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1~12

나단비 | 2024.03.02 04:10:47 댓글: 0 조회: 9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047
11
이상과 현실





앤은 퀸스 전문학교 시절의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가르치는 일은 정말로 해볼 만해. 제인은 가르치는 일이 무미건조하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재미있는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나거든. 그리고 아이들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어. 제인은 학생들이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벌을 준대, 그러니까 가르치는 일이 단조롭다고 하는 것 아니겠니. 오늘 오후에는 지미 앤드루스가 ‘얼룩덜룩한’이라는 단어를 말하려다가 생각이 안 나니까 “음, 철자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하지 않겠니.
“무엇이죠?” 하고 내가 물었지.
“세인트 클레어 도넬의 얼굴이에요, 선생님.”
세인트 클레어의 얼굴이 분명 주근깨투성이긴 하지만 난 다른 아이들이 그걸 놀리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야 했지. 나도 한때는 주근깨투성이였고 아직도 그 아픈 기억이 생생하니까. 하지만 세인트 클레어는 얼굴에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미를 때린이유도 지미가 세인트 클레어라고 불러서래. 그것도 한 아이에게 은밀히 들어 알았기 때문에 그냥 모른척 넘어가려고 해.
어제는로티 라이트에게 덧셈을 가르쳤어. 로티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가 한 손에 사탕을 세 개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두 개 들고 있다면 사탕이 전부 합해 몇 개일까?” 로티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한 입 가득이요.” 그리고 자연 시간에 내가 두꺼비를 죽이면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더니 벤지 슬론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단다. “다음 날 비가 오니까요.”
그런 대답을 듣고 웃음을 참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스텔라. 집에 가도 이런 우스운 이야기들이 생각난단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동쪽 방에서 비명 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면 신경이 곤두서곤 한대. 그래프턴에 사는 한 남자가 한때 미쳤을 때 이유 없이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이 그 시초였다고 하거든.
너는 토머스 A. 베케트3)가 성인으로 시성된 게 아니라 뱀으로 시성되었다는 얘기를 아니?4)로즈 벨이 그렇다더구나. 그리고 그 애는 또 윌리엄 틴들5)이 신약 성서를 번역한 게 아니라 썼다는구나.6)클로드 화이트는 빙하란 창틀을 끼우는 사람7)이라는구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흥미로운 일은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기 생각을 털어놓게 하는 일인 것 같아. 지난주 비가 많이 내린 날 점심시간에 난 아이들을 내 주변에 둘러앉히고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해보라고 했어. 우선 가장 원하는 일을 말해보도록 했지. 어떤 아이들은 인형, 말, 스케이트 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했고, 어떤 아이들은 아주 독특한 대답을 했단다. 해스터 볼터는 일요일 날 입는 옷을 날마다 입었으면 좋겠고 거실에서 식사를 했으면 좋겠대. 한나 벨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착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어.마저리화이트는 나이가 열 살인데 벌써 과부가 되고 싶다고 하더구나. 왜냐고 물어보았더니 심각한 얼굴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노처녀라고 부를 테고, 결혼을 하면 남편이 상전 노릇을 하니까요.’ 라고 하지 뭐니. 그리고 과부가 된다면 양쪽 다 그럴 위험이 없다는 거야.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샐리 벨의 대답이었어. 가장 원하는 일이 신혼여행이라고 했거든. 신혼여행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특별히 좋은 자전거라나. 사촌 오빠가 결혼하고 몬트리올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아주 좋은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거야.
또 얼마 전에는 지금까지 한 일 중에 가장 짓궂었던 장난이 무엇이었는지 얘기해보라고 했단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3학년 아이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얘기를 했어. 엘리자 벨은자기 숙모의 양털 뭉치에다 불을 붙였대. 일부러 그런 짓을 했느냐고 하니까 전부 다 일부러 한 짓은 아니었고 불이 어떻게 타오르는지 보려고 한쪽 끝에다 살짝 불을 붙였는데 홀랑 다 타버렸다고 하더구나. 에머슨 길리스는 헌금함에 넣어야 할 돈 10센트를 캔디 사먹는 데 써버렸다고 했어.애너터벨이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은 묘지에서 자라는 블루베리를 따먹은 것이었고, 윌리 화이트는 일요일에 입는 옷을 입고 양 우리 지붕에서 미끄럼을 아주 많이 탄 거래. “그렇지만 난 그 일로 충분히 벌을 받았어요. 여름 내내 누더기 바지를 입고 주일 학교에다녀야 했거든요” 하고 말했단다. 그리고 “이미 벌을 받은 일이면 회개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하더구나.
너도 우리 아이들이 쓴 작문을 읽어보아야 해. 정말 읽어볼 만하거든. 최근에아이들이 쓴 것을 몇 편 베껴 보내줄게. 지난주에 4학년 아이들에게 각자가 좋아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나 주제로 삼아서 나한테 편지를 써보라고 했어. 가본 곳 중에서 재미있었던 곳을 소개한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적어도 된다고 했어. 진짜 편지지에 쓰고 봉투를 봉한 다음 내 주소도 써야 한다고 했지.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모두 자기 힘으로 말이야. 지난 금요일 아침 내 책상에는 편지가 가득 쌓였단다. 그날 오후 나는 가르치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인 만큼 기쁜 일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아이들의 작문이 힘겨움을 많이 보상해주었거든. 여기 네드 클레이의 편지가 있는데, 주소, 스펠링, 문법 모두가 네드 클레이가 쓴 그대로야.


