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53회)

죽으나사나 | 2024.04.07 08:24:43 댓글: 0 조회: 178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9193
너를 탐내도 될까? (53회) 불안이라는 알 수없는 감정.  

“그럼 오늘 온 사람이 실제 치매 환자고 치매 진단을 받은 사람은  정상이었다는 거네?”

“그렇지. 환자는 젊은 여자였고 보호자인 엄마와 같이 왔는데 병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난리도 아니었다. 괜찮다던 애가 왜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못 하는 일이 많은지 답답해서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나 봐. 치매 판정을 받고 우리 병원으로 따지러 온 거거든.”

“저런.”

서울은 진성의 호소 짙은 한숨에 나지막이 공감을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박 쌤도 문제긴 하지만 환자 차트가 바뀌었다는 걸 간호사 누구도 몰랐다는 게 참 사람을 미치게 하더라고.”

“그 뒤로는 형이 병원을 뒤집었겠네.”

보지 않았어도 그 아찔한 광경이 눈 앞에 아른거려 서울은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그러다 매서운 두 눈이랑 마주하고는 올라간 입가를 살포시 내렸다. 

”그래. 뒤집었지. 병원 상대로 고소한다는 걸 겨우 말렸다. 그리고 피해를 본 건 그 환자뿐이 아니잖아. 바뀐 차트 때문에 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 생각하며 얼마나 괴롭게 살고 있을지 걱정이 되더라고. 그래서 빨리 연락을 하라 했는데…“

”했는데?“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안 받아. 문자를 넣어도 답도 없고.“

”헐…“

서울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

”오정연!“

하정은 은서와 헤어지고 나서 곧장 집으로 왔다. 주차를 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려다가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정연을 발견했다. 

”하정아!“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고 있었던지라 저를 부르는 하정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반가워하며 뛰어왔다. 

“여기서 뭐해?”

출발하기 전 정연에게서 언제 오냐는 문자가 오긴 했었다. 조금 있으면 갈 거라 답장을 해주었는데 언제부터 이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너 금방 온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지.”

답하는 정연의 입가에는 부자연스러운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이내 가라앉은 눈매는 하정으로 하여금 여러 감정들이 오가게 만들었다. 

”애도 아니고, 더운데 굳이 나와서 왜 기다려.“

괜히 투덜거리며 앞장서서 걸었다. 

어제,

정연한테서 강은서의 존재를 알 게 되었고 그 길로 무슨 정신인지 그 가게까지 찾아갔다. 나올 때도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나왔다.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았고 어느새 습관적으로 집 동네까지 다다랐고 눈에 들어온 건 작은 놀이터였다. 

어릴 때 자주 갔던 그 놀이터는 아니었지만 통 미끄럼틀을 보니 들어가고 싶었다. 크나큰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이 허전함에 작은 통 미끄럼틀 안은 날 꼭 감싸는 느낌이 들어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곧바로 서른 넘은 내가 거기에 들어가기엔 너무 커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게 너무 서러워서 모래 바닥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이제 서른 넘은 나이인데도 나는 어린 시절 필요했던 통 미끄럼틀 안을 찾아야 했고, 이제는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래서 울었다. 

울다 지치고 기운이 다 빠져 있을 무렵, 서울이가 나타났다. 

분명히 멈췄던 눈물이었는데 그 앨 보자마자 또 흘러내렸다. 어린아이처럼 투정질을 했다. 

날 걱정스레 쳐다보는 서울이한테 그러고 싶었다. 날 더 바라봐 주라고, 내가 이리 슬프니 나만 보라고…

나의 등을 말없이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를 하는 그 애의 너른 품이 그 순간엔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다. 

분명히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앤데…

나보다 훨씬 큰 어른같이 느껴졌다. 

집에는 안 들어오고 호텔로 갔다.

마음과 정신이 혼란스러워 정연을 마주할 형편이 안 되었다. 서울은 날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고 난 정연에게 밖에서 자고 들어갈 거란 문자만 보내주었다. 

사실 정연이가 나한테 강은서에 대해 말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 말을 꺼냈을 땐 제 친구가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잘 알고 있으니 저 자신을 많이 자책했을 거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내가 그대로 무너져 내린 건 아닌지 정연에게는 혹독한 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문득 들자,

정연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은 자신이 해야 하는데 먼저 선수를 쳐버린 하정을 놀랜 토끼 눈으로 쳐다보던 정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아래로 떨구었다. 

“어렵게 얘기한 말이었을 테고 네가 날 이렇게 걱정할 거란 생각까지 못 했어. 내 생각이 짧았어.”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정연이가 다시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미안한 건 나지. 그런 중요한 얘기는 차분히 앉아서 해야 하는 게 맞는데 네가 갑자기 대표님을 찾아간다고 하는 바람에… 흡.”

정연은 꺼내지 말아야 할 인물을 꺼냈다는 생각에 제 입을 두 손으로 급히 틀어막았다. 그런 정연을 힐긋 쳐다보며 하정은 픽 웃어버렸다. 

“이제 내 눈치 보지 마. 나 괜찮으니까.”

“진… 짜?”

“응. 일단 들어가자.”

어깨를 쭉 펴지 못하는 정연의 등을 찰싹 내리치며 하정은 현관문을 열었다. 


샤워를 먼저 끝낸 정연이가 멍하니 TV에 시선을 꽂은 하정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뚜렷하지 않은 초점… 

하정의 시선은 TV를 보는 거 같지만 집중을 못 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정아.

