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9~10

나단비 | 2024.04.17 15:03:58 댓글: 0 조회: 6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682
9
부엌 소동






프랑스 북부 지방 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블라이드 의사가 걱정하는 말을 했다.
“내년 봄이 되기 전까지는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릴라는 한 발로 아기 요람을 흔들고 입으로는 “네 코는 겉뜨기, 한 코는 안뜨기” 소리를 중얼거렸다. 모건은 아기를 요람에 재우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지만 수잔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수잔을 우쭐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중요한 원칙이 아닌 한 원칙을 살짝 벗어나도 뭐 나쁠 일 있겠는가.
“그렇게 오래 어떻게 견뎌요?”
릴라는 뜨개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다음 다시 뜨던 양말로 돌아갔다. 그 말만으로도 2달 전의 릴라라면 즉시 ‘무지개 골짜기’로 달려가 한바탕 울어야 했을 것이다.
미스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고, 블라이드 부인은 두손을 꼭 붙들었다. 수잔이 얼른 말했다.
“자, 우리 모두 긴장하고 열심히 일을 시작해야 해요. ‘정상 영업 중’이란 말이 영국의 모토라고 하던데요, 사모님. 나도 그 말을 내 모토로 삼겠어요. 지금 우리에게 그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 같네요. 나는 언제나 토요일에 내놓는 푸딩을 만들겠어요. 잔손이 많이 가지만 그게 나아요. 거기에 정신을 쏟다 보면 딴 일은 잊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키치너 경이 열심히 하고 있고, 조프르도 프랑스 사람치고는 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겠어요.
난 젬에게 저 과자 상자도 보내고, 오늘 중으로 양말도 한 켤레 완성할 거예요. 나로서는 하루에 양말 한 짝이 한계예요. 항구 어귀에 사는 앨버트 미드 할머니는 하루에 한 켤레 반을 뜬다지만, 그 사람이야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 노인네는 오랫동안 누워만 지냈어요, 사모님. 자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남에게 폐만 끼치면서 죽지도 못하고 있다고 아주 괴로워했죠. 그런데 지금은 자기 같은 사람도 할 일이 있으니 살아보기로 했다면서 완전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어요. 새벽부터 저녁까지 군인을 위해 뜨개질하고 있대요.
우리 사촌 소피아까지도 뜨개질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모님. 참 다행이에요. 손을 배에다 포개고 있는 대신 부지런히 뜨개바늘을 움직이면 그만큼 불평거리도 덜 생각날 테니 우울한 소리도 덜 하겠죠. 소피아는 다음해 이맘때 우리 모두 독일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를 독일 사람으로 만들려면 1년으로는 안 될 거라고 해줬어요. 릭 매컬리스터도 군대에 갔다는 얘기 들었죠, 사모님? 그리고 조 밀그레이브도 가고 싶어 하지만 군대에 지원하면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미란다를 주지 않을까 봐 못 가고 있대요.”
“심지어는 빌리 앤드루스 씨 아들까지도 간대요. 제인의 외아들도, 다이애나의 잭도요. 프리실라의 아들도 일본에서 떠났고, 스텔라의 아들은 밴쿠버에서 나갔어요. 조 목사의 두 아들도요. 필리파는 자기는 아직 결정도 내리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떠나버렸다’고 썼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젬이 집에 들르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을 보내왔군. 통보가 나온 후 바로 몇 시간 안에 출발해야 한대.”
의사가 편지를 아내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무하는군요. 샘 휴즈 경은 우리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대요? 그 소중한 아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있게 해주지도 않고 유럽으로 보내버리다니요. 내가 의사 선생님이었으면요, 선생님. 이 일을 신문에 투서하겠어요.”
수잔은 분개해서 말했다.
“아마 더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난 다시 한 번 젬이랑 헤어지는 일을 도저히 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처음 젬을 보낼 때와는 달리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아, 제발, 하지만 그만두겠어요. 나도 이런 말은 하지 않겠어요. 수잔이나 릴라처럼 나도 여장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블라이드 부인은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두들 훌륭해요. 나는 우리 집 여자들이 아주 자랑스러워요. 우리 릴라까지도. 나의 ‘들의 백합’ 릴라도 적십자를 활발하게 이끌어 나가고, 캐나다의 어린 생명을 구원해주고 있으니. 아주 훌륭해. 앤의 딸, 릴라, 네 전쟁고아 아기 이름을 어떻게 지을 거니?”
