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10회)

죽으나사나 | 2024.02.19 06:39:55 댓글: 1 조회: 340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8034
너를 탐내도 될까? (10회) 빨간색 와인.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실까. 정연 씨?”

정연의 웃기지도 않는 발언에 하정은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니야~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원래대로라면 네가 어떤 수를 놓았던 처음 계약 그대로 이행 불가한 기업들은 다 내쳤단 말이야. 이번은 처음이야!“

”네네~ 그렇겠죠. 알겠으니까 그만하시죠? 오정연 씨.“

반쯤 포기한 상태로 하정이가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영혼도 없는 네네를 시전했다.

”아니면 그 소문이 진짜인 걸까?“

”뭔 소문?“

”중소기업 인수 합병설.“

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정연을 보고 있으려니 또 비소가 비집고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하정은 크게 웃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인수 합병설은. 뭐 잘못 먹었어?”

“아니야. 우리 회사서 작년부터 중소기업 인수 합병설이 돌고 있었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소문으로는 너네 회사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가 돌았었어. 그래서 그런지 올해 너네 회사 주식도 엄청 올랐잖아.”

“주식?”

주식 얘기를 꺼내니 왠지 정 과장한테서 들은 적이 있는 거 같다. 사 놓은지 좀 되었던 우리 회사 주식이 꽤 많이 올라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던 그 말.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인수합병 얘기랑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말도 안 돼. 우리 회사 지금 저 혼자서도 잘나가고 있는데 왜 굳이 대기업에 인수를 당하겠냐. 그냥 헛소문일 거야.”

“뭐, 그렇겠지?”

정연이 자신도 그건 아닌 거 같았는지 머쓱하게 웃어넘겼다.

“하정이 너 요즘도 남자는 안 만나냐?”

“오늘 별소리를 다 하네? 당연히 없지. 네가 소개도 안 시켜주는데.”

하정이 정연을 보며 눈을 흘기자 그동안 많이 억울했는지 정연이가 펄쩍 뛰면서 테이블을 탕하고 내리쳤다.

“하, 얘를 봐라? 내가 너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몇 번을 설득했어! 네가 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싫다고 했잖아.“

“그건 옛날이고. 요즘 안 해줬잖아.”

나 이제는 필요할 거 같단 말이야.

“야. 걔네들이 언제까지 너를 기다려주냐. 다 짝을 찾았지.”

“아. 그랬구나.”

로봇처럼 감정 없이 답을 한 하정이가 호프만 들이켜댔다.

“맞다!”

하정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계약 철회니 제안서니 하면서 잊고 있었던 그 일!!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나,”

“어, 네가 왜.”

“남자랑 잤나 봐.”

“우리 나이에 남자랑 잔 게 뭔 별일이라고…. 어??? 하정이 네가 뭐라고? 누구랑 뭐 잤다고???”

못 볼 귀신이라도 본 듯 정연은 또다시 술집이 떠나가게 소리를 질러댔다.

“어, 분명히 잤어.”

“그, 그 잤다는 게 했단 소리야??”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정연이가 하정이보다 더 놀란 건 맞는 거 같았다.

“했다는 건…”

“하, 나 참. 둘이 막 물고 빨고 그 짓까지 했냐 말이야!”

정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저기… 죄송한데 다른 테이블에서 이쪽이 너무 시끄럽다는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조금만 낮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느새 알바생이 조용히 다가와 이들한테 난감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 죄송합니다!!”

둘은 동시에 얼굴이 발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

“왔어?”

세상 다정한 목소리에  부드러운 눈빛을 둔 기혁이가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직접 열었다.

”비번 알려줬잖아. 왜 매번 초인종을 눌러?“

”아저씨가 직접 문 열어주는 게 좋아서요.“

룸살롱이 아닌 밖에서 만날 때 은서는 기혁이를 대표님이 아닌 아저씨라고 불렀다. 빙그르르 예쁜 미소를 머금은 은서가 하이힐을 톡 하고 벗었다. 가지런히 놓으려고 허리를 굽히려는데 기혁이 커다란 손에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들어가. 내가 할게.“

굳이 그 큰 몸을 숙여 웅크리고 앉아서 나갈 때 편하게 하이힐을 가지런히 세워놓았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서한테 옆에 놓여있는 실내화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 앞에 놓인 실내화에 작은 발을 살포시 넣은 은서가 입을 열었다.

