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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주술(제3회)

l판도라l | 2023.03.13 02:04:05 댓글: 1 조회: 771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9931
5.
“지금 뭐하고 있어?”

이 도시의 알려진 관광지-민속촌에서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나무 우거진 숲속에 작은 민가들이 보였다. 청량한 노래소리도 곁들어 들려왔다. 한부장은 밀짚모자를 쓰고 수놓이 치마를 입은 이족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서 대나무 춤을 배우고 있었다. 대나무 율동에 따라 한부장의 귀걸이가 해빛에 반짝였다. 나는 한부장의 눈부신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녀의 문자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누워있지.”
“어머님은?”
“거실에서 티비 보고있어.”
“화해는 했어?”
“아니.”

나는 짧은 한숨을 한번 삼키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빨리 화해해.”
“왜?”
“몰라서 물어? 나한테 하소연 퍼부을 생각 하니 지금부터 머리가 아파서 그래.”
“당신도 한번 당해봐. 전에 나한텐 안그랬는 줄 알어?”
“뭐? 어머님이 당신한테 하소연을? 그동안 내가 그렇게도 맞춰드렸는데도?”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딨어. 당신 성격 알고도 모르겠다고 대체 진심을 일수 없다고 불만이었어. 그렇게 맞춰줘도 불만이면 난 차라리 그냥 내 성격대로 지낼 거야.”
“그래도 그렇게 서로 버티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무려 48시간을?”
“난 괜찮아. 불편한 사람이 먼저 말을 걸겠지.”
“밥은 어떻게 먹을 건데?”
“일단 내가 해놓고 드시려면 드시고 나는 방안에서 먹을 거야. 왜 꼭 내쪽에서 먼저 화해를 시도해야 하지? 엄연히 말해서 내 잘못은 아니잖아. 잔소리가 많은 엄마 잘못이지.”

나는 또다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나무춤이 끝났는지 한부장이 내쪽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왜 일이 잘 안풀려?”
“아닙니다. 그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그 공장에서 다시 연락이 올거에요. 전화만 잘 받으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잘 받는 건데.”
“전화 바로 받지 마시고 두세번 울린 다음에 받으시구요, 태도는 뜨직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분명 연락이 올겁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부장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액정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공장이야.”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한부장은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한서진입니다.”

출장 일정은 앞당겨 끝났다. 공장 책임자는 우리 요구에 따라 부품의 원래 단가로 재계약서에 순순히 사인을 했다. 공장을 나오면서 한부장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과장 이번 성동격서는 참으로 좋았어.”
“성동격서라기보단 허장성세였죠.”
“그건 아닌 듯해. 아까 업계 지인이 문자가 왔었어. 우리가 지금 이 도시 다른 공장 만나고 다닌다고 소문이 이미 퍼졌던데?”
“아, 그건 손을 좀 썼습니다.”

위챗 모멘트에 관광지 사진을 좀 넣고 이목이 끌만한 제목을 넣으면 업계에 바로 소문이 퍼지게 되어있었다. 나는 그저 남편 서태훈의 위챗 모멘트 인력 자원을 충분히 이용했을 뿐이었다.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공항으로 가달라고 말하려는데 한부장이 미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호텔 예약은 어떡하고.”
“취소하면 되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났어. 날도 어두워졌고. 항공편도 제일 빠른 게 내일 아침이야.”
“…”
“마침 할 얘기도 있고.”

그래도 내가 머뭇거리자 한부장은 풋 웃었다.

“덮치지 않을테니까 따라와.”

한부장의 옆모습을 잠깐 보다가 나는 묵묵히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사실은 집에 대치하고 있을 두 여인?이 걱정되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것을 한부장에게 말할수는 없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체크인을 끝냈는지 한부장이 방키를 내게 내밀었다.

“여기 2층에 괜찮은 바가 있어. 옷 갈아입고 내려와.”

