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20~21

단차 | 2023.12.02 12:00:05 댓글: 2 조회: 20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3952
 20

     

     

     

     

  유리 케이스 안을 아오에는 홀린 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높이 50센티미터, 폭 40센티미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인도의 타지마할이지만, 이건 단순한 모형이 아니다. 놀랍게도 레고 블록으로 만든 것이다. 부품 수가 무려 6천 개에 달한다. 처음 가격표를 봤을 때는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28만 엔이 넘는 가격이다. 이런 걸 집 안 어디에 놓을 셈이냐고 툴툴거리는 건 고사하고, 우선 신용카드 명세서를 보자마자 아내가 노발대발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꾹꾹 참으면서 그저 구경만 하기로 했다.

  아오에의 방에는 다양한 모양의 레고 블록이 천 개 가까이 있다. 모조리 자신을 위해 사들인 것이다. 저녁을 먹은 뒤 위스키 잔을 찔끔찔끔 기울이며 다양한 것을 만들어보는 그 자신만의 취미 활동이다. 좋은 작품이 나왔을 때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지난달에 만든 스카이트리 모조품은 제법 괜찮게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풀릴 때까지 감상한 뒤에는 해체해야 한다. 완성품을 전시해둘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오에는 집 근처 쇼핑센터 안에 자리한 모형 전문점에 와 있었다. 잠시 틈만 나면 대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절로 발길이 이쪽으로 향했다.

  매장 안을 조금 이동하자 데이코쿠 호텔 레고 블록이 한창 잘 팔리고 있었다. 그 상자를 보고 아오에는 항상 그렇듯이 망설였다. 가격은 마침맞고 사이즈도 허용 범위다. 하지만 집에 들고 갔을 때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현재 도쿄 데이코쿠 호텔은 이 모형과는 전혀 다르지요?” 갑자기 가까이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오에는 흠칫 놀라 옆을 보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콧날이 뾰족한 여자가 서 있었다.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이 호텔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표작으로, 지금은 아이치 현 메이지무라로 이전되었다던데요. 하긴 그것도 현관 부분만 옮긴 것이죠.”

  “그래도 그 메이지무라 안에서는 가장 큰 건물인데요.” 아오에는 말했다.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오에 교수님.”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가슴이 철렁할 만큼 미인이었다. 아오에는 혈압의 상승을 자각했다.

  “아, 근데 당신은…….”

  그녀는 정면으로 아오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카오카 형사를 아시지요?”라고 물었다. “아자부기타 경찰서의.”

  뜻밖의 방향에서 날아온 질문이었다.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예에, 라고 대답해버렸다.

  “역시 그렇군요. 잘됐습니다.” 여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지금?”

  네, 라고 말하고 그녀는 아오에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람이 쓰윽 다가드는 기척에 아오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큰 몸집에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눈썹 옆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만 보고도 왠지 몸이 오그라들었다. “뭡니까, 대체?” 한심하게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걱정 마세요.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자가 말했다. “우하라 마도카에 대해 잠깐 여쭤보려는 것뿐이에요.”

  “우하라 마도카? 그럼 당신들은…….”

  여자가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곳에는 ‘가이메이 대학 총무과/기리미야 레이’라고 찍혀 있었다.

  “며칠 전 나카오카 형사가 우리 대학에 오셨어요. 그리고 뇌신경외과 우하라 박사님께 이것저것 물었다는군요. 그것에 대해 나카오카 형사에게서 뭔가 얘기를 들으셨나요?”

  “아니, 요즘 그 사람과는 만난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기리미야 레이는 손목시계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요. 잠깐만 함께 가주시겠어요?”

 
 “예에, 그런 일이라면.”

  나카오카와 우하라 젠타로가 나눈 대화는 아오에로서도 궁금한 사안이었다.

  그들의 차는 쇼핑센터 주차장에 있었다. 검은 세단이다.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권하는 대로 아오에는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은 기리미야 레이가 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조수석 쪽에 앉았다.

  그런데요, 라고 아오에는 말했다. “내 얘기는 나카오카 형사한테 들었어요?”

  운전석의 기리미야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하라 박사님께서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뇨, 그냥…….”