쌍둥이 언니는 만나보고 어땠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는데 넌 왜 아무 일 없는 듯한 얼굴을 하는 거야. 불안하게.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걱정스레 하정을 살피고 있는데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욕실에서 나온 정연을 발견한 하정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네가 좋아하는 송강이 예능 프로에 나와. 빨리 가서 봐봐.“

싱긋 웃어 보이며 하정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정을 오랫동안 보아온 정연이었 건만 지금의 하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되어서 불안이라는 덩어리가 그녀의 가슴을 꾸욱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한에게서 들었다. 오늘 낮에 하정이가 회사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것도 강은서의 이름으로 대표님을 찾아갔다고 했더랬지. 

그 안에서 대표님이랑 무슨 얘기를 한 거니?

하정아. 괜찮은 게 아니지? 그렇지?

***

”치이익-”

익숙하게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은서는 탁 하는 사운드와 함께 화려한 금빛으로 도배 된 라이터 뚜껑을 닫았다. 오랜만에 다시 꺼낸 담배라 작은 폐부에 쭉 들이킨 담배 연기는 꽤 매캐했다. 희뿌연 연기를 둬 어번 내뿜던 은서는 도저히 이걸로는 안 되겠는지 피우던 꽁초를 화단에 놓인 재떨이에 털어버리고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아저씨…”

손에 들고 있던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의식적으로 몸 뒤에 감추었다. 

“다시 피는 거야?”

저벅저벅,

고요한 음성을 흘리며 기혁이 역시 그녀한테로 다가왔다.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근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별로 맛없네.”

은서는 몇 해 전 끊었었던 담배를 다시 피는 모습을 하필이면 비흡연자인 기혁이 앞에서 들켰다는 게 괜히 속상했다.

머쓱해서 웃어 보이는 은서를 기혁은 그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해서 더 난감해질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기혁이에게 하정이가 찾아왔었다는 얘기도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은지가 찾아왔었어요.”

당연히 미리 알고 있는 기혁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이 찾아왔는데 혹시 하정이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힘든 건 아닌지 싶어서 은서를 찾아온 것이니. 

하정이가 은서의 모습을 하고 사무실을 찾아온 건 낮이었다. 저한테 했듯이 은서한테도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싶어서 그 길로 달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건 입으로는 독한 말을 뱉으면서도 파르르 떨리던 하정의 그 여린 두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서였다. 

매섭게 쏘아붙이다가도 금세 흔들리는 그 모습에 저 역시 얇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은서에게도 바로 오지 못한 이유였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든 정리라는 게 쉬웠던 기혁인데 왜 이렇게 그 사람에게만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 꿈을 포기하고 사는 것도,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했어도,
힘든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쉽게 정리가 안 되는 지금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은서가 이리 있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난 왜 이리 온전히 너를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는지…

미안했다. 

“알아. 하정 씨가 찾아온 거.”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 말을 듣자마자 바로 놀라지 않는 기혁의 태도에 은서가  물어왔다.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저번에 나랑 같이 왔던 이 실장 있지.”

“네.”

“이 실장이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윤하정 친구야.”

“아… 그러면 자연스레 하정의 귀에 들어갔겠네요.“

은서가 혼잣말을 뱉듯이 중얼거렸다. 

“많이 놀랐겠네. 기억을 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듣고 왔으니…”

기억이 돌아왔을 거란 생각은 거의 안 하긴 했다. 부모님에
대해 물어볼 때 이미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혹시 제 앞에 있는 아저씨가 말해주었나 싶기도 했다. 

안면을 튼 사이였고, 은지랑 차라리  빨리 재회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던 아저씨라…

“너는 어때? 그리도 기다리던 동생을 재회한 기분이?”

가라앉은 눈꺼풀 아래로 짙은 시선이 은서의 사색을 차단했다. 

“너무 좋죠. 얼마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지… 아시잖아요.”

은서가 옅게 웃었다. 

“근데 정작 은지를 만났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기다려왔는데 정작 일이 벌어지고 나니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진짜…“

기나긴 속눈썹을 들춰올린 은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든 이유가 이건가보다. 

오랫동안 꿈 꿔왔던 바람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바라왔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기쁨은 잠시,

또 알 수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건,

갑자기 찾아온 이 기쁨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겠지. 

”은서야.“

낮고 잠긴 기혁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은서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간 기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저한테로 당겨서 살포시 안아주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이제 시작이니까. 네 동생 윤하정은 이제 어디로 안 갈 거니까 조금 천천히 네가 하고 싶었던 걸 생각하면서 살아. 그래도 돼. 너는.”

가슴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불안했던 은서의 가슴을 많이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의 품에서 은서는 자그맣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추천 (1) 선물 (0명)
IP: ♡.214.♡.18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73
죽으나사나
2024-04-24
1
230
죽으나사나
2024-04-23
1
220
여삿갓
2024-04-21
4
602
죽으나사나
2024-04-21
0
333
여삿갓
2024-04-20
3
1095
죽으나사나
2024-04-18
2
955
죽으나사나
2024-04-16
2
989
죽으나사나
2024-04-16
1
322
죽으나사나
2024-04-15
1
215
죽으나사나
2024-04-15
1
225
죽으나사나
2024-04-14
1
292
죽으나사나
2024-04-14
1
239
죽으나사나
2024-04-13
0
272
죽으나사나
2024-04-13
0
180
죽으나사나
2024-04-12
0
222
죽으나사나
2024-04-12
0
193
죽으나사나
2024-04-11
1
178
죽으나사나
2024-04-11
0
124
죽으나사나
2024-04-10
1
244
죽으나사나
2024-04-10
0
131
죽으나사나
2024-04-09
1
249
죽으나사나
2024-04-09
1
163
죽으나사나
2024-04-07
1
208
죽으나사나
2024-04-07
1
178
죽으나사나
2024-04-04
2
273
죽으나사나
2024-04-04
1
236
죽으나사나
2024-04-02
2
302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