호텔방으로 올라온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최대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쩌면 내가 만들고 싶은 시간을 한부장이 만들어준 셈이 된다. 집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걱정되었지만 일단 지금은 호기심이 그 걱정을 눌렀다. 나는 곧바로 와인바로 내려갔다.

와인바의 몽롱한 불빛속에서 나는 한눈에 한부장을 발견할수 있었다. 어깨선이 드러나는 레드 원피스가 그녀의 미모를 한결 출중하게 받쳐주었다. 나는 움찔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직도 옷장 깊숙히 자리잡은, 언젠가 남편에게 선물받았던 내 원피스와 완벽하게 닮아있는 러플 디자인이 내 눈을 자극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테이블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뭐 좀 먹을까.”

한부장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물었다. 나는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고 미리 주문해놓은 모양으로 웨이터가 테이블을 세팅했다. 와인도 한병 곁들어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 한부장이 곱게 눈을 흘겼다.

“알어. 자긴 맥주만 마신다는 거. 한잔만 받아놔. 와인은 나 혼자 마실 거야.”

한부장이 나에 대한 호칭도 어느새 살짝 달라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고기를 썰었다.

“이런데 안좋아한다는 것도 알어.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좀 봐줬으면 좋겠어.”
“네.”

건조하게 대답하고 고기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미디엄으로 익힌 고기어서 입안 가득히 육즙이 배었다. 왠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고 오히려 고소함이 느껴졌다. 몸이 바뀌더니 입맛도 변했나. 나의 사색을 중단시키며 한부장이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

나는 칼질을 멈추었다. 공기속에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한부장의 생일이란다. 나, 아니 남편이 모를수 있을까. 지금 적당한 제스추어를 생각해내지 않으면 한부장 그녀는 분명 의심을 할 것이다.

“아, 그러셨구나.”

나는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피했다.

“생일 축하드려요.”
“타지에서 쓸쓸하게 혼자 생일 보낼줄 알았는데 같이 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사실 생일인 걸 알고 온 것도 아닌데…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와인 한모금을 들이켰다.

“공장과의 미팅도 잘 끝났고, 재계약도 잘 처리됐고…알다싶이 영업본부 본부장 자리를 두고 경쟁이 심해. 자칫 밀려날수도 있었는데 이번 일로 승진 자격이 있게 됐어. 나 이번 생일 정말 의미있게 보낸 것 같아. 그 누가 기억해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승진 축하드립니다.”

나는 서둘러 한부장의 말을 막았고,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아직 결정난 건 아니니까. 여자라고 본사쪽에서 밀어낼수도 있는 걸.”
“여자라는 우세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기도 하지만…아직 세간에서 여자에 대한 편견이 심한 걸 자기가 몰라서 그래? 내가 왜 아직 연애나 결혼을 못하겠어?”
“각자 선택이 달랐을 뿐이죠.”

만일 애초에 내가 회사에 남았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출산과 함께 퇴사를 선택했고 삶에서 그런 선택은 되돌릴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자기 말대로 내가 한 선택이야. 그렇다고 이런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따박따박 존대는 좀 그런데? 사람이 적당히 풀어지는 멋도 있어야지.”
“존대는 안할수도 있는데 호칭정리는 제대로 하자.”

내가 바로 말을 놓자 한부장은 눈을 치켜떴다.

“어머? 지금 화내는 거야? 오늘 서과장 박력 넘친다. 아까 미팅때도 그렇고 사람이 왜 이렇게 달라보여?”
“내가 뭘…”

어색함을 감추려고 또 와인 한모금을 들이켰다.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다. 항상 생맥주만 선호했는데 이참에 취향 좀 우아하게 바꿔볼까 하고 생각할 때였다.

“그래. 서과장 말대로 호칭 주의할께. 우리가 사겼던 사이라는 걸 회사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뻔 했다. 나는 급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거 빅뉴스다. 서태훈이 한부장과 사겼었다고? 대체 언제? 왜 나는 모르는 일이지?

“언제적 일을.”

짐짓 담담한 척 입속으로 궁시렁 거리자 한부장도 와인 한모금을 들이켰다.

