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28~29

단차 | 2023.12.02 21:39:49 댓글: 2 조회: 17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4154
 28

     

     

     

     

  인테리어 잡지를 보고 있는데 곁에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고 치사토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기무라’라고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연결하고 네, 라고 대답했다.

  “지금 혼자?”

  “응, 집 거실이야.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좋아,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감행하기로 했어. 마지막 단계야. 실행은 오늘.”

 
 “오늘? 너무 갑작스럽잖아.”

  “대략적인 날짜는 전부터 말했었지? 다른 일정은 넣지 말고 언제라도 연락받을 수 있게 하라고 했잖아.”

  “그야 알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어.”

  “나도 사정이 있어서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막판까지 결정하지 못했어. 아무튼 일의 수순은 기억하고 있지?”

  “그건 기억하고 있지. 근데 정말 잘될까? 만일 그쪽에서 연락을 안 하면 어쩌지?”

  “그건 걱정할 거 없어. 틀림없이 올 거야. 연락을 안 할 리가 없어.”

  그는 항상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그 근거를 설명해주지 않으니 치사토로서는 불안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그가 말한 대로 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락이 온다고 쳐도 이렇게 급한 호출은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잖아. 그쪽도 일정이 있을 텐데.”

  “그럴 경우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어.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 하지만 어떻게든 응하려 할걸? 어떤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이걸 우선할 거야.”

  여전히 단정적인 말투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바로 전화하면 돼?”

  “응, 잘 부탁해.”

  “알았어.”

  전화를 끊고 치사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장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서 한 대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남편 미즈키 요시로의 것이다. 바로 오늘을 위해 그가 죽은 뒤에도 해약하지 않고 내내 보관해왔다. 전원을 켜려고 했지만 배터리가 떨어져 있었다. 서랍에 충전기도 함께 넣어두었다. 그걸 전화에 연결해 옆의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았다. 그 상태로 전원을 켜고 주소록을 열었다. ‘아’ 행에 상대의 이름이 있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빨라졌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숨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에서 할 말을 정리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기무라가 미리 알려주었다.

 
 침을 삼키고 발신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전화를 건 것이다. 번호 표시는 제한으로 되어 있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참에 착신음이 사라졌다. 상대 쪽에서 끊은 것이다.

  치사토는 크게 당황한 채 휴대전화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대체 누가 전화를 했을까. 아니면 잘못 걸려 온 전화였을까. 오랜만에 전원을 켜자마자 잘못 걸려 온 전화, 라는 우연이 과연 있을까.

  잠시 기다려봤지만 전화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역시 잘못 걸려 온 전화인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지금부터 큰일을 해치워야만 한다. 쓸데없는 걱정은 금물이다.

  액정 화면의 내용을 확인하고 발신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를 귀에 대자 발신음이 들려왔다.

  문득 불안해졌다. 만일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리 없다고 기무라는 말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 아닌가. 그럴 경우에는 일단 끊으면 되는 걸까. 아니, 그러면 상대가 공연히 경계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망설임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잠시 뒤 들려온 것은 부재중 전화로 바뀐다는 안내 목소리였다. 치사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전화를 잡은 손에 꾸욱 힘을 넣었다. 지금부터가 첫 번째 승부처다.

  삐이 하는 발신음이 들렸다. 치사토는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 씨인가요? 저는 미즈키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라고 합니다.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대로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번호가 표시되어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를 두 번 반복해서 남긴 뒤,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충전기에 이어진 휴대전화를 거실장 위에 내려놓고 치사토는 소파로 돌아왔다. 몸을 내던지듯 누워버렸다. 기껏해야 메시지를 남긴 것뿐인데 겨드랑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곧 끝난다. 모든 것이.

 
 테이블에 놓인 작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깨닫고 보니 이제 곧 3월이다. 즉 그 일로부터 벌써 1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그 만남으로부터.

     

  그날 치사토는 혼자서 마세라티를 운전하고 있었다. 피부미용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 근처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었을 때, 돌연 시야가 가로막혔다. 무슨 일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쿠웅 하고 뭔가에 부딪치는 충격이 있었다. 치사토는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길가에 한 젊은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괜찮아요?” 치사토는 뛰어가서 말을 건넸다.

  젊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고통스러운 듯이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내 차가 친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 거 같은데요?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미, 미안해요. 느닷없이 앞이 보이지 않아서.”

