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82회)

죽으나사나 | 2024.06.02 07:15:15 댓글: 2 조회: 591 추천: 3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72761
너를 탐내도 될까? (82회) 거짓말. 
하정이 차오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울자 기혁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살포시 내리고는 자신의 손등으로 닦아주고는 서글프게 우는 하정을 끌어안았다. 하정이 반항 없이 그의 품에서 한참을 흐느꼈다.
더 얘기해야 하는데 일단은 저 자신도 진정이 필요했다.
할 말이 많았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고 강은서의 존재에 대해 끝까지 직접 꺼낸 적이 없었던 이 사람을 질책하고 싶었다. 아주 지독한 말들로 그를 고통 받게 하고 싶었다.
근데...
근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이 눈물만 흘러나오고 저를 꼭 끌어안은 그의 품이 이리도 따뜻한지...
"은서는 모든 걸 알았고 제 선택을 받아들였습니다. 은서나 저나 좋은 감정은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던 하정 씨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 그리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은서에 대한 짐은 저 혼자만 짊어지면 됩니다."
기혁이가 꺼낸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하정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다시 싸늘한 기운이 하정이 주위를 맴돌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강은서는 다 알고 떠난 거였군요. 대표님은 어떻게 알아요? 강은서도 대표님처럼 쉽게 그 마음을 접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하정은 어느새 기혁이 옷 소매를 꽉 잡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기혁이 말처럼 은서도 쉽게 그를 놓아줄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었으면 좋을 뻔했다. 하지만 하정의 머릿속에 분명히 기억하는 게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있다고 답하던 은서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건 사랑을 가득 담은 모습이었다.
하정이 입에서 헛웃음이 나갔다.

왜 저렇게 단순하게만 생각을 하는 걸까. 
대표님은 모르겠지만 저랑 무척이나 닮은 그 눈에서 분명히 봤었단 말이에요. 그 눈빛만으로도 난 강은서가 당신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고요. 강은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난 강은서의 그런 마음을 무시한 채 당신이랑 하하호호 웃으며 사랑을 나눌 수는 없을 거 같아요.

“하정 씨. 은서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어요. 은서가 설령 그게 진심이 아니었더라도 저, 지금은 은서를 신경 쓸 여건이 못 되어요. 제 마음 속엔 하정 씨 뿐이라서… 모든 원망은 제 곁에서 저한테 전부 쏟아요. 그러니 이제 저를 그만 밀어내고..."

하정이 머리를 천천히 젓더니 기혁에게서 뒤로 몇 발작 떨어져 나갔다.
"대표님."
기혁이 하려던 말을 멈추었고 그녀를 살폈다. 서글퍼진 그녀의 얼굴을.
"우리 이러지 말아요. 대표님. 다시 이런 일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신다면... 전 포기할 수 밖에 없어요. 대표님께서 아이를 핑계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는 최악의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난.... 그렇다면 나는... 포기할 거에요."
하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떨린 음성이 저를 마구 찌르는 것만 같았다.
"포기한다는 그 말은... 아니죠? 그 뜻이 아니죠?"
이번엔 기혁이가 그녀를 다그쳤다. 충격이 그득 찬 얼굴이었다. 
"이 아이는 저에게 축복이 아니에요. 충격 그 자체죠. 그래서 전 대표님이 아이 때문에 찾아오는 자체부터 싫고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싫어요. 그러니... 제가 포기..."
"그만, 그만하세요. 하정 씨.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요."
고개를 푹 숙인 하정이가 차마 기혁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중얼거리다가 불쑥 제 팔을 잡은 그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한 기혁이가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혀있는 거 같았다.
미안해요... 아이가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혼란스러워요. 아이를 핑계로 여태 틀어졌던 상황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인 거 같아요.
그리고...
미안해. 아가야. 
포기한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야. 정말이야. 절대 포기를 안 해. 혼자서 키우더라도 아가 너는 이 엄마가 절대 포기를 안 할 거야. 아주 건강하게 낳아서 예쁘게 키울 거야. 
하지만 미안해. 못된 말을 입밖에 꺼내서... 너한테 들리게 말해서... 엄마가 정말 미안해. 
***
"그만하세요. 대표님."
정신없이 술잔을 비우는 기혁의 손목을 기어이 잡은 건 도하였다. 늦은 밤 기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었다.
평소 가던 바에 갔고 자리에 앉자마자 말 한 마디 없이 기혁은 주구장창 술만 마시고 있었다. 독한 술이었다. 그냥 놔뒀다간 큰일이 날 거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도하가 그의 손에서 자연스레 술잔을 빼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기혁이 무슨 일이냐는 도하의 질문에 씩 웃어버렸다. 허탈한 미소였다.
"난 분명 기회라고 생각했어."
기혁이 다시 술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 보니 아니었네. 지독한 그 여자는 내가 생각했던 기회의 줄을 아예 싹뚝 자를 생각이었어."
서론 없이 꺼낸 말들에 도하가 머리를 굴리다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던 술을 마시자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느꼈던 건 권기혁의 연애 사업이 잘 안 풀렸을 거란 추측은 맞는 거 같았다.
"좌절이 없이 쉽게 오는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압니다. 직진 아닙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호언장담하는 도하를 힐끗 쳐다보던 기혁이가 또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 직진했다가는 다 잃을 수도 있어. 난 오늘에야 그걸 알았고."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정말 안 되는 걸까.