프린스에드워드 섬
초록 지붕 집의
셜리 선생님께,

‘새’

선생님, 전 선생님께 새에 관한 글을 쓸꺼예요. 새는 아주 쓸모 있는 동물이에요. 우리 고양이는 새를 잡아요. 고양이 이름은 윌리엄이지만 우리 아빠는 톰이라고 불러요. 줄무늬가 있고 한쪽 귀는 지난겨울에 동상에걸렀어요. 그것만 아니면 아주 잘생긴 고양이죠.
우리 삼촌도 고양이를 키워요. 그 고양이가 어느 날 삼촌 집에 들어와서는 나가지 않았대요. 삼촌은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 고양이는 처음 봤대요. 삼촌이 고양이가 흔들의자에서 자도록 내버려두니까숭모는삼촌이 고양이를 자식들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고양이에게 친절하게 대해고 신선한 우유를 주어야 하지만 어린이보다 더 잘해주어서는 안 대죠. 이것이 지금까지 제가 생각한 것 전부에요.

에드워드 블레이크 클레이

세인트 클레어 도넬은 평상시처럼 간결하게 요점만 적었어. 세인트 클레어는 절대로 쓸데없는 말을하지 않거든. 나는 클레어가 이런 주제를 고르고 추신이라고 덧붙인 것도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재치와 상상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해.
셜리 선생님께,

선생님은 우리가 본 것 중에 뭔가 이상한 것을 써보라고 하셨죠. 전 에이번리 공회당에 관해 쓰겠어요. 에이번리 공회당에는 문이 두 개 있어요. 안에 하나가 있고 밖에도 하나가 있죠. 창문이 여섯 개고 굴뚝도 하나예요. 끝이 두 개고 옆면도 두 개예요. 그리고 파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아주 이상해 보여요. 공회당은 아래 카모디 길에 서 있어요. 에이번리에서는 세 번째로 중요한 건물이죠. 다른 중요한 건물로는 교회와 대장간이 있어요. 공회당에서는 토론회가 열리고 강의도 하고 콘서트도 열려요.

그럼 이만,
제이컵도넬

추신: 공회당은 아주 밝은 파란색이에요.
애너터벨의 편지는 상당히 길어서 좀놀랐어.애너터가 작문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은애너터도 세인트 클레어만큼이나 글을 짧게 썼거든.애너터는 아주 얌전한 아이고 모범생이지만 독창성은 없는 아이야. 이것이 그 애의 편지야.
사랑하는 선생님께,

