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57회)

죽으나사나 | 2024.04.10 16:51:29 댓글: 0 조회: 133 추천: 0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9940
너를 탐내도 될까? (57회)  아빠는 시한부였어. 
"그리 원하던 가족을 알 게 되었는데 아무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 많이 혼란스럽지? 생각보다 애틋한 것도 없고."
마치 제 속을 꿰뚫기라도 할 듯 서울의 두 눈동자는 깊고 짙었다. 가라앉은 무거운 음성이 하정의 애써 잠재우던 마음속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필요할 거야. 기억에 없으니 천천히 알아가면 돼. 누나는 해낼 수 있어. 누구도 누나한테 기억해 내라고, 빨리 정을 붙이라고 강요하지 않아. 혹시나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 크게 혼내줄 테니까."
진짜 크게 혼내기라도 할 것처럼 제 가슴을 툭 치는 듬직한 서울에 하정은 피식 웃었다.
"나한테 그럴 사람 없어. 내 눈치를 보느라 바쁘더라고. 강은서나, 어릴 때 우리를 많이 돌봐주셨다던 이모나..."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네."
서울은 하정의 종아리를 조심히 내려놓고 그녀의 옆에 마주 앉았다.
"누나."
순간, 하정은 저를 부르며 어딘가 모르게 강렬해진 서울의 눈빛을 보고 말았다.
"내가 권기혁을 잊을 수 있게 도와줄게."
하정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득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서울에게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브레이크 없이 훅 들어오는 서울이 때문에 머리가 하얘졌다. 

서울의 고개가 차츰 하정에게 드리웠다. 
따뜻한 숨결이 저한테 살포시 얹히자 하정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찔끈 감아버렸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
며칠 후 주말.
또각또각 무거운 하이힐 소리를 내며 하정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족이랑 약속이 있는 정연은 외출을 했고 거실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던 하정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다.
안 받을까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받은 상대방은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정이니? 엄마야.]
분명히 국제 번호가 아닌 한국 번호였다.
[언제 들어왔어요?]
차갑게 식은 하정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까지 울렸다.
"하정이 네가 보고 싶기도 했고... 영진 그룹 사모님께서 연락이 왔었어. 너랑 권 대표 때문에 한 번 보자고 하더라고."
[뭐어???]
제 귀를 의심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영진 그룹 사모님이 보자고 했다고?
오늘 점심에 만나기로 했단다. 나랑 셋이서 같이 보자고 했다면서.
기가 막힌 소리를 듣고 급히 준비를 하고 약속 장소로 다 왔다.
고급 레스토랑 룸 앞까지 도착한 하정은 심호흡을 길게 했다.
저 문을 열면 진짜 12년 만에 엄마를 만나는 거다.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십 수 년 만에 나타난 엄마는 결국 다른 이유도 보태어 나타났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었다.
먼저 우아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는 권 대표의 어머니 연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엔 스무 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와는 많이 늙으신 엄마가 앉아있었다.
나를 보더니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기에.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둘이 한참이나 시선이 얽혀있자, 
"어서 와서 앉아요."
연화가 그 둘의 시선을 갈랐다.
그제야 하정은 고개를 숙여 앞에 앉은 연화에게 인사를 하며 엄마인 미연의 곁에 앉았다.
"잘 지냈었어요? 윤하정 씨."
나이에 비해 눈가에 정말 적은 주름을 접으며 연화가 곱게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이 한국에 안 계신다고 해서 좀 찾아봤는데 태국에 계시더라고요. 못 뵙겠다 싶어서 통화만 하려고 했는데 오신다고 하니 제 입장에선 고맙기도 했고요."
하정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연화는 연신 입술을 떼었다. 아마도 앞에 앉은 모녀에게서 이상한 기류가 넘쳐 그런 거 같았다.
엄마를 갑자기 만나 게 된 것도 당혹스러운데 지금은 사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은 제 앞에 앉아있는 권기혁의 어머니였다.
"사모님. 저번에 오해는 다 풀린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저랑 대표 님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러니 사모님께서 제 엄마를 만나실 이유도 없어요."
저를 똑바로 응시하며 당차게 말하는 하정을 보며 연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강은서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강은서는..."
"걱정하셔야 할 겁니다. 강은서는 제 쌍둥이 언니라서요."
연화의 말끝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하정이가 받아쳤다.
"쌍둥이 언니...?"
어떻게 이런 일이...
연화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하정의 사진을 보고 나서 들었던 그 느낌이 정확했었다. 다만 어디에서 만난 적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강은서의 얼굴은 직접 본 적이 없었고 썩 오래전에 사진을 통해 한 번 피뜩 본 적이 있었던 지라 그 얼굴은 자연히 잊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사진 속에 얼굴이랑 많이 닮았다.
윤하정은,
강은서와 쌍둥이다?
하...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라면...
둘의 사주는 비슷한 거 아닌가?
생각지 않은 전개에 연화의 발간 입술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큰 얘기가 오가지 않은  점심 식사가 되었고 머리가 복잡해진 연화였지만 제 본인이 먼저 초대한 만큼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들하고 작별 인사까지 하고 차에 올랐다.
"김 기사."
"네, 사모님."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걸까?"
"왜 그러십니까?"
뭔가를 깊이 사색하는 연화를 룸 미러로 살피며 김 기사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혹 식당 안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연수동 무당한테 가야겠어."
"지금 말입니까?"
"응. 지금."
차갑게 떨어지는 연화의 답을 끝으로 차는 유유히 출발을 했다.
...
검은색 세단이 시야에서 아예 사라지자 하정은 조용히 곁에 서있는 미연에게 몸을 홱 틀었다. 사모님이 있어서 삭혔던 화가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어? 어떻게 그동안 한 번 안 찾아오던 사람이 재벌 집 사모님이 부른다고 냉큼 달려오는 거야? 대단하게 부유하진 않아도 물욕이 없어 나름 만족하며 살던 엄마였잖아. 권 대표랑 내가 잘 되면 큰 거라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차가운 음성에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는 하정에 미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정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짜 가증스러워. 어떻게 엄마란 사람이 끝까지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절망 섞인 하정의 혼잣말이 미연의 속을 여지없이 긁었다. 

