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2

나단비 | 2024.03.30 14:08:47 댓글: 2 조회: 150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554
첫해



1

(서머사이드 중등학교 교장 앤 셜리가 킹스포트 레드먼드 대학교 의과 대학생 길버트 블라이드에게 보내는 편지)


프린스에드워드 섬, 서머사이드, 도깨비 길, 윈디 포플러
9월 12일, 월요일

내 사랑 길버트에게,

이 얼마나 멋진 주소야! 이렇게 멋진 이름들 들어봤어? ‘윈디 포플러’는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집 이름인데, 난 이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리고 ‘도깨비 길’이라는 이름도 근사하지 않아? 물론 이 이름이 정식 명칭은 아니야. 원래 이 거리 이름은 트랜드 가야. 하지만 여기를 트랜트 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주간 신문에서 언급하는 경우처럼 아주 드문 경우를 빼고는. 신문에서 그 이름을 본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트랜트 가가 도대체 어디야?” 하고 묻는다고. 그러면 누군가가 “‘도깨비 길’을 말하는 거야.” 하고 대답해줘. 하지만 왜들 그렇게 부르는지는 말해줄 수 없어. 내가 이미 레베카 듀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냥 여긴 언제나 ‘도깨비 길’이었대. 아주 오래전에 이 길이 귀신에 씌었었다나. 하지만 레베카는 이 골목에서 자기 얼굴보다 더 흉측한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대.
내가 이렇게 얘기를 앞서가면 안 되지. 넌 아직 레베카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곧 레베카 듀를 알게 될 거야. 오, 그럼. 앞으로 우리가 주고받을 편지에 레베카 듀가 얼마나 자주 등장할 텐데.
“지금은 어스름이 내린 시간이야, 길버트.(그나저나, 어스름이란 말은 너무 분위기 있지 않아? 난 어스름이란 말이황혼 녘이란 말보다 더 좋아. 너무 부드럽고 뭔가 아련하고, 그리고…… 그리고…… 어스름하잖아.)나는 낮 동안에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야. 그리고 밤이면 잠과 영원이 지배하는 세상의 일부가 되지. 하지만 어스름에는 낮에도 밤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내가 돼. 오로지 너와 나, 우리 두 사람에게만 속하는 내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너한테 편지를 쓸 때는 꼭 이 시간에만 쓸 테야. 하지만 지금 이 편지는 연애편지가 될 수 없어. 난 지금 질 나쁜 펜촉으로 글을 쓰고 있거든. 펜촉이 너무 날카롭든지 너무 뭉뚝하든지 하면 글씨가 엉망이 되는 펜으로 연애편지를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제대로 된 펜을 구했을 때나 나한테 달콤한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 사이에 내가 새로 살게 된 집 이야기를 해줄게. 거기 사는 사람들 얘기도. 길버트, 여긴 집도 사람들도 너무나 다정해.
난 어제 여기 와서 하숙집을 구했어. 린드 아주머니가 나와 같이 다녀주셨는데 겉으로야 뭔가 살 것이 있다고 하셨지만 진짜 이유는 내게 하숙집을 구해주고 싶어서였다는 걸 난 잘 알아. 아무리 내가 대학을 다녔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린드 아주머니 눈에는 내가 아직도 미숙한 애송이로 보이는 거야. 여전히 지도와 안내와 감시가 필요한 사람인 거라고.
우리는 여기 기차로 왔어. 오, 그런데 길버트. 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너도 알지, 나한테는 내가 특별히 찾지 않아도 항상 모험이 따른다는 걸. 난 모험을 끌어들이는 사람인가 봐, 정말이야.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일이 벌어졌어.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린드 아주머니의 가방을 집으려고 몸을 구부렸거든.(아주머니는 서머사이드에 사는 친구 집에서 일요일을 보낼 계획이셨어.)난 온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반질반질한 의자 손잡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꽉 붙들었어. 바로 그 순간에 누가 내 손을 거칠게 철썩 때리지 않겠어. 난 꽥 소리를 지를 뻔했지. 오, 길버트, 내가 뭘 의자 팔걸이로 착각했는지 알아? 그것은 어떤 신사분의 대머리였어. 그 사람이 나를 무섭게 노려봤는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게 분명했어. 난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를 하고 얼른 기차에서 내려버렸어.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눈길을 던졌을 때도 그 사람은 무섭게 날 노려보고 있었어. 린드 아주머니도 몹시 놀랐고 내 손은 아직도 얼얼해!
난 하숙집 찾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톰 프링글 부인이라나 뭐라나 하는 사람이 15년 동안이나 내가 갈 학교 교장 선생님을 하숙시키고 있다고 들었거든. 하지만 그 부인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갑자기하숙 치는일이 귀찮아졌다면서 나를 받아주지 않겠대. 몇 군데 괜찮은 집을 돌아다녀 봤는데 다들 정중하게 거절하더라고. 물론 내가 살고 싶지 않는 곳도 더러 있었지. 우리는 오후 내내 시내 전체를 다 돌아다녔어. 너무 덥고 지쳐서 세상이 다 파래지고 머리도 아파왔어. 린드 아주머니는 몰라도 나는 그랬어. 절망감에 빠져서 거의 포기 직전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도깨비 길’이 나타난 거야!
우리는 린드 아주머니의 옛 친구인브래덕부인을 만나러 갔어.브래덕부인은 그 미망인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싶다고 했어.
“그 사람들은 레베카 듀의 임금을 지불하려면 하숙생을 들여야 한다고 했어요. 따로 돈이 더 들어오지 않는 한은 레베카를 더 이상 집에 둘 수 없대요. 그리고 레베카가 가버리면 누가 그 늙은 붉은 소의 젖을 짜겠어요?”
브래덕부인은 내가 그 붉은 소의 젖을 짜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 강한 시선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지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나선대도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되지.
“어떤 미망인들을 말하는 거야?”
린드 아주머니가 물었어.

