 낭독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지난 여름 내가 휴양객들이 모인 해변 콘서트에서 낭독했을 때 사람들이 날 비웃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캐서린을 비웃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틀림없이 나를 비웃었을 거예요. 그날 달리 뭘 비웃었겠어요!”하지만 앤은 웃으며 낭독을 해달라고 끝까지 졸랐다.
“앙코르를 받으면 <제네브라>를 읊어요. 스티븐 프링글 부인이 그러는데 캐서린이 읊는 <제네브라>는 감동 그 자체라고 하더군요. 그날 밤 부인은 감동으로 한숨도 못 잤대요.”
“아니에요, 나는 <제네브라>를 좋아하지 않아요. 읽기 책에 실려 있으니까 학생들에게 낭송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려고 가끔 낭송을 하긴 했지만 난<제네브라>가 싫어요. 자기가 감금된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죠? 소리를 질렀더라면<제네브라>를 찾아다니던 사람들 귀에 들렸을 것 아니에요.”
마침내 캐서린은 낭독을 하겠다고 했지만 파티에 갈지 말지 바로 그날이 될 때까지도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가기는 하겠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와 춤추려는 사람이 없을 테니 나는 샐쭉해서 비꼬는 말이나 내뱉을 테고 거기 있는 게 창피할 거예요. 언제나 파티에 갈 때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어요. 몇 번밖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내가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질 않아요. 사실 난 춤을 꽤 잘 추는데. 헨리 삼촌네에 있을 때 배웠거든요. 삼촌 집에서 일하던 가난한 하녀 아이도 춤을 배우고 싶어 해서 그 아이와 난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밤이면 부엌에서 춤 연습을 했어요. 나는 춤추는 것을 좋아해요. 적당한 파트너만 있다면.”
“이 파티에서는 비참하게 느끼지 않아도 돼요, 캐서린.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니까요.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천지차이예요. 캐서린은 머릿결이 아주 예쁘군요. 모양을 한번 바꾸어보지 그래요?”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좋아요. 내 머리가 늘 꼴불견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매만질 틈이 없었어요. 그리고 내겐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도 없어요. 그 녹색 호박단 드레스도 괜찮을까요?”
“녹색은 캐서린이 입어서는 안 되는 색깔이에요. 내가 만들어준 붉은색 핀턱 주름 목깃이 달린 드레스를 입어요. 그래요! 캐서린은 붉은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
“난 붉은색이 싫어요. 헨리 삼촌 집에 있을 때 거트루드 숙모가 늘 선명한 빨간색 앞치마를 입게 했단 말이에요. 그 앞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날 놀렸어요. 어쨌든 내가 뭘 입을지로 앤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니에요. 옷은 아주 중요해요.”
앤이 캐서린의 머리를 땋기도 하고 말아 올리기도 하면서 힘주어 말했다. 그런 다음 자기 솜씨를 보고 만족스러웠다. 앤은 캐서린의 어깨에 팔을 얹고 거울 쪽으로 향하게 했다.
“정말이지 우리 둘 다 상당한 미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정말 기쁜 일 아니겠어요? 수수해 보이는 사람들도 몸치장에 조금만 신경 쓰면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요. 3주일 전 일요일, 그 딱한 밀베인 씨가 설교했던 주일 기억나죠? 심한 코감기라도 들었는지 아무도 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잖아요. 나는 그날 내 주변 사람들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브렌트 부인에게는 코를 새로 바꿔주고 메리 애디슨 머리는 구불구불하게 컬을 만들어주었어요. 제인 마든은 레몬 향기가 나게 해주었죠.에머 딜에게는 갈색 옷을 벗겨버리고 대신 파란 옷을 입혀주었고 샬럿 블레어에게는 체크무늬 옷 대신 줄무늬 옷을 입혔어요. 검은 사마귀도 몇 개 없애줬죠. 토머스 앤더슨의 광대 같은 긴 모래 색깔 수염은 깎아버렸어요. 그렇게 조금씩 변화를 주었더니 모두들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브렌트 부인의 코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가 해준 것들은 모두 그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캐서린의 눈은 꼭 차 빛깔이에요, 호박색 차 빛깔. 오늘 저녁에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활기를 가져 봐요. 브룩이란 이름처럼 반짝반짝 맑고 밝게 빛을 내고 즐겁게 행동하라고요.”
