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주술(제4회)

l판도라l | 2023.03.13 02:12:55 댓글: 1 조회: 750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9932
7.
“우와, 신난다…”

아이는 공원 놀이터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대형 놀이기구를 넋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아들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탈수 있겠니?”
“탈래요.”

아들애의 대답에 나는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안무서워? 어떻게 저걸 탈 생각을 했어?”
“엄마가, 남자는 용감해야 된댔어요”
“오?”
“그리고 무서워하지 말고 혼자서도 해보라고 했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나 혼자 타보려구요. 난 용감한 어린이니까.”

아들애는 주먹까지 쥐어보이며 말했다. 잠시후 놀이기구가 멎자 그는 정말로 용감하게 걸어들어가서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오히려 기구가 작동하자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후 아우성 소리가 멎고 아이가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렇게 두려우면서 무서웠으면서 왜 타?”
“엄마가…두렵다고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했어요.”

아이는 쿨쩍거리면서도 대답을 했다. 순간 실낱 같은 것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잠깐, 아주 잠깐 멍해졌다.

공원의 풀냄새는 싱그럽고 꽃들은 저마다 자기 자태를 뽐냈다. 한적한 공원 호수가에서 우리는 가져온 베낭을 풀었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머리를 흩날렸다.

“여기.”

가지고 온 짐속에서 머리끈을 꺼내어 그녀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직 여자의 몸에 익숙치 않은지 그녀는 집에서도 머리를 잘 묶지 않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올리고 머리끈으로 고정시키자 아들애가 손벽을 치더니 스케치북을 꺼냈다.

“잠시만요…가만 있어요.”
“뭐? 이러고 있으라고?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눈을 흡뜨자 그녀도 동을 달았다.

“오분도 무리야. 그냥 사진 찍어서 나중에 그려.”
“그래요.”

아이는 못내 아쉽다는 듯 스케치북을 거두었다.

“미술 선생님이 숙제를 내줬어요.”
“그래? 이번에도 아빠를 그리래니?”
“아니요.”
“그럼?”
“가족을 그리라고 했어요.”
“학원이 무슨 숙제가 그리 많아.”

그녀가 머리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안되겠다. 다음날 준이 학원 선생님들 한번씩 다 만나봐야겠어. 별로라고 판단되면 다른 학원 더 돌아보고.”
“그래. 알아서 해.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그녀가 도시락통을 내놓았다. 그녀의 김밥 솜씨는 여전했다. 뭐 까놓고 말하면 원래 내 손의 솜씨지만 말이다. 김밥 한입을 베어물던 나는 문득 그녀쪽을 보았다. 그녀가 왜? 하는 기색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맛이 없어?”
“…여기에 우엉을 넣었어?”
“응.”
“당신 우엉 안먹잖아.”
“당신이 좋아하니까.”

서둘러 김밥을 마저 삼켰다. 그리고는 물도 함께 마셨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가슴 한구석이 살짝 먹먹 하기도 했고 간질거리기도 한 것이 나로서는 간만에 느껴보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전에는 우엉을 먹지 않는 남편을 배려해서 일부러 우엉을 빼고 김밥을 만들었지만 하도 그 짭쪼름한 맛을 좋아한 나머지 김밥에 따로 우엉을 얹어서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아마 그것을 기억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항상 나빼고 다른 사람을 챙겨주던 것이 습관이 된 내가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는 것이 왜 이리 적응이 안되는 건지…이러니까 내 스스로가 더 불쌍해보이지 않는가! 윤지연, 너도 참 못났다.

공원마실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아들애는 신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오후내내 방에 박혀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고 나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날 저녁도 거르고 말았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여기저기 널린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고 방청소를 시작했다. 거실을 정리하다가 아들애가 어제 그리다만 그림이 눈에 띄였다. 꽃이 만발한 공원 호수가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한쌍의 남여 그림이었다. 그림속 남자는 눈매만 아빠를 닮았고 여자는 엄마보다 얼굴이 길었지만 그림 색감은 의외로 조화로웠다.

하품을 하면서 거실로 걸어나오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웬 일이야? 갑자기 왜 청소를.”
“원래 내가 하던 일인데 무슨.”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이라도 당한 듯 잔뜩 경계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내가 피씩 웃었다. 그리고는 청소기를 세워두고 소파에 앉아 그녀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우리 말이야. 한번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게 어때? 자꾸 쌈닭들처럼 싸우지만 말고.”
“내가 싸웠나. 당신이 걸고들었지.”

그녀는 궁시렁 거리다가 내가 흘겨보자 입을 다물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그동안 자주 싸웠던 이유는, 당신은 남자지만 섬세하고 치밀한 적이 많았고 나는 여자치고 독립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어. 그런 것 때문에 자주 삐걱거렸던 거 같아.”

