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ㅡ 비밀 정원에서 (완결)

단밤이 | 2024.01.18 09:30:25 댓글: 0 조회: 20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1183
The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


비밀 정원에서
이 세상이 시작된 후로, 한 세기마다 놀라운 것들이 발견되었다. 지난 세기에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근사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새로 시작된 이번 세기에는 더욱더 훌륭한 것들이 몇백 개나 더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이한 일이 새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어느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얼마 후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놀라운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온 세상은 왜 몇 세기 전에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이 지난 세기에 알아내기 시작한 새로운 것들 중 하나는, 생각은 단지 그 생각만으로도 전기 배터리처럼 강력해서, 햇빛처럼 좋을 수도 있고 독약처럼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슬픈 생각이나 나쁜 생각이 마음속으로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면, 성홍열을 옮기는 균이 몸속에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것처럼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몸에 들어온 후로 계속 머무르게 내버려 두면, 사는 동안 그런 생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메리 아가씨는, 마음속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사람들을 헐뜯는 의견들과 그 무엇에도 기뻐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결심이 가득 차 있을 땐, 안색은 누렇고, 늘 어디가 아프고, 매사 지겨워하는 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메리가 전혀 모르는 동안에도 주변 환경은 메리에게 매우 상냥했다. 환경은 메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메리의 마음이 서서히 울새, 아이들이 복작거리는 황무지의 시골집, 심술궂은 묘한 정원사 영감과 평범하고 자그마한 요크셔 하인, 봄과 나날이 되살아나는 비밀 정원, 황무지의 소년과 그 소년의 ‘동물 친구들’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메리의 간과 소화력에 영향을 미쳤고, 피부를 누렇게 만들고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불쾌한 생각들은 들어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콜린이 제 방에 틀어박힌 채, 두려움과 병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등에 생길 혹과 곧 찾아올 죽음을 곱씹는 동안, 콜린은 걸핏하면 히스테리를 부리고 반쯤 미치광이가 된 작은 건강 염려증 환자였을 뿐, 햇살과 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노력을 하면 건강을 되찾고 두 다리로 설 수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아름다운 새 생각들이 오래된 흉측한 생각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콜린에게도 생기가 되돌아왔고, 피는 혈관에서 건강하게 뛰었고, 힘이 홍수처럼 콜린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콜린의 과학적 실험은 꽤나 현실적이었고 단순했다. 그 실험에 괴상한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불쾌하거나 용기를 꺾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을 때 기분이 좋아지고 확실하게 용기를 주는 생각을 얼른 떠올리고, 그 생각으로 나쁜 생각을 몰아낼 수 있는 분별력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상상조차 못 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두 가지가 한곳에 함께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얘야, 네가 장미를 키우는 곳에서
엉겅퀴는 자랄 수 없단다.
비밀 정원이 생기를 되찾아가고 더불어 두 아이가 생기를 찾아가는 동안,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와 스위스의 계곡과 산처럼 아름다운 곳들을 방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지난 10년 동안 마음이 어둡고 가슴 아픈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용기가 없었다. 그는 어두운 생각 대신 다른 생각을 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푸른 호숫가를 산책하며 어두운 생각을 했다. 사방에 짙푸른 용담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고 온통 꽃향기로 진동을 하는 산등성이에 드러누워서도, 어두운 생각을 했다. 행복했던 순간 지독한 슬픔이 쏟아져 내리자 그는 암흑이 자신의 영혼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 속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작은 빛줄기조차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기억에서 지우고, 의무를 저버렸다. 그가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동안 그의 주위로 암흑이 어찌나 짙게 깔렸는지,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울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암흑이 독약처럼 주변의 공기를 음울함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반쯤 미쳤거나 영혼에 죄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침울한 표정에, 어깨가 구부정하고, 키가 컸다. 그가 호텔 숙박부에 기입하는 이름은 언제나 ‘영국, 요크셔, 미슬스웨이트 장원, 아치볼드 크레이븐’이었다.
