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9~20

나단비 | 2024.03.03 13:56:15 댓글: 2 조회: 455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333
19
행복한 나날





어느 날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결국은 말이에요, 행복한 날이란 게 꼭 멋지고 신나는 일이 생기거나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날만은 아닌 것 같아요. 사소한 일이지만 진주 목걸이에서 진주가 한 알씩 빠져나오듯 작은 기쁨을 주는 날들이 하루하루 이어지는 나날이 바로 행복한 날인 거죠.”
‘초록 지붕 집’의 생활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앤에게 곧잘 닥치곤 하는 예기치 않은 사건과 불운도 한꺼번에 밀려들지는 않았고, 한 해에 걸쳐 아무 탈 없이 평화롭게 지나가는 날 속에 섞여 간간이 일어나서 앤의 생활에는 일과 웃음이 있고, 꿈과 배움으로 충만했다. 늦은 8월의 그날도 그렇게 행복한 날이었다. 오전에는 앤과 다이애나가 쌍둥이를 데리고 호수에서 배를 타고 해안가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단맛이 나는 풀을 뜯기도 하고 파도를 타며 놀기도 했다. 파도에 실려 밀려오는 바람은 태초에 배운 옛노랫가락을 읊조리고 있는 듯했다.
오후에는 앤이 폴네 집으로 내려갔다. 폴은 집 위쪽을 둘러싼 울창한 전나무 숲 옆 푸른 언덕에 누워 옛날이야기 책에 빠져 있다가 앤을 보자 환하게 얼굴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무 기뻐요. 할머니는 외출하셨거든요. 차 마실 시간까지 저와 함께 있어주실 수 있죠, 네? 저 혼자 차를 마시는 건 너무 외로워요. 있잖아요, 선생님. 전 영 메리 조 누나에게 같이 차를 마시자고 해볼까 했지만 할머니가 허락하실 것 같지 않아요. 할머니는 프랑스인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하시거든요. 그리고 메리 조 누나랑은 얘기하기도 어려워요. 메리 조 누나는 웃으면서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라는 말만 하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대화가 아니에요.”
“물론 너랑 같이 차를 마시고 갈게. 네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단다. 지난번에 여기서 네 할머니가 만든 맛있는 쇼트브레드19)과자를 먹어본 후로 꼭 또 먹어보고 싶었거든.”
폴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선생님, 선생님은 쇼트브레드를 얼마든지 드실 수 있어요. 하지만 메리 조 누나한테 물어봐야 해요. 할머니가 나가시면서 메리 조 누나에게 쇼트브레드가 어린아이의 위장에는 부담이 되니 주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먹지 않겠다고 한다면 메리 조 누나가 조금은 줄지도 몰라요.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선생님.”
“그래, 그러자. 그리고 메리 조가 쇼트브레드를 주지 않겠다고 해도 괜찮아. 그러니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어.”
폴의 긍정적인 생각이 마음에 들어 앤도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폴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럼, 정말 괜찮고말고.”
“그럼 저도 안심이에요.”
폴이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메리 조 누나는 이유를 잘 말하면 알아들어요. 원래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할머니의 말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거죠. 할머니는 좋은 분이지만 사람들이 할머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야단이 나요. 오늘 아침에는 제가 죽 한 그릇을 다 먹어서 할머니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걸 다 먹으려면 무지하게 힘들어요. 할머니는 저를 남자다운 남자로 만들어야 한대요. 그런데 선생님,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거짓 없이 대답해주실 수 있죠, 네?”
“그래, 그래볼게.”
앤이 약속했다.
“선생님도 제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기라도 한 듯 폴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아니야, 폴. 절대 아니야. 누가 그런 얘기를 했니?”
앤이 놀라 소리쳤다.
“메리 조 누나요. 하지만 메리 조 누나는 제가 그 말을 들은 걸 몰라요. 피터 슬론 부인네 집에서 일하는 베로니카가어제저녁에 메리 조 누나한테놀러왔는데 복도를 지나다가 부엌에서 둘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메리 조 누나가 ‘폴은 좀 이상한 아이야. 저 아이가 하는 말은 전부 이상해. 머리가 좀 잘못됐나 봐.’ 하고 말했어요.