”은지를 만나보니 어때요?“

”성격이 급하시긴, 식사를 하면서 말해줄게.“

자리에서 툭 털고 일어서며 기혁은 은서의 양어깨를 잡고 안쪽에 있는 다이닝룸으로 이끌어갔다.

”와아…”

은서의 입에서 옅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거대한 펜트하우스에서 다이닝룸에 기다랗게 놓여있는 식탁은 결코 작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각종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있었다.

“언제 이걸 다 준비한 거예요?”

“이틀 후면 네 생일이잖아. 난 하필이면 내일 필리핀 출장으로 네 생일에 못 보게 될 거고. 다 내가 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거지? 요거, 요거, 그리고 저것까지만 내가 직접 한 거고 나머지는 출장 불렀지.”

“아…”

“미역국도 내가 한 거야.”

풍성하게 차려놓은 한 상을 보면서 은서는 눈가가 촉촉해짐을 느껴 바로 눈을 둬 어번 깜빡이더니 활짝 웃으며 기혁을 사랑스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안 써줘도 되는데… 출장 갔다 와서 같이 외식을 하면 되는데요.”

“은서야. 내가 해주면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거야.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은서의 말을 시정했지만 그건 결코 명령이 아닌 따뜻한 속삭임이었다.

”음식 식겠어요. 빨리 먹고 싶어요.“

은서가 식탁을 훑으며 딴 소리를 했다.

”어, 응. 그래.“

기혁은 은서 옆에 있는 의자를 은서가 앉기 편하게 쏙 빼주었고 그녀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반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맛있어요.”

기혁이가 직접 했다는 미역국과 잡채, 갈비찜을 맛보던 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음미를 했다.

“맨날 일하시느라 바쁠 텐데 언제 이런 걸 할 줄 알았대요?”

“너튜브가 있잖아. 고대로 따라 한 건데 뭐.“

”그대로 해도 맛이 이상할 때가 은근 있는데 한번에 성공하신 거네요?“

”어… 응. 그렇지?“

실패할 걸 생각해서 거의 10인분 되는 양을 샀는데 그 재료들을 다 썼고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다는 말은 못 하겠다.

기혁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맨날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먹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생일이 될 거 같아요. 고마워요.“

은서가 자꾸 고마워했다. 이렇게까지 고마워할 건 아닌데… 오래전부터 은서 생일에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다만 그럴 신분이 못 되었던 거지.

도연이가 하늘나라로 간 지 3년이 넘었다. 도연이한테 남녀 간의 애정은 없었지만 6년 넘게 한 지붕 아래서 살았던 공식적인 아내였다. 은서에게 다가갈수록 도연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고 난 3년은 은서를 만나는 걸 최대한 많이 자제했다. 그게 도연일 위하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와인을 챙겨올 걸 그랬어요. 난 그냥 은지에 대해 얘기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은서가 아쉬워했다.

“와인? 집에 있어.”

“네? 아저씨 집에 술이 있다고요?”

“응. 잠깐만.”

기혁이가 주방으로 향해 걸어가더니 금방 와인 한 병을 들고나왔다.

“술도 안 마시는 아저씨네 집에 술이 있다니. 신기한데요?”

오프너로 와인을 따는 기혁이가 굵은 팔뚝에 힘을 주니 핏줄이 두드러졌다.

와인 잔은 두 개였지만 와인은 은서한테만 따르고 자신의 잔은 물을 따랐다.

”생일 축하해.“

”한 잔도 안 마실 거예요?”

“응. 출장 때문에 마저 할 일도 남아있고.”

“아…”

납득이 간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잔을 들어 물만 담은 기혁이 잔과 살짝 부딪혔다.

“윤하정 씨 말이야.”

식사가 어느 정도 되자 기혁이가 하정이 이름을 입에 올렸다.

“네.”

은서가 답을 하며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밝더라. 사람이.”

지금의 너랑은 다르게.

