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주술(최종회)

l판도라l | 2023.03.18 19:54:06 댓글: 1 조회: 905 추천: 4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51858
11.
봄볕이 따뜻하게 쏟아지는 어느날 오후, 나는 준이를 데리고 백화점 상가거리에서 디저트를 먹고있었다. 아이스크림 한입 가득 문 준이가 문득 내뒤를 가리켰다.

“엄마, 저건 뭐야?”

아들애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사탕을 꽃묶음으로 만들어 안고 한 커플이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있었다. 나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같이 먹으면 비위생적이야. 알지?”
“아니, 그거 말고 왜 저 이모는 사탕을 안고있어?”

아들애의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오늘이 화이트데이어서 그런거지.”
“화이트데이는 뭐야?”
“화이트데이는…음, 커플로 치면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
“그럼 엄마는 어떤 선물을 아빠 줄거야?”
“내가?”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보니 남편에서 선물을 못받았다고 투덜거린 날은 있어도 내가 남편에게 선물은 준 날은 결코 없었다. 윤지연…너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엄마는, 주고싶어도 줄수가 없잖아.”

겨우 이 한마디를 짜냈더니 준이는 금세 수긍이 간다는 듯 말이 없었다. 등뒤의 커플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알어? 저번 발렌타인데이에 월식이 있었잖아. 그리고 운석이 달 표면을 스쳤고. 그런데 지구 여기저기에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났대.”
“그걸 믿어?”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다 동영상 조작해서 찍어 올리는 거야. 관종들이지.”
“내 주위 친구들도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는데? 그날 소원을 빈 사람들이 거의 다 이루어졌대. 임신한 친구도 있고. 남친이 생긴 친구도 있고. 결혼한 친구도 있어.”
“그런 일은 소원을 빌지 않아도 이루어지잖아.”
“아이 참, 다 그날 소원을 빌었다고 했단 말이야.”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봐야지. 로또 당첨되라는 소원은 왜 안이뤄졌는데?”
“자기 설마…그날 자기도 소원 빌었어? 내말 듣고?”
“…아니 꼭 당신 말 들어서가 아니라…”
“참, 내가 잊고 말 안했는데, 그 소원 혼자 빌면 안돼. 발렌타인데이니까 커플이 같이 빌어야 영험을 본다고 했어.”
“그래? 왜 그 말을 이제야 하는데.”
“정말 로또 당첨되라고 소원 빌었어? 당신 생각보다 순진한데?”
“음…여기 아이스크림 맛있네. 하나 더 시킬까?”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다가 차츰 웃음을 거두었다. 기억에 소환되는 한단락의 대화가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엄마, 소원이라는 건 뭐야?”
“소원? 글쎄…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거.”
“그럼 엄마 소원은 뭐야?”
“엄마 소원은 우리 준이가 씩씩해지는거.”
“나 말고, 엄마가 하고싶은 건 없어?”
“엄마가 하고싶은 건, 아빠가 엄마처럼 한번 살아보는 거야.”

아아. 아아아아. 결국 나는 그 흔한 사우나 한번 못가고, 일박이일 여행이라 해봤자 고작 회사에서 보낸 출장이 다였지만…지금 와서 보니 내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 된다.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거창한 소원을 빌어볼 걸. 아, 그런데 잠깐…커플이 같이 빌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면…설마?

“엄마, 이젠 가요.”

아들애가 내 앞에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스크림 값을 지불한 후 아들애의 손을 잡고 천천히 상가 거리를 걸었다.

“엄마, 아빤 어디 갔어?”
“휴가.”
“언제 와?”
“글쎄…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 우리 준이 아빠 보고싶어?”
“네, 어제 아빠 얼굴 그렸는데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칭찬했어요.”

아들애가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남편이 휴가를 떠난후 나는 차대리를 한번 회사밑 커피숍으로 불러낸 적 있었다. 차대리는 나를 보자 두손을 비비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지연…지연씨…이번엔 왜 또. 요즘따라 자주 보네.”

몇일전 같이 커피를 마신 사람은 내가 아닌데…그전에 호프 같이 마신 사람은 나 맞지만. 나는 입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고 커피 한모금을 들이켰다.

