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1~12

나단비 | 2024.03.26 20:25:27 댓글: 0 조회: 88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711
11
인생의 순환





앤은 터본 장학금의 영광을 안고 에이번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앤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정작 앤이 변하지 않아 놀라고 실망했다는 투였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에이번리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에이번리로 돌아온 첫날 ‘초록 지붕 집’의 신도 석에 앉아 설교를 듣는 동안 앤은 몇 가지 변화를 한꺼번에 깨닫고 깜짝 놀랐다. 결국 이 에이번리에서도 시간은 가만히 물러서 있지 않았다. 강단에 서 있는 목사님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몇몇 낯익은 얼굴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에이브 씨의 예언은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고, 피터 슬론 부인의 한숨 보따리도 다 바닥이 났으며, 티머시 코튼도 린드 부인 말마따나 20년이나 죽는 연습만 하더니 결국 숨을 거두었다. 조시아 슬론 노인도 절대로 깎지 않던 수염을 깨끗이 면도하고 관속에 들어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들은 이제 모두 교회 뒤에 있는 묘지에 누웠다. 빌리 앤드루스는 정말 네티 블루엣과 결혼했다!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에 겨운 빌리가 깃털과 비단으로 장식한 신부를 하몬 앤드루스 가족 신도 석으로 데려가는 걸 보았을 때 앤은 너무 기뻐하는 자기 눈빛을 숨기려고 얼른 모자로 가려야 했다. 앤은 제인이 빌리를 대신해 청혼했던 그 크리스마스 방학 중의 어느 폭풍우 치던 밤을 잊지 못했다. 그때 빌리는 앤의 거절로 마음의 상처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럼 네티에게도 제인이 빌리를 대신해 청혼했을까? 아니면 빌리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운명의 청혼을 했을까? 신도 석의 하몬 앤드루스 부인에서 합창단 석에 앉아 있는 제인까지, 앤드루스 가족이 모두 빌리의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인은 올가을 에이번리 학교를 그만두고 서부로 갈 예정이었다.
“에이번리에는 멋진 남자가 없어서야, 그럼. 말로는 서부로 가면 건강이 좋아질 것 같아서라고 하지만 뭐 그럼 지금까지 건강이 안 좋았다는 말인가.”
린드 부인의 말이었다.
“제인은 좋은 아이예요. 누구처럼 사람들 이목이나 끌려고 일부러 일을 벌이진 않으니까요.”
앤의 말에는 제인의 믿음이 들어 있었다.
“그래, 제인은 남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닌 적은 없지. 네 말이 그런 뜻 아니냐, 앤? 하지만 제인도 결혼하고 싶어 해. 딴 사람들처럼 말이지, 그럼. 그게 아니라면 여자라면 씨가 마르고 남자만 득실대는 곳엔 왜 가려고 하겠어? 그렇지 않니?”
하지만 그 순간 놀라움과 경악으로 앤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제인이 아니라합창단 석제인 옆에 앉은 루비 길리스였다. 루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루비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파란 눈은 너무 밝고 찬란했으며 볼은 상기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가느다란 몸매에 손도 너무나 희어서 찬송가를 든 손이 거의 투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루비 길리스가 어디 아픈가요?”
교회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앤이 린드 부인에게 물었다.

“루비 길리스는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루비 본인과 그 집 사람들만 모를 뿐이지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인정을 안 하는 거지. 루비네 집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그럼 루비가 아주 건강하다고 말할 거야. 하지만 지난겨울에 심하게 한 번 아픈 다음부터는 아이들을 가르치지도 못하고 있어. 이번 가을에는 다시 교단에 서겠다고 하더구나. 화이트 샌즈 학교로 가고 싶어 해. 불쌍하게도 화이트 샌즈 학교가 개학을 하면 제인은 아마 무덤으로 들어가야 할 거다, 그럼. 불쌍한 것.”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자기의 어린 시절 친구가 죽는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최근 몇 년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맺었던 우정의 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앤은 가슴이 아팠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항상 명랑하며 애교 많은 루비가. 루비를 떠올리면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교회를 나오면서 루비는 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며 내일 집으로놀러 오라고 초대까지 했다.
