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84회)

죽으나사나 | 2024.06.11 21:24:10 댓글: 0 조회: 357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76025
너를 탐내도 될까? (84회) 너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어. 

은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힘없이 눌러앉은 하정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은서가 했던 말들을 되새겨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을 잃어서 다행인 것도 있다니…

[만일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그런 큰 일을 겪고도 연락 한 번을 안 했다면 난 크게 화났을 거야.]

은서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옅은 미소와 함께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은지 너에 대한 기억은 나 혼자만의 기억이라 널 이해할 수는 있어. 어느날 갑자기 넌 꿈에도 몰랐던 쌍둥이 언니가 생겼고 무조건 좋아할 일만은 아니란 것도 잘 알아. 얼굴만 닮은 낯선 나한테 다 털어놓기 힘들다는 걸 알아. 그리고 더군다나….]

은서가 더는 뒷말을 잇지 않고 멈추자 하정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랑 거의 똑같은 얼굴을 한 은서를 응시했다. 어딘가 항상 위태로웠던 저랑 달리 너무나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에서 지켜주었던 건 맞아. 무너지려고 할 때 나에게 손을 내민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그래서 좋아했어.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니. 가진 게 많고 잘난 사람이 그렇게 잘해주는데. 근데 있잖아. 인연이란 게 참 이상하더라. 좋아하면 다 되는 줄 알았고 그게 영원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노력이 필요했고 타이밍이란 게 있었더라.]

[강은서. 난…]

[강은지. 넌 내게서 그 사람을 앗아간 게 아니야.]

조곤조곤 꺼내는 은서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용기가 없던 하정이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고 했고 은서는 하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나타나기 전 우린 이미 오래전부터 남여간의 끈은 없었어. 그 사람도 나도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야. 나에 대한 감정을 배신하고 너한테 마음을 연 게 아닐 거야. 그 사람은 그렇게 못 된 사람이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을 해. 나에게 없었던 표정과 행동들이 너한테서 보였어. 넌 모르겠지만 난 알아. 오래 보아왔잖니.]

[이런 말들이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해도 변하지 않는 건 딱 하나야. 둘이 어떤 상태에 있었던 나란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걸 깨닫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넌 대표님이랑….]

[잘 됐을 거라고?]

하정이 말을 마저 보태며 은서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말대로 네가 안 나타났더라면 우린 서로에게 어떤 감정인지 자각을 못 했을 거고 그냥 그대로 지내왔겠지. 근데 그게 1년, 2년, 또 10년을 흘러보내고 나면 아닌 감정이 다시 살아날까? 살아났다고 해도 우린 유지를 할 수 있었을까?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결과에 더 괴로워하게 될 꺼야. 사랑이라 믿었는데 지푸라기도 안 남았다면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거야. 지금이라도 알 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해. 그 사람은 나에게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었어. 이제 어리지 않은 난 그 가족을 벗어나 이 세상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이야. 나도 새로운 삶을 택해서 살 거고 그 사람 울타리에서 벗어나려고 해.]

거짓말…. 거짓말 같아…

하정이 눈가가 촉촉해졌다. 

[거짓말 아니야.]

가늘어져가던 하정이 눈이 커져갔다. 

은서는 하정이 속을 꿰뚫고 있는 거 같았다. 

[나 생각보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면 난 은지 너라도 양보 못 해. 그거 알아? 7살이던 은지 너한테서 배운 게 있 거든. 바보같이 누구한테도 당하지 말고 뺏기지 말라면서 내 편을 들어줬던 건 은지 너였어. 난 그런 은지가 좋았어. 언제나 당당하고 멋있던 내 동생 은지가.]

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려왔다. 어릴 때의 본인이 강은서한테 어떤 존재였을지, 아무 것도 기억을 할 수가 없어서 더  눈물이 났다. 

[즈레 겁먹고 물러서는 은지는 매력이 없어. 이것 저것 생각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을 해. 나를 비롯해서 누구도 너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어.]

은서는 변함없는 온화한 표정으로 하정에게 타일렀다. 

넌 잘못한 게 없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제 잘못이라 했다. 하정이가 왜냐고 묻자, 은서는 처음에는 그저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 하는 말이,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일찍 못 찾아갔던 죄라고 했다. 순서가 틀려서, 너를 힘들 게 한 건 본인이라 더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동생에게 안 좋게 보여질 거라 생각되어 즈레 겁먹은 건 자신이었고 용기를 내어 찾아갔더라면, 그리고 그 사람을 소개시켜줬더라면… 

두 사람이 또 사랑을 해도 그건 본인이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다. 제 몫이 아닌 사람이었으니. 