“그래. 십년도 더 지난 일을 다시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이젠 내 생일까지 기억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지연씨가 눈치챈 것 같지 않아? 아니면 왜 그렇게도 서과장 괴롭히겠어?”

대체 내가 언제 남편을 괴롭혔다고…입이 삐쭉거려 지는 걸 간신히 참느라 얼굴에 풍이 올 지경이었다. 스테이크를 썰던 내 손이 천천히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보면…그날의 그 문자가…그런 의미였구나.

“잘 들어갔어? 우리 일은 지연씨가 모르는 게 좋겠지?”

한부장, 아니 그녀가 아직 차장이었을 때 내게 도착한 그녀의 문자는 달랑 이 한줄이었다. 잠버릇이 나쁜 아들을 안고 어르다가 이런 문자를 받은 나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속에서 널장이 떨어져 내리는 그 절망의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문자 잘못 보내셨어요.”

거두절미하고 답장을 보냈다. 선배라는 호칭도 생략했다.

“아…지연씨, 미안해. 둘다 프사가 같아서 헛갈렸어.”

내가 더 답하지 않자 한차장은 부연설명을 보내왔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나는 말없이 그녀를 친구 리스트에서 삭제하고 차단해버렸다. 그 일이 지난지 3년, 그녀는 차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제 다시 본부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데 나는 집에서 육아만 하다가 지금은 아예 황당한 영혼 체인지까지 겪고있는 중이었다. 대체 내가 그녀보다 무엇이 못해서.

“서과장 왜 그래?”

나이프를 틀어쥐고있는 내 얼굴이 험악했는지 한부장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적우적 고기를 씹어 삼킨후 한마디 던졌다.

“그럼 그 문자는 왜 보냈어?”

한부장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한가닥 놀라움이 스쳤다.

“지연씨가 다 얘기했어?”
“…”
“얘기했구나. 둘이 그런 얘기까지 공유하는 구나.”
“…”

내가 여전히 침묵하자 한부장은 고개를 외로 탈았다.

“실수로 보낸 거야.”
“당신 치밀함으로 그런 실수를 하다니. 의외인데?”
“정말 실수라니까. 나 안믿는 거야?”
“한부장님.”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을 정히 접어 상위에 놓았다.

“스테이크 맛있었습니다. 와인도 좋았구요.”

존댓말로 돌아온 나를 한부장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만 제 적성에는 여전히 맞지 않네요. 한두번쯤 메뉴 바꾸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요.”
“…”
“저와 한부장님 그 한단락의 과거도 이런 시도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하지만 사람은 자기 적성에 맞게 살아야지요. 저는 여전히 생맥주가 좋고, 튀김과 꼬치가 좋습니다.”
“…”
“그러니 메뉴 변경을 무리하게 권하지 마십시오. 스테이크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팔면 됩니다. 고객 선호도를 우선시하고 확인하는 것, 이것 역시 우리 영업본부 마케팅 전략이 아닙니까.”
“…”
“제게 좋은 상사가 되어주십시오. 다시한번 생일 축하드립니다.”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밤중의 티켓이라도 변경하리라 생각하며 나는 방으로 올라가서 짐을 챙긴 후 핸드폰 앱으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바를 나서기전 얼핏 뒤돌아본 한부장의 실루엣이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아주 약간이었다.

만일 이런 체인지를 겪지 않고 오늘 출장을 온 게 나 아닌 남편이었다면 그는 이런 한부장을 두고 먼저 자리를 뜰수 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만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 역시 남편과는 다른 성향이어서 인간관계를 대할 때에는 유연함 보다는 맺고 끊는 방법을 항상 선택해왔었다. 새삼 이런 인간관계를 완전히 외면할수 없는 남편의 직장 생활도 꽤 버겁고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어떻게 이시간에 왔어?”