소파에 마주 앉아서 우리는 처음으로 찬찬히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꼭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이야기 하는 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내 말은 독백처럼 울렸다.

“결국 서로가 역할분담을 제대로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만만 쌓여갔던 거야.”
“…”
“물론 서로 소통을 할수도 있었지만, 내가 하는 감기가 상대방 암보다 아프다고, 사람은 이기적이기때문에 영원히 상대방 입장을 완벽하게 이해할수는 없어.”
“그래서…당신이 말하자는 건 대체 뭔데.”
“우리가 서로의 배역에 좀 더 확실하게 몰입해보는 거야.”
“몰입?”
“그래. 오늘부터 나는 완벽하게 서태훈이 되어볼께. 당신은 한번 윤지연이 되어봐.”
“…”
“그동안 당신 마음속에 나에 대한 불만들이 있었다면, 당신이 한번 나를 바꿔봐. 나도 당신을 바꿔볼테니까. 서로의 마음속에 완벽한 상대방을 한번 연기해서 만들어 보자구.”
“그래서 어제 공원도 가고 오늘 청소도 한 거야?”
“그래. 내가 원하는 남편의 역할이 바로 이거였어. 주말이면 같이 나들이도 가주고, 휴일엔 빨래나 청소도 해주고.”
“좋아. 그러면 나도 한번 시도해볼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내 얼굴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나는 흠칫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뭐야.”
“얼굴에 거뭇한 게 묻었어. 닦아주려고 하는 건데.”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원하는 와이프는 이래. 부드럽고 연약하고 여성스럽고 남편이 해주는 사소한 일에 만족하고 고마워할줄 알고.”
“…”
“가끔은 남편에게 기대고 남편 믿어줬으면 더 좋겠고.”
“…”
“냉랭한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을 보였으면 좋겠고.”
“…”
“부부사이 자연스러운 스킨쉽도 있었으면 좋겠고.”
“…”
“어려운 건가.”
“다른건 몰라도 마지막은 좀…”

나는 그녀를 힐끔 쳐다본 후 혀아래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라면 당신 자신을 만지고 싶겠어?”
“아, 그건 좀…”

그녀도 바로 수긍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동시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은 후 내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처럼 이런 특이한 경험을 하는 부부도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
“없었으면 좋겠는데.”
“왜?”
“우리가 몸을 되찾으면 나는 책을 쓸테니까. 제목도 생각해놨어. 체인지 주술.”
“제목이 너무 평범한데?”
“평범하기가 어디 쉬운줄 알어? 세상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하는데. 지금 나도 제발 평범해지고 싶다.”

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아들애가 거실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바로 입을 다물었고 아들애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계란후라이 먹고싶어요.”
“그래, 알았어.”

그녀가 일어나려고 하자 내가 그녀의 어깨를 눌러앉혔다. 그리고는 최대한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아들?”
“네?”
“오늘 계란후라이는 아빠가 해주는 게 어때?”
“아빠가 한건 맛없잖아요!”
“뭐???너 이놈!!!”

내가 벌떡 일어서자 아들애는 키득거리며 방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나는 늦을새라 아들애의 뒤를 쫓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그녀의 얼굴에도 둥근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들애가 잠근 방문을 확확 잡아당기던 나는 때맞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하는수없이 소파로 되돌아왔다. 액정을 들여다보던 나는 덴겁을 하고 그녀를 불렀다.

“빨리…빨리 전화 좀 받아줘.”
“누군데 그래?”
“울 엄마.”

그녀도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
“…”
“네. 네. 네.”

연신 네만을 반복하다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두손을 맞잡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래? 응? 뭐라셔?”
“친구모임 왔다가 여기 들리신대.”
“뭐? 친구모임? 엄마가?”
“응. 여기 친구분들 많은가봐.”

그녀가 나직히 말했고 나는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금방 시어머니를 보냈더니 이제는 가시어머니가 온단다. 대체 이분들은 왜 이리 자주 들려주시는지…제발 우리를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으련만.

아침에 상쾌했던 기분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소식이었다.


8.
장모는, 아니 우리 엄마는 조금 특이한 분이셨다.

시어머니가 살림과 내조를 잘하는 전형적인 현처양모형 여인이라면 우리 엄마는 자신을 꾸미고 생활을 즐기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도회지적 타입이었다. 두분은 차림새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가치관과 인생관이 전혀 달랐는데 나와 남편은 어릴때부터 어느정도 두 엄마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도 사흘을 넘기지 않았으며 우리 집안 살림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집안 가구 구조와 주방 식기들 위치까지 바꾸는 시어머니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엄마가 편하기는 했으나 꼭 사람의 손이 필요할 때는 간혹 서운하기도 했다.

