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31~32

나단비 | 2024.04.16 15:35:54 댓글: 0 조회: 7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487
31
칼의 참회






페이스가 샐쭉해서 말했다.
“난 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우린 잘못한 일이 없다고. 무서운 것은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어. 그 일로 아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사고였단 말이야.”
“너희들은 겁쟁이 짓을 했어. 무서워도 용감하게 이겨내지 못했으니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해. 사람들이 다 너희를 비웃을 거야. 이건 우리 집안의 수치야.”
제리는 재판관 같은 태도로 말했다.
“오빠도 우리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안다면 우리가 벌 받을 건 이미 다 받았다고 생각할 거야.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
페이스는 몸까지 떨며 말했다.
“형도 거기에 같이 있었다면 아마 도망쳤을걸.”
칼이 중얼거렸다.

“홑이불을 뒤집어 쓴 할머니를 보고…… 하, 하, 하!”
제리가 조롱했다.
“전혀 할머니로 보이지 않았어. 커다랗고 허연 것이 풀 위를 기어 다니는 게 꼭 메리가 말한 헨리 워런의 유령 같았다고. 얼마든지 비웃어. 그렇지만 형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를 비웃을 수만은 없었을 거라고. 어쨌거나 우린 무슨 벌을 받아야 하지? 나는 벌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말해줘, 메러디스 재판관.”
그러자 페이스가 외쳤다.
“내 생각엔 칼이 가장 죄가 무거워. 맨 먼저 도망쳤잖아. 게다가 칼은 남자야.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서 여자아이를 지켜주었어야 했어. 너도 그건 알고 있겠지, 칼?”
제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칼은 수치감으로 신음했다.
“좋아. 네가 받아야 할 벌은 오늘 밤 혼자서 묘지로 가서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에 앉아 있는 거야. 12시까지.”
칼은 몸을 떨었다. 묘지는 베일리 정원에서도 멀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 심했다. 하지만 칼은 자기의 불명예를 벗어버려야 했다. 자기가 겁쟁이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좋아. 하지만 12시가 된지 어떻게 알아?”

칼이 씩씩하게 말했다.
“서재 창문을 열어놓을게. 그럼 시계 종 치는 소리가 들릴 거야. 12번을 다 칠 때까지 묘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그리고 페이스와 우나는 일주일 동안 저녁 먹을 때 잼을 먹지 마.”
페이스와 우나는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칼의 벌이 더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괴롭더라도 얼른 끝나버리는 것이 낫지 질질 끌어야 하는 고난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앞으로 꼬박 1주일이나 잼도 없이 꺼칠꺼칠한 빵을 어떻게 먹는담! 하지만 선행 클럽의 벌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자기에게 내려진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밤 9시가 되자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칼만은 이미 그전부터 묘석에 앉아 있어야 했다. 우나가 살그머니 칼에게 밤 인사를 하러 왔다. 칼에 관한 동정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칼, 많이 무섭니?”
우나가 속삭였다.
“아니, 조금도 안 무서워.”
칼은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나도 12시가 될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릴게. 거기서 쓸쓸한 기분이 들면 우리 방 창문을 봐. 나도 자지 않고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그럼 쓸쓸하지 않을 거야.”
우나가 말했다.
“난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칼이 말했다.
칼은 대범하게 말했지만 목사관 불이 꺼지자 외로운 생각이 사무쳤다. 아빠가 예전처럼 서재에 자주 있어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외로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메러디스 씨는 그날 밤 어촌 마을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나갔다. 12시가 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칼은 그 섬뜩한 기분을 혼자서 견디어야 했다.
글렌 마을 사람 하나가 초롱불을 들고 지나갔다. 불빛이 묘지를 비추자 이상야릇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유령이나 마녀가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그 사람이 지나가 버리자 묘지는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글렌 마을의 불빛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하늘에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무척 캄캄한 밤이었다. 때에 맞지 않게 매서운 동풍도 불어왔다. 지평선 저쪽에서는 샬럿타운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바람은 전나무 사이로 몰아치며 신음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알렉 데이비스 씨의 큰 비석이 빛을 발했다. 비석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가 기다란 팔을 비틀고 흔들어대는 모양이 꼭 귀신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끔씩 버드나무 가지가 움직이는 모양에 따라 묘비까지 움직이는 듯 보였다.