크레이븐 씨는 서재에서 메리 아가씨를 만나고 그 아이에게 ‘땅을 조금’ 가져도 된다고 말한 후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며칠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가장 조용하고 외진 곳들만 골랐다. 크레이븐 씨는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솟은 산 정상에 올라, 막 떠오른 태양이 산들을 환하게 밝혀 온 세상이 방금 태어난 것처럼 보일 때 주위 산들을 굽어보았다.
그 햇살도 결코 그의 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0년 만에 처음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상황은 변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그림 같은 계곡에 있었다. 누구의 영혼이라도 그림자 속에서 건져줄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광 속을 홀로 걸을 때였다. 한참을 걸었지만, 그곳 풍경은 그의 영혼을 구해주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피곤해진 그는 이끼가 양탄자처럼 깔린 시냇가에서 쉬려고 털썩 주저앉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그 시내는 보드랍고 축축한 녹색 이끼 사이로 난 좁은 물길을 따라, 소리도 경쾌하게 졸졸졸 흘러갔다. 가끔 돌멩이들 위나 주위를 지나갈 때면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 나지막하게 후후 웃는 소리를 냈다. 그는 물가로 새들이 다가와 머리를 푹 담그고 목을 축인 후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냇물은 살아 있는 생물 같았고, 시냇물의 작은 목소리가 고요함을 더욱 깊게 만드는 듯했다. 골짜기는 정말, 정말 고요했다.
앉아서 흘러가는 맑은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아치볼드 크레이븐은 몸과 마음이 고요한 골짜기처럼 점점 차분해지는 듯했다. 이러다 잠에 곯아떨어지려나 싶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앉아서 햇빛이 반짝이는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흐르는 물을 따라 그의 시선이 물가에 자라는 식물에 가닿았다. 아름다운 푸른 물망초 한 무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물가에 바짝 붙어 자라는 통에 잎사귀들이 물에 젖어 있었다. 그 물망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레이븐은 몇 해 전에도 그 꽃을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물가의 물망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몇백 송이나 되는 자그마한 꽃망울들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따뜻한 마음으로 떠올렸다. 그는 그 단순한 생각이 느리지만 착실하게 그의 마음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생각이 조금씩 자리를 넓혀나가면서 다른 것들을 살며시 몰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마치 흐르지 않고 고여 있던 샘에서 맑고 달착지근한 샘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솟아올라, 어느새 시커먼 물이 샘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물가에 앉아 섬세한 푸른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골짜기가 점점 고요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그러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일어나 숨을 천천히 깊이 들이쉬고, 의아함을 느끼며 이끼 양탄자에 섰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뭔가가 조용하게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뭐지?”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손을 이마 위로 가져갔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고 느껴져!”
이런 일이 그에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다시 미슬스웨이트로 돌아갔을 때, 그가 골짜기에 갔던 그날 콜린이 비밀 정원에 들어서며 이렇게 소리쳤다는 사실을 아주 우연히 알고는 그는 그 골짜기에서 보낸 기묘한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오래, 오래, 오래 살 거야!”
묘한 고요함은 그날 저녁 내내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는 모처럼 평온한 잠을 잤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머지않아 그의 곁을 떠났다. 그것을 잡아둘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이튿날 밤 그는 어두운 생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그것들은 마음속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는 그 골짜기를 떠나 다시 방랑 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도 이상하게 여겼다시피, 자신도 모르게 몇 분이나 때로는 30분 정도 시커먼 짐을 다시 어깨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절절하게 느꼈다. 아주 천천히,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 정원과 함께 ‘되살아나고 있었다’.
황금빛 여름이 점점 무르익어 황금빛 가을이 되자, 그는 코모 호수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그는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그는 수정처럼 푸르고 맑은 호숫가에서 며칠을 보내거나, 신록이 싱그러운 언덕을 올라 지쳐 잠이 들 수 있을 때까지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그 무렵 그는 전보다 잠을 더 잘 자게 되었다. 게다가 악몽이 찾아와 그를 공포로 몰아넣는 일도 그쳤다.
‘어쩌면.’ 그가 생각했다. ‘내 몸이 점점 건강해지는 모양이군.’