제가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해 편지를 쓰려고 해요. 전 선생님을제 온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진심으로 사랑해요. 저의 모든 것을 다해서요. 그리고 전 영원히 선생님을 위해내한 몸을 바칠 거예요. 그것은 저의 가장고귀한 특권입니다. 그것이 제가 학교에서 착하게 행동하려고 하고 공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선생님은 너무나 아름다우셔요. 목소리는 음악 소리 같고 눈은 팬지꽃에 내린 이슬처럼 반짝거려요.당신은키가 크고 품위가 넘치는 여왕입니다. 머리는 황금처럼 물결치죠. 앤서니 파이는 빨간색이라고 하지만 앤서니의 말에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선생님을 안 지 이제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생님을몰랐던 때란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선생님은 저를 축복하고신성하게 하려고 제 삶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언제나 올해를 제 인생 최고의 해로 기억할 거예요. 선생님을 알게 된 해니까요. 또한 우리가 뉴브리지에서 에이번리로 이사 온 해이기도 하고요. 선생님에 대한 제 사랑으로 제 삶은 더욱 풍성해졌고 제가 나쁜 일에 물들지 않게 해주셨지요. 이 모든 것이 전부 선생님 덕분입니다.나의다정한 선생님.
지난번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꽃을 꽂은 선생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선생님과 제가 모두 늙고 흰머리가 날 때까지도 전 선생님을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할 거예요. 내 다정한 선생님. 전 항상 선생님을 생각한답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요. 전 선생님이 웃을 때도 한숨을 지을 때도 사랑해요.당신이 오만해보일 때조차도요. 앤서니 파이는 선생님이 언제나 화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전 선생님이 한 번도 심술궂어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앤서니는 항상 말썽만 부리니까 선생님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전 선생님이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좋아요. 선생님이 새 옷을 입을 때마다 지난번보다 더욱더 아름다워 보여요.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해는 졌고 별은 반짝여요. 별들이당신의 두 눈만큼이나밝게 반짝이는군요.나의 사랑,선생님 손과 얼굴에 입맞춤을 보내드립니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어모든 해악에서선생님을 지켜주길 바라면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제자,
애너터 벨

이 특별한 편지를 읽고 난 좀 놀랐어. 이런 편지글을애너터가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다음 날 쉬는 시간에애너터를 데리고 시냇가로 산책하러 나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았지.애너터가 울음을 터트리면서 고백하더구나. 지금까지 한 번도 편지 같은 걸 써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래. 그래서 어머니의 화장대 서랍 맨 위 칸에 들어 있는 어머니 처녀시절 연애편지 다발을 꺼내서 읽어보았대.
“그건 아버지가 보낸 편지가 아니었어요. 어떤 목사공부를 하고 있던 사람이 그렇게 아름다운 편지를 보냈던 거였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어머니는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대요. 저는 그 편지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그 편지에서 여기저기를 베껴 썼어요. ‘그대’라고 되어 있는 곳은 ‘선생님’으로 고치고 제가 생각한 것도 집어넣으면서 말을 바꾸기도 했죠. 전 ‘감성’이라고 되어 있는 데는 ‘옷’이라고 바꾸었어요. ‘감성’이라는 것이 입는 것 같았거든요. ‘전 선생님이 아실 줄 몰랐어요. 제가 쓴 글이 아니란 것을 알아버리실 줄 정말 몰랐다고요. 선생님은 정말로 영리하신 분이에요.’애너터가 울면서 그렇게 말했어.
난애너터에게 남의 편지를 베껴서 자기가 쓴 것처럼 꾸미는 짓은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말해주었단다. 하지만애너터가 후회하는 이유는 모두 발각됐기 때문인 듯했어.
그리고애너터는 훌쩍이면서 ‘그래도 전 선생님을 사랑해요. 목사가 먼저 쓴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부 사실이라고요. 전 제 온 마음을 다해서 선생님을 사랑해요.’ 하고 말했단다.
그렇게 말하는데 꾸짖을 수도 없더라고.
다음은바버라쇼의 편지야. 편지지에 찍혀 있던잉크 자국은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선생님께,