칼은 묘석 위로 다리를 올려놓고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감히 묘석 아래로 다리를 늘어뜨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폴록의 무덤 속에서 메마른 손이 쑥 튀어나와 발목을 꽉 붙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언젠가 모두 여기에 모여 앉아 있을 때 메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생각나 칼을 죄어왔다. 물론 칼은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헨리 워런의 유령 이야기 따위는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폴록 할아버지도 벌써 60년 전에 죽었으니 누가 묘석에 앉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잠들어버린 때 혼자만 깨어 있으니 뭔가가 이상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자기 혼자뿐이었다. 연약한 자기 혼자 힘으로 강인한 어둠의 지배자에게 대항해야 했다. 이제 겨우 열 살인 칼의 주변에는 온통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칼은 시계가 얼른 12시 종을 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시계가 절대 12시 종을 치지 않으면 어쩌지? 마사 이모할머니가 태엽 감는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시계가 11시를 쳤다. 이제 겨우 11시야! 아직도 이 음침한 곳에 1시간이나 더 있어야 해. 다정한 별이라도 두세 개 반짝여준다면! 어둠이 너무 두꺼워서 칼의 얼굴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묘지 여기저기서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칼은 몸을 떨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공포감 때문이기도 했고 몹시 추워서이기도 했다.
거기다 이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차디찬 빗줄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칼의 얇은 면 셔츠는 금방 흠뻑 젖어버렸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로 몸이 너무 괴로워서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칼은 12시까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명예가 달린 일이었다. 비가 내릴 경우에는 아무 말도 해두지 않았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서재 시계가 12시를 쳤다. 흠뻑 젖은 칼은 온몸이 굳어져 뻣뻣한 몸을 이끌고 폴록의 묘석에서 내려와 목사관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가 딱딱 마주쳤다. 칼은 얼어버린 몸이 절대로 녹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칼의 몸은 따뜻했다. 아니, 몹시 뜨거웠다. 제리는 칼의 시뻘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아버지를 부르러 달려갔다. 메러디스 씨는 허둥대며 올라왔다.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느라 밤샘을 하고 새벽녘에야 돌아와서 목사의 얼굴도 상아빛처럼 창백했다. 메러디스 씨는 걱정스럽게 칼 위로 몸을 굽히고 물었다.
“칼, 어디 아프니?”

“그 묘석, 여기요. 저, 저것이 움직여요. 나를, 나를 잡으러 와요. 저리 치워요, 제발.”
칼이 헛소리를 했다.
메러디스 씨가 급히 전화를 했고, 10분 후에 블라이드 의사가 목사관으로 왔다. 30분 후에는 능숙한 간호사를 보내달라고 시내에 연락을 했고, 온 글렌 마을 사람들이 칼 메러디스가 폐렴에 걸렸는데 아주 중태여서 블라이드 의사도 예후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2주일 동안 블라이드 의사는 머리를 몇 번이나 흔들었는지 모른다. 칼은 양쪽 폐에 모두 폐렴이 왔다. 그동안 메러디스 씨가 자기 서재 마루를 걸은 것은 단 한 번뿐이었고, 페이스와 우나는 자기들 방에서 서로 붙들고 울었으며, 제리는 엄청 후회하는 마음으로 정신이 나간 듯 칼의 방 앞 복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블라이드 의사와 간호사도 칼 옆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새벽이 붉게 동터올 때까지 죽음과 맞서 용감히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칼은 모두의 응원에 힘입어 위기를 넘기고 회복했다. 이 소식은 글렌 마을 사람들에게 재빨리 전해졌고,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목사와 그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칼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대로 잠을 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메리 밴스도 얼마나 울었는지 그 이상한 눈이 불에 타 담요에 난 구멍처럼 퀭해요. 칼이 폐렴에 걸린 것은 자기 용기를 자랑하려고 그 비 오는 날 밤 묘지를 배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앤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에요. 칼은 자기를 벌주려고 묘지에 있었던 거였어요. 헨리 워런 유령 일로 겁쟁이 노릇을 한 벌로요. 아이들이 스스로를 가르치려고 클럽을 만들었다나 봐요. 그래서 잘못을 하면 스스로 벌을 주었대요. 제리가 그 이야기를 전부 메러디스 목사님에게 털어놓았다고 하더군요.”