정말로 그의 몸은 점점 건강해졌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변화하는 드물게 평화로운 시간 덕분에, 몸과 함께 영혼도 서서히 강인해져 갔다. 그는 미슬스웨이트를 떠올리기 시작했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지 고민했다. 이따금 아들을 흐릿하게 떠올렸다. 방에 들어가 네 기둥을 세운 조각 침대에 다시 다가가서, 끌로 간 것처럼 뾰족한 턱과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에, 속눈썹이 기이할 정도로 새까맣게 난, 눈을 꼭 감고 자는 아들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지 자문했다. 그러고는 진저리를 쳤다.

어느 화창한 날, 그는 산책을 너무 멀리까지 나갔다가 둥근 달이 어느새 밤하늘 높이 걸리고 온 세상이 보라색 그림자에 잠겨 은빛으로 빛날 즈음에 돌아왔다. 호수에서부터 호숫가를 지나 숲속까지 이어진 고요한 풍광이 어찌나 근사한지, 그는 머무르고 있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나무로 둘러싸인 물가의 작은 테라스로 내려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상의 향기가 감도는 밤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는 마음속으로 묘한 차분함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차분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더니, 어느새 그는 잠이 들었다.
언제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그는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얼마나 자신이 깨어 있었고 정신이 말짱하다고 생각했는지 기억이 났다. 테라스에 앉아서 늦게 핀 장미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발치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온 그 목소리는 달콤하고, 청명하고, 행복하게 들렸다. 먼 곳의 소리 같은데도, 바로 곁에서 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아치! 아치! 아치!” 그의 이름을 부를수록 목소리는 더 달콤하고 청명해졌다. “아치! 아치!”
그는 자기가 놀라지도 않은 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는 진짜 사람의 목소리였고, 너무나 자연스러워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릴리아스? 릴리아스?” 그가 대답했다. “릴리아스! 당신 어디에 있어요?”
“정원에요.” 황금 플루트에서 나온 듯한 소리가 되돌아왔다. “정원에 있어요!”
다음 순간 꿈이 끝났다. 하지만 그는 곧장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는 그 사랑스러운 밤이 끝날 때까지 깊고 달게 잠들었다. 마침내 눈을 뜨자, 어느새 찬란한 아침이 찾아왔고 하인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하인은 이탈리아 사람이었고, 그 별장 하인들이 모두 그렇듯이, 외국인 주인이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크레이븐 씨가 언제 별장을 나섰다가 돌아오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가 잠자리를 어디에서 마련할지, 정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닐지, 밤새 호수를 떠다닐 보트에 누워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하인은 편지 몇 통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크레이븐 씨가 편지를 가져갈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하인이 물러나자, 크레이븐 씨는 잠시 편지를 들고 앉아서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마치 일어난 줄 알았던 잔인한 일이 실은 일어나지 않은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 느껴졌다. 뭔가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는 너무나도 생생해 진짜 같았던 꿈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정원에 있어요!” 그가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정원에 있다고! 하지만 문은 잠겼고 열쇠는 깊이 파묻혀 있을 텐데.”
잠시 후 그가 편지를 힐끔 보니, 가장 위에 놓여 있는 편지는 영어로 쓰인 요크셔에서 온 편지였다. 평범한 여성의 필체였지만 아는 사람의 필체가 아니었다. 그는 발신인이 누군지 짐작도 못 한 채 편지를 개봉했다가, 바로 첫 몇 마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친애하는 크레이븐 씨께
저는 언젠가 황무지에서 주제넘게 크레이븐 씨에게 말을 걸었던 수전 소워비입니다.
그때는 메리 아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주제넘은 짓을 하겠습니다. 제가 크레이븐 씨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돌아오시면 분명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무례를 양해해주십시오. 저는 크레이븐 부인이 이곳에 계신다면 분명 돌아오라고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충실한 하인
수전 소워비
크레이븐 씨는 그 편지를 한 번 더 읽고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는 줄곧 그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슬스웨이트로 돌아가야겠어.” 그가 말했다. “그래, 당장 돌아가자.”