“왜 그 있잖아, 케이트 아주머니와 채티 아주머니.”
브래덕부인은 학사가 되었든 아니면 그 무엇이 되었든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나 되는 듯이 그렇게 말했어.
“케이트는 애머사 맥콤버 부인(선장의 미망인)이고 채티는 링컨 맥클린이라고 그냥 평범한 사람의 미망인이야. 다들 그 두 사람을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르지. 그 사람들은 ‘도깨비 길’ 끄트머리에 살아.”
“‘도깨비 길’!”
그 말에 난 그만 내 마음을 딱 정해버렸어. 난 그 미망인들 집에서 하숙해야만 해.
“당장 가서 그분들을 만나 봐요.”
난 린드 아주머니에게 재촉했어.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도깨비 길’이 요정 나라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거든.
“그 사람들을 만나보긴 해야겠지만 하숙을 하게 해주고 안 해주고는 레베카가 결정하게 될 거예요. ‘윈디 포플러’를 휘어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레베카 듀거든. 내가 장담해요.”
“‘윈디 포플러’! 농담이겠죠?”
설마 집 이름이 그런 이름일 리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하지만 분명 린드 아주머니도 무슨 집이 그런 이름이냐고 하셨어.
“오, 맥콤버 선장이 그렇게 불렀지. 그 사람이 살던 집이거든. 집을 빙 둘러서 미루나무를 심고는 아주 자랑스러워했다고 해요. 하지만 맥콤버 선장이 집에 머무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집에 와도 오래 머물지도 않았대요. 케이트 아주머니는 그래서 아주 불편했다고 말하고는 했는데, 그 말이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는 말인지 아니면 아예 집에 오지 말아야 했다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미스 셜리가 그 집에 하숙할 수 있기를 빌지요. 레베카 듀는 요리도 아주 잘해요. 특히 차가운 감자 요리는 천재적이죠. 만일 미스 셜리가 레베카 마음에 든다면 아무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어요.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글쎄, 그럴 리는 없겠죠, 그럼요. 여기 새로 온 은행가 한 사람도 하숙집을 구한다고 하던데 레베카가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몰라요. 프링글 부인이 미스 셜리에게 방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도 좀 심상치 않아요. 서머사이드는 프링글 집안사람이나 프링글 집안과 맺어진 사람들 세상이에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프링글 네를 ‘왕족’이라고 부르죠. 미스 셜리도 그 사람들과 잘 사귀어둬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서머사이드 학교에서 배겨내지 못해요. 여기는 모든 일이 그 집안 손아귀에서 놀아나요. 그 사람들 마음대로 주무른다고요. 그 에이브러햄 프링글 선장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니까요. 여긴 아주 프링글 세상이지만 그중에서도 ‘단풍나무 저택’의 두 노부인이 가장 상전이에요. 소문에 따르면 그 두 사람이 미스 셜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더군요.”
“어째서요? 그분들은 저를 본 적도 없는걸요.”
내가 소리쳤지.
“음, 그게 어떻게 된 얘기냐 하면, 그 사람들 팔촌 되는 이가 그 학교 교장 자리에 지원했거든요. 당연히 모두들 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스 셜리가 채용되었으니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일어서 머리를 맞대고 한 입으로 아우성을 친 거죠. 글쎄, 그 사람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저 그렇게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고요. 말은 크림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미스 셜리를 매번 골탕 먹일 테니 두고 봐요. 여기 오자마자 이렇게 미스 셜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미리 경고해두면 조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예요. 미스 셜리가 잘 처신해서 그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줘요. 미망인들이 미스 셜리를 받아준다면 레베카 듀와 함께 식사해도 상관없겠죠? 레베카는 하인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은 선장의 먼 친척이에요. 하지만 손님이 오면 레베카는 식탁에 같이 앉지 않아요. 자기의 분수를 알아야 할 때는 안다는 거지요. 하지만 미스 셜리가 그 집에서 하숙하게 되면 물론 레베카는 미스 셜리를 손님으로 여기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얼른 레베카 듀와 식사하는 건 전혀문제 될게 없다고브래덕부인을 안심시키고 린드 아주머니를 잡아끌고 나왔어. 당장 떠나야 은행가보다 앞질러 갈 수 있을 테니까.
브래덕부인은 문가까지 따라 나왔어.
“채티 아주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알았어요? 아주 예민한 사람이거든. 가엾게도 마음이 너무 여려요. 케이트 아주머니만큼 돈도 없고. 케이트 아주머니도 그리 큰돈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케이트 아주머니는 남편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자기 남편 말이에요. 하지만 채티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자기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뭐. 링컨 맥클린이 좀 괴팍했거든요. 채티 아주머니는 자기 남편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좋게 보지 않을 거라는 자격지심 같은 걸 갖고 있어요. 오늘이 토요일이라 잘됐어요. 금요일이었다면 채티 아주머니는 하숙 같은 건 생각도 하려 들지 않았을 거예요. 미신이라면 케이트 아주머니가 믿을 것 같죠? 보통은 뱃사람들이 미신을 믿으니까요. 그렇지만 케이트 아주머니가 아니라 채티 아주머니가 그래요. 그 사람 남편은 목수였는데도. 그 사람도 젊었을 때는 아주 예뻤어요. 그런 사람이 가엾기도 하지.”
나는브래덕부인에게 채티 아주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부인은 걱정되는지 집 앞길까지 따라 나왔어.
“케이트 아주머니와 채티 아주머니는 미스 셜리가 집에 없다고 물건을 뒤지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아주 양심적인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레베카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레베카는 험담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미스 셜리라면 현관문으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 집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는 현관문을 쓰지 않거든. 그 문은 애머사의 장례식 이후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요. 곁문으로 들어가요. 열쇠는 창틀 화분 밑에 있어요. 만일 아무도 없으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기다리세요. 그리고 또 절대로 그 집 고양이를 칭찬해서는 안 돼요. 레베카 듀가 고양이를 아주 싫어하거든요.”
나는 고양이를 칭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겨우브래덕아주머니 집을 나올 수 있었어. ‘도깨비 길’은 금방 찾았지. 아주 짧은 골목길이었어. 길 끝으로는 탁 트인시골 풍경이 펼쳐졌고 더 멀리로는 푸른 언덕이 아름다운 배경을 이루고 있었어. 길 한쪽은 집이라고는 한 채도 없이 항구까지 언덕이 져 내려갔고, 다른 쪽에는 집이 세 채가 있었어. 첫 번째 집은 별로 설명할 게 없는 그저 평범한 집이었고, 그다음 집은 음산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커다란 저택이었어. 돌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집인데,지붕 창이 사마귀처럼 붙어 있고 이중경사로 된 맨사드 지붕1)편평한 꼭대기에는 철책이 둘러쳐졌어. 집을 빙 둘러서 가문비나무며 전나무가 가득 우거져 정작 집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지. 아마 집 안도 어둑하고 몹시 음침할 거야. 마지막 세 번째 집이 바로 ‘윈디 포플러’ 집이야. 이 집은 길모퉁이에 자리를 잡아서 집 앞으로는 바로 잔디가 깔린 길이고 모퉁이를 돌면 나무가 아름답게 그늘을 드리운 진짜 시골길이야.
난이 집을 보자마자 금방 이 집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처음 보자마자 마음이 가는 그런 집이 있잖아. ‘윈디 포플러’가 바로 그런 집이었어. 설명하자면 하얀, 아주 새하얀 목조 건물이고, 녹색 덧문이 달려 있어. 아주 선명한 녹색이야. 한쪽에는 ‘탑’이 있고지붕 창이 양쪽으로 나 있어. 집 둘레로 낮은 돌담이 둘러 있고 미루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빙 둘러서 있지. 집 뒤쪽으로는 넓은 뜰이 있는데 꽃나무와 여러 가지 식물들이 보기 좋게 뒤섞여 있어. 하지만 내가 이 집의 매력을 다 말해준 건 아냐. 이 집에는 간단히 말해서 이 집만의 즐거운 개성이 있고 어딘지 ‘초록 지붕 집’ 분위기도 나.
“이 집이야말로 저를 위한 곳이에요. 여긴 제 운명이 라구요.”
린드 아주머니는 운명 같은 것은 별로 믿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기쁨에 넘쳐 말했어.
“학교까지 가려면 꽤 많이 걸어야겠다.”
아주머니는 감동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했어.
“전 괜찮아요. 운동도 되고 좋죠, 뭐. 어머나, 저기 저 아름다운 자작나무와 단풍나무 숲을 좀 보세요!”
린드 아주머니는 바라보기는 했지만 간단히 말씀하셨어.
“모기에 시달리는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 모기는 질색이니까. 양심의 가책보다 모기 한 마리가 더 밤잠을 설치게 하는 법이거든.
현관문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오히려 무척 다행스러웠어. 정말로 무시무시해 보였거든. 나뭇결무늬가 있는 양쪽으로 여닫는 문인데 무척 육중해 보였고 꽃무늬 유리가 끼워져 있었어. 그 문은 이 집에 조금도 어울려 보이지 않았어. 잔디 사이로 드문드문 박힌 얇고 납작한 사암석이 깔린 예쁜 보도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그 작은 녹색 곁문이 훨씬 더 친근감 있고 다가가고 싶었다고. 보도 양옆으로는 깔끔하게 잘 정리된 리본 그래스가 깔렸고 금낭화, 참나리, 수염패랭이꽃, 국화과 쑥류, 신부의 부케꽃, 붉은색과 하얀색 데이지 꽃, 그리고 린드 아주머니가 ‘자기약’이라고 부르는 작약도 있었어. 물론 이런 꽃들이 모두 이 계절에 꽃을 피우고 있진 않았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모두 아름답게 피어날 게 분명해. 또 한쪽 구석에는 장미 정원도 있었어. ‘윈디 포플러’와 음산한 느낌을 주는 옆집 사이에는 벽돌 담장이 있는데 그 담장은 담쟁이덩굴이 온통 휘감고 있어. 담장 중간에는 색 바랜 녹색 문이 나 있지만 문 위 격자 아치 위로 담쟁이덩굴이 칭칭 휘감겨 있는 걸 보면 오랫동안 그 문이 열린 적은 없나 봐.