“화요일이랑 수요일 밤엔 외출해야 해. 카모디 음악회에 가야 하고 화이트 샌즈에서 열리는 파티에 갈 거라서. 허브 스펜서가 나를데려다줄거야. 내 최근 애인이야. 그러니 내일 꼭 와. 너랑 얘기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너의 레드먼드 생활을 모두 들려주어야 해.”
루비는 자랑하듯이 속삭였다.
루비가 자기의 연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을 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앤은 기꺼이 초대에 응했고 다이애나 역시 함께 가주기로 했다.
“루비를 만나고 싶었어. 오랫동안. 하지만 혼자 루비를 만날 순 없을 것 같았어. 루비가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기침 때문에 말도 못 할 지경이면서도 자기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보기 힘들고. 사람들 말로는 루비가 아무리 병마를 이겨내려 해도 가망성이 별로 없대.”
다음 날 오후‘초록 지붕 집’을 나서며 다이애나가 앤에게 말했다.
둘은 구불구불한 붉은 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나무 꼭대기 위에 높이 앉은 울새는 저녁 기도라도 드리는지 황금빛 대기를 생기 넘치는 소리로 가득 채우고, 늪과 연못에서는 개구리가 내는 소리가 은빛 플루트 부는 소리처럼 들려왔으며, 저 너머 들판에서는 씨앗들이 제 위로 떨어지는 햇빛과 빗줄기를 받아 생명을 틔우려고 꿈틀거렸다. 대기에는 갓 떨어진 나무딸기가 흩뿌리는 자연 그대로의 달콤하고 건강한 냄새로 가득했고, 분지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으며 자줏빛 별들이 시냇물 위에서 파랗게 빛났다.
“너무 아름다운 석양이야. 저기 좀 봐, 앤. 저 구름은 또 다른 세상 같아. 저 길고 낮은 자줏빛 구름이 해변이고, 그리고 더 멀리 저 맑은 하늘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야.”
다이애나가 말했다.
“폴이 쓴 이야기에서처럼 우리가 달빛 배를 타고 저바닷속을 항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에서 우리 지나간 옛 시간을 모두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 숱한 봄과 꽃들을? 거기에서 폴이 보았던 꽃밭은 예전에 우리를 위해 꽃봉오리를 터뜨렸던 장미들이었을까?”
몽상에서 깨어난 앤이 말했다.
“아니! 넌 모든 것이 다 추억으로 변한 늙은 여자라도 된 듯 말하는구나.”
“루비의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 우리가 늙은 여자들이 되어버린 것 같아. 루비가 정말로 죽는다면 다른 모든 슬픈 일들도 다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잠깐, 엘리샤 라이트 씨네 집에 들러도 될까? 엄마가 아토사 대고모님에게 이 잼을 갖다 드리라고 했어.”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토사 대고모님이 누군데?”
“아직 못 들었니? 스펜서베일의 샘슨 코츠 부인. 엘리샤 라이트 씨의 이모님이지. 우리 아버지의 고모님이시기도 해. 남편이 작년 겨울에 돌아가시고 대고모님만 외롭게 혼자 남으셨어. 무척 가난하게 말이야. 그래서 라이트 씨네 집에서 모시기로 했지. 우리 엄만 우리가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빠가 안 된다고 했어. 아토사 대고모님과는 절대 함께 살 수 없대.”
“왜, 대고모님이 그렇게 지독한가?”
앤이 무심히 물었다.
“너도 대고모님을 만나보면 뒤돌아서기도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거야, 앤. 아빠 말씀으론 대고모님 얼굴이 꼭 도끼처럼 생겼대. 공기도 자를 만큼 날카롭고, 혀는 더 매서운 분이래.”
다이애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앤과 다이애나가 갔을 때 아토사는 부엌에서 씨감자를 썰고 있었다. 다 낡고 색이 바랜 낡은 옷을 입고 입었고, 흰 머리도 단정치 못했다. 아토사는 좋은 기분은 아닌 듯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네가 앤 셜리구나.”