그러더니 정원을 지나 별장으로 들어가 피처에게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요크셔로 돌아왔다. 긴 시간 기차를 타고 오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들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난 10년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가 말이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아들을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아들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옛 기억이 마음속에서 떠올랐다. 그는 아이는 살고 어머니는 죽었기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던 어두운 날들을 떠올렸다. 그는 아기를 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기를 보러 갔을 때는, 아이가 어찌나 병약한지 모두 몇 주밖에 못 살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몇 주가 흘러도 아기는 살아남아 돌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아이가 몸이 휘어져 장애를 안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아버지가 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라는 실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에게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보냈고, 사치스럽게 살게 해주었다. 하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불행만 파고들었다. 1년간 집을 떠나 있다가 처음으로 미슬스웨이트로 돌아갔을 때, 비참해 보이는 어린 아들이 무심한 듯 힘없이 새까만 속눈썹이 난 커다란 잿빛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행복했던 눈과 너무나 닮았으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죽음을 본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홱 돌려버렸다. 그 후로 크레이븐 씨는 아이가 잠이 들었을 때가 아니면 거의 보러 가지 않았다. 아들에 대해서는 사납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반쯤 미쳐버렸으며, 장애를 안고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불같은 분노를 터트려 목숨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무슨 일이든 아들의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들에 관한 기억이라면, 어느 하나 유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탄 기차가 협곡을 통과하고 황금빛 들판을 지나는 동안, ‘되살아나고 있는’ 남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잘못을 한 거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10년은 긴 시간이야. 뭔가를 시도해보기에 너무 늦었을지 몰라. 정말 너무 늦었을 거야. 대체 지금까지 나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물론 이것은 잘못된 마법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늦었다’라는 말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콜린도 그에게 잘못된 마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검은 마법과 흰 마법은 고사하고,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제부터 배워야 했다. 그는 수전 소워비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오로지 모성애로, 콜린의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건가 궁금했다. 콜린이 죽을 정도로 심하게 아프다고 말이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신기한 차분함이라는 주문에 걸려 있지 않았다면, 크레이븐 씨는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차분함은 일종의 용기와 희망까지 선사해주었다. 최악의 사태에 대해 상상하는 대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더 나은 쪽을 믿으려 애를 썼다.
“그 부인은 혹시 내가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아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미슬스웨이트에 가는 길에 소워비 부인을 만나봐야겠어.”
하지만 황무지를 가로질러 가다가 작은 시골집 앞에서 마차를 세우자, 주위에서 함께 놀던 일곱에서 여덟 명 되는 아이들이 전부 고개를 까닥하며 다정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더니 어머니는 아기를 낳는 산모를 돌보려고 아침 일찍 황무지 건너편으로 갔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 디콘’이 장원의 한 정원에서 일을 하는데, 일주일에 며칠씩 그곳에 간다고 알려주었다.
크레이븐 씨는 튼튼하고 작은 몸에 볼이 통통하고 발그레한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아이들이 건강하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환하게 웃는 아이들에게 마주 웃어주며,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가장 나이가 많은 ‘우리 엘리자베스 엘런’에게 주었다.
“여덟 개로 나누면 너희 각자에게 반 크라운씩 돌아갈 거야.” 그가 말했다.
마침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면서, 서로 팔꿈치로 쿡쿡 찌르고 깡충깡충 뛰며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나누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마차는 그곳을 떠났다.
눈부신 풍경이 펼쳐진 황무지를 마차를 타고 가로지르니,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황무지를 지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땅과 하늘과 저 멀리 만발한 보라색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600년 동안 그의 핏줄이 살던 고색창연한 대저택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 느낌 말이다. 어떻게 그는 지난번에 양단 휘장이 늘어진, 네 기둥을 세운 침대에 누운 채 꽉 닫힌 방에 갇힌 아들에 대한 생각을 떨치고 그곳을 떠날 수 있었을까? 지금 가면 아들이 조금이라도 호전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이와 마주하지 못하는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 꿈은 얼마나 생생했던가. “정원에 있어요. 정원에 있어요!”라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청명했던가.
