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가 살해되었다 (19회)

죽으나사나 | 2024.01.20 05:11:00 댓글: 0 조회: 151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1595
내 여자친구가 살해 되었다. (19회) 너와의 데이트 2

왕왕 왕, 주혁이의 머릿속에서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강아지의 웃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웃는 거 같은 강아지의 소리다.

지나가는 강아지가 웃겠네 진짜.

농담을 하는 줄 알았던 혜주가 진짜 주혁이랑 같이 강남에 모 백화점까지 와서 지금 옷을 고르고 있다. 그것도 섹시룩 전문 가게에서.

"저기 모자를 꾹 눌러쓴 남자 남주혁 아니야?"

"에이. 설마. 남주혁이 여길 왜 와. 그것도 여자랑."

직원들이 각자 많지 않은 손님을 응대하면서  방금 옷을 고르고 탈의실에 들어간 혜주를 기다리며 의자에 홀로  앉아있는 주혁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수다를 떨었다.

"쓰윽-"

탈의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왔다. 멍을 때리면서 축 처져있던 주혁이의 가지런한 눈썹이 확 치켜들리면서 검은 눈동자는 점점 커져갔다.

오늘날을 잡았다. 난 데이트를 할 것이다. 남주혁이랑.

[나 여기서 배우 그만하면 안 될까?]

새벽에 양볼은 민수한테 맞아서 조금 빨갛게 부어올라갖고는 거의 죽을 듯한 표정을 지었던 주혁이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밤새 생각을 했다. 내가 여기로 와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가 혜주의 몸에서 해야 될 게 뭘까.

안되는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생각한 결과는 한 가지였다.

어차피 나는 현실로 돌아가버리면 내가 혜주의 몸으로 여기서 무엇을 했든 미래에는 없다. 그건 즉 내가 평소 혜주랑 하고 싶었던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근데 내가 또 내 몸이 아닌 혜주의 몸에 들어와 있으면서 혜주가 어떤 시선에서 나를 바라왔는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또 주혁이랑 무얼 하고 싶었는지 알아내서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았다. 그리고 남주혁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말이다.

나의 역할은 그냥 딱 이건 거 같다.

“김혜주. 너 미쳤어?”

눈이 휘둥그레져서 혜주가 입고 나온 그냥 짧은 천 쪼가리 같은 원피스를  본 주혁이가 깜짝 놀라 가게에 걸려있던 아무 옷이나 잡아당겨서 거의 알몸 같은 그녀의 몸을 급히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왜 그런 옷을 입고서는.”

혜주가 픽하고 웃었다.

그래 네 자식은 혜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지?

“왜 그러세요~ 여자친구분 지금 너무 섹시하고 예쁘신데~”

피팅을 도와주던 직원이 화사하게 웃으며 부러움의 눈길을 여지없이 보냈다. 아직도 주혁이를 힐끔 쳐다보면서.

“야, 너 당장 옷 안 갈아입어?”

혜주의 귀에 바짝 붙어 거의 명령조로 쏘아붙이는 주혁이다.

그러나 혜주는 그런 주혁이를 무시하고 직원한테 싱긋 웃으며 한마디를 했다.

“입고 갈게요. 태그 뜯어주세요.”

뭐어??!

“자기가 계산해 줘~.”

아주 조금 뻔뻔하고 애교가 섞인 자기야를 시전하면서 계산을 하란다.

허, 어이가 없었지만 자꾸 힐끗 쳐다보는 직원들 때문에 혹시나 남주혁이라는 게 들킬 가봐 두려워져 급히 계산을 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린 혜주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혜주야. 내가 미안했어. 어제 그렇게 늦게 들어오면 안 되는 건데…”

그냥 죽는 시늉을 하면서 잘못했다고 빌자. 혜주 네가 이러니 너무 무섭다.

“아, 화장실 여기 있네.”

주혁이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은 혜주가 화장실을 발견하고  위는 가슴골이 훤히 보이고 하체는 또 달랑 엉덩이만 덮은 원피스를 입은 채 바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주혁은 뭔지 모를 불안감이 휩쓸었다.

“와. 상쾌해.”

세 번째 날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양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냥 팬티에 붙이는 생리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그래도 꽤 빨리할 수 있는데
외출할 때 특히 이런 딱 붙는 옷을 입을 때는, 붙이는 것보다 탐폰이라는 애가 더 나은 거 같아서 욕실 수납장에 있던 걸 챙겨서 나왔다. 처음 하는 거라 또 검색을 열심히 했지만. 나름 잘한 거 같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며 피식 웃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뭐야… 여자친구가 화장실에서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 앞에서 얌전히 기다려야지. 어디에 간 거야 얘는.

