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향전-잊혀진 그들(상)

l판도라l | 2023.02.08 18:08:54 댓글: 2 조회: 928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0729
1.

“야!김향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방금전까지 나는 분명 도서관에서 춘향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빡 졸았었다.

어울리지 않게 웬 고전이냐고?글쎄 그 망할 어문 선생님이 다음주에 춘향전에 대한 전체 내용을 숙지하고 조별로 주제토론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나는 수업이 끝나자 짜증이 솟구쳐서 책을 탕 소리나게 덮고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춘향전만 나오면 나는 내게 향단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준 내 부모님을 원망하느라 밤을 샐 지경이었다. 차라리 춘향이라 지어도 지금보다 열배는 낫겠다. 이건 뭐 뛰어봤자 춘향의 몸종 이름이니...

“야, 김향단!오늘 체육시간은 빠지면 안된다는 거 잊었어?”

으휴...웬수가 따로 없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꼭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게 그 이름을 불러야 하겠니?나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책을 넣고 절친의 뒤를 따라 도서실을 나섰다.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절친의 뒤통수를 구멍이 나도록 째려보면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저년은 이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오지랖은 또 얼마나 넓은지...남이사 체육시간 빠지든 말든...학급장이긴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어문시간도 모자라서 이젠 체육시간까지 날 감독하려 들어?나는 입속말로 온갖 육두문자를 다 날리며 체육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잠시후, 나는 그런 절친에게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누가 남자는 뇌가 섹시해야 한다고 했는가...역시 남자는 몸이...쿨럭...중요하다.

“이번에 새로 온 체육선생님이래. 어때?잘생겼지?”

옆에 선 절친이 내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얘, 저건 잘생긴 정도가 아니야. 저건 아주 그냥 죽여줘...

그래, 차라리 그냥 죽여주라.

나는 정확히 1분후 우리앞에 설치된 높다란 그네를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그네라니...역시 이번 체육시간은 빠질 걸 그랬다.

“자, 한달후에 열릴 체육대회에 우리 학교도 참가해야 하는 거 알지?오늘 너희들중 그네를 잘 타는 학생들만 뽑을테니까 탈줄 모르거나 겁이 나면 물러서도 좋다.”
“저요!저요...저 어릴때부터 그네 잘 탔어요!”

절친이 손을 높게 들었다. 훈남 체육선생님의 눈길이 우리쪽으로 향한다.

“그래, 학생 이름이 뭐야?”
“성유리입니다.”
“성유리?앞으로 나와봐.”
“넵.”

나는 아니꼬운 눈길로 절친이 체육선생님 곁으로 포르르 달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네에 몸을 실으면 되었지 팔은 왜 선생님 목에 두른다니?아니, 팔 근육은 왜 슬쩍 만져보는데?저런저런...저게 어문선생님 좋다 할땐 언제고…

그네를 잡고 마주보는 두 얼굴이 하도 다정해보여서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었다.

“어,그래.학생...무슨 일이야?”
“선생님, 저는 어릴때부터 그네신동이었습니다.”
“오, 그래?그럼 잠깐 여기로 나와봐.”

체육선생님이 절친에게 뭐라 했는지 그녀가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내쪽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그네쪽으로 다가갔다.

“선생님께서 밀어주시는 거에요?”
“그래. 강약 조절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는 눈을 딱 감고 그네에 올라탔다. 별로 무서운 건 아니...지. 무섭다, 무서워...사람 살려...줘.

귀가에 바람이 쌩쌩 불고 눈앞이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해졌다. 그네가 높이 올라갈수록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하고 호흡이 곤란해져서 나는 온몸을 사시나무떨 듯 떨었다. 그러다보니 언제 두손을 놓았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털썩...

여학생들의 새된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다시 정신이 들었을때, 나는 여전히 그네옆에 엎드려 있었다. 이 싸람들이 진짜...그네에서 떨어진 사람을 당장 의무실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기에 방치해두다니...벌떡 일어서려다 발밑의 뭔가를 밟아 나는 다시 넘어져버렸다.

“향단아,괜찮아?”

그래도 절친이 그나마 안부라도 물어보고 있었다.

“이년아,그네에서 떨어져봐.너라면 괜찮겠냐?”

