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2 (둘째 해)

나단비 | 2024.03.31 14:04:37 댓글: 0 조회: 114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720
둘째 해


1



도깨비 길, 윈디 포플러
9월 14일

난 우리의 아름다웠던 두 달이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정말 아름다웠던 시간이었지? 이제 2년 남았어.
(몇 단락 생략)

하지만 ‘윈디 포플러’에 돌아오게 된 것도 무척 기뻐. 내 혼자만의 탑 방으로, 내 전용 의자와 높다란 침대로, 그리고 부엌 창틀에 앉아 햇볕을 즐기는더스티 밀러에게로.
미망인들은 나를 보고 반가워했고 레베카 듀도 “돌아와서 기뻐요!”하고 진심으로 반겨주었어. 물론 꼬마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작은 녹색 쪽문에서 다시 만난 기쁨을 마음껏 나누었어.
“저는 선생님이 저만 뒤에 남겨 두고 혼자 먼저 내일로 가버렸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이야.
“정말 아름다운 저녁이지?”

내가 말했어.
“셜리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저녁이 다 아름다운데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꼬마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물었어.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야!
“여름 동안 뭘 하며 지냈니?”
내가 물었지.
“생각이요. 내일 일어날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어요.”
엘리자베스는 가만히 속삭였어.
그런 다음 우리는 내 탑 방으로 올라와서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책을 읽었어. 엘리자베스는 요즘 코끼리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
“코끼리라는 이름에는 뭔가 매혹적인 게 들어 있어요. 내일에는 코끼리를 아주 많이 보게 될 거예요.”
아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손으로 턱을 바치고 앉아 진지하게 말했어.
우리 요정 나라 지도에다도 코끼리 공원을 집어넣었어. 날 그렇게 비웃듯 보지 마.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으니까. 길버트, 난 네가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표정을 지으리란 걸 알아. 그래도 소용없어. 이 세상엔 요정이 있다고. 요정이 없는 세상이란 있을 수 없어. 누군가는 이 세상에 요정을 넣어주어야 한다고.
학교로 돌아와서 기뻐. 캐서린 브룩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지만 내 학생들은 나를 만나 몹시 반가워들 해. 젠 프링글은 주일 학교 발표회에 써야 한다면서 천사 머리에 장식할 양철 후광 만드는 걸 도와달래.