다이애나가 앤을 소개하자 아토사가 입을 열었다.

“너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앤드루스부인이 네가 집에 왔다고 하더구나. 네가 아주 좋아 보이더라고 말이다.”
앤에 관해 좋은 말은 들은 게 없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개선해야 할여지가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는 말투였다. 아토사는 넘치는 에너지로 쉴 새 없이 감자를 썰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앉으라고 권할 필요도 없겠지? 너희한테 이런 곳에 무슨 관심이나있으려고.”
아토사가 빈정대는 말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젤리를 한 병 주셨어요. 오늘 만든 거라 대고모님도 좋아하실 것 같다구요.”
다이애나가 밝게 말했다.
“고맙기도 하지. 네 엄마가 잼을 보낼 줄은 몰랐구나. 근데 네 어머니의 잼은 너무 달아서 말이지. 그래도 억지로라도 먹으려 노력해보마. 이번 봄에는 입맛이 통 없어. 난 정말 아주 형편없이 지낸다.”
아토사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은 계속하고 있다. 이 집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필요가 없으니까.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만 이 잼을 저기 찬장에 넣어주겠니? 난 이 씨감자 손질하는 거오늘 밤까지 다 끝내놓아야 하거든. 너희들이야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테지? 손을 망치는 게 끔찍이도 싫을 테니까.”
“우리 농장을 빌려주기 전까진 저도 씨감자를 썰었는걸요.”

앤이 웃었다.
“전 아직도 그 일을 해요. 지난주에도 사흘이나 감자를 썰었어요. 감자를 썬 날엔 레몬주스에 손을 담갔다가 양가죽 장갑을 끼고 잠을 자기는 했지만요.”
다이애나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토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매일 읽어대는 그 바보 같은 잡지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던? 네가 그런 잡지를 읽도록 내버려두는 네 엄마가 더 문제야. 네 엄마가 너를 망치고 있는 것 같다. 조지가 네 엄마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우린 모두 적당한 짝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아토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조지 배리가 결혼할 때 가졌던 나쁜 예감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려고? 나처럼 늙은이랑 얘기하려니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구나. 젊은 남자가 집에 있어야 했는데, 유감이다.”
앤과 다이애나가 일어나자 아토사가 말했다.
“우린 어서 가서 잠깐이라도 루비 길리스를 만나봐야 하거든요.”
다이애나가 변명했다.
“핑계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아토사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후딱 들어왔다 또 가버리는구나. 대학에서는 다들 그렇게 가르치는가 보지? 니들이 좀 더 현명하다면 루비 길리스하고는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게 좋을 거야. 결핵은 옮는 병이라고 의사들이 말하지 않던. 루비 길리스가 작년 가을 보스턴에 갈 때부터 난 그 애가 분명 무슨 병이든 걸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에걸리게 마련이거든.”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지 않아도 병은 걸려요. 어떨 땐 죽기까지 하죠.”
다이애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죽게 돼도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아토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다이애나, 그나저나 넌 이번6월 말에 결혼한다면서.”
“아니에요. 사실이 아니에요.”
다이애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너무 오래 미루지 마라. 너도 곧 시들 테니 말이다. 네 혈색과 아름다운 머릿결도 말이야. 게다가 라이트네 사람들은 변덕이 아주 심하니까. 앤 셜리, 너도 모자 좀 쓰고 다녀야겠다. 코에 주근깨가 말이 아니구나. 이런, 게다가 빨간 머리까지. 하긴 조물주가 만들어주신 모습 그대로 사는 거지 뭐. 마릴라에게 안부나 전해다오. 내가 에이번리에 머무르게 된 뒤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지만, 어쩌겠니? 욕할 순 없지.커스버트가 사람들은 자기네가 아주 고고한 사람들인지 알아.”
“정말 끔찍하지 않니?”

도망치듯 얼른 집을 빠져나오면서 다이애나가 말했다.