아파서 머리도 쳐들지 않고 대답했을 뿐인데, 왠지 절친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내가 뭐 못할말을 했나...

고개를 든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싱그러운 풀향기와 눈에 들어오는 꽃송이들, 이건 분명 학교 체육장이 아니다. 여긴 어딜까?왜 이렇게도 낯선 풍경일까…

더 억이 막힌 건 눈앞에 있는 절친의 옷차림이다.

체육대회 당일도 아닌데 절친은 벌써 연노랑 저고리에 핑크색 치마를 받쳐입고 머리를 땋아 늘여 댕기까지 드리웠다. 아주 꼴갑을 해라 꼴갑을.

게다가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해쭉해쭉 웃는다.

“우리 향단이가 그네에서 떨어지더니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가 보구나. 괜찮다. 어디 다친덴 없느냐?어디 한번 일어나보거라.”

너야말로 저리 썩 비키거라. 볼썽 사나우니.

나는 입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 어디 다친데는 없어보였으나...

“돌아버리겠네!”

내 말에 절친의 눈이 올롱해진다.

“돌아?혹시 머리가 어지러운 게냐?”
“어.”
“혹...기억이 돌아서지 않은 게냐?”
“기억?무슨 기억...그것보다 이거 당장 못치워?내 체육복은?”

나는 내 몸에 걸려있는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와락와락 벗어내쳤다. 그런 내 행동에 절친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향단아!”
“누가 나한테 이런 걸 입혔어?내가 이런 한복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벗어내쳤다. 이어서 속바지까지 벗으려던 내 행동이 저 멀리 앞쪽에서 울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멈추어버렸다.

“신임사또 행차시다!길을 비키거라!”

나는 어리둥절해서 절친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바라보며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넋두리를 하고있었다.

“도련님이 간지 얼마 안되었는데 향단이 너까지 그러면 나 어떡하냐...”
“도련...님?”
“몽룡도련님 말이다. 가신지 한달이나 되었는데 종무소식이구나. 떠나기전 방자를 통해 꼭 서신을 주마 약조하셨건만...”

급기야 절친이 손수건을 꺼내 어깨까지 들먹인다. 이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뭔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내가...타.임.워.프.를 해버린 것이다!여기 조선시대로, 전라도 남원으로.

하느님 맙소사!

......

2.

조선조 숙종년간.

그러니까 이게 바로 내가 뜬금없이 시간여행을 해서 와버린 시간대다. 다 그넘의 그네탓을 하기에는 너무도 아이러니한 상황이라 나는 현대 내 절친을 닮은 그녀가 내게 옷을 도로 입혀주고 나를 집으로 데려올 때까지 한참이나 망연자실해 있었다.

절친을 닮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그 유명한 성춘향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얼굴에 꽤 미색이 남아있는 중년의 부인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야단치는 바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춘향의 어머니 월매쯤으로 추증되는 그 중년부인의 말에 따르면, 남원 도호부사로 있던 이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부임해서 한양으로 올라간지 한달이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고, 춘향은 단오날 그네를 타던 그 자리에서 광한루쪽을 바라보면서 이몽룡에게 소식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그네곁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에서 떨어진 게 확실해?다른 조짐은 없었고?...요?”

조선시대의 존댓말이 습관이 되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월매의 눈이 내쪽을 무섭게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짐?”

춘향이 내게 물어왔다.

“뭐 하늘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떠왔다든가 아지랑이 피는 곳에 갑자기 블랙홀 같은 것이 생겼다든가...”

춘향은 쟤 어떡해 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고, 아까부터 나를 째려보던 월매마님이 내쪽을 향해 버럭 소리질렀다.

“이것아!빨리 빨래나 하고 집안청소나 해!허황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머니, 향단인 오늘 좀 쉬게 하자구요. 아직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다행이도 월매마님이 춘향이 말이라면 들어주는 것 같았다. 월매마님이 휑하니 나가자 나는 춘향의 앞에 바싹 다가들었다.

“그러니까 말해봐. 진짜로 털썩 소리밖에 들은 적 없어?...요?”
“우리끼리 남았어. 향단아.”