“열쇠를 찾아야겠어.” 그가 말했다. “그 문을 열어볼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가 저택에 도착하자 평소처럼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하인들은 그가 훨씬 밝아 보이고, 보통은 피처에게 시중을 받으며 지내던 저택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서재로 가더니, 메들록 부인을 불렀다. 어쩐지 흥분한 표정에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가정부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들어왔다.
“콜린은 어떻게 지내오, 메들록?”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어른.” 메들록 부인이 대답했다. “도련님은, 도련님은 달라지셨다고 할까요.”
“악화된 거요?” 그가 물었다.
메들록 부인은 안색이 말 그대로 벌게졌다.
“음, 그러니까요.” 부인은 설명을 하려고 했다. “크레이븐 선생님도, 간호사도, 저도 정확히 도련님의 상태를 모릅니다.”
“그건 왜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콜린 도련님은 상태가 호전된 걸 수도 있고 나빠진 걸 수도 있습니다. 도련님의 식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수준이에요. 그리고 도련님의 태도는.”
“그 애가 전보다 더, 그러니까 더 괴상해졌소?” 크레이븐 씨가 걱정스럽게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물었다.
“바로 그겁니다, 주인님. 도련님은 매우 괴상하게 자라고 계세요. 과거 도련님의 상태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거죠. 도련님은 전혀 드시지 않으시더니, 갑자기 엄청난 양을 먹어치우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더니 다시 음식을 딱 끊으시고는 전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다 남기시더라고요. 주인님은 모르셨겠지만, 도련님은 집 밖으로는 절대 데리고 나가지 못하게 하셨어요. 휠체어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하면, 도련님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셨죠. 크레이븐 선생님도 책임질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도련님이 어느 날 최악으로 히스테리를 부리시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메리 양과 수전 소워비의 아들 디콘과 함께 밖으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시지 뭐예요. 디콘이 휠체어를 밀면 된다고 하셨어요. 도련님은 메리 양과 디콘을 몹시 좋아하게 되셨어요. 디콘이 길들인 야생동물들을 데리고 왔죠. 그 덕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지내세요.”
“보기엔 어떻소?” 다음 질문이었다.
“도련님이 자연스럽게 드셨다면 살이 오른 걸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런데 저희는 이게 살이 아니라 부기일까 봐 걱정이랍니다. 도련님은 메리 양과 단둘이 계실 때면 가끔 희한하게 웃으세요. 전에는 절대 웃지 않으셨잖아요. 괜찮으시다면, 당장 크레이븐 선생님이 주인님을 만나러 오실 겁니다. 평생 지금처럼 당황하신 적이 없었어요.”
“콜린은 지금 어디에 있소?” 크레이븐 씨가 물었다.
“정원에요. 도련님은 항상 정원에서 지내세요. 그런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으시다며, 근처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크레이븐 씨는 메들록 부인의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정원에 있다고!” 크레이븐 씨가 말했다. 메들록 부인을 내보낸 후, 그는 멍하니 서서 몇 번이나 이렇게 말했다. “정원에 있어!”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꽤나 애를 썼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되자,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예전에 메리가 그런 것처럼, 그도 관목 담장에 난 문을 통과한 후 월계수 담장과 분수 옆 화단들 사이를 지났다. 이제 분수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었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화초를 심은 화단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풀밭을 가로지르고 담쟁이덩굴 담장 옆으로 난 ‘긴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바삐 놀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걷는 동안 두 눈을 좁은 길에서 떼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오래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곳으로 이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문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은 훨씬 더 느려졌다. 담장 위로 덩굴이 빽빽하게 늘어져 있어도, 그는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한편 땅에 묻은 열쇠는 어디에 파묻혔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그래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그는 깜짝 놀라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이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인지, 자신에게 묻기까지 했다.