“엘리자앤드루스아주머니보다 더 지독해. 아토사라는 이름으로 한 평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봐. 누구라도 끔찍한 일 아니겠어? 나 같으면 그 이름을 코델리아라고 상상할 텐데. 그럼 좀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나도 앤이란 이름을 싫어할 때 그렇게 생각하니 많은 도움이 됐거든.”
앤이 말했다.
“조시 파이가 크면 딱 아토사 대고모님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조시 엄마와 아토사 대고모님과는 사촌지간이거든. 하여튼 그 집에서 빠져나왔으니 다행이야. 아토사 대고모님은 정말 심술궂어. 모든 것의 맛을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 같아. 우리 아버지가 아토사 대고모님의 얘길 해준 적이 있는데, 얼마나 웃기는지 들어 봐. 어느 날 정말 사람 좋고 영적으로 충만한 목사님이 스펜서베일 교회에 오셨는데, 귀가 많이 안 좋은 분이셨대.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 내용도 잘 못 알아들으셨대. 주일 밤마다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신도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성경 구절을 읊었대.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모임에서 아토사 대고모님이 벌떡 일어나셨는데, 기도를 드린 것도성경 문구를 외운 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대신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말을 퍼부어댔대.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차례로 부르면서 그동안 행실이 어땠고, 과거 10년 동안 어떻게 싸움질을 하고 무슨 소문들이 났었는지 노골적으로 다 밝히면서 마지막으로넌더리 나는이 스펜서베일 교회가 또다시 더럽혀지는 일이 없길 바라지만 무서운 심판이 교회에 내릴 거라고 하시면서 말을 끝냈대.그러고는숨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으셨다지. 그런데 목사님은 그런 대고모님의 말을 한 마디도 못 들으셨다는 거야. 대고모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 진지하게 ‘아멘! 주여, 우리 자매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해주소서!’ 하셨대, 글쎄. 너도 우리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으면 배꼽을 잡았을 거야.”
“이야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이애나. 나 요즘 들어 내가 단편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어. 출판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소설.”
앤이 조심스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넌 할 수 있어. 몇 년 전에 우리가 이야기 클럽을 만들었을 때 넌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만들어냈었잖아.”
다이애나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그런 종류의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이야기 말고. 단편 소설을 생각하고 있는데, 쓰기가 두려워. 실패하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프리실라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모건 부인도 처음에는 소설들을 보낼 때마다 다 거절당했대. 하지만 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내가 확신해. 왜냐하면 요즘의 편집자들은 좀 더 지각 있는 사람들이니까.”
“작년 겨울에 레드먼드의 3학년 여학생인마거릿버튼이 소설을 썼는데 그게 <캐나다 여성>지에 실렸어. 내 생각엔 나도 그 정도의 소설쯤은 쓸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럼 네 글도 그 잡지에 실릴 수 있을까?”
“처음엔 대형 출판사 중 하나를 시도해볼까 해.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는가에 달렸지만.”
“무슨 얘기를 쓰고 싶은데?”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좋은 줄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굉장히 중요하거든. 내가 결정한 거라곤 주인공의 이름뿐이야. 에이버릴 레스터라고 정했어. 예쁜 이름 아니니? 아직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마. 너랑 해리슨 아저씨한테만 말하는 거야. 아저씨는 힘이 날 만한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셨어. 요즘 이야기책들은 옛날 것에 비하면 훨씬 형편없대. 내가 일 년이나 대학에다녔으니 뭐 더 잘 쓸 수 있겠지 하시더라.”
“네 소설에 뭘 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실까?”
다이애나는비난조로 말했다.
루비 길리스네 집에 도착해보니 불빛과 손님들로 흥에 겨운 분위기였다. 스펜서베일의 레오나르드킴벌과 카모디의 모건 벨이 응접실에 앉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몇 명의 활기가 넘치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루비는 눈동자와 뺨이 한층 더 빛나며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다른 아가씨들이 돌아가자 앤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새로 장만한 여름 드레스를 보여주었다.
