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71회)

죽으나사나 | 2024.04.18 16:00:01 댓글: 52 조회: 1161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2082
너를 탐내도 될까? (71회) 몸살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하정은 열흘 전에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없는 태국에서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진 엄마는 하정이와 같이 한국에 들어오길 선택했다. 하정의 바람대로. 

끝이 안 날 것 같은 장마는 드디어 막을 내리려는지 요 이틀은 비 소식이 없었다. 

기나긴 장맛비 때문도 있지만 이제 9월에 들어선 서울의 날씨는 제법 산산해지려고 했다. 특히나 출퇴근을 할 아침저녁이 그랬다. 

요즘따라 온몸이 자꾸 으슬으슬 해진 하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꺼운 옷을 여미였다. 

하정은 일주일 전부터 맥스라는 회사에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리더스랑 비슷하게 전자부품을 만드는 크지 않은 회사였다. 

조금 더 쉬라는 미연의 걱정에도 하정은 태국에서 오자마자 얼마 안 지나 바로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치매인 줄 알고 일을 할 수 없다 판단되어 그만두었던 일은 다시 하고 싶어졌다. 리더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수리해 주었고 퇴직금이 들어왔다. 처음 받는 퇴직금이 생각보다 많았다. 뭐… 오랜 시간을 한 회사에만 몸을 담갔으니. 이제 엄마랑 같이 좋은데 여행이나 갈까 고민을 했다. 

은서는 하정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스페인으로 떠났다. 일단 짧은 여행을 할 거라고 했으니 언젠가는 오겠지. 하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권기혁은 그 후로 하정에게 따로 연락이 없었다. 

하긴…

그렇게 매정하게 쫓아버렸는데 연락하는 사람이 이상하긴 하지. 

“윤 팀장님 아니세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회사 로비에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하정을 불러 세웠다. 

“어?? 한 팀장님!”

서울은 좁았다. 

리더스 품질보증팀에서 일하던 한 팀장을 새로 근무하는 회사에서 만나게 되다니!

“한 팀장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하정이 반가움에 얼굴색이 환해졌다. 개인적으로 따로 만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회사 내에서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하던 사이였다. 

“저 7월에 리더스 그만뒀잖아요.”

“왜요?”

한 팀장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귀를 쫑긋하는 하정에게 속삭였다. 

“윤 팀장도 알잖아요. 품질팀 그때 한동안 난리가 난 거. 영진 그룹과의 계약 때문에.”

“아…”

품질팀은 영진 그룹과의 계약이 깨질 위기에 아무런 손도 못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었다. 하정이도 해결을 못 했더라면 품질팀 전체가 박살 날 뻔했었지. 

한 팀장이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찌 되었던 계약은 유지되었었잖아요.”

“맞아. 근데 그 뒤로 우린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혀서… 더군다나 우리 부장님 알지? 무서운 꼰대인 거. 얼마나 사람을 더 갈구는지… 안 나올 수가 없었어.”

“에효. 어떡해…”

하정이 안타까움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 팀장도 알다시피 난 애 엄마잖아. 빨리 다른 회사를 찾아야 했고 다행히 조건이 비슷한 이 회사로 들어온 거야.”

“아…”

“요즘 집에 일이 있어서 며칠 급하게 휴가를 썼었거든. 이렇게 다시 출근한 첫날 윤 팀장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여긴 근데 무슨 일로 왔어요?  제가 알기론 리더스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들었는데.”

“아, 저 이제부터 여기서 일해요. 그리고 저 이제 윤 팀장 아니고 윤 대리입니다.”

“에에??? 윤 대리??”