의사가 말했다.
“전 짐 앤더슨 씨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도 자기 아기의 이름은 자기가 지어주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릴라가 말했다.
가을이 깊어가도 짐 앤더슨으로부터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킹스포트를 떠난 후로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내와 아기의 운명이 어찌 되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릴라는 아기에게 제임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결정했고, 수잔은 거기에 키치너를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제임스 키치너 앤더슨은 현재 자기 처지보다 얼마쯤 더 당당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곧 아기 이름을 짐스라고 줄여 불렀으나수잔만은 완강히 ‘아기 키치너’라고 부르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길 거부했다.
“짐스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 아기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에요, 사모님.”
수잔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우리 사촌 소피아의 말로는 이름이 너무 경박스럽대요. 소피아가 평생 딱 한 번 지각 있는 말을 하긴 했지만 난 그 말에 얼른 옳다구나 동의해 소피아를 우쭐하게 만들어주고 싶진 않더군요. 그 아기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야 아기가 좀 아기다워 보여요. 릴라가 아기를 아주 잘 키웠어요. 하지만 그 말도 릴라 앞에서 해서 릴라를 우쭐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요. 사모님, 그 아기가 더러운 플란넬 천에 싸여 커다란 수프 단지에 담긴 채로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을 난 절대로,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수잔 베이커가 경악하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지만, 난 그때 정말로 경악했죠. 정말이에요. 너무 끔찍해서 한순간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했어요. 내가 정신이 나간 것이나 아닌지 했다고요. 하지만 난 누가 수프 단지라는 헛것을 보았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현실이구나 했지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릴라더러 아기를 돌봐야 한다는 소리를 했을 때 난 그분이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릴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믿을 수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셨지요? 릴라가 해냈어요. 우리는 무슨 일이건 해야 한다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하는 일이 없다고요, 사모님.”
수잔은 10월의 어느 날 자기의 의견이 틀림없다는 증거를 또 하나 보탰다. 의사 부부는 외출 중이었고, 릴라는 2층에서 짐스의 낮잠을 재우고 있었다. 쉼 없는 열정으로 네 번 아기를 어르고 한 번은 뜨개질을 하면서.
수잔은 뒤 베란다에 앉아 콩을 까고 있었고, 소피아도 수잔을 거들고 있었다. 글렌 마을에는 평화와 고요가 감돌았고, 하늘에는 은빛의 빛나는 구름이 떼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무지개 골짜기’에는 부드러운 보랏빛 가을 안개가 환상적으로 감돌았고, 단풍나무 숲은 불타오르는 듯 보였으며, 부엌 뒤뜰의 들장미 울타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환상적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 풍경으로 보아서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어서 수잔의 충성심도 잠시 동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잔은 젬을 태운 대함대가 캐나다 육군을 이끌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으로 벌써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터였다. 소피아까지도 그날은 다른 날처럼 우울해하지 않고 오늘 같은 날씨에는 뭔가를 불평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고요함은 분명 폭풍전야로 머지않아 무서운 폭풍이 곧 몰아닥칠 조짐이었다.
“세상이 너무 고요해서 곧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소피아는 말했다.

이 말을 실제로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두 사람 뒤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나는 소리로 부딪치는 소리, 와장창 깨지는 소리, 숨죽인 듯한 외침 소리와 신음소리가 온통 뒤섞여 들려왔다. 수잔과 소피아는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소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드 씨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군. 나는 언제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
수잔이 투덜거렸다.
거실 옆문으로 릴라가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미친 고양이가 하는 짓일 거야. 어쨌든 가까이 가면 안 돼. 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볼 테니까, 어이구! 또 도자기 그릇이 깨지는 소리군. 저 고양이에게는 악마가 들렸다고 내가 전부터 말했거든.”
수잔이 말했다.
“아무래도 저 고양이가 광견병에 걸린 것 같아. 난 전에 고양이가 미쳐서는 사람을 셋이나 물어뜯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물린 사람은 모두 죽었대. 아주 끔찍한 병에 걸려서. 잉크처럼 검게 변해버렸다나.”