전 어젯밤 그 생각을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메리 조 누나의 말이 맞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할머니께 여쭈어볼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여쭈어보자고 생각했죠. 선생님이 제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물론 네가 이상한 게 아니지. 메리 조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이제는 메리 조가 한 얘기로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앤은 분개해하며 속으로 메리 조에게 말조심을 시키라고, 어빙 부인에게 당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젠 마음이 편해졌어요. 선생님 덕분에 이젠 정말 기분이 가뿐해요. 머리가 이상하다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렇죠, 선생님? 제가 상상한 얘기를 메리 조 누나에게 가끔씩 들려주어서 메리 조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건 좀 위험한 일일 수도 있어.”
앤이 자기도 경험한 일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제가 메리 조 누나한테 한 얘기를 선생님께 들려드릴 테니 어디가 이상한 얘기였는지 보세요. 하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저녁때가 되면 전 얘기가 하고 싶어 좀이 쑤시거든요. 그런데 제 얘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으면 메리 조 누나에게 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 이야기를 듣고 메리 조 누나가 저를 머리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한다면 좀이 쑤셔도 그냥 참아야겠어요.”
“얘기가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지면‘초록 지붕 집’으로 뛰어와서 내게 이야기를 해.”
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면 좋아해서 앤이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네, 그래야겠어요. 하지만 제가 갔을 때 데이비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데이비가 저를 보면 인상을 쓰거든요. 데이비는 어린아이이고 저는 꽤 큰 아이니까 별로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누가 저한테 인상을 쓰면 기분이 좋지가 않아요. 그리고 데이비가 인상 쓸 때 표정은 정말 험악하거든요. 어떤 때는 그렇게 구겨진 얼굴이 다시 펴지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니까요. 교회에서도 저를 그렇게 쳐다봐요. 교회에서는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도라는 저를 좋아해요. 저도 도라가 좋고요. 하지만 그전만큼은 아니에요. 도라가 미니 메이 배리한테 크면 저랑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거든요. 저도 어른이 되면 결혼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어려요. 그렇죠, 선생님?”
“좀 어리긴 하지.”
선생님도 맞장구를 쳤다.
“결혼 말이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요, 요즘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요.”
폴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난주 어느 날 린드 아주머니가 오셔서 할머니와 함께 차를 마셨어요. 할머니는 저한테 엄마 사진을 보여드리라고 했어요. 아빠가 제 생일 선물로 주신 사진을요. 전 린드 아주머니께 엄마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마음씨도 좋고 친절하지만 엄마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분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할머니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죠. 린드 아주머니는 엄마가 아주 예쁘기는 하지만 여배우 같아 보이는 데가 있고 아빠보다 너무 젊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언젠가는 네 아빠도 다시 결혼을 하게 될 텐데 새엄마가 생기는 게 좋으냐, 폴?’ 하고 물으시는 거였어요. 아빠가 결혼을 한다는 생각에 순간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린드 아주머니께 제 감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죠. ‘린드 아주머니, 우리 아빠는 우리 엄마를 썩 잘 고르셨으니까 두 번째도 좋은 엄마를 골라주실 거라고 믿어요.’라고요. 전 정말로 그 부분에서는 아빠를 믿어요. 하지만 선생님, 아빠가 저한테 새엄마를 만들어주실 생각이라면 저한테 미리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어요. 메리 조 누나가 차를 마시라고 우리를 불러요. 제가 가서 쇼트브레드를 좀 줄 수 있는지 상의해봐야겠어요.”
그 ‘상의’ 결과 메리 조는 쇼트브레드뿐만이 아니라 설탕 절임까지 내놓아주었다. 앤이 차를 따르고 폴과 함께 거실에서 아주 즐겁게 차를 마셨다. 열린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둘이 나누는 대화가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뿐이라서 메리 조는 다음 날 베로니카에게 해줄 얘기가 아주 많았다. 그 얘기는 물론 그 학교 선생님도 폴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차를 마신 후에 폴은 앤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서 엄마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빙 부인이 책장에 숨겨두었던 그 생일 선물이었다. 폴의 천정이 낮은 작은 방은 부드러운 붉은 저녁 빛이 바다를넘어 들어와 물결쳤고, 네모진 창문 가까이에 있는 우거진 전나무 숲이 던지는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이 부드러운 빛과 그림자 속에 다정하고 처녀 같은 얼굴에, 부드러운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진 폴의 어머니 사진이 침대 발치 쪽 벽에 걸려 있었다.
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엄마 사진이에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엄마를 볼 수 있도록 할머니한테 저기 걸어달라고 했어요. 이제는 잠자리에 누워 잠들 때까지 등불이 없어도 괜찮아요. 우리 엄마가 여기 저와 함께 있는 것 같거든요. 아빠는 저한테 물은 적도 없으면서 제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아냈어요. 아빠는 뭐든지 알고 있나 봐요.”
“네 엄마는 정말 아름다운 분이구나, 폴. 너는 엄마를 닮았어. 엄마의 눈과 머리가 네 것보다 더 진하기는 하지만.”
“네, 제 눈은 아빠를 닮았어요.”
이렇게 말하고 폴은 온 방 안을 뛰어다니며 쿠션을 모두 가져다 창가에 쌓아 올렸다.
“하지만 아빠 머리는 이제 하얘졌어요. 머리숱은 많지만 머리는 하얘요. 나이가 50살이 다 됐으니까요. 얼마 안 있으면 노인이 되겠죠. 겉으로는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마음은 아직 젊어요. 자,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저는 선생님 발밑에 앉을게요. 선생님 무릎에 머리를 기대도 될까요? 엄마와 저는 늘 이렇게 앉아 있었어요. 아, 이러고 있으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요.”
“자, 이제 메리 조가 이상하다고 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폴의 고수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앤이 말했다. 폴은 적어도 마음이 맞는 친구에게는 자기 생각을 서슴없이 얘기했다.
“어느 날 밤 전나무 숲에서 생각해낸 이야기예요.”
폴이 꿈을 꾸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정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제가 생각한 이야기일 뿐이죠. 제가 그 이야기를 생각해낸 다음에 누구에게든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도 없어서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있던 메리 조 누나에게 갔어요. 긴 의자에 앉아 메리 조 누나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 누나? 나는 저 저녁별이 요정 나라의 등대라고 생각해.’ 하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메리 조 누나는 ‘어이구, 네 이야기는 모두 이상한 것뿐이야. 요정 같은 것은 절대로 없어.’ 하고 말을 했어요. 저는 화가 났죠. 물론 저도 요정이 없는 건 알아요. 하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막을 건 없잖아요. 그래도요, 선생님. 전 인내심을 갖고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했어요. ‘그렇다면, 누나, 내가 지금 생각한 걸 들어볼래. 해가 지면 천사들이 이 세상을걸어 다녀. 은빛 날개를 접은 키가 크고 하얀 천사가 저기서 걸어 다닌다고. 꽃과 나무 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천사의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이들한테는 그노랫소리가 들려.’ 그러자 메리 조 누나는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손을 막 내저으면서 말했어요. ‘너는 어쩜 어린아이가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 하니. 네 말을 듣고 있으면 무서운 생각이 든단 말이야.’ 메리 조 누나는 정말로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나머지 얘기는 정원으로 나가서 했죠. 정원에 말라 죽은 작은 자작나무가 있었거든요. 할머니는 바다의 짠물이 튀어 나무가 죽었다고 했지만 저는 그 나무의 요정이 바보같이 밖으로 나가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해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 작은 나무는 너무 외로워서 가슴이 아파 죽은 거예요.”
“그리고 그 불쌍하고 바보 같은 작은 요정도 세상에 싫증을 느끼고 나무에게 다시 돌아왔지만 나무가 죽어 가슴이 아팠지.”
앤이 말했다.
“그래요. 나무의 요정이라도 바보짓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해요. 진짜 사람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요. 제가 초승달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선생님? 꿈으로 가득한 황금 배라고 생각해요.”
폴이 진지하게 말했다.
“배가 구름 위로 올라가 갸우뚱 기울어지면 꿈이 조금씩 쏟아져 우리의 잠 속으로 떨어지지.”

