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미로의 저쪽 2

3학년2반 | 2022.02.06 07:45:12 댓글: 0 조회: 68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833

3 접근
오월이 사라진 지 하루가 지났다.
경찰은 긴급 수배령 제1호를 발동해서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장완수 형사는 오월의 집에서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냈다. 그녀로부터는 두 번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점심 때쯤 동림건설의 김전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경찰을 바꿔 달라고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모님께서는 아직 안 들어오셨는가요?"
"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쪽으로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저기 사실은......."
상대방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장형사는 긴장했다.
"말해 보십시오. 무슨 일인가요?"
"실은 어제 아침나절에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뭐라구요?"
장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왜 이제사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지금 그 여자를 찾으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는데. 그 여자 어디 있죠?"
"어제 P호텔에서 만났는데 아직도 거기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2015호실입니다."
"그쪽으로 나오시오! 커피숍에서 만납시다! 내 얼굴을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모르면 장완수를 찾으시오."
장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황형사가 말없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함께 택시를 탔지만 장은 황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황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워낙 냉랭했기 때문에 황은 그에게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장은 프런트로 먼저 달려갔다.
"경찰입니다. 지금 2015호실에 누가 투숙하고 있죠?"
"일본인이 투숙하고 있습니다."
프런트맨이 숙박 카드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언제 투숙했죠?"
"조금 전에 투숙했습니다."
"어제 투숙했던 사람을 알아보고 싶은데......."
프런트맨은 서랍 속을 뒤지더니 카드 한 장을 뽑아냈다.
"오숙자라는 여자가 혼자 들었습니다."
장은 카드를 뺏어들고 들여다보았다.
"이 기록은 주민등록증과 대조한 건가요?"
"손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여자 언제 나갔나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방값을 선불하고 투숙했기 때문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12시에 자동적으로 체크아웃되었기 때문에 다른 손님을 투숙시켰습니다."
장형사가 황형사와 커피숍으로 함께 들어가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두 사나이가 일어서면서 허리를 굽혔다.
"동림건설에서 왔습니다."
장은 그들과 마주앉으면서 사납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어제 바로 연락해 주었으면 이런 일이 없죠. 내가 어제 분명히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두 신사는 어쩔 줄 모르며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불찰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당신들은 모를 거요. 그 동안 두 사람이 살해되었어요. 범인들은 잔인무도한 놈들이에요. 놈들은 오부인을 노리고 있어요. 오부인을 발견하면 반드시 살해할 거요. 그런데 부인은 밖에 몸을 노출시키고 있으니 나 죽여 달라고 돌아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방에는 없던가요?"
"지금까지 있을 리가 없죠. 어제 어떻게 해서 오부인을 만나게 되었죠?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어제 전화가 왔었습니다. 회사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정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는 10분 남짓 계속되었다. 그리고 장형사의 질문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할 때 오부인한테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그런 점은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거나 그런 점 말이오."
"아주 정상이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침착하셨습니다."
김전무는 단언하듯 말했다. 장은 식어빠진 커피를 마시고 나서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내가 이런 말을 묻는 건 오부인이 혹시 정신 이상으로 가출한 게 아닌가 해서요. 헌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회사를 이끌어가려는 의지가 아주 강하게 엿보였습니다."
"그럼 왜 가출했을까? 그 이유를 말하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들이 댁으로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모님께서 정색을 하시고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유 같은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은 하셨습니다만......."
"무슨 말을요?"
"마치 우리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서 잠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서 나온 거라고 하셨습니다."
"오부인은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아요."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내 육감이 그래요. 당신들이 어제 제때 연락만 해주었던들 별일 없었을 텐데......."
"사모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기에 어리석게도......."
장은 두 신사를 흘겨보았다.
"약속을 지킬 일이 있고 안 지켜도 좋을 일이 있어요. 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그런 약속은 안 지켜도 좋은 거예요."
"잘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부인을 만나든가 부인한테서 전화 연락이 오면 즉시 연락해 주십시오."
장은 그들 앞에 명함을 던져놓고 일어섰다.
오월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서서히 자연스럽게 접근해 들어갔다.
아직은 어디쯤에 범인들의 그림자가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내딛은 첫걸음이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미로의 저쪽을 향해-.
부산에 내려와 '로댕의 집'에 출입한 지 닷새째 되는 날 밤 그녀는 여자 바텐더인 미스 홍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동안 월이 홍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녀가 아직 때 묻지 않았으며 돈에 매우 약하다는 것 등이었다. 홍은 대학에 다니다가 공무원인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맏이로, 아래로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셋이나 있다고 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그녀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학업을 계속하려는 열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그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그녀는 돈을 필요로 했다. 스물세 살 처녀답지 않게 돈에 대한 집착력이 강렬했다.
그것을 알게 된 월은 상대가 놀랄 정도로 팁을 후하게 주었다. 그런 팁을 받아보지 못한 홍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바싹 달라붙었다.
시간이 10시가 지나면서 실내에는 손님이 서너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요새는 경기가 좋지 않아 장사도 신통치 않다는 홍의 말을 받아 월이 말했다.
"나도 이런 가게 하나 내고 싶어. 이런 거 하나 차리려면 얼마나 들까?"
"실내 장식하고 보증금하고 해서 1억 남짓 들었나 봐요. 매 월세가 따로 2백만원씩 나가고 있어요. 장소가 좋으니까 비싼 편이에요. 하지만 장사만 잘 되면 이게 꽤 남는 장사래요. 언니, 하나 차리세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홍은 기대에 찬 눈으로 월을 쳐다보았다. 월은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렇다고 시시하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고......."
"자본금은 얼마나 가지고 계신데요?"
"얼마 안 돼. 몇 장밖에 안 돼."
그녀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홍은 더욱 호기심이 당기는 눈치였다.
"몇 장이라면 몇 천 말씀인가요?"
월은 씨익 웃었다.
"몇 천 가지고 어떻게 사업을 해. 이렇게 돈 가치가 없는 때에......."
"그럼 몇 억이란 말씀인가요?"
홍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월은 눈을 흘겼다.
"남들 다 듣겠어. 창피하게......."
홍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떼었다.
"언니가 부러워요. 우리는 몇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돈 못 만질 거예요."
"그게 어디 내가 번 돈인가. 우리 아빠가 남겨준 거지."
"아빠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거예요?"
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홍은 월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 같으면 그 돈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만 받아먹겠어요."
"누구나 다 그렇게들 말하지. 하지만 막상 돈이 있으면 그렇게 안 돼.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어서 안달이지. 그게 사람의 본성인가봐. 가만히 있기를 거부하는 본성 말이야."
"헌데 언니는 왜 혼자 부산에 내려와 있어요?"
"혼잔데 어디 산들 어때. 서울이 싫어졌어. 부산은 바다가 있고 해서 서울보다 낫지. 하지만 1년쯤 살아보니까 이젠 싫증이 났어. 그래서 딴 데로 갈까 생각하고 있어."
"아이, 언니, 가지 마세요."
"애인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언니, 정말 애인 없으세요?"
"없어."
"언니 같은 분이 애인이 없다니 이상하다. 언니, 제가 애인 한 사람 소개해 드릴까요?"
월을 바라보는 홍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월은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좋을 대로...... 하지만 아무나 사귀지는 않아."
"어떤 남자가 좋으세요? 남자들은 언니를 보면 오케이할 거예요. 언니는 미인이니까."
"미인은 무슨 미인......."
그녀는 곱게 눈을 흘겼다.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조건은 없어.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들면 되는 거야. 신랑감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애인이니까......."
"엔조이할 애인 말씀이죠?"
그렇게 말해 놓고 그녀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 적당한 남자 있어?"
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월이 바싹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 되었다.
"누군데? 대강은 알아야 만나잖아?"
"여기 사장님이에요."
"이 가게 말이야?"
"네, 아주 멋지게 생겼어요."
"그래? 한 번 보고 싶은데...... 어떤 사람이야?"
그녀는 일부러 크게 몸을 돌려 저쪽편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안 계세요. 가게에는 가끔 어쩌다가 나오세요. 이것 말고도 다방도 하고 당구장도 하고 디스코 클럽도 경영하고 있어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인가 보지. 총각이야?"
"부인하고 이혼했다니까 총각인 셈이지요."
"자식은?"
"자식들은 부인이 데려갔나 봐요."
"몇 살이나 먹었지?"
"서른다섯쯤 됐을 거예요."
"정말 멋있어?"
"멋있어요. 여자들이 줄줄 따른데요."
"그렇다면 한 번 해볼 만하겠는데......."
그녀들은 악동들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제가 좋을까?"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구 빠를수록 좋지 않아요?"
"그래, 내일 또 올게. 참 내일 12시쯤 시간 있어? 내가 점심 살게."
"네, 시간 있어요."
"그럼 12시에 여기서 만나."
스낵바를 나온 월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능숙하게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몰고 있는 차는 이틀 전 구입한 중고차로 일제 스포츠카였다. 그녀는 일부러 많은 돈을 주고 그것을 구입한 것이었다. 그 스포츠카는 빨간색의 멋진 차로 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20분쯤 지나 그녀는 어느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25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월세로 빌린 것은 부산에 도착한 그 다음날이었다. 그 아파트에는 마침 전화까지 딸려 있어서 안성마춤이었다. 그녀는 침대와 소파 등 몇 가지 가구까지 갖추어 놓고 창문에는 커튼도 달았다. 전자 제품도 몇 개 들여놓았다.
누가 보기에도 혼자 부유하게 사는 여자 같은 인상을 주도록 분위기를 꾸며 놓았다.
차에서 내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갔다.
아파트 문을 열자 어둠과 함께 공허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 공허감이 두려웠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공허감을 안고 견뎌내야 하는 불면의 밤들이 더없이 무서웠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그녀는 소리없이 움직였다.
바다 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젖힌 다음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조용한 음악이 방안에 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부엌으로 가서 소주병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병째로 나발을 불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한숨을 내쉬며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아파트였기 때문에 언제나 바다를 볼 수가 있었다. 문을 열었다. 바닷바람이 어린아이의 손길처럼 얼굴에 와 닿았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다 위로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수평선 위에 불을 환히 밝힌 큰 배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거듭 나발을 불었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쳤다. 얼굴빛이 몹시도 창백했다. 너무 창백해서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술병의 술이 점점 줄어들었다.
마침내 빈 술병이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집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탁자 위로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만취된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파에 그렇게 앉은 채 그녀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12시경에 그녀는 홍을 만나 그녀를 태우고 해운대로 갔다. 홍은 월 일제 스포츠카를 직접 모는 것을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다. 월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신뢰와 선망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월은 홍을 호텔로 데리고 가 부페 식사를 사 주었다. 부페를 처음 먹어보는 홍은 배가 터지도록 이것저것을 가져다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월은 일부러 남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음식과 패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쉴새없이 지껄이는 그녀를 홍은 감동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월은 홍에게 아파트까지 보여 주었다.
"언니가 부러워요."
홍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아주 당연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밤 9시 조금 지나 월은 미스 홍의 소개로 한 사나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키가 크고 준수하게 생긴 미남으로 바로 '로댕의 집' 주인이었다.
"배광식입니다."
그가 점잖게 자기 소개를 했다.
"안소라예요."
월도 자기 소개를 했다.
"자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깍듯이 말했다.
"뭘요. 분위기가 좋아서 몇 번 왔더랬어요."
그녀는 이를 조금 드러내고 웃었다.
"어떻게 혼자 이런 델 오십니까?"
"같이 다닐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요."
"저런...... 제가 술친구 돼 드려야겠는데요."
"그렇게 해주세요."
그녀는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홍은 스탠드로 돌아가고 룸에는 그들 두 명만 남았다.
배광식이 왼손을 쳐들었다. 지금까지는 그 손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었다. 그 손을 보는 순간 월은 흠칫하고 놀랐다. 배광식의 왼손 새끼손가락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녀가 얼른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리면서 술잔을 집어들었다.
"댁이 서울이라구요?"
"서울에 집이 있긴 하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커서 세를 줬어요. 그리고 저는 가출 소녀가 되어 이렇게 부산까지 내려왔어요."
"아, 그래요? 그럼 혼자십니까?"