소피아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수잔은 태연하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루는 깨진 접시들로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수잔이 조리 도구들을 반짝반짝 닦아 즐비하게 늘어놓은 기다란 선반에서 그 참상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빈 연어 통조림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미친 듯이 날뛰며 온 부엌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녀석은 비명과 성난 고함을 지르며 날뛰었다. 닥치는 대로 깡통을 부딪는가 하면 앞발로 잡아 뽑아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꼴이 어찌나 우스운지 릴라는 배꼽을 움켜잡고 웃어댔다. 그러자 수잔이 나무라는 눈으로 릴라를 보았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일이라고. 저 고양이는 네 엄마가 시집오면서 ‘초록 지붕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파란색 반죽 그릇을 깨버렸다. 이것은 이만저만한 재앙이 아니라고.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이드 씨의 머리에서 저 깡통을 뽑아낼 수 있을까?”
“저 고양이에게 손을 대면 안 돼. 그랬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부엌문을 꼭 닫아버리고, 앨버트를 불러와.”
소피아가 힘차게 외쳤다.
“나는 별것도 아닌 우리 집안 일로 앨버트를 불러오는 버릇은 붙이지 못했어. 그나저나 저 고양이가 괴로워하고 있어 큰일이군. 아무리 저 고양이가 못마땅해도 괴로워하는 꼴은 못 봐주겠어. 넌 키치너 아기를 돌보아야 할 몸이니 저리 가 있어라, 릴라. 내가 방법을 찾아보겠다.”
수잔이 씩씩하게 말했다.
수잔은 부엌으로 들어가 블라이드 의사의 낡은 비옷을 집어 들었다. 용감하게 고양이를 뒤쫓으며 비옷을 몇 번이나 던졌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했다. 여러 차례 실패를 되풀이한 끝에 마침내 비옷을 고양이와 깡통 위에 덮어씌울 수 있었다. 수잔이 깡통 따개로 깡통을 따는 동안 릴라는 몸부림치는 고양이를 비옷에 싸서 꼼짝 못 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동안 박사가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잉글사이드’가 지어진 이래 그런 비명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수잔은 앨버트 크로퍼드가 이 소리를 듣고 자기가 고양이를 학대하고 죽이려 들고 있다고나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박사는 겨우 자유를 찾았지만, 분노에 떨었다. 이 모든 일이 분명 자기를 괴롭히려고 꾸며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박사는 감사는커녕 수잔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다 부엌에서 후닥닥 도망쳐 나가 들장미 울타리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러고는 온종일 부루퉁해서 나오지도 않았다. 수잔은 근엄한 얼굴로 깨진 접시들을 쓸어내었다.
“독일군이라도 저렇게 소동을 부리지는 않겠구먼. 내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저런 악마 같은 짐승을 키우는 사람이야 시집올 때 가져온 그릇을 깨뜨려도 불평은 못 하겠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양이 녀석이 머리를 연어 통조림통에 처박고 부엌을 휘젓고 돌아다닌대서야, 나 원, 참!”
수잔이 침통하게 말했다.




10
릴라의 고민





시월이 갔고, 쓸쓸한 11월과 12월의 음산한 나날도 서서히 지나갔다. 세상은 서로 싸워대느라 시끄럽기만 했다. 벨기에의 앤트워프가 함락되었다. 터키가 선전포고를 했다. 작지만 용감한 나라 세르비아가 압제자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섰다. 전쟁터에서 수만 리 멀리 떨어져 있고, 언덕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 사람들은 나날이 뒤바뀌며 속속 전해지는 전쟁 소식에 희망과 공포가 교차했다.
“두세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글렌 세인트 메리 사람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군사 작전이나 외교 작전이라는 시각으로 생각하고 말을 해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날마다 모두가 똑같이 기다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우편물이 배달되어 오는 것이다. 수잔조차 우편마차가 역과 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다리를 덜커덩거리며 건너올 때부터 신문이 집에 당도해 읽게 되기까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뜨개질감을 꺼내 신문이 올 때까지 정신없이 뜨개질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사모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명치끝이 답답해지면서 머릿속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할 때도 뜨개질만은 할 수 있으니까요. 신문에서 표제를 읽고 나면, 그것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일할 수 있게 돼요. 점심식사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우편물이 오면 참 난감해요. 정부에서도 우편배달을 좀 더 편리한 시간에 해주도록 배려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그렇고, 독일군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 칼레는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카이저도 올해는 런던에서 크리스마스 만찬을 들 수 없겠군요. 있잖아요, 사모님.”
수잔이 목소리를 낮추는 걸 보니 무언가 충격적인 정보를 제공할 모양이었다.