”다행이네요.“

은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열심히 사는 거 같았어. 나름. 그리고 너랑 생긴 게 어쩜 그리도 똑같은지. 이 작은 도시에서 너희들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제가 일부러 은지가 다닐 거 같은 동네는 피했으니까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마주칠 수는 없죠. 전 이렇게 한없이 부족한데 은지 앞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어요.

“근데 있잖아…”

뒷말을 흐리면서 사색에 잠기던 기혁이가 혼자 피식 웃어넘겼다.

그런 기혁이 모습을 우연히 포착한 은서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저씨...?

우리 은지 생각을 하는 건가요?

...

"손님 방에서 자고 가지."

"제가 언제 여기서 자고 가는 걸 봤어요? 출장 때문에 할 일도 남았다면서요."

"그거야 서재서 내가 혼자 하면 되는 거고."

기혁이가 현관에서 나가려고 힐을 신는 은서의 팔을 잡았다.

아쉬워하는 기혁을 가늘게 올려다보던 은서가 웃으며 자신의 팔을 잡은 기혁이 손을 스르르 풀었다.

"오늘 덕분에 잊지 못할 생일을 보낸 거 같아요. 출장 잘 다녀와요."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었고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향만 남기고 은서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편,

"야, 오정연! 정신 좀 차려봐! 너 혼자 집에 갈 수 있겠어?"

"땅, 연하쥐!"

꼬부랑거리는 혀를 겨우 굴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정연이가 길바닥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나갔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처음 갔던 술집에서 창피해서 뛰쳐나오고 그대로 끝내고 집에 갔어야 했다. 내일 주말이라고 2차로 술을 오랜만에  달린다고 달린 게 화근이었다.

술을 그리 잘 못하는 하정은 별로 안 마셨지만 이제 술 주량이 늘었다면서 호언장담하던 정연이가 죽도록 퍼마시더니 결국 이 사달을 만들었다.

"내가 아무래도 같이 가야겠어."

"저 혹시 대리 부르신 분...?"

"네! 맞습니다!"

정연은 자신을 부축하던 하정을 홱 밀치고 쭈볏거리며 다가온 사람한테 다가갔다.

"나쁜 기지배. 너랑 안 갈 꼬 야. 왠지 알아?"

혀 꼬인 소리로 뾰로통해서 입을 삐쭉 거리는 정연이 때문에 괜히 창피하기까지 했다. 하정은 옆에 쭈볏거리고 서 있는 그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왜 같이 가기 싫은데."

귀찮지만 안 물어보면 더 시간을 끌 거 같으니 예의상 물어줬다.

"어떻게 남자라는 생물에 통 관심이 없다던 네가 나보다 더 먼저 남자랑 자냐고!!~~~ 이게 말이 돼...읍!!"

미쳤나 봐! 오정연!

하정은 무슨 말까지 꺼낼지 모르는 정연이 입을 꽉 틀어막았다.

"아하하하... 얘가 미쳤나 봐! 너 이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힐끔힐끔 대리운전하러 온 그 사람을 쳐다보며 더 크게 웃어댔다.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겨우 정연을 차 안에 던져버리고 정연이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30분 정도 후에 도착할 거 같으니 주차장으로 나와 달라고. 너무 취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보태고.

거의 몸싸움 수준으로 시덕 질을 하다가 정연이를 태운 차가 사라지니 어딘가 허전함까지 느꼈다.


"못 이길 술을 왜 저 정도로 마시냐.  참, 이해가 안 가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하정이가 문득 저 먼발치 앞에서 와인병을 들고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여자와 마주했다.

휘청거리는 그 모습이 왠지 누구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었다.

그러다 도로 난간에 부딪혀 거의 쓰러질 뻔한 여자를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확 당겼다. 이때 여자 손에 들려 있던 와인이 남자의 옷에 와르르 흘러내렸다.

솜사탕처럼 하얀 셔츠가 순간 발갛게 물들었다.

빨간 셔츠.

왜 낯설지가 않은 걸까.

어디에서 본 적이 있나? 근데 내가 어디에서 볼 수가 있었을까....

허얼..........

마포대교 위,

그날 있었던 일이 하정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좌르르 스쳐 지나갔다.
추천 (2) 선물 (0명)
IP: ♡.214.♡.18
나단비 (♡.252.♡.103) - 2024/02/19 10:41:11

다음이 궁금하네요. 재밌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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