"네, 혼자예요."
"홀가분하니 좋겠군요."
"자유롭기는 한데 외로워요."
그녀는 뜨거운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콧대가 길고 눈매가 날카로운 사나이였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 이 사내는 새끼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을까? 혹시 손가락이 없는 걸 감추려고 그런 게 아닐까.
"바쁘지 않으세요?"
"아뇨."
그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우리 다른 데로 가죠. 제가 한 잔 사겠습니다."
월은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일어섰다.
"네, 좋아요."
가만히 앉아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제 차로 가요."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사내를 주차장 쪽으로 데리고 갔다.
"멋진 차로군요. 운전도 잘 하시고......."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배광식이 말했다.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띤 채 앞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느 호텔 앞에서 차를 내려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갔다. 웨이터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스테이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사내는 매우 정중하게 행동했다. 너무 깍듯하고 정중해서 이쪽이 혼란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술 몇 잔 들어가고 두어 번 같이 춤을 추고 나자 점점 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번째로 블루스를 추게 되었을 때 월은 사내가 달아오르도록 몸을 내맡겼다. 사내는 여자를 휘어감고 돌아갔다.
"나도 외로운 몸이오."
그녀의 귀에다 대고 사내가 속삭였다. 그녀는 사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처지야."
"혼자세요?"
"음, 혼자야."
어느새 그의 말투는 반말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상체를 뒤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나한테 무엇을 바라고 접근한 것일까. 단순히 육체를 바라고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던져놓은 미끼를 단단히 물었음에 틀림없다. 수억대의 돈을 가진 처녀라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들겠지.
지금 이 사내는 나를 탐색하고 있다.
두 시간쯤 지나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더듬었다. 그녀는 그가 만지는 대로 가만 있다가 그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왼손이었다.
"손 한 번 대봐요."
그녀는 사내에게 손을 쭉 펴게 한 다음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가냘프고 조그만 손에 비해 남자의 손은 마디가 굵고 컸다.
"어머나, 무슨 손이 이렇게 크세요?"
그녀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남자 손이 이렇지 뭐. 손이 꼭 아기 손 같군. 꽉 쥐고 부숴버리고 싶은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여긴 왜 이래요?"
그녀는 붕대가 감긴 새끼손가락을 가리켰다.
"아, 이거...... 좀 다쳤어요."
사내는 당황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많이 다쳤어요."
"아니, 조금 비었어요."
그녀는 더 듣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떻게 하면 저 손가락을 볼 수 있을까. 사내로 하여금 자진해서 저 붕대를 풀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항상 그런 안경을 끼고 있어요?"
남자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듯이 하며 물었다.
"불만이세요?"
"색이 좀 짙은 것 같아서......."
그가 안경을 벗기려는 것을 그녀는 피했다. 그녀의 안경은 확실히 조명이 어두운 실내에서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색깔이 진했다.
"눈이 빛에 몹시 약해요. 안과 선생님이 처방을 내려준 대로 맞춘 거예요. 불만이시더라도 참으세요."
그들은 자정이 지나서야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남자는 꽤 취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신이 말짱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얼른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동침을 요구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욕망에 번득이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굳이 썰렁한 방에 혼자 갈 필요 없지 않아."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녀는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육체를 지켜야 할 가치 같은 게 남아 있을까. 육체를 지켜서 어쩌자는 것인가. 나의 육체는 그이와 함께 이미 죽은 지 오래다. 더 이상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의 육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눈웃음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사내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런 다음 침대 위에 눕혀놓고 허둥지둥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성급하게 일부터 치르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상대가 옷을 모두 벗길 때까지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다가 그가 일을 치르려는 순간 그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씻어야 해요."
"하고 나서 씻으면 되잖아."
남자는 급했다.
"아니에요. 씻어야 해요. 더러운 몸으로는 싫어요. 당신도 씻으세요."
그녀는 욕실로 뛰어갔다.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열어두었다. 물을 틀어놓고 욕조 속에 들어가 앉아 있자 사내가 들어왔다.
월은 사내의 왼손을 보았다. 붕대가 젖으면 풀어놓겠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내가 욕조 속으로 들어앉으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두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름다운 젖이야."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뜨겁게 했다.
그녀는 왼쪽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가락의 붕대는 아직 젖어 있지 않았다. 가슴에다 물을 끼얹었다. 붕대가 젖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것도 모르는 듯 정신없이 가슴만 주물러대고 있었다.
"어머, 어떡하죠?"
"뭐가?"
사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붕대 말이에요. 젖었어요."
"괜찮아."
"상처가 덧나면 어떡해요?"
"거의 다 나았어."
그러면서도 사내는 붕대를 벗겨내려고 하지를 않았다.
마침내 고역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자를 받았다.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몇 남자를 더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남자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과 함께 침대 스프링이 퉁겼다. 그의 왼손이 젖가슴을 더듬었다.
"차가워요."
그녀는 젖은 붕대를 가리켰다.
"차가워서 싫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더니 새끼손가락에서 붕대를 간단히 뽑아냈다. 순간 그녀는 손가락 끝이 잘려나가고 없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 자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사내가 왼손을 등 뒤로 돌렸다.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치욕의 순간을 줄이기 위해 몸을 굳힌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좀 움직여봐."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행동은 질기고 길었다.
마침내 그가 일을 치르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녀 옆에 네 활개를 편 채 드러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월은 가만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사내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첫째 마디가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런데 잘린 지 얼마 안 된 듯 잘린 부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혼란을 느꼈다.
"뭘 보고 있어?"
사내가 눈을 뜨고 물었다. 그는 왼손을 쳐들더니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였다.
"아프겠어요. 어쩌다가 그랬어요?"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아프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아팠는데 이젠 거의 다 나아서 괜찮아."
"언제 그랬어요?"
"한...... 보름쯤 됐어. 이거 없다고 해서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
"그래도 보기 흉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뭐 어때. 할 수 없지."
월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내는 아니다. 새끼손가락이 절단되긴 했지만 이 남자는 범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시기적으로 맞지가 않다. 이 남자의 새끼손가락은 불과 보름전에 절단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범인들에게 당한 것은 지금부터 석 달 전인 지난 1월이었다. 석 달 전에 한 사나이의 손에 새끼손가락이 없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사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움직였다.
"어, 갈려구?"
사내가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옷 입는 것을 계속했다.
"왜 그래?"
사내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사내의 손을 홱 뿌리쳤다.
"가겠어요."
"이 시간에? 갑자기 왜 그래?"
"그냥 가고 싶어서요."
"가지 마."
사내는 우악스럽게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오늘밤은 나하고 지내는 거야."
월은 사내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사내는 대단한 힘으로 내리눌렀기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힘으로 사내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맥이 풀렸다. 동시에 사내와 더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옷을 벗기는 대로 잠자코 있어 주었다.
사내는 한 차례 더 그녀를 농락하고 나서야 품에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이윽고 열기가 식고 호흡이 가라앉았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가 있었다.
"왼손 불편하지 않으세요?"
"괜찮아."
"전 자꾸 신경에 걸려요."
"왜? 무슨 상관이지?"
"끔찍해서요."
"그래서 가려고 했나?"
"네, 전 그런 데 신경이 예민해요."
"보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이미 보았는걸요. 어쩌다 그랬어요?"
"알 필요 없어."
"그래도 알고 싶어요. 전 제가 관계하는 남자의 모든 것을 알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요. 이야기해 줘요."
"이야기할 수 없어. 비밀이기 때문에......."
"사고로 다친 게 아니에요?"
"음, 사고로 다친 게 아니야."
"그럼 누가 자른 거예요?"
"말할 수 없다니까."
배광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 분노가 서려 있음을 월은 느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옆방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허탈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꼭 듣고 싶어?"
"네, 듣고 싶어요."
그녀는 남자의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말해 주지. 사실은 잘린 거야. 도끼로......."
"어머나!"
그녀는 몸을 움츠리면서 그것을 꽉 쥐었다.
"무서워요."
그녀는 떨었다.
남자가 그녀를 껴안았다.
"겁이 많군."
"네, 전 겁이 많아요. 그런데 누가 그런 짓을 했어요?"
"어떤 놈들이......."
이를 가는 소리로 그가 말했다.
"손가락을 자르는데도 왜 가만 있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상대는 여러 명이고 난 혼자였으니까."
"싸운 거예요?"
"아니, 싸운 건 아니야. 싸우다 이렇게 됐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 새끼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왜 그렇게 된 거예요?"
"사실은 빚이 좀 있었어. 꽤 많은 빚이지. 그 돈을 갚지 않으니까 깡패를 시켜서 손가락을 자른 거야. 갚지 않으면 오른손 새끼손가락도 자르겠대."
"어머나! 무서워요!"
월은 사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으로 닷새 이내에 갚지 않으면 또 자르겠다는 거야."
그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그럼 빨리 갚으세요."
"돈이 있어야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게를 처분해서 갚으려고 하는데...... 가게가 나가줘야 말이지. 이 불황에 가게를 선뜻 사겠다는 사람이 있겠어?"
"그럼 어떡하죠?"
"글쎄, 걱정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다가 또 잘리면 어떻게 해요? 경찰에 연락해서 그 사람들을 잡게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 경찰에 고발하면 난 죽게 돼. 그 놈들은 무서운 놈들이야."
"그럼 도망치세요."
"그것도 안 돼. 이 좁은 바닥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디로 도망치겠어. 도망쳐도 그 놈들은 반드시 찾아내. 그리고 나를 죽일 거야. 차라리 손가락이 모두 잘리는 게 낫지."
그녀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빚이 얼마나 되는데 그러세요?"
"꽤 많아."
"얼마예요?"
"3억이야. 2억이었는데 이자가 무섭게 불어나서 3억이 된 거야."
"뭐 많지도 않네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 돈이 많지 않단 말이야?"
"그게 뭐가 많아요? 그만한 돈에 손가락을 자르다니 나쁜 사람들이군요."
이번에는 그녀가 분노의 빛을 나타냈다.
사내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만지기 시작했다.
"누가 3억만 빌려 준다면 평생의 은인으로 알고 섬기겠어."
그는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까짓 3억 가지고 뭘 그러세요."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목숨하고 관계되는 돈이야."
"하긴 그렇겠군요."
그녀는 허리를 뒤틀었다.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3억원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누가 부자랬어요. 그렇다 이거죠. 하지만 돈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요."
"말만 들어도 고맙군. 허풍이라도 말이야."
"허풍이 아니에요."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허풍이 아니고 뭐야? 돈도 없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건 허풍이지 뭐야?"
"돈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사내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이제 처음으로 정사를 가졌어.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도움을 바라겠어?"
"하룻밤 정사에도 만리 장성을 쌓는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요?"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껴안았다.
"좀 도와줄 수 있겠어?"
"글쎄요."
그녀는 슬슬 뒷걸음질했다. 사내는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 좀 도와줘. 은혜 잊지 않을게."
"글쎄요. 한 번 생각해 보고요."
"그냥 달라는 건 아니야. 빌려 달라는 거야. 빌려주면 이자까지 후하게 쳐서 주겠어. 그리고 6개월 후면 원금까지 다 갚아 주겠어."
"그러다가 만일 못 갚으면?"
"못 갚을 리가 있겠어. 여자 돈 떼먹지는 않아. 시시하게 그런 짓 하지는 않아."
"만일 못 갚으면 제가 손가락을 잘라야겠군요."
"그래, 좋아. 빌려주는 거지?"
"아뇨, 지금 장담할 수는 없어요. 돈은 엄마가 관리하고 있으니까 엄마한테서 타내야죠."
"그게 가능할까?"
"모르죠."
"제발 좀 부탁해. 이걸 좀 보라구."
그는 새끼손가락이 없는 왼손을 그녀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월은 그 손을 잡아 상처 부위를 세밀히 관찰했다. 분명히 오래된 상처는 아니었다.
"새끼손가락 없는 사람 처음 봤어요."
"내 친구 하나도 새끼손가락이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월은 멈칫했다.
"어떤 친군데요?"
"그저 그런 친구야."
"그 사람은 어떻게 하다가 손가락이 잘렸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
"잘린 지 오래 됐어요?"