“이건 내가 확실한 계통에서 들은 말인데요, 그렇지 않았다면 목사님에 관한 일인데 누구에게 전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널드 목사가 류머티즘에 잘 듣는다면서 주마다 샬럿타운의 터키탕에 간다는군요. 우리가 터키와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요. 아널드 씨네 교회 집사가 그 사람의 신학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하던데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자, 오늘 오후에는 젬에게 보낼 과자를 싸야겠어요. 젬이 맛있게 먹겠죠. 진흙탕 속에 빠져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말이에요.”
젬은 솔즈버리 평야에서 주둔하고 있으며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있더라도 밝은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레드먼드에서 월터가 릴라에게 보내오는 편지는 밝지 못했다. 릴라는 월터의 편지를 열 때마다 오빠가 군대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썼을까 봐 불안한 마음에 가슴을 죄었다. 월터의 비참한 마음은 릴라도 비참한 기분이 들게 했다. 월터가 곁에 있다면 지난번 ‘무지개 골짜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릴라는 월터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이 미웠다.
“월터 오빠도 갈 거야. 오빠가 가버리면 나는 견딜 수 없어.”
어느 날 오후 ‘무지개 골짜기’에 혼자 앉아 월터에게서 온 편지를 읽던 릴라는 슬픈 듯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겁쟁이의 상징인 흰 깃털을 넣은 편지를 월터에게 보내왔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해도 마땅해, 릴라. 나는 그 깃털을 달고 다녀야 한다고. 모든 레드먼드 학생들에게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해. 우리 학년에서도 입대하는 학생들이 나오고 있어. 날마다 두세 사람씩은 전쟁터로 가고 있어. 어떤 날은 나도 가겠다고 결심해보기도 해. 그러면 여지없이 난 총검으로 사람을 찌르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 누군가의 남편이나 연인을 아니면 아들을, 작은 아이의 아버지일 수도 있겠지. 내 자신이 온통 상처 입고 찢긴 몸으로 들판에 뒹구는 모습도 떠올라.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 괴로워하기도 하고, 추위에 떨기도 하고, 주변에는 온통 죽은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뿐이지. 난 절대로 그런 곳엔 갈 자신이 없어. 그런 생각만도 견딜 수 없어. 내가 어떻게 그 현실을 견딜 수 있겠니? 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되는 날도 있어. 예전에는 사는 것이 행복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끔찍하기만 해.
릴라, 나의 릴라, 네가 보내주는 편지가 없었다면, 그 귀엽고 명랑하고 즐겁고 우습고 익살맞고 나를 믿어주는 네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단념해버렸을 거야. 그리고 우나의 편지도! 우나는 정말 착한 아이야, 그렇지? 수줍음 많고 슬퍼 보이지만 천진난만하면서도 놀랍도록 섬세하고 강인한 면도 있는 것 같아. 너처럼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편지를 쓰는 재주는 없지만. 우나의 편지에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어.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 우나의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나도 전선으로 가도 좋다는 마음마저 들어. 우나가 나더러 전쟁터로 나가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가야 한다고 권유하지도 않았고. 우나가 그런 말을 할 리도 없지. 편지에 담긴 건 아마도 그 애의 정신일 거야. 그 애의 성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래, 나는 갈 수 없어. 너는 겁쟁이 오빠를 두었고, 우나는 겁쟁이 친구를 둔 거야.

‘아, 오빠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내 마음이 아파. 오빠는 겁쟁이가 아닌데. 겁쟁이가 아니라고. 그렇지 않아.’
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릴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초록빛 골짜기며 그 맞은편에 잿빛으로 펼쳐진 쓸쓸해 보이는 휴경지 어디를 보나 월터 생각이 났다. 시냇물이 구부러져 돌아가는 곳에 핀 들장미에는 아직 빨간 꽃 이파리가 개울 위로 너울거렸고, 나무줄기에는 조금 전에 내린 보슬비 방울이 진주알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언젠가 월터가 시로 쓴 적이 있었다. 바람은 시들어 갈색이 된 양치류 사이에서 한숨 쉬고 바스락거리다가는 시냇물 쪽으로 구슬프게 사라져갔다. 월터는 11월의 구슬픈 바람이 무척 좋다고 했다. 정다운 ‘연인 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껴안은 듯 휘감겨 있고, 이제 커다란 자작나무가 된 ‘하얀 숙녀’는 벨벳 같은 잿빛 하늘을 등지고 기품 있게 우뚝 서 있었다. 이런 이름들도 모두 월터가 오래전에 붙여준 것들이었다. 지난 11월, 월터는 릴라와 미스 올리버와 함께 골짜기를 걸으면서 이파리를 다 떨어뜨린 ‘하얀 숙녀’ 위로 은빛 초승달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하얀 자작나무는 아름다운 이교도 아가씨 같아요.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에덴의 신비를 간직한.”