춘향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평소대로 해. 우리끼린 여염의 말을 쓰기로 했잖아.”
“여염, 그러면 반말해도 돼?”
“니가 나보다 한살이 많아. 언녕 그러기로 하지 않았어?”
“너 몇살인데.”
“이팔.”

지금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뭔 구구단인지. 이팔, 열여섯???

이게 어디 열여섯 처자의 얼굴이며 몸매인가?조선시대에도 식량은 그리 부족하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월매마님이 돈이 좀 있거나. 하긴 번듯한 집이며 춘향의 옷차림을 보니 너무 궁색하지는 않은 듯 하다. 춘향뿐만 아니라 몸종 출신인 내 옷차림만 봐도 여느 여염집 처자들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내가 반나절전까지만 도서관에서 춘향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봤는데...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춘향전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내가 온 이 시대는 소설속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이몽룡을 기다리겠다고?”

내 물음에 춘향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야지. 그이가 내게 정표까지 두고 가셨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녀의 손에는 옥가락지가 정히 끼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지 마라.”
“왜?”
“이몽룡 안와.”
“아니야, 꼭 오신댔어.”
“오겠지. 하지만 그건 그가 늙었을때 일이야.”
“무슨 말인지...”

나는 침까지 튕겨가며 내가 아는 역사지식을 성춘향 그녀에게 과시했다.

“이몽룡 걔, 한양 가서 과거 급제한다 쳐. 동부승지 아들에 과거까지 급제했으면 한양의 명문가들이 서로 사위로 삼자 안하겠니?그리고 과거 급제하면 임금을 뵈어야지, 벼슬을 받아야지…언제 널 생각할 겨를이 있겠니?”
“하지만 내게 약조를...”
“했겠지!서로 좋아 죽고 못살땐 하늘이 별이라도 따준다 했겠지. 하지만 현실은 암울한 거야. 솔직히 넌 마님이 거금 들여 명문가 규수처럼 키운거 빼곤 뭐가 있어?”
“그래도...”

솔직히 춘향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그녀더러 내 절친을 닮으라 했던가. 현대의 내 절친이 호박을 쓰고 구렁텅이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 역시 지금처럼 보따리를 싸고 말릴 것이다. 나는 남몰래 주먹을 틀어쥐었다. 조선시대로 와서 첫번째로 해야 하는 일이 이몽룡과 춘향을 갈라놓는 일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암튼 춘향을 위해서나 절친을 위해서나 이몽룡은 반드시 아웃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헛되이 기다리지 말고 좋은 신랑감 있으면 잡아. 그깟 과거?살면서 그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내 극진한 권유에 춘향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춘향을 말리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현대에서 우리가 아는 춘향전은 픽션이었다. 사실 춘향과 이몽룡이 광한루에서 만나 서로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그뒤의 변학도의 횡포, 성춘향의 수청거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도 등 모든 이야기는 어느 누군가가 지어낸 소설이었다. 이건 다 당시 백성들의 념원을 반영한 어느 무명인의 허황한 소설인데 후세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춘향전을 신분을 뛰어넘는 고귀한 사랑이라고 떠받드는 게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내 이름이 춘향전의 몸종 이름과 일치하다는 것도 한몫 했다.

다들 못믿겠다고?그럼 어디 춘향전에 대한 내용을 조목조목 나열해보자.

우선 전라도 남원 도호부사라는 자리는 일반 고을의 사또가 아니라 종3품 관직이다. 즉 우리가 아는대로 변학도가 낙하산으로 이런 중요한 지방관으로 발령날수는 없다는 얘기다. 분명 조정에서 엄한 선발을 거쳐서 남원부사로 부임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어느 자료에선가 봤는데 변학도는 지금 겨우 23살이다. 실제로 아까 낮에 길옆에서 가마를 타고 지나는 모습을 얼핏 보았지만, 새로 부임된 신관사또는 젊고 준수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알던대로 나이 많고 여자만 밝히는 위인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몽룡이 한양에 가서 과거에 급제했다고 치자. 임금이 아무리 노망이 났기로 그런 왕초보한테 지방관을 숙청할 암행어사 보직을 맡긴다고?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지나가던 개: 하하하...그런데 날 불렀니?
나: 아니야, 수고했어. 가봐.
지나가던 개: 불렀으면 뼈다귀라도...
나: 뼈다귀도 못추리기전에 꺼져.
지나가던 개: 깨갱, 알았어...]