“파란색 실크 드레스는 아직 입기가 좀 그래. 여름에 입기에는 좀 부담스럽거든, 가을이 되면 입을까 해. 나, 화이트 샌즈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거야. 내 모자, 어때? 어제 네가 교회에서 썼던 모자는 정말 산뜻하더라. 나한테는 좀밝은색이 어울리는 것 같아. 저기 아래층에 웃기는 두 남자 봤니? 서로 밖으로 쫓아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 났어. 난 두 사람 다 별로인데. 나는 허브 스펜서가 맘에 들어. 가끔은 허브가 ‘내 운명의 남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지난 크리스마스 땐 스펜서베일의 선생님이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다 그 남자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면을 발견했어. 내가 거절하자 그 남자는 거의 미치려고 하더라. 저 두 사내, 오늘 안 왔으면 하고 바랐는데. 앤, 난 너와 좋은 시간을 갖고 싶었거든. 앤,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너랑 나랑은 정말 좋은 친구였잖아.”
루비는 앤의 허리에 팔을 돌려 안으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잠깐 동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루비의 빛나는 얼굴 뒤로 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비쳤다.
“종종놀러 와. 그래 줄 거지 앤? 혼자 와. 난 너와 얘기하고 싶어.”
루비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비, 괜찮니?”
“나! 난 정말 괜찮아. 지금까지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어. 물론 작년 겨울에 결핵 때문에 약간 힘들긴 했지만, 내 얼굴색을 봐. 내가 그렇게 환자같이 보이지는 않잖아.”
루비의 목소리가 순간 아주 날카로웠다. 그러고는 앤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어버리고 화가 난 듯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루비는 여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두 시골 남자를 놀리는 데만 너무 열중한 채 앤과 다이애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해 둘은 곧 자리를 물러 나왔다.



12
에이버릴의 속죄





어느 날 저녁 앤과 다이애나는 분지의 아름다운 개울가로 산책을 나섰다.
“무슨 공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앤?”
고사리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풀들은 한층 짙은 초록 들판을 이루었다. 돌배나무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배꽃이 활짝 피어 은은한 향기를 뿜어냈다.
앤은 행복한 듯 한숨을 쉬며 몽상에서 깨어났다.
“나, 내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어, 다이애나.”
“정말? 벌써 시작한 거니?”
순간 다이애나가 큰 관심을 내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음, 그저 몇 장 써봤어. 하지만 꽤 괜찮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적당한 줄거리를 만들어내느라 시간을 많이 쏟았거든.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야기는 에이버릴이라는 여주인공 이름에 맞지 않았어.”
“그럼 주인공 이름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나도 그러려고해봤지만, 할 수 없었어. 차라리 다이애나 네 이름을 바꾸면 바꿨지 그건 할 수 없었다고. 에이버릴이란 이름이 나에겐 너무 진짜 같아서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그러다가 결국 그 이름에 맞는 이야기를 생각해내게 된 거야. 그런 다음엔 다른 인물들 이름을 골랐는데, 너무 신나더라.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 그 이름을 생각하느라 몇 시간이나 뜬 눈으로 누워 있었다니까. 남자 주인공 이름은 퍼시벌 대림플로 정했어.”
“그럼 등장인물 이름을 모두 다 지었니? 만약 아니라면 나도 이름을 짓게 해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도. 나도 네 이야기에 한몫하고싶다고.”
다이애나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럼 레스터 씨네 집에서 일하는 소년 이름을 지어봐.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닌데 아직 이름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거든.”
앤이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을 레이먼드 피츠오스본이라고 부를래.”
그런 이름이야 얼마든지 댈 수 있는 다이애나가 말했다. 모두 그 이야기 클럽 덕분이었다. 앤과 다이애나, 제인앤드루스와 루비 길리스가 에이번리 학교에 다니던 시절 함께 만들었던 클럽이었다.
앤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름은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 이름치곤 너무 귀족적인 것 같아. 어떻게 피츠오스본이란 이름으로 돼지 먹이를 주고 나무를 주워 나를 수 있겠니. 난 상상이 안 돼.”

다이애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상상력이 있다면 왜 그 정도까지도 상상할 수 없다는 건지.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앤일 것이다. 결국 그 아이에게는 로버트 레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줄여서 바비라고도 부르기로 했다.