“준이 아빠 일로 보자고 했어요. 차대리님.”
“지연씨, 말 편하게 해. 우린 충분히 서로 편한 사이…”

차대리의 말을 자르며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리님은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는 지금처럼이 더 편해서요.”
“아, 그래.”
“오늘은 다름 아니라 준이 아빠 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얘기해. 내가 아는만큼은 다 알려줄께.”
“준이아빠…가끔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고 했어요. 혹시 우리 준이아빠 몸이 어디 안좋은 데라도 있나요? 회사에서는 어땠어요? 대리님 아시는대로 다 말씀해주세요.”
“글쎄. 언젠가 월차 내고 병원에 다녀오는 걸 보긴 했어.”

차대리는 미간을 모으고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두번인가, 세번인가. 최근에는 별로 못봤는데.”
“어느 병원인지 기억하시나요?”
“그게…”

……

차대리가 알려준 병원은 바로 내가 몸이 바꿔었을때 엄마와 함께 갔었던 그 병원이었다. 요즘 병원들은 시스템상 환자들의 모든 정보가 전산 입력이 잘되어있어 내가 신분을 밝히고 남편의 담당의사를 찾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큰 수술이 아니고 복강경 수술이어서 회복도 빨랐구요. 그런데 아내분이라면서 정말 모르셨습니까. 담낭염 같은 건 평소에 자주 아프니까 어느정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쉽게 알수가 있는 병이거든요. 수술후에도 몰랐다니 참.”
“전혀 티를 안내서…”

나는 혀아래소리로 중얼거렸다. 의사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 어머니가 같이 아프셔서 경황이 없을만은 했겠지만. 어머님 담당의사분께 얘길 듣자니 아드님이 어머님 수술비도 다 대고 방사선 치료도 줄곧 시키고 그러다가 막상 본인 치료시기 놓친 건 아니냐고. 젊었다고 방심해선 안됩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더 허약해요. 시어머님과 남편 두분 다 소중합니다. 아시겠어요?”
“…”

나는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병원문을 나섰다. 아들이 아니고 사위라고, 시어머니가 아닌 내 엄마였다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았다. 병원 대문을 나서자 해볕이 하도 강렬하게 내리쬐어서 나는 그만 발을 비틀하고 말았다.

더듬더듬 병원밖 벤취를 찾아 앉았다. 비록 꾸밈이 없고 허세 부리지 않으며 바르고 정직한데다 배려심 깊은 그 성품에 끌려 연애를 시작하긴 했지만, 막상 사귀어보니 생일이나 명절을 챙길줄도 모르고 철저하게 계획적이며 모든 즉흥적인 일에는 지출을 자제하는 편이라 가끔 가치관이 부딪치는 경우가 있어 결혼전 은근히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혼을 하고 살림을 꾸리게 되면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된다는 엄마의 인생조언을 받아들여 그와의 결혼에 골인했던 것이다. 결혼해서 생일날 유일하게 받아본 선물이 빨간 원피스였고 그것마저 한부장이 입은 원피스와 같은 모델이었다. 그런 그가…

나는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쪽의 엄마의 목소리는 예이제없이 밝고 파워풀했다.

“우리딸, 무슨 일이야?”
“엄마…얼마전 엄마가 다녀갔을때, 엄마가 나한테 그랬죠. 나 정말 이혼하고 싶을때, 이혼 고집할때 엄마 한번 찾으라고.”
“응. 서서방이 전하디?”
“왜 그런 말 했어요?”
“응?”
“그런 말 해서…말이 씨가 됐잖아요! 나 이혼하자고 했고, 그 사람은 동의했어요. 그런데 이게 뭐에요?”