“우리 딸 이제 진짜 어른 같고 더 예뻐졌네.”

허,

저를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에 손을 올리려 하자 하정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무슨 연유에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볼 일 다 보았으면 이제 다시 돌아가세요.”

할 말을 끝낸 하정은 더 이상 미연과 볼 일이 없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렸다. 

쌓인 감정들을 꾹꾹 누르며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 하던 때였다. 

등 뒤에서 차분한 그녀의 한 마디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얼굴을 돌아봐야 했다. 

“네 아빠가 많이 아파.”

아프다니?

들여다본 미연의 두 눈동자는 여렸고 꽤 많이 흔들리고 있어서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위암이었어. 아빠는 3개월 밖에 안 남은 시한부였어.”

“시한부였다고? 언제부터?”

눈살을 찌푸리며 하정은 또 어느새 묻고 있었다. 

제아무리 밉다고 생각했던 분들이었지만 아프다는 말에 무신경하게 지나칠 순 없었다. 

“네가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하…

하정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아빠는 이미…”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살아계셔.“

북받쳐오는 감정에 침을 꿀꺽 삼킨 미연이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하정에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밖에 모르던 네 앞에서 아빠는 죽기 싫다고 했어. 그래서 남은 생은 어릴 때 잠깐 살았었던 태국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던 건 네 아빠였어. 그래서 우린 급하게 여기를 떠났던 거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하는 그녀의 말들이 이제는 거짓말 같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계시다고요?“

살아 계셔서 울분이 터지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시한부였던 아빠가 살아 계신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근데도 여태 저한테 한마디 귀띔도 안 해주었던 엄마에게 또 큰 실망을 하게 될 거 같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기적이라고 했어. 어릴 때 살면서 좋은 추억들이 많았던 태국 그 동네에서 살아서 그런지… 3개월 밖에 안 남았다던 네 아빠의 시간은 1년, 2년을 지나가더니 5년 완치 판정까지 받았었어.“

완치는 다행이라며 하정이 어느새 갑갑했던 가슴이 쓸어내려 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네 아빠랑 같이 들어오려고 거길 다 정리했었어. 근데 참 이상하더라고. 거길 정리하고 떠나려던 전날 밤 네 아빤 쓰러졌고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어.“

이건 분명히 나를 만나러 오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일 거야.

