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9~20

나단비 | 2024.03.27 17:39:06 댓글: 0 조회: 61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863
19
에피소드





러스티를 무릎에 올려놓고 벽난로 앞의 깔개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앤이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제임시나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았으니10대시절은 영원히 떠나보내야 하는 건가요?”
거실에는 둘뿐이었다. 스텔라와 프리실라는 위원회 모임에 갔고, 필리파는 2층에서 파티에 갈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쉬운 모양이구나.10대란 인생의 멋진 부분인데 말이야. 난 내가 아직도10대라는 게 기쁘다.”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우스갯소리에 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요, 아주머니는 영원한10대세요. 백 살이 돼도 언제나 열여덟일 거예요. 맞아요. 너무 섭섭해요. 그리고 실망스럽고요. 스테이시 선생님이 오래전에 스무 살이 되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자기 성격이 완성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제 성격이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온통 허점투성이에요.”

“모두 다 그렇지 뭐. 난 허점이 수백 군데도 넘는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너에게 했던 말은 스무 살 정도가 되면 네 성격이 어느 한 방향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의미였을 게다. 그리고 점차 그 방향으로 발전하는 거지. 걱정하지 마라, 앤. 하느님과 네 이웃과너 자신의 의무만 다하면 된다. 그리고 인생을 즐겨. 그게 내 철학이고, 비교적 맞는 말 같기도 해. 그런데 필은오늘 밤어디를 간다는 게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쾌활하게 말했다.
“댄스파티에 간다나 봐요. 파티 때문에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멋있는 드레스를 준비했어요. 부드러운 노란색 실크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드레스죠. 필의 갈색 머리와 잘 어울릴 거예요.”
“‘실크’와 ‘레이스’란 말에는 항상 마법이 숨어 있어. 그렇지 않니? 실크, 레이스란 소리만 들어도 총총거리며 댄스파티로 달려가는 느낌이 들거든. 그것도 노란 실크라니. 햇살 같은 드레스일 것 같구나. 나도 노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처음엔 엄마가, 그다음엔 남편이 내 소원 같은 건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 천국에 가서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이 바로 노란색 실크 드레스를 마련하는 거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앤이 한바탕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있는데, 눈부신 아름다움을 흩뿌리면서 필리파가 내려왔다.그러고는긴 타원형 거울에다 눈부신 자기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예쁘게 보여주는 거울은 사람을 상냥하게 만들어. 내 방에 있는 거울은 뭐든지 녹색으로 보여서 이상하거든. 나 예쁘지 않니, 앤?”
“너 정말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싶니, 필?”
필리파가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앤이 물었다.
“물론, 당연하지. 거울이나 남자들이 왜 있는 거겠어?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드레스가 잘 마무리가 된 것 같으냐고. 치마가 바로 펴졌니? 이 장미를 좀 더 아래로 내리는 게 나을까? 너무 높으면 안 돼. 그럼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보이니까. 그래도 귀를 간지럽게 하는 건 싫은데.”
“모든 게 완벽해.게다가 너의그 보조개도 너무 사랑스럽고.”
“앤, 넌 칭찬에 인색하지 않아 좋아. 너에게는 남을 시기하는 마음 같은 건 없어.”
“앤이 널 시기해야 할 이유가 뭐냐? 앤이 너만큼 예쁘지 못할지는 몰라도 코는 네 코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필리파의 말에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저도 알아요.”
필리파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 코는 내게 항상 위안이었어.”
앤도 고백했다.
“또 네 앞머리 모양도 무척 예뻐. 그 이상하게 말려 올라간 곱슬머리는 곧 아래로 내려올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잖아. 정말 보기 좋아. 코 말이 나왔으니, 난 내 코가 너무 걱정돼. 내가 마흔 살이 되면 난 아마 번 집안의 코를 갖게 될 거야. 마흔 살이 되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앤?”
“늙고 뚱뚱한 아줌마?”
앤이 놀렸다.
“아니,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댄스파티 에스코트 상대를 기다리며 편안하게 앉아 있던 필리파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조지프, 이 앙큼한 놈. 네가 감히 내 무릎에 뛰어오르려고? 나더러 온몸에고양이 털을 묻히고 춤추러 가라는 거니? 절대 그렇겐 안 돼. 난 절대 뚱뚱해지지도 않을 거야. 분명 결혼이야 하겠지만.”
“알렉이나 알론조랑?”
앤이 물었다.
“그럼, 둘 중 하나와 하겠지. 물론 그보다 먼저 내가 그 두 사람 중 하나를 택해야 하겠지만.”
필리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정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꾸짖듯 말했다.
“전 원래오락가락하도록태어났어요. 그 무엇도 저를 흔들리지 않도록 막을 수 없다고요.”
“그러니 좀 더 분별력이 있어야지, 필.”
“물론 분별력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 아주머니가 알렉이나 알론조를 아신다면 제가 왜 한 사람을 선택하기 힘든지 이해하실 거예요. 두 사람 다 똑같이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럼 더 나은 사람을 찾으면 되겠네.”
“아, 그 왜 4학년 학생 중에 그런 사람 있잖니. 너에게 완전히 빠져 있고, 큰 눈에 눈매도 선한 사람, 윌 레슬리였나.”
“그 사람은 눈이 너무큰 데다너무 선해 보여서, 꼭 소 같아 보이잖아요.”
필리파의 평은 잔인했다.
“그럼 조지 파커는 어떠냐?”
“그 사람이야 언제나 풀을 먹여 다림질을 해놓은 사람 같아서.”
“그럼 마르 홀월시는 어때? 그 사람이라면흠잡을데 없지 않니?”
“아니에요, 그 사람은 가난해요.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전 부자와 결혼해야 해요, 아주머니. 물론 얼굴도 잘생겨야 하구요. 그건 결혼의 필수 조건이에요. 그러니 길버트가 부자였다면 전 바로 길버트랑 결혼했을 거예요.”
“어머, 정말?”
앤이 짓궂게 물었다.
“앤도 저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우리 둘 다 길버트를 차지할 마음은 없으니까요.”
필리파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자, 그 유쾌하지 못한 생각은 이제 그만! 어쨌든 언젠가는 결혼하게 되겠지. 난 그 끔찍한 날과의 대면을 최대한 늦출 거야.”
“하지만 네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면 안 된다, 필.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 그 좋았던 옛 시절의 사랑은 이제 너무 낡은 것이 되어버렸나니.’”
필리파가 놀리듯 목소리를 떨며 읊조렸다.
“저기 마차가 왔네, 그럼 난 간다. 안녕, 구식 아가씨들.”
필리파가 나가자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심각한 얼굴로 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애는 예쁘고 사랑스럽고 정도 많고 성격도 좋은데, 저렇게 말할 때 보면 정신 상태가 온전한 것 같지 않다. 네 생각엔 어떠니, 앤?”
“글쎄요, 전 필이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저 말투가 그런 거죠.”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앤. 필을 아껴서 하는 말인데 난 여전히 필을 잘 모르겠다. 필은 나를 놀라게 해. 내가 아는 다른여자아이들과는 달라. 나도 처녀 시절에는 아주 여러 모습을 지녔었지만 저렇지는 않았어.”
“얼마나 여러 모습을 지녔었는데요?”

