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집 歸天

네로 | 2003.02.28 18:02:03 댓글: 0 조회: 247 추천: 1
분류일반 https://life.moyiza.kr/mywriting/1561334
어제 인사동에 식사약속이 있어서 "千江에 비친 달"이라는 옛스러운 이름을 가진 음식점에 들렸다. 몇번 들렸던 곳인데 역시 인사동의 여느 음식점처럼 옛날분위기를 내느라고 고심꽤나 한 집이였다. 유리창대신 창호지, 벽시렁에 놓여있는 이름모를 옛놋쇠용구들... 한문이 빼곡이 적혀있는 도배지...

나름대로 옛모습을 흉내냈지만 붉은 황토로 지은것으로 보이는 벽은 사실 흙에다 물감과 본드를 섞어서 얇게 바른것이요, 붓으로 쓴 고풍스러운 옛종이 역시 인쇄기에서 줄줄이 뽑아낸것임을 생각할때 썩 개운치는 않다.

어쨋거나 좀 있으니 큼지막한 파전이 올라오고 서로 나무국자로 솔잎동동주를 잔에 따르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시간도 어지간히 흐르고 식사까지 마친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같이 간 형이 좋은곳이 있으니 한번 가잔다.

우리가 간곳은 歸天 이라고 하는 찻집이였다.
이미 작고한 천상병시인이 무려 10여년간 식사를 전혀 하지 않고 바로 여기 歸天에서 막걸리만 드시고 지냈다고 한다. 천상병시인에 대해서 아는바는 전혀 없지만 막걸리만 드시고 살았다는 시인의 기행(奇行)에 대해 호기심이 가기도 하고 얼마나 멋진곳일가하는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달마가 그려진 초롱에 歸天이라고 적혀져있는 골목에 들어서서 문을 뚝 떼고 현관에 들어섰다. 작은 걸상에 앉아있는 몇명 손님들이 눈에 띄였다. 손님이 많아서 현관에서 대기중인가부다라고 생각하면서 내부를 들여다보려고 하는순간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른바 내부가 없었다. 내가 서있는곳이 현관이 아니라 찻집이였고 작은 나무판자에 앉아있는 손님들은 대기하는 손님이 아니라 차를 마시고있는 고객들이였던것이다!

거의 길가의 구두수선소를 방불케 하는 규모에 이른바 걸상이라는것도 의자가 아닌 기다란 나무토막에 가까운것으로써 두명이 앉으면 2인용이 되고 4명이 앉으면 4인용이 되는 그런것이였다. 건축현장에서 나오는 페자재로 만든것으로 추정되는 탁자에는 톱과 도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손때에 닳아 반질반질해서 거칠다는 느낌은 별로 주지 않았다.

옆자리에서는 한쌍의 커플이 나무궤짝위에 차잔을 올려놓은째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자리에 자리하고 앉자 주인아주머니가 메뉴가 적힌 부채를 건넨다.  유자차 4000원,생강차 4000원,모과차 4000원 차값은 균일가로 4000원씩이였다. 외국손님들도 자주 들린다는것을 과시하듯 뒤에는 영어로 메뉴가 표기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목을 끄는것은 제일 밑에 딸랑 위치하고있는 [커피 3500원]이였다.  유독 커피를 500원 싸게 받는 저의는?

여기에선 평소에 촌스러워보이던 생강차나 대추차가 당당한 주메뉴인 반면에 문명의 대명사격인 커피는 싸구려음료로 변질해버리고말았다. 그런데 이걸 보고 가슴한켠에서 묘한 쾌감이 이는것은 무엇때문인지?

좀 있으니 우리가 주문한 매실차며 유자차,생강차,모과차가 나왔다. 나는 모과차가 마셔보고싶어서 그걸로 선택했다. 순간  3년전인가 겪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웃음을 참을수가 없었다. 하루는 과일가게를 지나가다가 모과를 파는것을 발견했다. 새노랗게 익은 과일에서는 농익은 향기가 뿜겨져나왔고 나는 그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두개를 사서 집으로 들고왔다. 늘 그러듯이 과일을 껍질째로 깨문 나는 그만 입안에 들은것을 깨끗하게 뱉어내야만 했다. 나무토막같이 딱딱하고 떫은데다가 이상한 그맛...

"에익! 간상배같으니라고, 익지도 않은걸 팔다니..." 과일장수를 원망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모과는 먹는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는 방향제로 씌인다나? 하지만 모과를 처음 본 내가 그당시에는 알리 만무했고...

떫은 모과맛과는 달리 모과차는 달큰하고 향이 좋았다. 그뿐아니라 옆에 사람들이 들고있는 생강차나 매실차도 아주 맛있어보였다. (이거 골고루 맛보고싶은데...)

호기심에 차서 큼직한 차잔이며 잠자리가 그려져있는 투박한 수제 컵받침같은것을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나는 재미있는것을 발견했다. 스테인레스로 만든 티스푼의 끝이 곱게 닳아있었다. 이정도로 티스푼이 닳을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이 스푼으로 차를 휘저었을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집의 벽에는 누가 그렸는지 잘 모를 난해한 그림들이 액자에 담긴째 여기저기 걸려져있었고 한쪽 벽은 선반으로 되여있는데 커버가 누렇게 뜬 LP(전축레코드판)와 "월간문학"따위 옛날 서적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빼곡히 꽂혀져있었다. 아마 수십년동안은 그대로 놓인째 정리를 한적이 없는듯이 보였지만 "다치지 마시오"라는 종이쪽지가 여러개 달려있는것을 보면 그리 고요하게 있지는 못한 모양이였다.

천상병시인이 여기에서 막걸리로 세월을 보냈다는데 메뉴에는 왜 막걸리가 없는지? 저 벽에 걸려있는 그림은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아보기조차 힘든지? 이러쿵저러쿵 잡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밤도 어지간히 깊어져서 우리는 귀가길에 올랐다.

길가에 줄느런히 늘여져있는 공예품가게와 이른바 전통을 테마로 한 음식점들을 지나치면서 생각나는게 있는데 이른바 전통이라는것은 이렇게 놋그릇이나 양반탈따위를 집안에 잔뜩 진렬해놓는다고 생기는것이 아니라 우리곁에 볼품없어보이는것들이라도 꾸준히 지켜주고 어루만져주기만 하면 스스로 만들어지는것이 아닌가 싶다. 화려한 옛 궁궐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전통을 귀천의 닳은 스푼과 쪽걸상에서 봤으니말이다.

PS: 귀천에서 마셨던 전통차들, 제일 위로부터 시계바늘 방향으로 유자차,생강차,모과차,매실차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차집의 주인아주머니가 바로 고 천상병시인의 부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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