올해 가르칠 내용이 작년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올해는 교육과정에 캐나다 역사도 들어갔거든. 내일은 ‘1812년 전쟁’26)에 관해 간단한 강의를 해야 해. 옛날 전투에 관한 글들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또다시 그런 전쟁이 일어나는 일이야 없겠지만. 학문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 외에는 오래전 전투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겠지? 캐나다에 그런 전쟁은 이제 없을 거야. 전쟁의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연극 클럽을 다시 조직할 생각이야. 학교와 관련 있는 집은 다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모금하려고 해. 루이스앨런과 나는 돌리시 길을 맡았어. 다음 주 토요일 오후부터 모금에 나설 거야. 루이스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생각이래. <시골집> 잡지에서 공모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농가 사진응모 대회에 도전을 해보겠다는 거지. 이 상금은 25달러이고 그 돈이면 꼭 필요한 새 양복과 코트를 마련할 수 있어서래. 루이스는 올여름 내내 농장에서 일했어. 하숙집에서도 집안일과 식사 준비를 거들었고. 물론 그런 일이 싫겠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아. 나는 그런 루이스가 아주 마음에 들어. 씩씩하고 야망이 있는 아이거든. 거기다 씩 웃는 모습은 아주 매력적이야. 그런데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아. 작년에는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어. 하지만 여름에 농장에서 일을 한 것이 몸을 좀 튼튼하게 해주었나 봐. 이 아이는 올해만 지나면 졸업이야. 그다음엔 퀸스 학교에 가서 일 년 더 공부하겠대. 이번 겨울에는 우리 하숙집 미망인 아주머니들이 일요일 날 저녁 식사에 루이스를 좀 더 자주 초대하겠다고 하셨어. 케이트 아주머니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루이스를 초대할지 상의를 해서 내가 돈을 좀 더 내놓는 것으로 아주머니를 설득했거든. 물론 난 레베카 듀까지 설득하려 들진 않았어. 단지 레베카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케이트 아주머니에게 일요일 저녁에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루이스앨런을 초대해달라고 부탁드렸지. 케이트 아주머니는 냉정하게 그럴 여유가 없다고 대답했어. 이미 딱한 처지에 있는 아이 하나를 초대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그 말을 듣고 레베카 듀는 고통으로 울부짖었지.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자기 손으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성실하고 가엾은 학생을 식사에 초대할 수 없다니! 저 고양이한테 주는 간에 돈이 훨씬 더 들잖아요, 고양이는 터질 듯 살도 쪘는데. 좋아요, 내 월급에서 1달러 빼서 그 애를 초대해줘요”
레베카의 복음은 받아들여졌어. 루이스앨런을 초대하기로 했고더스티 밀러의 간도 레베카 듀의 급료도 줄지 않았지. 정말 마음씨 좋은 레베카 듀지!
어젯밤에는 채티 아주머니가 내 방으로 살짝 들어오더니 구슬 장식이 달린 망토를 갖고 싶다고 했어. 케이트 아주머니에게도 그런 말을 해보았지만 그런 걸 갖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느냐는 핀잔만 들었대나.
“정말로 내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생각해요, 앤? 나는 주책 맞은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전부터 구슬장식이 달린 망토를 가지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그것이야말로 멋진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것이 다시 유행하잖아요.”
“너무 나이가 들었다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지 못할 만큼 늙은 사람은 없어요. 정말로 너무 늙었다면 그런 옷을 입고 싶지도 않을걸요.”
내가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 드렸더니 채티 아주머니는 “내가 그걸 사서 케이트 말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어.” 하고 말했어. 정말 그렇게 하실 모양이야. 나는 또 케이트 아주머니를 어떻게 달래드려야 할지도 알고 있지.
나는 내 탑 방에 혼자 있어. 밖은 너무 고요해. 이 밤의 고요함은 벨벳처럼 부드러워서 미루나무 가지조차도 흔들리지 않아. 나는 지금 막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킹스포트에 있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날려주었어.
26. 1812년 6월, 프랑스혁명 뒤 영국-프랑스전에 휘말린 미국과 영국의 전쟁. 미국은 해상권도 영국에 빼앗겼으나 격렬한 반격을 벌여 영국군을 캐나다로 몰아냈다. 이 전쟁에서 캐나다군은 영국군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2





돌리시 길은 일종의 산책로여서 오후가 되면 이 길을 거니는 사람이 많았다. 앤과 루이스도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가 나무숲 저편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사파이어 빛깔의 바다에 눈길이 사로잡혀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나 나무가 우거진 분지에 어여쁜 작은 집이 보이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연극 클럽 기부금을 부탁하는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앤과 루이스는 번갈아가며 기부금을 청했다. 남자의 경우는 앤이 설명을 하고 여자의 경우는 루이스가 나섰다.
“그 드레스와 모자를 쓰고 나갈 거면 앤이 남자를 맡아요. 나도 한창때는 기부금을 거두러 좀 다녀봤는데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예뻐 보일수록 돈이 더 많이 거두어지더라고요. 적어도 기부금을 내겠다는 약속은 받아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여자를 만나야 한다면 가장 촌스럽고 미운 옷을 입고 나가야 해요.”
레베카 듀도 그렇게 조언했다.
“길이란 건 참 흥미롭지 않니, 루이스? 반듯한 길은 말고 막다른 길이나 구부러진 길 말이야. 모퉁이를 돌아가면 생각지도 못한 아름답고 놀란 만한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 반겨주잖아. 난 언제나 구부러진 길을 좋아했어.”

