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9~10

나단비 | 2024.04.01 17:16:13 댓글: 0 조회: 10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051
9



윈디 포플러, 탑 방
4월 20일

내 가여운 사람 길버트에게,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39)나는 젊은 채로 늙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야. 내 학생들이 학년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 토요일 밤에는 해밀턴 씨네 개가 짖어댔어. 그래서 난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걱정이야. 오늘 밤 캐서린을 만날 때 우산이 뒤집히지나 않을까 걱정이야. 지금은 캐서린이 나를 무척 좋아하지만 언제나 나를 그렇게 좋아해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야. 난 내 머리 색깔이 결국은 적갈색으로 변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야. 나는 내 나이가 오십이 되면 코끝에 점이 생겨 버릴까 봐 걱정이야. 나는 우리 학교가 불에 타 버릴까 봐 걱정이야. 오늘 밤 내 침대에서 쥐가 나올까 봐 걱정이야. 난 단지 내가 항상 네 주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나와 약혼했을까 봐 걱정이야. 내가 침대 덮개를 만질까 봐 걱정이야.
오, 내 사랑, 걱정하지 마. 난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야. 이건 단지 어니스틴 버글의 병에 전염이 된 것뿐이야.난 이제야 왜 레베카 듀가 어니스틴을 ‘미스 걱정’이라고 불렀는지 알겠어. 그 가여운 사람은 너무 많은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 운명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나 봐.
세상에는 수많은 버글들이 살고 있지. 어니스틴만큼 심한 버글 병은 아니더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여 오늘을 즐기지 못하는 버글들이 아주 많다고.
내 사랑 길버트. 우리는 그렇게 미리 두려워하면서 살지 말자. 그건 끔찍하게 노예처럼 사는 일이야. 우리는 용감무쌍하게 모험도 하면서 한 발 앞서 살자고. 우리는 인생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고,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즐기면서 살자고. 비록 삶이 우리에게 산더미 같은 역경을 가져다주고 장티푸스와 쌍둥이를 선사하더라도!
오늘은 4월 속으로 6월의 하루가 떨어진 것 같은 날이었어. 눈은 모두 사라졌고 새끼 사슴 같은 엷은 황갈색 목장이며 황금빛 언덕은 봄노래를 부르고 있어. 내 단풍나무 숲 속 초록 골짜기에서 목인신(牧人神)판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폭풍 왕’은 자줏빛 안개 속에 아련히 모습을 드러내었어. 요즘은 비가 아주 많이 내려서 축축한 봄 저녁의 석양을 탑 방에 앉아 즐기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야. 하지만 오늘 밤은 바람이 강하고 분주한 밤이야. 하늘에 떠가는 구름조차도 서둘러 달리고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빛도 바삐 세상을 비출 준비를 하고 있어.
길버트, 오늘 밤 에이번리의 오솔길을 우리 둘이 손을마주 잡고걷고 있다면 어떨까?
길버트,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너무 사랑에 빠져 있어. 내 말에 불경스럽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넌 목사님도 아니잖아.
39. 전도서 2장 2절.





10





헤이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달라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별과는 동떨어져 혼자서 헤매는 것처럼 좀 멋진 일이기도 하다. 헤이젤은 그 어느 경우에라도 평범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만 튀어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모두가 다 달라요.”
앤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웃고 있군요! 미스 셜리의 웃는 얼굴은 환상적이에요.”
헤이젤은 아주 하얗고 통통하게 살이 찐 두 손을 마주잡으며 앤을 동경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헤이젤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적어도 한 마디는 강조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방을 홀리는 웃음이라고 할까. 나는 미스 셜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모든 것을 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우리는 같은 별에서 태어났어요. 가끔씩 난 내가 점쟁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미스 셜리. 난 어떤 사람을 보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금방 알아보거든요. 나는 미스 셜리가 이해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란 것도 금방 알아보았다니까요. 누군가가 날 이해해준다는 건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동안은 아무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무도요. 하지만 미스 셜리를 보자마자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저분은 날 이해해줄 거야. 저 사람과 함께 하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어. 오, 미스 셜리, 우리 진정한 삶을 살아요. 항상 진실하게 살자고요. 오, 미스 셜리,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하나요?”
