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전 10

나단비 | 2024.03.17 09:46:00 댓글: 5 조회: 342 추천: 3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4460
화랑전 10
화랑은 쭈뼛거리면서 이연의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편한데 앉아."
"아. 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내적 비명을 지르던 화랑은 이연의 취향이 다분히 담긴 방안을 둘러보다가 어색하게 의자에 앉았다. 뭐가 이렇게 빠르지. 그의 수상한 고백을 듣고 서연과 상담한 지 딱 일주일만이었다.
오후. 낮이 짧아지면서 노을빛이 학교 건물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로 화랑은 속이 시끄러웠다. 이연은 어쩐지 한동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분명 아쉬운 쪽은 그쪽이어야 맞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던 사람이었다. 서연과 식사하면서 이상형에 대해 말하다 보니 우연히 이연이 그녀의 이상형에 들어맞는다는 걸 알게 된게 다였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자꾸 생각이 그에게 흘러갔다. 오가다 마주치면 인사라도 할 법 한데, 이연은 못 본척 스쳐지나갔다.
차라리 잘됐다 싶어 화랑은 그의 연락처를 지울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대로 두었다. 굳이 삭제하는 것도 의식하는 행동 같았다.
[수업 끝나고 잠깐 얼굴 보자.]
그러다 문득. 통보식의 문자를 받고도 쪼르르 나와서 기다리는 자기가 웃겼다.
바쁘게 움직이는 학생들 사이로 걸어오는 이연이 보였다. 화랑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안녕."
가까이 다가온 이연이 인사를 건넸다. 어딘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네. 안녕하세요."
"밥 먹으면서 이야기 해."
"네."
그전과 다르게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시선을 거두며 이연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걷는 화랑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생각은 해봤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이연은 밑도끝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이요?"
답을 하고 나서야 화랑은 이연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만나보자. 우리."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선배. 저 좋아하세요?"
"그러게. 나도 궁금해."
"네? 그게 무슨."
"좋아해. 좋아한 것 같아."
"좋아한 것 같다고요?"
"그래. 아니, 좋아해."
화랑은 그의 말이 맥락상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도 아니고 '좋아한 것 같아.'라니. 왜 여기서 과거형을 쓰는 거지. 국어가 좀 딸리는......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어쨌거나 고백을 한 거 같은데 뭐라고 답해야 하지.
"시간 많이 준 것 같은데. 아직이야?"
"네? 아니요. 좋아요. 만나봐요. 우리."
이연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래. 우리 잘해보자."
"아. 네. 잘해봐요."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두 사람은 서로 딴청을 피웠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화랑은 원래 연애를 이렇게 시작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집게로 샐러드를 접시에 집어 온 화랑은 포크를 들어서 치커리를 콕 찍었다. 왠지 모르게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드니 이연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는 안 드세요?"
"아. 선배라고 하지 말고."
"그럼 뭐라고 불러요?"
"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반말해도 좋고."
"그건 좀. 천천히 할게요."
"응. 너 편한 대로 해."
이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쭉 표정이 굳어있던 그가 웃어서 그런가. 화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재빨리 고개를 숙인 화랑은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뭘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벌써 소화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소화도 시킬겸 산책이나 할까?"
무슨 정신에 나섰는지도 모를 가게 앞에서 화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은 사소한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졌다. 마치 그녀에게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다 멈춰 선 곳은 그녀가 사는 동네의 어떤 빌라 앞. 바로 이연의 자취방이다.
"잠깐 올라갔다가 갈래?"
"아. 그게...... 네."
거절해야 하는데, 이연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안된다는 말이 안 나왔다. 처음 보는 온화한 미소였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화랑은 홀린 듯이 끄덕였다.
낯선 향기가 은은히 감도는 그의 방에 들어선 순간 화랑의 심장은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왜 긴장되지 화랑의 머릿속에 빠르게 여러 상황들이 스쳤다. 설마. 아닐거야. 만나보기로 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고.
이연은 주방 쪽으로 가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음료수 마실래?"
"네? 네."
바보같이 반응해버린 자신을 타박하며 화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잠시후 이연이 들고 온 음료수는 그녀가 좋아하는 복숭아 음료수였다.
"네가 이걸 좋아한다고 들었어."
"아. 서연이가 이런 것도 말했어요?"
"내가 물어봤어. 네가 뭘 좋아하는지 전부 알려달라고."