“그 이야기로 돈은 얼마나 벌 수 있을까?”
다이애나가 물었다.
하지만 앤은 돈에 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앤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지 한낱 금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앤의 문학적인 꿈은 아직 돈에 생각으로 더럽혀지지 않았다.
“나도 읽어보도록 해줄 거지, 앤?”
다이애나가 간청했다.
“소설을 다 쓰고 나면 너랑 해리슨 아저씨에게 보여줄게. 그러면 아주 신랄한 비평을 해줘. 그 외에는 소설이 출판될 때까진 아무도 보지 못할 거야.”
“결말은 어떻게 할 거야, 행복하게? 비극적으로?”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난 비극적인 결말이 좋아. 그래야 훨씬 더 낭만적일 테니까. 하지만 편집자들은 비극적 결말에 편견을 갖고 있어. 그리고 해밀턴 교수님도 예전에 오직 천재만이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셨어. 난 천재가 아니잖아.”
앤이 겸손하게 말했다.
“난 행복한 결말이 좋아. 남자 주인공이랑 여자 주인공이 결혼하게 해줘.”

다이애나가 말했다. 프레드와 약혼한 후로는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결혼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이애나였다.
“하지만 넌 슬픈 이야기를 읽고 우는 걸 좋아하잖니.”
“그래, 이야기 중간에는 우는 게 좋아. 하지만 결말은 행복해야 해.”
“난 한 장면은 비극적으로 만들려고 해. 로버트 레이가 사고로 다치고 죽는 장면 같은 거 말이야.”
“안 돼, 바비를 죽이지 마. 그 아이는 내 건데, 난 그 아이가 잘살았으면 좋겠어. 정말 죽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골라줘.”
다이애나가 깔깔거리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이후 앤은 2주 동안 소설 생각으로 괴로워하거나 기쁨에 도취된 채 보냈다. 멋진 생각에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기도 했고, 몇몇 대조적인 주인공들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좌절하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이런 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쓰면 되잖니.”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에이버릴은 정말 다루기 힘든 주인공이야. 내가 의도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을 해. 그럼 그전 이야기를 다 망치게 돼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해.”
앤이 한탄했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는 끝났고 앤은 아무도 없는 동쪽 방으로 들어가 다이애나에게 그 소설을 읽도록 했다. 앤은 로버트 레이를 죽이지 않고서도 ‘비극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앤은 소설을 읽는 동안 다이애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때때로 벌떡 일어나 적절히 울음을 터뜨려주었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자 다이애나의 표정에는 약간의 실망감이 드러났다.
“왜 모리스 레녹스를 죽였어?”
다이애나가 책망하듯 물었다.
“그는 악한이야. 벌을 받아야지.”
앤이 주장했다.
“난 이 사람을 제일 좋아했단 말이야.”
다이애나가 비논리적인 반박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었어. 죽어야만 했어. 내가 그를 살려두었다면 그는 아마 에이버릴과 퍼시벌을 괴롭혔을 거라고.”
다소 화난 듯 앤은 말을 내뱉었다.
“그랬겠지. 네가 그 사람을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럼 낭만적이지 않아. 게다가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그렇긴 하지만. 앤, 네 이야기는 정말 괜찮아. 이 소설이 너를 유명하게 해줄 거야, 난 확신해. 제목은 정했어?”
“그럼, 아주 오래전에 정해놨지. ‘에이버릴의 속죄’야. 정말 멋진 제목이지 않니? 자, 다이애나. 이제 솔직하게 말해줘. 내 글에 잘못된 부분은 없니?”
“글쎄.”
다이애나가 머뭇거렸다.
에이버릴이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은 소설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서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여주인공은 요리 같은 걸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왜? 바로 그 부분이 유머러스한 부분인데. 그리고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멋진 부분 중 하나야.”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게 더 이상의 비평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해리슨 씨는 더욱 매몰찼다. 우선 소설 속에 묘사가 너무 많다고 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모두 빼버려라.”