다만, 움츠렸던 본인 때문에 모두에게 불필요했던 상처를 준 거 같아서, 그래서 괴로웠다. 

마지막으로 은서는 그랬다. 

[다음엔 꼭 좋은 소식을 전해줘. 겉보기엔 안 그래 보여도 그 사람, 마음이 참 여리고 외로운 사람이야. 그러니 그 사람 곁에 있어줘. 예쁜 아기도 낳고 오손도손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란 말이야.]

[…!]

하정은 놀라했지만 은서는 하정이가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 눈치를 챘다. 아랫배에만 가 있던 하정의 손을, 작아도 한참이나 작을 뱃속의 존재를 저도 모르게 보호하려는 엄마의 본능을. 

은서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 스위스로 가야 한다는 은서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남자친구라고 소개해주던 그 사람 곁에 있기로 한 거 같아서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모두가 저보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사람 본인도, 친구 정연도, 엄마도, 강은서도….

하지만, 

강은서가 아니라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또 한가지가 있었다. 그 사람이나 저나 지금은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이게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감정일까. 정말 그 사람은 은서가 아닌 나라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이제는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더 꽁꽁 옭아매기만 하고 나중엔 서로를 탓하지는 않을까. 

부모님 이외에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적이 없던 하정은 그날 밤 여러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

아침 공기가 꽤 차가워진 10월이 성큼 다가왔다. 하정이 배는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불룩해지고 있었다. 워낙에도 삐쩍 말랐던 몸이라 더 눈에 띄게 임산부라는 걸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보건소에서 받아온 임산부 뱃지를 가방에 걸고 하정은 출근 길에 나섰다.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한 그녀가  뱃지를 달고 다니는 거에 처음엔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 본인이 크게 신경을 안 써서 그런걸까. 이제는 하정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중기로 들어선 지금은 입덧도 사라지고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끝낸 하정이는 따뜻한 유자차를 포장해서 건물 옥상으로 왔다. 점심 햇살이 어찌나 좋은지 한낮은 정말 여름 날씨 같았다. 

하정은 유독 파랗고 높은 가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맑은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켰다. 

”띠리리리리링.“

한참을 여유를 만끽하던 하정이가 벨소리에 눈을 떴다. 

”응. 정연아.“

친구 정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뭐해? 밥 먹었어?“

”응. 먹었지.“

”요즘은 어때? 몸은 괜찮아?“

요즘의 정연은 부쩍 많아진 회사일 때문에 하정과 얼굴을 마주한지 꽤 되었다. 본부장 따라 출장도 많아져서 하정이랑 만나고 싶음에도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입덧도 끝났고 상태가 너무 좋아. 걱정 안 해도 돼.”

“다행이다. 축복이가 이제 삐쩍 말라가는 엄마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나보다.“

”하하… 그런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녁에 퇴근 후 니네 집에 잠깐 들릴게.“

”너 요즘 바쁘잖아. 이제 시간이 있을 때 만나. 피곤할 텐데 들리지 말고.“

”괜찮아.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생한다고 본부장님한테서 상품권을 받았어. 무려 50만짜리야.“

”와아~ 고생한 보람이 있네?“

전화기 너머로 정연이가 킥킥 거리며 좋아하자 하정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몇일 전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힘들어 못 하겠다면서 그러더니 돈 앞에서는 역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현실이다. 

”그래서 말인데, 뭐 먹고 싶어?“

”음~~ 그러면 정연이 덕분에 과일 좀 먹어볼까?“

”말만 해. 다 사줄 수 있어.”

정연이가 으쓱댔다. 

“애플망고?”

“망고? 알았어. 다른 것도 말해. 끊지 말고 줄줄이. 이 언니가 다 기억하고 사갈게.“

”망고만 일단 먹고 싶어.“

”뭐야, 김 새게. 그럼 내가 알아서 사간다?“

투덜대는 정연이 잔소리와 함께  통화를 끝낸 하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또 다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두 눈을 감았다. 