“예닐곱 명 정도.”




20
길버트의 고백





필리파가 나른한 듯 소파에 누워 기지개를 켜며 하품까지 했다. 계속해서 서로 으르렁대는 고양이 두 마리는 쫓아내 버렸다.
“요즘은 정말이지 무료하고 재미없어.”
앤은 《픽윅 클럽의 기록》에서 눈을 뗐다. 중간고사도 끝났고 이제는 느긋하게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겐 정말 지루한 날이었지?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멋진 날이었을지도 몰라. 어떤 사람들은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을 거고. 오늘 어딘가에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도 있을 거야. 위대한 시 한 편이 탄생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을지도 모르지. 이별에 마음 아파한 사람도 있었겠고.”
앤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넌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해서 너의 멋진 생각을 망치는 거니? 난 가슴 아픈 이야기는 싫어. 유쾌하지 않은 건 싫다고.”
필리파가 투덜거렸다.

“그럼 넌 인생이 슬픈 일은 다 피해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필?”
“아이참, 그런 건 아니지. 내겐 슬픈 일도 없는 것 같니? 알렉과 알론조도 나를 유쾌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 사람들 때문에 난 골머리가 아파.”
“넌 무슨 일이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해? 나 아니라도 세상엔 심각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나 같은 사람들도 필요하다고. 세상을 달래줄 사람. 모든 사람들이 심각하고 지성적이기만 하다면 살기가 얼마나 끔찍하겠니? 조시아 앨런31)이 말했듯이 ‘매력적인 사람도, 유혹적인 사람도’ 있어야지. 고백해봐. 이번 겨울 여기‘패티네 집’에서의 겨울이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기분 좋고 즐겁지 않았니? 내가 여기 함께 살고 있으니까.”
“그래, 맞아.”
앤은 인정했다.
“그리고 이 집 사람들도 모두 날 좋아하잖아? 나를 완전히 미친 애로 보는 제임시나 아주머니마저도 말이야. 그럼 왜 내가 다르게 행동해야 해? 아, 졸려. 어젯밤에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읽느라고 1시까지 깨어 있었어.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지. 책을 다 읽고서 램프를 껐냐고? 스텔라가 마침 운 좋게도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 방 램프는 아침까지 훤히 밝혀져 있었을 거야. 스텔라 소리가 나기에 내가 얼른 방으로 좀 오라고 해서 내 난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불 좀 꺼달라고 부탁했지. 난 침대에서 나갈 수 없었어. 그랬다간 분명히 뭔가가 침대 속에서 내 발목을 붙들었을 거야. 그런데 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이번 여름에 어떻게 하시겠대?”

“그냥 여기 계시겠대. 그게 다 저 축복받은 고양이들 때문이지만. 아주머니 댁으로 돌아가는 일도 너무 번거롭고, 어디 다른 곳에가기도 마땅치 않으신가 봐.”
“지금 뭘 읽는 거니?”
“《픽윅 클럽의 기록》.”
“그 책은 항상 나를 배고프게 했어. 맛있게 먹는 장면이 많거든. 주인공들은 항상 햄과 달걀, 밀크 펀치에 죽고 못 사는 것 같아. 그럼 나도 책을 보면서 주방 찬장을 뒤져야 해. 내 배가 고픈 것 같거든. 식품 저장실에 뭐 먹을 게 있나요, 앤 여왕님?”
“내가 오늘 아침에 레몬파이 만들어둔 게 있어. 가서 먹어.”
필리파는 식품 저장실로 달려갔고 앤은 러스티와 함께 과수원으로 나갔다.
이른 봄의 기분 좋은 향이 은은하게 퍼진 촉촉한 저녁이었다. 공원에는 아직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았고, 항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서 있는 소나무 밑 여기저기에도 4월의 태양을 잘도 피한 눈이 쌓여 있었다. 길은 여전히 질퍽질퍽했고 초저녁이 되면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푸른 잔디가 자랐고 길버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은은한 색깔의 예쁜 산사나무 꽃을 찾아냈다. 공원을 나온 길버트의 손에는 산사나무 꽃이 한가득 쥐어져 있었다.