“맞아요, 선생님! 오, 선생님도 아시는군요. 그리고 저는 제비꽃도 천사가 별이 빛나도록 하늘에 구멍을 뚫을 때 떨어진 하늘 조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미나리아재비는 아주 옛날 햇빛으로 만들어졌고요, 스위트피는 나중에 하늘나라로 가면 나비가 될 거예요. 선생님, 이런 생각들이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어린아이가 생각할 만한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생각이지. 백 년을 노력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네 생각이 이상하다고 할 거야.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해도 좋아, 폴. 넌 나중에 시인이 될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집에 도착하자 폴과는 전혀 다른 아이가 재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비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앤이 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누이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데이비, 기도해야지. 잊어버렸니?”
앤이 타일렀다.
“아니야, 잊지 않았어. 이제는 기도하지 않을 거야. 이제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겠어. 내가 아무리 착하게 굴려고 해도 누나는 점점 더 폴 어빙만 좋아하잖아. 그래서 그냥 나쁜 아이가 되어 내 맘대로 재미있게 놀기나 할 거야.”
데이비가 반항적으로 말했다.
“난 폴 어빙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난 너도 폴만큼 좋아해. 단지 좋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누나가 폴과 나를 똑같은 방법으로 좋아 해주었으면 좋겠어.”
데이비가 응석을 부렸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데 똑같은 방식으로 좋아할 수는 없다고. 너도 도라와 나를 같은 방식으로 좋아하지 않잖아. 안 그래?”
데이비가 일어나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렇긴 하지만……. 난 도라가 내 동생이니까 좋아하는 거고 누나는 누나니까 좋아해.”
데이비도 인정을 했다.
“나도 폴은 폴이니까 좋아하고, 데이비는 데이비니까 좋아해.”
앤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기도를 해야겠어.”
데이비가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지금 침대에서 내려가 기도하기는 귀찮으니까 내일 아침에 두 번 할게. 그래도 괜찮겠지?”
“안 돼.”
앤이 당장 안 된다고 해서 데이비는 뭉그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도를 마치자 데이비는 그 작은 맨발로 바닥을 딛고 반쯤 일어서 앤을 올려다보았다.
“누나, 난 옛날보다 훨씬 더 착해졌어.”