있어야 할 자리에 주혁이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매너가 없다고? 이 자식이 누가 자기를 알아볼 가봐 도망간 거 아냐? 하. 내가 그렇게 쓰레기라고???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던 차에 멀리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오는 주혁을 보았다.

“자. 이거 위에라도 걸쳐.”

“응?”

남주혁을 보면 엄청 혼내야지 하면서 눈썹을 구기고 있었는데 손에 뭔가를 들고 있던 주혁이가 그걸 혜주의 가슴 앞에 내밀었다.

“뭔데?”

시큰둥해서 대충 흘겨본 물건은 옷이었다. 얇은 가디건 같은?

말이 없이 째려보면서 눈으로 욕했다. 이게 뭐냐고.

그러자 살짝 반짝이는 입꼬리를 한껏 말아올리고는 뛰어서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주혁이가 입을 열었다.

”너 그대로 다니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아래는 어떻게 못해도  위에 다 나온 가슴이라도 좀 막아.”

아… 가릴만한 옷을 사러 간 거였어?

어쭈~ 그래. 내가 아는 나는 그렇게 지 살자고 혼자 도망가는 놈은 아니지. 암…

근데 이 자식이 기껏 지 보라고 이런 옷을 골랐더니 뭐 막으라고? 바보 같은 자식. 누구 덕분에 눈 호강하는 줄도 모르고.
쯧쯧.

가디건을 안 입고 멀뚱히 서 있는 혜주한테 직접 옷을 입히고 있는 불쌍하고 바보 같은 주혁을 쳐다보면서  혀를 끌어 찼다.

“이제 좀 낫네.”

이제 안심이 된다는 표정과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혜주의 귓가에 가까이 바짝 다가가 뜨거운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아까는 너무 야했어.”

뭐지? 내가 미쳤나?

혜주의 몸에 들어와서 그런가? 현재 들어와 있는 게 혜주의 혼은 아니라도 심장은 그대로니 그런 거겠지?

심박수가 갑자기 세차게 올라간다. 미쳤다!

이럴 수는 없는 거지!! 미치지 않고서야!

강하게 반박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자.”

어느새 앞에서 둬 걸음 걷다가 꿈쩍 않는 혜주를 발견하고는 기다란 팔을 내미는 주혁이다.

”어딜?“

미친 가슴을 주먹으로 탁탁 치면서 혜주가 질문했다. 그러자 주혁은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더니 시선이 발아래에서 멈추었다.

“옷이랑 신발이 너무 언밸런스 한 거 아니야? 예쁜 구두로 사줄게. 일로 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볼을 말아올린 저 자식이 오늘따라 왜 저리 멋있어 보이냐.

나 김혜주, 아니. 남주혁이 미쳤구나. 드디어.

혜주는 해탈한 심정으로 손을 내민 주혁을 슥 지나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혜주를 그냥 놔둘 리 없는 주혁이기에 성큼 걸어가 혜주의 손을 꽉 잡아 깍지까지 꼈다.

혜주가 질색을 하면서 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조여오는 악력은 혜주로 하여금 손을 빼는 건 포기하게 만들었다.

“와. 여기 우리 20대 초반 때에만 몇 번 와보고 못 와봤잖아. 많이 달라졌다~”

주혁은 오랜만에 와보는 가로수길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신기해했다.

맞다. 딱 20대 중반쯤인가 그때까지 데이트란 걸 해보고 그 뒤로는 제풀에 남의 눈이 두려워 혜주랑 같이 당당하게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남주혁이란 걸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걸 알았다면 진작에 많이 했을 것이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 데이트를.

생각해 보면 맨날 혜주네 집에서 만났다. 밥도 집에서. 영화도 집에서. 오락도 집에서.
처음에는 기분 전환으로 강남에 있는 뷰 좋은 오피스텔로 가기도 했었다. 언론에 위치가 공개가 된 후부터는 못 가게 되었지만.

혜주가 살던 오피스텔은 지금처럼 잘나가던 때가 아닌 무명시절에 같이 살던 집이다. 이제 잘나가고 돈도 많으니 보안이 좋고 뷰가 좋은 오피스텔이 많은 강남으로 이사를 하자고 했지만 지금 집에 정이 들기도 했고 강남은 부담스러워서 못 가겠다고 한 게 혜주였다.