“그걸 시로 써봐, 월터.”
그 말을 듣고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월터는 다음 날 정말로 시를 써서 들려주었다. 아주 짧은 시로 구절구절 도깨비 같은 상상력이 넘쳤다. 그 시절에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릴라는 서둘러 일어섰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짐스가 이제 곧 잠에서 깰 것이다. 짐스 점심을 먹여야 하고, 짐스의 조그만 턱받이도 다려야 했다. 오늘 밤은 적십자 소녀단 위원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지금 뜨고 있는 가방도 완성해야 한다. 소녀단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예쁜 가방이 될 것이다. 아이린 하워드의 가방보다도 예쁠 것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한다. 요즘 릴라는 아침부터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짐스를 돌보느라 빼앗기는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짐스는 잘 자라고 있었다. 정말로 부쩍 자랐다. 예쁜 아기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터무니없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릴라는 짐스가 무척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고 궁둥이를 찰싹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짐스에게 뽀뽀를 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아늑한 거실에서 블라이드 부인과 수잔, 그리고 미스 올리버는 바쁘게 바느질이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독일군이 오늘 로즈를 점령했다는군요. 이 전쟁으로 제 지리 지식이 늘어났어요. 학교 선생님이라지만 석 달 전만 해도 저는 로즈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로즈라는 지명을 들어도 아무것도 몰랐을 테고 알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로즈에 관한 무엇이든 다 알고 있어요. 그 면적, 국제사회에서의 위치, 군사적인 중요성. 어제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두 번째로 공략하다 로즈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절망에 빠져버렸어요. 밤에도 잠에서 깨어 그 일로 걱정했지요. 아기는 밤에 깨면 언제나 울죠. 밤중에는 모든 것이 마음을 짓누르고 구름 뒤에 해가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도 없어요.”
“나는 밤중에 잠이 깨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카이저를 죽을 때까지 고문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어젯밤에는 그놈을 끓는 기름에 넣고 튀겨버렸네요. 벨기에의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살해당해 고아가 된 아이들이며 굶어 죽은 아기들을 생각하면서요. 그랬더니 속이 후련하더군요.”
뜨개질하면서 책까지 읽고 있던 수잔이 말했다.
“만일 카이저가 여기 있어 어깨가 아프다는 말이라도 하면 수잔이 제일 먼저 달려가 연고를 발라줬을 텐데요, 뭘.”
미스 올리버가 놀렸다.
“내가요? 아니, 내가요, 미스 올리버? 뜨거운 기름을 발라주었겠죠, 미스 올리버. 물집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었을 거라고요. 내 분명 그러지요. 그놈 어깨에 약을 발라주다니, 내 참!”
수잔이 몹시 분개하며 외쳤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잖아요, 수잔.”
블라이드 의사가 진지하게 타일렀다.
“그래요, 우리의 적은요. 하지만 조지 왕의 원수는 아니죠, 선생님.”

수잔은 블라이드 의사에게 멋진 일격을 가하고, 너무 기뻐 안경을 닦으며 미소마저 떠올렸다. 수잔은 지금까지 안경을 쓰지 않고 살았지만 요즘 전쟁 소식을 읽으려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덕에 특별한 소식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미스 올리버, Mlawa, Bzura, 그리고 Przemysl12)는 어떻게 발음하는 건가요?”
“맨 끝의 지명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예요, 수잔. 그 나머지도 짐작하는 정도지요.”
“그런 외국 지명은 정말이지 해괴망측해요. 내 생각으로는요.”
수잔이 투덜거렸다.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쪽에서도 서스캐처원이며 머스쿼도보이트 같은 캐나다 지명이 그 못지않게 해괴망측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수잔. 요즘 세르비아군의 활약이 눈부시더군요. 벨그라드를 점령했대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오스트리아 놈들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쫓아버렸지요.”
수잔은 유쾌한 듯이 맞장구치고 동유럽 지도를 살펴보며 뜨개바늘로 지명을 하나하나 찔러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조금 전에 소피아가 세르비아는 끝장났다는 말을 해서 내가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신의 섭리라고 말해주었지요. 그 말은 누구라도 못 믿는다고는 못 하겠지요. 여기 살육이 너무 끔찍하다고 나와 있군요.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다 외국 사람들이라고 해도 너무 많은 남자들이 죽어가요, 사모님. 안 그래도 남자가 부족한데 말이에요.”