“난 헤이젤이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앤이 미소 띤 얼굴로 헤이젤의 황금빛 고수머리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져주며 말했다. 헤이젤을 좋아하기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헤이젤은 앤의 탑 방에서 앤에게 가슴에 있는 말을 몽땅 쏟아놓고 있는 중이었다. 달은 항구에 걸려 있고 늦은 5월의 석양이 창문 아래 튤립의 붉은 이파리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아직 불을 밝히지 말아요.”
헤이젤이 사정을 했고 앤도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요. 어둠이 친구가 되어주는 때면 이 방은 너무나 아늑해요, 그렇죠? 이런 때 불을 밝혀 버리면 어둠은 적이 되어버려요. 빛은 성이라도 난 듯 나를 노려보거든요.”
“나도 그런 생각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아름답게 표현은 못 하겠어요. 미스 셜리는 제비꽃의 말을 하는 것 같아요.”헤이젤이 기쁨에 들떠 괴롭게 속삭였다.
헤이젤은 자기가 하는생각을전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말은 너무나 시적이었으니까.
탑 방은 오늘 이 집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방이었다. 레베카 듀는 그날 아침 아주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회 부인회 모임이 이 집에서 있을 텐데 그전에 응접실과 손님방에 도배를 새로 해야 해요.”
그래서 두 방의 가구들을 모두 밖으로 빼놓았지만 도배를 하기로 한 사람들은 다음 날이나 되어야 온다고 했다. 그렇게 되어 ‘윈디 포플러’는 지금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고 탑 방만 유일한 오아시스로 남았다.
헤이젤 마르는 앤에게 폭 빠져 있었다. 마르 집안은 얼마 전 겨울에 샬럿타운에서 서머사이드로 새로 이사 왔다. 헤이젤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10월 빛깔의 금발 미인’이었다. 황금빛과 구릿빛이 섞인 머리에 눈은 갈색이었다. 레베카 듀는 헤이젤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면 세상에 도움 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헤이젤은 여러 사람에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 눈과 고수머리를 보고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앤도 헤이젤을 좋아했다. 그날 오후에도 앤은 온종일 아이들을 가르치다 오후가 되면 그렇듯이 좀 피곤했고 약간 비관적인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5월의 산들바람이 창문으로 달콤한 사과꽃 내음을 실어다 준 때문인지 아니면 헤이젤의 수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양쪽 다이리라. 어쨌든 앤에게 헤이젤은 자기의 어린 시절의 환희, 이상, 그리고 낭만적인 미래에 비전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헤이젤은 앤의 손을 꼭 잡고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미스 셜리가 나를 알기 전에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미워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도 미워요. 나 혼자만 미스 셜리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건 좀 비이성적이지 않아요? 헤이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잖아요. 테리도 사랑하면서.”
“오, 미스 셜리! 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 없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 이해해줄 만한 사람에게 말을 해야겠어요. 그저께 밤 연못 주위를 밤새 빙글빙글 돌았어요. 거의 12시가 될 때까지요. 나는 괴로웠거든요. 모든 것 때문에요.”
헤이젤은 장밋빛이 도는 하얀 얼굴과 속눈썹이 긴 눈, 동그란 얼굴을 후광처럼 드리운 고수머리가 허락하는 한 가장 비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나, 나는 헤이젤과 테리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으로 알았는데요.”
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난 3주일 동안 헤이젤은 온통 테리 갈런드 얘기뿐이었다. 헤이젤의 태도는 누구에게 말하지 못할 거면 연인이 왜 필요 있겠느냐는 것으로 보였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요. 오, 미스 셜리, 인생은 너무나 복잡해요. 어떤 날엔 생각 따윈 집어 치우고 아무 데서나 똑바로 드러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헤이젤이 몹시 씁쓸한 듯 말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죠?”“아무 일도요. 아니, 모든 것이 다 문제예요. 오, 미스 셜리, 내가 모두 얘기를 할게요. 내 속을 모두 털어내 놔도 되나요?”
“그럼요.”
“난 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어요.”
헤이젤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내 일기장 말고는요. 언젠가 내 일기장을 한번 보여드릴까요, 미스 셜리? 이건 자기 고백이에요. 그래도 무엇이 내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지는 적을 수 없었어요. 그것이 나를 질식시켜요.”
