尼采和莊子如是说3-11~13

나단비 | 2024.06.09 13:23:09 댓글: 0 조회: 122 추천: 0
분류교양서적 https://life.moyiza.kr/fiction/4575376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11
재능은 이미 나에게 갖춰져 있는 것이다
Nietzsche
세상에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라. 사람은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법이다.
『반시대적 고찰』
莊子
비록 형벌로 한쪽 발이 잘렸지만 인품으로 유명한 '왕태'라는 자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가 그에 대해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고, 그는 아무것도 가르치는 게 없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마음이 가득 채워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에게 모여드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정지된 물을 거울 삼아 자기를 들여다본다. 멈추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오직 잔잔한 물만이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덕충부」
세상에 어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단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니체에게 교육이란 인간을 자립적.독자적 존재가 되도록 이끄는 훈련이다. 이 훈련을 통해 교육의 수혜자는 그동안 얽매였던 여러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동안 무턱대고 따르기만 했던 대상들을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운다. 이 과정에 따라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삶의 주인이 되어간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간다. 최종적으로 교육은 "자기 자신의 선생이자 자기 자신의 조각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치 엄마가 아기의 기분이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듯, 나 자신 속의 또 다른 '나'를 자기 아기처럼 돌보는 것이다.
장자에게도 교육은 '나 자신'이 되는 훈련이다. 장자의 아포리즘에서 왕태는 도가 사상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자의 상이다. 왕태는 서 있을 때도 가르치는 것이 없고 앉아 있을 때도 의논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그를 찾아간 사람은 마음이 가득 채워져서 돌아왔다.
왕태는 일체의 차별상을 초월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왕태가 비록 이런 경지를 터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왕태의 내면에서 벌어진 일일 뿐, 왜 많은 사람이 그를 흠모하여 찾아오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공자에 의하면, 오직 마음을 비운 자만이 마음을 비우기를 원하는 자에게 마음을 비우게끔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정지된 물처럼 고요한 사람을 자기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
만약 장자를 교육사상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장자의 교육방법은 스승이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잠재된 재능을 본인의 역량에 의해 끌어내는 데 있다. 장자가 볼 때, 재능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무의식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나의 어떤 능력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만물을 주재하는 자연의 도를 꺠닫는 것이다.
12
'옳고 그름'을 넘어 '좋고 나쁨'으로
Nietzsche
『선악을 넘어서』라는 이 위험한 표제어를 내가 사용하려는 것, 즉 내가 원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충분히 밝혀졌다고 가정한다면, 내게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건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라는 뜻이 아니다.
『도덕의 계보』
莊子
나는 선함이라는 것이 진실로 선한 것인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 만약 그것이 선함이라고 한다면 내 몸을 살릴 수가 없고, 선함이 아니라고 하면 내 몸을 살린다.
오자서 伍子胥는 왕에게 간언했다가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자 다퉜고 끝내 자신의 육신을 망쳤다. 하지만 만약 왕과 다투지 않았다면 그는 명성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로 선함이란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지락」
서양의 현대철학은 니체에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면면하게 계승되어 온 '로고스' 중심주의적 전통, '이데아' 중심적 사유가 니체로 인해 해체되고 전복됐다. 서양의 철학사는 니체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는 서양의 철학 전통에 나타나는 선과 악의 가치평가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려 했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도덕 감정은 인간의 동물적.생리적 충동의 영역 속에 포함될 수 있다. 니체는 이 생각을 바탕으로 기존의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평가 구도를 '좋고 나쁨'으로 전환하려 했다.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니체는 스피노자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은 뒤, 친구 오버베크 Franz Overbeck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매우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었네! 나는 스피노자를 거의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그의 전체적인 경향이 나와 비슷할 뿐 아니라,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네. 산마루에 혼자 오른 느낌이 이제는 적어도 둘이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네."
스피노자에게 선함이란 '좋음'을, 악함이란 '나쁨'을 의미했다. '선과 악'에는 주체가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어떤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절대 규범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의하면, 선함이란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다. 또 악함이란 "우리가 선한 어떤 것을 소유하는 데 방해되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이란 능력의 증대, 감소와 관련이 있다.