“그래, 정말 그래, 데이비.”
칭찬을 해주어야 할 때는 전혀 주저 없는 앤이 얼른 그렇게 말을 해주었다.
데이비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더 착해졌다는 것을 알아.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말해줄까? 오늘 마릴라 아주머니가 나한테 잼 바른 빵을 두 조각 줬거든. 하나는 나 먹고 하나는 도라 먹으라고. 그중 하나가 다른 쪽보다 훨씬 더 컸는데 마릴라 아주머니는 어느 것이 내 것이라고 딱 말해주지는 않았어. 나는 더 큰 빵을 도라에게 주었어. 그건 내가 잘한 거잖아. 그렇지?”
“아주 잘했어, 아주 남자다워, 데이비.”
“응, 그래. 도라는 배가 안 고프다면서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은 내게 다시 주었어. 하지만 난 도라가 그럴 줄 몰랐다고. 그러니까 난 착한 거야, 앤 누나.”
앤은 저녁놀이 깔린 ‘드리아드의 샘’ 가로 산책을 나왔다. 벌써 어둠이 내린‘유령의 숲’을걸어 나오는길버트 블라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앤은 갑자기 길버트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고 느꼈다. 얼마나 남자다운 모습인가. 키가 크고 진솔해 보이는 얼굴에 맑고 솔직해 보이는 눈을 가졌으며 어깨는 떡 벌어졌다. 앤은 길버트가 자기의 이상형은 아니더라도 아주 잘생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오래전에 자기의 이상형을 정해두었고 둘의 남자에 대한 취향은 아주 비슷했다. 그 이상형의 남자는 키가 크고 잘생겨야 하며 우수에 차 있으면서도 깊어 보이는 눈을 가져야 하며 목소리도 녹일 듯 부드러워야 했다. 길버트의 외모는 우수에 젖어 보인다거나 헤아릴 길 없을 만큼 깊어 보이는 눈을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외모라도 우정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길버트는 샘 가 고사리 위로 다리를 죽 뻗고 앉아 앤을 바라보았다. 만일 길버트에게 자기의 이상형 여자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앤이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는 그 일곱 개의 주근깨까지도 포함해 일일이 앤의 모든 것을 댈 것이다. 길버트는 이제 막 소년티를 벗고 있지만 이상만큼은 높았다. 그리고 길버트의 미래에는 언제나 크고 촉촉한 잿빛 눈에 꽃처럼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빛을 가진 한 소녀가 자리했다. 그래서 자기 미래를 이 여신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조용한 에이번리에도 누군가를 만날 기회나 유혹은 얼마든지 있었다. 더군다나 화이트 샌즈의 젊은이들은 다소 개방적이었으며 길버트는 어디를 가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길버트는 앤과의 우정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했고 언젠가는 앤의 사랑도 얻기를 바랐다. 앤의 맑은 눈동자가 지켜보면서 뭐라 할지 모른다는 듯 말도 생각도 행동도 조심스럽게 했다. 높고 순수한 이상을 지닌 모든 처녀가 무의식적으로 친구에게 영향력을 미치듯 앤이 그렇게 길버트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 그 힘은 자기 이상에 충실하게 사는 한 계속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길버트 눈에 비친 앤의 커다란 매력은 다른 많은 에이번리의 아가씨들처럼 사소한 일에 애를 태우는 법이 없고 질투를 한다거나 사람을 속이는 일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환심을 사려고 일을 꾸미는 법도 없다는 점이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거나 일부러 꾸며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식 없고 충동적이면서도 수정처럼 맑은 앤의 성격에 그런 일이 맞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이런 생각을 말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앤이 인정머리 없이 차갑게 그 봉우리조차 싹둑 잘라버리려고 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면 비웃으려 들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는 건 열 배는 더 싫은 일이었다.