  치사토는 자신의 차를 돌아보았다. 앞 유리에 신문지가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에 날려 와 찰싹 달라붙은 것 같았다.

  클랙슨이 뿡뿡거렸다. 뒤에서 차가 온 것이다.

  “잠깐만요.” 젊은이에게 말하고 앞 유리의 신문지를 떼어낸 뒤에 일단 차를 도로가에 붙였다.

  다시 젊은이에게로 뛰어갔다. 그는 아직도 웅크리고 앉은 채였다.

  치사토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구급차를 불러야겠어. 아, 그리고 경찰에도 연락해야지.”

  하지만 젊은이는 손을 흔들었다.

  “신고하면 나중에 괜히 귀찮아지니까 하지 마요. 그쪽도 이래저래 조사받는 건 싫잖아요.”

  “그래도 이런 일은 정확히 처리해야…….”

 
 치사토의 말에 젊은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아, 나중에 내가 괜히 떼쓸까 봐 걱정돼요? 그럼 이렇게 하죠. 지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그 진단서를 본 뒤에 경찰에 신고할지 말지 결정하자고요.”

  젊은이의 제안은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쪽이 그렇게 해도 괜찮다면…….”

  “그럼 그렇게 해요. 근데 이 근처에 병원이 있던가?”

  “내가 아는 병원이 있어. 거기로 가요.”

  젊은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치사토는 초조해하면서도 젊은이가 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안도했다. 불량한 차림새도 아니고 말투도 공손했다. 얼굴 생김새에도 기품이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가벼운 타박상으로 밝혀졌다. 진단서를 받아 든 그는 더 이상 아픈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해결됐네요. 이 정도 일로 경찰에 신고하다니, 괜히 오라 가라 일 처리만 복잡해져요. 그쪽도 이제 마음이 놓이죠?”

  “그야 그렇지만……. 아 참, 맞다.” 치사토는 지갑에서 만 엔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내 젊은이에게 내밀었다. “봉투도 없이 이렇게 건네서 미안하지만, 우선 이거라도…….”

  그는 얼굴 앞에서 손을 내저었다.

  “에이,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진찰비를 내줬잖아요.”

  “내가 진찰비를 내는 건 당연하지. 이대로는 내가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어서 받아요.”

  젊은이는 치사토의 손맡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죠. 그 돈으로 다음에 밥을 사주세요. 가능하면 불고기로. 어때요?”

  깜짝 놀라서 치사토는 젊은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요, 결혼한 분을 유혹할 생각은 아니니까. 실은 이번 달에 지갑이 허전해서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했거든요.”

 
 그 표정이며 말투가 부드러워서 치사토는 희미하게 싹튼 경계심이 스르르 풀렸다.

  “그렇다면 기꺼이 초대하겠지만, 불고기로 되겠어? 프렌치든 이탈리안이든, 다 사줄 수 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코스 요리의 오르되브르라느니 샐러드라느니, 번거롭기만 하잖아요. 그냥 불고기면 돼요.”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날짜와 시간, 만날 장소를 그 자리에서 정했다. 남편 이외의 남자와 단둘이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치사토보다 아마도 다섯 살 이상은 어린 남자였다. 왠지 마음이 둥실 떠올랐다.

  그것이 그와의 만남이었다. 사흘 뒤 저녁에 니시아자부 불고깃집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는 기무라 고이치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가이메이 대학에 다니는데 현재는 휴학 중이라고 했다.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치사토가 묻자 잠시 생각해본 뒤에 그는 대답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측이라고 해야 하나?”

 
 “예측? 뭘 예측하는데?”

  “여러 가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측하죠. 이를테면…….” 그는 접시 하나를 치사토 앞에 놓았다. 그리고 양념병을 손에 들었다. “이 접시에 양념을 조금 따를 거예요. 어떤 모양이 될 것 같아요?”

  치사토는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묘한 것을 물어보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둥근 모양이 되지 않을까?”

  기무라는 접시에 시선을 떨구었다. “약간 일그러진 하트 모양.” 그렇게 말하고는 병을 기울여 양념을 조금 따랐다.

  치사토는 깜짝 놀랐다. 하얀 접시 가운데 갈색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정말이네? 어떻게 알았어?”