‘윈디 포플러’ 정원 문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길옆에무리 지어있는 클로버가 보였어. 나도 모르게 몸을 숙이고 그것을 들여다봤는데, 세상에나, 길버트! 거기에 바로 내 눈앞에네 잎클로버가 세 개나 있었어. 이거야말로 내 앞길에 행운을 예고하는 일이 아니겠어! 프링글 사람들이라도 이 말에 반대하고 나설 순 없을걸. 그리고 그 은행가도 이런 흔치 않은 행운을 잡지는 못했을 거야.
그 곁문은 열려 있었어. 누군가 분명 집에 있다는 얘기고, 우리가 화분 밑을 뒤질 필요는 없다는 거지. 문을 노크했더니 레베카 듀가 나왔어. 난 그 사람이 레베카 듀라는 걸 당장 알아보았다고. 레베카 듀가 아닌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어, 절대로. 역시나 그 사람은 다른 이름을 갖지 않았더군.
나이는 마흔 살쯤 돼 보였고 얼굴은 꼭 토마토 같았어. 토마토 앞이마로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것 같았다고. 작고 검은 눈은 반짝반짝했고, 작은 코는 끝이 뭉툭하고, 입은 옆으로 쭈욱 찢어진 것 같았어. 그 모습이 꼭 레베카 듀였다니까! 생김생김이 다 작아. 팔도 다리도, 목도 코도, 모든 것이 다 작았지만 미소만큼은 크더군. 미소가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까지 걸쳐진 것 같았어.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는 레베카 듀의 미소를 보지 못했어. 내가 맥콤버 부인을 만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거든.
“맥콤버 선장 부인을 말하는 건가요?”
맥콤버 부인이라면 이 집에 적어도 한 다스는 된다는 듯 불퉁거리며 반문하더라고.
“네.”
나는 아주 순한 양처럼 대답했지. 그다음에는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어. 작은 방에 놓인 가구마다 장식이 달린 덮개를 덮어놓아 좀 산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조용하고 정다운 분위기라 아주 마음에 들었어. 방에 놓인 가구들이 모두 아주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워 보였고, 또 가구들이 얼마나 다 빛이 나던지! 어떤 가구 닦는 약으로도 그렇게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윤을 낼 수는 없었을 거야. 나는 그게 다 레베카 듀가 팔꿈치로 문질러댄 덕이라고 생각해. 린드 아주머니는 벽난로 위에 놓인 병 안에 든 돛을 한껏 펼친 배에 아주 큰 관심을 보이셨어. 그 배가 어떻게 병 안에 들어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노릇이래.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 장식품이 방 안에 바다 분위기를 낸다고 생각하신대.
미망인들이 들어왔어. 난 그분들을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지. 케이트 아주머니는 키가 크고 마른 몸에 머리는 하얀 분인데 좀 엄해 보였어, 꼭 마릴라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었지. 채티 아주머니는 키가 작고 마른 몸에 역시 머리는 하얀데 좀 사색적인 분이라는 느낌이었어. 젊었을 때는 아주 예뻤을 것 같지만 지금은 그 아름다움이 눈에만 남아 있었어. 부드러운 갈색 눈이 아주 크고 예쁜 분이거든.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말씀드리니까 두 미망인이 서로를 바라보았어.
“우리는 레베카 듀와 상의해야 해요.”
채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지.
“그럼요.”
케이트 아주머니도 그렇다고 하셨어.
“그래서 부엌에서 레베카 듀가 불려 나왔지. 고양이도 레베카 뒤를 졸졸 따라왔어. 아주 크고 털이 복슬복슬한 몰타 고양이였어. 가슴이랑 목도 하얀색이었는데 난 금방 그 고양이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브래덕부인의 경고가 생각나서 그만두었지.
레베카가 나를 아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어.
“레베카, 미스 셜리가 우리 집에서 하숙하고 싶다네요. 우리가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 말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케이트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지.
“왜 안 된다는 거죠?”
레베카 듀가 물었어.
“그렇게 되면 레베카가 힘들 것 같아서 그렇지.”
채티 아주머니가 말했어.
“힘든 일이라면 예전에 이미 적응이된 걸요.”
레베카 듀는 말했어. 난 도저히 그 이름과 성을 따로따로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아, 길버트. 그건 불가능해. 그런데 두 미망인들은 그냥 레베카라고만 불러.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로선 이해가 안 되지만.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기엔 우리가 너무 늙었어.”
채티 아주머니는 고집을 부리셨어.
“제 생각은 달라요. 나도 이제 마흔다섯밖에 안 되었고, 아직 젊다고요. 이 집에 젊은 사람이 살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은 법이죠. 남자는 밤이고 낮이고 담배나 피워대잖아요. 우리를 홀라당 다 태워버릴지도 모른다고요. 하숙생을 들이려거든, 난 미스 셜리를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물론이 집은 두 분 집이죠.”
레베카 듀는 그렇게 말을 되받아쳤지. 그렇게 말하고 레베카는 사라져버렸어. 호메로스라도 그 말을 들었다면 기뻐하지 않았을까. 난 이제 이 문제는 다 결정된 거라고 생각했지만 채티 아주머니는 내가 2층으로 올라가 방을 먼저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하셨어.
“우리는 저 탑 방을 내놓을 거예요. 손님방만큼 넓지는 않지만 겨울철이면 난로를 들여놓을 수 있는 난로 파이프 구멍도 뚫려 있고, 경치도 훨씬 더 좋아요. 거기서는 저 묘지도 보이지요.”
난 그 방이 마음에 들 거라는 걸 알았어. 바로 그 이름, ‘탑 방’이란 이름도 전율이 일게 하거든. 우리가 옛날 에이번리 학교에 다닐 때 부르고는 했던 노래에 나오는 집에 사는 느낌이 들 것 같아. 회색빛 바다 곁에 서 있는 높다란 탑에 사는 처녀 노래. 역시 그 방은 정말로 다정한 곳이었어. 우리는 구석 계단을 타고 그 방으로올라가 봤어. 방은 좀 작은 편이었지만 레드먼드 대학에 다닐 때 첫해에 살았던 그 우중충한 문간방보다 작지는 않았어. 방에는 창문이 2개가 있어.지붕 창은 서쪽을 향해 있고,박공 창은 북쪽을 보고 있지. 그리고 탑으로 생긴 구석에도 밖으로 열게 되어 있는 창문이 있었어. 그 밑으로는 내 책을 둘 수 있는 책장이 있고, 마루에는 술이 달린 동그란 깔개가 깔렸어. 커다란 침대에는 침대 지붕이 달렸고 침대에는 기러기 털로 만든 이불이 깔렸는데 너무나 부드러워 보이고 이 침대에서 잠을 자 침대를 흩트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어. 그리고 길버트, 그 침대는 너무 높아서 올라가려면 정말 우습게 생긴 이동식 발판 계단을 딛고 올라가야 해. 낮에는 그 발판을 침대 밑에다 넣어두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물건은 맥콤버 선장이 외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구석에는 예쁜 장식장도 놓였어. 선반은 조가비무늬 종이가 발라져 있고 문에는 꽃다발이 그려져 있는 거야. 창문 곁 의자에는 동그란파란색쿠션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가 꾹 눌린 채 단추가 달려 있어서 꼭 통통한파란색도넛 같아 보였어. 그리고 예쁜 세면대도 있는데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위 칸은 파란 울새 알 색깔인 세숫대야와 주전자를 놓기에 딱 알맞은 크기이고, 아래 선반은비눗갑이랑 뜨거운 물 주전자를 두도록 되어 있지. 수건이 가득 담긴 작은 놋쇠 손잡이가 달린 수납장도 있는데 그 위에는 예쁜 흰색 도자기 인형이 놓여 있었어. 분홍색 신발을 신고 황금색 장식 띠를 두르고 금발 머리에는 붉은 장미꽃을 꽂은 아름다운 숙녀 인형이야.
방 안 전체가 옥수수 색깔 커튼을 통해 들어온 빛에 의해서 금빛으로 빛났어. 회칠이 된 벽에는 정말 보기 드문 태피스트리도 걸렸더라. 밖에 서 있는 포플러나무가 그늘을 드리워서 무늬를 만드는 살아 있는 태피스트리라고나 할까. 항상 무늬가 변하고 흔들리기까지 하니까. 어쨌건 아주 행복한 방인 것 같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여기라면 안심할 수 있겠어, 그럼.”
방을 나오면서 린드 아주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패티네 집’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살아서 좀 구속당한 듯 갑갑할 것 같은걸요.”
내가 아주머니를 놀리는 소리를 했어.
“자유! 자유! 양키 같은 말은 하지 말아라, 앤.”
린드 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치셨어.
난 오늘 여기로 내 가방과 짐을 모두 옮겨왔어. 물론 ‘초록 지붕 집’을 떠나기 싫었지. 내가 얼마나 집을 자주 또 오래 떠나있든지간에 방학이 되면 다시 돌아갈 거야. 집을 한 번도 떠나본적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위로해도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무너져.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방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리고 이 집도 나를 좋아할 거고. 난 항상 집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
내 방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아주 아름다워. 저 오래된 묘지까지도. 거뭇한 전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저 묘지까지는 구불구불한 돌담길이 이어져 있어. 내 방 서쪽 창문으로는 멀리 항구가 보여. 아주 정겨운 풍경이야. 작은 요트와 미지의 항구를 향해 떠나는 배들이 떠 있는 안개 낀 해변도 보이고. 안개 낀 해변이라! 얼마나 환상적인 말이야! 바로 그 ‘상상의 여지’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북쪽 창문에서 보면 길 건너로 자작나무와 단풍나무 숲이 보여. 너도 알다시피 난 언제나 나무 예찬론자잖아. 레드먼드 대학에 다닐 때도 그랬어. 영문학 시간에 테니슨을 공부하면서도 훼손당한 소나무 숲에 한탄하는 가여운 이노니2)요정과 같이 슬퍼하고는 했으니까.
숲과 묘지 너머로는 붉은 리본 같은 구불구불한 길이 반짝거리며 골짜기 길을 지나가는데, 하얀 집들이 그 길을 점점이 수놓았어. 골짜기들도 너무 정겨워 보여.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딱히 알 수 없지만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그리고 그 너머로는 다시 내가 좋아하는 푸른 언덕이야. 난 그곳을 ‘폭풍 왕’이라고 이름 지었어. 아주 강렬한 열정 같은 게 느껴지거든.
혼자 있고 싶으면 여기로 올라오면 돼. 왜 가끔씩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잖아. 바람이 내 친구가 되어줄 거야. 바람이 내 탑 주변에서 포효하고 한숨짓고 신음할 거야. 겨울의 하얀 바람, 봄의 초록 바람, 여름의 파란 바람, 가을의 붉은 바람, 그리고 모든 계절의 거친 바람, ‘주의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3)난 언제나 이 성경 구절에 전율이 느껴져. 마치 모든 바람이 주께서 내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나 한 것처럼. 난 항상 조지 맥도널드 이야기에 나오는 그 북풍을 타고 달아났던 소년4)을 부러워했지. 어떤 밤에는 길버트, 난 내 탑 방의 창문을 열고 바람의품 안으로 들어가. 레베카 듀는 왜 그날 밤 내 침대가 비어 있었는지 절대 알지 못할 거야.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의 꿈의 집을 갖겠지, 길버트? 우리 꿈의 집에도 바람은 불 거야. 그 미지의 우리 집이 어디에 있을지 정말로 궁금해. 내가 그 집을, 달빛을 받을 때 가장 좋아할까? 아니면새벽 녘에 가장 좋아하게 될까? 우리가 사랑과 우정을 나누면서 일을 하고,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도 웃으며되돌아볼수 있는 재밌는 모험들을 하게 될 우리 미래의 집. 노인이라! 우리도 늙을까, 길버트?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
탑의 왼쪽 창문에서 보면 이 마을의 지붕들이 다 보여. 난 이곳에서 적어도 일 년은 살게 될 거야. 그리고 저 집들에 사는 사람들은 내 친구가 되겠지. 그렇지만 난 아직 그 사람들을 모르니까 적이 될지도 모르지. 이름이야 다르겠지만 파이네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프링글 사람들도 그런 종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이 개학이야. 난 기하학을 가르쳐야 해. 기하학을 가르치는 일도 배우는 일만큼이나 힘들겠지. 프링글 집안 아이들 중에 제발 수학 천재는 없기만 바랄 뿐이야.
이제 여기 온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지만 난 그 두 미망인과 레베카 듀를 평생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두 미망인은 자기를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르래. 그래서 나도 날 그냥 앤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처음엔 내가 레베카 듀를 미스 듀라고 불렀어.
“미스 뭐라고요?”
그렇게 다시 묻더라.
“듀라고요, 그게 이름이잖아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지.
“네, 그렇죠. 하지만 난 미스 듀라는 호칭은 들어본 지가 오래돼서 좀 어색하군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미스 셜리. 난 그 이름에 익숙지가 않아요.”
“알겠어요, 레베카…… 듀.”
난 듀라는 말을 빼버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써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어.
브래덕부인이 채티 아주머니가 예민한 분이라고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어. 난 그런 사실을 저녁 먹으면서 벌써 알아챘지. 케이트 아주머니가 채티의 예순여섯 번째 생일이란 말을 꺼냈어. 그 순간 어쩌다 내 눈길이 언뜻 채티 아주머니에게로 갔는데 채티 아주머니가 울더라고. 아니, 와락 울음을 터트린 건 아니고. 그건 너무도 격해서 채티 아주머니와는 어울리지 않았어. 아주머니의 갈색 눈에 그저 눈물이 고여서는 넘쳐흘렀어. 그냥 줄줄, 조용하게.
“왜 그래, 채티?”