  이상하네, 라고 아오에는 생각했다. 지난번 나카오카와 얘기했을 때, 설령 우하라 젠타로를 만나더라도 아오에에 대한 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아오에는 조수석 남자를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한 마디 말도 없는 이 남자도 가이메이 대학 사람인가. 얼굴 생김새나 큼직한 체구에서는 위험한 장면을 수없이 헤쳐온 사람 특유의 오라가 풍기는 것 같았다.

 
 차는 시티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호텔 커피숍에라도 가려나 했더니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에 기리미야 레이가 누른 버튼은 객실 층이었다.

  “방에서 얘기하는 게 조용하고 마음 편하니까요.” 아오에의 마음속을 읽어낸 것처럼 그녀가 말했다.

  아오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엄청난 일이 기다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별다를 것 없는 스위트룸이었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앙 테이블 옆에 긴 의자와 일인용 의자가 L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기리미야 레이가 권하는 대로 아오에는 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일인용 의자 쪽에 앉았다.

  “커피, 괜찮으세요?”

  “아, 예.” 곁의 왜건에 포트와 커피 잔이 준비되었다. 기리미야 레이는 잔에 커피를 따라 아오에 앞에 놓았다. 그동안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는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아오에와 기리미야 쪽은 일절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어쩐지 더 으스스했다.

 
 “우하라 박사님이 나카오카 형사에게서 마도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으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난처해하고 계십니다.”

  “난처하다니, 왜요?”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기리미야 레이는 입가를 풀며 빙긋이 웃었다. “마도카는 혼자 여행을 떠난 참이라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박사님도 파악하지 못하셨어요. 아, 어서 드시죠, 식기 전에.”

  잘 마시겠다고 말하고 아오에는 커피에 밀크를 넣었다. “그렇습니까, 혼자 여행을 떠났다고요.”

  “아오에 교수님은 아카쿠마 온천과 도마테 온천에서 마도카를 만나셨다고 하던데요?”

  “예, 그냥 우연히 만났었죠.”

  “실은 우하라 박사님이 마도카를 무척 걱정하고 계세요. 요즘 연락이 전혀 없는데, 정말로 별일 없이 잘 지내나 하고요. 그런 때에 나카오카 형사까지 찾아왔으니 더 불안하시겠지요. 그래서 아오에 교수님께 자세한 말씀을 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시간 내기 힘드신 박사님 대신 제가 찾아뵙게 됐어요.” 미리 준비한 문장을 읽듯이 기리미야 레이는 술술 말했다.

 
 “예에, 그렇습니까.” 아오에는 커피를 마셨다.

  “마도카를 만나셨을 때의 얘기를 좀 듣고 싶군요. 우선 아카쿠마 온천에서 보셨다면서요?”

  “그랬죠. 젊은 여자가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와 있어서 나와 함께 갔던 담당자가 주의를 줬습니다. 그때는 그것뿐이어서 딱히 별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도마테 온천가에서 또 눈에 띄는 바람에 깜짝 놀라 말을 걸어봤지요.”

  “말을 걸었다고요, 어떻게요?”

  “뭐, 그저 그런 얘기였어요. 왜 이런 곳에 와 있느냐고 물어봤죠. 그때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지만요.”

  “그때는, 이라는 건?”

  “내가 묵는 여관을 알려줬더니 저녁때 마도카가 찾아왔었어요.”

  아오에는 여관에서 마도카와 나눈 대화며 둘이 사고 현장을 보러 갔던 일 등을 말했다.

  “그랬군요. 마도카가 친구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까.” 기리미야 레이는 생각을 굴리듯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여학생, 대체 누굽니까?”

  아오에의 질문의 의미를 언뜻 이해하지 못했는지 기리미야 레이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누구냐는 말은 좀 이상하군요. 무슨 일을 하고 있지요?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라는 말은 본인에게서 들었습니다만.”

  “그 말 그대로예요.”

  “하지만 뭐랄까, 신비한 분위기가 있더군요. 단순한 니트족이 아니에요. 유난히 아는 것도 많고 날씨를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날씨?”

  “눈 내리는 시각을 맞혔어요. 게다가 정확하게.”

  “아오에 교수님.” 기리미야 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도카는 평범한 여자애예요. 약간 괴팍한 면은 있을지 모르지만 단순히 개성일 뿐입니다.”

  “예에…….”

 
 “마도카와 그 밖에 어떤 이야기를 하셨지요? 찾고 있는 친구에 대해 그녀가 뭔가 말을 했던가요?”