아마 준이를 임신했을 때라고 기억된다. 입덧을 하면서 그렇게 엄마가 해주는 소꼬리찜이 먹고싶었다. 그러다 어느날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기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한밤중에 얘기를 꺼냈다. 엄마는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어떡하지? 내일아침부터 우리 고향 노인조 공연이 있어. 그리고 공연후에는 유람을 가고 그길로 직접 집으로 가는데. 이밤중에 어디 가서 소꼬리를 구해오냐.”
“알았어요. 사먹을테니 신경쓰지 마세요.”

말은 그리했지만 조미료 투성이인 밖의 음식을 사먹는 다는 것은 당시 심한 입덧을 하는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이틀후 내 생일이라고 남편이 어디에선가 소꼬리찜을 구해왔지만 그 소꼬리찜은 거의 두점도 짚지 않고 냉장고안을 들락거리다가 끝내는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말았다.

암튼 이런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나와 남편-그녀가 이토록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는 단순한 시어머니와 달리 젊었을때부터 여러 사업을 벌리기도 했었고 지금도 영업쪽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있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강했다. 아직 서로의 역할에 서툴기만 한 우리가 과연 엄마앞에서 실수없이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열연할수 있을지 그게 의문이었다. 나는 회사에 나간다 쳐도 그녀는 그냥 집에 있어야 하는데 과연 모녀?간에 아무런 삐걱거림이 없이 무사하게 지낼수 있을런지…

울며 겨자먹기로 이튿날 퇴근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픽업을 나갔다. 하필이면 저녁비행기라 아들애의 숙제를 봐주기로 한 그녀가 몸을 뺄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엘레베이터 문앞에서 마침 퇴근하려는 차대리를 만났고 그는 언제나처럼 능글거리면서 내게 한손을 들어보였다.

“여어…서씨, 벌써 퇴근인가. 그렇게도 마누라가 보고싶나.”

마침 엘레베이터가 도착했기에 나는 아무 말없이 그안으로 들어갔다. 차대리는 따라 들어오며 궁시렁거렸다.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인사는 받아야지. 곧 승진 앞둔다고 너무 안하무인이 아닌가. 서씨…”
“서과장.”

내가 정정하자 차대리는 눈이 휘둥그래서 나를 보았다.

“서씨?”
“서과장이라 불러줘. 입사 동기니까 존대까지는 요구 안할께.”
“뭐라고?”
“회사 위계질서는 기본으로 지켜야지. 안그래? 차대리.”

마침 1층에 도착했기에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엘레베이터를 나왔다. 그가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저게 미쳤나…몇일전 병원 가더니 정말 뭐가 어떻게…”
“아참.”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단체톡방에서 출장건으로 여러가지 말을 해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부장님과 좀 더 돈둑한 사이가 되었기에 승진리스트에도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승진되면 내가 한턱 내지.”

차대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 지는 것을 뒤로 하고 나는 유유히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미풍이 옷자락을 날리는 따뜻한 봄날씨였다. 공항에 도착하니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와인색 스카프를 날리며 엄마가 출구쪽에 표연하게 서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앞에 다가갔다.

“엄…어머님…”
“마중 나오지 말라니까 말을 안들어 참.”

엄마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당신의 사위를 마음들어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렇다고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할 필요까지는…

“피곤하시죠? 저녁비행기는 좀 힘들던데.”
“아니, 전혀. 내일점심 모임이 있어서 미리 왔어.”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었는데 이리로 몰고 올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몸을 돌리는데 엄마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서서방.”
“네.”
“급히 들어갈 것 없이 저녁식사나 하고 들어가지.”
“네? 준이엄마가 다 준비해뒀을텐데요.”
“준비하지 말라고 문자 보냈어. 먹고 들어가는 줄 알고있을 거야.”

우리가 서로 핸드폰은 바꾸지 않았는데 그렇다면…나는 내 핸드폰을 꺼냈고 그제야 문자가 한통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운전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자였다.

“사위랑 데이트 좀 할께.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어.”

나는 엄마가 주의하지 않은 틈을 타 가만히 “네.” 하고 짤막한 회답문자를 보냈다. 그리고는 해당 대화내용을 캡쳐해서 급히 그녀에게로 보냈다.

“엄마랑 저녁 먹고 들어갈테니 저녁 준비하지 마.”

……

공항의 밤은 인파로 붐비는 낮과는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엄마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쥔 나는 고개를 들고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어머님.”
“따뜻한 국수나 먹지 뭐.”

엄마가 다가와서 내 팔을 꼈다. 우리는 모자간처럼 다정하게 공항안 면집으로 이동했다. 자리에 찾아 앉은 나는 시선을 들어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트렌치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지만 스카프는 그대로 두르고 있었다.

