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외전-여우구슬(제1회)

l판도라l | 2023.02.18 02:18:06 댓글: 2 조회: 670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3521
1.

칠흙같이 어두운 밤, 손톱눈만한 초생달이 어렴풋한 달빛 한줄기를 인간세상에 내려보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정의 시간.

높은 산과 깊은 수림을 갖고 있어 청구(青丘)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마을 언덕은 밤장막속에서 뿌옇게 그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그 언덕위로 작은 행장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애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얼굴은 대략 열대여섯으로 보였고, 구멍난 갓과 낡은 도포차림으로 보아 어느 청빈한 가문의 어린 도령 같았다.

언덕을 지나온 소년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발걸음을 주춤했다. 소년의 시선안으로 수림 언저리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년은 잰걸음으로 여인의 옆에 다가갔다.

“낭자,낭자...이보시오.정신을 차려보시오.”

여인은 혼절했는지 옴짝달싹 하지 않았고, 소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행장안에서 마른 전을 꺼냈다.

“혹시 기아에 시달리는 거라면 이거라도...”

전을 조금 찢어 여인의 입가로 가져가자, 여인이 무의식중에도 입을 벌려 전을 삼켰다. 소년의 얼굴에 알릴락말락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배고파 혼절한 것이로군.”

여인은 전 하나를 다 먹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낯선 인영이 있는 것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뒤로 움츠렸다. 소년은 얼굴에 둥근 미소를 그렸다.

“놀라지 마시오. 지나가는 과객이요. 이젠 좀 괜찮소?”
“도...도련님이 절 구해주신 겁니까.”
“근래에 기근이 심하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요. 어느 댁 처자이시오? 저 앞이 청구마을이니 댁이 어딘줄 알려주시면...”
“...저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댁을 찾아온 것이요? 저 마을 사람들은 내 두루 아오만.”

여인이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자 소년은 잠자코 여인을 쳐다보다가 또 한번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라면 실례가 많았소. 그럼...”

소년이 일어서서 몇걸음 물러서자 여인은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서 소년에게 예를 올렸다.

“비천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외람되오나 감히 도련님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누구에게도 눈에 가시인 사람이요. 구차한 목숨 버리지 못해 연명하는 처지니 굳이 이름을 알아 무엇 하겠소.”
“그래도 제겐 은인이시니 존함을 꼭 알고 싶습니다.”

여인의 말에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을 내린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석견이요. 내 이름은 이석견.”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를 만난 일은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아주십시오. 약조할수 있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소년은 눈을 들어 여인을 이윽토록 주시했다.

“알겠소. 내 약조하리다.”

소년의 모습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젠 나오거라.”

여인의 치맛자락을 헤집고 한 작은 소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하도 왜소한 몸집이어서 소년에게 발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여인에게 물었다.

“어머니...왜 저를 사람들에게 숨기시는 것입니까.”
“아직 기가 약하여 네 모습을 온전히 감출수 없다. 만일 우리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일부 욕심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그것을 노릴 것이다. 허니 어서 빨리 그것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느니라.”
“그런데 절 발견하지 못했는데도 왜 저분에게서 함구의 약조를 받아내신 겁니까.”
“널 숨기려다 들킨 것이 있다.”

여인이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부풀어보이는 치맛자락 사이로 삐죽이 나온 무언가가 달빛아래 어렴풋이 드러났다. 여인은 치마폭을 여미어 그것을 다시 꽁꽁 감추었다.

“초승달이 뜨는 날이면 가끔은 이런 경우가 발생하지. 이게 다 그 구슬을 잃어버린 탓이다.”

여인은 다시 시선을 들어 아득히 멀어진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이석견이라...그 아이가 벌써 저렇게 자랐군. 불원천리 여기로 온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여자아이는 눈을 깜빡거렸고 여인은 다시 꽁꽁 치마폭을 여미었다.

“어린 나이에도 무서운 통찰력과 자제력을 가졌구나. 정녕 이런 것을 보고도 전혀 안색을 동하지 않다니.”
“어머니,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여자아이의 말에 여인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올렸다.

“한양.”

달이 구름뒤로 얼굴을 감추었고 청구마을은 뽀얀 안개속으로 그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

2.

효종 10년.

임금은 자신의 앞에 엎드려있는 어린 조카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단정한 눈매며 준수한 미간이 꼭 어린 시절의 형님을 보는 듯 하여 임금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소년이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임금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드디어 상경했구나. 이젠 관례를 치를 나이가 지나지 않았느냐.”
“올해 열여섯이옵니다.전하.”

소년의 또렷한 대답에 임금은 미미한 웃음을 짓는다.

“열여섯이면 어엿한 성인일터. 그래, 어디 말해보거라. 뉘댁 규수가 좋겠느냐.”
“어찌 감히 명문가의 규수로 하여금 소인을 따라 고생을 하게 하겠습니까. 소인의 혼례는 소인이 알아서 할터이니...”
“어허!”

임금은 얼굴 한가득 노기를 띄였다.