나는 그만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는 수화기 저쪽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대체 뭐가…”
“왜 날 속였어요? 그 사람이 수술비 방사선 치료비 다 댔다면서요? 왜 수술한 일 속인 것도 모자라 그 사람 한테 그런 경제적인 지원까지 받게 하냐구요? 엄마가 돈이 없어요?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지연아…진정 좀 해.”
“미안해서 어떡하라고…”

핸드폰을 틀어쥔 손이 떨리자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지연아…”
“나더러 어떻게 그 사람 얼굴 보라고…그런줄도 모르고, 태클에, 불만에…육아 스트레스를 그 사람한테 풀었어요. 결혼하고 출산한 게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 회사에서 한부장 못지 않게 잘나갈수 있었다고. 그런데 현실은 비정했고…난 그 괴리감을 참을수 없었어요…그 스트레스를 몽땅 그 사람한테 풀었어요. 그 사람이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 같아서…나 혼자 가정 위해 희생한 거 같아서…그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만 잃은 게 많은 거 같아서…”
“…”
“한스러웠고, 달통이 안되었어요. 점점 자존감도 잃어갔고…내 감정에만 집중해서, 막상 엄마가 아파도, 그 사람이 아파도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구요. 그깟 소꼬리찜이 뭐라고…그깟 육아 못도와주는 게 뭔 대수라고. 이리 이기적인 사람이였어요. 엄마 딸.”
“…”
“엄마…미안해요…엄마 아프면서도 나한테 미안해하게 해서…그런 마음으로 눈치보고 살게 해서…이제와서 알아놓고 엄마한테 야단쳐서…이렇게 불효막심해서…정말 미안해요…엄마…”
“…”
“막상 이런 상황에서도 그이한테 왜 그랬냐 사실확인도 못하는,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는…이렇게 못난 딸이에요…엄마 미안해요…엄마…”
“지연아…울지 마.”

엄마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그거 알어? 내가 말 안했던거랑, 서서방이 너한테 얘기 안한 거 아마 같은 생각을 해서일거야.”
“…”
“난 네가 걱정하는 게 싫고, 네가 부담 가지는 게 싫었어. 나 사실, 아파서 오랜 시간 일을 못했어. 그리고 병때문에 노후대책으로 모아둔 적금 깨려고 했어. 그걸 알고 서서방이 막더구나. 자기가 비상금으로 모아둔 돈이 있는데 너도 모르는 거라고. 그래서 부담갖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써버려도 된다고.”
“…”
“난 그래서 너 정말 이혼 결심할때 전화 달라고 한 거야…네가 이미 알았으니 이젠 얘기해주는 거야.”

나는 한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네 남편…니가 살면서 앞으로라도 자존감 잃을가봐 말 안한 거야. 니가 당당한 게 좋고, 자기한테 한마디도 안지고 따박따박 대드는 것마저 좋다고 하더라. 콩깍지가 씌여도 든든히 씌였지. 대드는 게 뭐가 좋다고.”
“…”
“그런데 그게 행복하다고 하더라. 네가 너로 사는 게 좋단다. 너 아닌 한 가정의 딸로, 엄마로, 와이프로 사는 것보다 너 자신으로 사는 게 좋다고. 그래서 자기가 도움준 걸 알게 되면 네가 혹시라도 자기랑 싸울때 기죽거나 위축되어서 할말 다 하지 못하고 살지 않을까, 그래서 자존감 잃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된다고 하더라.”
“…”
“네가 너 아니게 되면, 그런 너와 사는 자기가 자괴감 느껴진다고 했어. 그래서 서서방은 니가 이 일을 쭉 몰랐으면 했거든. 그렇게라도 니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었나봐. 그러니 모르는척 해줘. 모르는척 하는 게 널 사랑하는 그 마음에 대한 예의야. 나도 이제 차차 일 시작해서 그동안 쓴 병원비 갚을 거니까.”
“바보천치 아니에요? 바락바락 대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 첨 봤네. 그건 무슨 변태심리야.”

겉으로는 욕했지만 내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엄마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앞에서 이러지 말고 좀. 이럴 시간이면 니 남편한테나 문안전화 좀 해. 지금 휴가 갔다면서.”
“귀신이다. 어떻게 그것까지 알아요?”
“내가 모르는 게 어딨니. 너네가 직면하는 모든 일 내 손바닥안에 있어.”
“말해봐요. 또 뭘 알고있죠? 엄마가 어디까지 알고있는지 함 얘기해봐요.”

설마 우리가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마저 알까? 나는 한수 더 떴고 엄마는 수화기 저쪽에서 카랑카랑하게 웃었다.

“됐어. 다 얘기하면 재미없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께.”