하정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하정아… 아빠가 이번엔 진짜 못 버틸 거 같아서 널 찾아온 거야. 아빠가 눈을 감기 전 너를 만나보고 싶어 하셔.”

엄마는 거짓말을 참 신박하게 하네…

하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암이라는 사람이 12년이나 살아계시는데 이제 와서 또 죽는대요? 말이 돼요?”

하정이 조소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하셨어. 미국까지 가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건 다 받아봤어. 수술도 하셨고. 근데 이번엔 진짜 안 될 거 같아. 네 생일날에 전화를 못 했던 건… 상태가 괜찮았던 아빠가 그 전날 쓰러져서 중환자실로 옮겼을 때라… 정신이 없었어. 미안해. 하정아.”

좀 그만 얘기했으면 좋겠건만,

엄마는 왜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여길 떠나야 했었는지, 

왜 내 생일날 축하한다는 전화를 안 했던 건지 자세히 설명을 구구절절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차라리 처음부터 진실을 말해 주었더라면 나의 20대는 그리 암흑 같지 않았을 텐데.

끝까지 두 분은 저를 위하는 척 행동했지만 결국 나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우린 참 안 맞는 부모와 자식이었다. 

“왜 그때 떠났는지 이제 원망하지 않을 테니 그만 돌아가세요.”

뱃속 깊이 올라오는 쓴 눈물을 삼키며 하정이 입술을 떨어뜨렸다. 

“하정아…”

“부르지 마요. 그렇게. 난 태국 안 가요.”

아빠를 만날 생각 따위 없거든요. 

자신들이 원할 때만 찾는 나한테 그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을 절대적으로 들어주기 싫었다. 

하정이 매정하게 돌아섰다. 

”아빠가 널 기다리셔. 너한테 달랑 전화로 오라는 말은 아닌 거 같아서 엄마가 오기로 결심을 한 거야. 마침 영진 그룹 사모님이 연락을 하셔서… 이건 정말 우연히 겹친 거야.“

아까 분노에 휩싸여 돈이 필요했냐고 소리를 지르던 하정에 오해를 풀어주기라도 하듯 미연은 또 설명을 늘어뜨렸다. 

하정은 이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급하게 떴다. 

제 차에 올라탔지만 시동은 좀처럼 켤 수가 없었다. 

12년이다. 

엄마 아빠가 저를 매정하게 떠난 지가. 

그동안 수없이 미워하기도,

왜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그분들을 떠나게 만들었는지 자책도 많이 했다. 

떠나간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가슴 저미는 괴로움과 지독한 외로움을 동반한 채 12년을 홀로 지내왔다. 

아까도 말했 듯이 차라리 처음부터 왜 그래야 하는지 제대로 말했더라면…

아닌가.

금방까지 슬픈 얼굴 가득했던 하정의 표정에는 한 줄기의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빠가 곧 죽게 된다는 걸 스무 살인 내가 알 게 되었다면…

그때의 난 어땠을까. 

어리고 지금처럼 단단치 못한 내 마음이 어땠을까. 

괜찮았을까?


14년 전,

[엄마!]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하정이가 정신없이 병원으로 뛰어들어왔다. 

두려움 가득한 미연의 두 눈을 본 하정은 저도 모르게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은 듯 굳어버렸다. 

[아빠 혹시…]

동그래진 두 눈에 금방이라도 홍수가 터질 듯하여 미연이가 하정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니야. 아까는 위중했는데 스텐트 시술을 받고 지금은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야.]

미연을 따라 중환자실로 들어간 하정은 산소호흡기에 의지를 한 채 잠들어 있는 그분과 마주했다. 

[왜 쓰러지신 건데?]

하정이 그에게서 시선을 못 뗀 채 미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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