릴라는 2층에서 일기를 쓰며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번 주는 수잔 아줌마의 말처럼 내게는 참으로 혹독한 한 주였다. 내 탓도 반은 되었지만 전혀 내 탓이 아니기도 했다. 내 탓이건 아니건 난 몹시 비참했다.
며칠 전에 겨울 모자를 사러 시내에 갔었다. 나와 같이 가서 모자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이 없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마침내 엄마도 더 이상은 나를 어린아이로 여기지 않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마음에 드는 모자를 발견했다. 그야말로 멋진 모자였다. 꼭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멋진 초록색 벨벳 모자. 내 머리 색깔과 피부에도 너무 잘 어울린다. 내 적갈색 머리 색깔을 돋보이게 만들고, 올리버 선생님이 곧잘 말하는 내 크림빛 피부에도 잘 어울렸다. 난 지금까지 정확히 이런 초록색 모자를 가져본 적이 딱 한 번밖에 없다. 열두 살 때였는데 그 초록색 비버 모자를 학교에 쓰고 가면 모든 여자아이들이 부러움의 눈길을 던졌다. 그래서 이 모자를 보는 순간 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버렸다. 값이 굉장히 비쌌다.
내 후손들이 보고 모자에 그렇게 많은 돈을 썼다고 생각한다면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모자 값이 얼마인지는 일기에 적지 않겠다. 더군다나 전쟁 중이라 모든 사람이 절약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절약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에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그 모자를 써보았을 때 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모자는 내게 무척 잘 어울렸지만 교회에 쓰고 가기에는 어쩐지 좀 너무 치장을 한 듯 요란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 글렌처럼 조용한 마을에서는 너무 눈에 띌 것 같았다. 모자 가게에서는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내 작고 하얀 방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더군다나 그 어마어마한 값이라니! 벨기에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데!
엄마는 모자와 가격표를 보더니 그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렇게 사람을 바라보는데 아주 선수다. 아빠 말로는 옛날 에이번리 학교 시절에도 엄마가 그렇게 아빠를 쏘아보는 바람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난 그 말이 상상이 간다. 또한 엄마와 아빠가 서로 막 알게 되었을 때 엄마가 석판으로 아빠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들었다. 엄마도 어렸을 때는 꽤 말괄량이였던 것 같다. 젬 오빠가 전쟁터로 떠날 때도 엄마는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 자, 이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 초록색 새 모자 이야기 말이다. 엄마는 드디어 내게 말을 했다. 아주 조용히.
“릴라, 모자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특히나 세상이 이렇게 궁핍한 때에 말이다.”
“내 용돈으로 샀어요, 엄마.”
내가 소리쳤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네 용돈은 네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서 알맞게 정한 금액이야. 한 가지에 돈을 다 써버리면 다른 일에 쓸 수가 없지 않니.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 그런데도 네가 저지른 잘못을 모르겠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문제는 네 양심에 맡기겠어.”
“이 문제를 내 양심에만 맡겨두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요, 엄마? 그 모자를 돌려줄 수도 없잖아요. 난 이 모자를 시내 음악회에 갈 때 쓸 거예요. 난 이 모자가 필요해요.”
나는 무척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렇게 소리를 치면서 화를 냈다. 아주 차갑고, 고요하고, 무섭게 화를 냈다. 그리고 아주 거만하게 한 마디 더했다.
“엄마가 내 모자를 못마땅해하시니 정말 유감이에요.”

“난 그 모자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 모자 가격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난 네가 그런 모자를 좋아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말했다.
난 도중에서 말허리를 잘려서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아까보다 더 화가 나서 차갑고 무서운 말투로 마치 엄마 말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외쳤다.
“그래도 이제는 이 모자를 쓰지 않을 수 없어요. 그렇지만 앞으로 3년 동안은 내가 모자를 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전쟁이 그보다 더 오래 간다면 전쟁이 계속되는 한 모자를 사지 않겠어요. 아무리 엄마라도.”
그 ‘엄마라도’ 하는 말투에 내가 얼마나 강력한 비난의 어조를 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이나 다른 모자를 사지 않으면 모자에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넌 3년이 되기도 전에 이 모자에 싫증을 내게 될 거다, 릴라.”