“너 자작나무 아래 서 있으니까 정말 나무의 여신 같다.”
길버트가 놀리듯 말했다.
“난 자작나무를 사랑하거든.”
앤은 크림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나무줄기에 뺨을 비볐다. 꾸민 데라고는 없는 참으로 앤다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이 너한테 무척 반가울 것 같은데. 메이저 스펜서 씨가 자기 농장 앞길에 하얀 자작나무를 심기로 했대. 우리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를 격려해주려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오늘 나한테 말씀하셨어. 메이저 스펜서 씨는 에이번리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공공정신이 강한 분이야. 그리고 윌리엄 벨 씨는 집앞길과 오솔길에 가문비나무 울타리를 만들 거라고 하셨어. 우리 개선회가 굉장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앤. 벌써 실험 단계를 지나서 우리 일이 인정을 받고 있는 거라고. 나이가 드신 분들도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화이트 샌즈에서도 마을 개선회를 만들어야겠다고 말들을 하고 있어. 엘리샤 라이트 씨조차도 미국사람들이 해변으로 소풍을 왔다 간 후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해. 미국사람들이 우리가 가꾼 길을 보고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칭찬했기 때문이래. 이제 보라고. 앞으로 스펜서 씨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치게 될 테니까. 에이번리는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될 거라고.”
“부인회에서 묘지를 맡자는 얘기가 나왔대. 그렇게 되면 좋을 텐데. 묘지를 개선하자면 기부금을 거둬야 하는데 개선회로서는 공회당 일 때문에 다시 손을 내밀 수가 없게 되었잖아. 어쨌거나 우리 개선회가 그 문제를 제안하지 않았다면 부인회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을 거야. 교회 마당에 우리가 심은 나무들도 잘 자라고 있고 학교 이사회에서도 내년에는 학교에 울타리를 쳐주겠다고 약속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난 식목일을 만들어서 모든 학생들이 나무를 심게 할 거야. 그리고 길가 구석에다 정원도 만들겠어.”
“지금까지 우리 계획은 거의 모두 성공적이었어. 볼터 씨네 흉가를 철거하려던 계획만 빼고는.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해야겠어. 레비 볼터 씨가 우리를 애먹이고 싶어서 절대로 허물려고 들지 않을 테니까. 볼터 집안사람들은 무슨 일을 반대로만 하려는 기질들이 있지. 레비 볼터 씨한테도 그런 기질이 강한 모양이야.”
“줄리아 벨은 특별위원을 다시 한 번 보내 레비 볼터 씨를 설득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볼터 씨를 그냥 내버려두고 외톨이로 만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앤이 말했다.
“그냥 하늘의 뜻에 맡기자. 린드 아주머니 말처럼. 정말 더 이상의 위원은 안 돼. 그 아저씨를 더 고집스럽게 할 뿐이거든. 줄리아 벨은 위원만 내세우면 무슨 일이든 다 되는 줄 알지만 말이야. 앤, 내년 봄에는 아름다운 잔디밭과 동네 가꾸기 운동을 벌이자. 올겨울에는 좋은 씨앗을 뿌려두어야겠어. 내가 잔디와 잔디밭 가꾸기에 관한 전문잡지를 갖고 있으니까 이 주제에관한보고서를 작성해야겠어. 이제 우리 방학도 거의 끝이 났다. 월요일이면 개학이야. 카모디 학교에 루비 길리스가 오기로 되었다지?”
길버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프리실라는 고향 학교에서 가르치기로 되었다고 편지를 보내왔어. 그래서 카모디 학교 이사회에서 루비에게 학교를 맡기기로 했대. 프리실라가 돌아오지 않아서 섭섭하기는 하지만 루비라도 그 학교로 오게 되어 다행이야. 토요일마다 집에 올 거야. 제인, 다이애나, 그리고 루비까지 우리 넷이 모두 모이게 되다니 옛날 생각이 나.”
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린드 부인 집에서 방금 집으로 돌아온 마릴라가 뒷문 계단에 앉아 있었다.
“레이철과 나는 내일 시내에 나가려고 한다. 린드 씨가 이번 주에는 몸이 좀 나아져서 또 아프기 전에 다녀오고 싶대.”
“내일은 저도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어요. 할 일이 아주 많거든요. 먼저 제 깃털 이불의홑청을 새것으로 갈아야 하고요. 이미 오래전에해야 했는데계속 미루기만 했거든요. 정말 하기 싫은 일이라서요. 하기 싫은 일을 뒤로 미루는 습관은 정말 나쁜 습관이에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아니면 학생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칠 때 양심에 거리끼거든요. 제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니까요. 그다음에는 해리슨 아저씨 케이크도 만들어야 해요. 개선회에 제출할 정원에 관한 보고서를 마쳐야 하고, 스텔라한테 편지도 써야 하고요. 제 모슬린 드레스도 빨아서 풀을 먹여야 해요. 도라의 새 에이프런도 만들어야 하고요.”
앤이 말했다.
“그 많은 걸 하려다가 절반도 못 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많은 일을 계획한 날에는 꼭 뭔가 일이 터져 훼방을 놓거든.”
마릴라가 비관적으로 말했다.
19) 버터 등의 쇼트닝을 듬뿍 넣어 구운 바삭바삭한 쿠키.




20
일은 꼬이는 법






다음날 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분 좋게 새로운 날을 맞았다. 아침 해가 진주 빛깔 하늘을 덮어 ‘초록 지붕 집’은 햇빛의 연못에 폭 빠져버린 듯 보였고 그 속에 춤추는 미루나무와 버드나무 그림자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저 너머로는 해리슨 씨의 밀밭이 연한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앤은 한참 동안이나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며 행복하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음미했다.
아침을 먹은 후 마릴라는 여행 떠날 채비를 마쳤고 오래전에 약속한 대로 도라를 데려가기로 했다.
“데이비, 착하게 놀아야 해. 앤 누나를 성가시게 하지 말고. 착하게 굴면 시내에서 줄무늬 사탕 사다 줄 테니까.”
언제부터 마릴라가 착하게 굴면 무언가를 주겠다고 아이를 꾀는 나쁜 습관을 들였는가!
“나도 일부러 나쁜 건 아니라고요. 어쩌다 보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지.”
“그럼 어쩌다 보면 나쁜 짓을 하지 않게 조심하렴.”