  “친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단지…….”

  “뭡니까?”

  “그게…….” 말을 해도 좋을지 망설이면서도 아오에의 입은 저절로 움직였다. “나카오카 형사가 아마카스 겐토 군에 대해서도 물어봤지요?”

  기리미야 레이가 흠칫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서 있던 남자까지 아오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으셨어요?” 기리미야 레이가 물었다.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블로그에서 봤습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왜 그 블로그를 보셨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오에는 이야기의 앞뒤가 뒤엉키면서도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를 찾아낸 과정이며 거기서 우하라 젠타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 또한 나카오카와 나눈 대화 속에서 마도카가 보여준 사진이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감지한 것 등을 말했다.

  “그러셨군요.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나카오카 형사는 왜 타살 가능성을 의심하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기리미야 레이는 하늘하늘 고개를 저었다.

  “숨기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저희 쪽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물론 아오에 교수님께 들었다는 건 절대 밝히지 않을 거예요.”

  아오에는 그녀의 이지적인 얼굴을 쳐다보고, 이어서 계속 정자세로 서 있는 남자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말도 없이 똑바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솔직히 대답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은근히 위협하는 것 같았다.

  “나카오카 형사는 아카쿠마 온천에서 사망한 사람의 부인을 의심하는 눈치였어요.” 아오에는 머뭇머뭇 말했다. “피해자와 나이 차가 많이 나고, 애초에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던데…….”

 
 “그렇군요, 부인을.” 기리미야 레이는 이해가 된다는 듯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오에는 아까부터 계속 자신만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아오에 쪽에서도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입장을 역전시켜보려고 했다. “마도카가 찾고 있는 친구라는 건 아마카스 겐토 군이지요? 마도카는 왜 사고가 일어난 온천지에서 그를 찾아낼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하지만 기리미야 레이는 퉁명스럽게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말했듯이 마도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버지인 우하라 박사님도 파악을 못 하고 있습니다. 아마카스 겐토라는 청년이 박사님의 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마도카가 그를 찾고 다닌다는 것도 우리는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당연히 그 이유도 설명해드릴 도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명함 비슷한 걸 받았다고 하셨지요?” 기리미야 레이는 아오에의 말을 가로막으며 감정을 읽어내기 힘든 눈빛으로 말했다. “도마테 온천의 여관에서 마도카가 직접 손으로 쓴 메모 카드를 건네주었다고 하셨어요. 그것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 그건 지금 여기에 없어요.”

  “그럼 어디 있죠? 대학 연구실인가요?”

  “글쎄, 그게 어디 있는지……. 아무튼 그건 아무 도움도 안 돼요.”

  “어째서요?”

  “아니, 엉터리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준 거였어요. 나중에 내가 걸어봤는데 엉뚱한 사람이 받았습니다.”

  “누가 전화를 받았는데요?”

  “글쎄요,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나이가 좀 있는 여자였습니다. 마도카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곧바로 끊었어요.”

  기리미야 레이는 일단 시선을 떨구더니 다시금 아오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카드에는 그 밖에 또 뭐가 적혀 있었지요?”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죠.”

  “그렇습니까. 하지만 역시 실물을 보고 싶군요. 학교에 있다면 지금 다시 가서 좀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물론 일이 끝나는 대로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만 보여주시면 앞으로 결코 아오에 교수님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지요. 아니, 교수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날 일도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라고 그녀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카드가 아직 있을지 모르겠군요. 내버린 것 같기도 하고…….”

  기리미야 레이의 오른쪽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학교 쓰레기통에요? 언제?”

  “아니, 그것도 기억이 안 나요. 어디였나.” 아오에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전화번호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된 시점에 그건 이미 그에게는 휴지였다. 지금까지 그 종이쪽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게다가 기리미야 레이가 그런 종이쪽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껏해야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을 뿐이다. 몇 번을 들여다봤으니 틀림없다.

  “그러면 발신 이력을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교수님이 마도카의 전화인 줄 알고 걸었던 그 번호가 남아 있겠죠? 그걸 좀 보여주시면 좋겠는데요.”

  “그야 뭐, 괜찮죠.”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런 번호를 알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어디로 연결되는지도 모르는 번호인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디에 연결되는지도 모른다—.