"꽤 됐지. 헌데 왜 그런 걸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녀는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였다.
"가능한 한 당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이젠 모른 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나도 소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차차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다시 그의 왼손을 쳐들고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왜 자꾸 이걸 보려고 그러지?"
그가 손을 거두려는 것을 그녀는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신기해서 그래요."
"그렇다면 자, 많이 보라구."
그는 손을 쫙 펴보였다. 그는 가능한 한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교묘하게 대화를 유도해 나갔다. 하나라도 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손가락 없는 사람끼리 만나면 우습겠어요."
"우습기보다는 좀 쑥스럽지."
"손가락 없다는 그 친구분 자주 만나세요?"
"음, 가끔 만나지."
"쑥스럽다면서요?"
"쑥스럽다고 안 만나나. 처음에만 그렇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만일 그 사람이 피아니스트라든가 그밖에 악기 같은 것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영향이 많겠지요."
"다행히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친구야. 하지만 왼손잡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 불편하겠지."
"뭐하는 사람인데요?"
"사업하고 있어. 아, 참, 그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깜박 잊었군......."
그는 전화를 걸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전화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손만 뻗으면 수화기를 집어들 수 있는 위치에 누워 있었지만 사내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가 전화를 걸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서려는 것을 그녀가 막았다.
"그대로 계세요. 제가 걸어 드릴게요. 몇 번이에요?"
그녀가 어느새 수화기를 집어든 것을 보고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
"475에 3662......."
그녀는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다르르 하고 신호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굴 찾을까요?"
"양동팔을 찾아."
신호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졸음에 겨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다만...... 양동팔 씨 계신가요?"
"어디신데요?"
상대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배광식 씨가 찾는다고 해 주세요."
"잠깐 기다리세요."
월은 수화기를 배광식에게 넘겼다.
배광식은 그녀의 배 위로 넘어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한 바퀴 몸을 굴렸다. 그리고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편 소리는 잘 들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네네,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아마 모레쯤이면 해결이 나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네?...... 아,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저 몸 좀 풀려고......헤헤...... 그럼요...... 최고급품입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한 번 보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안녕히 계십시오."
그녀는 못 들은 체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전화번호와 이름을 속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외웠다. 배광식이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친구 사이가 아닌 듯했다.
양동팔은 어떤 사람일까. 그를 만나야 한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배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아, 졸려요."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그거 기대해도 될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돈 말이에요?"
"음......."
"글쎄, 지금은 뭐라고 확답할 수가 없어요. 좀 기다려 보세요."
"꼭 좀 부탁해."
얼마 후 배광식은 잠이 들었다.
그가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월은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배광식의 양복 저고리를 가지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불을 켰다.
먼저 지갑을 뽑았다.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을 빼내 보았다. 이름이 손대식으로 되어 있었다. 배광식이란 이름은 가짜임이 분명했다. 지갑 속에는 빳빳한 만원권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돈 따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지갑을 도로 양복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다음에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에는 각종 메모와 전화번호가 잔뜩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백 속에 집어넣고 욕실을 나왔다. 양복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소리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3시 15분이었다.
인적도 차량도 거의 끊긴 거리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스포츠카를 몰고 어둠 속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배광식이 눈을 뜬 것은 아침 10시가 가까워서였다. 지나친 성희 끝에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기 때문에 늦잠을 잤던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옆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욕실에 들어갔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담배를 피워물고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빛에 가늘게 뜨고 있다가 방안이 유난히도 조용하다는 느낌에 비로소 욕실 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여자의 옷가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급히 걸어가 욕실문을 열어 젖혔다. 여자는 없었다. 잠시 주춤하다가 불길한 예감에 옷장을 열고 양복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속의 돈을 헤아려 보았다. 하나도 축나지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들었다.
볼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갔겠지. 내가 곤하게 잠들어 있으니까 깨우지 못하고 먼저 나갔겠지. 하지만 메모지라도 하나 적어놓고 갈 것이지.
그는 혹시나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1시가 지나도록 방안을 서성거렸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호텔을 나와 '로댕의 집'으로 갔다.
미스 홍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 아가씨 이름이 안소라라고 했지?"
"네, 안소라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전화번호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어요."
잠시 후 그는 안소라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그는 한참 기다렸다가 전화를 끊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역시 받지를 않는다.
"집에 없는 모양인데."
그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안 받아요?"
미스 홍이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안 받아. 그 아가씨 아파트에 가봤다고 했지?"
"네, 가봤어요."
"어딘지 가르쳐 줘."
그는 안소라의 집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기 위해 수첩을 찾았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수첩이 없었다.
"내가 수첩을 어디다 뒀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수첩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수첩을 어디에서 분실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그 생각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반 시간 후 그는 어느 아파트 앞에서 서 있었다. 호수를 확인한 후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안으로부터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그 아파트와 마주 보고 있는 아파트의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집 이사갔는데요."
"언제 이사갔나요?"
"아까 아침에요?"
4 첫번째 얼굴
음악 다실 안에는 차이코프스키 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넓은 실내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젊은 대학생들이었다.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드리운 그 여대생은 약간 불만스러운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더벅머리의 그 청년은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신문 광고란에 눈을 박고 있었다. 시력이 약한 탓인지 신문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있었다. 그 역시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애인 사이였다. 여자 쪽이 부유한 데 비해 남자는 고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쾌활하고 자신만만했다.
"뭘 그렇게 봐?"
여학생이 볼멘 목소리로 물었는데도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느냐구?"
조금 더 큰소리로 묻자 그제서야 남학생은 신문에서 눈을 떼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앉혀놓고 신문만 보기야?"
"미안해."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 나서 담배꽁초에 불을 당겼다. 앞으로 허리를 굽히자 점퍼 자락이 올라가 등허리 살이 훤히 드러나보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난히 예쁘게 차리고 나왔는데......."
여학생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일주일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일주일 전 토요일 그들은 경주로 놀러 갔었는데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여관에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애인에게 처녀를 바쳤다. 관계를 맺고 나자 그녀는 몹시 울었다. 그를 때리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녀는 일주일 동안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일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괴로운 것은 그보다도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주일을 버티다가 마침내 오늘 고집을 꺾고 나온 것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먹고 자고 지냈지."
여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남학생은 씨익 웃었다.
"이제부터는 존대어를 써야지. 서방님이 됐는데......."
"뭐라고?"
여학생은 눈을 크게 뜨더니 그에게 책을 집어던졌다.
"아, 농담이야."
그는 능숙하게 책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동안 보고 싶어서 혼났어."
그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거짓말 마."
"정말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니?"
그 말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손을 감추었다. 그리고 뚫어질 듯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 엄마가 보재."
그 말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구?"
"우리 엄마가 보재."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왜? 왜 날 보자는 거야? 이유가 뭐야?"
"몰라서 물어?"
"아니, 그럼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그럼 하지 않고. 난 엄마한테 하나도 숨기지 않아."
"맙소사.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왜? 겁나?"
"겁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왜 얼굴이 그렇게 창백해지지? 겁나면 겁난다고 그래."
그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 못하고 있자 그녀는 갑자기 킬킬거리고 웃었다.
"겁에 질린 그 표정 너무 우스워."
"이게 누굴 놀리는 거야?"
그가 발끈하자 그녀는 한 차례 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엄마한테 그런 말 했을 것 같아? 엄마가 알면 날 죽일 거야."
"엄마한테 이야기해도 좋아. 난 만나볼 용의가 있으니까."
"정말?"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신선한 눈빛이었다.
"정말이야."
"만나서 뭐라고 그럴 거야?"
"따님을 사랑합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여대생은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러나 아까처럼 책을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남학생은 강인하게 생긴 턱을 멋쩍은 듯 쓰다듬고 나서 말했다.
"나 볼일 있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뭔데?"
"아르바이트 건이야."
"아르바이트 얻었어?"
"아냐, 가 봐야 알아. 하지만 기분이 될 것 같아."
"무슨 일인데?"
"이거야."
그는 신문을 탁자 위에 펴놓더니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학생은 얼굴을 숙이고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광고 기사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성실한 사람,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구합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학생이면 더욱 좋습니다. 보수는 후하게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연락처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려구?"
"응, 학비도 벌어야 하고 용돈도 궁해."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학비하고 용돈은 내가 어떻게 해볼게."
"대주겠다 이거야?"
"응, 내가 대줄게."
남자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붉어졌다.
"내가 병신인 줄 알아? 사지가 멀쩡하고 튼튼해. 얼마든지 학비도 벌 수 있어. 내가 왜 너한테 용돈을 타 쓰니? 부잣집 딸이라고 재는 거야?"
"오해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야. 나를 사랑한다면 이해할 수 있잖아?"
"사랑하고 그건 별개 문제야. 사랑한다고 해서 돈까지 타 쓰냐.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야.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나 여자한테서 돈을 타 쓰지. 그런 이야기는 앞으로 하지 마. 두 번 다시 하면 화낼 거다. 알았어?"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벅머리 대학생은 잠시 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아르바이트 대학생을 구한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 좋아요. 대학생인가요?"
상대는 여자였다.
"네, K대 3학년생입니다. 법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그럼 두 시간 후에 만나도록 해요. 지금 1시 10분이니까 3시 10분에 P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해요. 이력서를 지참해 주세요. 참, 이름이 뭐죠?"
"조민기(趙珉基)입니다."
이쪽에서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민기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가 나왔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만나죠?"
"만날 수 있어요."
전화가 다시 일방적으로 끊겼다.
민기는 밖으로 나가 이력서 용지를 사가지고 다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력서를 만드는 동안 그의 애인은 턱에 손을 괴고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민기와 오계화(吳桂花)는 3시 정각에 호텔 커피숍에 들어섰다. 커피도 마시지 않고 앉아 있는데 3시 10분이 되자 카운터 쪽에서 조민기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기는 급히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여종업원이 내미는 구내전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조민기 씨죠?"
"네, 그렇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오세요. 10층 15호실로 오세요."
"동행이 있는데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안 돼요."
단호한 말과 함께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10층으로 올라오래. 다녀올게 잠깐 기다려."
"함께 가면 안 돼!"
"안 돼, 혼자 올라오래."
따라오려는 애인을 제지하고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는 새삼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닳아빠진 청바지에 베이지색 점퍼, 헝클어진 머리와 면도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얼굴. 신선한 것이 있다면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빛뿐이었다.
그 눈은 신선하면서도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키는 큰 편이었다. 입고 있는 점퍼가 작아서 손목이 훤히 드러나고 지퍼를 잠글 수가 없다. 떡 벌어진 가슴팍을 감싸고 있는 흰 티셔츠가 찢어질 듯 팽팽하다.
15호실 앞에 이른 그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는 안으로 문을 밀었다.
여자가 한 사람 방 가운데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에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실례합니다."
민기는 고개를 꾸벅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여자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민기는 의자에 앉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여자도 마주앉았다.
여자를 보는 순간 그는 혼란을 느꼈다. 짙은 화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얼굴이 위장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살이나 된 여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차림새는 사치스러웠다. 아래위 흰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력서 좀 볼까요?"
민기는 이력서를 꺼내 여자 앞에 내밀었다. 여자는 자세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상이 없겠지요?"
"네, 사실입니다. 알아보십시오."
그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여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었다.
"댁이 부산인가요?"
"아닙니다. 산청입니다."
"그럼 부모님은?"
"산청에 계십니다.?"
"거기서 뭘 하시나요?"
"농사짓고 있습니다."
"농사는 몇 마지기나 되나요?"
"열한 마지기입니다."
"식구는?"
"우린 9남매입니다. 제가 셋째입니다."
"열한 마지기로 생활이 되나요?"
"안 됩니다."
"그럼 대학은 어떻게 다니나요?"
"제가 벌어서 다니고 있습니다. 헌데 요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쉽지 않습니다."
"하숙하고 있나요?"
"친구하고 둘이서 자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자는 다리를 꼬았다.
"법학과라면...... 고시 준비하고 있나요?"
"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겠군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아니, 나도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어요."
"가능하면 저를 써 주십시오. 지원자가 많겠지만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시간이야 관리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여자는 담배를 내밀었다.
"피우세요."
그녀가 먼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민기도 담배를 집어들었다.