  “그러니까 예측이죠. 양념의 점도, 접시의 표면 상태, 그런 걸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예요.” 그는 접시를 끌어당기더니 잘 구워진 갈비를 하트 위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진짜 좋은 고기네.” 흐뭇한 듯 눈이 가늘어지면서 웃었다.

 
 괴짜 같은 젊은 애, 라고 치사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즐거운 식사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 그때는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괴짜 같은 젊은 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무라는 얘기를 잘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치사토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딱히 감출 일도 아니라서 뭐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별 재미도 없다고 생각한 내용에도 그는 표정을 바꿔가며 민감하게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런 손님만 있다면 클럽에서 일하는 것도 훨씬 더 즐거웠을 텐데, 라고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다음에는 내가 낼게요.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올 예정이니까.” 식사 후에 기무라가 말했다.

  “응, 꼭.” 치사토는 대답했다. 그저 빈말로 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예감을 품었다.

  언젠가 이 청년과 섹스를 할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요시로와 결혼한 이래, 다른 남자와는 잔 적이 없었다. 별로 그런 욕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고, 단순히 그럴 만한 만남이 없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다음에 만나 식사를 한 뒤, 기무라의 청으로 들어간 호텔 바에서 실은 방을 예약해두었다, 라고 그가 말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유혹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었는데, 미안.” 카운터석에서 그는 머리를 숙였다. “지난번 식사가 정말 즐거워서 멋진 여자분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물론 싫으시다면, 뭐 괜찮아요, 앞으로 절대 청하지 않을 테니까.”

  기무라가 여자를 사귀는 데 익숙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착실한 성품이라는 건 지난번에 만났을 때 이미 알았다.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잠시만 생각하게 해줘.” 치사토는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한 시간 뒤, 두 사람은 그가 예약한 방에 가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기무라는 섹스 경험은 부족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을 메우고도 남을 만한 젊음이 있었다. 야생동물 같은 약동감과 넘치는 에너지를 치사토는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침대 시트는 두 사람의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이후, 몇 주일에 한 번의 페이스로 만났다. 처음 한동안은 단순히 섹스 친구가 생긴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놀기 좋은 상대를 찾은 것뿐이다. 리드하는 건 언제든지 내 쪽이다.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모두 내가 하기 나름이다. 싫증 나거나 위험이 감지되면 관계를 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몇 번 만나는 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치사토는 깨달았다. 기무라는 그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도 즐거워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곤 했다. 요컨대 자신은 이런 시간에 굶주려 있었다, 라고 새삼 깨달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돈은 많지만 자극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것이 한계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치사토는 기무라에게 어떤 얘기든 다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남편에 대한 불만, 현재의 생활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까지 털어놓았다.

  “그럼 빠져나오면 되지.” 침대 안에서 치사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무라가 말했다.

  “어떻게?” 그녀는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남편이 빨리 죽어줬으면 좋겠다. 20년쯤은 참아줄 생각이었는데 점점 힘이 든다. 그렇지?”

  “그야 그렇긴 한데…….”

  “그럼 그런 날을 앞당기면 되지.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니네, 뭐.”

  “그래도…….” 치사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사람을 죽이다니.”

  기무라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근데 상상해본 적은 있지?”

  치사토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걱정할 거 없어.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나는 그저 그날을 앞당기자고 했을 뿐이야. 그날이라는 건 남편이 죽는 날이야. 물론 불사신이 아니니까 언젠가는 죽겠지. 그런 날을 좀 앞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게 바로 죽인다는 얘기 아니야?”

  “넓은 의미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형법상으로는 살인이 아니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은 사고로 사망하는 거야. 게다가 한없이 자연재해에 가까운 사고로. 재해가 일어날 곳에 데려가 그 피해를 당하게 하는 거.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니까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아.”

  어때, 라고 기무라는 치사토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젊은 애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걸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내 전공이 예측이라고. 어디서 어떤 자연재해가 일어나는지, 그것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어. 당신은 그런 곳에 남편을 데려가기만 하면 돼. 물론 당신은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해. 아,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아.”

  “그 자연재해라는 게 어떤 건데?”

  치사토가 묻자 기무라의 눈이 번쩍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서 말했다. “황화수소.”