뭐 암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엔 우리 춘향이를 그런 양아치한테 못보내지. 어디 아비가 부임된 고을에 와서 그 고을 퇴기의 딸이랑 정분이나 나고. 이한림도 어지간히 속이 타시겠다.

[월매: 내 눈에 흙이…그거 내 대사인데.
춘향: 우린 백년가약을 약조했어. 그리 비하하지 말아줘.
이한림: 남이사~그리고 지금 난 동부승지거든?]

시끄럽고.

“암튼 춘향이 너, 절대 이몽룡 기다리지 마. 처녀귀신으로 늙기 싫으면...”

내가 단단히 모를 박아 하는 말에 춘향이 눈을 올롱하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처녀귀신?”

그제야 전설속 그녀와 이몽룡 사이의 그렇고 그런 일이 생각나서 나는 그녀대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아, 나 이제 17살인데 19금 상상을 해버렸다. 조선시대엔 무슨 애들이 이리 조숙하냐.

“이몽룡 기다릴바엔 차라리 변학도가 나아. 변학도가 널 얼마나 사랑하게 되는지 넌 모르지?네가 정인이 있다 해도 그는 집요하게 구애를 할거야.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한참 정설에 외설에 야사까지 섞어서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문득 대문간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뉘시오?”

문간에서 월매마님의 묻는 소리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방이오. 사또나리께서 보내셨소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나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

3.

“이게 다 무엇이오?”

이방이 줄느런히 내놓은 보따리들을 바라보는 월매마님의 눈이 반짝인다. 호기심에 구경나온 나와 춘향이는 월매마님의 속된 모습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신임 사또나리께서 성참판 나리의 가솔이 여기 있다는 소리에 특히 소인을 보내셨수다.”

이방이 얼굴 한가득 요상한 미소를 지은채 금은보화며 비단필륙들을 내어놓는다. 월매마님의 눈이 그 보따리들을 떠나지 못했다.

“돌아가신 나으리께서 얼마나 고마워하시겠소. 사또나리께 이리 마음 써주시어 송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시오.”

월매마님의 말이 끝나자 이방은 또 한번 헤헤거렸다.

“그외에 간단한 청이 하나 있수다.”
“그것이 무엇이오.”
“사또나리께서 이 댁에 귀한 소저가 계시다 하여 한번 뵙기를 청하온데...”
“아, 언제요?시간, 장소...”

“마님.”

참다못해 내가 버럭 소리를 내버렸다. 이방와 월매마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월매마님은 나를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지었다.

“향단이 너 이게 무슨 경망한 작태더냐. 내가 평소에 너희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마님,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행랑방으로 잠시 납시옵소서.”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건 나야 알바 없고. 까짓거, 조선시대 코스프레 한번 하지머. 평소 사극을 많이 봤으니 이정도 사극톤쯤이야 쉽게 흉내낼수 있다.

월매마님이 툴툴거리며 나를 따라 나왔고 춘향이도 뒤따라 나왔다. 나는 두손을 내저어 춘향을 내쫓았다.

“아씨, 아씨는 방에 가서 수놓이나 하셔요.”
“무슨 일인데, 나도 듣고싶어.”
“애들이 들으면 안되는 거에요. 가세요, 가.”

춘향을 후이후이 내쫓고 월매마님을 돌아보자, 월매마님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우리 집이 노비나 몸종들에게 관대하긴 해도 너 이런...”
“됐고요, 마님. 이몽룡 마음에 안드시죠?”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월매마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응?”
“마님 이도련님을 싫어하시잖아요. 저앞에선 커밍아웃 하셔도 돼요.”
“커...뭣이라?”
“뭐 암튼, 아씨와 이몽룡 떼어놓는 일 저랑 한번 손잡아보실래요?”

월매마님은 고개를 기웃하더니 잠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그놈 한량끼가 마음에 안들어 그렇다 치고, 넌 왜?”
“저야 당연히 아씨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죠. 생각해보셔요. 아씨께서 기약도 없는 사랑을 기다리면 저 또한 처녀귀신으로 아씨를 따라 늙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
“저도 시집을 가야겠다구요. 그러러면 아씨부터 좋은데로 먼저 보내야죠.”
“그건 그렇지. 그래서 춘향일 변사또한테 보내려는데 니가 이리 불러낸 거잖냐.”