  도마테 온천의 여관에 마도카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아오에의 믿음을 얻으려고 열의를 보였다. 우하라 마도카가 가짜 이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족 신용카드도 보여주었다. 그렇게까지 했었는데 거짓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을까. 진짜 번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아오에가 그 자리에서 걸어볼 수도 있었다. 마도카가 가진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오에는 결코 그녀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 번호는 진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전화를 받은 것도 아마 마도카였을 터였다. 하지만 아오에와의 연결을 끊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했던 게 틀림없다. 보이스체인저를 사용하면 남의 목소리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점을 아마도 기리미야 레이는 눈치챈 것이다.

  “왜 그러시죠?” 기리미야 레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오에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잠시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아, 아뇨, 이 스마트폰으로 전화한 게 아니라는 것이 생각나서.”

  “그러면 어떤 전화로?”

  “분명 연구실 전화였어요. 고정 전화를 썼던 것 같아요.”

  “그 전화에 발신 이력은?”

  아오에는 고개를 저었다.

  “고정 전화기에는 발신 이력이 남지 않아요. 우리 대학 전화는 호텔처럼 내선 전화를 겸하고 있습니다. 혹시 전화 회사에 연락하면 알아봐줄지도 모르지만 정당한 이유가 아니면 그것도 안 될 거고.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전화는 프라이버시에 관한 일이 되니까요.”

  기리미야 레이는 한숨을 내쉬고 문 옆에 서 있는 남자 쪽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남자도 일순 시선을 맞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오에를 보았다. “마도카가 건네준 메모 카드는 학교 쪽에 가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거 말인데요, 내가 집에 가져갔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집 쪽을 먼저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즉시 출발할까요.” 기리미야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에게 눈짓을 건넸다.

  “아, 잠깐. 집에는 나 혼자 가도 됩니다. 게다가 그게 꼭 집에 있다는 보장도 없어요. 만일 눈에 띄지 않으면 학교 연구실 쪽도 찾아보겠지만,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하니까 이쯤에서 그만 끝내지요. 이렇게 합시다, 내가 그 메모 카드를 찾아냈을 때는 물론이고, 못 찾을 경우에라도 일단 당신에게 연락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기리미야 레이가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눈빛을 던졌다.

  아오에는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좀 해주시죠.” 그대로 허리를 깊숙이 꺾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미안하군요. 잘 찾아보겠습니다.”

  기리미야 레이가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아오에는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탔다. 차가 출발한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은 아직도 승차장에 선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얼굴 표정에 의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 이력을 확인했다. 학교 연구실에서 전화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 스마트폰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발신 이력에 번호가 남아 있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기리미야 레이 일행에게 번호를 알려줬다가는 자신이 진실을 알게 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리미야가 말하지 않았는가. 두 번 다시 아오에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그녀는 애초에 아오에에게 어떤 진실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 마도카의 소재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도카가 현재 사용하는 전화번호도 알지 못한다.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꾹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주도권은 내 손안에 있다.

     

  집에 돌아오자 저녁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라시즈시*였다. 이 또한 소타가 좋아하는 메뉴지만, 햄버거나 카레 같은 것에 비하면 일식을 좋아하는 아오에로서는 감지덕지였다.(* 식초와 소금으로 간을 한 밥 위에 생선, 고기, 달걀부침, 양념 채소 등을 얹어 내는 요리.)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제 방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아내 게이코는 밥을 차려주고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가족 간에 대화가 없는 채 아오에가의 밤은 깊어갔다.

  지라시즈시로 배를 채우면서 아오에는 작전을 짰다. 승부는 딱 한 번이다. 실패했다가는 분명 두 번째 기회는 없다. 어떻게든 체크메이트까지 몰고 갈 수를 써야만 한다.

  제대로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 아오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금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발신 이력에서 그 번호를 골라 통화 표시를 눌렀다.

  낯선 번호라면 마도카는 분명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스마트폰 번호라면 마도카가 받지 않을 리 없다. 왜냐하면 지난번에는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받았는데 이번에는 받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다. 마도카로서는 아오에가 이 번호를 계속 엉터리 번호로 알고 있어주기를 바랄 터였다.

  호출음 소리가 들렸다. 세 번, 네 번, 아직 받지 않는다. 착신 표시를 보며 망설이고 있는 건가.