  기무라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치사율이 높은 맹독 가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화산 지대인 일본에는 전국 곳곳에 화산가스 발생원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온천지로, 지하에서 황화수소 가스가 방출되고 있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지만 기상 조건에 따라 치사량 수준까지 농도가 상승할 우려가 있는 곳도 있다. 그런 곳에는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지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위험 지역 또한 전국에 산재한다.

  그런 곳을 찾아내 남편 미즈키 요시로를 데려가기만 하면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라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고,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아무 문제 없어. 의심받을 일이 전혀 없어서 몇 번이든 도전할 수 있거든. 이만큼 안전한 계획도 없을 거야. 당신이 할 일은 단 한 가지, 남편을 온천지에 데려가 산책을 가자고 해서 그 위험 지역에 서 있게 하는 것뿐이야.”

  그것뿐이라면 분명 간단할 것 같기는 했다. 무엇보다 리스크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어때, 해볼 거야?” 기무라가 물었다.

  치사토는 처음 그가 호텔 방에 청했을 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잠시만 생각하게 해줘.”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마음은 정해졌었는지도 모른다.

  치사토는 니가타 현의 나가오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근처 공장에 다니는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그보다 열 살이 어렸다. 작고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치사토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았는지 살림살이는 늘 빠듯했다.

  치사토가 철이 들 무렵, 여든 가까운 나이였던 조부는 이미 치매 징후를 보였다. 특히 심한 것이 배회 증상이어서 아버지 어머니가 손전등을 들고 찾아 나서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게다가 딱하게도 조모까지 넘어져 허리와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치사토가 초등학생 때였다. 그때부터 조모는 거의 자리보전 상태였다. 당연히 조부를 돌봐줄 수도 없었다. 모든 일거리가 어머니에게 집중되었다. 치매 걸린 시아버지와 누워 지내는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던 것이다. 도움을 줄 만한 친척도 없었다. 아버지는 요양 시설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구청에 가서 상의해봐도 유효한 해결책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거의 매일 밤마다 말다툼을 했다. 어머니는 늘 지쳐 있어서 치사토에게 그 화풀이를 했다. 아버지도 음울한 얼굴로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치사토가 중학생 때, 결국 부부는 이혼했다. 치사토는 어머니가 거둬주었다. 낮에는 슈퍼에서 밤에는 주점에서 일하느라 밤늦게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어머니는 치사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하곤 했다.

  “여자가 행복해지는 건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어. 결혼할 때는 상대를 미리 잘 알아보란 말이야. 남편 될 사람뿐만 아니라 그 부모 형제도. 막상 결혼했는데 너한테 힘든 일거리가 털썩 떨어지면 어떡할 거야? 제일 좋은 남편감은 나이 많고 돈도 많은 남자야. 그런 사람이면 설령 시부모가 있어도 세상 떠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고, 일단 돈이 있으면 노인 모시기도 훨씬 수월해. 나도 그런 사람을 골랐어야 했어. 괜히 사랑 타령만 하다가는 편한 밥은 못 먹는 거야.”

  오랜 세월 어머니의 노고를 지켜본 치사토의 뇌리에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이 새겨졌다.

  이혼은 했지만 아버지와는 정기적으로 만났다. 만날 때마다 아버지는 여위어가는 듯했다. 얼굴색도 좋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조부모를 돌봐주려고 회사를 조기 퇴직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집에 몰래 가본 적이 있었다. 현관문이 잠겨서 마당으로 돌아가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함 소리였다. 뒤를 이어 부르짖는 듯한 또 다른 목소리.

  치사토는 머뭇머뭇 안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덜퍼덕 주저앉은 할아버지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떼쓰는 어린애 같았다. 그 곁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안 돼, 안 된다고 했잖아!” 아버지가 꾸짖으면서 조부의 뺨을 내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함께 슬픔이 담겨 있었다.

  치사토는 상황을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뭔가 말썽을 부린 것이다. 그토록 효심 깊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손을 대다니. 학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발소리를 죽여 도망치면서 역시 어머니 말이 옳다고 치사토는 생각했다. 돈만 있었다면 아버지가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올라왔다. 재학 중에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도쿄 롯폰기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혹시 함께 일할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진즉부터 말했었다. 어머니에게는 사실대로 말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네 인생이니까 너 좋을 대로 해. 근데 허접한 남자한테는 절대 빠지지 마.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배웅해주었다.

