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1~12

나단비 | 2024.04.02 18:43:49 댓글: 0 조회: 5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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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또한 이 저택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품위가 느껴졌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고 벽난로 위로는 샹들리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금도금 된 테가 둘린 거울이 걸려 있었다. 식탁에는 은과 크리스털 식기들과 영국 더비산 자기 그릇들이 아름답게 놓였다. 음산한 표정의 나이 많은 하녀가 시중을 든 저녁은 과할 정도로 잘 차려져 앤의 건강하고 젊은 식욕을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미스 미네르바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앤은 또다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 같은 두려움에 감히 한 마디도 입을 뗄 수 없었다. 크고 검은 털에 윤기가 자르르한 고양이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목쉰 소리로 야옹거리며 미스 미네르바 곁에 앉았다. 미스 미네르바가 고양이 앞에 우유를 따라주었다. 그 모습이 좀 인간적으로 보여 톰갤런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라는 두려움이 많이 가셨다.
“복숭아를 좀 더 드실래요? 아무것도 먹지를 않는군요. 정말로 아무것도.”
“오, 미스 톰갤런, 전 아주 많이 먹었는걸요.”
“톰갤런 가(家)는 항상 음식을 풍성하게 차린답니다.”
미스 미네르바가 아주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우리 소피아 숙모는 스펀지케이크를 아주 잘 만들었어요. 내가 먹어본 것 중에 최고지요. 우리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는 걸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여동생 메리였어요. 언제나 먹는 것이 시원찮아서였죠. 뭐든지 조금 입에 넣어서 맛을 보는 듯하고는 말아요. 아버지는 메리 고모의 그런 태도가 자기를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리처드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결혼을 했을 때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죠.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절대 집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어요. 그 뒤로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드리던 가족 예배 때 주기도문을 외우면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짓는 자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는 구절은 빼버렸어요. 내게는 지금도 저기서 무릎을 꿇고 그 문장을 빼버리고 기도를 올리던 우리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해요.”
미스 미네르바가 꿈꾸듯 말을 맺었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세 개 거실 중에서 가장 작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커다란 벽난로 앞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크고 음침한 방이었지만 벽난로로 인해 아늑하고 기분 좋은 분위기가 났다. 앤은 섬세한 장식용 냅킨을 코바늘로 뜨고, 미스 미네르바는 숄을 짜면서 모노드라마처럼 혼자서만 말을 했는데 대부분 화려하면서도 좀 무시무시한 톰갤런 가문의 역사 이야기였다.
“이 집은 비극적인 기억으로 가득해요.”
“미스 톰갤런, 이 집에 즐거운 일은 없었나요?”
앤이 겨우 그 질문을 했다. 미스 미네르바가 코를 푸느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서 간신히 그 한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있었죠.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는 이 집에 즐거움이 넘쳤던 적도 있어요.”
미스 미네르바가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셜리 선생은 서머사이드의 모든 사람들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서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오!”
미스 미네르바 얼굴에 실망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만일 원한다면 우리 집안 이야기는 무엇이든 써도 좋아요. 그래요, 이름은 바꿔서요. 그럼 이제 파체시게임을 할까요?”
“전 그만 가봐야겠어요.”
“아니에요, 오늘 밤엔못 가요. 비가 마구 퍼붓는걸요. 그리고 저 바람 소리 좀 들어봐요. 우리 집에는 마차도 없다고요. 내가 쓸 일이 없어서. 이렇게 퍼붓는 빗속을 거의 1킬로미터나 걸을 수 있겠어요? 오늘 밤엔여기서 자야 해요.”
앤은 톰갤런 저택에서 밤을 보내기도 싫었지만 3월의 폭풍우 속에서 ‘윈디 포플러’까지 걸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파체시게임을 시작했다. 미스 미네르바는 이 게임에 너무 열중해 무서운 이야기도 잊어버렸다. 그런 다음 둘은 밤참을 먹었다. 두 사람은 시나몬 토스트를 먹고 톰갤런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놀라우리만큼 얇고 아름다운 찻잔으로 코코아를 마셨다. 마침내 미스 미네르바가 앤을 손님방으로 안내했고 앤은 그 방이 미스 미네르바의 언니가 뇌졸중으로 죽은 방이 아니어서 마음을 놓았다.
“이 방은 원래애너벨라고모 방이었어요.”