케이트 아주머니가 좀 언짢다는 듯 물었어.
“그게, 그게 난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고.”
채티 아주머니는 말했어.
“그래?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어, 채티.”
케이트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한 순간에 모두들 기분을 풀고 다시 활짝 개었지.
그 고양이는 황금빛 눈을 가진 귀여운 커다란 수고양이로, 털 색깔이 꼭 먼지 낀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품 있는 몰타 고양이야. 케이트 아주머니와 채티 아주머니는 이 고양이를 꼭 먼지투성이 방앗간처럼 보인다고 해서 ‘더스티 밀러’라고 불러. 그것이 이 고양이의 이름이야. 하지만 레베카 듀는 그냥 고양이라고만 부르지. 레베카가 이 고양이를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야.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2.5센티미터 두께의 간을 먹여야 하고 고양이가 응접실로 슬그머니 들어올 때마다 낡은 칫솔로 팔걸이의자에 묻은고양이 털을 떼어내야 하는 데다 밤늦게까지 밖에 나가 있으면 가서 찾아와야 하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대.
“레베카 듀는 원래부터 고양이를 싫어해요. 더스티는 유별나게 더 싫어하죠. 2년 전에 캠벨 노부인네 개가, 그즈음 캠벨 부인은 개를 기르고 있었거든요. 더스티를 입에 물고 이리로 데려왔어요. 아마 캠벨 부인에게 데려가 봐야 돌봐주지 않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가여운 새끼 고양이는 흠뻑 젖어 추위에 떨고 있었어요. 어찌나 말랐던지 뼈가 살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니까요. 마음이 돌덩이 같은 사람이라도 그 고양이를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케이트와 난 그 고양이를 우리 집에 두기로 했는데 그 일로 레베카 듀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우리도 좀 고지식했던 때라, 적당히 둘러댈지를 몰랐죠. 우리도 그 고양이를 기르고 싶은 건 아니라고 말했으면 됐을걸. 미스 셜리도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채티 아주머니는 식당과 부엌을 가로막은 문 쪽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내게 말했어.
“그게 바로 우리가 레베카 듀를 다루는 묘책이에요.”
사실은 나도 이미 알아차렸어. 그것은 보기도 아름다운 일이었지. 서머사이드 사람들과 레베커 듀는 레베카가 이 집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미망인들의 생각은 달랐던 거지.
“우리도 은행가에게 방을 빌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젊은 남자는 집에 착실하게 붙어살지도 못할 테고, 교회도 제대로 안 나갈 텐데 그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은행가에게 방을 빌려주고 싶은 척했어요. 당연히 레베카 듀는 우리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우리는 앤이 와줘서 정말 기뻐요. 앤은 요리를 해주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에요. 앤도 우리를 좋아해주기를 바랄게요. 그렇지만 레베카 듀에게도 몇 가지 아주 좋은 점은 있어요. 레베카 듀가 15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지금처럼 깔끔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응접실 거울에 먼지가 얼마나 앉았는지 보여주려고 케이트가 거울 가운데다 레베카 듀라고 글자를 써놨다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필요 없었어요. 레베카 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거든요. 방이 마음에 들었으면 해요, 앤. 밤새도록 창문을 열어두어도 괜찮아요. 케이트는 밤바람이 몸에 좋지 않다고 믿지만 하숙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대로 방식이 있죠. 케이트와 나는 방을 함께 쓰는데, 하룻밤은 케이트를 위해 창문을 닫고 또 하룻밤은 나를 위해 창문을 열고 지내요. 그런 사소한 문제야 금방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뜻이 있는 곳엔 항상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밤중에 레베카 듀가 집 안을 돌아다녀도 놀라지 말아요. 레베카는 조그만 소리라도 나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일어나 돌아다니거든요. 그 때문에 레베카 듀가 은행가를 두기 싫어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잠옷 바람으로 은행가와 부딪치면 민망하니까요. 그리고 케이트가 말이 없다고 마음 쓰지도 말아요. 케이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젊은 시절 애머사 맥콤버 선장과 함께 온 세계를 돌아다녀 이야깃거리를 잔뜩 갖고 있을 텐데도 그래요. 나도 케이트처럼 이야깃거리가 많았으면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이따금 세상은 어째서 이리도 불공평할까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도 하죠. 말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야깃거리가 없고, 말하기를 싫어하는 케이트는 모든 걸 알고 있잖아요. 그 까닭이야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채티 아주머니는 말이 좀 많은 편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 적은 이야기를 모두 줄줄이 한꺼번에 늘어놓은 건 아니야.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중간 중간에 끼워 넣었지. 뭐 대단한 말들은 아니니까.
이 집 아주머니들이 소를 한 마리 기르고 있는데, 길 위쪽의 제임스 해밀턴 씨네 목장에서 방목하고 있어. 레베카 듀는 거기까지 젖을 짜러 다니지. 우유는 얼마든지 있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레베카 듀가 담에 나 있는 작은 문으로 캠벨 부인 집의 ‘그 여자’에게 우유를 가져다줘. 엘리자베스에게 먹이려는 것인데, 의사가 엘리자베스에게 우유를 먹여야 한다고 했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또 엘리자베스가 누구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 캠벨 부인은 이웃 성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자 그 집 주인이고 그 저택 이름은 ‘늘 푸른 집’이야.
오늘 밤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이 방에서 처음으로 자는 거니까. 잠자리가 바뀌면 언제나 그렇잖아. 게다가 난 이렇게 묘한 침대는 본 적 없어. 하지만 나는 밤을 좋아하니까 괜찮아. 누워서 인생의 온갖 일들을 다 생각해보겠어. 과거, 현재, 미래, 특히 미래를 꿈꿔보고 싶어.
이건 정말 무자비한 편지가 되어버렸네, 길버트. 두 번 다시 이렇게 긴 편지로 널 괴롭히지 않을게. 하지만 난 내 새로운 생활을 모두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내 새 보금자리를 네 눈앞에 그려볼 수 있도록. 이제 다 했어. 멀리 항구 쪽에서 달이 ‘그림자 나라로 가라앉고’ 있어. 마릴라 아주머니한테도 편지를 써야 해. 모레쯤에는 편지가 ‘초록 지붕 집’에 도착하겠지. 데이비가 우체국에서 편지를 집으로 가져오면 마릴라 아주머니가 봉투를 열 거야. 데이비와 도라가 옆에 앉아 기다릴 테지. 린드아주머니도 귀를 쫑긋 세우고 계실 거고. 오, 오, 그런 생각을 했더니 향수병에 걸려버렸어.
잘 자, 사랑하는 길버트.

영원한 너의 앤,
앤 셜리
1장
1. 이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붕.
2. 테니슨의 시(1830년 작품).
3. 시편 148편 8절: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4.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 1824~1905) 스코틀랜드 출생 영국 동화 작가 겸 시인. 공상 이야기인 《북풍의 등에 업혀(At the Back of the North Wind)》로 유명하다.






2
(앤이 길버트에게 보낸 여러 편지 중에서 발췌)