"아......."
캔 뚜껑에 손을 가져다 대던 화랑의 손가락이 멈칫 했다. 이연이 그녀의 손에서 캔을 가져가더니 캔 뚜껑을 따서 다시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단 말 안 해도 돼."
"네."
화랑은 건네받은 캔음료를 조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정적이 흘렀다. 드문드문 말을 잘 걸어오던 이연도 어쩐지 조용했다. 캔을 들어서 또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화랑이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저기......."
정적을 깨고 들어온 이연의 목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이연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왜 가까이 다가오는 거지. 화랑이 움찔했다. 이연은 거침없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손이 그녀의 뺨을 살짝 스쳤다. 살짝 스친 뺨이 훅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거."
이연은 아무렇지 않게 화랑의 머리카락에서 떼어낸 것을 보여주었다.
"뭐가 묻었길래."
"아...... 네. 감사해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
"네. 죄송해요."
"뭐야. 편하게 해. 너 내가 무서워?"
"그건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불편하다 씌여있는데."
머쓱하게 손사래를 치던 화랑은 피식 웃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바깥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화랑은 두리번거리다가 베란다 쪽에 보이는 화분들을 보고 다가갔다. 이거 사진으로만 보던 몬스테라? 이거 키우기 어렵다고 하던데. 왜 이렇게 이쁘지.
"선배. 식집사에요?"
"식집사? 그게 뭔데."
"식물 키우면 식물 집사라고. 줄여서 식집사......"
돌아서서 신나게 설명하던 화랑은 말을 더 이어가질 못했다. 이렇게 갑자기? 화랑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연을 밀어내지 못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연의 차가운 입술이 먼저 닿았다. 그다음엔...... 화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키스가 이런 거구나. 그녀는 손을 올려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늦은 시간.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집이 가까워서 안 데려다주셔도."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아. 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의 자취방에서 별일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놀라긴 했으나 더 진도를 나가진 않았다. 그 다음에 티비로 영화 한 편 본게 다였다.
건물을 나서자, 이연이 손을 내밀었다.
뭐지. 설마. 손 잡으라는건가. 화랑이 멀뚱하니 보기만 하니 이연이 손을 다시 거두었다.
"손 잡기 싫어?"
"그게 아직 좀......"
화랑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좀 믿기지 않았다. 만나보기로 했으면 사귀는 건데. 뭔가 갑작스럽단 생각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가자."
이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내내 화랑은 이따금 그를 몰래 쳐다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 갑자기 남친이 생기다니. 그것도 저렇게 잘생긴 남친이......
집 앞에 도착하고 화랑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연은 말없이 화랑을 쳐다보았다.
"저 들어가 볼게요."
"그전에."
이연은 이번에는 두 팔을 벌렸다. 뭐지? 그녀가 생각한게 착각이 아니란 듯 이연은 피식 웃어 보였다.
"이건 하게 해줘."
"네......"
화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연이 다가와서 살짝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화랑의 모든 신경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로 쏠렸다. 이런거 생각보다 따뜻한데. 화랑은 두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이연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내일 또 봐."
"네. 내일 봐요."
손을 흔들어보인 이연은 뒤돌아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번 돌아보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는 않았다.
공동 출입문을 열고 들어간 화랑은 그제야 자기 호흡이 엉망으로 틀어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숨을 고르고 그녀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잘 준비하고 핸드폰을 확인하던 화랑은 '잘자.'라고 짧게 온 이연의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연애라는 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추천 (3) 선물 (0명)
IP: ♡.252.♡.103
죽으나사나 (♡.214.♡.18) - 2024/03/18 02:41:04

저도 풋풋한 연애를 하고 싶습니다. 아아… 옛날이여.

나단비 (♡.252.♡.103) - 2024/03/18 11:03:24

저도 글로나마 해봅니다 ㅋㅋ

뉘썬2뉘썬2 (♡.169.♡.51) - 2024/03/22 04:03:14

시간전도법이엿군요.소설을 많이보지않아서 습작수법을 잘몰라요.

키스?? 역시 남자자취방에는 안가는게 좋군요.ㅋㅋ

복숭아음료수는 단비씨가 좋아하는거죠?

나단비 (♡.62.♡.242) - 2024/03/22 06:13:03

저도 익숙치 않아요.
이번 캐릭터는 최대한 제 취향 안 넣으려고 했어요.
저는 달달한 음료수 잘 안마셔요 ㅋㅋ

뉘썬2뉘썬2 (♡.169.♡.51) - 2024/03/22 07:08:50

아하 이번에는 작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햇군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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