싱긋 웃으며 답하는 하정에 한 팀장의 두 눈이 동그래져갔다.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도 그런데 유능한 윤 팀장이 대리라니? 굳이 왜 대리로? 적어도 과장 정도는 달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 회사에 들어왔어요.“

”오호~. 저 이번엔 품질팀 아니고 영업팀이에요. 저도 이제 팀장은 당연히 아니고 과장이랍니다.“

하정이가 일부러 대리직을 찾아 취직을 한 거 같았지만 한 팀장, 아니, 한 과장은 괜히 저는 과장이라고 자랑을 하는 거 같아서 말하면서도 머쓱해졌다. 

”팀장님은 능력 있으시잖아요. 당연한 거죠. 저는 이번에도 마케팅 부서로 왔어요.“

”오오~ 역시. 가장 자신 있는 걸로 다시 시작을 한다는 건가. 어찌 되었던 너무 반가워. 윤 팀장, 아니. 윤 대리라고 해야 되나?“

”네. 한 과장님.“

하정이 웃자 한 과장도 같이 배시시 웃었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밥을 먹는 둥 하는 둥 하던 하정은 근처 약국으로 갔다. 낮에는 아직도 더운 날씨의 연속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 때문이라 그런지 하정의 몸은 한국에 와서부터 내내 몸살 기운이 있는 거 같았다. 

“몸이 자꾸 으슬으슬 추워서 그런데 효과 좋은 감기약 하나 주세요.”

약사에게 증상을 말하고 약국 안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언제부터 그랬을 가요?”

“네?”

“몸살 기요.”

하정이 저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약사를 쳐다보았다. 

“음… 2주 정도 된 거 같아요.“

“요즘 밥맛은 있나요?”

여자 약사는 질문이 많았다. 그것도 이상한 질문들을. 

“별로… 없긴 한데… 요.”

하정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럼 약을 사서 드시는 것보다 테스트를 먼저 해보시죠.”

“무슨 테스트를…”

약사는 싱긋 웃으며 하정이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글씨를 본 하정이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테스트는 무슨…”

무의식적으로 약사를 훑다가 불룩한 그녀의 배에 시선이 갔다. 약사는 제 배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미소를 지었다. 

“증상은 저 초기 때랑 비슷한 거 같아서요.”

하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임산부한테 버럭 화를 낼 수가 없어서 그저 헛웃음만 쳤다. 이때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약을 살 마음이 없어진 하정은 전화를 받으며 약국을 나섰다. 

“응. 정연아.”

“너 오늘 퇴근하고 뭐해?”

“뭐… 할 건 없는데. 왜?”

“그럼 같이 밥 먹을까?”

“어… 그래.”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전에 정연이한테 아빠를 보내드리고 왔다는 얘기를 꺼냈었다. 사뭇 섭섭해할 만도 한데 정연은 그저 나를 안아서 토닥토닥해주었다. 별말이 없었다. 사실 위로를 한답시고 과하게 행동하는 게 더 부담스러웠겠지만. 저 자신을 잘 알아주는 정연이가 고마웠다. 

“근데, 있잖아.”

전화기 너머 머뭇거리는 정연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서울이 말이야.”

회사 입구에 들어서려던 하정이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한테 직접 전화하기가 좀 그런가 봐. 나한테 연락 와서 네 안부를 묻길래 요즘 네 일을 얘기해 줬었어.”

“… 응.”

“회사 그만뒀다고 그러더라.”

“… 왜?”

“사람 살리는 일을 다시 하고 싶어졌다나. 좀 쉬다가 병원에 다시 들어갈 거래. 걔 의대 졸업했잖아.”

“아… 그랬었어?”

“허얼… 몰랐던 거야?”

“응.”

정연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긴 했다. 서울에게 받기만 했었지. 내어준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던 거고. 

하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서울이도 같이 만날까? 네가 불편하다면 뭐… 안 부르고.“

이 정도면 그냥 부르자는 얘기가 아닌가 싶으면서,

픽 하고 웃음을 흘린 하정이 입을 떼었다. 

”그래. 불러.“

”오케이~“

들뜬 정연과의 통화를 끝으로 평범한 일상의 오후였다. 