 
 롯폰기 클럽에서 일을 시작했다. 요령은 금세 파악했다. 특별히 좋아해주는 손님도 많았고, 데이트를 청해 오는 건 노상 있는 일이었다. 그중 몇몇 남자와는 관계를 가졌지만 모두 치사토에게는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눈에 차는 사람을 못 만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 뒤에 긴자 쪽으로 옮겼다. 그래도 이렇다 할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긴자에서 두 번째로 옮겨 간 가게에 찾아온 사람이 미즈키 요시로였다. 독신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가 생겼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산가라는 게 밝혀져 더욱더 마음이 쏠렸다. 고령의 모친이 있는 모양이지만 이미 요양 시설에 들어갔다니 이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즈키 요시로도 치사토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2차 데이트를 청했을 때, 재미 삼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이라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사귈 마음이시라면 오케이예요.”

  “물론 진심이지.” 요시로는 말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걸로, 어때?”

  치사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요시로에게 안겼다.

 
 마흔 살이나 나이 많은 남자와의 결혼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요시로는 호화롭게 살게 해주었고 실력파 프로듀서의 아내라는 명예도 기분 좋았다. 요시로의 친척들에게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지만 그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무라가 그의 죽음을 앞당겨준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고 아직 충분히 젊은 상태에서 새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는 건 눈부실 만큼 꿈이 넘치는 이야기였다.

  다음에 만났을 때 기무라는 마음의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다.

  치사토는 아직 망설이면서도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남편을 어느 온천으로 데려가면 되는 거야?”

  기무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후보지는 아카쿠마 온천이라고 대답했다. 나아가 시기는 11월에서 12월 사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양한 조건이 갖춰지는 게 분명 그 무렵이야. 남편 일정을 미리 파악해둬.”

  “응, 알았어.”

 
 그렇게 계획은 굴러가기 시작했지만 치사토는 여전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밥을 먹다가 요시로를 보면서 이 사람이 내년에는 이 세상에 없는 건가, 라고 생각해봐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무라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기대하며 요시로에게 생명보험을 들자고 말해보았다. 결혼한 뒤에 남편의 자산을 알아보니 예상했던 만큼 많지는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요시로도 그리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응, 이제 슬슬 그런 얘기 나올 줄 알았어”라면서 짓궂은 웃음을 보였다. “당신은 일단 재산을 노리고 나와 결혼했으니까 말이야. 좋아, 내가 다 해줄게. 당신이 원하는 만큼 실컷 계약하라고.”

  아마도 그는 아무리 재산을 노린 결혼이라도 치사토가 설마 남편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기도 했다.

  12월에 접어들자 치사토는 요시로에게 온천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

  “웬일이야, 온천 같은 데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아니에요. 진짜 멋진 비탕이라는데요? 함께 가요, 여행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그렇다면 나야 좋지.” 젊은 아내의 여행 제안에 남편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일정에 대해서는 이미 기무라의 상세한 지시가 있었다. ‘자연재해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날’이라는 얘기였다. 그가 알려준 날을 끼고 2박 3일의 플랜을 짰다.

  그런데 실행일이 다가오자 기무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잘되면 그다음에는 당신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나 역시 빨리 죽어주었으면 하는 인간이 있거든. 게다가 두 명이야.”

  치사토는 숨을 헉 삼켰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도와달라니, 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것인가. 범죄를 저지르라는 건가.

  “괜찮아. 별일도 아니야. 이번 일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손댈 건 전혀 없어. 누구도 당신을 의심하지 않아.”

  나아가 기무라는 말을 이었다.

 
 “우선 남편이 어떻게 되는지 잘 지켜봐. 그러면 당신도 틀림없이 납득할 테니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기무라의 화술에는 치사토의 마음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마력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닥쳐왔다.

  치사토는 요시로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무라가 미리 지시해준 시각에 여관을 나섰다.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하며 그가 알려준 곳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요시로가 의아한 듯 치사토에게 물었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냐? 폭포는 어디에도 없을 거 같은데? 그보다 여기가 원래 사람이 드나드는 길인가? 짐승 길 아니야?”

  “걱정 마세요. 내가 알기로는 이 길이 틀림없으니까.”

  이윽고 문제의 지점에 도착했다. 치사토는 여관에 카메라 배터리를 깜빡 놓고 왔다고 요시로에게 말했다.