9월 26일

내가 네 편지를 어디 가서 읽는지 알아? 저 길 건너편에 있는 숲이야. 그 숲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해가 고사리 덤불 위로 얼룩덜룩 그림자를 만들고, 개울물이 꼬불꼬불 흘러가는 곳이지. 그 골짜기엔 비틀린 채 누워 있는 나무가 하나 있어. 나무 기둥 위로는 폭신폭신 이끼까지 덮여서 난 그 나무 중간에 걸터앉아. 바로 눈앞에는 무척이나 보기 좋은 자작나무가 나란히 서 있어. 내가 이곳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지금까지 꾸었던 어떤 꿈보다도 더 멋진 꿈을 꾸어. 황금빛이 섞인 녹색에 선홍색 줄기가 퍼진 꿈이지. 이런 환상적인 꿈들은 이 비밀스러운 자작나무 골짜기에서 나온 거야. 그렇게 날씬하고 기품 있을 수가 없는 자작나무 자매와 가만가만 속삭이는 개울물이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곳에서 태어난 꿈이라고. 이곳에 앉아 숲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고요가 있다는 걸 알아, 길버트? 숲의 고요, 해변의 고요, 목장의 고요, 밤의 고요, 여름날 오후의 고요. 이 모든 고요는 저마다 다 다른 특색을 갖고 있어. 이런 고요함을 자아내는 건 근본이 다 다르기 때문이지.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거나, 더위와 추위에 무감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난 나를 감싸고 있는 고요함을 통해서 내가 어디 있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고.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 지도 이제 2주가 되었고, 꽤 잘해나가고 있어. 하지만브래덕부인 말이 맞았어. 프링글 집안사람들은 보통 두통거리가 아니야. 행운의네 잎클로버를 찾긴 했지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브래덕부인 말대로 그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두 크림처럼 부드럽고, 빠져나가기는 또 얼마나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지.
프링글 집안은 서로 간에 용의주도하게 연결망을 갖추고 있어서 자기네끼리 싸우기도 잘하지만 외부인에 대항해서는 어깨를 맞대고 힘을 합치지. 서머사이드에는 프링글 사람과 프링글이 아닌 사람이라는 두 종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맡은 학생들은 거의가 프링글이야. 프링글이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아이들도 알고 보면 프링글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 많지. 그들 중 우두머리는 젠 프링글이야. 베키 샤프5)가 열네 살이었다면 꼭 그런 눈이었을 거야. 초록빛 눈을 가진 개구쟁이거든. 난 젠이 아이들을 부추겨 일부러 내 말을 듣지 않게 했고,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일을 꾸민다고 생각해. 그러니 내가 아이들 다루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 아이는 정말이지 재밌는 표정을 짓는 재주도 있어. 내 뒤에서 교실 전체로 퍼져가는 웃음소리가 들리면 그게 누구 때문인지 난 당장 알지만 여태까지 그 현장을 잡지는 못했어. 그 애도 역시 머리가 있단 말이야. 못된 장난꾸러기 같으니라고! 그 애는 작문을 하라고 하면 대문호의 사촌이나 되는 것처럼 멋진 글을 써내고, 수학도 어찌나 잘하는지, 어이구! 그 아이가 하는 말은 말마다 총기가 넘치고 그 아이가 하는 행동엔 유머가 넘쳐나. 나를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사이에는 통하는 것이 있었을 텐데. 사실은 난 두려워. 젠과 내가 서로 마주 보며 웃을 날이 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까 봐.
젠의 사촌인 미라 프링글은 전교에서 가장 예쁜 아이지만 분명 머리는 가장 나쁜 아이야.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 예를 들면 오늘 역사 시간에는 이런 말을 했어. 인디언들이 샹플랭6)과 그 부하들을 하느님이나 아니면 ‘어떤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겼대. ‘인간 이상의 존재’로 여겼다는 말을 하려고 했겠지.
레베카 듀의 말에 따르면 프링글 사람들은 서머사이드 사회의 상류층이래. 나는 이미 두 프링글 집에서저녁 초대를 받았어. 새로 온 선생님을 초대하는 일은 예법에 적절한 일이고, 프링글은 그런 필요한 제스처를 생략하면 안 되니까. 어젯밤에는 제임스 프링글 씨 집에 초대를 받았어. 아까 말한 젠의 아버지야. 그 사람은 꼭대학교수님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멍청하고 무지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규우율’이어쩌고저쩌고하는얘기를 늘어놓았어. 규율이라는 단어에 몹시 힘을 주어 손톱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면서. 손톱도 별로 단정하지 못했고, 문법도 엉망이었어. 서머사이드 중등학교는 항상 단호한 사람이 필요하니 경험이 아주 많은 남자 선생이 왔어야 했대. 그런데 난 너무 젊다는 거지.
“그 결점이야 시간이 곧 해결해주겠지만.”
그 사람은 아주 슬픈 일이라는 듯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말을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난 프링글 사람들 수법대로 그 사람을 아주 천진난만하게 바라보면서 아주 살살 녹는,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았지. 속으로는 ‘고집불통에 선입견으로 가득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외치면서.
젠은 분명 엄마 머리를 물려받았을 거야. 그 애 엄마는 나무랄 데 없는 분으로 보였어. 젠은 자기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까 아주 예의범절의 표본처럼 행동하더라. 하지만 그 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중했지만 그 말투는 여전히 무례했어. 그 애가 미스 셜리라고 할 때마다 아주 모욕적으로 들리게 말하려고 애쓰는 게 역력했다니까. 그리고 매번 내 머리를 보는 눈빛도 그야말로 홍당무를 바라보고 있다는 눈빛이었어. 프링글 사람들은 아무도 내 머리가 적갈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젠보다는 차라리 모톤 프링글이 나아. 모톤 프링글은 다른 사람 말이라면 한 마디도귀담아듣지않는 아이지만. 그 애는 다른 사람한테 말을 걸어서 대꾸를 하면, 말을 끝낼 때까지 절대로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다른 말을 시작해버린단다.
스티븐 프링글 부인이 어제 내게 편지를 보내왔어. 그분은 미망인 프링글이야. 서머사이드에는 미망인으로 가득해. 아주 상냥하고 정중했지만 심술궂은 편지였지. 밀리한테 내가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준다나. 밀리는 아주 연약한 아이라서 과로하면 안 된다는 거야. 벨 선생은 숙제를 전혀 내주지 않았대. 나도 벨 선생처럼 밀리가 아주 연약하고 예민한 아이라는 걸 알아야만 한대. 스티븐 부인은 나도 노력만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대. 부인은 오늘 애덤 프링글 코피를 낸 것도 틀림없이 나라고 생각할 거야. 코피 때문에 애덤은 오늘 공부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거든. 어젯밤에는 자다 깨서 갑자기 내가 칠판에 문제를 적을 때 ‘i’자에 점을 찍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 다시 잠들 수가 없었어. 분명 젠 프링글이 알아차렸을 거라고. 이제 온 프링글 집안에 그 얘기가 쫙 퍼져서 모두들 그 일로 숙덕거릴 거야.
레베카 듀는‘단풍나무 저택’에 사는 노부인들만 빼놓고 온 프링글 집안이 다 나를 한 번 초대하고 그 뒤로는 영원히 나를 무시할 거라고 했어. 그들은 상류층이니까, 그 말은 곧 내가 서머사이드 사회에서 추방된다는 뜻이겠지. 글쎄, 두고 보자고.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아직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난 그런 문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 선입견에는 어떤 이유도 없는 거잖아. 내가 아직도 유아기를 겪고 있는 것 같아. 난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어. 내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내 학생들 절반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야. 난 ‘불공정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거라고 지금. 강조체가 하나 더 나왔네. 하지만 강조를하다 보면감정을해소하는 데좋으니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프링글 아이들만 빼놓고는 모두들 착해. 몇 명은 아주 영리하고 야망도 갖고 있어. 공부에 진정으로 흥미를 느끼면서 성실하게 공부하지. 루이스앨런은 하숙비 낼 형편이 아니어서 하숙비 대신으로 하숙집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그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그리고 소피 싱클레어는 매일 아버지의 늙은 회색 말을 타고 거의 10킬로미터를 달려 학교를 오간단다. 길버트, 내가 좀 더 힘을 내야겠지? 그런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는데 프링글 일로 그리 신경을 써서야 되겠어,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만일 내가 프링글 아이들을 이기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큼줄어든다는 거야.