  일곱 번째 중간쯤에 마침내 연결되었다. 네에, 라는 여자 목소리. 이번에도 나이 든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나는 다이호 대학의 아오에라고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네? 누구시라고요?” 여자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지난번에는 이 시점에서 마도카가 아니라고 판단해버렸다.

  “다이호 대학의 아오에 교수야. 도마테 온천의 스즈야 여관에서 만났었잖아.”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몇 번에 거셨어요?”

  여기서부터 승부다. 아오에는 숨을 들이쉬었다.

  “오늘은 보이스체인저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군. 마도카, 네 목소리 그대로야.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아마카스 겐토 군에 관한 얘기야. 그에 관한 정보를 원한다면…….” 거기까지 단숨에 말해버린 참에 전화가 뚝 끊겼다.

  곧바로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미 착신 거부 상태였다. 예상했던 일이라 낙담은 하지 않았다.

  아오에는 방금 나눈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마도카라고 단정하고 말을 던졌지만, 만일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여자도 어지간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겁이 나서 전화를 해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오에는 자신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목소리가 다른 것에 당황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보이스체인저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니 목소리며 말투가 마도카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문제는 아오에의 제안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마도카의 관심을 끄는 데는 역시 아마카스 겐토를 미끼로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설마 아오에가 아마카스 겐토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서 내심 크게 놀랐을 것이다. 지금쯤 아오에의 속셈을 곰곰 생각해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언제 전화가 걸려 와도 즉시 받을 수 있게 집 안을 이동할 때도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욕조에 들어가 앉아 있는 사이에도 착신이 있으면 곧바로 받을 수 있게 문 바로 옆에 두었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고 레고 블록으로 만들기 시작한 작은 성이 완성되었는데도 착신음은 울리지 않았다. 아오에는 점점 불안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전화를 하지 않는가. 아마카스 겐토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지 않은 건가. 적어도 아오에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이유 정도는 마음에 걸릴 터였다. 그게 아니면 경계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인가.

  오전 1시를 지나 아오에는 침실로 갔다. 옆의 침대에서는 아내 게이코가 잠든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베갯머리에 스마트폰을 두고 그도 침대에 들었다. 오늘 밤에는 연락이 안 올 것 같다, 라고 단념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깨닫고 보니 누군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왜, 왜 그래?” 머리가 몽몽했다.

  “휴대전화 울리잖아요.” 아내 게이코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뭐?”

  베갯머리에 두었을 터인 스마트폰이 없었다. 하지만 진동 소리는 분명 들렸다. 아래를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서둘러 주워 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아오에입니다.” 침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상대는 침묵하고 있었다. 일순 전화가 끊겼나 싶어 화면을 확인해봤지만 통화 중으로 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라고 말을 건넸다.

  “지금 혼자예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틀림없이 마도카였다.

  “내 방에 혼자 있어. 다른 방에 식구들이 있지만 다들 자고 있어. 나도 자고 있었고. 설마 이런 시간에 전화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스위치를 누른 다음 시계를 보았다. 오전 3시였다.

  “나도 설마 교수님이 다시 전화할 줄은 몰랐어요.”

  “응, 그랬겠지.”

  “잘도 알아냈네요, 전화번호가 진짜라는 거. 처음 전화하셨을 때, 보이스체인저 목소리에 완전히 속은 것 같았는데.”

  “그 뒤로 이래저래 일이 있었어.”

  “이래저래, 라니요?”

  “얘기하자면 길어. 일단 빨리 만나자. 만나서 설명해줄게.”

  마도카는 잠시 틈을 두었다.

 
 “그럼 이것만이라도 먼저 알려주세요. 교수님이 어떻게 겐토 군을 알고 있죠?”

  “그것도 간단히는 설명할 수 없어.”

  “대충 얘기하셔도 되는데요.”

  “안 돼. 만나서 얘기하자. 걱정 마, 너를 만난다는 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거야. 기리미야라는 여자한테도.”

  마도카가 다시 침묵했다. 그 시간이 조금 전보다 더 길었다.

  “진짜로 이래저래 일이 많으셨던 모양이네요. 교수님이 이번 일에 휘말릴 줄은 몰랐어요.”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내 잘못이란 거예요?”

  “그런 게 아니지.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갔을 거야. 아무것도 모른 채 잘못된 사실을 공언하는 얼빠진 학자가 됐을 거라고. 그러니 너를 만나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잘못된 내용이라니요?”