“아이고, 가엾은 것들.”
미스 코넬리아가 신음했다.
교회 신도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산더미처럼 목사관으로 날라다 주어 칼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갔다. 노먼 더글러스는 매일 저녁 갓 낳은 달걀 한 꾸러미와 저지종 젖소의 진한 우유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가끔씩 목사관에 한 시간 정도 머무르며 메러디스 씨와 예정설에 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글렌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마차를 몰고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칼이 다시 ‘무지개 골짜기’에 갈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은 칼의 병이 다 나은 것을 기념하려고 축하잔치를 벌였고, 그 자리에 블라이드 의사도 참석해 불꽃놀이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메리 밴스도 거기 왔지만 귀신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미스 코넬리아가 다시는 잊지 못할 만큼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32
두 고집쟁이






로즈마리 웨스트는 ‘잉글사이드’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발길을 ‘무지개 골짜기’에 있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샘 쪽으로 돌렸다. 여름에는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작은 샘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연인의 영혼도 더 이상은 오지 않았으며, 존 메러디스와의 추억은 너무도 고통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골짜기 위쪽에 노먼 더글러스가 베일리 정원의 돌담을 젊은이처럼 가볍게 뛰어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덕 위의 집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만일 노먼에게 들키면 집까지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서 로즈마리는 노먼이 자기를 못 보고 지나치기를 기대하면서 얼른 샘 옆에 있는 단풍나무 숲 그늘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노먼은 로즈마리를 보았다. 아니, 사실은 로즈마리를 뒤쫓아 온 것이었다. 노먼은 로즈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언제나 로즈마리가 자기를 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로즈마리는 노먼 더글러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거칠고, 너무 성질이 급하고, 너무 시끄러워서 곁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옛날에도 엘런이 왜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지 참으로 의아해했다.

노먼 더글러스도 로즈마리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나 그냥 껄껄 웃어넘기고 말았다. 노먼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자기를 싫어하는 내색을 보여도, 같이 싫은 감정을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억지스럽게 칭찬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는 로즈마리가 아주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했으며 자기 역시 로즈마리에게 아주 훌륭하고 너그러운 형부가 되어주고 싶었지만 형부가 되어주려면 먼저 로즈마리와 대화를 해야 했다. 그래서 아까 글렌 가게 앞에서 로즈마리가 ‘잉글사이드’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로즈마리를 뒤쫓아 온 것이었다.
로즈마리는 거의 1년 전 그날 저녁에 존 메러디스가 앉았던 단풍나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조개가 파인 것 같은 작은 샘이 고사리에 둘러싸여 반짝거렸다. 루비처럼 붉은 황혼 빛이 늘어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쳤다. 로즈마리가 앉아 있는 한옆으로는 키가 큰 과꽃이 피어 흔들거렸다. 그 조그만 곳은 요정들과 아주 옛날부터 숲에 살던 나무 요정들이 꿈꾸고, 지켜보고, 숨어 있는 은신처 같았다.
그 매혹적인 세계를 노먼 더글러스가 뛰어들어 한순간에 산산이 흩트려놓았다. 그 사람이 그곳을 집어삼켜버린 듯 제멋에 겨워 사는 붉은 수염의 노먼 더글러스만이 있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했다.
“안녕하세요.” 
로즈마리는 쌀쌀하게 인사하고 일어섰다.
“안녕하시오, 로즈마리. 왜 일어서고 그래요, 앉아요. 다시 앉아요. 난 로즈마리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 왔어요. 세상에나,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그래요? 난 잡아먹지 않아요. 난 저녁밥도 배불리 먹었단 말이오. 앉아요. 우리 좀 친해져 보자고요.”

“여기서도 말씀은 잘 들립니다.”
로즈마리가 말했다.
“귀가 있으니 그렇겠지요. 난 로즈마리가 편안히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해요. 거기 서 있으니 몹시 어색하고 불편해 보여요. 난 여기 앉겠소.”
노먼은 존 메러디스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둘의 앉음새가 어찌나 달라 보이던지 로즈마리는 너무 우스워 웃음이 터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노먼은 모자를 옆에 내려놓고 커다란 붉은 손을 무릎 위로 올린 다음 눈을 반짝이며 로즈마리를 바라보았다.
