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11회)

죽으나사나 | 2024.02.19 21:05:00 댓글: 2 조회: 348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8215
너를 탐내도 될까? (11회) 룸에서 기다려.
일주일 전, 마포 대교 위.
기억을 잃고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되어 죽으려고 했던 그날, 하정은 한 손에 와인병을 들고 다리 난간 위에 두 발을 올렸다. 난간을 넘어가야 했으니 한쪽 발을 더 높이 들려고 하는 순간, 몸이 휘청거리면서 뒤로 자빠지려고 했다.
"어어엇!"
이대로 뒤로 넘어가면 익사가 아니라 콘크리트 위에 뒤통수가 깨져서 죽을 거 같다.
아, 이것도 괜찮은 건가? 어차피 이제 쓸모가 없어질 내 머리...
안녕.
눈을 감았다. 두 팔은 활짝 펼친 채.
이제 죽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찰나에, 누군가가 갑자기 하정의 허리와 어깨를 꽉 잡았다. 
"어?"
그 충격으로 하정이 손에 들려있던 와인병이 뒤집어진 채 위로 확 올라갔고 안에 남아있던 와인은 고스란히 하정을 부축해 주었던 남자의 몸에 사정 없이 흘러 내려갔다.
"아, 내 술!"
하정이가 흘러 내려간 와인을 아까워하며 몸을 허덕이며 움직이다 그 남자한테 와락 안겨버렸다.
"하... 좀 가만히 있으시죠?"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내 술... 아까운 내 술 내놔. 당신 때문이야."
그러건 말건 하정은 젖은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혼자 중얼거렸고 그대로 풀썩 남자의 몸에 기대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래.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고...
그다음은 뭐지?
여기서 다시 필름이 끊겨버렸다.
아마도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정신을 잃었으니 호텔로 데려간 건 영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고.
근데 왜 옷은 홀라당 다 벗고 있었을까?
그날 옷에서 솔솔 배어 나오던 그 세제 향으로 보아 옷에 토를 해서 세탁에 맡긴 걸까?
남자 옷에는 와인을 쏟았으니 벗는 게 당연할 테고...
근데 왜 굳이 같이 한 침대에서 자야 했냐고.
날 건드린 걸까? 아니면 나도 같이...
"으으~"
하정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머리를 강하게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부정해야만 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납득 시킬 수가 없었으니.
근데 그 촉감...
너무 부드럽고 괜찮았어. 이런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거겠지?
그리고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울적해졌다.
***
열흘 후,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급하게 내려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승선하고 없었다. 휑한 항구에는 몇 명의 크루즈 안내 직원들만 있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나긋한 목소리의 여자 직원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뛰어오느라 아직도 헐떡거리는 하정이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 네. 여기요.“

“아시안 캐리비안 크루즈에 초대받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여정 되십시오~”

살가운 직원들 인사를 받으며 선착장으로 나갔다.

”와아…“

가히 크다, 멋있다는 간단한 한마디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사이즈의 크루즈선이었다. 12층으로 이루어진 크루즈선은 3000명도 넘는 승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지?

코앞에 마주 선 대형 크루즈는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차마 그 크기가 한눈에 가늠이 안 될 지경이었다.

드디어 승선이다!
하정은 작은 캐리어를 탈탈 끌고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크루즈에 몸을 담갔다.

[크루즈 행사 관계자분이시군요. 승선하시면 바로 4층인데 3층 안내 데스크로 가시면 방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아까 터미널에서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던 직원 말대로 3층으로 향하려다가 4층 난간에 몸을 덥석 갖다 붙였다.

“예쁘게 꾸미고 왔는데 출발 전에 인증샷을 찍어야지~”

아침에 알람 시간에 맞춰 일어나긴 했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어제 다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맨날 회사서 입던 오피스 룩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이번 크루즈 승선이 꼭 여행 목적은 아니지만
어차피 쇼는 3일차가 아닌가. 무대 준비도 3일차 낮에 하게 될 테니 이틀은 온전히 내 시간 아닌가?

부랴부랴 옷장을 뒤졌다. 예뻐서 사놓기만 하고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화려한 패턴의 쉬폰 롱 원피스를 꺼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하늘하늘거릴 듯 한 예쁜 원피스였다.

