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

궁초댕기 | 2002.08.28 18:15:32 댓글: 2 조회: 474 추천: 0
분류일반 https://life.moyiza.kr/mywriting/1560797



여태 내게 있어 여자와 남자는 일종의 극히 생리적인 명사일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아니였었다. 그리고 이런 자연스러운 구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고.
요즘들어 돌아가신 할머니가 무척이나 그립다.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들, 내게 보여주셨던 할머니의 모든 것들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면서 내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준다. 그리고 소박한 기억속에 담긴 할머니의 모습은 이미 내 할머니라는 의미를 넘어 한 아름다운 여인의 삶이란 어떤것인가를 가르치고있다…


우리 할머니는 경기도 양면군 태생이시다. 작년에 돌아가실 때 아마 아흔 일곱이셨으니까 1905년 생일것이다. 거의 한 세기 전 사람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들은 그렇게도 내가 듣기에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었다. 말 그대로 옛날 옛적… …
할머니네는 넉넉한 집안은 아니였지만 면에서 훈장을 지내셨던 큰아버지 덕분에 온 가족이 그럭저럭 살수는 있었단다. 그리고 그 윗대에 아마 우리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무슨 자그마한 벼슬을 하셨었는데 토비들이 자주 와서 많이 털리우긴 했어도 그 밑천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홍길동이나 임꺽정이 어쩌면 소설속에만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느낌이 묘해진다. 암튼 그렇게 소란스럽고 날로 몰락해 가고 있던 조선시대를 할머니는 살으신것이다.
열다섯살 나던 해, 그 때 할머니는 막 피여날려는 꽃망우리같은 소담한 처녀였다.   치렁치렁 길게 땋은 머리끝에 언제나 빨간 궁초댕기를 들이셨다는 할머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아침마다 내 머리를 땋아 주시면서 꼭 그러셨다. 여기다는 궁초댕기를 들여야 제격인데… 하지만 궁초댕기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모든 옛말들처럼 옛날에나 있음직 할 비단댕기였다. 요즘도 의상전문이 아닌 사람들 한테는 궁초는 참 듣기에도 어려운 말이다. (아, 빗나갔다. 할머니 얘기로 돌아가야지.)
이쁘고 바느질 잘하고 참하다고 동네어른들은 치하가 대단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 나가셨던 큰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된채 마당에 들어서시면서 《윤화야(우리 할머니 본명이 임윤화다.), 너 이제 시집 갈 나이두 됐구나, 내가 좋은 자리 알아서 날까지 다 받아 왔으니까 그리 알고 있거라.》그러시드란다. 큰아버지가 온 가족의 가장이시고 또 원체 성미가 호랑이 같은지라 우리 할머니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무소리 못하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단다. 큰아버지가 서울 올라가셔서 친구들 만났는데 그 중에 어떤 친구가 술상에서 그랬단다. 니 조카딸 이쁘던데 우리 며느리루 안 줄래? 라구. 그리구 큰아버지는 별 고려도 없이 암 돼구말구. 그렇게 응낙을 하신거구. 우리 할머니의 《혼인대사》는 그렇게 남자들 술상에서 오가는 말 몇마디로 결정이 나신거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대사》는 다 술상에서 이뤄지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자유연애랍시고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그렇게 튕겨가며 고르는 오늘의 우리들에겐 너무나 억울하고 어쩜 그럴수 있냐는 불만부터 자아내게 만드는 일이지만 우리 할머니때는 본래 그렇게 돼있었고 누구에게나 그렇게 돼있는거였으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였다. 그게 여자의 숙명(?)이였다…
