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67회)

죽으나사나 | 2024.04.15 04:44:37 댓글: 0 조회: 226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61095
너를 탐내도 될까? (67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전날 밤, 

잠깐 멈추었던 비는 또다시 후두두 떨어지더니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선사하기 싫어 그렇게 아끼던 하늘이 이제는 어딘가 뚫리기라도 한 듯 많이도 쏟아붓고 있었다.

은서는 인터폰 화면에 뜬 기혁의 말끔하던 모습이 점차 비에 젖어 초라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표정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손을 들어 화면에 비춘 그 초라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은서는 안다.

기혁이가 왜 자신을 이토록 찾는지.
저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있다는 걸 아는 사람한테 없는 척을 할 뿐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피하기.

[아저씨…]

나지막이 부르는 그 이름은 저 자신 빼고는 들을 사람이 없었다.

은서가 쓴웃음을 지으며 화면을 툭 하고 꺼버리고 방으로 들어갔었다. 


“달칵.”

기혁이와 대화를 끝낸 은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으로 안 들어가고 현관 입구에 서있던 준우는 은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저 평온한 그런 표정이었다. 

“미안해. 준우야. 널 이런 식으로 이용해서.”

은서는 금방까지 잘 참았던 감정 그대로 유지하려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준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은서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괜찮은지 더 자세히 볼 참이었다. 

“참지 마. 힘들면.“

은서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엔 그녀를 향한 안타까움이 배어있었다. 

울컥했지만 그걸 또 꿀꺽 삼킨 은서가 머리를 도리질했다. 

”아니야. 울고 그러진 않을 거야. 그건 너한테 너무 미안한 일이잖아.“

은서는 또 속절없이 웃으려고 한다. 

”괜찮아. 얘기했잖아. 네가 필요하면 날 언제든 갖다 쓰라고.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너도 네가 지금 느끼는 그 감정 억지로 참지 마. 그러다 병 나.“

“나 괜찮아. 정말이야.”

은서는 우겼다. 괜찮다고. 

그리고 이제 정말 괜찮아질 거라고.

이른 아침에 서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새 저한테 전화를 할지 말지 기다린 느낌이 들 정도로 서울의 마음이 많이 조급해 보였다. 아저씨의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왜… 대표님 집 주소를…]

[하정 누나가 병원에서 사라졌어요. 어젯밤에 권기혁 대표 집으로 같이 갔다는데 그 뒤로 통화가 안 돼요.]

[아…]

서울의 말을 들은 은서는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어젯밤 제 집 앞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너무 맞고 있는 거 같아서, 은서는 끝내는 못 버티고 우산을 챙기고 나갔었다. 그러나 기혁은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오는 찌릿한 통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서울 씨. 전 알려줄 수 없어요.]

거절했다. 주소를 알려달라는 서울의 간곡한 부탁을. 

전화까지 꺼진 그 집에 서울이가 그냥 그렇게 쳐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힘들어하는 서울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만으로 그가 원하는 답을 줄 수가 없었다. 

저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강은서 씨는 권기혁 대표가 하정 누나랑 그러고 있는데 화도 안 나요? 왜 피하고 있는데요?]

전화기 너머 서울의 질책이 은서의 가슴을 찔러댔다. 

아무 말이 없자 긴 한숨을 내쉰 서울이가 포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은서는 알고 있었다. 

하정이가 아저씨네 집까지 간 이상 이미 같이 있는 둘을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저씨한테서는 이미 여러 전화와 문자가 왔었다.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래…

서울의 말대로 피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만나서 해야 할,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근데 들어서 뭐 하게? 

들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텐데.

은서의 두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이어 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친구 인척만 해달라고,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고민 없이 받아들인 준우한테 너무나 고마웠다. 

“스페인… 내가 간다고 하면 너 진짜 갈 거야?”

준우는  아까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건지 한 번 더 확인이 필요했다. 

잠시 흔들리던 은서의 눈동자가 뚝 멈췄다. 이내 고운 미소를 흘리는 은서가 꾹 닫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뭐… 네가 괜찮다면?“

은서의 말이 진심인 거 같아서 준우의 가슴엔 억지로 꺼버렸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준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말을 들었다.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 했던 건 저 자신이 은서를 향한 마음이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정이… 어때요? 병원에 갔었는데 차 사고는 아니고 놀란 거라 하긴 하던데 그래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차분한 은서의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생각보다 많이 놀랐나 봐. 어제 병원에 있기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우리 집에 데려갔어.]

[… 네. 그랬군요.]

[은서야. 나 사실…]

[아저씨.]

얘기하려는 기혁의 말을 끊어버린 은서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저한테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하정이… 제가 봐도 정이 가는 여자예요. 당차고 똑 부러져 보였고 그건 어릴 때랑 똑같아요. 제가 항상 부러워하던 면이었죠.]

옅게 웃음을 지은 은서가 말을 이어갔다. 

[드디어 아저씨가 진심으로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겨서 전 기뻐요. 이건 진심이에요.]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해. 은서야.]

가끔 그런 상상을 했었다. 은서 앞에서 제 동생인 하정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은서는 어떤 반응을 할까. 

나쁜 놈이라고 욕할까,

그건 아닐 테고. 

지금처럼 이리 별게 아닌 듯 담담한 태도를 보이겠지. 