또한 스피노자와 니체에 따르면 선과 악은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거나 향상하도록 한다면 선함이고, 존재를 위축시킨다면 악함이다. 니체는 도덕을 '힘'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했다. 힘이 충만하여 향상되는 것을 느끼면 그것이 곧 선함이고 좋음이다. 또 힘이 빠져나가 퇴보하는 것을 느끼면 그것이 곧 악함이고 나쁨이다. 악함과 나쁨이란 일종의 소화불량 같은 것으로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만나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거나 내가 훨씬 강한 소화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악함과 나쁨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으나, 현재로서는 해로운 존재가 된 것이 바로 악함과 나쁨이다. 다음은 스피노자의 말이지만, 니체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선함'이란 내가 꼭 지켜야만 하는 규범이 아니라, 나에게 맞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제3부, 『에티카』
그러면 장자의 도덕에 관한 관점은 어땠을까? 장자는 선과 악의 상대성을 강하게 피력했다. 장자의 아포리즘에 의하면, 만약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선함만을 좇아 포악한 군주에 온몸으로 항거하면 내 몸이 다칠 수도 있다. 장자는 기존의 선함이라는 가치에 의문부호를 던졌다. 장자가 볼 때, 도덕적 규범이란 생의 의지를 북돋아 주는 방향으로 기능해야만 한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부차 夫差를 도와 월나라 왕 구천 句踐과 벌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구천이 많은 재물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하자 부차는 그것을 수용한다. 오자서는 이참에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부차는 듣지 않는다. 왕은 오자서를 점점 멀리한다. 오자서는 화가 닥칠 것을 염려해 자기 아들을 제 齊나라에 맡기는데 부차는 이 사실을 알고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오나라 사람들은 오자서의 충절을 기려 사당을 지어준다. 우리는 오자서의 충절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만약 오자서가 자신의 간언을 부차가 듣지 않은 것을 더는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유유자적해 있었다면 부차로부터 해악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충절 있는 인물로 세상에 이름이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중시하는 도덕적인 옳음을 지키고자 하면 오자서와 같이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면 세상으로부터 부도덕한 자로 낙인찍힌다. 이렇듯 도덕적인 옳음이 나의 양생 養生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선택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장자가 볼 때 '옳고 그름'이란,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선양'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적으로 칭송받는다. 또한, 그들은 나라를 평화롭게 잘 유지했다. '선양'이란 왕이 자기 자식 대신, 나라 안에서 덕이 있는 훌륭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연나라 왕 쾌는 재상에게 선양을 하였지만, 나라는 3년만에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 제나라의 침략으로 결국 망해 버리고 만다. 똑같이 선양해도,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선양이 아닌 무력에 의해 나라를 찬탈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전쟁으로 왕이 되어 나라를 잘 유지하였으나, 초나라의 백공은 전쟁으로 멸망한다.
장자에 의하면 옳음과 좋음이란 변치 않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주사위 놀음 같은 복불복에 가깝다. 그러니 때로는 도덕적 가치판단 같은 인위적인 억압을 넘어서자, 무심하게 천지 대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삶의 태도도 도덕적 판단 아래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삶의 태도다.
13
지식과 도덕은 생생한 삶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Nietzsche
지금까지 교육되고 존중 받고 설교되어 온 거의 모든 도덕은 삶의 본능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우상의 황혼』
莊子
백이 伯夷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 밑에서 죽었고, 도척 盜跖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동릉산 위에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장소는 달랐지만, 생명을 해치고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훼손한 점에서는 똑같다. 어찌 반드시 백이가 옳고 도척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변무」
장자는 전국시대 중기 사람이다. 전국시대에는 생산력이 향상됨에 따라 사유재산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문제들이 전방위적으로 한꺼번에 표출됐다. 또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했다. 이 혼란하고 복잡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장자는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멈추고 자신의 성품에 따라 유유자적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다툼을 무의미한 행위로 봤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해 봐야 다른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것이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갈 뿐이다.
니체와 장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적으로 우리를 옥죄는 지식이나 이념, 도덕은 생생한 삶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그래도 이런 식의 비판이 다소 무책임하게 보이기는 한다. 아는 것이 없으면 원하는 것도 없으므로 아무런 발전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와 장자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지식, 이념, 도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예컨데 연고주의의 핵심인 가족주의(가족이라는 단순한 개념을 지식화한 것)를 비판하면 어떤 사람들은 가족관계를 없애자는 뜻으로 듣는다. 하지만 가족주의를 아무리 비판한들 가족관계가 사라질 염려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혈연관계라는 인간의 원초적 정감이 이데올로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것일 따름이다.
니체와 장자가 지식, 이념, 도덕을 비판할 때, 이것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비판했을까? 그렇지 않다. 니체와 장자는 어떤 소수의 유력한 세력들의 이익만을 뒷받침하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이득으로 포장하는 지식, 이념, 도덕 체계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이렇게 비판을 한 것이다.
장자의 아포리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그가 도덕적인 의리와 도둑질을 같은 범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이는 흔히 역사에서 인의를 지킨 대명사로 칭송된다. 반면 도척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9천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거느렸던 전설적인 큰 도둑이다. 도척과 백이는 각각 악함과 선함의 상징이지만 장자에 의하면 두 인물은 모두 자연 본래의 성정을 훼손했다는 점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다. 불인 不仁이나 불의 不義뿐만 아니라, 인 仁이나 의 義도 지나치게 추구하게 되면 자연적 본성을 해치기 떄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인습화된 도덕적 가치 규범에서 벗어나 자연을 따라야만 한다. 사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선악의 가치판단을 넘어서 있다. 자연의 역동적인 진행 과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인간의 속성에는 항상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나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이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다. 현실에서 선과 악 그리고 좋음과 나쁨은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새롭게 갱신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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