맥스 대표는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고 싶다는 하정이 말을 들어줬다. 허나, 그 뒤로 팀장이 얼마나 챙겨주는지 힘든 일 하나 없이 너무나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임산부가 그런 것까진 안 된다 쉬면서 해야 한다. 참…. 어쩌면 편의를 너무 봐주어서 그만둬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윤 대리님. 또 지하철 타시게요?”

퇴근 시간에 맞춰 하정이 회사 입구를 빠져나가는데 장 대리가 불렀다. 

“네.”

“차는 왜 안 갖고 다니세요?”

어느 순간부턴가 운전을 안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하정에게 궁금했던 장 대리가 물어왔다. 

”아, 그게…. 잠이 무척 많아져서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요. 대리님도 아시잖아요. 회사를 오는데 차가 너무 막히다보니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거. 지하철은 그럴 일이 없으니 편해요.“

”아, 그러시구나. 몰랐네요.“

장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정이 배에 시선이 갔다.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었던 장 대리는 다시 꾹 다물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 뵈요. 장 대리님.”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장 대리의 뜻을 알 리가 없는 하정이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네! 내일 봐요!”

뒤늦게 장 대리가 하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정은 고개를 살짝 틀어 숙여 인사를 하고 그대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후우…. 

장 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 대리가 운전해서 가는 방향과 지하철역으로 가는 방향은 같았다. 얼마 전에 장 대리는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정이 뒤로 누군가가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오직 그녀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어서 혹 나쁜 사람은 아닐까 싶어서 주시를 했었다.

그런데 조금 낯익은 그 모습은…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정장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모습을 한 그 사람의 옆모습을 보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그 뒤로 몇번을 더 그의 모습을 보았었고 하정은 전혀 눈치를 못 채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뒤에서 똑같은 보폭으로 걷고만 있었다. 아니, 다리가 길어서 가다가 멈추다를 반복한다고 해야 하나. 

오지랖인 거 같아서 한 번도 아이의 아빠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고 무슨 일인지 묻지를 못했다. 그래서 장 대리는 권기혁 대표가 거의 매일 같이 회사로 찾아오고 있다는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잘 계셨죠?”

정연이는 하정이네 집 현관에 들어서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미연에게 달라붙었다. 미연은 정연이 손에 들려있는 빵빵한 마트봉투를 받아들었다. 

”뭘 이렇게 잔뜩 사들고 왔어?“

”보너스 받은 걸로 임신한 제 친구한테 맛있는 걸 좀 사왔죠~”

“하정이한테 정연이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부럽네. 근데 요즘 왜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거니?  많이 바쁜가 봐.“

”네에~~ 너~~~무 바빠요. 본부장님이 대표님 업무까지 다  처리해야 하다보니 요즘 정신이 없어요.“

“대표님 업무까지 왜?”

기혁이와 연락을 주고 받았었지만 회사 일에 관해서는 들은 적이 없던 미연이가 물었고 정연이 구두를 벗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희 대표님 요즘 회사에 안 나오세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소문이 돌고 있긴 해요.”

“무슨 소문?”

“대표님은 지금 자리에서 물러날 거라고, 그 자리를 이을 사람은 본부장님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본부장님이 전보다 많이 바빠지신 거고요.”

“그런 얘기는 처음…”

미연은 방에 있던 하정이가 어느새 거실로 나와 이들한테 다가오자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왔어?”

“응.”

정연이 하정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미연이가 맛있게 만든 갈비찜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정연이가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집에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섰다. 하정이도 정연이가 출발하는 걸 보려고 따라 나왔다. 

“네가 사온 과일도 좀 먹고 가지 그래.”

“아니야. 배가 너무 불러서 더 들어갈 배도 없거니와 그건 너 먹으라고 사준 거니까 하정이 너나 많이 드세요.”

정연이 씩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고마워. 조심해서 운전하고, 또 연락해.”

“하정아.“

차 안으로 들어가려던 정연이가 빌라 입구를 향해 돌아서는 하정을 불렀다. 

”왜?“

초롱한 눈망울이 정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부르다 말아?”

정연이 저를 쳐다보기만 하자 하정이 입을 삐쭉거렸다. 

”하정이 넌 대표님이 궁금하지도 않아?“

”……“

”정말 안 궁금해?“

정연이 커다란 두 눈이 가늘어져갔다. 

”응. 안 궁금해.“

정연이 의심의 눈초리를 단번에 꺾으며 하정은 돌아섰다.

터벅터벅 계단을 밟았다. 

정연아. 

사실 나,

엄청 궁금해. 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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