 
 “양쪽 온천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밝혔던 의견 말이야. 그건 사고 따위가 아니야. 그렇지?”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데요?”

  “너라면 다 알 것 같아. 그러니 좀 알려다오, 사실 그대로. 그 대신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털어놓으마. 경찰이 아마카스 겐토 군을 쫓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오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이대로 전화를 끊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알았어요.” 마도카가 말했다. “하지만 만날 장소와 시간은 내가 정할 거예요.”

  “좋아.” 아오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1

     

     

     

     

  나카오카가 형사과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어이, 하고 계장 나리타가 손을 까불며 불렀다. 일은 잘하지만 시간관념은 희박한 상사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한 건 드문 일이었다.

  나카오카가 다가가자 나리타는 담뱃갑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흡연실에서 밀담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할지 대략 짐작이 갔다.

  “뭐야, 그거?” 흡연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리타는 나카오카의 손맡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선물이에요. 전병과 메밀국수 좀 샀어요. 전병은 나중에 동료들에게 나눠줄 거고, 메밀국수는 계장님 댁에 가져가세요. 메밀, 좋아하시죠?” 나카오카는 종이봉투에서 메밀국수 꾸러미를 꺼내 나리타에게 내밀었다. 선물을 받아 포장지에 인쇄된 글씨를 들여다보던 나리타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도마테 온천? 휴일에 여자 데리고 여행 다녀왔어? 와아, 부럽다, 부러워.”

  “아쉽게도 저 혼자 다녀왔네요. 게다가 당일치기로.”

  “당일치기? 자네한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취미가 아닙니다. 일이에요, 일.”

  “일?” 나리타는 꾸러미를 옆에 챙겨놓고 입에 문 담배에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내가 할 얘기가 바로 그거야. 자네, 왜 몰래몰래 돌아다니지? 행선지가 불명확한 일이 많다고 주위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어.”

  “지시받은 일 외에 딴짓을 하는 건 아닌데요.”

 
 나리타는 삐뚜름한 입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내 질문에 대답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아카쿠마 온천 건이죠. 젊은 마누라가 유산을 노리고 남편을 해치운 거 아니냐는 그 건 말이에요.”

  나리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어? 수상하기는 한데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결론 난 거 아니었어?”

  “아니, 근데요, 조사하다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러잖아도 이제 슬슬 보고하려던 참이에요.”

  “이상하다니, 뭐가?”

  흡연실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지만 나카오카는 계장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댔다. “이건 틀림없는 대박 사건이에요. 게다가 웬만한 덩치가 아닙니다.”

  나리타는 담배를 손끝으로 톡 튕겨 재를 떨었다. 얼굴에 노회한 번뜩임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뭘 잡았는데?”

  “다른 사건하고도 관련이 있더라니까요. 그쪽도 온천지에서 변사, 게다가 황화수소. 이번에는 도마테 온천이에요.”

  나리타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덥석 물었다는 징후다. 연달아 담뱃불을 붙인 뒤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얘기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나카오카는 아오에와 나눈 대화를 포함해 지금까지의 경위를 숨김없이 얘기했다. 복잡하게 뒤얽힌 내용이라 나리타가 자꾸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지만, 이건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뭐야, 진짜 수상쩍은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새 담배를 입에 물면서 나리타는 말했다.

  “그렇죠? 내가 몰래 돌아다니는 거, 이해가 되시지요? 잘하면 본청 친구들도 따돌릴 수 있다고요.”

  “그건 그러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잖아. 그 살해 방법만 해도 대학 전문가 교수가 아무래도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면서.”

  “근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척척 맞아떨어지잖아요. 영화 관계자 두 명이 잇따라 온천지에서 황화수소 중독으로 사망하다니. 양쪽 피해자와 인연이 깊은 영화감독의 가족은 과거에 황화수소로 사망했고, 거기서 살아남은 아들이 현장에서 목격됐어요. 이걸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시겠어요?”

  나리타는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더니 이어서 대량의 연기를 토해냈다.

  “그냥 넘어갈 사안은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자네는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지?”

  “내 판단으로는 이렇습니다. 자세한 것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양쪽 사건 모두 아마카스 겐토가 관여했어요. 근데 단독범이 아니라 공범자가 있는 사건이죠. 아카쿠마 온천에서는 그게 미즈키 치사토였어요.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둘이 손을 잡기로 했다. 어떻습니까?”