헤이젤이 극적으로 자기 목을 눌러 보였다.
“물론 보여주겠다면 보고 싶네요. 그나저나 헤이젤과 테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오, 테리! 미스 셜리,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 말을 믿어주실 거죠? 테리는 내게 낯선 사람 같아요. 낯선 사람이요. 내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 말이에요.”
헤이젤이 자기 말을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설명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헤이젤, 난 헤이젤이 테리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말을 했잖아요.”
“오, 그래요. 나도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끔찍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요. 오, 미스 셜리, 내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다른 사람은 상상하기도 불가능한 일이죠.”“나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앤이 로이 가드너와의 일을 기억하며 동감한다는 듯 말했다
“오, 미스 셜리, 난 그 사람과 결혼할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난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이제야. 이젠 너무 늦어버렸죠. 난 달빛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버렸던 거예요. 달빛만 없었다면 내게 좀 더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고 했을 거라고요. 하지만 난 마음이 너무 들떠 있었어요. 이제야 그걸 알겠어요. 오, 달아나 버렸으면 좋겠어요.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요!”
“하지만 헤이젤, 이게 다 실수라고 생각한다면 왜 그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아요?”
“오, 미스 셜리, 난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랬다간 내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될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정말로 좋아해요. 난 이 일을 피할 방도가 없다고요. 게다가 테리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나 같은 아이를 상대로 말이에요. 나는 아직 열여덟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내가 비밀리에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친구들이 모두 나를 축하해주었어요. 모두가 한 편의 연극 같아요. 사람들은 모두 테리가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은 스물다섯 살이 되면 그 사람 할머니가 남겨주신 돈을 만 달러나 상속받기로 되어 있거든요. 나는 돈 같은 추한 것에는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오, 미스 셜리, 왜 이 세상엔 돈 좋아하는 사람뿐이죠, 왜요?”
“어떤 면에서는 돈이 최고인 세상이긴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요, 헤이젤. 그리고 테리에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 해도, 우리 모두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요. 가끔씩은 우리 마음이 뭔지 잘 모르는 때도 있구요.”

“오, 그럴까요? 난 미스 셜리가 날 이해해주리라고 믿었어요. 나는 정말로 테리를 사랑한다고 믿었어요. 처음으로 테리를 보았을 때 그날 밤 난 그저 가만히 앉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죠.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내 온몸이 전율했죠. 테리는 정말이지 잘생겼어요. 그렇지만 그때도 그 사람 머리가 너무 곱실거리고 눈썹은 너무 옅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는 어떤 일에든 그냥 빠져버려요. 아주 격렬한 성격이죠. 테리가 옆에 오기만 해도 너무 좋아 몸이 다 떨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오, 나는 이 몇 주일 동안에 나이를 먹어버렸어요, 미스 셜리. 아주 늙어버렸다고요! 약혼을 한 뒤로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어머니에게 물어보세요. 난 확실히 결혼할 만큼은 테리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거예요.”
“그럼 결혼해서는 안 되죠.”
“테리가 내게 청혼했던 그 달이 휘영청 밝았던 날 밤에도 사실 나는 존 프링글의 가장무도회에 어떤 옷을 입고 갈까 고민했어요. 5월의 여왕으로 꾸미면 근사할 거라고 생각했죠. 연한 녹색 드레스에 그보다 더 진한 녹색 장식 띠를 두르고 연분홍색 장미를 머리에 꽂은 모습을 상상했어요. 그리고 작은 장미꽃 송이와 분홍색과 녹색 리본을 드리운 메이폴40)을 들면 멋질 거라고요. 하지만 존의 삼촌이 돌아가셔서 그 파티는 열리지 않았고 그런 생각은 모두 부질없게 되었죠. 어쨌건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 중요한 순간에 내 마음이 그렇게 딴 데 가 있었는데도 진심으로 테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런 게 가능한가요?”
“모르겠어요. 우리 마음은 이따금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하니까요.”