집에 들어서니 그녀가 거실에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님은?”
“저쪽 작은 방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큰방으로 들어간 후 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있는 준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따라 들어온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뚱한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으레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막상 내 얼굴을 하고있는 그 사람을 보니 왠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머님 화 많이 나셨어?”
“몰라. 암튼 저녁은 안드셨어.”

나는 머리를 끄덕인 후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한선배랑 언제 사겼었어?”

스치듯 무심하게 물었는데도 그녀는 드디어 올것이 왔다는 비장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하여간 여인들이란.”

여인의 얼굴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나더러 사직하라고 했었구나? 한 회사에 오래 있으면 들통 날가봐.”
“당신이 생각하는 내가 그렇게도 치졸한 남자였었나.”

역시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남자라고 지칭하는 게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이젠 어떡하나? 아 오늘이 한부장 생일이라는데, 옛애인 생일 정도는 까먹지 않았겠지? 느낌이 어땠어?”
“당신, 이렇게 걸고 들자고 일찍 들어온 거였어? 하루종일 집안일에 육아에 시어머니 상대에 지친 나한테 지금 이런 말도 안되는 태클을 걸어?”
“태클…”
“게다가 그 빌어먹을 기저귀 때문에 지금 피부 트러블까지 생긴 나한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내가 누구때문에 지금 이 고생을 하는데!”
“기저귀?...”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미간을 구기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알려주는 브랜드의 생리대를 사지 않은 후과는 참담할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익히 알고있는 나는 이미 화가 절반이나 가셔져버렸다.

“이게 다 하늘이 준 기회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더러 직접 한번 겪어보게 하는 거잖아.”
“그게 왜 당신한테만 준 기회라고 생각하지? 당신도 내 고초를 한번 겪어보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닌가?”
“고초는 무슨! 출장을 빙자한 데이트에 관광지 유람에 매일 즐겁기만 하구먼!”
“그래? 어디 한번 회사생활 잘 즐겨봐. 그렇게 웃게는 안될 걸.”

그녀가 지지 않고 빈정거리자 나는 옷장을 열고 안쪽에 깊숙히 자리잡은 빨간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옛 연인이랑 같은 디자인의 선물은 좀 너무 센스가 부족한 게 아닌가? 그렇게도 창의성 없어서야.”

내 일격에 그녀는 잠시 주춤했지만 바로 맞받아쳤다.

“그 선물 받고 밤낮 기뻐한 건 누군데?”
“그게 기뻐한 걸로 보여? 어이 없어서 웃는다는 생각은 안해?”
“뭐라고?”
“정말 마음에 들었으면 지금까지 처박아 뒀을까? 한번도 입지 않고?”
“아껴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눈앞의 그녀, 아니 그에게 두손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대체 우리 부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해왔던 걸까.

“아…사람이 이정도로 착각하면서 살수도 있는 거구나.”
“뭐? 착각?”
“그래. 착각. 우선 나는 빨간색 싫어하고 이렇게 러플이나 레이스 달린거 질색이야. 그냥 스마트하게 아래로 선이 흘러내려간 느낌을 좋아한다고.”
“스마트…선이 흘러…그건 어떤 건데…”

하도 둘이 티각태각 하니 아이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눈짓으로 그녀를 거실로 불러냈다. 거실의 환한 등빛아래 그녀의 얼굴은 좌절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원피스를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암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점은, 서로 이틀 바꿔서 살아본 경험이 어때? 이제야 내 고충을 알겠지? 막 내게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샘솟지 않나?”
“무슨 소리! 고충이라면 회사에서 아글타글 자기 위치 지키려는 나만큼만 하겠어?”
“하아…어디 나가서 말해봐. 여자가 집에서 육아하고 살림하고 온갖 명세서 가족관계 다 책임지고 처리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이냐고. 거기다 자영업까지 겸하고.”
“그정도 작은 규모의 쇼핑몰도 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이래뵈도 우리 식구 일상 지출은 다 거기서 나온다고. 막말로 당장 당신이 퇴사해도 내가 재기할 시간을 벌어줄수 있단 얘기야.”
“이 여자가 정말…왜 지금 나 퇴사하라고 저주하는 건가? 내가 퇴사하면 준이 교육비 학원비 어떡할 거야? 이제 또 태권도 추가하겠다면서?”
“그정도는 내 수입에서도 충분히 나와!”
“그래? 허리띠 졸라매고 먹고 입는 거 아껴서 학원비 내려면 애가 퍽이나 행복하겠다!”
“내가 언제 먹고 입는 걸 아꼈어?”
“여자들은 이래서 안된다니까. 돈은 그렇게 아껴서 남는 게 아니라 벌어서 남기는 거야.”
“당신 그거 여성비하 발언인 거 알어?”