미스 미네르바가 아름다운 녹색 화장대 위에 놓인 은촛대에 촛불을 켜고 가스등은 꺼버리면서 말했다. 매슈 톰갤런은 어느 날 밤 가스등을 불어 끄고, 동시에 자기 존재도 감추어버렸다고 했다.
“애너벨라고모는 톰갤런 집안에서 가장 미인이었어요. 저 거울 위에 걸린 초상화가애너벨라고모예요. 입매가 무척이나 기품 있죠? 침대에 덮인 저 침대 덮개는애너벨라고모가 만든 거예요. 편안하게 쉬어요. 메리가 침대에 바람을 쐬어두었고 뜨거운 벽돌 두 개를 넣어 침대를 따뜻하게 했어요. 그리고 이 잠옷도 바람을 쐬었죠.”
의자에 걸려 있는 커다란 플란넬 잠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프탈렌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셜리 선생 몸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오랫동안 아무도 입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는 그 옷을 입고 돌아가셨죠. 오, 하마터면 그 이야기 하는 것을 잊을 뻔했어요. 이 방은 오스카 톰갤런이 죽었다가 살아난 방이에요. 모두들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이틀이나요. 저승사자들이 그 사람을 원하지 않았나 봐요. 그것 역시도 비극이었죠. 오늘 밤 푹 잘 수 있길 바랄게요.”
미스 미네르바가 문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앤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방 안에서 갑자기 이상하고 낯선 것이 느껴졌다. 적개심을 품은 것이. 몇 세대가 거쳐온 방인데 어떤 방이 그렇지 않겠는가? 죽음이 넘본 일도 있었을 것이고, 사랑이 꽃핀 적도 있었을 것이며,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 방일 것이다. 정열과 희망이 숨 쉬었고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은 정말로 오래되었고 끔찍한 일로만 가득했던 집이었다. 구석구석마다, 음침한 방마다 모두 증오와 상심으로 죽은 귀신으로 넘쳐나고 밝은 빛으로 나와 본 적이 없는 어둠만 가득한 집이다. 너무 많은 여인이 여기서 울었다. 바람도 창가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며 음산하게 울부짖었다. 잠시 동안 앤은 폭풍우가 몰아치거나 말거나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분별력을 되찾았다. 아무리 이 집에 비극적인 일과 끔찍한 일이 많았더라도 수많은 어두운 세월을 지나오면서 즐겁고 좋은 일도 있었으리라. 음악 소리며 웃음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밝고 어여쁜 아가씨들이 춤을 추며 비밀 이야기도 속삭였으리라. 보조개가 쏙 들어간 아가들이 태어났고 결혼식도, 무도회도 열렸으며 분명 음악 소리와웃음소리도 들렸으리라. 스펀지케이크를 만든 부인은 잘 웃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고, 용서받지 못했던 리처드는 용감한 연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자기로 하자. 이 아름다운 이불을 좀 보라구! 그리고 여긴 손님방이야! 내가 예전에 얼마나 손님방에서 자보고 싶어 했는데, 아직도 그 기대감을 잊지 않았다고. 그런데 내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나도 미쳐 있으면 어쩌지?’
앤은애너벨라톰갤런의 코앞에서 머리를 풀어 빗질했다. 거만하고 허영심이 강해 보이는애너벨라는 뛰어난 미인답게 오만함이 가득한 한 얼굴로 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앤의 몸이 오싹해왔다. 저 거울 속에서 어떤 얼굴들이 앤을 마주 보고 있을지 누가 알랴? 모든 비극의 주인공들과 귀신에 쓰인 여자들이 다 저 거울을 보았으리라. 앤은 일어나 와르르 해골이라도 쏟아져 나올 테면 나와 봐라 하는 심정으로 용감하게 벽장문을 열어젖히고 옷을 걸었다. 그러고는 누구든 자기 위에 앉는 사람은 다 경멸하겠다는 듯 딱딱한 의자에 앉아 침착하게 구두를 벗었다. 이어 그 플란넬 잠옷을 입고 촛불도 불어 끄고서 메리가 넣어준 벽돌 덕분에 기분 좋게 따뜻한 침대로 들어갔다. 잠시 동안 창문에 흐르는 빗물 소리며 낡은 처마 주변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비명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곧 톰갤런 집안의 온갖 비극은 다 잊어버리고 꿈조차 꾸지 않고 곤히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검은 전나무 가지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앤이 작별인사를 하자 미스 미네르바가 말했다. “난 혼자 산 지가 너무나 오래돼서 말하는 법도 다 잊어버린 것 같았는데. 이 천박한 시대에 이렇게 매력적이고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제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제가 사실은 내 생일이었어요. 미스 셜리 덕분에 이 집에 잠시 젊음을 맞이해 아주 즐겁게 지냈지요. 지금은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죠. 전에는 그토록 많은 사람이 기억해주었는데.”