“잘 생각해보니 나는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한 번도 없었어요. 여기에 손톱 손질할 때 쓰는 오렌지나무 스틱이 있나요? 고마워요. 좀 빌려 쓰겠어요. 내 손톱이 거칠거칠해져서요. 이야기를 하면서 손질하는 게 좋겠어요. 이처럼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이런 기회를 갖기가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자꾸만 뭔가가 훼방을 놓잖아요.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그래요. 테리.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미스 셜리? 의견을 듣고 싶어요. 아, 나는 마치 덫에 걸려버린 기분이에요!”
“하지만 헤이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오,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미스 셜리! 아주 복잡해요. 우리 어머니는 테리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진 숙모는 그렇지 않아요. 숙모님은 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모두들 우리 진 숙모가 훌륭한 판단력을 가졌다고 말하잖아요. 나는 아무하고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는 커다란 꿈이 있어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가끔씩은 수녀가 되고 싶기도 해요. 하느님의 신부가 되는 일은 멋지지 않은가요? 가톨릭 성당은 꼭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물론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고, 수녀가 되는 일이 평생 할 일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나는 언제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주 낭만적인 직업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열이 있는 환자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아 주고, 그런 일요. 어떤 잘생긴 백만장자 환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침 해와 푸른 지중해가 맞닿아 있는 리비에라의 별장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난 그런 내 모습을 자주 꿈꿔 왔어요. 어리석은 꿈이죠. 그렇지만 너무나 달콤한 꿈이에요. 난 그런 꿈을 포기하고 테리 갈런드와 결혼해 서머사이드에 정착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헤이젤은 그런 생각들로 몸을 떨며 손톱 손질이 잘되었는지 열심히 살폈다.
“내 생각엔 말이에요…….”앤이 말을 해보려 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무엇 하나 공통점이 없어요, 미스 셜리. 테리는 시나 로맨스 같은 건 관심도 없는데 내게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걸요. 가끔씩 나는 내가 클레오파트라가 환생한 사람이라거나 트로이의 헬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튼 그렇게 암울한 그림자를 지닌 매혹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다면 내 이런 훌륭한 생각과 느낌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고요. 그런데 테리를 보면 모든 게 너무 현실적이 돼요. 그 사람은 그 누구의 현신도 될 수 없어요. 내가 베러 프라이의 깃 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대답한 말이 좋은 증거가 될 거예요.”
“나는 베러 프라이의 깃 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요.”
앤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어머나, 그래요? 나는 이야기한 줄 알았는데. 미스 셜리에게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니까요. 베러의 약혼자가 까마귀 깃털을 주워 깃 펜을 만들어 베러에게 주었대요. 약혼자는 베러에게 ‘이 펜을 쓸 때마다 새가 날 듯 하늘까지 당신 마음이 솟아오르길 바라오.’ 하고 말했대요.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테리는 베라가 말을 하듯 글을 써대면 그 펜은 곧 닳아 없어져 버릴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까마귀는 하늘로 솟아오르듯 날아오르지도 못하는 새래요. 테리는 그 말에 담긴 전체적인 의미는 완전히 모르는 거죠. 아주 본질적인 의미 말이에요.”
“그 의미가 뭔데요?”
“오, 어머나, 어머나, 솟아오르는 건 말이에요. 이 땅에서 멀어지는 거지요. 베라가 끼고 다니는 반지를 보지 못했어요? 사파이어예요. 난 사파이어는 약혼반지로 너무 어둡다고 생각해요. 난 앤이 낀 것처럼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진주 반지가 더 좋아요. 테리는 내게 당장 약혼반지를 주고 싶대요. 그렇지만 난 조금 더 있다가 달라고 했어요. 반지는 날 구속하는 고리가 될 것 같아서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죠.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기분은 들지 않겠죠?”
“네, 그렇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좋은 일이에요. 오, 미스 셜리, 내가 다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난 인생의 보다 더 깊은 의미를 찾아 나설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말을 한다 해도 테리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거예요. 게다가 그 사람은 성질도 급해요. 갈런드 집안사람은 모두 그래요. 오, 미스 셜리, 이런 내 마음을 테리에게 말해줄 수 있나요? 테리는 미스 셜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미스 셜리 말이라면 수긍할 거라고요.”
“헤이젤,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왜 할 수 없어요. 미스 셜리가 그 말을 할 수 없다면 제게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어요. 하지만 나는 절대로, 절대로 테리 갈런드와 결혼할 수 없어요.”