마릴라가 훈계했다.
“앤, 시어러 씨가 오늘 오면 구이용과 스테이크용 고기를 좋은 걸로 좀 사두어라. 오지 않으면 내일 저녁 식사에 쓸 닭을 한 마리 잡아야 한다.”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점심은 데이비와 저뿐이니 다른 요리는 하지 않을 거예요. 훈제 고기로 때우고 저녁에 아주머니가 오시면 스테이크를 좀 구울게요.”
“난 오늘 아침에 해리슨 아저씨와 덜스20)를 따러 가기로 했어. 아저씨가 그러자고 했으니까 점심도 주실 거야. 해리슨 아저씨는 정말로 친절하셔. 아주 재미있고. 나도 어른이 되면 아저씨처럼 될 거야. 아니, 아저씨처럼 행동하겠다고. 아저씨처럼 생긴 건 싫고. 하지만 그럴 염려는 없지. 린드 아주머니도 내가 아주 잘생겼다고 했으니까. 어른이 돼서도 이대로일까? 궁금해.”
“그럼, 그럴 거야. 넌 정말 잘생긴 아이야, 데이비.”
앤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마릴라는 그다지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잘생긴 아이답게 행동해야 해. 착하고 신사답게 굴고.”
“그런데 저번에 미니 메이 배리가 누가 자기한테 못생겼다고 했다면서 울 때는, 착한 아이는 얼굴이 예쁘거나 밉거나 모두한테 귀여움을 받는다고 말했잖아. 도대체 날마다 착해야 한다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만날 착하게 행동해야 한대.”
데이비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넌 착해지고 싶지 않다는 거니?”
이제는 마릴라도 어린아이를 많이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더러 한다.
“나도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긴 하지만 너무 착하긴 싫어요. 착한 사람만 주일 학교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벨 장로님도 아주 나쁜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않아.”
마릴라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에요.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는걸요. 지난주 일요일 주일 학교에서 기도할 때 그렇게 말했다고요. ‘나는 한낱 보잘것없는 벌레 같은 사람입니다. 가련한 죄인입니다. 아주 나쁜 죄인입니다.’ 그랬어. 벨 장로님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나쁘다고 했을까? 누구를 죽였나? 아니면 돈을 훔쳤나? 궁금해.”
다행히도 바로 그때 린드 부인이 마차를 몰고 오솔길을 올라오고 있어서 마릴라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벨 장로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할 때는, 특히 궁금한 게 많은 어린남자아이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수식적인 표현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게 되자 앤은 계획했던 대로 일을 해나갔다. 마루를 쓸고 침대를 정리하고 닭 모이를 주고 모슬린 옷을 빨아 널었다. 그런 다음 깃털 이불 홑청을 갈 준비를 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손에 잡히는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열네 살 때 입었던 감청색 옷이었다. 입고 보니 앤이‘초록 지붕 집’에 처음으로 왔을 때 입었던 그 악명 높은 면모 교직물 옷처럼 짧고 몸에 딱 달라붙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리털이나 깃털로 상할 염려는 없는 옷감이었다. 머리에는 매슈가 쓰던 커다란 붉은색과 하얀색 점이 박힌 머릿수건까지 뒤집어쓰고 준비를 마친 앤이 부엌 곁방으로 내려왔다. 마릴라가 외출하기 전에 앤을 도와서 깃털 이불을 부엌방으로 날라다 놓았었다.
부엌방에는 깨진 거울이 걸려 있었고, 어쩌다 앤이 그 거울을 보아버렸다. 코에 그 일곱 개의 주근깨가 다른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비쳤다. 창문 블라인드가 걷혀 있어 밝은 빛이 비쳐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나, 어젯밤에 그 로션 바르는 걸 잊어버렸어. 식품 저장실로 가서 지금이라도 발라야겠어.’
앤은 이 주근깨를 없애려고 이미 수많은 방법을 써보았다. 한번은 코가 홀라당 벗겨져 버린 적도 있었지만 주근깨는 그대로 남았다. 며칠 전에는 잡지책에서 주근깨를 없앨 수 있는 로션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재료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마릴라의 반대에도 앤은 곧장 재료를 섞어 로션을 만들었다. 마릴라는 하느님께서 주근깨를 주셨으면 그 짐이 아무리 버거워도 그대로 지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앤은 식품 저장실로 달려갔다. 저장실은 창가 바로 곁에 자리를 잡은 커다란 버드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항상 어둑했다. 앤이 들어갔을 때는 파리를 막으려고 블라인드까지쳐놓아 거의 깜깜했다. 앤은 선반에서 로션이 든 병을 집어 작은 스펀지에 듬뿍 묻힌 다음 코에 발랐다. 이 중요한 볼일을 마치자 앤은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깃털 이불을 바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을 마친 앤의 모습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옷은 온통 깃털이 달라붙어 하얗게 변해버렸고 머릿수건에서 삐져나온 앞머리에도 깃털이 달라붙어 마치 머리에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난처하기 짝이 없는 순간에 부엌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어러 씨일 거야. 내 꼴이 엉망이기는 하지만 지금 달려나가 봐야 해. 이 아저씨는 항상 서둘러 가버리니까.’