앤은 옅은 붉은색 석양을 배경으로 앙상한 자작나무 가지가써놓은 멋진 시를 바라보며 과수원의 커다란 회색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앤은 공상에 잠겨 공중누각을 짓는 중이었다. 햇볕이 드리워진 장엄한 홀과 안마당이 있는 멋진 대저택이 아라비아의 향기 속에 우뚝 솟아 있었고 자기는 그곳의 여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 과수원에서 걸어오는 길버트의 모습이 보이자 앤은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앤은 길버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길버트도 앤이 혼자 공상을 즐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러스티조차 앤을 피해주었다.
길버트는 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한 손가득 쥔 산사나무 꽃을 내밀었다.
“이 꽃을 보면 옛날 학교에서 소풍 갔을 때가 생각나지 않니?”
앤은 그 꽃을 건네받아 그 속에 얼굴을 묻었다.
“나 방금까지 사일러스 슬론 씨네 황야에 있었어.”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목소리로 앤이 말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진짜 갈 수 있잖아.”
“아니, 2주 후에나 집에 갈 거야. 필과 함께 볼링브로크에 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해. 넌 나보다 먼저 에이번리에 가 있겠구나.”
“아니, 올여름엔 에이번리에 안 가. <데일리 뉴스>에 자리에 있다고 해서 일을 할까 해.”
“아.”
앤이 작은 소리를 냈다. 길버트가 없는 에이번리는 어떨까 앤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잘됐구나.”
앤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그곳에서 일했으면 하고 바랐거든. 내년 학비를 마련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너무 힘들게 일만 하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서도 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서 빨리 필리파가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넌 이번 겨울에도 끊임없이 공부만 했잖아. 오늘 너무 멋진 저녁 아니니? 오늘 여기 오다가 저기 늙고 구부러진 나무 밑에서 아름다운 흰색 제비꽃이 가득 핀 곳을 발견했어. 마치 금광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야.”
“넌 항상 금광을 발견하잖아.”
길버트의 목소리도 초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서 제비꽃이 더 있는지 찾아보자.”
앤은 길버트를 부추겼다.
“내가 가서 필을 불러…….”
“지금은 필이나 제비꽃 이야기는 하지 말자.”
길버트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앤의 손을 꽉 잡았다. 앤은 도망칠 수 없었다.
“나, 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니, 얘기하지 마. 제발.”
앤은 애원하듯 말했다.
“아니, 해야겠어.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앤, 너를 사랑해. 너도 알고 있겠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마음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 언젠가 내 아내가 되어주겠다고 말해줘.”
“아, 아내? 안 돼. 길버트, 넌 이제 모든 걸 망쳐버린 거야.”
앤이 비참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거니?”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길버트가 물었다. 앤은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식으론 아니야. 난 항상 너를 친구로서, 좋은 친구로 생각해왔어.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길버트.”
“언젠가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도 줄 수 없는 거니?”
“아니, 그럴 수 없어. 난 널 절대로 사랑할 수 없어. 그런 건 아니야, 길버트. 나한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앤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의 시간이 너무 길고 끔찍해서 앤은 고개를 들었다. 길버트의 얼굴은 입술까지 창백했다. 그리고 길버트의 눈, 앤은 몸을 떨면서 길버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얼굴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혼이 이토록 끔찍하고 기괴한 것이었던가. 앤은 이 순간 길버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니?”