미스 미네르바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어땠어요? 꽤 음산한 그 집안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을 텐데.”
그날 밤 채티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런데 미스 미네르바가 내게 해준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일까요, 채티 아주머니?”
“글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요. 톰갤런 집안에는 정말로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채티 아주머니가 말했다.
“6세대나 거쳐 온 집안이니까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못 믿을 일도 아니지.”
케이트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 난 그 집이 정말로 저주를 받은 집안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거나 비명횡사했잖아요. 그리고 그 집안 피에는 광기가 흘러요.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만으로도 저주받고 있다고 말하기 충분하지요. 아주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하여튼 그 집을 지은 목수가 그 집을 저주했다는 이야기예요. 무슨 계약에 문제가 있었다나. 폴 톰갤런 노인이 그 목수와 계약을 맺었는데 그 때문에 목수는 파산해버렸대요.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용이 더 많이 들어서요.”
“미스 미네르바는 그 저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던데요.”
앤이 말했다.
“가여운 사람 같으니라고. 그 할머니가 가진 거라고는 이제 그것밖에는 없거든.”
레베카 듀가 말했다.
앤은 그 위엄 있는 미스 미네르바가 겨우 가여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우스워 몰래 웃음을 지었다. 앤은 탑 방으로 올라와 길버트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톰갤런 저택을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잠들어 있는 옛날 집이라고 생각했어. 그래, 지금은 그 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전에는 분명 그렇지 않았지. 엘리자베스는 항상 내일을 이야기해. 하지만 그 오랜 톰갤런 저택은 어제야. 난 어제에 살고 있지 않고 내일이 친구처럼 손짓하는 세계에 살고 있어 기뻐.
미스 미네르바는 다른 모든 톰갤런 사람들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고 싶어서 자기 집안의 비극을 되뇌며 무한한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이에게서 만족을 얻는다면 미스 미네르바는 자기 가족의 비극적인 일에서 만족을 얻는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길버트,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을 모조리 비극으로 보고 비극에 탐닉하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나는 120년이나 된 그런 집은 싫어. 우리의 꿈의 집을 마련할 때는 새 집으로 하든가 유령이 없든가 전통이 없는 집으로 하자고.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집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 살게 하자고. 난 톰갤런 저택에서의 그 하룻밤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내가 입을 열지 못할 만큼 나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은 내 평생 처음이었거든.



12





꼬마 엘리자베스 그레이슨은 언제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할머니와 그 여자의 감시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그런 일을 기대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저절로 일어나도록 운명 지어진 일도 있다. 만일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에라도.
셜리 선생님이 ‘윈디 포플러’로 온 뒤로 엘리자베스는 내일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고 ‘초록 지붕 집’을 다녀온 것은 내일을 미리 맛본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 6월이면 셜리 선생님은 서머사이드 중등학교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해를 마치게 되므로 꼬마 엘리자베스의 마음은 할머니가 늘 신게 해주는 단추가 달린 예쁜 구두 속으로 스며들어버렸다. 많은 학교 아이들이 엘리자베스의 이 구두를 몹시 부러워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유를 향한 길로 안내해주는 것이아닌 다음에야 이 구두에 별 관심도 없었다. 이제는 엘리자베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셜리 선생님마저 자기를 영원히 떠나려 한다. 6월 말이면 서머사이드를 영영 떠나서 아름다운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꼬마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셜리 선생님이 이번 여름 결혼하기 전에 ‘초록 지붕 집’에 초대하겠다고 약속을 했어도 슬픈 마음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어쨌거나 할머니가 그걸 허락하지도 않으리라고, 셜리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는 일을 할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모두 끝났어요, 셜리 선생님.”
아이는 훌쩍였다.
“우리 희망을 갖자. 이건 새로운 시작일 뿐이야.”
앤이 활기차게 말했다. 하지만 앤도 기분이 처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앤이 보낸 편지를 받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면 이제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 적에도 이렇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데 더 나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저 두 늙은이는 아이가 죽는 날까지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거라고요.”