  “금방 가져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사진 좀 안 찍으면 어떻다고?”

  “아이, 싫어,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만 여기 있어요. 아무 데도 가지 말아요.” 뒤돌아보지 않고 치사토는 뛰었다. 요시로는 뒤쫓아 오지 않았다.

  그다음은 경찰과 소방대에 몇 번이나 진술했던 그대로였다. 여관에 돌아가 카메라 배터리를 챙겨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더니 요시로가 쓰러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희미하게 달걀 썩는 듯한 냄새가 났을 뿐이다.

  치사토는 다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진짜구나. 진짜였구나. 기무라의 얘기는 거짓이 아니었어……. 이것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여관에 전화를 걸었다. “큰일 났어요. 산길에서 남편이 쓰러져 전혀 움직이지를 않아요.”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건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그때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치사토는 기무라라는 인간이 두려워졌다. 거스르는 것 따위, 불가능했다. 약속한 대로 나스노 고로라는 배우를 도마테 온천의 산책로 입구까지 안내했다. 나중에 뉴스를 통해 그 역시 화산가스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 기무라는 또 한 사람을 죽음으로 초대하려 하고 있었다. 치사토는 그 일을 거들어야만 한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정말일까. 이대로 계속 저승사자의 조수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두 번째 타깃이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말을 듣고 치사토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남편의 장례식 때 나타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가능할까.

  혹시—.

  기무라는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던 게 아닐까. 내가 운전하던 차의 앞 유리를 향해 신문지를 날리고, 시야가 가로막힌 틈을 노려 큰 부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만 일부러 부딪혔는가. 기무라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전화 통화 때 그 얘기를 하자 기무라는 시들한 목소리로 “그거야 어찌 됐건 상관없잖아?”라고 말했다. “우연이었든 의도적이었든 무슨 차이가 있어? 결과적으로 당신과 나는 원래 목적을 착착 달성해가고 있는데.”

  “혹시 원래 내 남편도 네가 죽이고 싶었던 거 아니야? 맞아, 그렇구나, 나를 이용한 거였어?”

  “글쎄 그것도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게다가 나한테 이용당했다고 해도 당신이 뭔가 손해라도 봤어? 아니잖아?”

  “……너, 누구야?” 치사토가 물었다. “기무라가 본명이 아니지? 대체 누구야?”

  “이봐요, 치사토 씨.” 기무라가 웬일로 이름을 불렀다. 오싹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 세상에는 모르는 게 오히려 좋은 일도 있어. 아니면 당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가 예측이라도 해줄까?”

  치사토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렇지, 그렇게 입 다물면 돼”라고 그는 말했다.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 그러면 당신 인생은 그리 나빠지지는 않아.”

  암흑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듯한 그 목소리는 지금도 치사토의 귓속에 달라붙어 있다.

 
 어떻든 한시바삐 풀려나고 싶다. 기무라와는 더 이상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이번이 반드시 마지막이어야 한다.

  착신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죽은 남편의 휴대전화가 거실장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을 꿀꺽 삼키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착신 표시에 ‘아마카스’라고 찍혀 있었다.

 


 29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를 들은 것은 드라이어로 한창 머리를 말리던 때였다. 마도카는 드라이어를 내던지고 욕실을 뛰쳐나왔다. 스마트폰은 침대 위에 있다. 서둘러 알람 소리를 껐다.

  드디어 왔구나—.

  마도카는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머리는 아직 덜 마른 느낌이지만 여기서 미적거릴 수는 없다. 상대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옷을 챙겨 입고 핑크색 니트 모자로 마무리했다. 다케오가 설마 자신을 놓칠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어떻든 금세 알아볼 수 있게 해두는 게 좋다.

  호텔 정면 현관을 나와 길을 건넜다. 잠시 기다리자 택시가 다가왔다.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행선지를 말했다. 운전기사의 대답이 퉁명스러운 것은 너무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도카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뒤쪽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흰색 왜건이 뒤에 따라붙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다케오. 검은 안경은 변장을 해보겠다고 쓴 것인가.

  목적지 근처에서 운전기사에게 말해 택시를 세웠다. 요금을 내고 밖으로 나서자 수십 미터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흰 담장에 둘러싸인 저택이 보였다. 한적한 주택가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미즈키 요시로의 집이다. 지금은 아내 치사토가 혼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그녀는 집에 있을 터였다.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전화를 기다리기 위해.