"이건 좀 특수한 일이에요. 위험하기도 하고 비밀을 요하는 일이기도 해요. 할 수 있겠어요?"
"나쁜 일만 아니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보수는 충분히 드리겠어요."
"어떤 일인가요?"
"그건 채용 결정이 난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댁에 전화 있나요?"
"네, 주인집에 전화가 있습니다. "
"여기다 전화번호를 적어주세요. 내일 오전 중으로 연락을 드리겠어요. 연락이 없으면 채용이 안 된 걸로 아세요."
"내일 오전에는 학교 수업이 있어서 안 됩니다."
"몇 시까지 집에 돌아올 수 있나요?"
"2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럼 2시에 연락드리겠어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민기는 꾸벅 절하고 호텔방을 나왔다. 그는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피숍으로 돌아온 그는 커피를 시켰다.
"어떻게 됐어?"
계화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일 연락해 주겠대."
그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무슨 일이래?"
"아직 모르겠어."
"무슨 일인지도 모르단 말이야?"
"응, 채용이 결정되면 말해 주겠대."
그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그녀에게 자세히 면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호텔방으로 불러들이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어. 여자가 혼자서 남자를 호텔방으로 불러들이다니 아무래도 이상해. 몇 살이나 된 여자야?"
"글쎄...... 하여간 젊은 여자야."
"다른 데 알아봐. 내가 알아봐 줄게."
민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계화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수상하지 않아?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라는데 그런 일을 꼭 하려는 이유가 뭐야?"
"나쁜 일은 아니라고 했어. 그리고 보수도 충분하다고 했어. 사실 대학생들이 하는 아르바이트라는 건 따분하기 짝이 없어. 좀 특수하고 흥미가 있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는데 그렇지가 못하거든."
"그럼 특수하고 흥미가 있어서 이번 일을 맡으려는 거야?"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야."
"좀 이상해."
계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민기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상하지 않구. 남자들은 다 마찬가지야. 미녀 앞에서는 꼼짝을 못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가 발끈하자 그녀는 책을 집어들고 냉큼 일어섰다.
"나 갈 거야."
"가긴 어딜 가! 앉아!"
"싫어!"
"이게!"
그는 애인의 손목을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그녀도 지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놔아!"
그녀는 실내를 가로질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빠삐용'의 주제가가 높이 울려퍼졌다. 그는 씨근거리며 여자 뒤를 따라갔다.
백 미터쯤 따라가서야 그는 애인을 붙잡을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게 꽉 움켜잡았다.
"이거 놔아! 놓으란 말이야!"
"못 놓겠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여관 간판이 보였다. 그는 그쪽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거 놔! 사람들이 본단 말이야!"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잠자코 따라와."
그는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은 채 여관을 향해 뛰었다. 힘이 부친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그에게 끌려갔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안 돼! 따라와!"
마침내 여관 앞에 닿았다.
그녀는 버티다가 하는 수 없이 끌려 들어갔다.
일단 여관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그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방문을 닫아 걸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쾅쾅 쳤다.
"이럴 수가 있어! 미쳤어!"
그는 그녀가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아 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창피를 줄 수가 있어? 미워! 미워!"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친 듯이 그를 때렸다. 그러나 그는 얄밉도록 가슴을 쭉 편 채 도도하게 서 있었다. 그의 넓은 가슴은 마치 바윗덩이 같았다.
아무리 때려도 상대가 끄덕도 하지 않자 그녀는 손이 아팠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그가 움직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와락 안아 버렸다.
그녀는 더욱 흐느끼면서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미워...... 미워......."
"울지 마."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덮쳤다. 그녀는 도리질을 하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흐느낌이 사라지는 대신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단단히 부둥켜안고 침대 쪽으로 움직였다. 일단 침대에 이르자 그들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불타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벗어! 빨리!"
그는 재빨리 옷을 벗어던지며 재촉했다. 이쪽저쪽으로 옷가지가 날아갔다.
그것을 보고 있던 처녀가,
"벗겨 줘."
하고 말했다.
알몸이 된 그는 여자 앞에서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다.
그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위쪽은 내버려 두고 아래쪽에 먼저 손을 가져갔다. 여자가 위에서 그의 하는 짓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청바지의 단추를 풀었다. 하체가 풍만하게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바지는 찢어질 듯 팽팽했다. 지퍼를 내린 다음 바지와 스타킹과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어머나, 이렇게 무례할 수가......."
그녀가 당황해하며 다리를 오므리자 그는 그녀의 배에다 얼굴을 묻었다.
그 다음 행위는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미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었다. 이들은 좀더 높은 쾌감을 얻기 위해 서로 협조하고 노력했다.
마침내 그가 땀투성이의 몸을 옆으로 눕자 그녀는 어린아이를 들여다보듯 그를 내려다보면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럴 때는 입장이 뒤바뀌는 것이다. 남자는 위축되고 여자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아르바이트 문제로 다투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2시 조민기는 그 이상한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채용됐으니 나와 달라는 연락이었다.
3시 정각에 그는 서면에 위치한 어느 고급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 구석진 방의 문을 열자 거기에 그 여자가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의 얼굴에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소가 스쳐갔다.
"실례합니다."
앉자마자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진홍의 루즈로 그려진 입술이 선그라스와 대조되어 더욱 육감적으로 보였다.
"일해 보겠어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선 식사나 들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천천히 말하겠어요. 술 한 잔 하겠어요?"
"네, 맥주 한 잔 하죠."
그는 그렇게 맛있는 중국 요리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요리가 나올 때마다 굶주린 듯 먹어치웠다. 그것을 그녀는 귀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고학하기 힘들지 않아요?"
"힘듭니다 일거리만 많으면 별 문제가 아닌데, 그렇지가 않으니까 힘듭니다. 대학생을 위해 일자리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데 반해 그녀는 거의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가 거의 배를 채우고 났을 때에야 그녀는 문제에 접근했다.
"솔직히 이야기해 봐요. 어제 나를 만났을 때 무엇을 느꼈나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술잔을 집어들었다.
"어떤 점이 이상했나요?"
"호텔방에서 남자도 아닌 여자가 혼자서 낯선 지원자들을 만나 본다든가,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위장하고 있다든가, 일 내용을 분명히 알려주지 않은 점, 그리고 비밀스런 분위기 등이 이상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어제 우리가 만난 일을 누구한테 이야기했나요?"
"네, 했습니다. 여자 친구한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가 그런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우리는 다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애인인가요?"
"네, 뭐 그런 셈입니다."
그녀는 멋지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앞으로 누구한테도 우리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하지 말아요. 누구한테도 해서는 안 돼요. 아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입을 열어서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비밀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여자가 선글라스 너머로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것을 알자 그는 가슴이 싸늘해져 왔다.
"그리고 두번째...... 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나에 대해 단 하나라도 알아내려고 하지 말아줘요. 그건 아주 질색이니까. 알았어요?"
"네네, 알았습니다. 하지만 존함만이라도......."
"본명은 말할 수 없어요. 아가다로 불러 주세요."
"세례명인가요?"
"아무렇게나 생각하세요."
"실례지만 결혼을 하셨나요?"
그의 당돌한 질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 난 유부녀예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 용건을 말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민기는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조사해 주세요."
아가다는 메모 쪽지를 대학생 앞에 내밀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475-3662. 양동팔'
조민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메모 쪽지를 보다가,
"이게 뭐죠?"
하고 물었다.
"적힌 대로예요. 양동팔이란 사람에 대해 조사해 주세요. 알고 있는 건 전화번호뿐이에요."
대학생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누구를 조사하는 일일 줄이야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침묵이 흐른 다음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몰라요. 아는 거라곤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에요. 이름도 가짜일지 몰라요. 주소도, 얼굴도, 직업도......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꼭 찾아내서 신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해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알아내야 해요."
"전화로 알아보면 될 거 아닙니까?"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전화를 걸어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이라면 구태여 사람을 구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건 그런 식으로 알아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상대방이 모르게 은밀히 조사를 해야 해요. 만일 상대방이 알게 되면 해를 끼칠지도 몰라요."
"그래서 위험한 일이라고 했나요?"
"네, 그래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상대는 악당인가요?"
"그건 아직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조사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찾게 되면 제일 먼저 알아내야 할 일이 있어요. 바로 이거예요."
그녀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 새끼손가락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먼저 알아봐 주세요. 만일 새끼 손가락이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 주세요. 샅샅이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기한을 정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기한을 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빠를수록 좋아요. 가능한 한 빨리 알아봐 주세요."
"보수는 얼마 주시겠습니까?"
"한 달에 2백만원 드리겠어요."
"2백만원이나......?"
그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의 놀라움은 차츰 의혹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2백만원이라니...... 너무 많아서 그럽니다."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위험 부담까지 감안해서 그 정도 드리는 거예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필요한 경비는 별도예요. 경비에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대로 쓰세요."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종이에 싼 돈 뭉치를 꺼내 민기 앞에 내놓았다.
"3백만원이에요. 한 달치 월급 먼저 드리는 거예요. 나머지는 경비예요. 경비를 착복하지는 않겠지요?"
"그, 그럼요. 지출명세서를 작성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완전히 당황해서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학생을 믿고 채용한 것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는 3백만원 뭉치를 두려운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만날 일이 거의 없을 거예요. 모든 일은 전화로 처리하도록 해요. 이게 제 전화번호예요."
아가다는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 쪽지를 민기에게 건네주었다.
"외운 다음 없애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거 보관하세요."
그녀는 열쇠 하나를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아파트 열쇠예요. 학생이 기거할 아파트를 하나 빌렸어요."
"아니, 왜?"
그는 두번째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필요해서 얻은 거예요. 아파트로 이사하도록 하세요. 전화도 있으니까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함께 있는 친구를 데려가도 좋습니까?"
"안 돼요. 혼자 있어야 해요. 옆에서 통화를 엿들으면 안 되니까요. 안전을 위해 그러는 거예요."
"이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로서는 정말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꿈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흡사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지......."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물었다.
"그런 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파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D동에 있는 S아파트예요. S아파트 202동 803호예요. 학생 이름으로 얻었는데 월세로 얻었으니까 그렇게 알도록 해요. 월세는 물론 경비로 지출하도록 하세요. 한 달치 선불했어요. 보증금이 없는 대신 비싸요. 월 50만원이에요. 그리고 이것도 보관하세요."
그녀는 통장과 도장을 꺼내 놓았다.
"학생 이름으로 온라인 통장을 하나 만들었어요. 앞으로 돈은 이 구좌에다 넣어드리겠어요. 그렇게 하면 일일이 만날 필요가 없겠지요. 괜찮겠지요?"
"네네, 좋습니다."
그는 여자의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차가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큰 돈을 들이면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아마 굉장히 돈이 많은 여자인 모양이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통장을 집어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장을 들여다보았다. '조민기'라고 새겨져 있었다.
"만일 알아내는 데 실패하면 어떡합니까?"
"난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성공하리라고 믿어요."
"열심히 해보겠어요."
아가다와 헤어져 중국집을 나설 때 그는 비로소 온몸이 땀에 젖어 있음을 알았다.
택시가 그 앞에 와서 멎었다.
그는 택시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D동 S아파트로 갑시다."
그곳은 도심에서 15분 거리밖에 안 되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수백 세대가 살고 있는 제법 큰 단지였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202동을 찾았다.
202동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202동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원이 그를 제지했다.
"어디 가십니까?"
"803호에 새로 이사왔습니다."
그는 열쇠를 꺼내 보였다. 그때까지도 그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 네, 알겠습니다. 누님이 계약하고 가셨죠!"
"네, 누님이 얻어준 겁니다."
그는 능청을 떨었다.
"짐은 안 가지고 오셨나요?"
"있다가 저녁때 가져올 겁니다. 학생이 책밖에 짐이 있나요?"
경비원은 웃으며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이 고개를 꾸벅해 보였다.
민기는 가슴을 펴고 202동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803호 앞에 섰다.