통화를 끝내려는 내게 엄마가 문득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네 시어머니 말이다.”
“네? 어머님이 뭐요.”
“전화와서 차 한잔 하자더라. 너에 대한 얘기도 좀 할겸. 한동네 살면서 아직 너네랑 같이 쇠는 명절 빼고는 만나지 못했거든. 이렇게 단둘이 만나서 되려나…”
“뭐 어때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 몇송이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떠있었다.

“두분이 만나서 내 욕이나 하지 마세요. 엄마는 그게 안되더라. 다른 사람이 내 욕을 하면 딸 편을 해야지 왜 그 사람 편 하는 거에요.”
“자고로 여자들이 같은 사람을 욕하는 건 서로의 우정을 돈둑히 하는 지름길이거든.”
“아, 엄마!”

엄마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님…저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12.
“아빠?”

내 상념을 끊으며 아들애가 걸음을 멈추었다. 집근처 마트 부근이었다. 햇살이 한가득 거리위로 쏟아지 있었고 조무래기들이 희희락락 마트앞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혀를 차며 아이를 끌어당겼다.

“애도 참, 대놓고 아빠야. 아빠는 휴가중이라고 몇번을 말해…”
“아니, 저기 아빠 맞잖아.”

아들애의 고집에 나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트 앞에서 한손에는 캐리어를, 한손에는 크다란 사탕꽃묶음을 안고 남편이 서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 희색이 만면해서 사탕꽃묶음을 흔들었다. 그바람에 단단하게 묶지 못한 리본이 풀렸고 사탕이 사처에 뿌려져 나갔다. 조무래기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어 사탕들을 주었다.

“엄마, 아빠 왜 저래? 왜 다른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줘?”

아들애는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눈을 반짝거렸고 나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으면서 아들애한테 말했다.

“준아, 아빠가 아마 명절을 착각했나 보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인가 해서 산타할아버지 훙내를 내는 거란다.”
“정말?”
“응. 아빠 상관 말고 우린 집에 가자.”
“싫어, 난 아빠한테 갈래. 나도 사탕 가질래.”

아들애가 내 손을 뿌려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자기 주장이 생겼지? 나는 잠시 멍해있다가 천천히 아들애의 뒤를 따라갔다.

“여보.”

뭐가 그리 기쁜지 싱글벙글 나를 맞이하는 남편에게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엷은 미소 한가닥을 지어보였다.

“어떻게 왔어? 휴가 아직 많이 남았잖아.”
“보고싶어서 왔지.”
“어우…닭살.”

나는 두팔로 몸을 감으며 주위를 살폈고 남편은 몇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보, 내가 이번에 가서 드디어 당신 선물을 사왔어.”
“선물?”
“응, 그동안 당신 취향 몰라서 선물 고르는 게 참 어려웠는데. 차대리가 그러더라. 여자들은 무조건 꽃 아니면 옷이라고.”

그넘의 차대리…나는 웃으려다 말고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봄날의 둥근 햇살이 그의 미소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그래서, 이번 선물은 뭔데.”

나는 한손으로 아들애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남편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원피스.”
“뭐? 또 한부장이 입던 모델은 아니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번엔 수소문해서 그 브랜드 최신상 모델로 샀어. 아직 여기까진 유행 오지도 않았을 걸.”
“정말? 믿어도 될까?”
“당신이 좋아한다는 음…스마트한, 허리라인이 떨어지는 그런 디자인으로, 색상은 인디핑크…”
“핑크? 난 핑크 안입잖아.”
“그리 빨리 속단하지 말고 들어봐. 이 인디핑크는 이번 시즌 유행이야. 지금 한창 봄이잖아. 벗꽃의 색상을 본따서 만든 원피스라 다들 손에 넣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게 또 하필이면 한정판이야. 하지만 내가 또 누구냐. 이깟 어려움에 단념할 내가 아니지. 암튼 이 원피스는 내가 이번길에 얼마나 애를 써서 구한 건지 당신이 들으면...”
“벗꽃…혹시?”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핸드폰을 내게 넘겨주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비번을 해제한후 그에게 핸드폰을 보이며 물었다.