  아니, 어쩌면 전화는 이미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다음 행동에 나서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마도카는 발길을 돌렸다. 저만치 길 위에 흰색 왜건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의 다케오는 시트를 한껏 뒤로 젖히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왜건 왼편으로 달려가 뒷좌석의 슬라이드도어를 홱 열었다. 누워 있던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수리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젊은 직원이었다.

  운전석의 다케오가 뒤를 돌아보며 눈이 둥그레졌다.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아저씨는 연구소로 돌아가세요.” 마도카는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나한테 들켰다고 보고하시면 돼요. 자, 어서요.”

  남자는 판단을 망설이는 얼굴로 다케오 쪽을 보았다. 다케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옆에 놓아둔 여행 가방을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

  자리를 바꾸듯이 마도카가 뒷좌석에 올랐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마도카는 다케오에게 물었다.

  “저 아저씨는 이번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거의 아무것도 모르지. 내가 잠깐 눈 붙이는 동안 감시를 대신 해준 것뿐이야. 마도카가 호텔에서 나오면 깨워달라고 했어.” 다케오는 젖혀둔 시트를 올리고 모자를 벗었다.

  “어휴, 고생 많이 하셨네.” 마도카는 곁에 놓인 종이 박스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빵이며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감시를 눈치챌 줄은 몰랐어.”

  “내가 바보예요? 아, 그 안경은 벗으세요. 어울리지 않으니까.”

  다케오는 안경을 벗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라, 나한테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게 규칙일 텐데요?” 짜증 난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린 다케오의 옆얼굴을 보며 마도카는 빙긋이 웃었다. “저기 흰색 담장의 저택이 보이죠?” 앞 유리 너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응, 하고 다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집에서 어떤 여자가 나올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다음은 제가 그때그때 얘기할게요. 아셨죠?”

 
 “알았어.” 다케오는 기합을 넣듯이 앉음새를 바로잡았다.

  마도카는 시트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종이 박스 안의 크림빵을 꺼내 먹었다. 적당히 단맛을 줄인 빵이라서 꽤 맛있었다.

  그러자 겐토가 유난히 단것을 좋아했던 게 생각났다. 연구소에서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따로따로 테스트와 훈련을 받았지만, 휴식 시간은 늘 함께 보냈다. 그런 때에 그는 초콜릿 같은 달콤한 간식을 즐겨 먹곤 했다.

  둘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내용도 많았다. 해저의 기복과 리얼타임의 온도 변화를 지구상의 몇 개소에서 모니터하면 지진의 예지가 가능할 것인가, 라는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얘기가 무척 즐겁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겐토가 오랜 세월 동안 깊은 고독감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일들의 예측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동료가 없다면 도리어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도카에게는 겐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내내 혼자였다.

  마침내 얻게 된 동료에게 그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모양이었다. 어느 날, 중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선뜻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얘기였다.

  아마카스가에서 일어난 황화수소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 라는 것이다. 게다가 겐토는 범인을 알고 있다고 했다.

  “범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어. 그러니까 확실해.”

  그 범인의 이름을 겐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왜냐하면 범인을 알게 된 것이 그가 식물인간 상태일 때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겐토를 만난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동기는 범인의 단순한 이기심, 이라고 겐토는 말했다. 머리가 돌아버린 인간이 저지른 이기적인 범죄, 라고.

  “그자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 반드시 내 손으로 단죄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는…….” 겐토는 마도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뒷일을 잘 부탁해.”

 
 마도카는 그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복수를 위해 연구소를 떠날 생각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복수를 끝낸 뒤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생각이리라.

  그건 좋지 않아, 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설득의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게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마도카는 안절부절, 초조한 마음이었다. 겐토가 걱정스러웠다. 누군가와 상의하고 싶었지만,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그와의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겐토가 연구소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마도카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단지 그를 찾으러 가겠다는 말만 거듭했다. 그러자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그녀에게 보디가드라는 명목으로 감시가 붙여졌다.

  대책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던 참에 아카쿠마 온천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겐토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미즈키 요시로라는 피해자의 경력을 알고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범행과 관련된 인물일 거라고 짐작했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 수도권에 폭설이 내릴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기상청의 날씨 예보는 허술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다. 마도카는 마음을 굳게 먹고 탈주 계획을 세웠다.