화장도 그에 맞게 평소보다 진하고 과감하게 하였고 머리는 어떻게 할까, 바다 위에선 머리를 풀어헤치기는 아무래도 바람이 좀 많이 불어서 산발이 되겠지? 단아하고 우아한 올림머리를 해야겠다. 예쁜 핀도 꽂고.

그리고 향수는….

다 떨어졌네. 저번에 산다는 게 병원을 다녀오고는 정신이 없어서…

하…

불쌍한 윤하정.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더니….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이야…

그래. 내 인생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하자.

[아, 그게 있었지.]

작년에 팀 막내가 생일 선물이라고 준 향수가 있었지. 향이 너무 애들 꺼라 구석에 처박아 둔…

다시 허공에 뿌리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역시나… 애들용이다.

복숭아 향이 뭐냐고. 나이 서른 넘었는데.

[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오랜만에 앳된 기분 내볼까?]

향수를 손목에 칙-  귓등에 칙- 뿌린 뒤 평소보다 많이 예뻐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하정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가 예상보다 많이 늦어진 시간을 발견하고 집에서 뛰쳐나왔지.

하정은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바닷가가 좋아 눈을 감고 크게 그 공기를 들이켰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귀여운 표정, 도도한 표정, 예쁜 표정까지 다양한 자세로 찍기에 바빴다.

그러다,
하정이가 여기저기 방향을 바꾸어 셀카를 찍던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럼틀을 타듯 아래로 시원하게 흘러내려갔다.

“어어!??? 내 폰!!!!“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난간으로 손을 뻗었지만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폰은 그렇게 망망대해로 사라져버렸다.

어떡해!!
크루즈에서 내려가서 직원한테 얘기할까? 하지만 내려간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잖아.

아무리 출발 전이라 내려간다고 한들 저건 바닷물이잖아.

“아아아…”

왠지 일진이 안 좋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직원이 얘기했던 3층으로 내려가려고 발을 떼었다.

“언제 도착했어? 전화도 안 받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한 사람. 귓가를 파고들듯이 가깝게 다가와 속삭였다. 하정이 어깨에 살포시 손까지 얹고.

누구…

가까운 거리에서 반사적으로 머리만 까딱 돌렸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권기혁 대표다!

아닌가? 저번에 픽 하고 웃는 것까지는 그런가 싶은데, 지금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보이며 세상 밝게 웃는 저 모습은 완전 딴 사람인데??

“복숭아 향이네.”

귓가에서 속삭이며 맴돌더니 어느새 하정이 향수 냄새까지 맡았나 보다. 짓궂게 더 다가오는 느낌에 하정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피했다.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땐 여전히 하정한테서 따뜻한 시선을 떼지 않은 기혁이와 눈이 마주쳤다.

멀뚱멀뚱 같이 올려보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하정이가 가까스로 그의 강렬한 눈빛을 피한 채 엘리베이터 방향을 가리키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내려가야 하는데…”

“너 몇 호실인지 모르잖아? 이 노란 거는 룸 카드고 이 검은색 카드는 선 내에서 결제할 때 쓰는 거야. 폰 줘 봐.“

카드 두 개를 하정이 손에 쥐여주고 손을 내미는 기혁이.

“아, 내 폰!”

눈을 깜빡만 거리다 정신이 돌아온 하정이가 울상을 지었다.

“왜 그래?”

“금방 여기서 셀카를 찍다가 바다에 떨궜어요…”

“아…”

오늘따라 은서가 왜 이렇게 귀엽지? 은서한테 저런 표정도 있었었나. 너무 사랑스럽다.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대표님, 어떡해요? 선상 와이파이도 다 결제했는데 다른 분들이랑 연락을 못 하게 생겼어요.”

입을 삐쭉거리며 울먹이는 하정을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며 위로인지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는 기혁이.

“조금 있다가 크루즈 전용 폰을 갖다 줄게. 객실은 9층이야. 9120호. 아래가 아니라 위로 올라가야 해. 다만 지금은 객실 안은 못 들어갈 거야. 먼저 5층에 가서 안전 교육을 받아야 할 거고…”

“대표님!”

기혁이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혁이는 그 소리에 바로 뒤돌았고 목소리로 보아 이한이란 건 짐작은 했다. 하정이도 얼굴을 빼꼼 내밀고 싶었지만 좁은 통로에서 기혁의 커다란 몸이 거의 다 가려져 있는지라 가깝게 다가온 이한 과는 서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들 대표 님을 찾으십니다. 이제 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이한도 역시 기혁이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뒤돌아서 다시 가라는 그의 몸짓에 포기하고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러 앞 장 섰다.