앤이 꿈꾸듯 말했다.
“돌리시 길은 어디로 이어지죠?”
루이스는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때 루이스는 셜리 선생님의 목소리는 항상 봄을 생각나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주 끔찍하게 선생다운 대답을 할 수도 있는데 루이스, 그러지 않을래. 이 길은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아. 그냥 바로 여기 머물지. 이 길이 어디로 가고, 어디로 이어지든 무슨 상관이야? 아마 이 세상 끝까지 가겠지. ‘오, 시간이 내게 다 무엇이랴?’라고 한 에머슨의 말이 기억나니? 그 말이 오늘 우리의 금언이야. 우리가 잠시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우주는 자기가 알아서 다 잘 굴러갈 거라고. 저 구름이 만든 그림자 좀 봐. 저 푸른 골짜기의 고요함도. 그리고 양쪽 모퉁이에 사과나무가 서 있는 저 집도. 봄이 되면 저 집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보라고. 오늘은 정말이지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날이야. 세상의 모든 바람이 다 한 형제라는 생각도 들어. 이 길을 따라 향기로운 고사리 무리가 많이 자라 있어 너무 좋다. 고사리 위로 걸쳐 있는 저 거미줄 좀 봐. 저걸 보니 내가 상상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고는 했던 옛날이 생각난다. 난 저 거미줄이 요정들의 식탁보라고 믿었지.”
둘은 황금빛으로 쑥 들어간 길가에서 샘물을 발견하고, 아주 작은 양치류 같은 이끼가 자라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이스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컵을 만들어 샘물을 떠 마셨다.
“선생님은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갈 때 마시는 물맛이 어떤지 모르시죠. 제가 서부에서 철로 건설 일을 하던 여름이었어요. 몹시도 무덥던 날이었는데 전 평원에서 길을 잃고 몇 시간이나 헤맸어요. 갈증으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오두막집 하나를 발견했죠. 버드나무가 빙 둘러선 그 집 정원에서 바로 이 샘물 같은 작은 샘물을 발견했어요. 제가 어떻게 물을 마셨는지 아세요? 그 뒤로 저는 성경에 나오는 물맛이 달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죠.”
루이스가 말했다.
“샘물 말고 다른 물도 만날 것 같은데.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아, 루이스. 난 소나기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내가 가진 옷 중 두 번째로 좋은 옷을 입었고 모자는 제일 좋은 모자를 써서 비를 맞으면 안 돼. 근방 1킬로미터 이내에는 집도 없을 것 같은데 어쩌지?”
앤이 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저기 가면 버려진 대장간이 있어요. 하지만 막 달려가야 해요.”
루이스가 말했다.
둘은 대장간으로 달려가 거기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날 오후 둘은 유유자적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산책을 즐긴 것처럼 소나기도 즐겼다. 고요가 베일처럼 온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그토록 요란스럽게 부스럭거리고 속삭이던 돌리시 길의 모든 것들이 날개를 접고 움직임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그림자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다. 길모퉁이에 서 있는 단풍나무 잎사귀가 뒤집혀 있는 모습이 마치 나무가 두려움에 떠는 듯 보였다. 거대하고도 서늘한 그림자가 녹색 물마루처럼 나무를 집어삼키고 구름이 그 위를 덮쳤다. 그다음엔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이 나뭇잎으로 떨어지고 안개 자욱한 붉은 길에서 춤을 추었으며, 물보라를 일으키며 낡은 대장간 지붕을 요란스레 두들겼다.