해리슨 씨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리슨 씨의 조언은 참을 수 없었지만 진실이라서 앤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묘사 부분을 거의 다 없애야 했다. 까다로운 해리슨 씨를 만족시키려고 이렇게 다시 쓰기를 세 번이나 해야 했다.
“석양 부분만 빼곤 다른 묘사들은 전부 뺐어요. 하지만 이 석양 장면만큼은 절대 없앨 수 없어요. 최고로 멋진 부분이니까요.”
앤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 전개와 아무 관련도 없잖니. 그리고 잘사는 도시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았어야 했다. 네가 그 사람들을 아는 게 뭐가 있니? 왜 바로 여기 에이번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았어? 물론 사람들 이름은 바꿔야겠지. 안 그럼, 린드 부인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해리슨 씨가 말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에이번리는 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곳이에요. 하지만 소설의 무대가 될 만큼 낭만적인 곳은 아니라고요.”
앤이 반박했다.
“하지만 난 이곳 에이번리에도 낭만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비극도 많지만. 그러나 네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현실 속 인물이란 느낌이 안 든다. 말이 너무많은 데다, 너무 공상에 젖은 말만 해. 대림플이란 놈은 두 페이지 이상 말을 지껄여대고 여자는 한 마디도 끼어들 틈을 안 준단 말이야. 만약 현실에서 그랬다면 여자가 남자를 땅에다 메쳐버렸을 거다.”
해리슨 씨가 꾸밈없이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버릴에게 쏟아놓은 그아름답고시적인 언어들이라면 어떤 여자의 마음도 사로잡고 말 거라고 앤은 가슴 깊이 믿었다. 게다가 품위 있고, 여왕 같은 에이버릴이 누군가를 ‘메쳐버리다’니. 에이버릴은 자기에게 청혼한 사람을 정중하게 거절했을 뿐이다.
“그리고 난 왜 모리스 레녹스가 에이버릴을 차지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딴 남자보다 몸집도 두 배나 크고 나쁜 짓도 잘할 놈인데. 그리고 나쁜 짓도 많이 했잖니.퍼시벌은 멍청하게만 있고, 하는 일이 도대체 뭐냐.”
‘멍청하게’는 ‘메치기’보다 훨씬 더 나빴다.

“모리스 레녹스는 악한이에요. 왜 모두들 퍼시벌보다 모리스 레녹스를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분노에 찬 앤이 말했다.
“퍼시벌은 너무 착해서 그렇다. 사람을 약 오르게 하는 놈이야. 다음엔 주인공이 인간적인 면모를 갖도록 글을 써라.”
“에이버릴은 모리스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는 나쁜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에이버릴이 모리스를 새 사람으로 만들면 되잖니. 앤, 너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해파리는 어쩌지 못하겠지만. 이야기 자체가 나쁜 건 아니야. 재미있어. 그건 인정하마.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기엔 네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으니, 한 10년은 더 기다려라.”
다음에 또 글을 쓰면 절대 누구에게도 비평해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고 앤은 결심했다. 너무 낙담스러운 경험이었다. 길버트에게도 소설을 읽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길버트에게 이미 소설 이야기는 했다.
“만약 이 소설이 성공하면, 길버트, 너도 출판된 소설을 읽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실패하면, 아무도 읽지 못하겠지.”
마릴라는 앤의 이런 모험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앤은 잡지에 실린 자기 소설을 마릴라에게 읽어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릴라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앤을 작가라고 불러주었다. 상상 속에서는 어떤 일이나 가능한 법이니까.
어느 날 앤은 큰 잡지사 중에서도 가장 큰 잡지사 주소를 쓴 길고 두꺼운 봉투를 들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앤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미성숙한 젊음답게. 다이애나도 앤만큼이나 흥분했다.
“얼마나 지나야 답을 받게 될까?”
다이애나가 물었다.
“아마 2주까지는 걸리지 않을 거야. 잡지사에서 이 글을 받아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울까.”
“물론 받아줄 거야. 그리고 더 보내달라고 부탁해올걸. 그럼 언젠가는 너도 모건 부인처럼 유명해지는 거지. 앤,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어.”