“그런 건 내 모습이 아니에요.”
“지난 한 주간 캐서린은 꼭 그랬어요. 그렇게 될 수 있다고요.”
“그건 단지 ‘초록 지붕 집’이 내게 부린 마법이에요. 내가 서머사이드로 돌아가면 신데렐라에게 울렸던 12시 종이 나한테도 칠 거라고요.”
“그럼 캐서린이 그 마법을 돌려놓아요. 자신을 좀 보라고요. 지금 거울에 비친 캐서린의 모습을 봐요. 앞으로는 항상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캐서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저 사람이 진정 자기인가 하는눈으로바라보았다.
“내가 더 어려보이네요. 맞아요.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 보이죠. 그래요, 난 내 나이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고 다녔어요. 하지만 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내 모습에 신경 쓸 이유도 없었는걸요.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앤과는 달라요. 앤은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 같아요. 나는 그런 건 하나도 알지 못해요. 전혀요. 이제 배우기에는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요? 나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을 비아냥거리기나 하면서 살아왔어요. 내가 달라질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렇게 빈정대는 게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항상 두려웠어요. 내가 뭔가 바보 같은 소리나 하지 않을까, 그럼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
“캐서린 브룩, 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봐요. 그 모습을 가슴에 담아둬요. 그 아름다운 머리를 뒤로 바짝 묶는 대신 얼굴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해봐요. 검은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 같은 두 눈, 홍조를 띤 볼, 그 아름다운 얼굴로 뭘 두려워해요. 이제 가요. 이러다 늦겠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무대에 서는 사람은 모두 도라 말대로 ‘지정석’이 마련되어 있으니 걱정 없어요.”
길버트가 공회당까지 둘을 태워다 주었다. 꼭 그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이애나의 자리를 대신해서 캐서린이 옆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애나에게는 이제 다른 관심사가 아주 많아 더 이상 발표회와 파티장으로 앤과 함께 달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멋진 저녁이었다! 흐릿한 초록빛 서쪽 하늘 아래 은빛 공단 같은 길에 눈송이가 하늘하늘 날렸다. 하늘에는 오리온성좌가 장엄하게 제 갈 길을 갔고 언덕과 들판과 숲에는 진줏빛 침묵이 감돌았다.
캐서린의 낭송은 첫 줄부터 청중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춤을 추자고 나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춤을 추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캐서린은 쓰디쓴 기분이 되지도 않았다. 대신 웃음이 났다. 그런 다음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와 거실 난롯가에서 발을 녹였다. 벽난로 위에는 친근해 보이는 두 개의 촛대가 놓여 방을 밝혀주었다. 린드 부인이 늦은 시간이라서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이불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 부엌 난로 뒤 바구니에서 잠들어 있는 강아지도 춥지 않게해주라고 말했다.
‘난 인생을 다시 보게 되었어. 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캐서린은 잠자리에 들며 생각했다.

“또 와요.”
둘이 집을 나서려 하자 마릴라가 말했다.
마릴라는 빈말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네, 꼭 다시 와요. 여름이면 몇 주 동안 여기서 지내자고요. 모닥불도 피우고 정원 풀도 뽑고 사과도 따고 목장에서 소도 몰아 봐요. 연못에 나가 배도 타고 숲 속을 헤매기도 해야죠. 내가 헤스터 그레이의 그 오래된 작은 정원을 보여줄게요. ‘메아리 집’, 제비꽃이 가득 피어 있는 ‘제비꽃 골짜기’도 보여줄게요.”
앤이 말했다.


30.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에베소 교회의 일곱 청년이 동굴로 피신했다가 187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한다. 이들이 깨어났을 때는 기독교가 공식종교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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