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 1장 01 위험하게 살아라

Careme | 2024.06.16 14:19:32 댓글: 1 조회: 148 추천: 0
분류교양서적 https://life.moyiza.kr/fiction/4577153
1장 마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 니체의 인생 설명서 


01

위험하게
 살아라

• 신의 죽음 •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왜냐하면 강물에 발을 담근 사람에게 다른 강물이,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흐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하나의 원리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한다고 보았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소용돌이처럼 격변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는 세상의 변화 속도를 감당하고 적응하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를 멈춘 삶은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40여 년을 살아왔을 때 변화로부터 갑자기 위기를 느낀다면 삶은 허무와 낙망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저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있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니체의 후기 사상에서 핵심 주제인 ‘신의 죽음’은 《즐거운 학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은 총 383개의 아포리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잠언 125 <광인>에서 신의 죽음을 알리는 등불 든 광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밝은 대낮인데 환한 등불을 든 어떤 광인이 광장에서 신을 찾는다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신을 찾는 그 광인을 비웃었다. 광인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며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다. 광인은 다시 한 번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신의 살해자라는 것이다.

‘니체는 왜 광장의 사람들 앞에 광인을 등장시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것일까?’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신을 인간이 어떻게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니체가 죽었다고 말한 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견디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럽인의 삶에 신은 절대적 의미였다. 니체가 살던 19세기 유럽에도 기독교 사상이 모든 이념과 가치의 기준일 만큼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따라 삶을 평가했다. 그런데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던 신이 더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신을 광인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했던 신과의 결별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기에서 ‘신’은 기독교의 신을 의미하지만, 니체는 단순히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는 것만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 사람들의 전통적 토대였던 모든 철학, 종교, 도덕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 죽음을 선언했다.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서양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로 나누었다.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의 세계로 참된 세계이다. 반면에 현실 세계는 생성, 변화, 소멸을 하는 세계로 시시때때로 변하는 가상 세계이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역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죽어서 영원한 구원을 통해 가야 할 천국이라는 ‘저 세계’로 나누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 즉 참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폄하한다. 결과적으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는 참된 세계이자 신의 세계였던 ‘저 세계’를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세계이다.
 
 
익숙함과 결별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라

오늘날 우리는 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 같은 물질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의 자리를 물질 만능주의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의 죽음’은 40여 년을 살아온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

대부분 20대와 30대에는 대학을 졸업하느라,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펙을 쌓느라, 사랑 타령을 하느라, 인간관계를 유지하느라 불안정한 삶을 산다. 마흔이 넘어야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한다. 그런데 안정적인 삶을 추구할수록 새로운 삶이라는 기회를 쉽게 단념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두려움도 많아졌고 용기도 부족하다.

‘당신은 원하던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인생의 중반기에 다시 한 번 치열하게 살 자신이 있는가?’

‘마음속에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 있는가?’

‘예전에 좌절된 꿈이 아직도 자신을 옭아매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한 번 가슴 뛰는 삶,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은가?’

이러한 질문에 니체의 대답은 한결같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이제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익숙한 것들이란 자신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믿어 온 것들이다. 삶의 토대였던 것들을 쉽게 버리기는 힘들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듯이 과거의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계기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를 의미한다. 계기는 다른 말로 터닝 포인트, 즉 전환점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그 지점에 서는 날이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다. 터닝 포인트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 발생한다. 또한 터닝 포인트는 누군가가 나 대신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리에게 반쯤 쓰인 새로운 서판을 완성할 의무를 부과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두 개의 서판을 주변에 둔 채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하나는 낡고 부서진 서판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게 반쯤 쓰인 서판이다. 전자에는 “신은 죽었다”라고 적혀 있고, 후자에는 “삶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어라”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과거와 결별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서는 낡은 서판을 파괴하고 새로운 서판을 완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쯤 쓰인 새로운 서판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차라투스트라는 서판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먼저 ‘창조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나로 산다는 것은 창조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창조자가 될 수 있을까? 기존의 가치 목록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 목록을 작성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낯선 세계로 나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왔던 것들이 흔들릴 때 진정한 나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마흔이라면, 또는 마흔을 앞두었거나 되돌아보고 있다면 남은 인생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현실적인 조건과 상황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사람들 대부분은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한다. 또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때면 한편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싶다는 저항감이 들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도시를 화산 위에 세우고, 미지의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위험한 삶을 선택하라”라고 말한다. 용기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이다. 삶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쉽게 외면하지 마라. 그럴 때일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라. 판에 박힌 낡은 삶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 보라. 진정으로 변화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때로는 목숨보다 더 사랑했고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맹세했던 것까지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에 포기했던 꿈과 열망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꿈꾸었던 야망이

다시 꿈틀대거나 다른 야망으로 표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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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로시카 (♡.25.♡.1) - 2024/06/19 07:54:35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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