하지만 난 ‘윈디 포플러’ 집을 사랑해. 여기는 그냥 하숙집이 아니야. 내 집 같아. 그리고 여기 사람들도 모두 나를 좋아해.더스티 밀러도 나를 좋아하지만 이 고양이는 가끔 나를 거부하기도 해. 아주 고의적으로 내게 등을 돌리고 앉거든. 고개를 어깨에 숨기고는 그 노란 눈으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흘끔거리기까지 하면서. 레베카 듀의 신경을 거슬리고 싶진 않으니까 레베카가 가까이 있으면 난 고양이를 쓰다듬어주지 않아. 이 고양이는 날이 갈수록 더 겸손해지고 편안해 보이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일도 많지만 밤이면 이상한 동물로 변해. 밤이면 고양이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해서 그렇대. 레베카는 어두운 뒤뜰에 나가 고양이를 불러대는 게 싫어서 고양이를 못 나가게 한대. 이웃들이 자기를 흉볼 거라고. 하긴, 그 고요한 밤에 온 마을에서 다 들릴 정도로 아주 목청껏 무섭게 불러대니. “괭이, 괭이, 괭이야!” 하고 말이야. 두 미망인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더스티 밀러가 보이지 않으면 히스테리를 일으키거든.
“그 고양이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사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레베카가 내게 하소연을 했어.
두 미망인과는 잘 지내고 있어. 난 그분들이 점점 더 좋아져. 케이트 아주머니는소설책읽는 걸 탐탁스럽지 않게 여기시지만 내가 읽는 책을 검열하지는 않겠다고 하셨지만 채티 아주머니는 소설책을 아주 좋아하셔. 아주머니에게는 비밀 장소가 있어. 시내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이나 혼자 할 수 있는 트럼프나 그 외에 케이트 아주머니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숨겨두는 곳이지. 그 비밀 장소는 의자야. 그저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채티 아주머니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의자. 아주머니는 그 비밀을 내게만 살짝 알려주셨어. 그런 것들을 몰래 들여오는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봐. 하지만 ‘윈디 포플러’에는 딱히 비밀장소가 필요하지도 않아. 무언가를 숨겨둘 곳이 정말로 많거든. 난 비밀스러운 찬장이 이렇게 많은 집은 처음 봤어. 그것도 레베카 듀가 그것들을 비밀스럽게 그대로 내버려들 때 얘기야. 레베카는 항상 모든 찬장을 인정사정없이 청소해버리거든. “집이저 스스로청소를 하진 않잖아요.”
아주머니 중에 한 분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한 마디라도 할라치면 표정을 구기면서 언제나 그렇게 말해. 레베카가 소설책이나 트럼프를 발견한다면 간단히 다 처리해버릴 게 분명해. 그 둘 모두는 그리스 정교도의 영혼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거든. 레베카 듀는 카드란 악마의 물건이고 소설은 그보다도 더 나쁜 것이라고 말하니까. 레베카가 성경을 빼놓고 지금까지 읽은 것은 ‘몬트리올 가디언’ 지의 사교란 뿐이야. 레베카 듀는 백만장자의 집, 가구, 그 사람들의 일상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그걸 아주 열심히 읽어.
“황금 욕조에비누 거품을 내고들어앉아있으면 정말 좋겠지요, 미스 셜리?”
레베카가 생각에 잠겨 그렇게 말한 적도 있어.
하지만 레베카는 진짜로 다정한 사람이야. 어디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안락의자를 꺼내 와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
“이건 미스 셜리의 의자예요. 셜리 선생님 것으로 정해두겠어요.”
등받이 좌우에 날개가 달리고 색은 바랬지만 브로케이드7)천을 씌운 의자였어.더스티 밀러는 그 의자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해. 혹시라도 내가고양이 털이 붙은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서 프링글 아이들한테 책잡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세 사람 다 내 진주 반지에 아주 관심이 많아. 그 반지의 의미에 관해서도. 케이트 아주머니는 터키석이 박힌 자기의 약혼반지를 보여주었어(너무 작아져서 그 반지를 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가여운 채티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기는 약혼반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 남편은 그런 약혼반지는 불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했대. 그때 아주머니는 얼굴에 버터밀크를 바르려고 내 방에 올라와 계셨어. 피부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매일 밤 하시는 일이야. 그리고 케이트 아주머니가 알면 안 되니까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어.
“케이트는 내 나이에 그런 일은 어리석은 허영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레베카 듀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여자는 예뻐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거고. 그래서 난 케이트가 잠자리에 들면 살며시 부엌으로 나가 버터밀크를 발랐어요. 하지만 레베카 듀가 내려오지 않을까 아주 조바심이 나요. 레베카는 잠을 잘 때도 귀가 어찌나 밝은지, 고양이 귀를 가졌나 봐. 그런데 매일 밤 여기로 와서 이걸 바를 수 있게 해줘 고맙지 뭐예요, 앤.”
우리 옆집인 ‘늘 푸른 집’에 관해서도 좀 알게 되었어. 캠벨 부인(이분 역시 프링글 사람이야!)은 나이가 여든이나 되었대. 그분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매우 근엄한 얼굴을 한 노부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집에는 마르타 몽크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가 있어. 그 노부인만큼이나 옛날 사람 같고 근엄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지. 사람들은 이 하녀를 ‘캠벨 부인의 여자’라고 부른대. 그리고 이 집에는 엘리자베스 그레이슨이라고 하는 노부인의 증손녀도 함께 살고 있어. 난 여기서 지낸 지가 2주일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엘리자베스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나이는 여덟 살이고 그 집 뒤뜰에서 이어진 지름길인 뒷길로 해서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내가 그 아이 오가는 걸 못 봤나 봐. 캠벨 부인의 손녀가 되는 그 애 엄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래. 그 손녀 역시도 부모가 모두 일찍 죽어서 노부인이 길렀대. 그 손녀는 피어스 그레이슨이라는 미국 사람하고 결혼했대. 린드 아주머니가 계셨으면 양키라고 했겠지. 안타깝게도 그 손녀는 엘리자베스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고 피어스 그레이슨은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파리 지점을 맡으려고 미국을 떠나야 했대. 그래서 아기는 캠벨 부인에게 맡겨졌지. 들리는 얘기로 그레이슨 씨는 엘리자베스를 아내 목숨을 대신해 태어난 아기라고 미워한대. 그래서 아기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다시는 아기를 찾지도 않았대. 하지만 그 말은 단지 소문일 뿐이야. 캠벨 부인도 그 캠벨 부인 댁에 하녀도 그에 대한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니까.
레베카 듀 말로는 모두들 그 어린 엘리자베스한테 너무 엄하게만 대해서 아이가 기를 펴고 살지 못한대.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아주 달라요. 여덟 살 아이치고는 너무 조숙하죠. 그 아이가 가끔씩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참! 그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어요. ‘아줌마, 침대로 막 들어갔는데 뭔가가 발목을 콱 깨무는 것처럼 느껴본 적 있어요?’ 아이가 깜깜한데 침대로 가기 무서운 것이 당연하지. 그리고 그건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야. 캠벨 부인은 자기 집에 겁쟁이는 필요 없다고 말하죠. 두 늙은이는 꼭 고양이 두 마리가 쥐 한 마리를 감시하듯 엘리자베스를 감시해요.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한다고요. 아이가 조금이라도 소리를 낼라치면 두 사람은 기절이라도 할 듯 난리를 치면서 항상 쉬! 쉬!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요. 그 아이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 쉬! 쉬! 소리를 들어야 할 거예요.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정말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난 그 아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아주 가여운 아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케이트 아주머니는 아이가 신체적인 면에서는 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했어. 그 사람들이 아이를 잘 먹여주고 입혀주기는 한다는 거지. 하지만 아이들이란 게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잖아. 난 내가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를 절대로 잊을 수 없어.
다음 주 금요일이면 난 집에 가. 에이번리에서 달콤한 이틀 밤을 보내게 될 거야. 단지 걱정되는 일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서머사이드에서 가르치는 일이 어떠냐고 물을 텐데 그럼 어떻게 대답하지?