선생님은 방문에 관해 써도 된다고 하셨죠. 전 남의 집을 방문해본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지난겨울 메리 고모님 댁이었죠. 메리 고모님은 성격이 아주 깐깐하지만 훌륭한 주부세요. 내가 고모님 댁에 간 첫날 밤, 우리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제가 항아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항아리가 깨져버렸죠. 메리 고모님은 그 항아리를 결혼할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이고 아무도 전에 그것을 깨뜨린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내가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고모님의 드레스를 밟아서 치마의 주름이 다 뜯어져 버렸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세면기에물 주전자를 부딪쳐 둘 다 찌그러져 버렸고 아침 식사 때는 찻잔을 엎어 식탁보를 젖게 만들고 말았죠. 점심 식사 후에 설거지를 도와주려다가 도자기 접시를 떨어뜨려 깨버렸고요. 그날 저녁에는 계단에서 아래층으로굴러떨어져서 발목을 삐어, 일주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답니다.
전 메리 고모가조지프고모부에게 차라리 잘됐다고, 아니면 저 아이가집 안의 모든 물건을 깨버리고 말았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요. 제 발목이 다 낫자 집에 갈 시간이 되었어요. 전 방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학교에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아요. 특히 에이번리로 전학을 온 후로는요.

그럼 이만,
바버라 쇼
윌리 화이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어.
존경하는 선생님께,

저는 매우 용감한 우리 고모에 관해 쓰려고 합니다. 고모는 온타리오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헛간으로 나갔다 뒤뜰에서 개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개가 그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여긴 고모는 몽둥이를 찾아 위협해 개를 헛간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한 남자가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상상의 사자(의문점: 윌리는 동물원 사자를 말한 걸까?)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 개는 사자였던 것입니다. 우리 용감한 고모가 몽둥이로 헛간에 몰아넣었던 개가요.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기적입니다. 고모가 무척 용감했던 것이지요. 에머슨 길리스는 우리 고모가 그 사자를 개로 여겼다면 사자라도 정말 개와 다름없어서 용감한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에머슨은 질투가 나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에머슨에게는 삼촌만 있지 용감한 고모는 없거든요.

최고의 편지는 마지막으로 남겨두었어. 내가 폴이 천재라고 말한다면 네가 웃을지도 모르지만 이 편지를 보면 폴이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거야. 폴은 바닷가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함께 놀 만한 친구가 하나도 없어. 진짜 친구 중에는 말이야. 퀸스 학교교장 선생님이 학생들 가운데 특별히 귀여워하는 아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은 기억하고 있지만 난 폴 어빙을 다른 아이보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다고 해서 나쁜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누구나 폴을 좋아하고 린드 아주머니도 설마 자기가 미국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폴은 마음에 든다고 했을 정도니까. 학교에서 다른남자아이들도 모두 폴을 좋아해. 폴이 꿈이나 공상에 잠겨 있길 좋아해도 조금도 남자답지 않다거나 약해 보이지 않아. 아주 씩씩하고 어떤 게임에서도 지지 않지. 며칠 전에도 세인트 클레어 도넬과 결투를 했어. 세인트 클레어가 영국 국기가 미국 성조기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했기 때문이야. 싸움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고 앞으로는 서로의 애국심을 존중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해. 세인트 클레어의 말로는 때리는 힘은 자기가 셌지만 때리기는 폴이 더 많이 때렸대.
이게 폴의 편지야.
사랑하는 선생님,