그녀가 제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녀에게 바로 은서의 존재를 알려줬더라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자각을 못 했고 깨달아 버린 현재 직진만 하면 모든 게 쉽게 풀릴 줄 알았던 자신이 우스워 기혁은 무거운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를 포기한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을 때 정말, 정말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진심이 아닐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 그리 할가 봐… 다가가지 못 했다. 

우습다. 은서를 좋아한다면서 긴 세월을 허무하게 흘러보냈고 마음이 식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다. 윤하정에게는 또다시 그런 실수를 안 할 거라 다짐을 하며 나섰지만 또 원점이었다. 

자신은 정말 비겁하고 못난 사람이었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이대로 그녀를 놔주어야 하나.

정말 그래야 하나. 

혼란 속에서 술자리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도하는 조용히 기혁이 옆에서 술친구를 해주었다. 

“김도하.”

생각에 잠겼던 기혁이가 도하를 나지막이 불렀다. 

도하는 대답 대신 저를 부른 기혁을 쳐다보았다. 

”네가 대표할래?“

”… 네?“

이건 갑자기 무슨 소리지?

당황해하는 도하를 마주한 기혁이가 픽 하고 웃었다. 

“농담 아니야.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지금 그 딱딱한 자리가 아니었어. 형이 없는 자리를 메꿀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김도하 너라면 회사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말씀은 농담이라도 무섭네요.”

도하 역시 일에 대한 욕심은 있어도 기혁이 자리까지 넘볼 야심은 없었다. 

그냥 지금 위치가 너무 좋았다. 제 대표지만 가끔 형 같이, 친구 같이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에도 농담처럼 제 자리를 가져가라, 자신은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했었지만 그냥 웃어 넘기곤 했다. 근데 오늘의 그는 슬픈 표정까지 겸해서 그런가, 왜인지 진심인 거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뭐, 또 외국 나가서 자그마한 커피숍이나 차리고 싶다고 하시게요?”

도하가 입꼬리를 씰룩 거리며 우스개로 흘러보내려고 했다. 

“카페 좋지. 예전엔 부동산에 관심 많았는데 회사에서 건설업까지 붙어보고 나니 그것도 별로네.  김도하 본부장이 도와주면 난 좀 쉬고 싶은데 가능할까?“

도하는 괴로워하는 기혁이 말에 답을 안 했다. 도하가 본 기혁은 정말 피곤해 보였지만 쉬이 답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

2주는 금방 지났다. 의사가 오라는 날짜에 맞춰 하정은 미연이와 함께 산부인과로 왔다. 그새 아이의 심장소리는 더 우렁차진 느낌이었고 젤리곰에서 제법 사람 모습을  갖추었다. 

이제 태아는 12주차가 되어 기형아 검사가 진행되었다. 정밀초음파로 아이의 목투명대 두께를 확인한다고 했다. 무척이나 긴장한 하정이는 초음파로 보이는 그 과정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화면에 집중했고 유심히 의사의 반응을 살폈다. 

임신이 되었다는 걸 몰랐다는 이유로 엄마가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을 많이 했었기에 혹여나 아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가 봐 두려웠다. 

검사는 생각보다 빨랐다. 초음파로 요리조리 태아를 돌려보느라 하정은 원없이 아이의 모습을 본 거 같았다. 아이는 어찌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그 작은 손발과 팔 다리를 쭉쭉 뻗어서 하정에게 보여주었다. 의사가 화살표로 가리키면서 아이의 머리, 심장까지 찾아주었고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정상수치가 나왔다고 했다. 