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란 생각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제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기혁의 속은 뭐라 형용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분명히 은서는 저를 찌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서서히 통증이 올라올 수도 있는 건지.

[욕을 왜 해요. 제가.]

하…

기혁이  쓴웃음과 함께 옅은 탄식을 흘렸다. 

미안했지만 해야 하는 말. 
은서한테 비수를 꽂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 이미 그녀에게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난 이 말을 해야 했다. 

[내가 은서 너한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내 마음을 이제 너한테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어서 꼭 말을 해야겠더라고. 나 윤하정 씨를 많이 좋아해.]

은서의 억지로 올라가있던 입매가 스르르 내려왔다. 

오랫동안 저 곁에서 묵묵히 지켜줬던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괴로워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생각지 못했던 건 맞았다. 

하지만…

누굴 탓할까. 

다 제 본인 탓이라는걸.

장맛비는 끝난 게 아니었다. 또 이들 사이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서는 때마침 내리는 이 비가 참 고마웠다. 이러면 저 자신한테 흐르는 물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상대방은 알 수가 없을 테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저도 남자친구가 생겼잖아요. 아저씨가 저를 많이 아껴주었는데 미리 말을 못 꺼내서 죄송스러운 건 저예요.]

끝까지 은서는 거짓말을 했다. 

제 입안 속살을 꽉 깨물며 하는 은서의 거짓말을 기혁은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알아도 어떡할 건지. 이제 와서 소용이 없었다. 

은서는 왜 그랬냐고 여느 여자들처럼 따지는 대신, 저 스스로 물러나기를 선택했다. 

은서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저 자신이라는 게,

은서가 아픈 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이었는데 지금 은서한테 그러고 있는 사람이 저 자신이라는 게 지독히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더 이상의 큰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은서는 남자친구를 너무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비까지 거세지고 있는 바깥에서 그녀를 더 잡아세우지는 못했다. 

이렇게 우린 마지막 대화조차 서로 어긋나 있었다. 같은 얘기였지만 방향이 틀어져 버린 우리의 이야기. 

19살의 맑디 맑았던 은서는 없어진지 오래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설레게 하였던 은서와는 이제 정말로 끝이 났다. 

은서가 들어간 꾹 닫힌 문에 한참을 시선을 꽂았다. 

은서와 나는 끊어진 동아줄이었을까. 

언제부턴가 우린 같은 평행선에서 줄 끝자락을 잡고만 있었다는걸. 줄을 당겨서라도 서로 더 다가가야 한다는 걸 몰랐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줄의 끝에 마주 선 우리는 그랬다. 

그 줄을 놔버린 게 또한 저라는걸….

은서와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게 허탈하고 또 허무했다. 

나의 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기혁이 쓸쓸함 가득한 커다란 등을 돌려버렸다. 

***

준우는 은서에 의해 집으로 돌아갔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컸다. 은서는 2층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살짝 젖히며 바깥에 시선을 두었다. 고요한 시선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커튼을 닫으려던 은서의 손이 멈추었다. 조심스레 다시 커튼을 들추었다. 

골목길에 아직도 세워져있는 기혁이 차를 보았다. 

하…

잘 참고 버티고 있던 은서의 감정이 무너진 건지 어깨가 들썩이었다. 

참아야 하는데 속절없이 눈물이 흘러 내리고 말았다. 

아저씨…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아저씨는 저한테 과분한 사랑을 이미 많이 주셨어요. 미련은 아저씨가 아니라 제가 욕심을 못 버리고 아저씨 곁에 남은 거예요. 전 오래전에 떠나야 했어요. 아직도 기억해요. 터미널에서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군인의 모습을 한 아저씨가 얼마나 멋있고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는지. 어른인 아저씨를 보며 또 다른 꿈이 생기더라고요. 나도 나중엔 저렇게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어른이랑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세상 그 누구도 안 부럽게 예쁜 아이도 낳고 오손도손 잘 살겠지.

비록 세상이 저한테 그런 소소한 일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전 아저씨를 만나 꽤 행복한 20대를 보냈어요. 못 미더우시겠지만 진짜예요. 꼴이 장난이 아닌 모습을 아저씨한테 들킨 그날을 빼면은요. 완벽한 20대였어요. 진짜예요.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은지를 다시 만날 수도 없었을 거예요.
너무 고마운 존재죠. 아저씨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린 건 저였고 이런 결과까지 오게 된 건 다 저 때문이었더라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스무 살이 된 은지와 다시 만나 둘이서 성공적으로 도망을 쳤더라면, 그리고 다시 어딘가에서 아저씨를 우연히 만났더라면.

아저씨는 저한테 그렇게 마음을 줬을까 하고..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일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미련하긴 했어요. 

아저씨는 쭉 내 곁에 있을 줄 알았거든요. 너무나 큰 착각이었던 거죠.
아저씨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기회를 놓친 건 저예요. 아저씨가 그렇게 나한테 많은 사랑을 퍼부어줬는데 저의 그 알량한 자격지심 때문에 아저씨의 진심을 몰라봤던 거예요. 그 어떤 것이던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몰랐어요. 난 … 그 타이밍을 한참이나 놓친 거고요.

그러니…

아저씨는 이제 저만 생각하면 무거워지던 그 마음을 툭 털어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정말. 

은서는 제 손에 들려있는 오래되어 낡았고 쭈글해진 쪽지에 시선을 옮겼다. 

<권기혁 010- 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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