선생님은 흥미로운 사람에 관해 글을 써도 된다고 하셨어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은 바위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에 관해 얘기를 하겠어요. 할머니와 아빠 외에는 아무에게도 그 사람들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이해심이 많은 분이니까 얘기를 해도 좋을 것 같아서요. 세상에는 이해를 잘 못 하는 사람이 많아서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죠.
바위 사람들은 해변에서 살아요. 겨울이 오기 전에는 거의 매일 저녁때마다 그 사람들을 보러 가요.지금은, 봄이 올 때까지는 갈 수 없지만 그 사람들은 어디 가지 않고 거기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요. 바로 그 점이 가장 멋진 점이죠. 노라를 가장 먼저 알았으니까 노라를 가장 사랑해요. 노라는 앤드루스 만에 살아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갖고 있고 언어랑 물의 요정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아요. 노라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답니다. 거기에는 쌍둥이 선원도 있어요. 선원들은 아무 데도 머물지 않아요. 항상 바다를 돌아다니니까요. 하지만 가끔씩 해변으로 와서 저와 얘기를 나누곤 하지요. 두 사람은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 보았고, 아주 재밌어요. 아니, 세상에 있는 것 말고도 많이 보았죠. 그런데 동생 선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항해를 하다가 달 길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 길은 바다에서 보름달이 떠오를 때 물 위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길이에요. 동생 선원은 그 길을 따라 항해를 하다가 달로 곧장 들어가게 되었대요. 그런데 달에 작은 황금 문이 보여 그문을 열고 들어갔대요. 달나라에서 동생 선원은 멋진 모험을 했지만 그 이야기를 쓰려면 이 편지가 너무 길어지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바위굴에는 황금 부인도 살고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해안가에서 커다란 굴을 발견했거든요. 그 안으로들어갔다가황금 부인을 만났어요. 금빛 머리카락이 발까지 내려오고 드레스도 온통 반짝거려 꼭 금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반짝거렸어요. 그리고 그 황금 부인은 온종일 금빛 하프를 연주했어요. 가만히 들어보면 해변에서 들려오는 그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 소리가 바위 사이에서 나는 바람 소리라고만 여기죠. 노라에게는 황금 부인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마음을 상하게 할지도 몰라서요. 쌍둥이 선원과 얘기만 오래 해도 노라가 좋아하지 않거든요.
저는 항상 줄무늬 바위가 있는 곳에서 쌍둥이 선원을 만나요. 동생 선원은 성격이 아주 좋지만 형 선원은 가끔씩 아주 무서워요. 그 형 선원에게는 수상쩍은 점도 있죠. 아마 해적이었는지도 몰라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한번은 욕을 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또 욕을 할 거면, 해변에 오지 말라고 말했어요. 욕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겠다고 할머니와 약속했거든요. 형 선원은 그 말에 겁을 먹었어요. 정말이에요. 자기를 용서해주면 해가 지는 곳으로 절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다음 날 오후 제가 줄무늬 바위에 앉아 있을 때 형 선원이 바다에서 마법에 걸린 배를 타고 와서 저를 그 배에 태워줬어요. 그 작은 배는 조개껍데기 속처럼 온통 진주와 무지갯빛으로 되어 있었고 돛은 꼭 달빛 같았어요. 우리는 저녁놀을 넘어 항해를 해갔죠. 생각을 좀 해보세요, 선생님. 전 저녁놀 속으로 들어가 봤다고요. 그곳이 어땠을 거 같아요? 해가 지는 곳은 온통 꽃으로 덮여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정원으로 항해해 들어갔고 구름이 온통 다 화단이었어요. 황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항구에 이르자 배에서 내려 장미꽃만큼이나 커다란 미나리아재비로 덮여 있는 넓은 목장으로 올라갔어요. 저는 거기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어요. 거의 일 년은 된 것 같았지만 형 선원 말로는 겨우 2~3분밖에 지나지 않았대요. 석양의 나라에서는 시간이 여기보다 훨씬 더 긴 모양이에요.

선생님을 사랑하는 제자,
폴 어빙

추신: 물론 이 편지는 사실이 아니에요, 선생님.
3) 12세기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와 헨리 2세 때 대법관을 지낸 사람. 헨리 2세의 교회 정책에 반대하여 죽었으나 후일 성인으로 추대됨.
4) 성인(saint)과 뱀(snake)의 철자를 혼동한 것을 빗대서 하는 말.
5) 16세기 영국의 종교 개혁가로 성경을 처음 영어로 번역함.
6) 영어로 번역한 것을 직접 쓴 것으로 잘못 표현한 것을 빗대서 하는 말.
7) 빙하(glacier)를 glass(유리)+-er(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오해해서 한 말.