레베카 듀도 말했다. 앤은 그 말에 우아함은 담겨 있지 않더라도 진실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둘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는 걸 알았다. 특히 그 여자에게 감시당하는 건 싫었다. 물론 할머니가 감시하는 것도 싫었지만 할머니라면 감시할 권리가 있을지도 모르므로 싫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항상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일이 오면. 오, 그때 그 여자 표정이 어떨지 정말로 궁금하다.
할머니는 절대 엘리자베스를 혼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집시가 잡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40년 전에 그런 아이가 있었다나. 지금은 이 섬에 집시가 찾아드는 경우도 거의 없어서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째서 할머니는 내가 끌려가든말든 마음 쓰는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할머니도 그 여자도 자기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자기를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지도 않았다. 이름을 부르려 들지 않고 되도록이면 ‘얘야.’ 하고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개나 고양이를 부르는 것처럼 ‘얘야.’ 하고 부르는 게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서 따져보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무서운 표정으로 건방지다고 화만 냈다. 그때 그 여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꼬마 엘리자베스는 종종 그 여자가 왜 자기를 미워하는지 궁금했다. 자기처럼 작은 아이를 왜 미워하는 건지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내가 미워할 가치나 있는 아인가? 엘리자베스는 그 무정한 여자가 목숨을 걸고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비록 알았다 해도 잘못된 애정이 얼마나 비뚤어져 나갈 수 있는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크고 음울한 ‘늘 푸른 집’이 싫었다. 그 집에서 내내 살았지만 아직도 그 집이 낯설었다. 하지만 셜리 선생님이 ‘윈디 포플러’에 온 뒤로는 모든 것이 기적처럼 달라졌다. 셜리 선생님이 온 후로 꼬마 엘리자베스는 꿈속 세계에 살았다. 어디를 보나 아름다웠다. 다행히도 할머니와 그 여자는 엘리자베스가 보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하기야 그마저도 할 수만 있었다면 막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둡기만 한 엘리자베스의 생활에서 셜리 선생님과 함께 붉은 마법의 길인 항구 길을 잠시 산책하는 것이 오로지 한 줄기 빛이 비쳐드는 일이었다. 그것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등대는 이상한 붉은색과 하얀색 동그라미를 그렸고,더 멀리 희미한 푸른 해안가, 작은 은빛이 도는 푸른 파도들, 제비꽃 빛 어스름 속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목장 불빛이 모두 엘리자베스에게 달콤하게 다가온 나머지 가슴이 다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저 안개가 자욱한 항구와 불타오르는 석양빛은 또 어떤가! 엘리자베스는 달이 떠오르면 언제나 지붕 창문으로 다가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어떤 배는 돌아오지만,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배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배를 타고 ‘행복의 섬’으로 항해하고 싶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배는 ‘행복의 섬’에 닻을 내린 배이며 그곳은 언제까지나 내일일 것이다.
그 신비스러운 붉은 길은 끝이 없으며, 엘리자베스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어 발이 근질거렸다.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너무 궁금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때도 있었다. 정말로 내일이 오면 얼른 달려 나가 셜리 선생님과 단둘이서살 섬을 찾아낼 것이다. 할머니와 그 여자는 절대로 올 수 없는 섬을. 둘 다 물을 아주 싫어해서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배에 몸을 실으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섬 건너편 육지에서 자기를 어쩌지 못하고 노려만 보는 두 사람을 놀려주는 자기 모습을 그려보았다.
“여기는 내일이에요. 이제 저를 붙잡을 수 없어요. 할머니들은 오늘에만 살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둘을 놀려줄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던 어느 6월 말 저녁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셜리 선생님이 부인회 접대위원회 위원장인 톰프슨 부인을 만나려고 내일 ‘흘러가는 구름’ 섬으로 갈 일이 있는데, 엘리자베스를 함께 데려가게 해달라고 캠벨 부인에게 부탁했다. 할머니는 언제나의 그 무뚝뚝한 태도로 허락해주었다. 엘리자베스로서는 할머니가 어째서 허락했는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셜리 선생님이 프링글 집안을 공포로 몰아넣은 어떤 정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까.
어쨌거나 캠벨 부인은 허락했다.

‘흘러가는 구름’ 섬은 바닷가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길쭉한 작은 섬으로, 집은 단 한 채뿐이었고 나무만 무성했다. 엘리자베스는 항상 은빛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자기만의 작은 섬을 갖고 싶었다.
“바다를 어떻게 건너요?”
“이 배를 타고 건너지.”
셜리 선생님은 말뚝에 잡아 매놓은 배를 풀었다.