그는 숫자를 두 번 세 번 확인한 다음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낯선 사람이 나타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참을 눌러도 안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가 딱 들어맞았다. 왼쪽으로 살그머니 돌려 보았다. 찰칵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안으로 들어서기가 두려워서 입구에 서서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대답이 없자 그는 문을 닫고 구두를 벗었다.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먼지만 뿌옇게 쌓여 있었다.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은 모두 두 개였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것 같았다. 욕실도 열어보고 부엌에도 가보았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가 설치되어 있어서 자취하기에는 아주 편리할 것 같았다. 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무 황홀해서 어쩔 줄 몰랐다. 가스를 틀어보았다.
파아란 가스불이 쉬이 소리를 내면서 올라왔다.
이번에는 수도꼭지를 틀어보았다. 수도물이 세차게 쏟아져 나왔다.
"근사한데...... 정말 근사한데...... 흐흐흐......."
그는 허리를 뒤틀면서 웃었다.
그때 때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다가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때르릉 때르릉.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전화는 거실 장식장 속에 들어 있었다.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는 수화기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다.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조민기 씨?"
"네, 그런데요?"
"아가다예요. 거기 갔을 것 같아서 전화해 본 거예요."
"아, 난 또 누구시라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파트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혼자 지내기에 너무 넓습니다."
"가스불 잘 나와요?"
"네, 잘 나옵니다. 수돗물도 잘 나옵니다."
"그럼 수고해요."
그전처럼 여자는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민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여자다. 수수께끼 같은 여자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런 짓을 할까. 그리고 왜 이런 짓을 할까. 이게 분명 꿈은 아니겠지. 혹시 내가 나쁜 일에 말려드는 건 아니겠지.
강렬한 호기심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을 물리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니, 늦은 게 아니라 그 스스로가 거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인 그는 도시의 아파트를 볼 때마다 항상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언제나 저런 곳에서 살아볼까. 그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는 신기한 듯 아파트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곤 했다.
그날 저녁 그는 가난한 자취방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와 함께 자취하던 절친한 친구인 신승우(辛勝宇)는 몹시도 섭섭한 눈치였다.
갑자기 혼자 빠져나가니 섭섭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욱이 짐을 날라다 주기 위해 아파트까지 따라온 그는 좀처럼 굳어진 표정을 풀려고 하지를 않았다. 계화도 아파트를 보고는 안색이 확 변했다.
민기는 그들을 보기가 민망했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 그들의 눈치만 살피다가 이렇게 변명했다.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아파트를 얻었겠어? 나를 고용한 여자가 얻어준 거야.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얻어준 거라구."
그 말에 계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흥, 아무래도 이상해. 여자가 아파트까지 얻어주고...... 정말 행복하겠어. 그 여자가 단단히 반한 모양이지."
"그게 아니야. 오해하지 마. 이건 순전히 비즈니스야. 다른 의도는 없어."
"이상한 비즈니스도 다 있다."
계화는 그의 말을 믿으려고 들지 않았다.
민기는 계화의 오해도 오해지만 친구를 납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했다. 친한 친구라면 당연히 넓은 아파트에 함께 있자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가다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아가다는 그에게 반드시 아파트를 혼자서 사용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건 내 아파트가 아니야.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야. 내 마음 같아서는 승우 너랑 함께 사용하고 싶지만 주인의 지시도 있고 해서 그럴 수가 없어. 이해해 줘."
"난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 지내. 그전부터 넌 아파트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으니까."
"더 이상 뭐라고 변명하지 못하겠어.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르바이트니까 그렇게 알아주면 고맙겠어."
"잘해 봐. 헌데 보수는 얼마지?"
민기는 그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에 2백만원이야."
하고 말했다.
"뭐? 2백만원? 정말이야?"
승우가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이야."
민기는 짐짓 점잖게 대답했다. 계화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어색하던 분위기는 일신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데......."
"이 아파트가 그걸 말해 주고 있지 않아? 내가 오늘 한턱 내겠어. 한 달치 월급을 오늘 미리 받았어."
"더구나 미리 받아?"
가난한 대학생은 마침내 입이 딱 벌어졌다.
민기는 뛰어나가더니 술과 안주를 잔뜩 사가지고 들어왔다.
"자, 오늘밤은 실컷 취해 보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는 일이야."
그는 친구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계화도 얼떨결에 술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가 그런 아르바이트가 있어? 2백만원씩이나 주는 아르바이트가 어딨어?"
승우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몸집도 작고 눈도 작았다.
"나도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야."
민기는 기분 좋게 맥주를 쭉 들이켰다.
"아무래도 이상해."
계화는 곁눈질로 그를 흘기면서 말했다.
"혹시 살인 청부업 같은 거 아니야?"
민기는 다그치는 물음에 웃음을 터트렸다. 승우와 계화는 웃지 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음날부터 조민기는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먼저 부산 시내 전화번호부에서 양동팔이란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런 이름은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본 다음 그는 475국을 관할하는 전화국을 찾아갔다. 마침 점심 때라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는 전화국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다가 젊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뭣 좀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직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전화번호 주소를 알려고 왔는데요."
민기는 긴장해서 말했다. 그러나 상대는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번호 주소를 찾으려고 왔는데요. 실례합니다만......."
"그건 알 수 없어요."
직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민기는 기다렸다가 그 직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 말을 걸었다.
"왜 알 수가 없나요?"
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피곤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런 거 일일이 다 응하다가는 우리 일 못합니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일까지 합니까?"
직원은 옆의 동료에게 식사하러 가자고 말했다.
"그래도 요청이 있으면 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무 규정은 없어요. 그건 사적인 일이란 말입니다."
민기가 다시 말을 붙이기 전에 그들은 저쪽으로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직원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기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그는 밖에서 적당한 사람을 물색했다.
10분쯤 기다리고 있자 적당한 사람이 안에서 나왔다.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었는데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나서 몹시 고민일 것 같은 처녀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행도 없이 혼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싸구려 음식을 파는 조그만 식당이었다. 그녀는 라면을 시켰다. 민기도 라면을 주문했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빈 자리가 그곳뿐이었기 때문에 민기는 자연스럽게 그녀 맞은편에 자리잡을 수가 있었다.
여직원은 가능한 한 남들에게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전화국에 계십니까?"
식사가 나오기 전에 민기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여자는 약간 놀란 듯 그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반응이 호의적임을 알고 그는 일차 관문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라면이 나왔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라면을 들여다보았다.
"전화국 사람들 불친절하더군요."
이 한마디는 당장 효과를 불러왔다.
여직원은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올리다 말고 얼굴을 쳐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민기는 대답 대신 라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선량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다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좀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러는지......."
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별일도 아니에요. 뭐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 어떻게나 쌀쌀하게 굴던지 말 걸기가 두려워 혼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주소를 알아보려고 왔어요. 전화번호는 있는데 주소를 몰라서 그러거든요."
"전화를 걸어 보시지요."
"그럴 수가 없으니까 전화국까지 온 겁니다. 걸 수 있으면야 벌써 걸었지요."
"일이 많다 보니까 본의아니게 불친절할 수가 있어요. 친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잘 지켜지지가 않아요."
여자는 두둔하는 조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난 아주 중요한 일이란 말입니다."
"학생인가요?"
그녀의 눈이 탁자 위에 놓인 책들 위에 잠시 머물렀다.
"네, B대학 법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호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주소를 알려고 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은 알려주게 되어 있지 않아요."
"은행 비밀 구좌도 아닌데 왜 그러나요?"
"우리는 가입자 편이지 그 반대편이 아니거든요. 주소를 가르쳐 줌으로써 가입자에게 간접적으로 피해를 줄 수도 있거든요."
그 말에 민기는 가슴이 뜨끔했다. 전화국에서 일하는 아가씨라고 우습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아주 조리정연했다.
"그래서 가입자의 요청이 있으면 전화번호부에 등재하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도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신경이 쓰이는지 매우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민기는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포기하는 게 좋을까요?"
그녀는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웃었다.
"꼭 알아야 하나요?"
"네, 누님!"
누님이라는 말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방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여직원의 가슴에 붙어 있는 명찰을 눈여겨봐 두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영순(崔永順)이었다.
그에게서 커피를 한 잔 얻어마신 최영순은 그가 써준 메모지를 들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민기는 30분쯤 앉아 있다가 전화국으로 전화를 걸어 최영순을 찾았다. 최영순은 말했다.
"찾아냈어요. 그런데 전화 주인은 양동팔 씨가 아닌데요."
"그럼 누굽니까?"
"김영치(金英治) 씨라고 되어 있는데요."
"좋습니다. 주소를 불러 주십시오."
주소와 이름을 적고 나서 그녀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그는 다방을 뛰어나왔다.
그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 두 시간 수업을 마친 다음 주소를 찾아나섰다. 그 주소지는 가장 번화가인 J동이었다.
그는 먼저 복덕방을 찾아갔다.
복덕방 노인은 대강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주소를 정확히 찾을 수가 없었다.
땀을 흘리며 길가를 헤매다가 그는 마침 우편 집배원을 만났다. 그는 무턱대고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십니다. 이 주소를 찾는데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데요."
그가 내민 메모지를 들여다본 집배원은 그에게 따라오라고 일렀다. 집배원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5분쯤 따라 걷는데 집배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저만큼 서 있는 5층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저겁니다. 저 누런 건물......."
"감사합니다."
집배원은 끄덕하면서 모퉁이로 돌아가 버렸다.
민기는 망연히 그 빌딩을 바라보았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그것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 같았다.
길을 건너 정문 앞으로 다가섰다. 입구에 수위실이 있었다.
출입구 오른쪽에 '中和빌딩'이라고 새긴 동판이 붙어 있었다.
"중화 빌딩이라......."
그는 중얼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 건물 지하에는 다방이 차려져 있었다. 다방 출입구는 정문 옆으로 나 있었다.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다방은 꽤 넓었다. 그리고 손님들도 많았다. 그는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레지가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레지였다.
"커피."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에는 매력이 있었다.
"혼자세요?"
"아니, 아가씨 것하고 두 잔."
레지는 자기 몫으로 밀크를 가지고 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레지였다.
"대학생인가 보지요?"
"네, 흔해 빠진 대학생입니다."
레지는 즐거운 듯 웃었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다리가 아파 쉬다 가려고 들어왔지요."
"종종 오세요."
"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레지는 아까보다 더 즐겁게 웃었다.
"이 빌딩에는 무슨 회사가 들어 있나요?"
"회사가 어디 한둘인가요 뭐."
"여러 회사가 들어 있나요?"
"사장님만 해서 열 명이 넘어요."
"그래요? 하긴 요새는 사장님도 많으니까 이상할 건 없지요."
"이젠 사장님 소리 듣기만 해도 역겨워요."
"이 빌딩 사람들은 다 여기서 차를 시켜 마시겠군요."
"거의 그래요. 차 시키는 건 좋지만 정말 배달 가기 싫어요."
"왜요?"
"차 한 잔 팔아주면서 온갖 잡소리며 수작 다 한다구요. 자기 마누라한테도 그렇게 못 할 거예요. 아주 더럽다구요."
"다 그럴라구요."
"남자는 다 마찬가지예요.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지만 일단 껍질을 벗으면 다 마찬가지예요."
"난 그렇지 않아요."
"학생이 그러면 쓰겠어요."
레지는 귀여운 듯이 그를 쳐다보고 나서 빈 찻잔들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민기는 반 시간쯤 더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는 출입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왼손을 주시하면서 부지런히 머리를 움직였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방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은 다음 일어섰다.
밖으로 나와 둘레둘레 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공중전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방금 들렀던 다방에다 전화를 걸었다.
"백조 다방입니까?"
"네, 그렇습니다아."
능청스런 여인의 목소리가 엿가락처럼 뽑아져 나왔다.
"거기 혹시 손님 중에 김영치 씨 안 계신가요?"
"누구요?"
"김영치 씨요."
"그런 분 없어요."
알아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민기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알아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자 매몰찬 응답이 돌아왔다.
"없으니까 없다고 하죠."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이거 보세요. 김영치 씨는 요새 여기 안 나와요."
"안 나온 지 오래 됩니까?"
"꽤 됐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그는 박스에서 나와 한참 동안 길가에 서 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백조 다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혹시 거기 양동팔 씨 계십니까?"
"손님 찾으세요?"
"네, 그래요."
"누구라고 그랬죠?"
"양동팔......."
"기다려 보세요."