12
요나의 날8)





앤은 전날 밤 쿡쿡 쑤셔대는 치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춥디추운 겨울날 아침 맑지 못한 정신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난 앤은 삶이 너무 단조롭고 재미도 없으며 부질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로 향하는 앤의 기분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치통으로 퉁퉁 부어오른 볼은 그렇다 치고 얼굴 전체가 쑤시고 아팠다. 교실은 난롯불이 잘 타지 않아 연기만 자욱할 뿐 추웠다. 아이들은 추위에 덜덜 떨며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앤은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 통에도 앤서니 파이는 예의 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옆 짝에게 뭐라고 소곤거리며 비웃기라도 하듯 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날 아침따라 유난히 아이들의 끽끽대는 연필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게다가 계산한 것을 보여주려고 책상 앞으로 나오던바버라쇼가 석탄 상자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교실이 온통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석탄은 교실 여기저기로 굴러갔고바버라의 석판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바버라쇼가 얼굴에 온통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고 간신히 일어서자남자아이들이 일제히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2학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앤이 그쪽을 바라보며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을 던졌다.
“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다면 네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라,바버라. 너만큼 나이를 먹은여자아이가 그렇게 칠칠찮게 행동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불쌍한바버라는 다시 자리로 더듬더듬 돌아갔고 석탄 먼지를뒤집어쓴채 눈물 자국까지 얼룩져 그 꼴이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이해심 많고 사랑이 가득하던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바버라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앤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2학년 산수 공부 시간은 고통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앤이 계산한 답을 독촉하고 있는데 세인트 클레어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넌 30분이나 지각했다. 이유가 뭐지?”
앤이 딱딱하게 굳은 태도로 물었다.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엄마를 도와드리느라 늦었어요. 오늘 점심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있어푸딩을 만들어야 했는데, 클러리스 알마이러가 아파버렸거든요.”
세인트 클레어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에 아이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자리로 가서 벌로 산수책 84페이지에 있는 문제 중에 여섯 문제를 풀어라.”
앤의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긴 했지만 세인트 클레어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가서 석판을 꺼냈다. 그런 다음 몰래 통로 건너편에 앉은 조 슬론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앤이 그 장면을 보았고 그 꾸러미에 성급한 판단을 내려버렸다.
요즘 돈이 궁한 하이람 슬론 할머니가 수입을 늘려 볼 양으로 호두 케이크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 케이크는 특히남자아이들이 아주 좋아해서 몇 주 동안이나 앤이 그 문제로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았다. 학교로 오는 길에남자아이들은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하이람 할머니의 케이크에 썼고 학교로 그 케이크를 들고 와서 먹거나 공부 시간에 친구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앤은 아이들에게 학교로 케이크를 가져오지 말라고, 가져오면 빼앗아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바로 앤의 눈앞에서 그 케이크 상자를 건네고 있다니! 하이람 할머니가 사용하는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종이로 싼 그 꾸러미가 분명했다.
“조, 그 상자를 이리 가져와.”
앤이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놀라고 부끄러운 마음에 조는 얼른 시키는 대로 했다. 조는 뚱뚱한 아이로 놀라면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 순간 조의 표정은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 보였다.
“불에 던져 넣어라.”
앤이 말했다.
조는 완전히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저…… 저…… 제…… 제, 제발요…… 선, 선생님…….”