하지만 지금은 ‘초록 지붕 집’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 길버트. ‘반짝이는 호수’는 푸른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겠지. 개울 너머 단풍나무 숲은 이제 막 선홍빛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을 거야. ‘유령의 숲’에 있는 고사리들도 황금빛이 섞인 갈색이 되었을 거고, ‘연인의 오솔길’에도 어스름한 그림자가 내려 너무나 매혹적인 곳으로 변했을 거야. 지금 바로 내가 거기에 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맞춰 봐, 내가 누구랑 거기 있고 싶은지?
길버트,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사랑해!


서머사이드, 도깨비 길, 윈디 포플러
10월 10일

존중하고 존경하옵는 귀하,

채티 아주머니 할머니의 연애편지는 이렇게 시작해. 멋지지 않아? 그 할아버지는 그런 극존칭을 듣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길버트, 그대도 그런 존칭을 원하나이까? 그나저나 네가 그 할아버지가 아니라서, 아니 어떤 할아버지라도 할아버지가 아니라서 너무 다행이야. 우리가 아직 젊고, 우리 앞날이 창창하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야. 우리가 함께할 앞날이 말이야, 그렇지?

(몇 페이지 생략. 앤의 펜은 날카롭거나 뭉뚝하지도 엉망이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지금 호박색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나무와 그 너머 항구를 바라보며 내 탑 방 창가 의자에 앉아 있어. 지난밤에는 혼자서 산책을 나갔는데 너무 기분이 좋더라. 사실 어젯밤에는 어디든 나가야 했어.
‘윈디 포플러’에 사소한 문제가 좀 생겼었거든. 채티 아주머니는 속이 상하다고 거실에서 우시고 케이트 아주머니는 침실에서 우시고 계셨어. 애머사 선장의 기일이라서 그랬대. 레베카 듀는 내가 보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엌에서 울었어. 레베카 듀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어. 하지만 내가 왜 우는지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자 레베카는 울고 싶을 때 우는 일을 좀 즐기면 안 되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레베카가 눈물에 폭 빠져 있도록 내버려두고 난 텐트를 챙겨서 얼른 집을 빠져나왔지, 뭐.
집을 나서 항구 길을 따라 내려갔어. 공기는 너무나 서늘하고 달콤한 10월의 향기로 가득했고 이제 막 갈아놓은 밭에서는 기분 좋은 향내가 났지. 나는 석양이가을밤달빛으로 깊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어. 난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어. 상상의 친구들을 만나 상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거든. 나 스스로도 놀라고 대견할 정도로 많은 풍자시를 생각해냈어. 프링글 사람들 때문에 괴로운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내 즐거움을 망치지는 못했지.
프링글 사람들을 야유하는 몇 마디를 목청껏 내뱉기는 했어.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지만 난 서머사이드 중등학교에서 잘해나가고 있지 못하거든. 어떻게든 나를 골탕 먹이려는 비밀 결사대 같은 단체가 조직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 한 예로 프링글 아이들이나 프링글 피가 섞인 아이들은 절대로 숙제를 해오지 않아. 그렇다고 부모들에게 호소해 봐도 아무런 소용도 없어. 그 사람들은 모두 싹싹하고 정중하게 잘도 빠져나가거든. 프링글이 아닌 아이들은 모두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프링글들이 퍼트리는 불복종 바이러스는 전체 학생들 분위기를 망쳐놔.
어느 날 아침에는 내 책상이 뒤집어져 있더라고. 물론 모두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지. 그리고 어제 내 서랍에서 나온 장난감 뱀도 누가 넣은 건지 모른다고 했고, 아니, 알면서도 말을 안 하는 거겠지. 하지만 모든 프링글 아이들이 내 놀란 얼굴을 보면서 재밌어 죽겠다고 웃으며 난리들을 쳤어. 내가 좀 많이 놀라 표정이 우습기도 했겠지만.
젠 프링글은 이틀에 한 번은 지각해. 항상 물샐틈없는 변명을, 아주 정중한 언어를 골라 늘어놓는데, 잊지 않고 입을 샐쭉 비틀어. 아주 무례한 태도지. 그리고 바로 내 코앞에서 쪽지를 돌리기도 해. 오늘은 내가 외투를 입는데 호주머니에서 껍질을 벗긴 양파가 나오더라니까. 난 그 애를 그 나쁜 버르장머리를 고칠 때까지 빵과 물만 주고 가두어두었으면 속이 시원하겠어.
지금까지 최악이었던 일은 뭔 줄 알아? 어느 날 아침 칠판에 그려져 있던 내 모습이야. 아주 익살스럽게 하얀 분필로 ‘빨간 머리’를 그려놨더라고. 모두들 발뺌을 했지. 난 우리 반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젠밖에 없다는 걸 알아. 그 그림은 꽤 훌륭했어. 내 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유일하게 자랑이요, 기쁨으로 여기는 내 코는 곱사등처럼 튀어나오게 그려놓고, 내 입은 30년 동안이나 프링글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한 노처녀처럼 심술 사납게 그렸어. 하지만 그건 분명 나였다고. 난 그날 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그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쳐야 했지. 우리가 한밤중에 일어나 몸부림쳐야 하는 일이 사악한 일 때문이 아니라 모욕감 때문이란 게 이상하지 않아? 나에 대한 온갖 소문이 다 떠돌고 있어. 프링글 집안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해티 프링글의 시험 점수를 깎았다는 비난도 들었지. 아이들이 실수를 할 때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린다는 소문도 났단다. 프레드 프링글이 옛날 로마군에서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던 백인(百人)대장을 백 년 동안 산 대장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 웃지 않을 수 없었는걸.
제임스 프링글은 “학교에 규우율이 없다. 전혀 규우율이 없다.” 하고 떠들고 다녀. 그리고 내가 버려진 아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고.
한마디로 난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프링글의 적대행위에 직면하고 있어. 교육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사교 분야에서도. 서머사이드는 모든 일이 프링글 집안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고. 이러니 그들이 왕족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지난주 금요일에 앨리스 프링글이 산책 파티를 열었는데 나는 초대받지 못했어. 프랭크 프링글 부인이 교회의 사업을 원조하려고 차 모임을 가졌을 때도(레베카 듀의 말로는 부인들이 새 뾰족탑을 세우려는 거래!)장로교인 가운데 참석해 달라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어. 서머사이드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 부인이 나를 성가대에 들어오게 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프링글들이 그렇게만 하면 자기들 모두 성가대에서 빠져버릴 거라고 위협했대. 그렇게 되면 알맹이가 모두 빠져 성가대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거라면서.
물론 학생 일로 어려움을 겪는 선생이 나 혼자만은 아니지. 선생들이 규율을 잡아 달라면서 자기 학생들을 내게올려 보내는데, 난 그 규율이라는 말이 너무나 싫어! 그 절반은 프링글 집안 아이들이거든. 그렇다고 다른 선생한테 불평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틀 전에는 공부가 끝난 뒤 젠을 남으라고 해서 젠이 일부러 해오지 않은 숙제를 하라고 했어. 바로 10분 뒤에‘단풍나무 저택’의 마차가 학교 앞에 멈추더니 미스엘런이 문에 나타났어. 아름다운 옷에 우아한 검은색 레이스 장갑을 끼고 훌륭한 매부리코를 한, 마치 100년 전의 말쑥한 노부인 모습으로. 노부인은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당장 젠을 돌려보내줄 수 없느냐고 묻더라. 로우벨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젠을 데려가기로 약속했다는 거야. 젠은 의기양양하게 돌아갔고, 난 내 반대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스레 깨달아야 했지.
앞길이 막막하다고 느낄 때는 프링글 집안이 꼭 슬론 집안과 파이 집안을 합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하지만 그렇지는 않아. 그 사람들이 내 적만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그 사람들은 대체로 솔직하고 쾌활하며 의리 있는 사람들이야. 난 미스엘런조차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스 사라는 아직 만난 일이 없지만. 미스 사라는 10년 동안이나‘단풍나무 저택’문밖을 나온 일이 없대.
“몸이 너무 약해서래요.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 믿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그 거만한 태도만큼은 아프지도 않아요. 프링글 사람은 모두가 거만하지만 그 두 노처녀 할머니의 거만함은 아주 하늘을 찌른다고요. 두 늙은 노처녀가 자기 조상 이야기하는 걸 들어봐요. 뭐, 그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프링글 선장은 확실히 훌륭한 사람이었지. 동생 마이럼 쪽은 그리 자랑할 게 없는지, 그 사람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지만요.”
레베카 듀는 코웃음을 쳤고 나를 위로하는 말도 잊지 않았어.
“그들이 떼거리로 덤비니 미스 셜리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가 다 안타까워. 무슨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 집안에서 한번 마음먹은 일은 여간해서 바뀌지도 않는대요. 그래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힘내야 해요, 미스 셜리. 용기를 잃지 말라고요.”
“미스엘런의 파운드케이크 만드는 법을 알고 싶은데, 그 요리법을 알려주마고 몇 번이나 약속했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질 않아. 영국 가정에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비법이래. 자기네들끼리만 꽉 움켜쥐고는 좀처럼 남에게 가르쳐주질 않지.”
채티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
가끔씩 내 황당한 꿈속에서는 내가 미스엘런의 무릎을 꿇려 채티 아주머니에게 파운드케이크 만드는 비법을 밝히게 만들고, 젠에게는 언제나 P와 Q를 잘못 쓰는 버릇을 고치라고 명하고는 해. 그 집안이 일치단결해서 젠의 못된 행동을 부추기지만 않는다면, 내가 젠을 내 마음대로 해볼 수도 있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화가 나.
(두 페이지 생략.)

당신의 충실한 종,
앤 셜리

추신: 이 말은 채티 아주머니 할머니의 연애편지에 쓰인 거야.


10월 15일

어젯밤 이 마을 건너편에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도둑이 어느 집에 숨어들어 현금과 은 스푼 한 다스를 훔쳐갔대. 그래서 레베카 듀는 개를 빌릴 수있나알아보러 해밀턴 씨 댁에 갔어. 뒤 베란다에 매두어야겠대. 나한테도 약혼반지를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주었어.
그것은 그렇고, 레베카 듀가 왜 울었는지 이유를 알았어. 집안에 다툼이 좀 있었나 봐. 또더스티 밀러때문이었지. 레베카 듀가 케이트 아주머니에게 저 고양이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도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이 고양이가 일부러 그러는 걸 알고 있다고 불평을 했더니 케이트 아주머니는 고양이가 야옹야옹하면 밖으로 내놓아주어야 일을 치지 않는 거라고 반박했다는 거야.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아요.”
레베카 듀는 소리를 질렀고, 결국 눈물의 봇물이 터졌지!
프링글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더 험악하게 나와. 어제는 내 책에 굉장히 기분 나쁜 낙서가 되어 있었어. 호머 프링글은 학교가 끝나 집으로 갈 때 공중제비를 넘으며 복도를 지나가더라. 그뿐만이 아니야. 얼마 전에는 익명의 편지를 받았어. 은근히 나를 비난하는 온갖 말들이 가득한 편지였지. 어쨌거나 난 내 책에 되어 있는 낙서나 그 편지가 다 젠이 한 짓이라고 생각진 않아. 그 애가 물론 못된 장난꾸러기이기는 하지만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이 일로 레베카 듀가 어찌나 화를 많이 내던지 만일 프링글 사람 어느 하나라도 그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낼 것 같아서 몸서리가 다 쳐졌어. 로마의 폭군 네로의 잔학함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난 사실 레베카 듀를 나무랄 수도 없어. 나 역시도 프링글 사람이라면 아무나 다 잡아다가 보르히아8)가 빚은 독약이라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다른 선생들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 2학년을 맡은 선생은 캐서린 브룩 교감 선생이고, 1학년을 맡은 선생은 조지매케이선생이야. 조지 선생에 관해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 아주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선량한 스무 살 청년으로 산악지대 목장과 안개 낀 섬 출신임을 암시하는 듣기 좋은 하일랜드 억양으로 말을 하지. 할아버지가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 출신이래. 그 선생은 1학년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어. 나도 그 선생이 마음에 들지만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캐서린 브룩 선생은 좋아하기가 좀 힘든 사람이야.
캐서린은 나이가 스물여덟인데 서른다섯은 되어 보여. 그 선생은 교장으로 승진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고 들었어. 내가 교장이 되어 나한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지. 거기에 난 그 선생보다 나이도 어린데 말이야. 좀 규율만 따져서 그렇지, 좋은 선생이야. 하지만 그 선생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어. 그래도 그 선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그 선생은 친구도 없고 어떤 식으로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해. 템플 가에 있는 아주 초라하고 음산해 보이는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옷차림도 무척 촌스럽고 단정치가 못하고, 사교 모임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주 고약한 성격이야. 내뱉는 말마다 비꼬는 말이어서 학생들은 그 선생의 독설을 무척이나 두려워하지. 난 그 선생이 눈썹을추어올리고아이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면 아이들이 찍소리도 못 한단 말을 들었어. 나도 프링글 아이들에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난 그 선생처럼 아이들을 무섭게 다루고 싶진 않아. 난 내 학생들이 날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
학생들이 명백하게 규칙을 어긴 일이 없는데도 그 선생은 끊임없이 아이들을 내 방으로올려보내. 특히 프링글 아이들을. 난 그 선생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아. 내가 곤경에 빠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런다는 걸 아니 정말이지 심란한 일이지.
레베카 듀는 그 선생이랑 친구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래. 케이트 아주머니와 채티 아주머니가 일요일 저녁에 몇 번 그 선생을 초대했었대. 그 다정한 분들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들을 초대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 샐러드를 내놓으시거든. 하지만 그 선생은 한 번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이젠 포기를 했다고 하셔. 케이트 아주머니 말씀대로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소문에 따르면 그 선생은 아주 머리가 좋고 노래도 잘 부르고 암송도 아주 멋지게 한대. 하지만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그런 걸해보이는 법은 없대. 한번은 채티 아주머니가 교회 저녁 모임에서 그 선생에게 암송을 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대.
“우리는 그 선생이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릴 줄 알았지.”
케이트 아주머니는 말했어.