하정이 의사의 말에 안도하며 울컥했지만 꾹 참고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미연이와 병원을 나섰다. 

“엄마가 뭐랬어. 괜찮을 거라 했지?”

병원을 나오면서 미연이가 하정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요 며칠 검진 날짜가 다가올 수록 딸인 하정이가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슬슬 중기로 들어서려고 해서 그런지 입덧은 덜한 거 같은데 밥을 시원하게 못 먹고 있었다. 수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많이 안쓰러웠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아이가 괜찮다고 해서. 무거웠던 마음이 솜사탕처럼 가벼워진 미연이가 활짝 웃었다.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엄마가 사줄게.”

하정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미연의 말에 고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

며칠 뒤, 주말. 

하정은 정연이와 서울 셋이서 서울 근교에 있는 캠핑장으로 왔다. 얼마 전부터 검사가 끝나면 날씨가 더 쌀쌀해지기 전에 한 번 캠핑을 해보자며 조르던 정연의 말에 응했다. 

아이도 무탈하다고 했고 마음이 편해진 하정이는 서울과 정연이가 열심히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모습을 의자에 앉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같이 돕고 싶다고 하니 둘이 크게 역정을 내며 의자에 눌러앉힌 덕분이었다. 

“누나, 요거 한번 먹어 봐. 고기가 정말 야들야들해.”

고기를 구우며 한 번 맛을 보던 서울이가 어느새 하정이 앞에까지 와서 집게채로 소고기 한 덩어리를 내밀었다. 뜨거울까 봐 미리 부채로 잘 식힌 덕에 하정이 입안에 들어온 고기의 온도는 적당했고 그의 말처럼 육질이 너무 부드러워서 몇번 안 씹었는데도 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맛있는 음식이 입안에 들어오자 하정이 두 눈이 크게 반짝이며 제 반응을 무구한 눈빛으로 기다리던 서울에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 

“너무 맛있어!!”

감탄사도 절로 나갔다. 

“그렇지? 내가 자주 이용하던 단골집에서 빼온 거야. 누나랑 축복이 먹이려고.”

“…고마워.“

벌써 아이의 태명까지 자연스레 부르며 씩 하고 웃고는 고기를 마저 구우러 가는 서울의 뒷모습을 보며 하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울에게 임신 중이라는 얘기를 꺼낸 건 하정이었다. 서울에게서 중간중간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었고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가 없었으니 어느날 서울을 만나 조심스레 아이의 존재에 대해 얘기했었다. 

깜짝 놀라했지만 금세 차분해진 서울은 하정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어주었다. 

[누난 혼자가 아니야. 아줌마도 계시고 정연이누나도 있고 무엇보다 누나의 선택을 무한정 지지하는 이 박서울도 있잖아? 누나가 하는 선택이 최선이고 그게 행복이라면 난 그걸로 됐어. 누나가 힘들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서 도와줄 수 있고.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나한테 직접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누나.]

어린 애가 아니었다. 서울은 역시…. 나이는 한참이나 어리지만 나의 불안한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서울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잘 알고 또  더 이상 같은 이유로 상처를 줄 수가 없어서 그런 서울의 말에 하정이도 고맙단 인사로 마무리를 지었었다. 

“하정아, 세팅 끝났고 고기도 거의 다 익어가니까 일로 와.”

바쁘게 움직이던 둘에 시선을 두었던 하정에게 정연이가 손짓을 했다. 

“응!”

하정이 이제 조금 나올 듯 말 듯한 배를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한테 다가갔다. 
고기에, 해물에, 야채에 라면에… 없는 게 없는 풍성한 한 상이었다. 

정말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너무나도 다행인 거 같았다. 

모든 걱정 따위 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로.
질풍경초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3) 선물 (1명)
IP: ♡.101.♡.243
질풍경초 (♡.27.♡.200) - 2024/06/04 13:33:22

나도 어즈는 하정이한테 빠진것같습니다,어떻게 권기혁의 라이벌로 경초라는 배역으 더 넣어주면 안되겠습니까?ㅎㅎ

죽으나사나 (♡.101.♡.243) - 2024/06/04 17:34:44

이제 늦었어요. 결말을 향해 가는 거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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