양동팔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후 다방 여자는,
"그런 분 없어요."
하고 말했다.
민기는 풀이 죽어 박스에서 나왔다.
김영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다방에서도 알고 있는 것 같다. 단골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안 나온다고 했다.
양동팔에 대해서는 다방 쪽에서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잘 알고 있는 사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파트로 돌아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책가방을 들고 다시 백조 다방으로 나갔다. 낮에 얼굴을 익혀 둔 레지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혼자 오셨네."
"누님 보고 싶어서요."
그의 능청에 레지는 기분이 좋은지 호감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 몇 살이에요?"
"스물둘입니다. 누님은......?"
"스물다섯......."
그녀는 스물다섯은 더 되어 보였다.
그들은 비로소 통성명했다. 민기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밝혔고 레지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자기를 미스 장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를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붙임성 있게 구는 젊은 대학생이 귀여운지 눈을 반짝이면서 그를 쳐다보았고, 틈만 나면 그의 자리에 와서 그를 상대해 주었다.
한 시간 남짓 다방에 앉아 있는 동안 민기는 김영치나 양동팔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고 그녀의 호감을 사는 데만 주력했다.
다방을 나올 때 그는 일부러 미스 장에게 책가방을 맡겼다.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맡겼는데, 그것은 일종의 신뢰의 표시로서 아주 적절한 제스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는 그 책가방을 찾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10시쯤에야 다방에 나타나서 가방을 달라고 말했다. 미스장은 주방 뒤에 있는 방에서 가방을 꺼내 가지고 오면서,
"학생이 책가방을 안 가지고 가면 어떡해요."
하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어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그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일부러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그녀는 누나처럼 말했다.
"네, 알았습니다."
그는 김영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는 미스 장에게 저녁을 대접했는데, 그때에도 딴전만 부렸다. 어떤 목적을 위해 접근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식사 후 그들은 송도로 나갔다.
민기는 그녀를 회집의 조용한 방으로 이끌었다. 거기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그녀의 신세 타령을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술을 꽤나 마신 그녀는 끝내 그의 품에 쓰러지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는 흐느끼는 그녀의 입에 뜨겁게 입맞춤했다.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눈 딱 감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들어가지 않겠다는 그녀를 가까스로 바래다 주고 나니 자정이 훨씬 지나 있었다.
다음날 그는 손님이 거의 없는 밤 늦은 시간에 다방에 갔다. 그를 바라보는 미스 장의 눈빛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갈구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참, 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민기는 마침내 목적한 바를 넌지시 꺼내 놓았다.
"뭔데?"
"김영치라는 분 여기 단골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을 알지?"
"좀 알아요. 같은 고향 사람이거든요."
"아, 그래? 그 사람 아주 깍쟁이야."
"잘은 모르지만 좀 그런 면이 있지요."
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생긴 것대로 놀아요. 생긴 것도 깍쟁이처럼 생겼어요."
"그 분하고 잘못 사귀었군요."
"그 사람하고 친해요?"
"아아뇨.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럼 안심이라는 듯 그녀는 김영치라는 인물에 대해 잔뜩 험담을 늘어놓았다. 민기는 그녀가 마음대로 지껄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김영치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김영치는 중화 빌딩 3층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 무슨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아 두 달 전에 집어치웠다는 거였다. 다방에 출입할 당시 그는 나이 어린 레지를 건드려 임신시켜 놓고 단돈 30만원에 그녀를 떼어놓았다고 하면서 미스 장은 몹시 분개해 했다.
민기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요새는 여기 통 안 오나요?"
"코빼기도 못 보겠어. 안 오니까 차라리 좋아요."
"저기......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는지 혹시 알아요?"
"몰라요."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좀 알 수 없을까요? 연락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슨 연락할 일이 있는데 그래요?"
"그럴 일이 있어요."
그녀는 선뜻 가능성을 비치려 들지를 않았다. 조금은 의아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민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요새는 통 못 보겠어."
"누님이 좀 알아주세요. 사실은 돈을 좀 받을 게 있어서 그래요."
"얼마나?"
"좀 많아요. 3백만원쯤 돼요."
그녀의 눈이 확대되었다.
"아니, 언제 빌려준 건데 그래?"
"제가 직접 빌려준 게 아니에요. 시골에 계신 형님이 작년에 빌려주신 건데 그걸 받지 못하고 형님이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저야 나중에 형수님한테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았지요. 형님이 돌아가시니까 그 사람이 영 돈을 갚을 생각을 안 하나 봐요. 형수님을 만만하게 본 거지요. 그런데 돈 빌려준 영수증 하나 받아놓지 않았나 봐요. 그러니 법에다 호소할 수도 없고 그 사람 양심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시골에서 3백만원이면 큰돈 아닙니까?"
"큰돈이지. 자기가 받을 수 있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내야죠. 형수님은 자기는 이미 포기했으니까 저보고 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학비에 보태 쓰라는 거예요."
"참 나쁜 사람이다. 사기꾼 아니야!"
"뭐 그럴라구요. 사업이 실패하고 해서 본의아니게 그렇게 됐겠지요."
"내 알아봐 줄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여기 자주 오니까."
"누군데요?"
"아마 모를 거야. 구일남이라고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김영치 씨 친구분 중에 혹시 양동팔이라는 사람 모르시나요?"
"양동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민기는 긴장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양동팔이란 사람입니다."
"모르겠는데......."
"그런 이름 듣지도 못했나요?"
"못 들었어요."
"하여간 김영치 씨 연락처 좀 알아봐 주세요.
"그래, 내 알아볼게."
그녀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절대 제가 찾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눈치를 채면 틀림없이 행방을 감추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알았어. 내가 요령껏 알아볼 테니까 그건 염려하지 말아요."
민기는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녀와 헤어질 때 그는 준비해 온 것을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께 드리려고 선물 하나를 사 왔지요. 별 것 아니니까 받아주세요."
포장을 풀어본 미스 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랍게도 그것은 금목걸이였다. 지금까지 그런 선물을 받아보지 못한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다 샀지?"
"누님한테 그런 거 선물할 돈은 있습니다.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고마워."
그녀는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민기는 아가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가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피곤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는 상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듣고 난 그녀는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가 미스 장에게 본명과 학교 이름을 사실대로 댄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라고 지시했다. 민기는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 때 그는 계화와 다투고 나서 백조 다방으로 갔다. 미스 장은 그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수필집 한 권을 선물하고 나왔다.
다음날 오후 2시 조금 지나 그는 백조 다방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스 장이 다가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김영치 씨와 통화했어요. 저녁에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괜찮지?"
"어떻게 알아냈어요?"
"그 사람 친구인 구일남이란 사람이 마침 왔기에 연락처를 알아냈어요. 그래서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봤지. 보고 싶은데 요새 왜 안 오느냐고 했더니 자기도 나를 보고 싶다나. 자기를 위해서 데이트 약속을 한 거라고."
"고맙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콜라를 대접했다. 그녀가 콜라를 비우고 났을 때 그는 불쑥 메모지를 꺼내 놓았다.
"혹시 이 빌딩 안에 이런 전화번호 있어요?"
그녀는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475-3662'라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메모지를 들고 카운터로 가더니 잠시 후 돌아왔다.
"이 빌딩에는 없어요."
"김영치 씨 뭘 하고 있대요?"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나봐."
8시 5분 전.
조민기는 김영치와 미스 장이 만나기로 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스 장이 구석진 곳에 혼자 앉아 있다가 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민기는 그녀의 뒤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8시 10분이 되자 뚱뚱한 중년 사내 하나가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미스 장을 발견하고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민기는 그 사내의 얼굴을 정면에서 관찰할 수가 있었다. 머리숱이 적고 얼굴빛이 검은, 탐욕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한껏 멋을 부린 정장 차림이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치기스러워 보였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스 장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 후 그들은 일어섰다. 민기도 일어섰다.
그들은 부근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미스 장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뒤를 한 번 쳐다보았다. 민기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부근의 그늘진 곳에서 어슬렁거렸다.
담배를 네 대 피우고 났을 때 그들이 식당에서 나왔다. 민기는 쇼윈도를 기웃거렸다. 그들이 그의 등 뒤로 지나갔다. 그는 몸을 돌려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쯤 가다가 그들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민기도 조심스럽게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여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여관 앞에 멈춰섰다. 남자가 미스 장을 여관으로 잡아끌었다. 미스 장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두 개의 그림자가 한동안 뒤엉켜 돌아갔다. 남자의 손에서 풀려난 여자는 골목 저쪽으로 뛰어갔다. 사내는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쌍년!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거 저축하면 이자 나온다냐."
사내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욕설을 퍼붓다가 골목 중간쯤에 있는 포장마차 집으로 들어갔다.
민기는 망설이다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몇 명 있었다.
김씨 옆에 가만히 자리잡았다. 김씨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차림새가 막노동자들 같았다. 민기는 소주를 시켰다. 김씨도 소주를 앞에 놓고 있었다. 민기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술을 들이켰다.
"무슨 고민이 있소?"
김씨가 마침내 걸려들어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민기는 상대를 보지 않고 말했다.
"학생이오?"
김씨가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네......."
"고민이 있으면 술을 마셔요, 술을...... 자, 한 잔 마셔요."
술잔이 디밀어졌다.
"감사합니다."
민기는 술잔을 받았다. 얼른 들이키고 상대에게 건넸다. 그리고 술을 따랐다.
"우리 피차 같은 입장인가 보군. 지금 몇 살이오?"
"스물셋입니다."
그는 김씨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살폈다. 손가락은 모두 정상이었다.
"스물셋이라... 좋은 때군. 내가 스물세 살 때는......."
술잔이 다시 돌아왔다. 민기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얼른 마시고 잔을 도로 건넸다. 잔이 부지런히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이봐, 학생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좋았어. 대학생은 인생의 황금기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연애도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라고. 우리는 이제 늙어서 다 틀렸어. 젊은 대학생들을 보면 난 부러워서 죽겠어. 청춘의 큰 뜻을 품으라구. 큰 뜻을 품어서 남 주나. 큰 뜻을 품으라구.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인생이란 이래도 한 세상이고 저래도 한 세상이야. 그러니 째째하게 살지 말란 말이야. 크게-크게 살란 말이야. 알았어?"
"네, 알았습니다."
"이름이 뭐지?"
"양인석입니다."
"음, 양가군. 장래 커서 뭐가 될 거야?"
"글쎄, 뭐 계획이 없습니다."
김씨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이거 뭐 이래. 이제 보니까 형편없군 그래. 장래 계획이 없다니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원대한 이상을 품으란 말이야. 하다 못해 한국 최고의 플레이 보이가 된다든가 아니면 최고의 거지가 된다든가, 하여간 최고가 돼라 이거야.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김영치는 점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혀까지 꼬부라져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조민기도 크게 취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밖으로 나와 골목에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버렸다. 일부러 목구멍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토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에서 얼른 깨어날 수 있었다.
"실례지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글쎄...... 사업하시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모르는 게 좋아. 나는 비밀을 좋아해."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좋지, 좋아."
"전화번호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전화?"
김씨는 민기가 내민 수첩에다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우리 집이야."
"감사합니다."
그 전화번호는 문제의 전화번호와는 달랐다.
"같은 값이면 직장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건 곤란해."
사내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사실은...... 난 사업에 실패해서 놀고 있지. 그래서 사무실 전화번호가 없다구. 조금 있으면 사업을 다시 시작할 거니까 그때 가서 봐. 전화가 세 대나 있었는데 말이야."
민기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전화는 모두 어떻게 했습니까?"
"그런 건 알아서 뭘 해?"
"그냥 물어본 겁니다."
"전화는 모두 세놓았지. 나중에 사업 시작하면 다시 찾아 쓰려구."
"전화를 세놓을 수도 있나요?"
"있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그게 어디 통하나."
"사실은 저희 집에도 전화가 두 대나 있는데 하나를 처분하려고 하거든요. 팔 것이 아니라 나중의 일을 생각해서 세를 놓는 게 좋겠군요."
"그래, 그게 좋아."
"어떻게 하면 세를 놓을 수 있나요?"
"전화상에다 내놓으면 거기서 다 알아서 해줘."
"아, 그렇군요."