내가 나랑 있는 게 맞긴 한가보다. 어떻게 처음 혜주의 몸에 들어왔을 때 골랐던 구두랑 이렇게 비슷한 걸로 골라서 사주냐. 높은 힐은 나도 사양이지만 발목 다친다고 굳이 굽이 낮은 구두를 사주는 주혁이다.

그래. 내가 내 분신이랑 같이 있는데 무슨 가슴씩이나 떨리고 지랄이냐. 미친놈 같게.

혜주는 자신한테 어이가 없어서 혼자 픽 웃었다.

”이제 어디 갈 거야?“

다리가 훤히 다 나오는 짧은 기장의 치마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쳐다보다가 가디건의 마지막 단추까지 꽁꽁 채워주고 하는 주혁이의 말이다.

“볼링장.”

짧고 간결한 혜주의 대답에 잠깐 멈칫하던 주혁이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빙글 미소를 지었다.

“볼링장 좋지.”

오락을 은근 좋아하는 혜주랑 어릴 때 자주 가던 곳이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매번 심각한 그 표정이 웃겨 더 많이 갔었다. 매번 지면서 어떻게 저리도 이번엔 이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 혜주 너 나 몰래 혹시 연습한 거야? 옛날이랑 뭔가 다른데?”

많이 딱딱하던 몸은 어데 가고 어딘가 많이 날렵해지고 부드러운 어드레스 자세의 혜주를 보고는 많이 놀란 주혁이가 한 말이었다.

훗. 내가 지금 혜주가 아닌 주혁이 너니까.

그러나 이 몸이 아무래도 문제일까. 자세만 좋았지 핀이 넘어가는 개수는 여전했다.

“역시 혜주는 혜주네. 괜히 식겁했네.”

질까 봐 마음 졸였던 주혁이가 그제야 넓은 어깨를 쫘악 펴면서 자신 있게 볼링공을 잡았다. 그 기다란 손가락을 공의 홈에 끼워 넣은 주혁은 긴 기럭지를 살짝 굽혀 균형을 유지하면서 시선은 에임 스팟에 집중을 했다. 살짝 무거운 볼링공이라 힘을 준 팔뚝에 굵은 근육과 핏줄이 올라온 걸 본 혜주는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공은 던져졌다. 데구르르르 정중앙으로 굴러가던 공이 정확히 1번 핀부터 닿더니 10개의 핀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스트라이크!!

주혁은 애처럼 좋아하며 주먹을 쥐고 들었던 팔을 힘 있게 내리며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마주친 혜주의 눈을 보고는 와서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듯 크나큰 손바닥을 내밀었다. 혜주는 같이 방긋 웃으며 그 손바닥이 얼얼해 질만큼 쨍하고 치면서 호응을 했다.

이 자식은  볼링을 잘 못하는 혜주 앞에서 대충 해도 될 듯한데 엄청 열심히 했었구나. 그렇게까지 해서 뭐 하게. 혜주가 널 더 우러러볼 줄 알고?

피식 웃음이 나갔다. 물끄러미 볼링공을 고르는 주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다음 코스는 코인 노래방, 오락실, 인형 뽑기 여느 연인들이 하는 아주 사소하고 별게 아닌 데이트를 했다.

한 여름의 해가 다행히 길어서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이미 어두운 밤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20대 초반 때의 추억으로 돌아가 신나는 하루를 즐긴 주혁이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혜주를 보며 묻는다.

"이제 어디 가?"

오늘은 전적으로 나 혜주한테 맡겼다. 어느새 자신이 모두가 알아보는 배우라는 걸 망각하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따라다니면서 즐거워했다. 주위에서 자기가 생각한 그 사람이 맞나 의심은 했지만 수수하게 입은 옷차림 때문일까, 아니면 꾹 눌러쓴 모자? 아니면...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친구가 없기로 소문난 것 때문일까. 다들 생각보다 우리한테  관심이 없었다.

이제 혜주가 좋아했을 거 같은 코스는 끝이 났다.

혜주는 기대감에 벅차 눈이 반짝이는 주혁이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웨딩드레스 체험."

갑자기 무슨 얘긴가 싶어 눈만 깜빡이는 주혁을 보며 그의 팔을 당겼다.

어제 밤새 검색하며 알아 본 한곳이 있다.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그 집. 보통 예약이 필수인데 예약을 안 해도 된다는 그 집.

웨딩드레스 체험이 가능한 드레스 샵.

내가 너한테 꼭 보이고 싶은 모습이자, 내가 보고 싶은 혜주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

나의 마지막 데이트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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