“로즈마리, 너무 뻣뻣하게 굴지 말아요. 우리 이성적이고 지각 있고 또 친근한 대화를 나누어봅시다.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엘런이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하니 내가 말할 수밖에 없어요.”
노먼은 로즈마리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살갑게 말했다. 그도 그럴 마음만 먹으면 다른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가능했다.
로즈마리는 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샘이 이슬방울처럼 작아져 보였다. 노먼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이 사람을 좀 도와주시오.”
그가 불쑥 말했다.
“제가 뭘 도와드려요?”
로즈마리가 샐쭉하니 물었다.
“벌써 다 알고 있잖아요. 그렇게 비극적인 얼굴만 하고 다니지 말라고요. 그러니 엘런도 말을 못 꺼내는 것 아니에요. 자, 봐요, 로즈마리. 엘런과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말 그대로예요, 알아들었어요? 이해했느냐고요? 하지만 엘런은 로즈마리와 한 약속을 물리지 않는 이상은 결혼하지 않을 수 없다더군요. 약속을 물릴 수 있어요? 그래 줄래요?”
“네, 그럼요.”
로즈마리가 답했다.
노먼이 벌떡 일어나 내키지 않아 하는 로즈마리의 손을 잡았다.
“잘됐어요. 난 로즈마리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내가 엘런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단 한순간에 해결하겠다고 장담했지요. 자, 집으로 돌아가 엘런에게 전해줘요. 2주일 뒤에 결혼하자고. 로즈마리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살아야 해요. 외로운 까치처럼 그 언덕 꼭대기에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로즈마리가 날 미워하는 건 알아요.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재미있을 거요. 삶의 양념이 되어준단 말이오. 엘런은 나를 들들 볶고, 로즈마리는 나를 얼어붙게 할 테니. 이제부터는 지루한지 모르고 살겠군.”
로즈마리는 아무리 권한다 해도 노먼의 집에 함께 살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을 노먼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노먼이 크게 기뻐하며 의기양양하게 글렌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뒤 로즈마리는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왔다. 로즈마리는 킹스포트에서 돌아온 후로 노먼이 거의 밤마다 찾아오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자매는 노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이름을 거론하기를 피한다는 사실이 더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로즈마리는 상대방을 원망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노먼에게 예를 갖추면서도 차갑게 대했고, 엘런을 대하는 태도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엘런은 두 번째 청혼에 결코 편안한 마음일 수 없었다.
로즈마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엘런은 세인트 조지와 함께 뜰에 나와 있었다. 두 자매는 달리아가 피어 있는 정원 보도에서 마주쳤다. 세인트 조지는 둘 사이 자갈이 깔린 보도에 앉아 윤기 나는 검은 꼬리를 하얀 발 주변에 우아하게 걸쳐놓고 있었다. 잘 먹고, 잘 보살핌을 받고, 사랑도 듬뿍 받는 모든 고양이가 그렇듯 아주 무관심한 태도로.
“저 달리아를 봤니? 지금까지 우리 집에 피었던 어떤 달리아보다도 탐스럽구나.”
엘런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로즈마리는 달리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엘런이 좋아하니 내버려둔 것뿐이었다. 로즈마리는 진홍빛과 노랑이 뒤섞인 달리아가 보란 듯이 피어 있는 화단으로 눈길을 주었다.
“저 달리아는 노먼 더글러스 씨를 꼭 닮았어. 노먼의 쌍둥이 같아.”
로즈마리는 그 꽃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엘런의 갈색 얼굴이 붉어졌다. 자기는 그 달리아를 숭배했지만 로즈마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고 지금 한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런은 로즈마리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원망할 수 없었다. 엘런은 그 무엇도 원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로즈마리가 노먼의 이름을 꺼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엘런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아까 골짜기에서 노먼 더글러스 씨를 만났어요. 그사람이 언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내가 허락하기만 하면요.”
로즈마리는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뭐라고 했니?”
엘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의 일 이야기하듯 가장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엘런은 로즈마리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 없어 세인트 조지의 미끈한 검은 등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몹시도 두려웠다. 로즈마리가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럴 수 없다고 답했을 수도 있었다. 취소하겠다고 했더라도 엘런은 과거의 일이 몹시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마음 편히 신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면, 그렇다면 엘런은 노먼 더글러스 없이 사는 법을 다시 한 번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배운 것은 이미 다 잊어버렸고 다시는 배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난 언제라도 둘이 결혼해도 좋다고 했어요.”