담쟁이덩굴이 문 위로 두껍게 늘어져 있고, 열쇠는 관목 아래 묻혀 있었다. 그 외로웠을 10년 동안 그 문은 그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정원 안에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나무들 아래를 뱅글뱅글 돌아가며 달리고 타닥거리는 발소리였다. 소리를 잔뜩 낮춘 기묘한 말소리도 있었다. 탄성과 숨죽인 환희에 찬 고함 소리 말이다. 어린아이들의 웃음 같은 소리도 있었다.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다음 순간 흥분이 쌓이고 쌓여서 확 터져버리는 바람에 까르르 자지러지게 웃는 아이들의 소리였다.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지금 들은 소리의 정체는 뭘까? 이성을 잃어,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멀리서 또렷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이것이었을까?
마침내 다음 순간이 찾아왔다.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순간 말이다. 발소리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침 그들은 정원 문 근처에 있었다. 빠르고 건강한 어린아이의 숨소리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담장 문이 벌컥 열려 늘어져 있던 담쟁이덩굴이 홱 걷혔다. 그리고 한 소년이 전속력으로 문을 튀어나오더니,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한 채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레이븐 씨는 때맞춰 양팔을 뻗었고, 앞을 보지 않고 냅다 튀어나온 바람에 그에게 부딪혀 넘어질 뻔한 아이를 붙잡아주었다. 그곳에 나타난 낯선 사람에 깜짝 놀란 아이를 잘 보려고 품에서 떼어낸 크레이븐 씨는 말 그대로 숨이 멎는 듯했다.
키가 크고 잘생긴 소년이었다. 아이는 생기로 환하게 빛났고, 힘껏 달려와서 얼굴이 근사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는 숱 많은 앞머리를 이마에서 넘기고, 기묘한 회색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아이다운 웃음기로 가득하고 새까만 속눈썹이 술 장식처럼 난 눈이었다. 크레이븐 씨가 숨이 멎을 뻔한 것은 바로 그 눈 때문이었다.
“누구냐? 어떻게 된 일이지? 넌 누구냐!” 그가 말을 더듬었다.
이런 만남을 콜린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건 계획에 없었다. 이런 만남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렇지만 달리기 경주에 이겨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다가 아버지와 만나는 상황이 훨씬 좋았다. 콜린은 몸을 죽 펴서 키를 한껏 늘였다. 콜린과 함께 달리다가 뒤따라 문으로 달려 나온 메리는 콜린이 원래 모습보다 어떻게든 키가 더 커 보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몇 센티미터라도 말이다.
“아버지.” 콜린이 말했다. “저 콜린이에요. 믿지 못하시겠죠? 실은 저도 믿기지 않아요. 저 콜린이에요.”
방금 전의 메들록 부인처럼, 콜린도 아버지가 다급하게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정원에 있었구나! 정원에 있었어!”
“네.” 콜린이 얼른 대답했다. “이게 다 정원 덕분이에요. 메리와 디콘과 동물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마법 덕분이죠.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가 오시면 말씀을 드리려고, 우리끼리 비밀로 했거든요. 저는 건강해요. 이제 달리기 경주에서 메리를 이길 수 있어요. 저는 운동 선수가 될 거예요.”
콜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한 소년처럼 말을 했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잔뜩 흥분해서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단어 하나하나가 떨렸다. 그 모습을 본 크레이븐 씨의 영혼은 믿을 수 없는 환희로 마구 요동을 쳤다.
콜린이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팔에 올렸다.
“기쁘지 않으세요, 아버지?” 콜린이 말했다. “기쁘지 않으세요? 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오래오래 살 거예요!”
크레이븐 씨는 양손을 아들의 어깨에 내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엔 감히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원으로 안내해주겠니, 아들아.”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말해주렴.”
그래서 아이들은 그를 비밀 정원으로 안내했다.
정원은 가을의 황금색과 보라색과 남색과 불타오르는 선홍색으로, 야생의 장관을 이루었다. 사방에 늦게 핀 백합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흰색이거나 흰색과 루비색이 뒤섞인 백합들이었다. 그는 이곳에 처음으로 백합을 심었을 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늦은 이 계절에 백합이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 시기를 맞춰 심었다. 늦게 개화한 장미 덩굴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가지에 걸려 있고,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나무를 서서히 노랗게 물들여가는 햇살 덕분에, 그곳에 있으면 황금으로 만든 사원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새로 온 손님은 아이들이 회색 일색인 정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랬듯이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이곳은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말했다.