할머니는 그런 숙명으로 한 생을 살으셨다. 할아버지가 첩을 들이셨을 때도 그랬고, 한창 나이에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랬다. 일편단심 그 남자만을 위해 그 남자가 남긴 모든 것들을 위해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팔자지 뭐…》힘들때나 어려워 지실때도 할머니는 언제나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이게 팔자라고 그러셨다. 정해져 있는 삶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그녀의 신조다. 그래서 저 세상 가시는 날도 그렇게 웃음을 머금고 아름답게 깨끗하게 떠나가실수 있은게 아닐까? 고작 스무여해를 살아 온 우리 세대 여자들이 자꾸 힘들어 지고 상처받는 건 혹시 그 정해져 있는 모든 운명들을 외면하고 내게 속하지 않는 그 뭔가를 얻으려고 애태우고 가슴 아파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네가 뭐 숙명론자냐?》그렇게 비꼴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가끔은 나도 할머니가 살으셨던 그 시대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선택이 필요없는,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삶이 왠지 좋아보이니까.
할머니가 시집가던 날, 할머니의 어머니는 꽃가마를 붙잡고 《우리 윤화 고생 많겠구나, 이제부턴…》,《너만은 돈 많은 집에 귀하게 시집 보낼려구 그랬는데 니 큰아버지가…》그러면서 큰 아버지 눈치를 살펴가면서 고름으로 입을 막고 소리죽여 자꾸 자꾸 우시드란다. 그렇게 할머니는 철도 채 들기 전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정든 고향집을 떠나 시집이란데를 가셨다.
세상뜨시기 직전에도 할머니는 고향집을 그리워 했다. 집 앞 터엔 두 그루의 대추 나무가 아츠라하니 솟아있었는데 그늘이 하도 커서 여름 내내 그 밑에다 망석을 깔아두고 동네 장정들이 모여앉아 소일하거나 어린애들의 놀이터로 되군 했단다. 가을에는 마노같은 대추들이 가지가 휘게 열렸는데 힘 좋은 청년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가지를 흔들어 대추를 떨어뜨리면 애들과 아낙네들이 줍고, 그렇게 해서는 뉘라없이 나눠먹고… 정말 그림같았다고 할머니는 늘 외우셨다. 《그 대추 나무들이 지금두 있나? 우리 집 툇마루두 참 컸었는데… 그 때는 좋았지…》가끔씩 이렇게 혼잣말을 하시는 모습을 나는 자라면서 많이 보았었다. 99년도에 내가 한국을 다녀오게 됐다. 내가 떠나던 날, 할머니는《대추나무 사진 한장만 찍어오겐?》그러시면서 내게 눈물을 보이셨다. 정말 빡빡한 일정 땜에 갈 수가 없어서 한국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6촌 형님(내겐 8촌 큰아버진가?)에게 여쭤봤드니 한 그루는 벌써 몇해전에 죽어 버렸고 지금은 한 그루만 잘 자라고 있다고 전해주셨다. 돌아와서 할머니께 전해드렸다. 나는 처음 할머니의 그렇게 복잡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아직 베버리지 않고 있기는 있단 얘기지? 참 오래 된 나무니까 늙어 죽었나 보다. … … 그래두 한 그루 라두 남아있다니 다행이고…》그러면서 또 눈굽을 찍으셨다. 내 가슴도 찌르르해졌다. 나중에 한국 다시 가면 그 땐 꼭 사진이라도 찍어다 드려야지 그랬는데… 이젠 영원히 할머니께 보여드릴 기회가 없이 돼버렸다.
요즘들어 나는 공연히 힘들고 외로워진다. 다행히 그때마다 할머니 얼굴이, 미소 비낀 그 얼굴이 눈앞에 삼삼해지면서 되도록 내가 차분해 질수 있도록 잡아주신다. 그래야지, 뉘라없이 산다는건 다 그런거야, 네가 가져야 할께 있고, 평생을 쫓아도 잡을 수 없는게 있지. 안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애태우고 눈물 흘리는건 집착이야. 그런 집착땜에 네게 속해있는 평범하고 작지만 따뜻한 많은 감동들과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도 있는거지.
그랬구나, 할머니의 아름다움은 바로 대추나무가, 고향집 툇마루가, 그리고 작은 궁초댕기가 주는 아름다움이였을 것이다. 한 남자를 위해 태어났고 내 자식을 위해 나를 태워야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신념이 할머니의 일생을 아름답게 지켜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지금부터라도 내게 있었던 아름다웠던 추억들과 지금 겪고있는 아프지만 행복한 순간순간들을 하나하나 주어모아야겠다. 그래서 언젠가 먼 훗날 내가 할머니가 된 뒤에 내 손군들에게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들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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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99.♡.43) - 2002/08/29 08:33:01

잘 읽었습니다.^_^

아큐원 (♡.247.♡.54) - 2002/08/29 10:55:53

잘 읽었슴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나네요..
어쩔수가 없었던 시절..선택할수 없는 인생..
인생에 유감이 얼마나 많겠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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