“왕실종친이다. 과인이 네게 경안군(慶安君)을 봉할진데 뉘 감히 종친의 혼사를 여염 대하듯 하겠느냐!”
“어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

소년은 임금을 향해 다시 깊은 절을 올렸다.

“소인의 복권은 원치 않사옵니다. 다만 저의 어머님의 신원만 이루어지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사옵니다.”
“형수님의 일은 내 자연 염두에 둘 것이다. 허나 지금은 대신들의 반발이 심하니 내 차차 기회를 봐서 신원하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한양에 거처를 마련하였으니 이젠 더이상 떠돌아 다니지 말거라. 너도 과인의 체면도 생각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명 받들겠습니다.”

소년이 편전에서 물러가자 임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승지가 들어오자 임금은 그를 향해 물었다.

“경안군이 강빈의 신원을 요청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이는 필히 심사숙고할 일이옵니다. 전하.”

도승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선왕의 원손이고 소현세자의 3남입니다. 강빈의 신원이 이루어지면 종통(宗統)은 경안군에게 돌아가므로 이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흐음...”
“근자에 전하의 소갈병(당뇨)도 빈번히 재발하오니 부디 그런 일은 괘념치 마시고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그래. 알겠노라. 그러면 경이 주위에 두루 물색하여 괜찮은 가문의 규수를 주선해줄수 있겠느냐. 경안군의 배필로 말일세.”
“양천 허씨의 가문에 규수가 있사옵니다. 마침 혼인적령기라 하옵고 사헌부장령 허확의 여식이옵니다.”
“그럼, 경이 이 일을 주선할수 있겠는가.”
“맡은바 소임을 다하겠사옵니다.”

도승지가 편전을 나가자 임금은 피곤한 듯 몸을 뉘였다. 근자에 기력이 쇠해지고 머리와 얼굴에는 이젠 종기마저 나기 시작한다. 소갈병은 점점 심해지는데 북벌의 꿈은 아득하기만 한 게 한스럽다.

“형님...아마 뵈올 날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임금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청에서 자신을 유달리 보살펴주던 세자빈 강씨의 얼굴도 눈앞에 언뜰거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 심양에서 있었던 일도...

“그 아이가 저리 컸습니다.형님...”

임금은 축축해진 눈을 감았다. 유난히도 추웠던 심양의 그해 겨울,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그와 소현세자는 강빈의 해산을 임박해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산파가 눈이 쌓여 오지 못한다는 소식에 소현세자가 눈덮인 마당에서 발을 굴렀다.

“그럼 어떡하겠느냐...따라온 조선 여인중에 산파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겠는가.”
“저어...”

관사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여인들 중에서 한 여인이 일어섰다. 평소에는 짬짬히 길쌈을 해서 강빈을 찾아와 피륙으로 바꿔가던 여인이었다.

“쇤네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산파 경험이 있소?”

소현세자가 다급히 여인에게 물었고 여인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이 산실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갓난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산실에서 나온 시비들이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알렸고 희색이 만면한 소현세자는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봉림대군...내3남이 드디어 태어났소.내 이름까지 생각해냈소.”
“감축드립니다. 저하...아이 이름을 뭐라 하시렵니까.”
“노송 회(檜), 이회라고 하겠소.”
“어찌 장자와 차자처럼 석철, 석린...석자 돌림을 쓰지 않으십니까.”

그가 묻자 소현세자는 고개를 들어 관사앞의 소나무를 보았다.

“저 겨울철의 소나무처럼 단단하고 드팀없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요.”
“네에…”
“또한 애명을 석견(石坚)으로 하면 단단한 뜻도 보전하고 석자 돌림도 되오만.”
“그리도 좋으십니까.그러다 원손인 장자가 질투하겠습니다.”

그가 웃자 소현세자는 문득 두손을 마주쳤다.

“아...이런…내 산파에게 사례를 깜빡했소...”

소현세자가 여인을 찾는 사이 그는 관사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일일히 돌려보냈다. 평소 소현세자와 강빈의 혜택을 입고있는 조선의 볼모들이 강빈의 난산 소식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헤쳐진 곳에서 그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하얗고 투명한 구슬이었다. 아까 산파로 자처한 여인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는데 눈에 덮여 잘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몸을 굽혀 천천히 그것을 집어올렸다.

그의 손안에 들어온 하얀 구슬은 잠시 반짝거리다가 곧 눈부시게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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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75.♡.27) - 2023/02/18 13:25:52

글을 읽는데 드마라를 보는 느낌이네요..그 스토리가 눈앞에 똭 보이는듯..섬세하게 너무 잘 쓰셧네요..
저번에는 중국역사엿다가 이번에는 또 조선의 역사네요..도대체 모르는게 머가 잇나요?ㅎㅎ

l판도라l (♡.109.♡.60) - 2023/02/18 18:10:40

제가 역사를 좀 좋아했어서 소설을 쓸때 역사소재를 자주 가져오는 편입니다. 거기에 판타지가 가미된거면 더 좋아하고요, 암튼 고대사라면 다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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