  “재미있군.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똑같은 날에 아카쿠마 온천에서 숙박했다는 것 정도로는 증거도 뭣도 안 되잖아.”

  “분명 아카쿠마 온천만으로는 안 되죠. 하지만 도마테 온천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확인된다면 어떨까요.”

  “도마테에서? 그쪽에서도 두 사람이 공모했단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도마테 온천에서 죽은 나스노 고로라는 배우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그 남자가 죽는다고 이득을 볼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원한을 샀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만일 범행에 공범자가 필요했다면 아마카스 겐토는 미즈키 치사토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치사토 쪽에서도 남편을 죽여준 빚이 있으니 부탁을 받으면 못 한다고는 하기 어렵죠. 아니, 그보다 도마테 온천 일에 협조하는 건 아카쿠마 온천 범행 이전에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정해진 일일 겁니다.”

  나리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은 잘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확인하느냐는 거야.”

  “렌터카는 어떨까요?”

  “렌터카라니, 무슨 얘기야?”

  “다이호 대학의 아오에 교수가 해준 얘기에서 좀 이상한 게 있었어요. 피해자가 혼자 현장에 간 것 같은데, 그 산책로 입구까지 어떻게 갔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도마테 온천에 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 교수 말이 맞더라고요. 산책로 입구는 온천가와는 반대편인데 가장 가까운 역에서도 몇 킬로는 되는 곳이에요. 차를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그럼 대개는 택시를 타잖아?”

  “피해자 혼자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내 생각에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분명 누군가 피해자를 산책로 입구로 유도한 거예요. 그렇다면 택시는 못 타죠. 사고가 일어난 뒤에 피해자에게 동행이 있었다고 운전기사가 증언해버리면 일이 꼬이니까요.”

  “미즈키 치사토는 차가 있나?”

  “있긴 해요. 하지만 빨간색 마세라티예요. 그런 차를 시골 온천지에 몰고 가면 당장 눈에 띕니다. 게다가 도쿄에서부터 가자면 거리가 너무 멀어요. 자칫 도로가 막혀 계획이 어그러질 위험성도 있죠.”

  “그래서 렌터카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흔적이 남잖아.”

  “그 일이 사건이 아니라 단순 사고로 처리되면 경찰이 렌터카 회사를 조사할 일도 없어요. 범인으로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죠.”


 나카오카의 설명에 나리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아진 두 번째 담배를 비벼 껐다. “흠, 그렇군.”

  계장님, 이라고 나카오카가 새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건 당일에 미즈키 치사토 혹은 아마카스 겐토라는 이름의 이용자가 있었는지, 현 내의 전 렌터카 회사에 조회해보면 어떨까요?”

  나리타가 쓰윽 노려보았다.

  “다른 현의 렌터카 업계에 기껏 관할 경찰서 계장이 어떻게 그런 일을 의뢰할 수 있겠냐.”

  “예, 그러니까 그건 좀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지만…….” 나카오카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물론 호시탐탐 본청 엘리트들을 따돌리려고 노리는 나리타의 성격을 뻔히 알고 해본 몸짓이다.

  나리타는 코 옆을 긁적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알았어, 과장을 통해 그쪽 현경에 협조를 요청해보자. 근데 자세한 건 아직 덮어뒀으면 좋겠는데. 뭔가 대충 둘러댈 이유를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겠네. 과장에게도 한동안 입 다무는 게 좋아. 이봐, 이 얘기 다른 누구한테 한 적 있어?”

  “아뇨, 계장님이 처음입니다.”

  “좋아, 내가 허가할 때까지는 발설 금지야. 그 대신 다른 일은 면제해줄게. 자네는 이 건에만 집중하라고. 도와줄 인력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몇 명 돌려줄 테니까. 단 그 친구들에게도 자세한 얘기는 하지 마. 알았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공략할 셈이야?”

  나카오카는 턱을 슬슬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마카스 겐토 쪽이죠.”

  “무슨 단서라도 있어?”

  “없어요. 그래서 원점으로 되돌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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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52.♡.103
지평선2 (♡.88.♡.15) - 2023/12/02 13:18:33

흥미진지하게 읽어내려 가는중입니다.
오늘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단차 (♡.252.♡.103) - 2023/12/02 15:51:4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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