“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라.”
“하…… 하…… 하지만…… 선, 선…… 선생님…… 이…… 이것은…….”
조가 절망에 빠져 숨을 헐떡거렸다.
“조, 너 지금선생님 말에 반항하는 거니?”
앤이 말했다.
아무리 조 슬론보다 더 대담하고 침착한 소년이라 한들 앤의 말투와 험악한 눈초리를 보고는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앤이 아니었다. 조는 괴로운 표정으로 세인트 클레어를 흘끗 보고는 난롯가로 다가가 크고 네모난난로 뚜껑을 열었다.그러고는세인트 클레어가 벌떡 일어서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꾸러미를 던져버리고 뒤로 얼른 물러섰다.
다음 순간 에이번리 학교 아이들은 지진이 일어났는지 화산이 폭발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앤이 경솔하게 슬론 할머니가 만든 호두 케이크 상자라고 단정한 그 꾸러미에 사실은 여러 종류의 폭죽과 불꽃 세트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워런 슬론이 세인트 클레어 도넬의 아버지에게 시내에서 사다달라고 부탁해 가져온 것으로, 그날 밤 생일 축하 파티에 쓰려고 했었다. 폭죽은 연달아 천둥소리를 내며 폭발했고 불꽃은 쉬쉬! 탁탁! 소리를 내며 온 교실 안을 날아다녔다. 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고여자아이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로 튀어 올라갔다. 조 슬론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소동이 일고 있는 교실 한복판에 우뚝 서 있고 세인트 클레어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웃으며 통로를 데굴데굴 굴렀다. 프릴리 로저슨은 아예 기절해버렸고애너터벨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실제로는 겨우 2~3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졌다. 앤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황급히 일어나 온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교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가스와 연기를 빼냈다. 그런 다음여자아이들이 모두 도와 기절한 프릴리를 현관으로 옮겼다.바버라쇼는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열심히 찾다가 반쯤 얼어 있는 물을 누가 말리기도 전에 프릴리의 얼굴과 어깨에 부어버렸다.
모든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려야 했다. 하지만 조용해진 것처럼 보일뿐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그 폭발 사건으로도 선생님 기분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앤서니 파이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계산을 하다 그만 연필 소리를 내고 만 네드 클레이는 따가운 앤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마룻바닥에 구멍이라도 딱 벌어져 자기를 삼켜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리 시간에는 무서운 속도로 대륙을 달려 모두들 어지럼증에 시달렸고, 문법 시간에는 글자 하나하나까지 분석당했다. 체스터 슬론은 후각이라는 글자를 잘못 썼다가 너무 창피를 당해 이 세상에서는 물론저세상에 가서도 이 수치심을 씻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앤은 자신이 어리석게 굴고 있다고 느꼈고 자기의 오늘 행동이 비웃음거리로 오늘 밤 집집마다 저녁 식탁에 오르게되리라는 것을알았지만 그런 생각은 불편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차분한 기분에서라면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차가운 경멸감으로 그 감정을 무시해버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 아이들도 모두 평상시처럼 제자리에 앉아 있었고 앤서니 파이만 빼고는 모두들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 앤서니는 검은 눈에 호기심과 조롱을 가득 담고 책 너머로 앤을 살폈다. 앤이 분필을 찾으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바로 손 밑에서 쥐가 한 마리 폴짝 뛰어나와 책상으로 올라가더니 곧 다시 마루로뛰어내려와사라져 버렸다.
앤은 뱀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본 앤서니 파이는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교실은 금방 고요에 휩싸였다. 무척 기괴하고 매우 불편한 침묵이었다.애너터벨은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히스테리를 일으켜야 할까, 말아야 할까? 더군다나 쥐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히스테리는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저렇게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두 눈에서 불을 뿜고 서 있는 선생님 앞에서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내 책상에 쥐를 넣었지?”
묻는 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소리에 폴의 등골이 다 오싹할 지경이었다. 조 슬론은 앤의 눈과 마주치자 대답할 책임이 자기에게 있기라도 한 듯 덜덜 떨면서 변명했다.
“아…… 아…… 아니에요. 저…… 저, 저는…… 선, 선생님…… 저, 저는 아…… 아니에요.”
앤은 가엾은 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앤서니 파이를 쏘아 보았으나 앤서니 파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앤을 마주 쳐다보았다.
“앤서니, 너지?”
“네, 그래요.”