하정은 막내급인 대리로 들어와서는 문서 프린트나 서류 정리 그런 것만 열심히 도맡아 했다. 한 팀의 팀장이었던 전에보다 가벼운 일들만 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가벼워서 지금 하는 업무도 은근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진짜 사회 초년생이었던 20대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면서. 

뭐,

맨날 일한 기억밖에 없지만. 

그리 바쁘지 않았는데도 오후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해는 벌써 짧아지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인데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정아~”

단골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정연이가 두 팔을 번쩍 들어 하정을 반겼다. 옆에는 살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서울이가 앉아있었고. 

“안녕. 서울아.”

옅은 미소와 함께 먼저 말을 건넨 건 하정이었다. 

“… 안녕. 누나.”

서울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주문했어?”

9월의 날씨엔 꽤 두꺼운 가디건을 벗어 등받이에 걸며 하정이가 정연에게 물었다. 

“뭐 똥집이랑 이것저것… 근데 넌 추워? 그 가디건은 좀 오바 아니야?”

“어?”

연핑크색 가디건에 눈길이 간 정연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좀 추워. 아침저녁으로.”

답하면서 보니 정연과 서울은 반팔 차림이었다. 

곧이어, 생맥주 세잔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내일도 출근이지만 오늘 좀 마셔볼까나~“

맥주잔을 높게 치켜든 정연이는 꽤 들떠 있었다. 

”미안. 난 몸살 기운이 있어서 좀 따가 약…  암튼 오늘은 안 마실래. 난 그냥 물로 대신할게요~“

하정이 제 앞에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김이 샌 정연이가 호프 잔을 툭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뭐야… 진짜 안 마실 거야?“

”응. 서울이랑 둘이 마셔.“

”쳇.“

누구도 하정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렇게 일상 얘기들이 오갔다. 

”잠깐 있어 봐. 나 화장실.“

열심히 수다를 떨던 정연이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버티더니 한계가 온 듯했다. 

서울과 둘이 남은 공간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서울과는 연락을 취한 적도, 만난 적도 없었으니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해야 한다. 

”서울아.“ ”누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둘 다 닫아버렸다.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던 둘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우리 왜 이리 어색하지?“

”그러게요.“

하정의 머쓱한 표정에 서울이도 입매를 늘리기 시작했다. 

”서울아.“

저를 부르는 그 부드러운 음성에 서울은 올라갔던 입꼬리를 살며시 내렸다. 

누나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올곧이 저를 바라보는지 궁금하면서도 걱정되었다. 

그새 많은 생각을 했다. 

누나는 다시 만난 나에게 불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다. 누나와 다시 만나 누나를 아는 척하고 다가갔던 건 그저 누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지, 누나에게 부담을 주고 힘들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누나 곁에 있다 보니 절로 욕심이 생겼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저 자신을 통제 못 했다. 

그렇게 만든 결과는 누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 자극을 줬고 저 자신도 괴로움에 허우적대었다. 

이런 걸 원했던 건 전혀 아니었다. 

누나의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연락을 하고 싶었다. 누나에게 특별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잘 알아서. 그래서 누나가 힘들어할 거 잘 알아서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누나는 이제 14살 아이가 아니라는걸. 슬픔은 당연하지만 이제 8살이 아닌 내가 누나 곁에서 억지로 그 슬픔을 나누려 안 해도 된다는걸. 

나도 이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누나가 나를 그냥 동생처럼, 친구처럼 찾을 때까지. 

그래서 오늘,

누나에게 부담을 줄 생각이 없다.  만나고 싶었지만 망설였고 그 다리를 놔준 게 정연 누나였다. 

“우리 전처럼 친구 해도 될까?”

하정이 활짝 웃으며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서울은 긴장하던 끈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하정의 손을 잡았다. 

“뭐야, 갑자기 웬 악수?”

화장실에서 돌아온 정연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둘을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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