“비가 쉬 멎지 않을 것 같은데요.”
루이스가 걱정했다.
하지만 비는 멈추었다. 비가 내릴 때도 갑작스러웠듯이 태양이 느닷없이 젖은 나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빛을 뿌렸다. 흰 구름들 사이로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아직도 비로 어둑했으나 두 사람 아래 펼쳐진 골짜기에서는 복숭아 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숲은 봄날답게 반짝반짝 빛나고 큰 단풍나무 위에 앉은 새는 진짜 봄날로 착각했는지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상은 놀랍도록 상쾌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이 길을 따라가 보자.”
앤이 낡은 판지 울타리 사이로 미역취꽃이 가득 피어난 좁은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길에는 집이 없을 것 같은데요. 항구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루이스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려면 어떠니. 이 길로 가보자. 나는 언제나 샛길이 좋아. 인적이 드문 외딴 길은 외로운 느낌도 들고. 루이스, 이 젖은 풀냄새 좀 맡아 봐. 어쩐지 나는 저 길 끝에 꼭 집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떤 종류의 집이든, 사진을 찍기도 좋은 집일 거야.”
앤의 예감은 틀림없었다. 얼마 안 가서 정말로 집이 나타났다. 게다가 사진에 담으면 멋질 집이었다. 옛날 분위기가 나면서도 독특한 모양이었는데 서까래가 낮고 네모진 조그만 창문이 나 있었다. 큰 버드나무들이 기다란 가지를 뻗어 집을 감쌌고 집 주변에는 여러해살이풀이며 키 작은 나무들이 무성했다. 집은 비바람에 바래고 낡았지만 집 뒤에 있는 커다란 헛간들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모든 면에서 최신식으로 보였다.
“집보다 헛간을 잘 정리해두는 사람은 쓰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더 많다는 말을 들었어요, 선생님.”
풀이 무성한 길에 깊게 마차바큇자국이 나 있는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루이스가 말했다.
“난 이 집 주인은 자기 가족보다는 말을 더 많이 생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걸. 이 집에서는 우리 연극 클럽을 위한 기부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사진 콘테스트에 낼 만한 사진은 얻을 수 있겠어. 이 음울한 분위기야 사진에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앤이 웃으며 말했다.
“이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 같아요. 이 집 사람들은 바깥세상과 별 교류가 없는 모양이에요. 연극 클럽이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살면 어떻게 하죠? 어쨌건 저 집에 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려 깨우기 전에 일단 사진부터 찍어두어야겠어요.”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빈 집인지 사람 기척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사진을 찍고 나서 조그맣게 난 하얀 문을 열고 뜰로 들어가 빛바랜 파란 부엌문을 두드렸다. 현관문은 ‘윈디 포플러’와 마찬가지로 쓰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장식용인 듯했다. 문이 담쟁이덩굴에 완전히 뒤덮여 여닫을 수도 없다면 장식적인 효과 외에 그게 어디 문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기분 좋게 기부를 해주든 안 해주든 두 사람은 적어도 이제까지 방문했던 집에서 받았던 상냥한 인사 정도는 기대했다. 그런데 문이 홱 열리며 나타난 얼굴은 미소 띤 농부의 아내나 딸의 얼굴이 아닌 쉰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백발 머리에 밤송이 같은 눈썹을 한 험상궂은 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다짜고짜 따져 묻는데 두 사람은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오?”
“우리 학교의 연극 클럽에 관심을 좀 가져주십사 하고 찾아왔어요.”
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 이상은 더 애를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들은 적 없소. 듣고 싶지도 않소. 알 필요도 없고.”
말을 마치자마자 문은 둘이 서 있는 문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꽝 닫혀버렸다.
“우리가 푸대접을 받았구나.”
돌아 나오면서 앤이 말했다.
“아주 상냥하고 기분 좋은 신사분이군요. 부인이 불쌍하네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비웃어주었다.
“아마 없을 거야. 부인이 있다면 저렇게까지 야만적이지는 않겠지.”
앤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레베카 듀에게 보내 호되게 버릇을 고쳐주라고 하고 싶어. 하지만 적어도 저 집 사진은 찍었으니 됐어. 왠지 이 사진이 입선하리라는 예감이 드는구나. 앗, 이런! 구두에 돌이 들어가 버렸어. 저 신사 집의 돌담에 잠시 앉아야겠다. 저 사람이 허락을 하거나 말거나 돌은 빼야 할 거 아냐.”
“다행히도 저 집에서 보이지는 않겠어요.”
루이스가 말했다.
앤이 구두끈을 다시 매고 막 일어났을 때 오른쪽 무성한 관목 숲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조그만남자아이가 나오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두 손에 커다란 사과 파이 한 조각을 꼭 쥐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고수머리에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갈색 눈을 가진 얼굴이 조각상처럼 섬세했다. 모자도 쓰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았으며 빛바랜 푸른 무명 셔츠와 낡은 벨벳 반바지만 입었는데도 어딘지 신분을 위장한 왕자님처럼 보였다.
아이 바로 뒤에는 검은색 뉴펀들랜드 종의 커다란 개 한 마리도 서 있었다. 머리가 아이의 어깨 높이까지 왔다.
앤은 모든 아이들을 사로잡아버리는 예의 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안녕, 꼬마야. 넌 어디 사니?”
루이스가 물었다.
아이는 생긋 웃으며 손에 들었던 파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아빠가 만들어주었지만 형한테 주고 싶어요. 전 많이 있거든요.”
아이가 수줍은 듯 말했다.