엄마는 너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조롱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미소였다.
“싫증이 나건 안 나건 그때까지 쓰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씩씩대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엄마에게 비꼬고 대드는 태도를 보이다니 후회하며 울었다. 나는 벌써 그 모자가 싫어졌다. 그러나 3년 동안, 아니 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고 말했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난 그 모자를 쓸 것이다. 내가 맹세한 이상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지킬 것이다.
이 일이 내가 당한 끔찍한 일 중 하나다. 다른 일은 아이린 하워드와 싸운 일이었다. 아니, 아이린이 내게 싸움을 걸어왔다. 아니, 우리 둘 다 싸움을 걸었다. 어제 우리 집에서 적십자 소녀단 모임이 있었다. 2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는데, 아이린은 글렌 윗마을에서 오는 마차편이 있어 일찍 왔다면서 1시 30분에 왔다. 아이린은 그 식사 문제로 논쟁이 있은 다음부터 나한테 그리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자기가 단장이 되지 못해 더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우리 일을 원만하게 진행시키려고 그런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어제 아이린이 왔을 때도 상냥하게 대해주어서 난 아이린이 그만 섭섭한 마음을 접고 다시 예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린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내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 아이린이 내가 새로 뜬 가방에 눈길을 던졌다. 모두들 아이린이 질투가 아주 심하다고 말하지만 난 전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믿는다.
아이린이 처음으로 한 일은 짐스에게 덤벼든 것이었다. 아이린은 아기를 예뻐하는 것처럼 짐스를 요람에서 안아 들고 아기 얼굴에 온통 입을 맞추었다. 짐스에게 그렇게 입을 맞추어대는 것을 내가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한 짓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위생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아이린은 짐스가 칭얼댈 때까지 아기를 귀찮게 했다. 그러자 아이린은 아주 기분 나쁜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면서 아주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 릴라, 넌 내가 아기를 독살이라도 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구나.”
“오, 아니야, 아이린.”
난 말 한 마디 한 마디 아주 상냥하게 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있잖니, 모건은 아기에게 뽀뽀해도 좋은 곳은 이마뿐이라고 했단다. 세균에 감염될까 봐 그런 거지. 나도 짐스를 돌보며 그걸 꼭 지켜.”
“어머나, 얘. 넌 나를 세균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거니?”

아이린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아이린이 날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화가 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 아이린과 싸우지 않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린은 짐스를 들어 올려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모건은 아기 흔드는 일을 절대 금하도록 했고 나도 그것만은 엄격하게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짐스를 흔들어댔고 아기는 그것을 몹시 좋아했다. 짐스는 웃기까지 했다. 짐스가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기는 지금 4개월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엄마나 수잔이 아기를 웃게 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그런데 짐스가 웃고 있었다. 아이린 하워드가 웃게 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나저나 아기는 웃으니까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볼에 아주 귀여운 보조개가 나타났고 커다란 갈색 눈이 다 웃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보조개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린의 모습도 바보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린은 자기가 그 보조개가 생기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바느질만 할 뿐 같이 좋아해주지 않았다. 아이린도 곧 짐스를 흔들고 까부는 일에 싫증을 내고 아이를 요람에 다시 내려놓았다. 아기는 더 놀아달라며 울기 시작했고, 그날 오후 내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만일 아이린이 아기를 건드려놓지만 않았더라면 짐스는 전혀 소란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린이 짐스를 보며 “이 아기는 늘 이렇게 우니?” 하고 물었다. 마치 지금까지 아기가 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아기의 폐가 발육하려면 하루에 몇 분씩 울어야 한대. 《모건의 육아 책》에 그렇게 나와 있어. 그래서 나는 짐스가 울지 않으면 일부러 적어도 20분은 꼭 울게 만든단다.”
“어머나, 그래!”
아이린은 내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비웃었다.

《모건의 육아 책》은 2층에 있었다. 여기 있기만 했다면 아이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을 텐데. 아이린은 곧 또 짐스의 머리카락이 별로 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었다. 4개월이나 된 아기가 그렇게 머리가 없는 건 처음 봤다나.
물론 나도 짐스 머리칼이 아직 많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그게 꼭 내 탓이라는 투로 그 말을 했다. 나는 짐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머리칼이 늦게 나는 아기도 많다고 응수해주었다. 아이린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난 그 말로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 한 시간 동안 아이린은 계속해서 날 그런 식으로 빈정댔다. 아이린이 뭔가 앙심을 품은 일이 있으면 이렇게 사람을 열 받게 한다는 말을 전부터 들었지만 전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아이린은 완벽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린이 정말로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누르고 온 힘을 다해 벨기에 아이들을 위해 잠옷 바느질을 했다.