다이애나는 자기 친구가 가진 재능과 하느님의 은총에 적어도 이기심 없이 그대로 인정하는 놀라운 장점을 가졌다.
환희에 찬 꿈을 꾸며 일주일을 보낸 후 드디어 쓰디쓴 자각의 순간이 다가왔다. 어느 날 밤 다이애나는 동쪽 방에서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는 앤을 보았다. 탁자 위에는 기다란 봉투 하나와 구겨진 원고가 놓여 있었다.
“앤, 네 이야기가 되돌아온 건 아니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이애나가 외쳤다.
“아니, 돌아왔어.”
앤은 짧게 대답했다.
“편집장이 어떻게 된 게 분명해. 도대체 이유가 뭐래?”
“아무런 이유도 없어. 그냥 받아주기 부적합하다고 인쇄된 종이쪽지 하나뿐이었어.”

“난 그 잡지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 잡지 속 이야기들은 ‘캐나다 여성’보다 반도 재미없는 것들이야. 책값만 엄청나게 비싸고. 내 생각에 편집장은 미국사람이 아닌 작가에게 편견이 있나 봐.낙담하지마, 앤. 모건 부인의 원고가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네 원고를 <캐나다 여성>지에 보내봐.”
“그래, 그럴 거야. 출판되기만 하면 인정받은 그 원고를 그 미국인 편집장한테도 보낼 거야. 그런데 석양을 묘사한 부분은 없애야겠다. 해리슨 아저씨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게 석양을 묘사한 부분도 사라졌다. 이렇듯 엄청난 손질을 가했는데도 <캐나다의 여성>지의 편집장도 ‘에이버릴의 속죄’를 바로 반송해버렸다. 분개한 다이애나는 앤의 소설을 읽지도 않고 그냥 반송했을 것이라며 <캐나다의 여성>지 구독 계약을 해지해버리겠다고 맹세했다. 앤은 이 두 번째 거절에 완전히 절망하고 침묵 속에 잠겨버렸다. 그리고 그 옛날 이야기 클럽 시절의 이야기들이 동면하고 있는 다락방 트렁크에 ‘에이버릴의 속죄’도 함께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하지만 그전에 다이애나의 간청을 받아들여 복사본을 만들어 다이애나에게 주었다.
“이것이 내 문학적 야망의 끝이로군!”
앤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해리슨 씨에게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어느 날 밤 갑자기 해리슨 씨가 그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냐고 앤에게 물어왔다.
“어떤 편집장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앤은 짧게 대답했다.

해리슨 씨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앤을 곁눈질했다.
“글쎄, 글을 계속 써보는 게 좋겠지.”
해리슨 씨는 격려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이제 다신 안 쓸 거예요.”
19세의 아직은 미성숙한 앤은 눈앞에서 기회의 문이 닫혀버리자 절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라면 그렇게 완전히 포기해버리진 않을 텐데. 가끔씩 글을 써봐야지.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들로 편집장을 괴롭히진 않을 거야. 나라면 잘 아는 사람과 장소를 주제로 쓸 것이고 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평범한 말투로 말하게 할 거야. 지나치게 떠벌리지도 않고 조용하게 해가 뜨고 지게 할 거야. 악한이 필요하다면 그 악한에게도 기회를 줘볼 거다. 앤, 난 기회를 줄 거야. 세상에는 끔찍하게 나쁜 악한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아. 물론 린드 부인은 우리가 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바로 우리들도 약간은 정중하고 선량하다고. 쓰기를 멈추지는 말라고, 앤.”
해리슨 씨는 그동안의 일을 다시 떠올려보듯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글쓰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짓이었어요. 레드먼드를 졸업하면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래요. 전 가르치는 일은 잘할 수 있지만 글은 잘 쓸 수 없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남편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나처럼 결혼을 오래 미루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해리슨 씨가 말했다.
앤은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해리슨 씨는 종종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고는 한다. ‘땅에 메치기’라든가 ‘멍청하게 있다’라든가 게다가 ‘남편을 얻는다’라는 말까지. 오,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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