한창 다투고 있는데 방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준이인가 했는데 의외로 시어머니가 눈을 비비면서 우리 등뒤에 서있었다.

“너희 그게 무슨 소리냐? 난 한참 듣고도 모르겠다. 왜 서로 입장 바꿔 다투고 있는 거니? 대체 뭐가 문제냐?”

우리는 서로 멀거니 바라보다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

“왜 더 놀다 가시지요, 어머…니.”

공항으로 가는 길에 적막을 깨뜨리느라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았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내 뇌리를 쳤다. 아닌게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 조수석에 앉은 어머님이 내쪽으로 홱 얼굴을 돌린다.

“어머니? 니가 언제부터 내게 그리 깍듯했었냐? 아니, 너보고 그리 부르라고 하던? 준이에미가?”
“그게 아니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 그러니까 엄마, 왜 오자마자 가냐 그거란 말이에요.”
“그럼 안가고 너네 부부싸움이나 구경하라고? 아무래도 이번길 내가 잘못 온 듯 싶구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얼마나 내가 오는 게 싫었으면…며느리란 사람은 첫날부터 뉘집 개가 왔냐 식으로 말대답질이나 하고. 아들이란 놈은 집 들어와서 제 어미 보는척도 안하고 부부싸움이나 하고.”
“말씀이 왜 또 그렇게 돼요.”
“너도 그렇지만 준이에미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아주 가관이더구나. 그리고 이번에 와서 놀랐는데 집안 살림이 아주 개판이야. 군데군데 먼지가 그대로 있고 창문은 일년 가도 안닦은 것 같고.”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가만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머님이 오시면 매번 똑같은 레파토리다. 특히 이번엔 내가 집에 있었으면 시어머니가 오기전 대청소라도 한번 하겠는데 몸이 바뀌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청소를 간과했던 게 문제였다. 하긴 대청소를 했다 한들 어머님한테서 똑같은 지청구를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냉장고안은 그게 뭐냐. 온갖 인스턴트 음식에 아이 몰골은 그게 또 뭐고. 준이 에미는 회사도 안다니는데 집안 살림이 아직도 그리 뒤전이냐.”
“회사 안다녀도 자기 일 하고있어요. 그 사람.”

저도 모르게 불쑥 변명이 나갔다. 나를 욕하는데 어디 참을수가 있나. 그리고 냉장고안의 고작 라면 두봉지 보고 이 야단이시다.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진다나 뭐나. 건강관리 한번 철저하시다. 나는 궁시렁거리며 변명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그 사람 하는 일이 눈에 보이는 일이 아니지만 벌이가 괜찮아요. 내 월급은 보험, 대출 값는 외에 다 적금 들고 아이 유치원 비와 일상 지출은 사실상 다 그 사람이 내고있어요.”
“그래도 밖의 일 하는 사람이 더 고생이지. 집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일을 한다고. 자고로 여자란…”

또 뻔한 훈계가 시작된다. 나는 입속말로 그 뒤를 이어나갔다.

“살림 잘하고 애만 잘 키우면 장땡이다. 여자가 무슨 바깥일을 한다고…여자와 그릇은 내돌리면 안되는 거다.”

암튼 어머님의 이단락의 멘트는 하도 들어서 눈을 감고도 달달 외울 정도였다.