“메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콜린이 말했다. “하지만 살아났죠.”
그러자 모두 자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콜린만 빼고. 콜린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서 있고 싶어했다.
아이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내자 아치볼드 크레이븐은 이렇게 신기한 이야기는 난생처음 듣는다고 생각했다. 미스터리와 마법과 야생동물, 기묘한 한밤의 만남. 그리고 찾아온 봄. 벤 웨더스태프 영감의 말을 반박하려고, 어린 라자를 벌떡 일어서게 한 상처받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열정. 기묘한 동지 의식과 연극, 너무나 소중하게 지켜온 대단한 비밀. 크레이븐 씨는 눈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껄껄 웃었고, 때때로 웃지 않을 때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운동 선수이자 강연자이자 과학의 발견자는 잘 웃고, 사랑스럽고, 건강한 아이였다.
“자.” 콜린은 이야기를 이런 말로 끝맺었다. “이제 더는 비밀이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면 너무 놀라서 기겁을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다시는 휠체어에 앉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돌아갈 거예요. 집으로요.”
벤 웨더스태프는 맡은 일을 하느라 정원을 벗어날 때가 드물었지만, 이번에는 채소를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주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메들록 부인에게서 하인들 구역에 들러 맥주를 한잔하고 가라는 초대를 받은 덕분에, 벤 영감은 자신의 희망대로 미슬스웨이트 장원에서 이번 세대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순간, 현장에 머물 수 있었다.
뜰로 난 여러 창문 중 하나로 풀밭이 살짝 보였다. 벤 영감이 정원에서 온 것을 아는 메들록 부인은 영감이 크레이븐 씨의 모습을 보았는지, 혹시 우연이라도 그가 콜린 도련님과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두 분 중 누구라도 보셨어요, 웨더스태프?” 메들록 부인이 물었다. 

벤 영감이 입에서 맥주잔을 떼더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럼요, 보았소.” 벤 영감이 짐짓 잘난 척을 하며 대답했다.
“두 분 다?” 메들록 부인 슬쩍 떠보았다.
“두 분 다.” 벤 웨더스태프가 대답했다. “부인, 맥주 감사하구려. 한 잔 더 마실 수두 있겠소만.”
“같이요?” 메들록 부인이 흥분한 나머지 맥주를 넘치도록 따르며 물었다.
“같이요, 부인.” 그러더니 벤 영감은 새로 따라준 맥주를 단숨에 꿀꺽꿀꺽 반이나 들이켰다.
“콜린 도련님은 어디에 계시던가요? 도련님 모습은 어땠어요? 두 분이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시던가요?”
“그것까진 못 들었소.” 벤 영감이 말했다. “계단 사다리에 올라서서 담장 위루다가 지켜봤을 뿐이니깐. 허지만 부인에게 이 이야긴 해드릴 수 있다오. 저 밖에선 집안사람들이 절대루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오. 그리구 결국 알게 될 일은 곧 알게 될 거요.”
그리고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벤 영감이 마지막 맥주를 꿀꺽 삼키고 창문을 향해 맥주잔을 엄숙하게 흔들었다. 그 창으로 관목 숲 너머까지 이어진 풀밭이 조금 보였다.
“저길 보시구려.” 벤 영감이 말했다. “그렇게 궁금허시다면 말이오. 저 풀밭을 가로질러 누가 오는지 보시구려.”
메들록 부인은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짧은 비명까지 질렀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하인들이 하인들 공간에서 전부 우르르 몰려와, 말 그대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풀밭을 가로질러 미슬스웨이트의 주인이 오고 있었다. 그는 하인들 대부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웃음기로 눈을 반짝거린 채 요크셔의 여느 남자아이 못지않게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아이는 바로, 콜린 도련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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