앤은 생각하며 부엌문으로 급히 달려갔다. 만약 자비로운 부엌 바닥이 깃털을 뒤집어쓴 이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처녀를 집어삼켜줄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초록 지붕 집’마룻바닥이 입을 쩍 벌려 앤을 집어삼켜야 했다. 층계에는 프리실라 그랜트가 아름다운 황금빛과 흰색으로 된 실크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으니까. 키가 작고 뚱뚱한 백발에 트위드21)정장을 입은 숙녀와 큰 키에 품위가 있으며 옷차림이 아주 세련된 숙녀도 함께 서 있었다. 이 부인의 아름답고 고상한 얼굴과 검은 속눈썹 아래 그 커다란 보랏빛 눈을 보았을 때 앤은 이 사람이 바로 샬럿 모건 부인이라고 직감했다.
그 순간 너무나도 당황해버린 앤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는 속담대로 앤은 그 생각에 매달렸다. 모건 부인의 주인공은 어떤 난관이라도 훌륭하게 이겨낸다! 언제 어디서 고난이 닥쳐도. 아무리 힘겨워도 이겨내고 힘이 들면 들수록 그들의 우월성을 더욱 빛나게 할 뿐이었다. 따라서 앤은 순간적으로 자기도 이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했다. 너무나 훌륭하게 그 위기를 모면해서 나중에 프리실라는 그 순간만큼 앤에게 감탄했던 적이 없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앤은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프리실라를 반갑게 맞이했고 자기가 마치 고상하게 성장하고 있기라도 한 듯 차분하고 조용한 태도로 동행한 손님들을 소개받았다. 앤이 틀림없이 모건 부인이라고 확신했던 부인은 놀랍게도 모건 부인이 아니라 펜덱스터 부인이었고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흰 머리가 난 부인이 바로 모건 부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충격 속에서는 실망할 기운도 없었다. 앤은 손님들을손님방을 거쳐 응접실로 안내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프리실라가 말에서 마구를 풀어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젯밤까지 우리가 이렇게 너를 방문하게 될 줄 몰랐어. 샬럿 고모님은 월요일에 섬을 떠나실 예정이고, 오늘은 시내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거든. 그런데 어젯밤에 그친구분한테서 성홍열에 걸려 격리를 당하고 있으니 오지 말라는 연락이 왔어. 그래서 내가 여기로 오자고 했지. 네가 얼마나 우리 고모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오는 길에 화이트 샌즈 호텔에 들러서 펜덱스터 부인도 함께 오게 된 거야. 부인은 우리 고모친구분이시고 뉴욕에 사셔. 남편이 백만장자야. 오래 머물지는 못해. 펜덱스터 부인이 5시까지 호텔로 돌아가야 하거든.”
프리실라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둘이서 말을 마구간에 넣는 동안 프리실라는 몇 번이나 앤의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이상한 눈초리로 자꾸만 바라볼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깃털 이불보를 바꾸어본 적이 없더라도 상상이야 할 수 있을 텐데.’
언짢은 기분으로 앤이 생각했다.
프리실라가 응접실로 가고 앤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다이애나가 불쑥 부엌으로 들어왔다. 앤이 깜짝 놀라 자리에 붙어버린 듯 서 있는 다이애나의 팔을 붙잡았다.
“다이애나 배리, 지금 저 응접실에 누가 와 있는지 알아? 샬럿 E. 모건 부인, 그리고 뉴욕 백만장자의 부인이 와 계셔. 나는 이 꼴이고. 그리고 점심을 대접해야 하는데 이 집에는 지금 먹을 것이라고는 훈제 고기밖에 없어, 다이애나?”
이제 앤은 다이애나도 프리실라처럼 묘한 표정으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눈치챘다. 이건 정말 너무들 한다. 