한참 만에 길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난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난 이 세상누구보다널 좋아해, 길버트. 그러니까 우린 영원히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해.”
길버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친구! 난 우정만으론 만족할 수 없어, 앤. 난 너의 사랑을 원해. 그런데 넌 지금 그걸 영원히 줄 수 없다고 말하잖아.”
“정말 미안해, 용서해줘, 길버트.”
이것이 앤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동안 상상 속에서 청혼을 거절하려고 생각해보았던 모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말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길버트는 앤의 손을 스스로 놓았다.
“네가 용서를 바랄 일을 한 건 없어. 난 그저 너도 나를 생각해줄거라고 믿어왔던 거야. 내가나 자신을 속인 거지. 그것뿐이야. 그럼 잘 가, 앤.”
앤은 방으로 들어와 소나무가 드리워진 창가에 앉아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어떤 것이 자기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물론 길버트와의 우정이었다. 왜 이런 식으로 그 소중한 우정을 잃어야만 하는 것인가?
“무슨 일 있는 거야?”
필리파가 달빛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필리파라도 수천 킬로미터 밖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앤은 바랐다.
“너, 길버트 블라이드의 청혼을 거절한 거지, 맞지? 넌 정말 바보야, 앤 셜리!”
“넌 지금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거절한 나를 바보라고 부르는 거니?”
앤이 차가운 말투로 되물었다.
“넌 직접 네 눈으로 보면서도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구나. 너는 사랑도 상상해내고 현실의 사랑도 그공상 속의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고 믿는 거야. 이런, 내가 평생 처음으로 지각 있는 말을 하고 있군.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줄 알지?”
“필, 제발 좀 나가줘. 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 내 세계가 산산조각이 났어. 난 그걸 다시 짜 맞춰야 해.”
“길버트가 없는 세계로?”
필리파는 방을 나갔다.
길버트가 없는 세계! 앤은 이 말을 우울하게 되풀이했다. 외롭고 비참한 세계가 되지는 않을까! 이 모든 것은 길버트의 잘못이야. 그동안 아름다웠던 우정을 깨뜨린 건 바로 길버트였다. 이제 앤은 길버트와의 우정이 없는 세계를 살아나가야 했다.



31. 미국 작가 마리에타 홀리(Marietta Holley, 1836~1926)가 쓴 소설의 주인공 사만다를 말한다. 홀리는 여성의 권리, 인종차별 등의 소재로 유머와 방언을 많이 섞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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