“이 원피스 맞어?”

그의 위챗 친구 모멘트에 올라온 사진 한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해외 지사로 발령된 한부장이 어느 파티현장에서 찍은 몇장의 사진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무대위에서 축사를 하는 한부장은 심플한 디자인에 은은하게 벗꽃이 돋친 인디핑크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차대리 모멘트에서 본 사진이었다. 사진을 확인한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어떻게 벌써 손에 넣었지?”
“벌써 손에 넣은 건지, 선물 고르기 싫어서 대충 남이 입은거 골랐는지 누가 알아.”

내가 입을 삐죽이며 돌아서자 그는 급히 내 팔을 잡아 자신에게 돌렸다.

“아니, 아니야. 정말 내가 애써 구한 거라니까. 이거 찾느라고 이 브랜드가 입주한 백화점을 내가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그러니까 왜 돌아다녀. 누가 그깟 원피스 사달랬어?”

내가 사정없이 내뱉는 말에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럼…어떤 선물이 좋지?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좀 선물 센스가 없어. 그래서 지금까지 당신 선물 하나 제대로 못해줬는데. 차대리 말 듣고 이젠 조금씩 고쳐가려고 그랬던 건데.”
“그런다고 없던 센스가 있어지나.”

나는 피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상사 고르는 센스도 없잖아. 당신. 한부장이 해외 지사로 갈때 같이 가자고 했다면서. 그러면 만년 과장 자리는 떨칠수 있을텐데. 그땜에 승진 미뤄졌다면서?”
“차대리가 또 입을 놀렸군.”
“그러니까 차대리 너무 믿지 마.”
“…”
“내가 언제 내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어디 나가서 떠들고 다녔을 거 같어? 특히는 차대리한테. 당신이 아는 윤지연은 그런 경솔한 성격이었어?”
“치밀한 성격도 아니지.”
“뭐?”
“아니야…암튼 그 일은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차대리가 언젠가 당신 모멘트 보고 넘겨짚은거라고 얘기하더군. 그래서 다른 사람 와이프 모멘트 연구할 시간에 일이라도 열심히 하라고 이번달 몇가지 과제 맡겨줬거든. 차대리 휴가 반납하게 생겼지.”
“누가 밴댕이과장 아니랄까봐.”
“밴댕이?”

그가 살짝 미간을 구기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사실 다른 선물 한가지 더 있는데 밴댕이라고 하니 취소해야겠는데.”
“다른 선물? 보나마나 아까 그 사탕꽃이겠지. 그건 이미 애들 다 나눠준거 아니야?”

내가 한껏 빈정대다가 그의 얼굴색을 보고 바로 작전을 바꾸었다.

“뭔데? 되게 궁금한데? 빨리 알려줘.”
“방금 밴댕이라고 했잖아.”
“누가? 우와 미쳤나봐. 어찌 그리 어이없는 말을 할수가…”

그러는 내가 하도 어이 없는지 그가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나는 아들애가 저쪽에서 친구로 되어보이는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에게 몸을 돌리고 살짝 발뒤꿈치를 들었다.

“여기.”

그래도 그가 여전히 멍하니 서있자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라고는 정말.”
“…”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고 나는 어쩔수 없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뗐다.

“이럼 됐지?”
“당신…”

그의 눈빛에 뭔가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역시 다른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그가 내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이러려고 이혼 안해줬어?”
“뭐? 이혼을 안해줘? 웃겨. 이혼은 내가 먼저 하자고 했네요.”
“뭐. 그래도 이튿날 민정국 안간다고 버틴 건 누군데.”
“그날 아침 하필 배가 아픈 걸 어떡해.”
“그럼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거 같으니까 우리 지금…”
“이혼하러 가자고?”

내가 놀란 어조로 묻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내 귀에 속삭였다.

“…집으로 가자고.”
“그걸 뭘 또 그리 은밀히 말하는데.”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내 선물도 은밀한 거라서…”
“그 얘기 아직도 안끝났어?”

나는 못말린다는 듯 그에게 눈을 흘겼다.

“얘기해봐. 대체 무슨 은밀한 선물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속옷.”