"아주 간단해."
"부근 전화상에다 내놓아야지요?"
"물론 그렇지."
그들이 포장마차집을 나선 것은 11시가 거의 가까워서였다. 민기는 비틀거리는 김씨를 택시에 태워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김씨 집은 변두리의 흔한 양옥집이었다.
집에 들어왔다 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그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샤워를 끝내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나, 아가다예요."
"아, 네......."
"수확이 있었어요?"
"김씨를 찾아내서 접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정상이었습니다. 그는 양동팔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자택 전화번호도 알아냈는데 양동팔의 전화번호하고 틀립니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는데 사업할 때 전화가 모두 세 대가 있었답니다. 그 전화를 모두 세를 줬는데 그 중 하나가 양동팔의 전화번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양동팔이 그 사람 전화를 세로 빌렸다는 말인가요?"
"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전화상을 뒤질 생각입니다. 전화상을 통해서 김씨가 전화를 세놓았을 가능성이 크니까."
"눈치채지 않게 조심스럽게 조사하세요. 이제부터는 여러 사람들 앞에 그 전화번호를 내보이게 될 거니까."
아가다는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조심하겠습니다. 김씨한테 대놓고 물어보면 간단하겠지만."
"그건 안 돼요......."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김씨라는 사람도 한 패일지 모르니까 그건 안 돼요!"
"네, 저도 그 점을 생각해서 직접 대놓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한 패라면 전화를 세놓지 않았을 거고 한 패가 아니면 전화를 세놓았겠지요."
아가다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조민기는 오전 수업을 끝내고 전화상이 몰려 있는 곳을 나갔다. 475국을 취급하는 전화상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그는 전화상에 찾아 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느닷없이 전화상에 들어가 전화번호를 내보이면서 이런 전화를 부탁받고 누구한테 세놓은 적이 없느냐고 하면 과연 제대로 대답해 줄 사람이 있을까. 장부까지 뒤져 보면서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귀찮고 수상쩍게 생각한 나머지 쫓아낼 것이 뻔하다.
궁리 끝에 그는 사람을 하나 사기로 했다. 전화상끼리는 잘 통할 테니까 그쪽 사람을 하나 매수하기로 했다.
전화상을 돌다가 한 시간만에 젊고 약아 보이는 사람 하나를 골랐다. 조그만 키에 두 눈이 쥐새끼처럼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서른두셋 정도 되어 보였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갑게 맞는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하자 요새는 불경기라고 머리를 내흔든다. 가게에는 종업원이 한 명 딸려 있었다.
잠시 후 민기는 가게 주인을 데리고 나와 옆에 있는 인삼 찻집으로 들어갔다. 비싼 차를 시킨 다음 머뭇거리자 작은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바쁜데 빨리 말씀하시죠. 부탁할 일이란 게 뭔가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네, 다름이 아니고 어떤 전화번호의 주인을 찾는 일입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닙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물론 터무니없는 걸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거래된 전화에 대해서는 알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장부에 적어놓았을 테니까요."
"그건 가능하지요."
"다른 가게의 장부까지도 조사해 달라는 겁니다. 만일 댁의 가게에서 거래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남의 가게 장부를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그는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내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장부는 함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전화상은 차를 후루루 마시고 나더니 일어서려고 했다.
"그건 곤란해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시오."
민기는 봉투를 꺼내 놓았다.
"10만원입니다. 알아내 주시면 10만원을 더 드리겠습니다."
상대는 뒤로 상체를 젖혔다.
"어디 봅시다. 몇 번인지......."
민기는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내주었다. 상대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직접 전화를 걸어보면 될 거 아닙니까?"
"그건 안 됩니다."
민기는 펄쩍 뛰었다.
"전화를 걸어서 알아낼 수 있는 일이면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상대방이 모르게 해야 하니까 이러는 거지요."
상대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마지못하는 체하면서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 대신 단서를 붙이기를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찾지 못하더라도 돈을 돌려줄 수 없다는 거였다. 거기에 대해서는 민기도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좋다고 했다.
다음날 저녁 때 연락하기로 하고 그들은 헤어졌다.
이튿날 민기는 하오 5시께 전화상에 전화를 걸었다.
"이거 때문에 일도 못 하고...... 빨리 오시오."
"알아냈나요?"
민기는 흥분해서 물었다.
"10만원 가지고 오시오."
민기는 전화상을 만나 잔금 10만원을 지불했다. 전화상은 알아내느라고 몹시 애먹었다는 말을 잊지 않고 한 다음 몇 자 적은 종이 쪽지를 꺼내놓았다.
"이 전화는 김영치라는 사람이 명진 전화상에 세를 놓아 달라고 맡겼었는데 두어 달 전에 한애자라는 여자가 가져갔어요. 주소는 이거예요."
그는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그 여자는 뭐하는 사람인가요?"
"그거야 알 수 없지요."
그 길로 민기는 한애자라는 여자의 주소지를 찾아나섰다. 한애자의 주소지는 고급 주택가의 복판이었다. 찾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 집 앞에 섰을 때 민기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한마디로 그 집은 호화 저택이었다. 드넓은 정원에는 수목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수목 사이로 보이는 2층 벽돌집은 지는 해를 받아 유난히도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담 위에는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에 감시용 카메라까지 부착되어 있었다. 안에서는 사나운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외부의 침입을 무섭게 경계하는 집임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대문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은 대문은 굵은 목판으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대문 옆에는 일상 통용문으로 보이는 작은 문도 하나 달려 있었다. 문패는 없었다.
그래서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쯤 왔다갔다하면서 살폈지만 출입하는 사람도 없었고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고급 주택가라 주위에는 밥 한 그릇 사먹을 데도 없었다. 거리로 나가 저녁을 먹고 나자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그 집 앞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 쪽에서 순경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곧장 걸어오더니 그 집 대문 앞에 다가섰다. 대문에는 순찰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순찰함 속에서 카드를 꺼내 몇 자 적고 나서 그들은 그곳을 떠났다.
"수고하십니다."
민기는 그들 옆으로 붙어 서면서 말을 걸었다. 순경들은 고개를 끄덕하면서 그대로 걸어갔다.
"저 집 주인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민기는 그들이 방금 체크한 집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순경들이 멈춰섰다. 수상하다는 듯이 아래위를 훑어본다.
"그건 왜 묻지요?"
"아니, 뭐...... 집이 하도 어마어마해서 그냥 한 번 물어본 겁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런 집에서 사는가 하고 궁금해서요."
"이 사람 좀 이상한데......."
순경들은 그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민기는 웃으며 학생증을 꺼내 보였다.
"학생이오?"
"네, 학생입니다."
"학생이 왜 여기서 어슬렁거려요?"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순경들은 학생증을 돌려주면서 빨리 가보라고 말했다. 민기는 가는 체하다가 순경들이 사라지자 다시 그 집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몇 번인가 돌아갈까 하고 망설였다.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성질이 조급한 편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가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용케도 자정이 가깝도록 거기서 기다렸다.
어제 내리다가 그쳤던 비가 밤이 깊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였기 때문에 그는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옷이 금방 축축해졌다.
자정이 지나 1시가 가까워졌을 때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굴러와 그 집 앞에 섰다.
민기는 볼펜을 꺼내 재빨리 자동차 넘버를 손바닥에다 적었다. 고급외제차였다. 차 속에는 운전사 외에 뒷자리에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얼핏 보아 중년의 사내 같았다. 대문이 삐거덕 하고 열리더니, 차는 집안으로 사라졌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민기는 비에 흠뻑 젖어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침에 보고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빨리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는 아가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가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를 세로 빌려쓰고 있는 사람을 알아냈습니다. 주소도 알아냈습니다."
아가다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이름은 한애자...... 주소는 D동145번지...... 그 집은 어마어마한 집이었습니다. 담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감시용 카메라까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안에는 사나운 개도 있습니다. 집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대문에 문패가 없어서 다른 방법으로 알아내야겠습니다. 새벽 1시쯤에 고급 외제 승용차가 그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차 속에는 중년 남자가 한 명 타고 있었습니다. 차번호를 적어 두었습니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나한테 그 집을 가르쳐 줘요."
"직접 나오시려구요?"
"네, 그게 좋겠어요."
아침이 되자 비가 그쳤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부슬비였다. 오후 3시에 조민기는 아가다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나갔다.
아가다는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먼저 나와 있었는데 그가 그녀의 변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전혀 몰라 보게 변장하고 있었다. 보따리까지 끼고 앉아 있는 것이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비까지 맞아 후줄근한 모습으로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경은 끼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가 뚫어지게 들여다보고서야 그는 상대가 아가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몰라 봤습니다."
그가 놀라서 말하자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어떠세요? 일할 만해요?"
"네, 재미도 있고 스릴도 있고...... 저는 모험을 좋아합니다."
"다행이에요. 그만두면 어쩌나 했는데......."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해주어서 고마워요."
"뭘요. 가능한 한 저를 안 만나고 일을 처리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서 그들은 다방을 나왔다.
그가 우산을 받쳐주려고 하자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비닐 우산을 하나 사들고 10여 미터 뒤에서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그 집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안에서 차가 굴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여자 혼자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어제 본 차하고는 다릅니다. 저건 국산차인데요. 여자도 처음 봅니다."
"미행해 보세요."
아가다는 빠른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민기는 차가 빠진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오월은 그 집 앞을 여러 번 왔다갔다했다. 멀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그 집과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집이 있었다. 오래 된 일식집으로 역시 2층 집이라 맞은편 집을 감시하기에 아주 적격일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일식집을 한참 돌아보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
한 시간쯤 지나서 그녀는 그곳에 다시 나타났는데 아까와는 전혀 딴판으로 돈푼깨나 있는 여자처럼 잔뜩 치장한 모습이었다.
그날도 건수 하나 올리지 못해 일찍 집에 들어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던 복덕방 노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성장한 여인을 보고 오랜만에 진짜 손님이 나타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 앉으시지요."
노인은 반색을 하고 그녀를 맞이했다. 여인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기가 보고 온 일식집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두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탁자를 탁 쳤다.
"아, 바로 그 집을 보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오래 전부터 내놓은 집입니다."
노인은 너무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헐값에라도 팔려고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집은 너무 낡아 값이 없고 땅값만 내면 된다고 했다.
월은 그 맞은편 집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집이 매우 훌륭하다는 말과 함께 집주인이 무얼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집이라면 정말 좋지요. 아마 시가로 한 10억 정도 나갈 겁니다. 주인은 회사 사장이라고 하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일식집을 세로 얻을 수는 없을까요?"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큰 고기가 걸린 줄 알았던 노인은 적이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는 웬만하면 쌀 때 사두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 오월은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복덕방을 나온 그녀는 다시 그 집 쪽으로 갔다.
그 집 앞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하면서 동정을 살폈지만 집에서 나오는 사람도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무척이나 조용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골목길을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굽어 내려가는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자 큰 길이 나타났고 그 길과 면한 모퉁이에 조그만 경양식집이 하나 있었다. '킬리만자로'라는 경양식집이었다.
조그만 실내에 푹신한 소파가 몇 개 적당히 배치되어 있고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조명이 실내 분위기를 아늑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나란히 앉아 정답게 속삭이고 있을 뿐 손님은 없었다.
안경낀 모습이 예뻐 보이는 처녀가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향해 목례를 보냈다.
월은 큰 사진이 걸려 있는 벽 쪽으로 붙어 앉았다. 하이네켄 맥주 한 병을 시킨 다음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턱이 온통 흰 수염으로 덮여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사진이었다. 그는 사냥총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맹수 한 마리가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헤밍웨이 뒤로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봉우리가 어슴푸레하게 떠 있었다.
그녀는 안경낀 처녀가 가져온 맥주를 컵에 따라 마셨다. 그제서야 자신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잠시 감았다. 눈을 뜨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물러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슴은 무서운 복수심으로 더욱 끓어오르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문제의 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람이 불어 비닐 우산이 뒤집혔다.
그것을 바로 펴려고 하는데 맞은편에서 조민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치려고 했다. 그녀가 비닐 우산을 버리고 그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민기는 주춤하며 물러섰다가 비로소 그녀를 알아보고는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내밀었다.