헤이젤은 마지막 손톱 손질을 마친 후 비극적으로 오렌지나무 스틱을 내려놓았다.
“만일 헤이젤이 테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서 그렇게 말을 해야 해요. 그 말이 테리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래야 해요. 언젠가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사람을 만날 거예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의심 같은 건 생기지 않아요, 헤이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알게돼요.”
“나는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헤이젤은 바위 같은 냉정함을 보이며 말했다.
“사랑은 오직 슬픔만을 가져다줄 뿐이에요. 어린 나도 그걸 알아버렸어요. 이 일은 미스 셜리 소설의 멋진 줄거리가 되겠죠? 그렇죠, 미스 셜리? 이제 가봐야겠어요. 이렇게 늦은 줄 몰랐어요. 미스 셜리에게 내 마음을 다 털어놓으니 마음이 훨씬 개운해졌어요. ‘그림자 나라에서 그대의 영혼을 만나리.’라고 셰익스피어도 말했듯이 말예요.”
“그 말은 폴린 존슨이 한 말인 것 같은데요.”
앤이 상냥하게 바로잡았다.
“그래요. 나도 알아요. 예전에 살았던 누군가가 했던 말이죠. 오늘 밤에는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스 셜리. 난 테리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걸요.”
헤이젤은 머리를 풍성하게 부풀려 그 위에 모자를 썼다. 장밋빛 안감에 가장자리에는 활짝 핀 장미꽃들을 장식한 모자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앤은 저도 모르게 헤이젤에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정말 예뻐요.”
앤은 감탄의 말을 했다.
헤이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들어 탑 방 천장을 뚫고 그 위의 다락방도 꿰뚫고 별을 찾았다.“난 이 순간을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미스 셜리. 내 아름다움이 신성해진 기분이에요. 내게 아름다움이 있다면요. 오, 미스 셜리는 미인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소문처럼 그렇게 예쁘지는 않은데 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해야 하는 기분도요. 이건 고문과도 같아요. 가끔씩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실망하는 상상을 하고는 수치심으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해요. 그건 아마 내 상상일 뿐이겠지만. 나는 너무 상상을 많이 해요. 내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공상에 빠져 사는 건 좋지 않은 데도요. 난 테리와 사랑에 빠졌다고도 상상했어요. 오, 미스 셜리, 지금 이 사과꽃 향기가 나나요?”
너무나 기분이 좋아진 헤이젤이 중얼거렸다.
앤도 코는 있어서 향기를 맡았다.
“신성한 향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천국은 온통 꽃밭으로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떨기 백합꽃 안에서 산다면 누군들 나쁜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그럼 좀 답답하겠네요.”
앤이 좀 심술궂게 말했다.
“오, 미스 셜리, 그러지 말아요. 내가 미스 셜리를 얼마나 숭배하는데 그렇게 비꼬는 소리를 하다니요. 그렇게 비꼬는 말은 나를 시든 이파리처럼 기죽게 해요.”

“그런 수다를 듣고도 용케 죽지 않고 견뎌냈군요. 그걸 어떻게 다 참을 수 있는지 당최 모르겠네요.”‘도깨비 길’ 끄트머리까지 헤이젤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앤을 잡고 레베카 듀가 말했다.
“나는 헤이젤이 좋은걸요, 레베카, 정말 좋아요. 나도 어린 시절에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가끔씩 헤이젤을 보면서 나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붙들고 저렇게 바보스러운 말을 늘어놓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나야 미스 셜리 어릴 때를 보지는 못했지만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미스 셜리는 진실한 얘기만 하잖아요. 하지만 헤이젤 마르는 그렇지가 않아요. 자기는 크림인 척하지만 알고 보면 탈지유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라고요.”
레베카 듀가 말했다.
“오, 물론 헤이젤이 다른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좀 과장된 면이 있긴 하죠. 하지만 헤이젤의 말은 진실이기도 해요.”
앤은 테리의 일을 생각하며 말했다. 헤이젤이 테리에게 한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이유는 앤이 테리를 대단치 않게 여겨는 지도 몰랐다. 앤은 헤이젤이 테리의 수중에 만 달러라는 거액이 들어오는데도 테리를 거절한 것도 떠올렸다. 앤은 테리를 잘생겼지만 마음은 진중하지 못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처음으로 눈길을 준 예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 아가씨가 자기를 차버린다거나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면 간단하게 다음 아가씨에게로 마음을 옮겨버릴 사람쯤으로 여겼다.