월매마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님도 참, 그깟 선물공세에 넘어가시면 딸을 팔았다는 소리나 들어요. 좀 밀당을 합시다, 밀당. 오케이?”
“오...오케이?”
“마님께서 전직을 한번 되살려보셔요. 남자가 만나자는데 덥석 좋습니다 하면 아무리 이뻐도 매력이 절감되지 않겠어요?”
“음...그럼 향단이 니 생각엔?”

월매마님이 솔깃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호기를 부렸다.

“제가 가서 탐문해볼께요. 신관 사또가 어떤 사내인지, 우리 춘향아씨를 행복하게 해주실수 있는지를...제가 가서 잘 보고 올께요.”
“그래, 하긴 네가 저 춘향이보다 기민하긴 하지.”

월매마님은 미간을 모으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이방한테는 어떻게 얘기하면 좋겠느냐.”
“저쪽에서 이방을 보냈으니 이쪽에서도 몸종을 보내죠. 간단한 답례품이라도 챙겨서요. 그게 수순이죠.”
“답례품이라...”
“최대한 돈 안드는 걸로요. 아씨께서 수놓으신 비단 손수건 정도가 좋겠어요. 적당히 은근하고 의미깊은 걸로.”
“그러자꾸나.”

밀모를 끝내고 다시 사랑채로 나온 월매마님이 이방에게 말했다.

“우선 사또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희도 답례로 작은 선물 하나 보내드리겠으니 이 아이로 하여금 동행하게 하소서.”

월매마님이 나를 가리키자 이방의 게슴츠레한 눈빛이 나를 한번 훑었다.

“이 아이는...”
“우리 아이의 몸종인데 영민하여 딸처럼 아끼는 아이입니다. 가서 사또나리께 제 뜻을 잘 전달하겠지요.”
“그럽시다.”

심부름이 헛탕을 치는가 싶었는데 그나마 교대를 할수 있어서 이방은 흡족한 눈치였다. 보짐들을 두고 이방은 대문간을 나섰고 나는 작은 함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길에서 행인들이 적어지자 이방이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너 이름이 뭐냐.”
“향단입니다.”
“향단...거 참 고운 이름이구나. 나이는...”
“17이에요.”
“나이도 꽃...꽃다운 나이구나.”

이방의 좁은 낯짝이 문득 가까이 다가와서 나는 뒤로 흠칫 몸을 뺐다.

“뭐하시는 거에요?”
“얼굴에 뭐가 묻은 것 같구나.”

그러면서 이방이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다치려 했다.

“춘향이보다 네가 더 어여쁘구나. 어떠냐?이참에 팔자를 고칠 생각은...”
“사또께 이르겠습니다.”

내가 딱딱하게 말하자 이방은 금세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고 참 맹랑한 계집이로다.”
“이런 말들, 새로 부임한 사또께서 딱히 듣기 좋아하실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또 한번 또렷하게 말하자 이방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누가 뭐랬느냐?네 상전이 사또를 따르면 네 또한 팔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냐?그 말이 하고싶었던 게야.”
“네~네.”

나는 무심하게 응수하며 이방을 따라 발길을 재우쳤다. 해가 기울무렵 겨우 관아에 도착했고 이방은 내게 뜰안에 서서 기다리라 한후 사또를 찾아 동헌안으로 들어갔다.

동헌뜰에 비낀 저녁노을을 보며 해가 지는 황혼의 아름다움에 잠시 서글픈 생각이 들 때였다.

“어찌 당신이...”

누군가가 등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걸음하셨소?정녕 내가 헛것을 본 것이요?”

나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으나 등뒤의 사람은 억센 팔로 나를 휘감은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득 선득한 것이 나의 목에 떨어졌고 나는 그의 절절한 모습에 잠시 모든 행동을 멈췄다.

......

4.

“그러니까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이지요.”

나는 눈앞의 준수한 사내에게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생기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음, 되구말구.

그런데 잠깐, 다시 보니 얼굴 한가득 민망한 표정을 지은 이 남자,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누굴까...맞다, 그 체육선생님...