“너, 내 말은 듣고 있는 거니?”

시어머니의 말에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준이에미 말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뭐가 심상치 않은데요?”

시어머니 눈치 은근 빠른데? 속으로 은근히 혀를 내두르는데 그뒤를 잇는 말에 나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암튼 이번에 보니 성격도 이상해지고…전에는 참 싹싹하고 고분고분했는데…말에 날이 서고 가시가 돋친 것이…혹 무슨 딴생각이 있는 게 아니냐?”
“딴생각요?”
“여자가 시어머니한테 막대할땐 딱 한가지…이젠 더 이상은 그 아들이랑 살기 싫다는 거다. 아들 보고 참는 일 더이상은 안해도 될때 그런 막행동이 나오는 거다.”
“도리는 잘 아시면서…”

입속으로 또 한번 궁시렁 거린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걱정을 안하니? 지금 고향에서도 한집 건너 이혼이다. 요즘 너네 젊은 것들은 결혼과 이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문제야.”
“뭐, 그럼 말죠머. 어차피 살림 잘 못해서 며느리가 마음에 안드시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준이 에미가 어때서. 그 한 뭐더라? 그 여자보단 훨 낫다.”

내가 마음에 안든다 할때는 언제고. 그런데 어쭈? 시어머니도 아는 과거사였어? 나는 가만히 혀를 찼다.

“그여자 말이 왜 또 나와요.”
“정말이지 그때 사진만 봐도 한눈에 알렸어. 그 여자는 결혼해서 살 여자가 아니야. 다행이 오래가지 않았지. 아니면 내가 나서서라도 너넬 뜯어 말렸을 거다.”
“그럼 준이엄마는?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데요?”
“음…일단 사리가 밝고 겉으로 유약하지만 내면은 강하고 독립적인 게 마음에 들었어. 적어도 내아들 혼자 고생하면서 벌어먹이지 않아도 되니까.”

시어머니 다운 이기심이 섞이긴 했어도 나름 솔직한 대답이어서 나는 핸들을 돌리며 피씩 웃었다.

“아까까지 살림살이 미흡하다면서 탓하시더니. 듣고보니 장점 많네요, 그 사람.”
“사람이 누가 결점이 없겠냐. 하지만 중요한 건 예의가 바르고 심성이 착한 거지. 아, 그런데 어제는 정말 놀랬다. 아까 서로 작별인사는 했어도 알륵은 남아있는 거 같으니 니가 집가서 잘 얘기해봐. 뭐 그동안 나한테 섭섭한 거나 쌓인 거라도 있나. 있으면 나도 알고 넘어가야 하니까.”
“알았어요. 별일은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진 마세요.”

나는 시어머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에 시름이 꽉 덮인 것이 아니래도 며느리와 이런 식으로 헤어진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잔소리는 심해도 속은 모질지 못한 분이시다. 이제 몸이 바뀌어오면 문안전화라도 한통 해드려야 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시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산넘어 산이라고 회사 인간관계가 겨우 정리되나 싶더니 가족관계에 덜컥 붉은 등이 켜졌다. 집에 돌아오니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주말이라 아이가 유치원을 쉬고있는 모양이다. 문가에 기대서서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있던 나는 그녀가 머리를 쳐들자 입을 열었다.

“우리, 공원이나 놀러 갈까?”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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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75.♡.27) - 2023/03/14 13:05:15

나도 하루만 몸이 바뀌여서 신랑지인이랑 시댁식구들한테서 내 얘기를 듣고싶어요.
도대체 뒤에서는 어떻게 말할가 쪼꼼 궁금하긴 하네요..ㅋㅋ근데 혹 안좋은 소리라도 나오면 표정관리가 안될거 같애서 안 듣고 사는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가도 생각되네요..ㅎㅎ
역시 시어머님은 제일 어려워요..ㅎㅎㅎ
참 오랜만에 올려주셧네요..언제나 글 올라오나 내일매일 자작글방을 들여다보고잇엇어요...자주 좀 올려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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