“건강은 괜찮으시죠? 어머님.”

일상적인 문안을 했을 뿐인데 엄마가 흠칫 하더니 은밀히 목소리를 깔았다.

“자네, 그번 일 지연이한테 얘기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일단 부정했다. 왠지 그것이 정답인 것 같아서였다. 엄마는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고것이 어찌나 눈치가 빠르다고. 그 일은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해. 알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입 무겁습니다. 어머님.”

눈치껏 엄마가 바라는 대답을 해줬다. 엄마가 안도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서방 믿어. 지연이 불쌍한 애야. 내가 젊었을때 장사에 바빠서 거의 버려두다 싶이 했었거든. 큰집에도 맡기고 삼촌집에도 맡기고 지어는 동네 애 이뻐하는 집에도 맡기고 먼곳에 도매하러 가군 했어. 한번씩 가면 보름, 한달이었으니 그 어린 애가 얼마나 외로웠겠나.”

엄마가 손등으로 눈굽을 찍어냈다. 나도 왠지 울컥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애가 주눅들지 않고 강하게 자라주어서 그게 큰 위로가 되었는데…가끔 필요 이상으로 독립적이고 눈치가 빠른 걸 보면 어릴때 얼마나 눈치밥을 먹어 저리 됐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져…”
“어머님…”
“이번에도 오래 있지는 않을 생각이네. 내가 여름만 피해 오니까 그 애는 많이 서운할거야. 여름이 생일인데…그래도 서서방이 옆에서 잘 챙겨주니 시름이 놓여.”

잘 챙겨주기는 개뿔…매번 근사한 생일선물 하나 없이 밥이나 한끼 먹고 끝나는 내 생일…밥은 언제라도 먹을수 있는 건데.

“다행이 림파암은 도지지 않은 것 같아. 수술한지 4년 됐나? 5년짼가? 고향에서도 보였는데 의사가 잘 관리한 덕에 건강 괜찮다고 했네. 시한부는 면한 모양이야. 여기 병원은 모레로 예약 잡았어.”

림파…뭐? 나는 창문쪽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았다. 날이 더워지고 있음에도 스카프를 꽁꽁 두른 모습이 어딘가 언발란스한 느낌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생각해보니 엄마의 방문은 항상 여름을 피했었고 매번 사흘을 넘기지 않았다. 와서도 스카프를 두르고 외출을 자주 하였기에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 도시에 무슨 친구가 그리 많냐고, 딸 보러 와서 무슨 약속 그리 많이 잡냐고 투덜거린적도 여러번이었다.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지만 나는 저가락을 들수가 없었다. 소꼬리찜이 먹고싶어 엄마에게 주문을 했던 그번 여름이 기억에 떠올랐다. 엄마가 스카프를 두르기 시작한 것도 정확히 그번 여름의 방문후라고 기억된다.

“왜 안먹나? 맛이 없어?”

엄마가 맞은편에서 물어왔고 나는 서둘러 저가락을 들었다.

“모레는 저와 함께 갑시다. 그 병원.”
“아니야. 출근할텐데 왜.”
“월차 쓰겠습니다. 그정도는 됩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제가 편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어머님.”

하도 단호한 내 말에 엄마는 피끗 고개를 들고 나를 보더니 다시 말없이 저가락을 놀렸다.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열한시가 거의 되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그녀가 뚱한 기색으로 마중나왔다.

“왜 이제야 왔어?”

뒤이어 내뒤의 엄마를 발견한 그녀가 주밋거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저녁내내 기다렸는데 말이에요. 엄…마.”
“문자 보냈는데?”

엄마의 말에 나는 소파위의 그녀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확인해봐. 문자 보냈어.”
“무슨 소리야. 들어온 문자가 없었어.”
“그럴리가.”

나는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다가 입을 딱 벌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게 그만 엄마한테 문자를 잘못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둘을 따라 당신 핸드폰을 확인하던 엄마가 피씩 웃음을 터뜨린 것은 잠시후의 일이었다.

“보나마나 둘이 핸드폰을 바꿔 쓰는구나.”
“아…”
“금슬이 좋고 신뢰가 쌓인 부부들은 간혹 그러기도 한다더구나. 서로 비밀이 없이 모든 걸 공유한다는 의미로.”

나와 그녀는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엄마는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여기 문자에서처럼 엄마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도 돼. 어머님보다 몇배는 듣기 좋은 걸.”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따라웃었다. 나는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만히 식은땀을 훔쳤다.

……

다음회에 계속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1) 선물 (1명)
IP: ♡.109.♡.118
로즈박 (♡.175.♡.27) - 2023/03/14 13:07:50

하하..인제는 서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가는건가요?..이쯤되면 조만간에 몸이 또 바뀌울거 같은데요..
다음집이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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