그다음 봄 내내 앤은 테리와 자주 만났다. 헤이젤이 앤에게 동행해 달라고 자주 졸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와 더욱 자주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헤이젤이 킹스포트 친척집을 방문하러 간 동안 테리가 앤을 자주찾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드라이브를 가자고도 했고, 어디를 다녀오면 앤을 집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둘은 나이도 비슷해 서로를 앤과 테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테리는 앤이 마치 엄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테리는 ‘그 머리 좋은 미스 셜리’가 자기와 친구가 되어주어 아주 우쭐해했다. 메이 코넬리가 연 파티가 있던 날 밤에는 테리가 아카시아 잎이 미친 듯 흔들리는 달빛 어린 뜰에서 아주 감상적으로 굴기도 했다. 앤은 장난스럽게 지금 여기 없는 헤이젤을 상기시켜주었다.
“오, 헤이젤! 그 어린아이요!”
테리가 말했다.
“그 어린아이는 테리와 약혼한 사람이 아니던가요?”
앤은 엄하게 나무랐다.
“약혼한 건 아니에요. 남자 여자 간에 시시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거였어요. 그때 난 달빛 때문에 그만 마음이 들떠 있었던가 봐요.”
앤은 얼른 이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만일 테리가 정말로 헤이젤에게 마음이 없는 거라면 헤이젤은 그에게서 자유를 찾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아직 어린 두 사람이 일을 너무 심각하게만 생각해 이 엉켜버린 실타래를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속박에 갇혀 버린 서로를 자유롭게 할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앤의 침묵을 오해한 테리는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난처한 입장에 있어요.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죠. 헤이젤이 나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 걱정이이에요. 어찌하면 헤이젤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충동적인 앤이지만 이번에는 한껏 어머니 같은 표정을 지었다.
“테리, 당신들 두 사람은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린애들 같아요. 테리가 헤이젤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헤이젤도 테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두 사람 다 그날 밤 달빛에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헤이젤도 테리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테리의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되어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헤이젤은 그저 무슨 일에든 쉽게 빠져버리는 낭만적인 아가씨이고 테리도 사랑에 빠지길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에요. 언젠가는 둘이 모두 오늘을 돌아보며 웃게 될 거예요.”(내가 이 이야기를 꽤 괜찮게 했지. 앤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테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앤 덕분에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헤이젤은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몇 주가 지난 다음 곧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깨달았어요. 하지만 헤이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죠. 남자가 한 여인을 만나면, 그 여인은…… 아니, 벌써 가려고요, 앤? 이렇게 좋은 달빛을 내버려두시려고요? 달빛에서 보니 앤은 꼭 하얀 장미 같아요.”
16.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 영국의 정치가. 해군 제독을 지내고 정계에서 활약하였으며, 문학작품과 사료로 높이 평가되는 《일기》를 남겼다.

추천 (0) 선물 (0명)
IP: ♡.62.♡.242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12
0
45
나단비
2024-04-12
0
45
뉘썬2뉘썬2
2024-04-11
1
79
뉘썬2뉘썬2
2024-04-11
1
138
나단비
2024-04-11
1
100
나단비
2024-04-11
1
131
나단비
2024-04-11
1
114
나단비
2024-04-11
1
112
나단비
2024-04-11
1
116
나단비
2024-04-09
1
95
나단비
2024-04-09
0
42
나단비
2024-04-09
0
57
나단비
2024-04-09
0
47
나단비
2024-04-08
0
46
나단비
2024-04-08
0
41
나단비
2024-04-08
0
51
나단비
2024-04-08
0
42
나단비
2024-04-08
0
43
나단비
2024-04-07
0
61
나단비
2024-04-07
0
56
나단비
2024-04-07
0
51
나단비
2024-04-07
0
47
나단비
2024-04-07
0
53
나단비
2024-04-05
0
69
나단비
2024-04-05
0
69
나단비
2024-04-05
0
60
나단비
2024-04-05
0
72
나단비
2024-04-05
0
82
나단비
2024-04-04
0
90
나단비
2024-04-04
0
7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