그네를 밀어주던 그 훈남 선생님에게 말 몇마디 더 붙이지 못하고 여기에 와버렸는데 역시 하늘은 내게 관대했다. 나 김향단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사람을 구했나.

“아내와 닮았소.”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아...첫사랑 콤플렉스인가.

“그건 참 영광이에요. 부인께선 지금 어디 계신지...”

부인은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어본 것인데 남자의 표정에 언뜻 슬픈 기색이 어렸다.

“사별...했소.”
“아아...”

멀리 떨어진 것뿐이 아니라 저승과 이승의 거리구나...나는 그뒤의 말을 잊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방이 동헌에서 나와 급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사또나리.”

“사...또?”

눈이 휘둥그래진채 나는 그를 보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이방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 그댁 사람이 와있습니다만.”

이방이 눈짓으로 나를 가르키자,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혹시 춘향...아씨?”
“아씨가 이리 직접 걸음할리는 만무하죠.”

나는 그제야 월매마님의 당부를 떠올리고 그에게 살짝 허리를 굽혀보였다.

“성참판댁 전갈을 가져온 향단이라 하옵니다. 사또나리께 문안 여쭙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그가 몸을 돌려 동헌 뒤쪽의 작은 별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서로 좌정해서 앉자 나는 가지고 있던 함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님께서 사또나리의 호의에 감사인사를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이것은 간단한 답례품이오니 받아주십시오.”
“마님께 고맙다 전하시오.”

그가 함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내 시선이 함에서 그의 얼굴로 옮겨졌다.

“안열어보십니까.”
“당면에서 열어봐야 하는 것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궁금하지 않으신지요. 아씨께서 주시는 선물이.”
“궁금하지 않소.”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나는 민망한 느낌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씨께서 직접 수놓으신 비단 향낭이십니다.”
“그렇소?”
“아씨를 뵙자고 한 일, 혹 전달할 말이 있으시면 소녀가 전달해 드리리다.”
“그건 직접 만나서 할 얘기여서.”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하는수없이 고개를 돌려 그의 절절한 눈빛을 마주했다.

“구멍이 나겠습니다.”
“...?”
“그리 보시면 제 얼굴이 닳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소녀는 나리의 그분이 아닙니다. 하오니 그런 눈빛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런 눈빛이라니.”
“슬프고 절절한 눈빛 말입니다.”
“…”
“세상 다 끝난 듯 체념하던 사람이 한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가, 다시 그 불씨가 꺼져버려 절망으로 가득찬 눈빛 말입니다.”
“...”
“부인께서도 나리께서 이러시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 누구보다 나리께서 행복하게 지내길 원하시는 분일터이니.”
“...”
“올곧고, 정직하게 정무를 보시어 고을 백성들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 주시는 훌륭한 사또가 되어주시옵소서. 그러다보면 지금의 이 슬픔, 어느정도 치유는 되실 겁니다. 자고로 슬픔을 잊는 것에는 바쁜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급히 따라 일어섰다.

“소저의 성함이 무엇이라 하였소.”
“저희 소저는 성가 춘향...”
“아니, 난 그대의 함자를 물었소.”

나는 잠시 시선을 들어 그를 찬찬히 보았다.

“김향단입니다.”
“김향단...내 단단히 기억하리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나는 별당을 나왔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으로 돌아가려면 바로 서둘러야 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가로등도 없고 전기도 없으니 말이다. 다행이 그가 이방을 불러 포졸 두명을 내게 붙여 집까지 배웅하라고 지시했다. 이방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소인이 다 알아서 조처하리다.”

그도, 나도 이방의 이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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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52
로즈박 (♡.175.♡.27) - 2023/02/09 14:30:23

하하하...넘 웃겨요
변학도가 향단이를 좋아하나요?판을 완전 뒤집어놧네요..춘향전에서는 변학도가 나이 많고 못생이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젊고 잘생겻다니 봐줘야하는건가요?ㅋㅋ

l판도라l (♡.115.♡.85) - 2023/02/09 17:39:43

네, 춘향전의 인물들로 이야기를 재구성 해보았습니다. 제가 고전 판타지를 쓰는게 취미어서요^^ 재미있다고 생각해주셔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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