로즈마리가 답했다.
“고맙다.”
엘런이 세인트 조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즈마리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나는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로즈마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로즈마리, 난 너무 부끄럽구나. 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내가 너한테 한 말들을 생각하면…….”
엘런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로즈마리가 얼른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너도 이젠 자유야. 너무 늦지 않았어. 존 메러디스…….”
엘런이 말했다.
“엘런 언니! 언니는 분별력을 모두 잃어버린 거예요? 나더러 지금 존 메러디스에게 달려가서 내 마음이 달라졌으니 당신 마음도 바꿔주기 바란다고 사정이라도 하란 거예요? 내가 지금 그러기를 바라는 거예요?”
로즈마리의 상냥한 성품 아래 어딘가 숨겨져 있던 성질이 파란 눈으로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아니. 그렇지만 네가 조금만 그 사람에게 용기를 주면, 그 사람은 돌아올 거야.”
엘런은 로즈마리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그분은 나를 경멸해요. 그리고 그건 정당한 거예요. 이런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마세요, 엘런 언니. 난 언니에게 조금도 나쁜 감정 없어요. 그러니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요. 하지만 내 일에는 상관하지 말아줘요.”
“그럼 나와 함께 살아. 난 너를 이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엘런이 말했다.
“언니는 정말로 내가 노먼 더글러스 씨의 집에 가서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 못 하니?”
엘런이 수치감을 느끼면서도 화가 나서 외쳤다.
로즈마리가 웃기 시작했다.
“언니, 난 언니가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난 네가 왜 안 된다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 그 사람 집은 아주 커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너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지 말아줘요.”
“그렇다면 난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난 널 여기 혼자 둘 수 없다고. 그 점만은 분명해.”
엘런이 단호하게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니다. 난 그 점에서만큼은 마음을 바꿀 수 없어. 제일 가까운 이웃집도 거의 1킬로미터나 밖에 있는 이런 곳에 어떻게 널 혼자 두어. 네가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서 너와 함께 살 거야. 이제 그 문제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자, 됐어.”
“노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로즈마리가 말했다.
“노먼에게는 내가 이야기할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설득할 수 있어. 난 너에게 내가 한 약속을 취소해달라고 할생각이 전혀 없었다. 절대로. 하지만 노먼에게 왜 내가 결혼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넌 이 세상에 오로지 너만이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길 필요 없어. 난 결혼해서 가면서, 널 여기 혼자 내버려둘 생각은 절대로 해보지 않았어. 꿈에라도 말이다. 너도 이제 내가 너만큼 결심이 굳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로즈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엘런은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몸 한 번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 세인트 조지를 내려다보았다.
“세인트 조지, 이 세상은 남자가 없으면 너무 무료한 곳이야. 그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난 차라리 이 세상에 남자가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남자 때문에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지를 좀 봐라, 세인트 조지. 여태까지 우리의 행복했던 생활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 존 메러디스가 먼저 우리 생활을 흔들기 시작하더니 이젠 노먼 더글러스가 달려들어 끝장을 내버렸구나. 그리고 지금은 두 사람 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독일의 카이저라는 내 생각에 유일하게 동의해준 사람이 노먼 더글러스였건만. 그런데 난 그 지각 있는 사람과 결혼할 수가 없어. 내 동생이 고집쟁이고 나는 더 고집쟁이라서. 내 말을 들어봐, 세인트 조지. 메러디스 목사는 로즈마리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돌아올 거야. 그런데 로즈마리는 그러려고 하지 않아, 세인트 조지. 앞으로도 결코 그러지 않을 거야. 새끼손가락을 꼬부리는 일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참견할 용기가 없어, 세인트. 난 부루퉁해 있지는 않을 거야, 조지. 로즈마리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러지 않기로 했지. 노먼이 화를 내겠지만 결국에는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두 결혼 생각 따위는 접고 말겠지. 그래, 그래, ‘절망은 자유인이 할 수 있는 것이고, 희망은 노예가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세인트. 자, 집으로 들어가자, 세인트 조지. 기운 나도록 우유를 주마. 그래야 이 언덕 위의 집에 행복한 존재가 단 하나라도 있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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