풋…웃으려다 말고 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아들애는 아직도 친구랑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속옷선물을?”
“그때 보니 당신한테 비싼 속옷이 없더라구. 보나마나 평소에 자기옷 사는데 돈 아낀거 같아서.”
“사이즈는 알고 사온거 맞어?”
“그럼, 잘 알지…그 어느때보다 더.”
“…”
“어때, 이 선물은 마음에 들어?”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준이를 불렀다. 오후 햇살이 셋의 그림자를 길게 땅위에 내리드리웠다. 준이가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빠, 나 키 엄청 많이 컸어.”
“그게 뭐 또 그리 신기할까.”

나는 웃으면서 아들에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남편의 팔을 껴안았다.

“이젠 가자. 집으로.”
“정말, 아까 내 핸드폰 비번은 어떻게 풀었어? 그거 자기가 모르는 비번일텐데.”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꽉 깨물었다. 시어머니와 돈둑한 사이가 되고보니 좋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비번이 내 생일이 아니어서 시무룩했는데 다행이 한부장의 생일도 아닌 시어머니의 핸드폰 뒷자리수라는 걸 시엄니는 자랑스럽게 내게 알려주었고 이것은 앞으로도 그에게는 비밀로 해야만 했다.

“다~아는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비상금 모으는 행동은 안하는 게 좋아. 바로 들통 날테니까.”
“비상금? 난 그런 거 없는데? 무슨 소리야. 괜히 넘겨짚지 마.”
“네~네~없겠지요. 지금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핸드폰 바꿔쓸까?”
“핸드폰은 왜? 싫어. 얼마나 불편한데.”
“그럴줄 알았어. 싫음 말고.”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웃었다. 물론 불편할 것이다. 요즘 거의 모든 은행거래는 핸드폰을 통해 확인되는데 엄마 병원비때문에 발생한 카드빚을 갚기 위해서는 앞으로 상당한 부분의 야근수당과 보너스도 내게 비밀로 해야 하니까. 애초에 비상금 얘기는 엄마를 부담주지 않으려는 그의 배려였고 우연히 집으로 날아온 신용카드 대출상환 고지서가 내 배려로 다시 집밑 우편함으로 옮겨졌음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웃자 그도, 아들애도 멋 모르고 따라 웃는다. 따뜻한 햇살이 우리 머리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금세 눈이 부셨다. 나는 그 찬연한 해빛을 맞받아 실눈을 하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사는 게 가끔은 그렇다. 때로는 해빛찬란한 날들이 이어지고, 때로는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칠수 있다. 살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제대로 만날수도 있고, 인연이 엇갈려서 잘못된 만남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형태로든 혼인생활을 이어주는 사랑의 주술을 부려줄지도 모른다. 꼭 마치 우리가 겪은 일들처럼, 삶은 다양한 경험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이토록 의미깊고 소중한 것이다.

나는 긴 숨을 깊숙히 들이쉰 후, 길옆에 서있는 크고 작은 꽃나무들에 시선을 주었다.

자연의 주술이 풀리자 벚꽃 피는 계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

완결

2020년 도라지 1기 2기 3기 4기 연재로 발표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4) 선물 (1명)
IP: ♡.42.♡.225
로즈박 (♡.243.♡.150) - 2023/03/19 04:10:32

서로의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오해가 아니엿을가 생각해봅니다..그리고 남자들은 선물같은거 잘 못하더라구요..우리 신랑도 기념일은 맨날 까먹고 미리 언질을 주면 선물보다는 항상 캐쉬로..ㅋㅋ생일날 어쩌다가 꽃다발에 케익 같은걸 챙기고..오히려 선물은 아들넘한테서 더 받는같애요..
암튼 요런 부분은 어느 부부들한테나 다 잇는거 같애요..비록 소소한거지만 어느정도 이해를 해주고 넘어가는 센스도 잇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저도 그렇지 못한것도 돌아보니까 참 많앗던거 같애요..글을 읽어보면서 내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되네요..인젠 적게 잔소리하고 성격도 좀 고쳐야겟어요..ㅋㅋ
좋은 글 고맙게 너무 잘 보앗습니다..바쁘시는거 아는데 시간 내서라도 또 재밋는 글 들고 오시길~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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