앤서니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앤은 책상에서 지시봉을 꺼냈다. 길고 무겁고 단단한 나무로 만든 지시봉이었다.
“이리 나와, 앤서니.”
그 매질이 앤서니 파이가 지금까지 당해본 벌 중 가장 심한 벌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 아무리 앤이 무섭게 화가 나 있었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심한 매질이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시봉은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아무리배짱좋은 앤서니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뒷걸음질 치는 앤서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책감으로 마음이 아파진 앤은 지시봉을 떨어뜨리고 앤서니에게 제자리로 가라고 했다.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이 되어 자리에 앉은 앤은 쓰디쓴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성마른 화가 사라진 지금은 그저 엉엉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애들에게 매질은 하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는데 지금 학생에게 매질을 하고 만 것이다. 제인이 얼마나 의기양양해할까! 해리슨 씨는 회심의 미소를 짓겠지!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일은 앤서니 파이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앞으로 앤서니는 결코 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앤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갈 때까지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방에 틀어박혀 부끄러움과 후회와 실망을 모두 흘려보내려는 듯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너무 오랫동안 울어서 마릴라가 놀라 방으로 찾아와서는 왜 우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제가 왜 우느냐 하면요, 제 양심의 문제예요. 아, 오늘하루는 정말이지 ‘요나의 날’과도 같았어요. 전저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앤서니에게 매질을 하고 말았거든요.”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벌써 옛날에 그랬어야 했어.”
마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이제 어떻게 다시 학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정말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고요. 얼마나 심하게 화를 내면서 무섭게 굴었는지 몰라요. 전 폴 어빙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놀라고 실망한 표정이었다고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전 인내심을 갖고 앤서니 파이가 절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젠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어요.”
마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고된 일로 거칠어진 손으로 앤의 윤기 나고곱슬거리는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앤이 울음을 멈추자 부드럽게 말했다.
“앤, 너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누구나 실수는 저지르는 법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잊을 뿐이지. 운수가 사나운 요나의 날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다. 앤서니 파이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애가 너를 싫어한다고 신경 쓸 것 없어. 널 싫어하는 애는 그 애 하나뿐이잖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어요. 전 모든 아이들이 절 사랑하기를 바라거든요. 한 아이라도 그렇지 않으면 속이 상해요. 이제 앤서니는 절대로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 전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전부 얘기해드릴게요.”
이야기를 들으며 마릴라는 앤이 못 본 사이 미소를 짓기 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마릴라가 활기차게 말했다.
“신경 쓸 거 없다. 오늘은 지나갔지 않니. 내일은 또다시 새날이 온다. 네가 말한 대로 아직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새날말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저녁이나 먹자. 기분 좋은 차 한 잔과 내가 오늘 만든 자두 과자면 네 기분도 한결 나아질 거야.”
“아무리 자두 과자라 해도 제 아픈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어요.”
앤이 우울하게 말했지만 마릴라는 앤의 평소 말투가 나오는 걸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고 여겼다.
쌍둥이의 밝은 얼굴과 데이비가 네 개나 먹은 마릴라의 훌륭한 자두 과자와 함께 한 즐거운 저녁 식사 덕분에 앤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날 밤에는 잠도 잘 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조용히 눈이 내려 세상은 근사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침 햇살 속에 반짝이는 하얀 눈은 과거의 실패나 부끄러운 행위 같은 것을 덮어주는 자비로운 망토처럼 보였다. 옷을 입으며 앤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든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야,
매일 아침은 새로운 세상이라고.”

그날 아침엔 눈이 쌓여 앤은 길을 빙 돌아 큰길을 통해 학교로 가야 했다. 앤이 초록 지붕 집 오솔길을 막 벗어나자마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앤서니 파이가 눈길을 헤치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앤은 둘의 입장이 바뀌기라도 한 듯 죄책감을 느꼈지만,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앤서니가 모자를 벗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태도였는데, 말까지 걸어온 것이다.

“정말로 고약한 아침이죠? 제가 선생님 책을 들어드릴까요?”

앤은 책을 건네주며 이게무슨 일인가싶었다. 앤서니는 아무 말도 없이 학교까지 걸어갔고, 앤은 학교에 도착하자 책을 돌려받은 다음 앤서니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지금까지는 앤서니의 호감을 얻어볼 양으로 그저 형식적으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이번에는 그런 미소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진정한 동지애 같은 것이 샘솟아 나와 지은 미소였다. 앤서니도 마주 웃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앤서니는 싱긋해 보였을 뿐이다. 그런 웃음이 일반적으로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앤은 앤서니의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존경심은 얻었다고 느꼈다.

레이철린드 부인이 다음 토요일에 와서 이런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있잖니, 앤, 네가 앤서니 파이를 이긴 것 같더구나. 글쎄 앤서니 파이가 네가 여자지만 좋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니까. 네가 ‘남자 못지않게’ 회초리질을 했다는 거야.”

“하지만 매질로 앤서니의 사랑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는데요.”

앤은 자신의 이상이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 조금은 후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파이네 식구들은 모든 면에서 좀 예외잖니, 그럼.”

린드 부인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 모든 얘기를 듣고 난 해리슨 씨는 말했다.

“내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제인은 더 인정머리 없이 앤의 아픈 상처를 후비는 말을 했다.

8) 구약성서에서 요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저버려 불행에 처하는 인물이며, 여기서 ‘요나의 날’은 불행과 파멸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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