루이스는 눈치도 없이 꼬마의 호의를 사양하려 했으나 앤이 재빨리 루이스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루이스도 그 뜻을 깨닫고 얼른 정색하며 파이를 받아 앤에게 내밀었다. 앤도 진지하게 그것을 받아 절반을 뚝 잘라 루이스에게 다시 내밀었다. 둘은 파이를 입에 넣긴 해야겠지만 아빠라는 사람의요리 솜씨가 어떨지 몹시 불안했다. 그렇지만 한 입 먹어보고는 마음이 놓였다. 아빠의 예의범절은 형편없었어도 사과 파이 만드는 솜씨는 확실히 괜찮았다.
앤이 칭찬했다.
“어머나, 맛있구나. 이름이 뭐지?”
“테디 암스트롱. 그렇지만 아빠는 저를 ‘꼬맹이’라고 불러요. 아빠한테는 저밖에 없어요. 아빠도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저도 아빠가 제일 좋아요. 아빠가 문을 쾅 닫아버려서 누나는 아빠가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누나와 형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우린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 하고 앤은 생각했다.)
“저는 저기 접시꽃 나무 뒤에 서 있었어요. 제 사과 파이를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전 항상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 없거든요. 저는 언제나 먹을 것이 잔뜩 있어요. 우리 아빠는 요리를 아주 잘하거든요. 아빠가 만든 라이스 푸딩을 먹어보면 좋을 텐데.”
“푸딩에 건포도도 많이 넣어주시니?”
루이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주 많이요. 우리 아빠는 구두쇠가 아니에요.”

“엄마는 안 계시니?”
앤이 물었다.
“네. 엄마는 돌아가셨어요. 지난번에 메릴 아주머니가 엄마는 천국에 갔다고 가르쳐줬지만 아빠는 천국 같은 건 없대요. 전 아빠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빠는 모르는 게 없거든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저도 크면 꼭 아빠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그렇지만 누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주겠어요. 우리 아빠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아주 잘해줘요.”
“너 학교는 다니니?”
루이스가 물었다.
“아니요. 우리 아빠가 집에서 가르쳐줘요. 학교 이사회는 내년에는 저도 학교에가야 한다고 말한대요. 저도 학교에다니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과도 놀 수 있으니까요. 제게는 카를로도 있고 아빠도 시간만 있으면 저랑 놀아주긴 하지만요. 우리 아빠는 항상 좀 바빠요. 농장 일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깨끗하게 다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을 다 상대해줄 시간이 없어요. 제가 자라면 아빠를 많이 도와줄 거예요. 그럼 아빠도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할 시간이 날 거예요.”
“이 파이는 정말 맛있다, 꼬맹이.”
루이스가 마지막 한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꼬맹이의 눈이 빛났다.
“맛있다니 아주 기뻐요.”
아이가 말했다.

“네 사진을 찍어줄까? 괜찮다면 루이스가 네 사진을 찍어줄 거야.”
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진을 찍어준다고 해서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작은 영혼이 준 것에 대한 대가는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 그럼요. 카를로도 함께 찍어도 되죠?”
꼬맹이는 신나서 말했다.
“그럼, 카를로도 되고말고.”
앤은 관목을 배경으로 두 귀여운 녀석들을 세웠다. 아이는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커다란 카를로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섰다. 개와 소년 둘다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마지막 남은 필름을 둘의 사진을찍는 데 썼다.
“사진이 나오면 너한테 편지로 보내줄게. 주소가 어떻게 되니?”
루이스가 약속했다.
“글렌코브 거리, 제임스 암스트롱 댁 테디 암스트롱이요. 아, 우체국에서 제 앞으로 편지가 온다니 너무 신나요! 제가 아주 굉장해진 것 같아. 아빠에게는 아무 말 안 하겠어요.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삼 주 지나서 네 앞으로 온 소포가 있는지 찾아봐.”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루이스가 말했다. 앤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여 햇볕에 그을린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아이에게는 앤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이는 너무 귀여웠고, 너무 씩씩했으며 너무 가엽게 엄마도 없었다.
오솔길 모퉁이를 돌면서 다시 한 번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개와 함께 돌담 위에 서서 둘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물론 레베카 듀는 암스트롱에 관해 모두 알고 있었다.
“제임스 암스트롱은 5년 전에 죽은 아내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전에는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죠.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좀 운둔자적인 기질이 있긴 했지만, 워낙 성격이 혼자 지내는 걸 좋아했죠. 자기 부인밖에는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고. 나이도 부인이 스무 살이나 어렸어요. 그런데도 아내가 제임스보다 먼저 죽어버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성격까지 아주 싹 달라져 버렸다고들 하더라고요. 더 무뚝뚝해지고 화도 잘 내고. 가정부도 안 두고 집이며 아이 기르는 일을 직접 해요. 하긴 결혼하기 전에도 꽤 오래 혼자 살았으니까 못 할 것도 없지만요.”
레베카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할 짓이 못 되지. 그 애 아버지가 교회든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니까.”
채티 아주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를 아주 예뻐한대요.”
케이트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갑자기 레베카 듀가 성경 구절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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