“오, 다이애나, 그렇게 좀 보지 마. 너도 깃털 이불을 갈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깔끔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된다는 걸 알잖아.”
앤이 사정했다.
“깃털 때문이 아니야. 네 코, 앤.”
다이애나가 주저했다.
“내 코? 오, 다이애나, 내 코가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니?”
앤은 싱크대 위에 걸린 작은 거울로 달려갔다. 거울을 흘끗 보는 것만으로 진실은 드러났다. 앤의 코는 아주 밝은 진홍색으로 빛났다!
순간 앤은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고 그간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상대방을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다이애나가 물었다.
“난 주근깨 약을 바른 줄 알았는데 마릴라 아주머니가 깔개에 무늬를찍는 데 사용하는염색약을 바른 모양이야. 이를 어쩌지?”
앤이 절망스럽게 대답했다.
“씻어내 버려.”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마 지워지지 않을 거야. 처음에는 내 머리에 물을 들였는데, 이젠 코에다가도 물을 들였어. 머리카락은 마릴라 아주머니가 잘라버릴 수 있었지만 코는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잖아. 이건 내 허영심에 대한 벌이야. 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그래도 위로가 안 돼.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난 정말이지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린드 아주머니 말로는 모든 일이 정해진 대로 되는 것이지 운이 나쁘고 좋고 할 것은 없다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염색약은 쉽게 지워졌다. 이제 조금 기운을 낸 앤은 다이애나가 집으로 달려간 사이 동쪽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런 때 입으려고 했던 모슬린 옷은 바깥 빨랫줄에 널려 펄럭거려서 검은색 평직 옷으로 만족해야 했다. 불을 피워 차를 끓이고 있는데 다이애나가 모슬린 옷을 입고 손에는 뚜껑을 덮은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엄마가 이걸 주셨어.”
뚜껑을 열어보니 먹음직스러운 닭고기여서 앤의 눈빛이 감사함으로 빛났다.
닭고기에 곁들어 새로 구운 빵과 버터, 훌륭한 치즈, 거기에 마릴라가 만들어둔 과일 케이크와 부드러운 여름 햇살 같은 금빛 시럽에 띄운 자두 절임을 차려냈다. 식탁은 분홍색과 하얀색 과꽃을 가득 꽂은 꽃병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지난번 모건 부인을 위해 장식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시장했던 손님들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같지 않았고 맛있게 먹어주었다. 처음에는 앤도 식탁에 차린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지 신경 썼지만 그런 생각은 곧 잊고 말았다. 앤이 모건 부인을 아무리 숭배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듯이 부인의 외모가 다소 실망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대화만큼은 훌륭했다. 부인은 여행을 아주 많이 다녀 훌륭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난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재치 넘치는 대화와 풍자적인 말로 풀어낼 때는 훌륭한 책에 나오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번득이는 재치 속에 진실하고 여성스러운 이해심과 자상한 마음이 강하게 느껴져 부인의 재능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인간적인 애정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인은 대화를 독점하지도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다른 사람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갔다. 덕분에 앤과 다이애나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펜덱스터 부인은 말이 적었다. 아름다운 눈매와 입술로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닭고기와 과일 케이크 그리고 절임을 먹을 때도 우아하기가 그지없어 마치 신들이 먹는 음식과 감로수를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앤이 다이애나에게 말했듯이 펜덱스터 부인처럼 신성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입을 열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연인의 오솔길’로 산책을 나가‘제비꽃 골짜기’와‘자작나무 길’을 지나‘유령의 숲’을 통해‘드리아드의 샘’가로 돌아왔다. 모두들 샘 가에 앉아 반 시간가량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건 부인은 왜 이 숲이‘유령의 숲’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궁금해했다. 앤이해 질녘에 마릴라가 억지로 이 유령이 나타나는 숲을 지나게 했던 그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극적으로 들려주자 부인은 너무 웃어 눈물까지 흘렸다.
“이것이야말로이성의 향연, 영혼의 교류가 아니었겠어?”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다이애나와 둘만 남자 앤이 말했다.
“나는 모건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펜덱스터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중에 어느 쪽을 더 즐겼는지 모르겠어. 부인이 방문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때보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야. 차를 마실 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줘, 다이애나. 우리 이 얘기를 좀 더 하자.”
“프리실라가 그러는데 펜덱스터 부인 남편의 동생은 영국의 백작과 결혼했대. 그런데 펜덱스터 부인이 자두 절임을 두 그릇이나 먹었어.”
다이애나가 이 두 가지 사실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영국 백작이라고 하더라도 마릴라 아주머니의 자두 절임 앞에서는 체면을 차릴 수 없을걸.”
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날 밤 앤이 마릴라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근깨 로션은 창문 밖으로 쏟아버렸다.
“다시는 예뻐지는 약 같은 건 바르지 않겠어. 조심성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는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나처럼 실수만 일삼는 사람이 그런 유혹에 빠진다면 운명의 신이 장난을 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아.”
앤은 씁쓰레한 얼굴로 굳게 결심하며 말했다.
20) 자주색이 나는 식용 해조류.
21)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되는 올이 성긴 모직물.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7 00:51:11

사소한일에 애태우지않고 질투하지않고 경쟁하지않고 가식없고 충동적이면서도
수정처럼 맑은 성격을가진 앤을 좋아하는 길버트.하지만 짝사랑을 쉽게 고백하
지 못하는것은 둘사이의 관계가 멀어질가봐 그러네요.


자기보다 폴을 더 이뻐한다고 삐뚤어진 데이비를 설득시키고 잘 다독여주는 앤은
화술도 좋네요.사람이 다른데 다 똑같은 방식으로 좋아할순없죠.모이자회원도
마찬가지예요.

나단비 (♡.252.♡.103) - 2024/03/07 09:28:30

네. 대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죠. 사람이 다르니까요.

앤은 솔직하고 용감한 매력인것 같아요.여전히 주근깨를 마음에 안들어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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