셜리 선생님은 노를 저을 줄 아는 모양이다. 셜리 선생님이 할 줄 모르는 일이 어디 있던가? 둘이 섬에 닿았을 때 이 섬은 무슨 일이고 가능한 환상적인 곳이란 걸 당장 알 수 있었다. 물론 여기는 내일에 있는 곳이었다. 이런 섬은 내일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 시시한 오늘에는 속할 수 없다.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리자 가정부가 나와 톰프슨 부인은 섬 저 끝에서 산딸기를 따고 있다고 앤에게 일러주었다. 산딸기가 자라는 섬이라니!
앤은 톰프슨 부인을 찾으러 나섰다. 그러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응접실로 들여보내 좀 쉬도록 했다. 처음 나서 본 길을 오래 걸어 지쳤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셜리 선생님이 원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따르고 싶었다.
꽃이 여기저기 놓였고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벽난로 위에 걸린 거울이 방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마음에 들었다. 열린 창문으로 항구와 언덕과 바다가 내다보였다.
갑자기 어떤 남자가 문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한순간 놀람과 동시에 공포심을 느꼈다. 이 사람은 집시인가? 하지만 집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집시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저 사람이라면 날 유괴해간다 해도 괜찮으리라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 사람의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고 반짝이는 밤색 머리도 네모난 턱도, 미소도 좋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웃고 있었으니까.
“아가씨는 누구지?”
그 사람이 물었다.
“저는, 저는 저예요.”
엘리자베스는 좀 어리둥절해 더듬거렸다.
“아, 그렇군. 바다에서 불쑥 솟아 나온 꼬마인 모양이야, 아니 모래 언덕에서 나왔나, 이름도 없이.”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자기를 놀리는 그 남자가 좋았다. 그러나 좀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엘리자베스 그레이슨이에요.”
침묵이 이어졌다. 굉장히 이상한 침묵이었다. 그 남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베스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더니 정중하게 앉으라고 했다.
“저는 셜리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선생님은 부인회 만찬회 일로 톰프슨 아주머니를 만나러 갔어요. 셜리 선생님이 돌아오면 둘이서 세상 끝까지 가보기로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날 유괴할 생각이라면 절 데려가세요!’

“그래, 그동안은 내가 널 돌봐줘야겠구나. 가볍게 간식이나 먹을까? 톰프슨 부인의 고양이가 아마 뭔가 갖다 줄 거야.”
엘리자베스는 앉았다. 이상하게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다 먹을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럼 딸기잼을 얹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요.”
엘리자베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남자는 벨을 흔들어 주문했다. 그렇다, 지금은 내일임에 틀림없다. 확실히 그렇다. 고양이가 갖다 주었든 누가 갖다 주었든 오늘이라면 마술에라도 걸린 듯 아이스크림에 딸기잼이 이렇게 나타날 리 없다!
“셜리 선생님 건 따로 놔두자.”
그 사람이 말했다.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었다. 그 사람은 말은 별로 하지도 않고 자꾸 엘리자베스만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표정을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다. 셜리 선생님 얼굴에서조차도 그런 부드러움은 보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람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기도 그 사람이 좋았다.
그 남자가 일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가야겠다. 셜리 선생님이 저기 오시는 게 보이니까 너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사람이 말했다.
“기다렸다가 셜리 선생님을 만나고 가지 않으실래요? 엘리자베스가 숟가락에 묻어 있는 마지막 잼까지 다 빨아먹으며 말했다. 만일 엘리자베스의 지금 이런 모습을 보았더라면 할머니와 그 여자는 기절해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만나보마.”
그 남자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가 자기를 유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이상하게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내일인 여기는 아주 좋은 곳이에요.”
“내일?”
“여기는 내일이에요. 저는 전부터 항상 내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지금 들어왔어요.”
엘리자베스가 설명했다.
“아, 알았다. 그렇지, 나는 유감이지만 내일은 그리 바라지 않아. 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단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람이 가엾어졌다. 하지만 어째서 이 사람은 불행할까? 어떻게 내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불행할까?
엘리자베스는 돌아오는 길에 섭섭한 듯 ‘흘러가는 구름’ 섬을 자꾸만 돌아다보았다. 바다와 길이 만난 언저리에 있는 가문비나무 숲을 헤치고 걸어가며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짐마차를 끄는 한쌍의 말이 느닷없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냈다. 말들이 마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셜리 선생님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43. 프랑스 중부에서 지중해 북서안을 향해 부는 한랭 건조한 국지풍으로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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