뒤따라 가려던 기혁이가 다시 하정이에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싱긋 웃으면서 몇 마디를 흘리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곳곳에 재미있는 액티비티가 많으니 많이 둘러봐. 오늘 낮엔 아마 내가 바빠서 곁에 못 있을 거야. 밤에 너무 늦지 않게 갈게. 룸에서 기다려.”

“네.”

네???

어디에서 기다리라고요??

잘못 들었…겠죠??

세상 아무렇지 않게 뱉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멘탈이 깨져 버린 하정은 멍하니 서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대표 님이 왜 나한테 갑자기 반말을 하지? 그것도 솜사탕처럼 살살 녹이는 눈으로 살갑게 지 여자친구를 대하듯이?!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이해는 안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그 말은 또 뭐고??

밤에 너무 늦지 않게 온다는 거긴 설마 진짜 룸이야??

설마, 설마…
이것저것 생각하다 안전 교육을 받았고 어느새 크루즈는 큰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출항을 했다.
하정의 금방까지 심각하게 하던 고민거리는 어느새 싹 가시고 12층까지 뻗은 크루즈선을 아래위로 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러 규모의 수영장과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워터 슬라이드도 있었고 스포츠 시설도 여러 군데, 레스토랑도 모두 몇 군데에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시범 운항이라 그런지 운영은 안 하는 거 같은데 면세점과 카지노도 있었다. 
전에는 어떻게 달랑 배 안에서만 몇 날 며칠을 여행을 하나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 직접 체감을 해보니 이 대형 크루즈 안에서는 뭐든 다 가능해 보였고 또 각종 액티비티 운영으로 지루할 틈도 없을 거 같았다.
​대충 돌아봐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인류의 머리는 대체 어디까지 발전을 할 것인가. 

자세히 돌아보면  또 생각지 않은 곳들이 많이 나오겠지. 

나 홀로 감탄을 발사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한 게 없이 시간이 많이 흐른 거 같았다. 크루즈 안이 어찌나 큰지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패션쇼 팀은 안 보였다. 

사실 사람보다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상대방도 자신을 못 찾은 걸 보니 다들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아서 한편은 다행이었다. 

“보자,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12층 꼭대기에서 열리는 선상 파티와 불꽃쇼네.“

크루즈 직원한테서 선내 가이드북을 받은 하정은 그걸 유심히 살피며 엘리베이터 9층 버튼을 눌렀다. 

몇 시간을 돌아다닌 거 같다. 
이제 룸에 들어갈 수 있는 거 같으니 짐도 풀고 잠깐 쉬어야  했다. 

기혁이가 말한 9120호를 찾아 카드를 대니 무거운 열림 음이 들리면서 객실문이 열렸다. 

“이, 이게 웬…”

별생각 없이 들어선 룸 상태는…

진짜 대박이었다. 

하정이가 발을 담근 이 룸은 웬만한 호텔 룸도 저리 가라 하는 큰 사이즈와 호화로운 방이었다. 

​“무슨 일개 직원한테 이런 호사를…. 역시 대기업이네. 와아~~“

발코니까지 겸한 여기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발코니에  나가보니 층이 높아 아찔하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이 느낌은 무엇에 비교를 해야 제대로 전달이 다 될지 몰랐다.

여긴 호텔로 치면 최상급인 스위트룸 정도일 텐데…

나한테 이렇게 좋은 룸을 선사해 주신 권기혁 대표님 감사합니다. 

요즘 패션쇼 팀이네 뭐네 하면서 갖은 일을 시킨다고 욕을 좀 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깨끗하게 주워 담을 게요. 

죄책감을 느낀 하정이가 혼자 마음속으로 크게 사죄를 하고는 얼른 발코니에서 룸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서 있기에는 잔잔하게 출렁이는 바닷물이 꽤 어지러워서 그대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난간이 꽤 튼튼하고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고 보면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바다 멀미를 좀 한다고 무서워서 뛰어 들어온 모습이란…

나란 사람 참 모르겠다.
추천 (1) 선물 (0명)
IP: ♡.101.♡.169
나단비 (♡.252.♡.103) - 2024/02/19 21:41:07

착각한건가요? 재밌어요 ㅋㅋ

죽으나사나 (♡.101.♡.169) - 2024/02/19 22:54:24

네엡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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