  성공적으로 탈주한 뒤, 즉시 아카쿠마 온천으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했다. 겐토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단지 공범자는 필요했다. 피해자의 아내가 그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묵었던 여관에 찾아가 밤중에 숙박부를 훔쳐보며 미즈키 부부에 대해 조사했다.

  이제 겐토는 어떤 수를 쓰고 나올까.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단죄하기 전에 매장해버려야 할 공범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그렇게 속을 태우고 있는 참에 도마테 온천에서 똑같은 양상의 사건이 또다시 일어났다. 피해자의 신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었지만, 아오에 교수에게서 무명 배우였다는 말을 듣고 역시 겐토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째서 황화수소 중독에 그토록 집착할까. 자신들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날수록 아마카스 사이세이 쪽에서 경계하게 되리라는 건 예상을 못 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겐토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퍼뜩 깨달았다. 그는 8년 전의 살인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게 통고한 것이다. 더구나 이 복수극의 주인공이 바로 겐토 자신이고, 기억을 잃기는커녕 옛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노라고 일부러 알려주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건가. 그 목적은 단 한 가지,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아마카스의 입장에서는 그 일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겐토는 방해가 되는 존재다.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들 터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겐토가 서서히 다가온다면 그 또한 반격에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다보고 겐토는 덫을 놓았다. 그가 이용하는 건 유일한 공범자 미즈키 치사토일 것이다. 그녀에게 지시해 아마카스에게 연락하도록 한다. 그럴 경우, 분명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를 쓸 것이다. 낯선 번호에서 걸려 온 전화라면 아마카스도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에서 연락이 온다면 그는 즉각 덫이라고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 덫인 줄 알면서도 아마카스가 움직일 거라고 겐토는 내다본 것이다.

  마도카는 미즈키 요시로의 휴대전화에 걸어보았다. 예상대로 전원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전원을 켜는 때가 온다. 바로 겐토의 복수극이 마지막 장을 맞이하는 때다. 마도카는 스마트폰을 개조해 5분 간격으로 미즈키에게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를 걸고, 만일 연결될 경우에는 알람이 울리게 해두었다. 조금 전의 알람 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즈키 치사토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경계하던 아마카스가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메시지를 남길 것이다. 그것을 듣고 아마카스 쪽에서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유감스럽게도 마도카 역시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다케오가 우물우물 뭔가 말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더니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누구랑 통화했어요? 뭘 알아냈죠?” 마도카가 물었다.

  “기리미야 씨야. 우선은 마도카의 지시를 따르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어.”

  조금 전의 남자 직원에게서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잘됐어요. 이제는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네요.”

  다케오가 슬쩍 목을 돌려 이쪽을 보았다. “질문 좀 해도 될까?”

  “규칙상 안 되지만, 이번만 특별히 봐드릴게요. 뭔데요?”

  “저 집에서 여자가 나오면 미행할 생각이야?”

  “네, 그럴 건데, 왜요?”

  “그렇다면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어.”

  “뭐죠?”

  “이 차에는 발신기가 달렸어. GPS에 의한 위치 정보가 리얼타임으로 당국에 전해지게 돼.”

  “당국?”

 
 “경찰 당국. 이 건에 대해 경찰청이 주도하는 특별 수사 팀이 움직이기 시작했거든.”

  마도카는 차의 천장을 우러러보았다. “아이 참, 그런 건 미리미리 말했어야죠!”

  “미안하다.” 다케오가 목을 움츠렸다.

  “그 발신기는 어디에 붙였죠? 떼어낼 수 없어요?”

  “특수한 공구가 아니면 안 돼.”

  큰일 났네, 라고 마도카는 생각했다. 아직은 경찰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최소한 이 차로 미즈키 치사토를 미행하려던 계획은 철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자동차 한 대, 그리고 도와줄 사람도 한 명이 더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 일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도와주겠다고 나설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번 일을 아는 사람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 딱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더 이상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실은 마도카 쪽에서 관계를 끊은 사람이다. 내가 필요하다고 다시 불러내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둔 상황에서 염치를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다.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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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52.♡.103
지평선2 (♡.88.♡.15) - 2023/12/04 14:18:16

아오에한테로....

단차 (♡.252.♡.103) - 2023/12/04 22:46:42

꾸준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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