그러자 드디어 아이린이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면서 아주 심술궂게 월터 오빠를 경멸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쓰지 않겠다. 도저히 쓸 수 없다. 아이린은 자기도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론 몹시 화가 났느니 어쩌니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그런 것을 내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린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 말을 한 것이다.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아이린 하워드, 넌 어쩌면 나한테 우리 오빠 욕하는 얘기를 할 수 있지? 난 도저히 널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네 오빠는 군대에 가지도 않았잖아. 갈 생각조차 없을걸.”
“아니, 왜 그러니, 릴라.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조지 버어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서 난 그 부인에게…….”
아이린은 말했다.
“난 네가 조지 버어 부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 다시는 나한테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마, 아이린 하워드.”
물론 난 그렇게까지 말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저절로 튀어나와 버렸다. 마침 그때 다른 단원들이 도착해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인 역할을 해야만 했다. 아이린은 오후 내내 올리브 커크와 짝이 되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돌아갔다. 아이린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난 우리 월터 오빠의 거짓된 말을 옮기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내내 그 문제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린과는 언제나 좋은 친구로 지냈고 최근까지도 아이린은 내게 아주 상냥했다. 하지만 이제 또다시 환상 하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이 세상에 진정한 우정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는 오늘 조 미드 할아버지에게 화물 창고 구석에다 먼데이의 집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날씨가 추워지면 먼데이가 집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먼데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 세상 어떤 일로도 먼데이를 단 몇 분이라도 그 창고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먼데이는 그 창고에 머물며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나가 마중했다. 그래서 우리는 먼데이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개집을 지어주면 먼데이가 들어가 누울 수도 있고 거기서 승강장도 내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먼데이는 유명해졌다. 시내에서 <엔터프라이즈> 신문 기자가 나와 먼데이 사진을 찍고 충성스럽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먼데이에 관한 기사를 썼다. 기사는 <엔터프라이즈>에 실려 캐나다 전역으로 퍼졌다. 하지만 먼데이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젬 오빠는 가버렸다. 먼데이는 젬 오빠가 어디 갔는지, 왜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난 그런 먼데이를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일지 몰라도 먼데이가 기다리는 것을 보면 젬 오빠가 돌아올 것 같기 때문이다. 돌아오지도 않을 사람을 왜 그렇게 기다리고 있겠는가.
짐스는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코를 고는 이유는 편도선염에 걸려서가 아니라 단순히 감기에 걸려서일 것이다. 어제 아이린은 감기에 걸려 있었다. 분명 아이린이 짐스에게 뽀뽀를 해서 감기를 옮긴 거다. 짐스는 이제 전처럼 날 힘들게 하지 않는다. 등뼈가 꼿꼿해졌는지 앉아 있기도 꽤 잘하고, 이제는 목욕을 시켜도 물이 좋은지 몸을 뒤틀며 악쓰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물을 찰싹찰싹 때리며 논다. 그 첫 두 달 동안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까마득하다. 하지만 나와 짐스는 여기 이렇게 있다. 우리 둘 다 잘해내고 있다. 오늘 밤에는 짐스 옷을 갈아입히면서 조금 간지럼을 태워보았다. 나는 짐스를 들어 올려 흔들어댈 생각은 없지만 모건도 간지럼 태우는 일에는 특별히 나쁘단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처럼 나도 짐스를 웃게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보조개가 생기게 만들 수 있는지도. 짐스의 엄마가 그 보조개를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오늘 양말을 여섯 켤레째 완성했다. 처음 세 켤레까지는 수잔 아줌마에게 뒤꿈치를 완성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하는 건 내 의무를 회피하는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마무리하는 법도 배워서 내 손으로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뒤꿈치 완성하는 일은 정말 싫다. 그러나 지난 8월 4일 이후로 난 싫은 일을 하도 많이 하고 있어서 싫은 일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해서 뭐 대수로울 것도 없다. 젬 오빠가 솔즈베리 평야의 진흙 바다에 관해 한 농담을 생각하면서 난 오늘도 진격한다.
12. 므와바(Mlawa), 브주라(Bzura), 프세미스우(Przemysl): 모두 폴란드 도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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