"방금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긴장해서 말했다. 월은 그를 '킬리만자로'로 데리고 갔다.
"분위기는 좋은데요."
"앞으로 이곳을 자주 이용하도록 해요. 전화번호를 적어두세요."
민기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킬리만자로'의 전화번호를 수첩에다 적었다. 월은 비프스테이크 2인분을 시켰다.
"남자 한 명은 어제 본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대머리였습니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네, 말씀드리죠."
민기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문제의 집에서 나온 여인이 골목을 빠져나가자 민기는 재빨리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 뒤를 따랐다. 여인은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녀는 일단 광복동에 차를 세워놓고 국제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민기도 택시에서 내려 그녀를 뒤쫓았다.
그녀는 어느 옷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10분쯤 후에 밖으로 나왔는데 옷가지를 하나 샀는지 쇼핑백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녀는 옷가게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왔다. 도중에 약방에 들러 무슨 약인가를 샀다.
민기가 관찰한 바로는 그녀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노란 비옷 차림이었는데 키도 늘씬했다. 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깡통 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30분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산 다음 다시 광복동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민기는 택시를 찾았으나 빈 택시가 눈에 띄지 않았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을 때 그녀가 탄 차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운전사를 재촉하여 부둣길 쪽으로 향하면서 보니 코발트색 승용차가 영도 쪽으로 꺾어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대교를 건너자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운전사에게 너무 바싹 다가가지 말라고 주의했다. 그 차는 태종대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코발트색 자가용이 태종대 입구를 통과했다. 갑자기 속력이 떨어졌다. 아주 느린 속도로 태종대를 한 바퀴 돌았다. 전망대를 지나 내려가더니 차를 세우고 내려섰다. 그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는 해변이었다. 모래는 없고 굵은 자갈뿐이었다. 파도가 높이 치솟고 있었다.
가게가 하나 있고 그 옆에는 비치 파라솔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가 한 명 파라솔 밑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밖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민기는 나무 뒤에 몸을 가리고 서서 여인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계단을 모두 내려간 여인은 곧장 어떤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앉은 채 담배를 피우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의 정장 차림에 색깔 있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여인이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서 남자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갑자기 남자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여인의 머리가 흔들렸다. 남자가 따귀를 갈긴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래도 여자는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잘 길들여진 개처럼 피하지도 않고 얻어맞고 있었다. 남자는 몇 번 더 그녀를 때렸다. 그런 다음 일어섰다. 의외로 조그만 사내였다. 여자가 그를 붙잡았다. 그가 다시 때리자 여자는 손을 놓았다.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남자는 주차해 놓은 노란 외제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여인도 자기 차에 들어갔다. 민기는 재빨리 택시를 찾았다.
그러나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택시가 바로 없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죠.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 따라갔는데 해운대로 가더군요. 그들은 곧장 B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남자는 40대였는데 뚱뚱하고 키가 여자보다 한 뼘이나 작았습니다. 여자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남자 뒤를 따라갔습니다. 로비에 앉아서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기에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쪽이 걱정이 되고 해서......."
그는 식어 버린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투숙한 호실을 알고 있나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함께 거기로 가요."
"지금 말입니까?"
그녀는 끄덕였다.
그들은 급히 식사를 끝내고 '킬리만자로'를 나섰다. 그 사이 빗줄기는 거세어져 있었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그녀는 길가에 세워둔 차 옆으로 다가섰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회색 국산 승용차였다.
빨간 색의 일제 스포츠카를 처분하고 남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국산 중고차를 새로 구입한 것이다. 중고차치고는 손볼 데도 없었고 성능도 좋은 편이었다.
조민기가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앉자 그녀는 차를 출발시켰다. 빗줄기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쾌적한 기분을 안겨주고 있었다.
"운전 솜씨가 훌륭하신데요."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차는 부둣길을 지나 도시 고속도로 위를 질주해 갔다. 다른 차들이 흡사 낙엽처럼 뒤로 떨어져 나가자 그는 불안한 표정이 되어 아가다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동요의 빛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해운대 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커브를 그었다. 부산에 온 지 얼마 안 된 그녀로서는 매우 빨리 지리를 익힌 셈이었다.
이윽고 B호텔에 도착하자 그들은 따로 떨어져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1층 라운지로 가서 창가에 자리잡고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다 그러는 동안 민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두 남녀를 찾았다.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아직 호텔 방안에 있는지 아니면 이미 호텔에서 나갔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는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로비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잘 보였다. 호텔방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30분이 지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 로비를 왔다갔다했다.
그릴 쪽을 보니 아가다가 그린 듯이 앉아 있다. 참을성이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다시 의자에 앉아 엘리베이터를 노려보았다. 한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용변이 마려웠다. 그 사이에 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대로 참고 기다렸다. 다시 30분이 지났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화장실로 가려고 일어서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기다리던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로비를 가로질러 지하로 뻗은 계단을 내려갔다. 민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남녀가 클럽 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민기는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가다에게 가서 보고했다.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방금 나이트클럽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거기에 가요."
그들은 라운지를 떠나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다.
클럽은 한창 북적거리는 시간이었다. 빈 자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웨이터가 마련해 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저기...... 저 사람들입니다."
민기가 플로어 가까이에 앉아 있는 남녀를 가리키면서 속삭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아가다의 시선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남자의 얼굴 위에 고정되었다. 이어서 여자의 얼굴 위로 옮겨갔다.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4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정면으로 보였지만 여자는 옆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찢어진 눈매가 매서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작은 체구이면서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 온 것 같은 카리스마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씩 주위를 사납게 흘겨보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여자 쪽은 얼핏 보기에도 주눅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마음에 들려고 몹시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월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그렇게 시선이 마주친 것처럼.
이쪽도 미인이었지만 저쪽도 꽤나 미인이었다.
그녀가 도로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월을 쳐다보지 않았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려는 듯 색안경을 끼었다. 월은 남자의 왼손을 주시했다. 새끼손가락이 있었다. 그녀가 찾는 남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일어섰다. 플로어로 나가더니 디스코를 추기 시작했다.
여자는 눈에 띌 정도로 애교 있게 춤을 추었지만 남자는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다.
"우리도 한 번 추죠."
민기가 아가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가다는 끄덕하고 일어섰다.
그들은 플로어로 나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행하고 있는 두 남녀도 바로 그들 옆에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도중에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했다. 일본말이었다. 여자가 춤추는 것을 그쳤다. 그들은 플로어를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월의 춤솜씨는 형편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릴 정도로 그녀는 춤을 못 추었다. 민기는 그녀가 남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엉망으로 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1시가 지났다.
일본말을 하는 조그만 사나이는 폭음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있었다.
민기와 오월이 세 곡째 추고 있을 때 클럽 안으로 두 사나이가 들어왔다. 민기는 그들을 보고 멈칫하다가 월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급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민기가 월의 귀에다 대고 숨가쁘게 속삭였다.
"아까 저녁 때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입니다. 대머리 옆에 있는 사람은 어제도 봤습니다."
그들은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한 명은 대머리였고 다른 한 명은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와 있었다. 여자가 그들을 보고 손짓하자 그들은 여자쪽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그러나 조그만 사나이는 비스듬히 앉은 채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들은 조그만 사나이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말했는데 너무 시끄러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여자는 제일 마지막에 앉았다.
조그만 사나이가 손을 흔들면서 일본말로 지껄였다. 대머리가 머리를 조아렸다. 광대뼈도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사나이는 술에 취해 방약무인한 태도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끝까지 다소곳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갑자기 민기가 아가다의 팔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저...... 광대뼈 튀어나온 사람......."
아가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기는 재빨리 속삭였다.
"새끼손가락이 없습니다."
"나도 봤어요."
아가다는 중얼거리고 나서 목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사나이는 왼손으로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분명히 왼손 새끼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너무 그쪽을 쳐다보지 말아요."
"일어서는데요."
그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대머리와 광대뼈가 조그만 사나이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미행해요."
그들도 일어섰다.
조그만 사나이는 고급 외제차의 뒷좌석에 태워졌다. 그 옆에 광대뼈가 앉았다. 운전석에는 여자가 앉았다. 조그만 사나이가 몰고 온 노란 차는 대머리가 맡았다.
이윽고 두 대의 차는 조용히 호텔 구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커브를 꺾어 달려갔다.
그 시간에 경사진 해안 도로에는 거의 지나는 차량이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다 안개까지 끼어 시야가 매우 어두웠다. 아가다는 열심히 차를 몰아갔지만 앞서 달려간 차들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차가 언덕바지를 올라갔을 때 광대뼈는 바지를 걷어올려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을 왼손에 움켜잡고 취해서 쓰러져 있는 조그만 사나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단검을 상대의 가슴에 깊숙이 찔러넣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 사나이를 차 밖으로 밀어던졌다. 사나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자 그는 구둣발로 가슴팍을 힘껏 찼다. 뒤따라 가던 노란 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땅바닥에 굴러떨어진 사나이를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아가다는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앞으로 나가 보았다.
조그만 사나이는 막 숨을 거두고 있었다. 안개와 어둠이 어느 정도 핏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민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 반해 아가다는 냉담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경찰에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빨리 타세요."
민기는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차 넘버를 알고 있으니까 경찰에 신고하면 놈들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돼요. 그냥 내버려 둬요."
그녀는 길에서 벗어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불을 모두 껐다. 민기는 계속 따지고 들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저런 살인자들을 그냥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내버려 둬요. 만일 저들을 경찰에 체포하게 하면 우리가 할 일이 없어져요."
민기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주 좋은 경험을 했어요. 저들은 살인을 누워 떡 먹기식으로 해요.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내가 조심하라고 이른 말을 이제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학생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살인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건 죄악입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전 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결정 내리지 말아요."
"죄악은 싫습니다."
"계약한 이상 그대로 일하세요. 난 학생이 마음에 들어요. 이런 것만 아니라면......."
"도대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을 미행해야 하는지...... 왜 살인을 보고도 모른 체 해야 하는지...... 이상한 일들뿐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알려고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게 계약 조건이에요."
"인간인 이상 어떻게 모른 체 할 수 있습니까? 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그 침묵을 깨고 말했다.
"차에서 내리세요. 당신 같은 사람 필요없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지."
"여기서 내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알 바 아니에요. 걸어가든지 기어가든지 맘대로 해요."
민기는 차에서 내렸다. 비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일이 있어요. 시체를 뒤져서 소지품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가져와요. 놈들이 돌아올지 모르니까 빨리 하세요."
그 말에 그는 얼어붙어 버렸다. 서슴없이 그런 명령을 내리는 그녀가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그는 시체를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영화에서나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체를 만지라고 했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담한 그도 비바람치는 밤에 피투성이 시체를 만진다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러나 여자 앞에서 자신의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아가다를 쏘아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비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시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급히 접근했다.
시체는 시커먼 모습으로 길바닥 위에 나뒹굴어 있었다. 무릎을 굽히고 시체에 손을 가져가다 말고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가다 쪽을 한 번 흘겨보고 나서 다시 손을 뻗었다. 일단 손이 닿자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닿는 대로 꺼내 자기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막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불빛이 보였다. 얼떨결에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금엉금 기어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두 대의 차가 시체 옆에 정거했다. 여자 하나와 남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범인들이었다. 그들은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시체를 들여다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대머리가 구둣발로 시체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죽었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가요."
여자가 재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윽고 그들은 차를 타고 급히 그곳을 떠났다.
민기는 숲속에서 기어나와 아가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었다.
아가다는 그가 타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다시 범인들의 차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소지품이 많아요?"
"네, 잡다하게 많은데요."
그는 시체에서 빼낸 물건들을 모두 꺼내 놓았다.
"이건 도둑질입니다. 강도로 오인받겠는데요."
그녀는 거기에는 아무 대꾸 없이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닦으세요."
그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닦았다. 그리고 화가 난 투로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아니요, 하나도......."
그녀의 대답은 그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저는 무서워서 혼났습니다."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커브를 홱 꺾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이 그녀 쪽으로 기울어졌다.
앞서 간 두 대의 차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아가다 역시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쫓아가고 있었다.
도심을 통과한 범인들의 차는 이윽고 문제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을 보고 아가다는 추적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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