“아주 으르렁거렸죠.”
레베카 듀의 말이야.
캐서린의 목소리는 정말로 우렁차. 거의 남자 목소리 같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딱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려.
그 선생이 예쁜 외모를 갖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좀 괜찮아 보이게 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 선생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칙칙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엄청나게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항상 넓은 앞이마에서 뒤로 잡아당겨 아무렇게나 묶고 다녀. 그런데 눈은, 검은 눈썹 아래 그 맑고 밝은 호박색깔 눈은 도대체 그 머리와 어울리지가 않아. 귀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귀이고. 손은 그렇게 예쁜 손은 보지 못했을 정도야. 입 모양도 아주 예쁘게 생겼어. 하지만 옷을 그렇게 이상하게 입는다니까. 입지 말아야 할 색깔과 모양의 옷만 입으라고 조언해주는 천재라도 옆에 둔 모양이야. 녹색이나 회색을 입기에는 얼굴이 너무 누르스름한데도 아주 칙칙하고 어두운 초록색과 담갈색이 나는 회색 옷을 주로 입어. 그리고 그 줄무늬가 그렇지 않아도 큰 사람을 더 크고 말라 보이게 했고. 거기에 항상 입은 옷 그대로 자고 나온 사람 같다니까.
그 선생의 태도는 정말로 불쾌해. 레베카 듀 말대로 항상 화를 내고 있거든. 계단에서 그 선생을 마주칠 때마다 나한테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니까. 내가 가엾게 여긴다는 걸 알면 그 선생은 무섭게 성을 낼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난 그 선생을 어떻게든 도와주었으면 싶어. 그 선생이 도움을 원하기는커녕 나를 정말로 미워하기만 하는데도 내 마음이 그래. 지난번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우리 세 선생 모두가 교무실에 모여 있을 때 내가 무슨 학교의 불문율을 어기는 일을 했었던가 봐. 캐서린이 당장 내게 “셜리 선생님은 자신이 무슨 법 위에 존재하는 인물인 줄 아는 모양이죠?” 하지 않겠어. 또 다른 날에는 내가 학교를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뭔가를 바꾸어보자고 하니까 아주 조롱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라. “전 동화 같은 얘기는 믿지 않아요.” 언젠가는 내가 그 선생이 한 일을 칭찬하는 말을 했어. 그랬더니 그 선생 왈 “달콤한 잼 속에 숨겨놓은 알약은 뭐죠?”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냐. 정말 기분이 나빴던 일은 내가 교무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선생 책을 주워서 안쪽 빈 면에 적힌 서명을 보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
“선생님 이름은 K로 시작하는 캐서린이로군요. C로 시작하는 캐서린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좋아요. C로 시작하는 캐서린은 고상한 척하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그날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다음부터 내게올려 보내는 결재란에 자기 이름을 C로 시작해 서명해 올리는 거 있지!
난 집에 오는 길 내내 비웃어줬어.
이해하기 어렵고 불편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내게 캐서린 선생의 그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태도 뒤에는 진정한 우정에 목말라하는 감정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자각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난 그 선생과 친해져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말았을 거야.
이런 캐서린의 반감에 프링글 아이들의 태도까지, 레베카 듀의 위로와 너의 다정한 편지와 꼬마 엘리자베스가 없었다면 난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내가 꼬마 엘리자베스를 알게 되었거든. 이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워. 삼 일 전에는 내가 돌담 문께로 우유를 가져다주었는데 그 하녀 대신에 엘리자베스가 나와 있었어. 그 단단한 문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어서 얼굴이 담쟁이 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 그 아이는 작고 창백했지만 생기 있어 보였고 생각도 깊어 보였어. 가을 황혼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두 눈이 적갈색으로 반짝였지. 어깨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연한 금발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동그란 빗 핀을 꽂았고 연한 파란색 평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꼭 요정 나라의 공주님 같아 보였어. 정말 그 아이는 레베카 듀가 말한 대로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 같았다고. 충분한 영양분을 받지 못한 아이같이도 느껴졌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이야. 햇빛보다는 달빛 분위기가 나는 아이라고나 할까.
“네가 엘리자베스니?”
내가 물었어.
“오늘 밤은 아니에요. 오늘 밤에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날이라서 베티예요. 어젯밤에는 엘리자베스였고 내일 밤에는 아마베스가 될 것 같아요. 제 이름은 제 기분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그 아이가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어.
그 아이한테서 ‘영혼이 통하는 친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 내 가슴이 뛰었지.
“쉽게 바꿀 수 있는 이름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너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무척 좋겠구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어.
“저는 이름을 많이 지어낼 수 있어요. 엘시, 베티, 베스, 일라이저, 리스베스,베스. 하지만 리지는 아니에요. 저는 리지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어요.”
“누가 그렇겠어.”
내가 말했지.
“제가 바보 같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셜리 선생님? 할머니와 그 여자는 제가 이상한 아이고, 바보라던데.”
“바보 같기는, 조금도 바보 같지 않아. 아주 현명하고 신나는 일인걸.”

내가 말했어.
엘리자베스는 우유 컵 너머로 눈을 접시처럼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어. 난 아이가 마음속으로 은밀히 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가 쓸 만한 사람이라고 마음을 정했다는 것도 느꼈어. 왜냐하면 엘리자베스는 내게 부탁이 있다고 말했거든. 엘리자베스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그 고양이를 안아서 쓰다듬어주어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조그맣게 물었어.
내가 내 다리에 몸을 비비대고 있는더스티 밀러를 안아 올리자 엘리자베스는 조그만 손을 내밀어 기쁜 듯 더스티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저는 아기보다 아기고양이가 더 좋아요.”
엘리자베스는 묘하고도 도전적인 표정으로 내 쪽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어이없어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표정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도 좀 그랬지.
“네가 아기를 본 적이 없어서 아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서 그래. 너도 고양이를 기르니?”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물었어.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가로저었어.
“아뇨, 없어요! 할머니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거기다 ‘그 여자’는 고양이를 아주 싫어해요. 오늘 밤엔 그 여자가 집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우유를 가지러 온 거예요. 저는 우유를 받으러 여기 오는 게 아주 좋아요. 레베카 듀는 아주 기분 좋은 아줌마거든요.”
“오늘 밤 레베카 듀가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니?”

내가 웃으면서 묻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가로저었어.
“아니요, 선생님도 기분 좋은 분인걸요. 전부터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내일’이 오기 전에는 사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거기 서서 이야기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우아하게 우유를 마시면서 ‘내일’에 관해 모조리 말해주었어. 그 여자는 ‘내일’ 같은 것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지만 엘리자베스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내일은 언젠가 꼭 올 거야. 어느 아름다운 날 아침 눈을 떠보면 바로 내일이 와 있을지 모른다고. 오늘이 아닌 내일이. 그럼 무슨 일인가 일어날지도 몰라. 무언가 엄청나게 기쁜 일이. 엘리자베스는 아무에게도 감시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 해본 적이 없어. 내일이 와서, 엘리자베스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어.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멋진 빨간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저 항구길 끝에서 내일을 찾을지도 몰라. 아마 ‘행복의 섬’이 바로 거기 있을지도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한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배들이 모두 닻을 내리는 곳에서 행복의 섬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내일이 오면 그 섬을 찾아낼 수 있다고 했지.
“그리고 내일이 오면, 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 마흔다섯 마리를 기를 거예요. 할머니가 고양이를 기르지 못하게 했을 때도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셜리 선생님. 그러자 할머니는 화를 냈어요. ‘나는그따위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건방진 것 같으니라고.’ 저는 그날 저녁도 못 먹고 방에 갇혔어요. 하지만 전 건방진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셜리 선생님, 저는 잠이 오지 않았어요. 건방진 짓을 한 뒤에 자다가 죽어버린 아이가 있다고 그 여자가 말했거든요.”
엘리자베스가 우유를 다 마시자 가문비나무 뒤 어딘가에서 창문을 날카롭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 우리 두 사람이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나 봐. 내 요정 소녀는 금발을 휘날리며 어두컴컴한 가문비나무 길로 사라져갔지.

“공상이 많은 꼬마죠.”
내가 한 그날의 모험, 분명히 모험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어, 길버트. 그 모험 이야기를 듣고 레베카 듀가 그렇게 말했어.
“어느 날엔 내게 이렇게 묻더라고요. ‘사자가 무섭지 않아요, 레베카 듀 아줌마?’ 그래서 난 ‘사자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할 수 없구나.’ 하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내일엔 사자가 얼마든지 있어요. 아주 얌전하고 다정한 사자들이요.’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또 ‘얘야, 그렇게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간 네 온몸이 다 눈이 되어버리겠다.’ 하고 말했죠. 그 아이의 눈이 나를 꿰뚫어 아이가 말하는 그 내일에서 뭔가를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 아이는 다시 ‘나는요,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아줌마.’ 하더군요. 문제는 그 아이가 충분히 웃으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웃지 않았어. 웃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그 커다란 저택은 그저 고요하고 외롭기만 할 뿐 웃음이라고는 없어. 세상이 온통 가을빛에 휩싸인 이런 날에도 그 집은 음산하고 우울하기만 해. 엘리자베스는 잃어버린 속삭임을 들어보려고 너무 애를 쓰고 있어.
서머사이드에서 내가 할 일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웃음을 가르치는 일인 것 같아.

당신의 가장 다정하고 충실한 벗,
앤 셜리

추신: 또 채티 아주머니 할머니 흉내!
5. 영국 작가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의 사회 풍자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 나오는 인물.
6.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1635). 17세기 프랑스의 탐험가. 캐나다의 식민지 개척자로 캐나다 초대 총독이 되었다.
7. 다채로운 무늬를 부직(浮織)으로 짠, 무늬 있는 직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색실이나 금실, 은실을 씨실로 사용하여 꽃 따위의 무늬를 놓아 짜거나 수를 놓은, 화려한 견직물이 많다.
8. 보르히아(Cesare Borgia, 1475/76~1507):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선과 살인을 일삼았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전제군주로 독을 넣는 사나이란 별명을 얻기도했다.​

 
 



추천 (2)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203.♡.82) - 2024/03/30 20:06:47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직전이면 그사랑이 더욱더 애절해지나바요.길버트에게 이렇게
기나긴 편지를 쓰다니요.노래 九百九十九朵玫瑰가 생각나네요.

나단비 (♡.252.♡.103) - 2024/03/30 22:32:13

앤이 안 그래도 수다쟁이인데, 사랑하는 길버트에게 편지를 쓰니 더 더 길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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